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6대 국왕 고종 | 高宗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생몰년 | 1934년~2020년[1] (김귀남) 1852년 9월 8일~1930년대[2] (이명복) | |||
한성부 정선방 구름재동 흥선군 사저 (이명복) | ||||
즉위 | 1863년 | |||
재위 | 조선 왕세자 | |||
1863년 ~ 1864년 | ||||
조선 국왕 | ||||
1864년 ~ 1913년 | ||||
조선 상왕 | ||||
1913년 ~ 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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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명복(命福)[3] → 재황(載晃)[4] → 형(㷩) | |||
봉호 | 완정군(完靖君) | |||
부모 | 생부 김명득, 생모 박입분 (김귀남) | |||
생부 흥선대원군, 생모 여흥부대부인 양부 철종, 양모 철인왕후 (이명복) | ||||
부인 | 왕후 민자영 | |||
자녀 | 장남 왕세자 척 차남 안양대군 규 삼남 경양대군 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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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체역사물 고종, 군밤의 왕의 주인공. 본래 가진 재주라고는 군밤을 기막히게 굽는 재주 뿐인 박복한 86세의 노점상이었지만, 북악산 산신령의 신통력으로 군밤을 원없이 먹게 해 달라 소원을 빌던 평행세계의 철부지 10세 소년 이명복, 즉 훗날의 고종과 몸이 뒤바뀌었다.2. 성품 및 능력
“그 역천(逆天)이라는 것. 천명에 거스름을 그리 부른다 들었소. 그런데 지금 천하의 대세가 서로 물고 뜯는 데 있다면, 참으로 천명을 거스르는 길은 그에 맞서 다 함께 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데 있지 않겠소? 물론 세상은 넓고 우리는 작으니, 단번에 그런 꿈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우선 우리 주변부터라도 하나씩 무언가를 해나간다면, 어쩌면 그런 날이 올 지도 모르는 법이외다.”
고종, 대원군이 올린 국가들의 무력 분쟁에 조선이 개입함에 대한 의향에 답하여.
고종, 대원군이 올린 국가들의 무력 분쟁에 조선이 개입함에 대한 의향에 답하여.
그렇다면 왕은 어떤 분이셨는가? 『맹자』에 이르기를, 성(聖)이면서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경지를 이르러 신(神)이라 하였다. 아아, 자불어(子不語)렷다! 공맹 두 성현조차 말로 드러내시지 못하셨구나! 이에 고균은 여기서 붓을 꺾는다.
김옥균, 고종대왕 행장(行狀)의 초고 말미에서.
귀남의 성격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선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좀 꼰대인 할아버지'다. 완전무결한 선인이나 교활한 악인은 아니며, 착하기는 하지만 똑똑한 신하들이 생각하지 못한 독특한 발상을 제시하는 것에서 소소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는 보통 노인이다. 다만 온화하고 소시민적인 성격인 것은 확실한데, 귀남 본인이 느끼기엔 서럽고 아등바등 살아갔던 전생에 비하면 본인에게 있어 모든 게 풍족한 이번 생에서는 애초에 화가 날 일이 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생에는 유복자로 태어나 부모형제부터 처자식까지 가족을 모두 잃고 길거리 장사를 전전하는 가난한 노인이었지만, 이번 생은 귀남의 자평에 따르면 사소하게는 매일 수랏상을 받아 좋은 밥을 먹고 궁궐의 비단 이불을 덮고 자는 호사부터 부모님이 장수하고 아내와 백년해로하며 잘 키운 아들 셋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룬 것까지, 불평할 거리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생은 전생에 그저 덤으로 받은 것이기에 감지덕지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김옥균, 고종대왕 행장(行狀)의 초고 말미에서.
다만 꼰대 기가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을 읽는 독자들, 즉 2020년대의 20대~40대 청장년층의 기준으로 그렇다는 이야기고, 작중 인물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이는 귀남이 현대 기준으로 좀 보수적인 인물이라 해도 결국 본질적으로는 현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 한국에서는 아무리 심각한 꼰대라 하더라도 여자가 사회에 진출해서 일하고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894년 뉴질랜드가 최초였고,[5] 여성이 본격적으로 사회에서 일하기 시작한 시점은 1910~20년대다. 때문에 '2020년대의 군밤장수 노인 김귀남'은 현대의 기준으로 봤을 때 '아무래도 연세가 좀 있으신 만큼 보수적인 성향이 좀 있는' 사람이지만, 작품의 배경인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조선 국왕 이형'은 당대의 기준으로 봤을 때 진보적인 수준을 넘어서 급진적인 인물이 될 수 밖에 없고, 실제로 작중의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대체 머리가 어디까지 깨었는지 짐작도 못할 극렬 혁신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110화 무렵 대조선국 국제를 제정할 때 신하들과 귀남의 관점을 보여주며 잘 드러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당연한 상식으로 기억하는 귀남은 대조선국 국제를 딱히 문제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신하들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대조선국 국제를 보고 노심초사했다. 나중에 경양대군 등 자손들이 미래 자신들의 후손들이 벌일 지 모를 왕위 싸움을 걱정할 때 그렇게 된다면 왕실을 해체하고 공화제를 도입하라는 초대형 폭탄발언을 하고 그 국호인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사액해 남기는 것으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그 외에는 성격상 특별한 문제가 아예 없다. 어차피 '이렇게 한다고 해도 나라가 망한다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이겠지, 그렇다면 그 전까지 백성들이나 잘 돌봐서 원망은 듣지 말자'라는 마인드로 왕의 일에 임하므로 일이 잘 안 되어 봤자 나라 망하는 것밖에 더 있겠냐라는 생각을 가진 덕에 권력자들이 흔히 가질 법한 권력에 대한 집착도, 큰 욕망이 없어 신료들과 백성들에게 권력을 상당수 나눠주었기에 국가원수로서 힘은 열성조 시절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이 작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모든 신료와 백성들이 존경하고 있어 임금으로서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대표적으로 근대적 의회인 참의원을 신설할 때에도 전생의 국회의원들이 법 만들고 일했던 것을 기억해 딱히 반대하지 않았고, 수백 년 이상 내려온 노비제와 신분제를 혁파할 때도 서양 기물인 자전거를 보여주며 이것만 있으면 노비가 필요하지 않다며 만약 노비가 꼭 필요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한 이의 경우엔 '왕실 내탕을 털어서라도 사주겠다'고 말하자 비판 여론이 쏙 들어갔다. 이런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라온 세자와 대군들이 아버지의 치적에 감히 누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 장성한 적자만 셋이 있음에도 태조대왕 양위 이후나 문종대왕 사후와 달리 상왕으로 물러나 왕위를 넘겨줄 때에도 피비린내 나는 왕실의 권력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과도 같이 덕 높은 아바마마를 모르고 자랄 본인의 자손들, 귀남에겐 손자뻘 왕손들이 장성하면 일어날지 모를 왕위 싸움을 걱정할 정도다.[6]
다만 집안을 풍비박산낸 6.25 전쟁으로 전쟁의 잔혹함과 무서움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는 듯하다. 극렬 북벌파 이필제와 그 수하들이 주조선 청나라 공사관을 습격해 건물을 망가뜨리고, 기물을 부수고, 공사관 직원을 폭행해 주조선 대청공사와 휘하 직원들이 모화관으로 대피할 정도의 피해를 입혀 조청간 외교분쟁을 일으키는 사고를 거하게 치자 격노해 즉각 이필제와 그 무리를 추포해 의금부에 끌고 와 국문하고 "역시 군대를 가야 철이 든다."라며 징병제로 전환해서 만백성에게 군대가 얼마나 힘든지, 뜬구름 같이 먼 이야기였던 전쟁이 얼마나 가깝고 또 함부로 전쟁을 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똑똑히 알게 해 주었다. 이 때 귀남은 보기 드물게 이필제에게 격노하는데,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도 귀남이 이렇게 화를 낸 일은 거의 없다.[7]
이필제와 그 무리가 강제입대 당한 것은 징병이라기보다는 형벌의 일종인 충군형에 가깝지만 이후 지엄한 법률, 그것도 어명에 의해 종군 생활을 하게 된 당대의 만백성에게 미친 듯이 욕을 먹었고 심지어 '신미년 필제 같다'는 속담까지 생겼다.[8] 결국 이필제는 길림성에서 끝없이 욕 먹으며 뺑이친 후에도 수많은 군필자들의 눈이 두려워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름까지 바꾸고 천도교에 입교해 길림성에 눌러앉았다. 게다가 이필제에게 격노한 일도 이후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점점 부풀려져서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귀남이 필제에게 벼루를 던졌다는 야사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자식인 경양대군도 철이 덜 들었던 시절에 이 벼루를 던졌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었을 정도. 팬덤에서는 한술 더 떠 '필제의 머리를 화로에 처박았다'를 넘어 필제를 통째로 질화로에 던져버렸다는 과장이 돈다.[9]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전쟁을 무서워 하면서도 본인이 전생에 몸으로 직접 겪어본 전쟁은 태평양 전쟁과 6.25 전쟁처럼 나라의 명운을 걸고 하는 캐삭빵밖에 없어서, "사지 멀쩡한 사내는 모두 총 잡고 아낙들은 모두 논밭과 공장 나가야 전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에 대해 서양에서는 '동양의 프로이센'이라 비유할 정도로 이 무슨 군국주의 국가나며 경악했지만, 정작 조선 내에서는 한반도 4천년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고조선-한 전쟁,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삼국통일전쟁, 나당전쟁, 고려 시절 후삼국통일전쟁, 여요전쟁, 여몽전쟁, 카다안의 침입, 홍건적의 침공, 고려 말 왜구의 침입부터 조선의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이[10] 많은 전쟁이 본토가 전장이 되어 수도를 포함한 상당수의 국토가 엉망이 되고 백성들은 그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은, 한 번 한 번이 국운을 건 전면전이였기에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편이다. 현실의 한국이 포방부, 화력덕후가 되고 도시 곳곳을 전쟁에 대비해 만든 이유도[11] 까딱하면 바로 대규모 전면전으로 번진 이런 전쟁경험 때문이다. 허버트 조지 웰즈의 작품인 '공중에서의 전쟁'을 각색할 때도 웰즈의 원문은 시골에서 조용하지만 평화롭게 사는 것이었으나, 귀남이 직접 각색을 지시한 내용은 참혹한 가난과 손발이 얼어붙는 지독한 추위와 비참한 굶주림, 전쟁이 끝났는데도 발 잘못 디디면 터져나가는 지뢰에 팔다리가 잘려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는 등, 내전에 시달리는 중동 국가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당대 기준에선 지나칠 정도로 잔혹한 모습이었다.[12] 이런 점들 때문에,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전쟁을 싫어하는 왕으로 알려져 있다.
분쟁을 싫어하는 온건한 성향과 당대 사람들보다 진보적인 사상, 그리고 전생과 현생을 합쳐 연륜이 깊은 노인 특유의 말돌리기 능력 덕에, 어떤 사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때 강경책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어딘가 엉뚱한 유화책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게 나비 효과로 예상치 못하게 이리 튀고 저리 튀어 결국에는 양쪽 모두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되지만 어쨌거나 손해는 보지 않는 좋은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유자의 짐' 따위를 주장하는 얼치기 제국주의자들이 등장하자 "학생은 공부가 본업이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와중에 다른 짓거리를 하는 거 보니 시험 난도가 낮은 모양인가 보군?"이라고 대꾸하며 과거시험 난이도를 대폭 올려버렸다. 그런데 근대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수나 능력과 시간이 부족했던 기존 관료층들이 이에 적극 찬동해서 자기네들이 필요한 걸 마구잡이로 시험과목으로 넣었고, 그 뒤에도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고 허튼 소리를 할 때마다 말 없이 과거시험 난이도가 올라갔고 수많은 유생들이 낙방과 생고생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13]
그렇게 마구 시험난이도를 올리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세상이 급변하자 초야에 묻힌 선비들이 평생 쌓아온 학업과 수행이 물거품이 되어가지만 그런 학식으로도 참의원에 오르기엔 부족하다는 것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에는 "배운 사람이 존중받는 직업은 판사랑 검사"라며 사법부 독립으로 어쩌다 국왕(정부)-의회-사법부라는 삼권분립을 완성하며 대응하는데, 삼권분립이나 사법부 독립 같은 거창한 명분이 있었던 게 아니라 '선비=많이 배운 사람이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논다고? 내가 살던 시대에는 판검사들이 많이 배운 사람이었지? 그러면 그거 시키면 어때?'하고 단순하게 접근한 것이다.
또한 분쟁을 싫어하는 성향은 국내의 정치적 알력다툼에도 마찬가지라 사람 모가지를 쌓아야 유지될 나라라면, 그런 나라는 망해도 싸다 라는 신료와 사관이 들으면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를 정도의(...) 수위가 높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장 계혜환국 때에도 세도가가 정계에서 쫓겨나기만 했지 사람이 죽은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나중에 개화의 물결에 올라탄 옛 세도가들이 각자의 분야를 살려 다시 정계에 오르는 것을 막지 않았다. 홍재학이 감히 현 국왕인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신료들 사이에서 어심을 어지럽히는 무례한 서생이라며 당장 잡아들여 참해야 한다고 파문이 일었을 때도 마음이 상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국가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이 잡아죽일 죄라고 생각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던지라 의금부로 끌고 가서 국문하지 않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과격한 문체로 상소를 올렸겠는가, 적어도 그 사정이나마 듣고 앞뒤를 따져보자'며 흔쾌히 대궐로 불러들여 대소신료들과 개혁안을 논하기도 했다. 귀남이야 선의로 부른 거지만 당사자인 홍재학은 감정에 북받쳐 감히 만인지상인 국왕을 함부로 욕해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불경죄를 지었으니 어깨가 천산처럼 무거워 죽을 맛이었다고.
전생엔 소학교[14]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터라 군밤 굽는 기술을 제외한 "미래 기술"은 없다시피하다. 아는 역사 지식이라고는 '미국은 좋은 나라, 일본은 나쁜 나라, 민비는 글러먹은 여인, 대원군은 대단한 사람, 이완용은 매국노, 이등박문은 왜놈 두목, 공산당 나쁜 놈, 모택동과 김일성은 공산당 수괴' 정도[15]에 그치고, 미래 지식까지 포함해도 자동차, 비행기, 관광업 등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해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수준이다.
거기에 머리도 특출나게 좋은 편은 못 되어서, 잠저 시절 스승이었던 오경석의 평가에 따르면 "주의가 산만하고 명석함도 둔재를 겨우 면한 수준". 때문에 일반적인 대역물 주인공과 비교하면 역사개변을 일으킬 지식이나 정치적 능력은 부족한 편이라 실제 계획을 짜고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대부분 휘하 신료들의 몫이다. 다만 수십 년의 노점상 경험으로 연마한 '사람 보는 눈'은 뛰어나고, 고된 세월동안 쌓여온 노인으로서의 지혜가 2번째 생의 시절까지 더해져 더욱 완숙해져 있기 때문에 (작가의 필력 덕도 크겠지만) 작중 대화에 있어서도 말문이 막히거나 중언부언하는 일 없이 유창하게 말하는 등 단순히 못 배워 무식한 노인이라고 만은 할 수 없다.
대신 군밤 굽는 실력만큼은 현생에서도, 전생에서도 가히 천하일품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단순히 군밤을 굽는 것을 넘어 율란같이 밤을 재료로 한 과자도 만들기도 한다.[16] 전생한 것 부터가 장사 단골 손님인 산신령이 그동안 맛난 군밤을 맛본 값이라고 귀남에게 선물로 선사한 것이며, 효자군밤으로 온 도성을 휩쓸던 당시에도 효를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우긴 했으나 손님이 몰려든 결정적인 원인은 귀남의 절묘한 군밤 굽는 실력[17]과 우수한 군밤 맛[18] 덕분이었다. 왕위를 정식으로 물려받고, 완전히 장성하여 대리청정과 섭정도 하지 않게 된 이후에도 군밤 굽기는 취미로 계속 이어나갔는데 주변에선 일국의 왕이 취미라지만 군밤을 굽는다는 것에 품위걱정을 했지만 그러기엔 어제(御製)[19]의 군밤이 너무나 구수하고 맛있던지라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으며[20], 외려 날이 선선해지는 가을이 되면 귀남의 질화로 가져오라는 어명을 내심 기다리고 있는 판국이다.
이러한 간식 하사하기는 주변 나인들은 물론,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해당되어 부족한 자신을 도와 나랏일 하느라 고생한다고 몸소 한두 톨 구워내서 쥐어주기도 하며 때로는 반대의견을 내놓는 신료를 살살 달래면서 뇌물 삼아 쥐어주기도 한다. 가령 박규수의 경우, 심각한 안건을 가지고 귀남에게 갔다가 정신차려보니 귀남이 몸소 구워낸 군밤을 엄숙하게 받으면서 이 자리에서 바로 먹는 게 예의인지, 아니면 조심히 집까지 들고 가서 먹는 게 예의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개그씬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어제군밤을 하사받은 신하가 대표적으로 정학과 개화의 거두인 문경공 이항로와 문충공 박규수였던 탓에 어제군밤을 하사받는다는 것이 일세의 명신(名臣)만 받을 수 있는 대접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작중 조정에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온 외교관들에게 군밤은 물론이고 율란을 비롯한 여러 간식거리를 대접하기도 했으며[21], 마찬가지로 타국 외교관들에게도 매우 뛰어난 맛이라고 호평을 받았다. 시간이 흘러 당분이 두뇌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확인되자 이런 간식거리를 궁궐에 상비해두면서 근무나 회의 중에도 중간중간 입을 달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다.
3. 행적
3.1. 전생
1934년, 아버지 김명득과 어머니 박입분의 셋째 아들로 출생. 아버지가 우마차 사고로 사망해 유복자로 자랐다. 어머니 병구완으로 집안이 빈한해 소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태평양 전쟁 때는 국가총동원법으로 인해 수탈을 당했다. 광복 후 5년 뒤 6.25 전쟁이 터졌고 입신양명을 꿈꾸던 큰형은 훈장을 타오겠다며 자랑스레 입대했다가 6.25 전쟁 초기 속절없이 밀리던 전선에서 전사해 전사통지서 한 장이 되어 돌아왔고, 둘째 형이 혼절한 어머니와 어린 아우를 건사하며 낙동강 방어선을 따라 부산까지 피난왔으나 결국 어머니마저도 타향 부산에서 돌아가시고, '큰형 죽인 빨갱이 놈들 모가지 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둘째 형은 다리 한 짝 팔 한 짝씩 나라에 바치고 돌아왔으나 그 이후 폐인처럼 지내다가 어느 날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귀남 본인은 전쟁 말에 성인이 되었다고 징집되었는데 다행히 최전방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욕 먹고 얻어맞는 등 가혹행위는 기본에 되놈·빨치산·추위와 굶주림을 상대하는 고된 시간을 보냈다.게다가 기껏 살아서 부산에서 고향 마을으로 돌아왔지만 집안은 이미 풍비박산 나 있었다.[22] 그리하여 무작정 서울에 상경하여 미국 배급물자 받아가며 이일 저일 하다가 군밤을 팔기 시작하였다. 장사 사 년차에 겨우 식모살이하던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몇 년을 맞벌이로 악착같이 벌고 귀신같이 아껴서 겨우 판잣집을 면한 집 한 칸을 얻었지만, 그 해 겨울 아내와 어린 아들이 연탄 가스를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저 제 팔자려니 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아내와 아들을 묻고서 재혼도 하지 않은 채 3.15 부정선거나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등 대한민국 격동의 현대사를 어떻게든 이겨내며 계속 밤을 굽다가 "뭔 고라니인지 고로쇠인지"하는 역병이 돌기 시작한 2020년 초, "그 옛날 비류랑 온조가 내려온 시절 이래" 가장 맛난 밤을 먹고 감탄한 북악산 산신령의 신통력으로 훗날 대한제국의 고종 태황제가 되는 흥선군 댁 둘째 아들 이명복의 삶을 살게 되었다.
3.2. 현재
3.2.1. 즉위 이전
엉뚱한 천장 아래서 눈을 뜨게 되어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86년을 살면서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뜬금없이 돌아갈 때가 있다는 것 정도는 체득했고 원 주인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은 덕에 그리 티를 내지 않고 새로운 일상에 녹아들 수 있었다.이하응이 임금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아니라 파락호 '흥선군'일 때 이명복이 되어 글공부 제대로 하라고 맞으며 지내다가 영 실력이 어설픈 군밤장수 천덕만을 대신하여 밤을 구운 것을 계기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조선의 역사를 뒤바꾸는 행보를 시작하였다.
오경석 밑에서 실전 위주의 경서 공부를 하다가 임술년 시월부터 훗날 철종이 되는 이원범이 하사한 은과 비단을 밑천 삼아 차린 노점에서 이른바 '효자율'을 판매하여 도성의 명물 '효자 군밤장수'가 되었다. 이후 효자율이 불러온 나비 효과로 안동 김문이 흥선군과 개화당 영수 박규수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어 원 역사보다 빨리 그리고 더 처참하게 몰락한 계해년(1863년)에 원범의 양자 완정군이 되어 조선의 세자가 됐다.[23] 그리고 그 해 가을 원범의 조언을 듣고 이 나라가 다가올 미래에 일본에게 삼켜질 운명이라고 해도 적어도 주변 사람들은 지켜내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3.2.2. 즉위 이후
갑자년(1864년), 왕위에 올랐다. 지난 생에 듣기로 조선이 망한 이유는 우물 안 개구리로 지냈기 때문이라 박규수에게 자신 또한 개화에 뜻이 있다고 밝혔다. 단오가 지나 조정 중신들 사이에서 흥선대원군이 주도하는 서원 철폐를 놓고 정쟁이 시작되자 막연히 서원을 학교 정도로 생각하여 조선이 망하기 전에 무식쟁이 소리 듣는 사람 줄어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서원을 확충한다'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택지를 골랐다. 서원 확충 도중 흥선군이 경전 보급을 명분으로 만든 사병들에 개화파가 올라타 개화주의 경전을 보급하면서 개화도 순조로워졌다. 이와 같이 전생의 기억으로 어쩌다 툭툭 뱉은 말들이 광기의 시대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조선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무엇보다 흔히 북벌, 군사행동을 의미하는 '역천'을, '지금 시대가 죽고 죽이는 시대라면 그것에 거역하는 것이야말로 역천이 아니겠는가'라며 평화주의 기조를 마련하는 장면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식 걱정이 조선의 국체를 바꿔버리는 경향이 있다. 아들 공부 잘하냐고 물었더니 '사람은 착하다'는 평가를 받자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24], 아들들이 만약 자기 다음 대에 권력싸움이 일어나면 어쩌냐고 묻자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게 왕의 자리를 탐낼 가치가 없도록 만들면 된다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바꾸라고 비밀리에 하교했다. 해석하자면 '너희+후손들 왕 자리 놓고 다투면 종묘사직 샷다 내린다!\'이고,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온 나라의 여론이 뒤집어지고 신하들이 통촉해 달라며 전국에서 만인소를 올릴 건 물론 신하들이 머리 박는 속도가 느리면 역적으로 찍힐 정도일 거라는 팬들의 평가도 나왔다.
시간이 흘러 결국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강사 총신들과 전쟁 막을 방도를 고심했고, 끝내 구호물자 및 인력 파견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론 결집과 재정 마련에 다소 난항이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몸소 옥음방송을 하기로 결심한다. 작중 서술을 빌리자면 팔도가 멈추고 2000만의 귀가 라디오에 집중하던 차, 생방송 시작부터 방송사고[25]를 내는 해프닝을 시작으로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솔하게 대본은 제쳐두고 하고싶은 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처음엔 백성들에게 도의로 지원할 것을 호소했지만 조금 부족하다 싶었는지 조금 강짜를 부리기로 하여 "정 안되면 본인이 직접 가서 도울 것이며, 필요하다면 임금 자리도 내려 놓겠다."는 하늘이 뒤집어지고[26] 역사에 길이 남을 폭탄 선언을 남기고 방송을 끝맺는다. 그리고 당연히 전국의 여론이 뒤집어지고 유럽 전역에 식량 및 의료 지원을 행하기 위한 창의단이 최익현을 선두로 발족, 최전선 각지에 적극적인 인도적 지원을 행하였으며 이러한 시도는 유럽 전역에 염세주의와 반전주의를 흩뿌린다.
1913년, 전쟁이 거의 종식되어가던 시점에서 박은식과 김옥균과 만나 만국연합과 국제정세에 대해 심각하게 의견 나누던 중, 대사를 보내 여러 나라를 방문해서 화합을 굳히자는 의견이 나오자 누굴 보낼지 이야기 하던 중 돌연 "이 사람이 간다면?"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슬슬 왕 자리 물려줄 때 되었다는 혼잣말로 본인을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다.[27] 이후 헐레벌떡 찾아와 머리부터 박고 만류하는 이척과 안양대군에게 나도 이제 중전과 해외여행 좀 가보자고 투덜거리다 군밤으로 살살 달래기로 한다. 안양대군이 마침 오고 있던 김옥균에게 말려달라고 통사정하지만 김옥균은 말리는 걸 포기하는 걸 넘어 아예 본인이 부추기고 있는 상황.
1913년 5월 왕위를 왕세자 이척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된 후, 중전 민씨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만국연합 첫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순방을 떠나 대남, 청, 유구, 일본, 소련, 유럽 각국, 터키, 이집트, 인도, 태국을 거쳐 귀국, 1년 휴양 후에는 미국과 하와이, 기타 아메리카 대륙 순방을 다녀온다.
1919년 1월 21일, 원 역사대로라면 이 날 훙서(薨逝)했겠지만, 쌓아온 덕이 많아 비명횡사하지 않고 오랜만에 나타난 북악산 산신령과 함께 귀남의 몸에 들어간 진짜 구름재 명복의 인생을 보러 잠깐 혼만 빠져서 미래로 갔다.
사후 원 역사처럼 묘호로 고종을 받았다. 그만한 공적이라면 마땅히 '조'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머리 온전한 사람이라면 선왕의 묘호가 종이라 하여도 털끝만큼의 의심 품지 못할 것이요, 선조/인조가 "조" 자를 달고 있다지만 선왕께서는 세종대왕과 나란히 서시고도 도리어 모자랄 정도이니 조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어 그대로 고조가 아니라 고종이 됐다[28]. 파킨슨 병에 걸렸으나 귀남의 묘호가 정해질 때까지는 살아있었던 김옥균은 평범과 비범의 구분을 무너뜨리게 되었으니 묘호를 정하는 일마저 그분 답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담으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말하기를 귀남이 훙서하였을 때 저 바다의 수면이 조금은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팔도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4. 평가
세종대왕과 동급, 혹은 그 위에 있다고 평가받는 군밤 세계관 내 최고의 성군. 옴니버스로 느껴질 정도로 여러 인물들의 행적과 국가정세를 묘사하는데 집중하는 작품 특성상 주인공 귀남의 행적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작중 귀남의 업적을 보면 가히 재림요순, 태평성대를 열고 나라의 위기를 해결했으니 요순탕무의 환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아와 유럽 할 것 없이 김귀남(빙의)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으며, 조선 내에서는 신분과 사상, 성별을 막론하고 만인지존으로서 추앙하고 있으며, 심지어 군주제와는 상극인 공산주의자와 아예 정부나 군주제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까지도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그래서 조선에서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해 뜯어고쳐 사민주의와 비슷한 온건파인 근왕파 공산주의가 생기면서 필요하다면 다른 진보파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온건파인 근왕파 볼셰비키가 급진파인 멘셰비키와 대립하며 서로 싸우다가 각나라들의 지원과 레닌(여기서는 일린)의 각성으로 근왕파 공산주의가 멘셰비키를 누르고 공산주의의 대세가 되었다. 부르주아의 만행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정치권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귀족이나 자본가를 견제하고 싶은 군주정과 궁합이 맞는다는 논리이며, 덕분에 러시아 황실에서도 귀족들이나 자본가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왕권에 걸림돌이 되거나 국왕을 꼭두각시로 만들 위험이 있었기에 적절한 견제가 필요했고 일린을 비롯한 근왕파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고 협조가 가능해 원역사보다 탄압이 크게 줄어들고, 니콜라이 2세가 소싯적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경험을 되살려 피의 일요일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고 의회 설치, 헌법 제정을 허용하며 개혁주의자들에게도 점수를 쌓아 러시아 혁명 당시에도 러시아 황실은 공산주의자들의 적대를 받지 않았고 소련 성립 후에도 러시아 황실은 건재하게 로마노프의 이름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나중엔 귀남도 만민공산당처럼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공산당은 북괴 공산당처럼 백성을 착취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나쁜 놈들과는 다른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즘도 자유와 평등, 사회의 안녕, 즉 인본주의에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라 흔히 말하는 아나키스트 폭력시위에 대한 회의론을 주장하는 온건파가 있었고 귀남이 아나키즘의 중점을 듣고 아나키즘 본연을 위한 땅을 마련해주며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자의 적인 군주가 아나키스트들에게 도움을 주어 어쩌다 생디칼리슴의 형성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귀남 본인의 행적을 보면 옛 성현인 노자가 말한 무위지치, 무위자연을 현세에 구현한 유교적 성군 그 자체. 본인에게 여색, 사치, 식탐 등 특별한 탐욕이 없다. 일부러 찾지 않아도 일국의 군주이니 호의호식하며 이런저런 고급 예물이나 진상품을 받는 게 예사일이지만 받은 물건들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일이 많다. 여자도 대비인 민자영 외에 작첩을 하지 않고 금슬 좋은 부부로서 백년해로했으며, 오히려 궁인의 혼례 허용이나 내시 채용 중단 등의 개혁을 실시했고, 술이나 음식도 그저 '세상엔 이런 맛도 있구나' 정도로 여긴다. 소소하게 군밤과 율란 굽는 정도의 취미밖에 없고, 그것도 혼자만 독식하지 않고 언제나 신하, 백성, 아들, 아버지, 그리고 백성 등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피 보기를 그리도 싫어하여 다른 나라들이 싸우거나 충돌이 발생하면 끼어들어서 중재하려 노력하고 최악의 전쟁에서도 전쟁의 포화에 시달리는 유럽 땅에 평화의 씨앗을 뿌렸다.
즉위 초기 계혜환국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도 옛 정적과도 같은 옛 세도가와 개화에 반발한 척화파, 새롭게 대두한 개화파 모두를 하해와도 같은 아량으로 다독여 일체의 숙청과 내침도 없이 감화시키고 인도하며 각자의 역할을 걷게 하였고, 수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필요하다면 외국인이나 옛 세도가 출신이어도 가림 없이 등용해 썼으며, 혼란기를 빠르게 수습하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냈고, 각종 문제가 발생할 때도 피나 강경책을 부르짖지 않고 적절한 유화책을 제안하여 해결했다. 자신의 모자란 점은 인정하고 자신보다 뛰어난 신하와 인재를 찾아내면 귀천과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지원함은 물론 권력도 믿고 맡겨줬으며, 제도에 폐단이 생길 미래를 걱정해 그 시기를 위한 비전 겸 후대를 향한 경고를 남겼으며 발전된 기물과 제도의 도입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온 세상의 나라들과 선린관계를 맺어 교린삼장에 따라 서로 이익을 주고받고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손을 내밀어 도와주며 나라의 이름을 널리 알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말에 맞게 세계 만방에 적 없이 고루 사귀고, 오래된 사대관계를 혁파하며 모든 나라와 대등한 국가로서 섰다. 국방의 일에 관해서만은 한치의 양보도 없으면서도 그 군대를 함부로 휘둘러 피를 일으키지는 않는 등,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비난할 부분이 '하나도' 없는 이상적인 군주라 할 수 있다.
언제나 온후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인자한 모습을 보였지만 평생 단 두 번 화를 내었는데 한 번은 두 자식이 연이어 죽었을 때,[29] 또 한 번은 이필제가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할 줄을 모르고 함부로 청나라를 쳐 전쟁을 하자는 망발을 일삼을 때였으니 신하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주상전하께서 화를 내신다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날이었으니, 애민정신이 형체를 이룬 것 같은 주상이다. 그래서 열성조 시절에 비하면 권력은 작으나 그 누구보다도 권위가 강한, 확고부동한 조선의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다. 물론 귀남 본인은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주변의 칭송은 그저 아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귀남을 직접 보는 대다수의 신료들, 특히 조선을 멸망 위기로 몰아간 세도정치 시기를 기억하는 나이 많은 대신들은 이 혼란한 시대에 열성조의 보우로 금세에 임한 성군이라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
굳이 흠을 찾자면 석유라는 불붙기 쉬운 폭발물로 작동하는 자동차라는 기물을 타고 시속 40km로 한강대교를 폭주했던 것[30], 그리고 군밤굽기가 취미라 자연히 주전부리를 즐겨한 탓에 말년에 살이 붙었다는 것 정도가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는 과거 조선 왕조의 조상 국왕들이나 타국의 역사의 사례를 둘러봐도 큰 흠이라고 할 수는 없는 애교에 가까운 트집이고, 그저 신하들이 왕의 건강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게 만든 정도다.
5. 기타
- 첫 선거가 아직 군대에 있던 시절 제2대 대통령 선거였는데, 저의 주소가 지금 어떻게 되는지 몰라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적었더니 무효표가 되었고, 그 다음 제3대 대통령 선거 때는 제대하여 확실히 주소지를 서울에 옮겨놓고서 제대로 투표권을 행사해 보려 했으나 하필 뽑으려던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선거 10일 전 작고하여 투표를 하지 못했다.
- 시골 태생이지만 성인이 된 이후 쭉 사대문안에서 삶을 영위해 왔기에 사실상 서울 사람으로 살아왔다. 이를테면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는 뉴스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 것이 전부인 반면, 서울토박이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덕에 서울에서 민담처럼 전해져 내려온 구한말 원세개의 행적에 대해 나름 들은 풍월이 있다.
- 작품 묘사상으로 현재 귀남의 용모는 '순박하게 생긴 난쟁이'다. 원 역사의 고종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 정작 표지에는 너무 훈훈한 중년 미남으로 나왔다.
- 전생에서는 소학교를 겨우 나온 노인이었으나 세자와 국왕으로 살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며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추었다. 수재 축에 못 드는 것은 확실하나, 사서삼경 등 다양한 경전 구절을 인용하여 나름대로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도 있고, 언문은 물론 한문도 읽고 쓰는 게 가능하고, 만년에는 꼬부랑 글자(아마도 영어)[31]도 어느 정도 읽게 되었다는 것을 보면 주변인들이 워낙 뛰어난 수재라서 그렇지 나름대로 왕으로서 갖출 학식은 갖춘 셈이다.
- 서예에 나름대로 조예가 있었던 원 역사의 고종과 달리 행서를 써도 초서가 나오는 악필이다. 오죽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이항로의 제자인 유인석이 과거에 급제하자 귀남이 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탕금을 내려서 이항로가 원하던 강당을 지어주겠다고 하였다. 이 때 귀남이 사액, 즉 현판 글씨를 직접 써주겠다고 하자 이항로의 다른 제자인 최익현이 '어필의 자유분방함'을 알아서 만류할 정도였다. 조선에서 국왕이 사액하는 건 소수서원을 보면 알 수 있듯 매우 대단한 영광인데도 이를 말릴 정도로 필체가 엉망이란 의미다. 후에 파킨슨병에 걸려서 필체 알아보기 힘들어진 김옥균의 필체를 같은 악필이라고 쉽게 읽은 걸 보면 어느 정도의 악필인지 짐작가능할 듯. 그럼에도 대군들이 자기 아들손자 대에서 벌어질 왕위 싸움을 걱정하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왕실을 폐하고 국명을 바꾸라며 그 자유분방한 어필로 '大韓民國' 4문자를 남겨 왕실 대대로 간수하게 시켰다.
- 동명이인의 독립운동가가 존재한다.#
- 최종적으로 1863년에서 1913년까지 총 50년간 재위하였다. 52년간 재위한 영조 바로 다음으로 매우 오래 재위한 국왕이 된 셈이다.
- 군밤 세계에 조지원과 김유진이 환생했다는 크로스오버 팬픽#에서는 1905년 8월 29일에 양위했고 1927년 10월에 사망했다.[32] 조지원과 김유진이 트립러라는 건 알아보지 못했고 단순히 인재를 아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게 되었다며 조지원을 공안에, 김유진을 사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시켰으며, 죽기 전 국토 대사업에 대한 유서를 남겨두어 대공황 수습을 위한 뉴딜 정책에 잘 사용했다. 특유의 성격으로 그 조지원을 갱생(!)시켰으며,[33] 김유진도 김귀남에게는 매우 순하고 일본 여행 때 김귀남에게 군밤을 선물로 받자 감동하거나, 패튼보다 막나가는 성격인 이원철[34]도 김귀남이 성군이라며 나름 존경하는 모습을 보인다.[35] 죽고 나서는 검머대의 김유진처럼 군밤장수 김귀남으로 다시 환생했지만, 김귀남이 바꾼 역사 덕분에 가족들도 무사하고 군밤 장사도 훨씬 잘 되어서 만족하며 살고 있다. 다만 신의 존재는 여전히 믿지 않는다고.
- 팬덤에서는 만약 한국 주요 대체역사물 주인공들을 한 세계에 모아둔 어벤저스 세계관을 만들 경우 무조건 김귀남이 조선 왕 또는 상왕 포지션이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주인공들을 전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김귀남의 선의빔뿐이라고...[36]
[1] 사망한 것이 아니라 몸이 뒤바뀐 시점.[2] 자세한 연도는 등장하지 않지만, 묘사상으로 만국연합의 1차 핵실험이 성공하고 그리고 본인보다 1살 많은 김옥균보다 몇 개월 빨리 죽었다. 대략 1930년대 초반에 붕어한 것으로 보이며 본래 생애의 출생년인 1934년에 붕어했을 수 있다.[3] 아명.[4] 초명. 세자 시절 사용했다.[5] 이 때는 투표권만 있었고, 모든 여성에게 피선거권까지 완전한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905년 핀란드가 최초다.[6] 실제로 경양대군은 이를 우려해서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귀남의 해답은 그렇게까지 가면 왕실을 해체하고 대한민국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한반도 반만년 동안 여러 국가를 거쳐 내려온 군주제조차 혁파한다는 발상은 경양대군과 다른 대군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신하들이었다면 틀림없이 머리가 깨져라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며 바닥에 머리를 내려찍었을 것이고.[7] 《18. 갔다 오지 않은 자 말을 말라(2)》에 수록된 에피소드. 이 때의 귀남의 심리묘사가 아주 소름이 돋는데, 6·25로 인해 부모님과 형제들을 잃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추위, 굶주림, 빨치산의 위협에 구르고 고생한 경험과 자신의 바로 앞에서 지뢰가 폭발해 앞에 있던 우마차가 오체분시되는 것을 보면서 전쟁의 무서움과 잔혹함을 직접 체험한 귀남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전쟁을 외치는 것에 머리에 피가 제대로 오르는 묘사가 압권이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그렇게 쌓이고 쌓인 서러움이) 옛날 눈 앞에서 우마차 한 대와 함께 터졌던 대전차지뢰처럼 터져 나왔다라고 할 정도.[8] 단 한 번의 실수로 평생을 비난받으며 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9] 그렇지만 전쟁이라면 극구 싫어하는 귀남옹의 성향을 감안하면 이게 단순한 과장으로는 안 들린다.[10] 고수전쟁에서는 100만에 달하는 군대가 침공해서 30만에 달하는 대군이 평양까지 몰려왔고, 나당전쟁에서는 현 휴전선 인근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대몽 항쟁 당시엔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간 사이 본토는 몽골군에게 유린당했으며(몽골군이 경주까지 내려와서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웠다.), 홍건적이 쓸고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찾아온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의 규모와 피해는 임진왜란에 준할 정도였으며, 임진왜란은 조선 몰락의 시발점이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11] 일산그라드 이전에 70년대 건설한 서울 아파트들에는 헬기 착륙 장소와 총구가 있고 도로에는 유사시 붕괴시켜 대전차방호벽을 만들 수 있는 장소들이 있다. 도로 배치도 이를 어느 정도 고려해서 만든 곳이 존재한다.[12] 웰즈는 어떻게 이런 생생한 묘사를 떠올렸는지 의아해 하여 전보로 물어보았고 귀남은 이에 "나는 보았소."라는 단 한마디로 응답했다.[13] 저렇게 만든 원흉이던 학생 단체 대표는 애초에도 실력은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고시에 합격할 실력이 없으면 조직 자체가 와해될 판이라 필사적으로 공부해서 별 영향을 안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14] 지금의 초등학교[15] 여기에 더해, 서울에서 전해 내려오던 원세개의 일화를 몇 마디 주워들은 바 있다고 한다. 즉 귀남옹이 아는 당대 인물 중 가장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원세개. 이외에도 이등박문을 안다면 한국인으로서 이등박문의 최후도 당연히 알 것이기에 안중근 의사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을 것이다.[16] 이 율란의 경우엔 질화로 쓰기 어려운 여름철에 주로 즐긴다고 한다. 율란 제조법 특성상 수라간에서 만들어야 하지만 왕이 부엌에서 불 때며 굽는 게 가당치도 않으니 율란만큼은 귀남의 지시를 따라서 나인들이 조리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만든다. 숙수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 나중엔 어제군밤 비슷하게 맛있게 나온다고.[17] 이 때문에 귀남과 효자군밤 사업파트너 관계였던 만덕은 귀남이 궁궐로 입궁한 이후에는 손님이 줄어서 고생이였다고 한다.[18] 작중에서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갖가지 군것질거리들과의 처절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결과물'이라고 묘사되는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귀남이 굽는 군밤은 설탕과 합성감미료를 잔뜩 집어넣는 21세기의 여러 간식들과 비교해서도 그 자리를 지켜낼 만큼의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는 의미다. 당연히 설탕은 국외에서 수입하는 매우 귀한 식재료에 합성감미료 따윈 유럽에서도 나오지도 않은 시대인 작중 배경인 구한말 기준으로는 무조건 통할 수 밖에 없다.[19] 왕이 직접 만들었다는 의미다.[20] 박규수가 귀남이 갓 구운 군밤을 먹고 조청보다도 맛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다.[21] 이 때문에 국제 외교계에서 조선의 국왕이 자신이 맞이한 타국의 외교관에게 군밤을 대접하는 것도 일종의 외교적 수사로 여겨지게 되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닌 상황에서 타국의 외교관을 불렀을 때 군밤을 대접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 나라의 행동이 아니꼽다'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귀남이야 이역만리 만리타향에 와서 고생한다며 군밤 먹고 힘내라고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지만.[22] 사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없었고 큰형과 어머니를 잃고 둘째형마저 없어졌으니 귀남은 징집된 시점에서 혼자 남은 몸이었다. 고향 마을이 통째로 소멸했다거나 그나마 있던 같은 본관 친척들마저 완전히 흩어졌다던가, 조부모까지 돌아가셨거나 하는 의미일 듯. 본관 문화가 약하게나마 남아있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23] 원 역사와 비교해도 이것 하나만으로도 고종의 정통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다. 원 역사에서는 일단 철종이 승하하자 익종의 아들로 입적을 시켜서 즉위한지라, 정식적으로 왕세자였던 기간 자체가 없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정식적으로 세자가 되어 즉위한 것이기 때문.[24] 국제(헌법) 제정에 끼워넣었다. 당연히 국왕의 왕권을 제약하는 국제라는 말에 온 나라의 선비가 한바탕 뒤집어지긴 했지만.[25] 방송에 익숙지 않아 시작한 줄도 모르고 "이보게, 이거 켜져 있는 거 맞는가?"하고 NG를 내버렸다. 말을 할 수가 없어 안양대군이 사관의 만년필을 뺏어 '시(是)' 자를 허겁지겁 적어 들어올려 겨우 시작을 알렸다.[26] 당연하겠지만 방송 스태프로 있던 관원들과 사관, 그리고 안양대군은 방송 중간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표정이 굳어져 가다 주상의 폭탄 발언 후엔 아예 얼굴이 하얘지다 못해 새파래질 지경이 되었다.[27] 이때 사관이 어찌나 심하게 놀랐는지 만년필을 떨구고 경악했다. 독자들 사이에서는 하도 자주 떨구다 보니 내구도가 남아날지(...)를 걱정하는 소리까지 나온다.[28] 시법에서 고(高)에 대한 특별한 문구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으뜸이라는 의미를 담은 시호로 다른 시호에 비해서 시호를 받은 왕을 높이는 표현이다. 베트남과 한국사에서 고종이라는 이름을 받은 왕의 치세가 영 애매했다는 것이 예외일 정도. 즉, 이 작품에서는 고종(김귀남)은 올바른 평가를 받은 시호를 얻은 셈이 된다.[29] 본인도 가슴이 찢어질 듯 슬퍼했지만 이런 팔자였나 보다 하면서 빠르게 마음을 추스리며 마음이 무너지려는 아내를 위로하였고, 자신들 같은 슬픔을 겪는 이들이 더 없게 하자며 서양 의학을 적극 도입했다. 애초에 화를 낸 이유도 첫 번째 아이가 죽었을 때는 민승호가 대원군이 서양 무당(=양의)을 데려와서 아이가 죽은 것이란 식으로 헛소문을 퍼뜨려(실제로는 아이가 위독한 걸 본 귀남 본인이 명을 내려 신하들이 '작은 파리'로 달려가 수소문해 양의를 불러온 것이다.) 자식 잃은 동생(민자영)의 마음에 비수를 박는 패륜을 저질렀던 탓에 화를 낸 것이고 두 번째 아이가 죽었을 때는 어의가 첫 번째 아이가 골든타임을 놓쳐 죽은 걸 봤음에도 반면교사삼아 양의학을 배우지 않아 또 골든타임을 놓쳐 여섯 달 된 딸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다. 두 번의 불호령이 떨어진 후에야 세 번째엔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 생각한 어의들이 부랴부랴 양의학을 공부하여 세 번째 아이, 그러니까 세자 이척부터는 무사히 자랄 수 있었다.[30] 현대에는 물론 느려보이지만, 말을 최고 속도로 몰아도 40 언저리였으니, 19세기 말에 이 정도면 굉장한 속도이다. 다만 이것도 귀남이 전생에 트럭 하나 가지고 싶었던 추억으로 새로 만들어진 차를 몰아본 것 뿐이고, 그 후 차를 몰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없다. 나중에 아들이 전차랑 부딪혀서 교통사고를 낸 적은 있지만.[31] 작중 묘사에서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등 유럽의 라틴계 문자를 꼬부랑 글자라고 부른다.[32] 1905년 을사조약이 일어난 해와 같은 해라고 명시된다. 다만 을사조약은 11월 17일이고 8월 29일은 1910년 경술국치이다.[33] 1905년에 트립했을 때 이미 조선이 멀쩡한 상태라 조지원이 폭주할 근원 자체가 없어지기도 했고, 처음에는 정치에 입문해 총리가 되려 했으나 막상 김귀남의 군밤과 선의빔(...)에 맞자 갱생해서 공안으로 나라에 보탬이 된 것에 만족하며 살다 은퇴했다.[34] 폭종의 주인공 이형의 21세기 이름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 이쪽은 빙환트는 아니다.[35] 전차 사용법에 대해 의견이 갈려서 비판하긴 했지만(김귀남은 보병의 옆에 싸우는 토치카로 쓰고 싶어했고 이원철은 중기병으로 쓰고 싶어했다) 이는 김귀남이 겪은 6.25 전쟁 말기 보병의 특성상 전차를 그런 식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던 것에서 기인한다. 1차대전 서부전선 참호전을 방불케 하는 6.25 전쟁 말기 고지전의 반복 속에서 전차는 1차대전 당시 전차와 비슷한 보병 지원이나 자주포 대용이 주 역할이었기 때문.[36] 이는 김귀남이 다른 빙환트 주인공들과 달리 6.25 전쟁에 참전했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채 시작해서 나타난 정신적인 원숙함의 차이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인권 없던 시대로 빙환트해 인간성이 망가진 '젊은' 주인공들과 달리, 86세까지 살면서 전근대나 다름없던 20세기 초의 시골 농촌부터 태평양 전쟁, 6.25 전쟁, 산업화, 민주화, 21세기 대한민국 도시까지 근현대사의 모든 격동을 겪으며 끝내 살아남았던 김귀남의 인생경험은 21세기에서 전생한 젊은 주인공들과 급이 다를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웬만한 또라이 주인공들도 김귀남에게는 자연히 숙이게 되는 것. 이는 빙환트한 다른 대체역사물 주인공과 비교해도 특출난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