| | |||
|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D1D1D; 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전쟁·분쟁 | 교전국 | |
| 제1차 북방 전쟁 ,1656 ~ 1660, | <colbgcolor=#f5f5f5,#191919> | ||
| 스코네 전쟁 ,1675 ~ 1679, | | ||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 ~ 1714, | | ||
| 대북방전쟁 ,1715 ~ 1721, | | ||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 ~ 1748, | | ||
| 7년전쟁 ,1754 ~ 1763, | | ||
| 바이에른 계승 전쟁 ,1778 ~ 1779, | | ||
| 프랑스 혁명 전쟁 ,1792 ~ 1795, | | ||
| 나폴레옹 전쟁 ,1803 ~ 1815, | | ||
|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1848 ~ 1852, | | ||
|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1864, | | ||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66, | | ||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 ~ 1871, | | }}}}}}}}} | |
| ← 신성 로마 제국의 대외전쟁 → (구)독일의 대외전쟁 | |||
| | |||
|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D1D1D; margin: -6px -1px -11px" | 전쟁·분쟁 | 교전국 | |
| <colbgcolor=#EB001A><colcolor=#fff> 제1차 폴란드-러시아 전쟁 1605 ~ 1618 | <colbgcolor=#fff,#191919> | ||
| 30년 전쟁 1618 ~ 1648 | | ||
| 제2차 폴란드-러시아 전쟁 1654 ~ 1667 | | ||
| 프로스트키 전투 1656 | | ||
| 제2차 빈 공방전 1683 | | ||
| 대튀르크 전쟁 1683 ~ 1699 | | ||
| 대북방전쟁 1700 ~ 1721 | | ||
|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 ~ 1735 | | ||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 ~ 1748 | | ||
| 7년 전쟁 1754 ~ 1763 | | ||
|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768 ~ 1774 | | }}}}}}}}} | |
| <rowcolor=#EB001A> → 폴란드의 대외전쟁 → 리투아니아의 대외전쟁 | |||
| 프로스트키 전투 | ||
| 날짜 | ||
| 1656년 10월 8일 | ||
| 장소 | ||
| 프로이센 공국 프로스트키[1] | ||
| 폴란드-리투아니아 | 스웨덴, 브란덴부르크 | |
| 교전국 | 폴란드-리투아니아 크림 칸국 | 스웨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
| 지휘관 | 코르빈 고시에프스키 수반 가지 아기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
| 병력 | 8000명~10000명[2] | 4000명[3] 포병 9 편대 |
| 피해 규모 | 200~250명이 죽거나 부상당함 | 스웨덴군 약 1500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힘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손실 병력 불명 대포가 대부분 노획당함 |
| 결과 | ||
| 발카 전투와 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이 승리함에 따라 스웨덴은 폴란드와 평화 협정을 맺음. | ||
1. 개요
폴란드어 : Bitwa pod Prostkami스웨덴어 : Slaget vid Lyck
북방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로, 1656년 10월 8일, 폴란드-리투아니아, 크림 칸국과 스웨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2. 배경
폴란드 전역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이 거세짐에 따라,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는 바르샤바에서 퇴각했고, 코르빈 고시에프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대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인 프로이센 공국을 공격했다. 프로이센 공국의 지휘관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이를 요격하고자 프로스트키로 출전했고, 엘크강과 다리 근처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요격하기로 계획했다.3. 시작
그러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계획과는 달리 전투가 벌어진 10월 8일 아침, 스웨덴군 약 1000명과 대포 12기 만이 강을 막 건넜으며, 2000명 이상과 나머지 대포는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리투아니아 기병대와 타타르 기병대가 먼저 프로스트키에 도착했고, 곧 전투가 벌어졌다.4. 전개
스웨덴군은 강을 반도 건너지도 못한 채, 강 주변의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있었고, 퇴각하기에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폴란드측은 동맹군인 타타르 기병대를 엘크강 쪽으로 보내 스웨덴의 지원군이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무방비로 평야지대에 노출된 보병대 위주의 스웨덴군[4]에게 기병대 위주의 병력을 돌진 시켰고, 강 건너에 위치한 스웨덴측 군대는 대부분이 죽거나 사로잡혀 궤멸하였다. 또한, 폴란드군은 스웨덴군의 진지에도 병력을 보내 5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5. 미디어 매체
- 폴란드의 영화 크미치스의 클라이막스 부분이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