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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계승 전쟁 War of the Bavarian Succession Bayerischer Erbfolgekrieg | ||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시기 | 1778년 7월 3일 ~ 1779년 5월 13일 | |
바이에른 계승 전쟁의 진행도 출처 | ||
장소 | 바이에른 | |
보헤미아 | ||
원인 |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병합 시도 | |
교전국 | <rowcolor=black> 프로이센-작센 연합 (공세) 승 | 합스부르크 제국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프리드리히 대왕 아우구스트 3세 | 지휘관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2세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프로이센-작센 연합 승리 - 바이에른 합병 계획 포기 -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양강 구도 확립 | |
영향 | 테셴조약 체결 - 오스트리아는 인 지구를 합병하며, 프랑스 왕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작센 선제후국,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승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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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78년부터 1779년까지 바이에른의 남부 지역 오스트리아 합병을 둘러싸고, 프로이센-작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2. 진행 (1778~1779)
2.1. 배경
1777년 카를 7세의 독자이자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비텔스바흐 가문 내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1]가 바이에른을 상속받게 되었다. 한 가지 문제라면 바로 이 카를 테오도어라는 인물은 사생아만 있고, 혼인 관계에서 낳은 적자가 없었다. 따라서 가문 상속법에 의거하면 카를 테오도어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팔츠-츠바이브뤼켄[2]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Karl II. August 1746~1795)[3]가 그 자리를 이어받을 예정이었다.이런 상황에서 호시탐탐 바이에른을 노리고 있던 세력이 있으니 바로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연이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빅엿을 먹은 오스트리아는 세력 회복이 절실했고, 바이에른은 그런 오스트리아에게 참으로 먹음직스러운 곳이었다. 요제프 2세는 일찍부터 이 곳을 탐내왔지만 공동통치자이자 어머니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로이센 왕국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요제프 2세는 차근차근 행동을 밟아나가고 있었는데, 첫 단추는 1765년 전임 선제후 막시밀리안의 여동생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제프 2세는 뚱뚱하고 못생긴 마리아 요제파를 싫어했고,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그렇지만 요제프 2세에게 남은 카드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300년도 더 전이었던 1429년에 당시 독일왕 지기스문트가 사위의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바이에른 영토를 준다는 증서가 있었던 것. 물론 300여년 전의 약속을 이제 와서 들이미는 것은 주변국가에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지만, 어차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바이에른의 카를 알브레히트와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도 200년 전의 문서를 빌미로 합스부르크 영지들의 상속을 주장한 전례가 있었다. 이렇게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게 제대로 된 명분일리는 없지만, 어쨌건 중요한건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해 여차하면 무력행사도 가능한 명분을 세워뒀다는 사실이었다.
요제프는 독일 권역에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늘려야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라인강변 오스트리아 영토인 외지오스트리아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영토적 연결은 물론 라인 지역 경제권이 도나우강 유역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했기 때문.
이때문에 신임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를 꼬드겨 "카를 테오도르의 서자에게 황제의 권한으로 특별히 상속권을 인정하여 기존 영지인 팔츠 선제후국과 오스트리아령 라인지방 영토를 합쳐서 새로운 군주국을 승인하되 대신 니더바이에른 지역을 넘겨달라"는 밀약을 체결하였다.
문제는 전임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의 부인과 후임 선제후로 예정된 카를 아우구스트와는 일말의 상의도 없이 카를 테오도르 독단으로 내린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전임 선제후 부인[4] 입장에선 이제 은퇴해서 뒷방 사는 것도 억울할 판에 방까지 빼달라는 소리고, 카를 아우구스트의 경우 자신의 상속권이 침해받기 때문에 당연히 크게 반발해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와 동맹을 맺어서 억울함을 호소할 지경이었다. 특히나 바이에른 선제후 궁정의 신하들은 분노가 폭발했다.
오랫동안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다스리던 조상 땅을 오래전 갈라져 남남이나 다름없는데 운좋게 이어받아 자기 서자의 상속권을 위해 대대로 이어온 조상의 유업을 팔아먹는 카를 테오도르의 매국행위에 격분하여 선제후의 결정을 인정치 않았으며 기존 오스트리아의 우방이던 작센 선제후마저 반대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국제여론을 조성하여 작센과 동맹을 맺고 현 상황 유지를 촉구했다.
오스트리아의 옛 동맹국이였지만 이제는 라이벌 프로이센의 동맹이 되어버린(동맹의 역전) 영국도 "요제프가 잘못 했네"라며 프로이센과 작센 편을 들었고,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하여 영국과 대서양을 넘나드는 전쟁을 치르느라 제 코가 석자였던 오스트리아의 동맹국 프랑스마저 병력 파견을 거절했다.
2.2. 외교적 파장
이 밀약이 공개되자마자 독일 전역이 발칵 뒤집힌다. 제일 먼저 프리드리히 대왕이 건재했던 프로이센 왕국이 열렬히 반대 의사를 밝혔다. 프로이센 왕국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 전쟁을 통해서 간신히 오스트리아에 대적할 만한 국력을 갖췄는데,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 일부 지역을 합병하면 그 동안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었다. 작센 선제후이자 카를 아우구스트의 매형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역시 격노해서 밀약의 승인을 거절한다.독일 문화권 내에서는 전반적으로 反오스트리아 분위기가 퍼져나갔고, 오스트리아의 믿을 구석이었던 외부 세력의 도움 역시 그리 원활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든든한 우방이었던 프랑스[5]는 저 멀리 신대륙에서 옆동네 다른 웬수에게 빅엿을 먹이느라 개입을 꺼렸다. 게다가 동쪽의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 역시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합병이 중부 유럽의 세력 구도를 무너뜨릴 것을 우려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2.3. 진행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사망한 직후인 1778년 1월 3일, 요제프 2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바이에른 영토를 점령하였다. 프로이센 왕국이 이에 대응하여 군대를 오스트리아 국경 부근으로 동원했고, 작센 역시 동원령을 선포하였다. 수 달에 걸쳐 협상이 진행됐지만 어느 쪽도 양보를 할 생각은 없었고 긴장은 더더욱 커져만 간다.7년 전쟁 이후 양국은 서로 미친듯이 군비확장에 몰두해서 서로 20만 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한다. 그 당시 관점으로는 상상을 초월한 어마무시한 규모. 7월에 마침내 프로이센/작센 연합국이 국경을 넘어 보헤미아를 점령하고 쾨니히그레츠 요새[6]를 위협한다. 세계 최고의 정예임을 자랑했던 프로이센과의 정면 충돌을 꺼렸던 오스트리아는 참호를 파고 상대방을 향해 포격을 하는 전략으로 시간을 끈다. 그리고 대규모 충돌은 없는 채로 이러한 양상이 1년 동안 이어진다.
오스트리아가 이렇게 나오자 프로이센 역시 뾰족한 수는 없었다. 상대방의 우주방어를 뚫을 수단도 딱히 없었고, 어떻게 어떻게 뚫어봤자 피해가 엄청날 것은 분명했기 때문. 그리고 이미 7년 전쟁으로 한 번 아작이 나봤던 프로이센에게, 이 피해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으며 그렇게 된다면 옆동네의 러시아, 스웨덴, 프랑스만 좋아 죽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도 하에 협상이 진행됐고 1779년 5월 테센 조약이 체결되었다. 테센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가 인(Inn)강 남동쪽에 위치한 인피어텔(Innviertel)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다시 바이에른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전쟁은 종결된다. 이때 오스트리아가 얻은 인피어텔의 최대도시가 바로 훗날 아돌프 히틀러의 고향인 브라우나우암인 되겠다.[7]
3. 여담
- 독일 쪽에서는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라는 명칭보다도 감자 전쟁(Kartoffelkrieg)이라는 명칭이 더 유명하다. 군대의 규모는 급속도로 성장했는데, 전선은 정체되어서 먹을 게 양쪽 다 떨어져, 아예 전몰자보다 굶거나 병으로 인한 비전투손실 인원이 더 많을 지경에 이르쟈 양국 병사들의 주요 업무가 식량 채집과 상대방 보급품 털기였는데 이때 채집한 식량이 감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국 병사들에게 쌍으로 감자를 털리던 농부들만 죽어나갔다고...
- 이 전쟁을 통해 프로이센은 확고하게 독일 문화권 내 양대산맥 중 하나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이 현상은 마침내 7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꺾고 부동의 원 탑으로 올라설 때까지 약 80여 년간 유지된다.
- 바이에른은 다른 독일 지역과 달리 종교도 가톨릭 우세이며 독일 제국에 합류하고서도 분리주의 성향이 강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에도 오스트리아와의 단독 통합안이 오르내릴 정도.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도 대를 이어 합스부르크 가문과 혼사를 맺어오며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했었고, 언어적 측면에서는 독일어 내에서 오스트로바이에른어로 묶일 만큼 언어도 유사하며, 종교 또한 가톨릭 신앙을 뿌리 깊게 고수한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바이에른 내부의 분리주의 계열은 바이마르 공화국 대신 오스트리아-바이에른을 통합하는 독립 운동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는 바이에른이 독일 권역에서 반프로이센- 친오스트리아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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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이델베르크의 카를 테오도어 다리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2] 한때 스웨덴 국왕을 배출한 가문으로 스웨덴 가계는 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분가, 팔츠와 바이에른을 상속받게될 가계는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분가.[3] 나중에 초대 바이에른 왕국 국왕이 되는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형.[4] 작센의 마리아 안나 조피. 루이 16세의 모후인 마리아 요제파와 카를로스 3세의 왕비인 마리아 아말리아의 여동생이다. 즉, 루이 16세의 이모.[5] 이 시기에는 가장 든든한 우방이라고 부를 만했다. 자세한 사항은 동맹의 역전 참조.[6] 90년 후 벌어진 보오전쟁 당시 최후의 격전지로 대 몰트케와 프리드리히 왕세자가 이끈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든 곳이다.[7]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브라우나우암인의 세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