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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1 13:18:12

마크 트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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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성공회 조선교구장'''
파일:조마가 사제.jpg
출생 1862년 3월 28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망 1930년 11월 6일 (항년 70세)
일본 효고현 고베시 고베항
재임기간 제3대 조선교구장
1911년 10월 28일[1] ~ 1930년 11월 6일[2]
제2대 조선성공회신학원장
1925년 ~ 19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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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뉴 컬리지
종교 성공회
<colbgcolor=#871B4D><colcolor=#ffffff> 부제서품 1887년
노리치대성당
사제서품 1888년
주교서품 1911년 7월 25일
런던 성 바울로 대성당
랜들 토머스 데이비드슨 대주교 주례
}}}}}}}}}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선교의 꿈을 품고 한국에 오다2.3. 주교가 되다2.4. 교구장으로서의 업적
2.4.1. 교구의 헌장과 법규를 제정하다2.4.2. 성 미카엘 신학원 설립
2.4.2.1. 신학원 설립의 필요성2.4.2.2. 신학원 설립
2.4.3. 서울대성당을 건축하다
2.5. 사망
3. 여담4. 참고자료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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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제품을 받은 세 분이여, 어디로 가십니까? 화려하게 지은 성당 안으로 가십니까? 세 분이 가실 곳은 어디입니까?
인류애에 주리고, 진리에 목마르고 불합리에 상처를 받고, 신음 고통하며 갈 바를 모르고, 할 바를 몰라서 헤매이는 저 수라장이 당신들이 가실 곳이며 주무실 방이고 거하실 집이 아닙니까?"
1929년 9월, 사제신품식 강론 중에서
마크 네이피어 트롤로프(조마가, The Rt. Reverend Mark Napier Trollope)[3]
제3대 조선교구장이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카엘 신학교 설립자.

2. 생애

2.1. 출생

1862년 3월 28일, 영국 웨스트민스터에서 측량사이자 건축가였던 찰스 브라운 트롤로프(Charles Brown Trollope)와 엘리자베스 네이피어(Elizabeth Napier)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4]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887년에 부제품을, 1888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2.2. 선교의 꿈을 품고 한국에 오다

제가 가진 것은 건강과 제가 받은 교육이며, 하느님이 선택해주신 대로 하느님의 사역을 위해 쓰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제가 어머님께 청하고자 하는 것은 제가 그곳에 갈 수 있도록, 주님께 갈 수 있도록 잊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나볼 수 없을는지 모릅니다.
1890년 당시 사제였던 트롤로프가 조선선교를 결심하며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889년에 성공회 해군 종군사제였던 찰스 존 코프가 신설된 조선교구의 교구장 주교로 서품받은 후, 첫 번째로 존 코프 주교와 함께 조선 선교에 동참했다.[5]

2.3. 주교가 되다

파일:조마가 주교.jpg
1926년 7월 발행된 《모닝캄(Morning Calm)》 제188호에 실린 마크 트롤로프 주교
트롤로프는 이후 1902년 휴가차 영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후 관할사제(vicar)로서 10여년간 영국에서 사목한다.

그러던 와중 1911년 5월 2일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랜들 토머스 데이비드슨(Randall Thomas Davidson) 대주교는 아서 터너 주교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조선교구장에 트롤로프를 임명했다. 트롤로프는 조선교구장 임명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본인은 이 부르심에 따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또한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캔터베리 대주교의 명령 때문입니다.
Trollope, "Letter from the Bishop-Designate," MC, Vol. 22, No. 129 (Jul. 1911), pp. 78-79.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 온것이 아니라, 단지 캔터베리 대주교에 순명하여 주교품을 받고 등 떠밀리듯이 조선에 온 것이다.

2.4. 교구장으로서의 업적

2.4.1. 교구의 헌장과 법규를 제정하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제도적 교회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1916년 5월 9일 장림성당(서울대성당의 전신)에 의회를 소집해 교구 헌장을 제정하였다. 의회는 5월 12일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헌장과 법규'를 채택하였다.[6]

헌장 중에 헌장의 기본성격과 대한성공회의 교리의 근본을 밝히는 '주교의 기본적 선언(Bishop's Fundamental Declaration)'에서 트롤로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조선성공회는 그의 근원이 되는 캔터베리관구 및 이와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관구와 상통하며, 일본성공회 및 중화성공회와 연합하여 마침내 모든 신자가 어떠한 구별이 없이 교회의 분열 이전과 같이 한 목자 아래 한 떼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도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3개의 신경에 포함된 그리스도의 교리를 굳게 지키며, 가톨릭교회[7]의 해석에 따라 믿음과 도덕의 궁극적인 표준으로 신구약성서를 택하고, 성서외경(Apocrypha)을 '생활과 행실의 교훈'으로 마땅히 읽도록 하며, 누구든지 구원을 얻기 위해 2가지의 대성사[8]와 동서성공회가 채택하고 있는 5가지의 성사를 굳게 지킨다.
●위의 예식을 공도문이 정한 금례와 서식을 따라 사용해야 한다.[9]
대한성공회 헌장과 법규(1916) - 주교의 기본적 선언(Bishop's Fundamental Declaration)
이와 더불어 헌장은 교구의 법령으로서 성격을 가져, 3성직의 승임절차, 주교의 권위와 그 근거, 고죄와 죄의 사면, 혼배규칙 및 영성체 규정 등 교구 전반의 예의와 법식을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아래와 같이 이 헌장은 법규에 관해서 교구의회가 어떠한 결의를 했더라도 주교가 이를 기각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법규의 공포 여부도 주교가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교구의회는 교회치리의 방법을 연구, 협의하기 위해 가급적 매년 개최한다.
●주교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헌장과 법규의 제정과 공포의 최고권을 가진다.
●사제들과의 협의기구인 교구의회 외에 교구-교무구-교회에 각각 논의구조로서의 협의회를 구성한다.
대한성공회 헌장과 법규(1916) - 주교의 기본적 선언(Bishop's Fundamental Declaration)
결국 이 헌장이 규정하려는 기본과제가 교리의 선언과 준수를 통한 '일치'의 도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 성공회가 설립되었을 당초에는 조선 13도를 한 주교 관할하에 있는 한 교구로 삼았으나, 당시의 기대하는 바는 성공회의 발전과 확장이 충실함을 따라서 이를 여러 교구로 나누고 이 나누인 교구들이 합하여 한 관구를 이루고 그 주교들 중에 1인이 대주교가 되기를 바람에 있었나니라.
朝鮮聖公會法規[10]p.24-25
위와 같이 트롤로프가 제도적 교회를 강조한 이유는 일치의 도모와 함께 관구로서 승격하고자 하는 즉, 독립된 교회가 되고자 하는 까닭도 함께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4.2. 성 미카엘 신학원 설립

2.4.2.1. 신학원 설립의 필요성
이미 한인 전도사와 교사의 양성은 터너의 재임시절에 실시한 적이 있어 1908년 8명의 교사를 임명했으나, 그 후 전도사 양성을 위한 임시 교육만 실시되고 있었다. 1912년 SPG 보고서에 트롤로프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성과 준비과정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한국 주교의 관심사는 가장 빠른 기간 안에 한국인 사목자를 양성하는 일에 모아 지고 있다. 한국에 있는 두 명의 사제가 사목일보다는 충분한 어학 수련으로, 가까운 장래에 건립되어 학생들을 모아들일 기숙사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신앙심이 두터운 한국의 젊은 청년들을 뽑아 훈련을 시켜 전도사를 만들고 정해진 과정에 따라 한국 교회의 부제와 사제를 만드는 책임을 질 수 있게 되었다.
"From the SPG Annual Report", MC, Vol. 24, No. 135(Jan. 1913), p. 3.
트롤로프는 선교부로부터 급여를 받으면서 외국 선교사들을 도와 선교일선에 참여하고 있는 전도사 가운데 몇몇을 선발해서 성직 서품을 위한 교육을 준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 20명의 사제가 한국인 교회를 위해 필요하나, 선교사의 충원이 여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선교금의 조달도 원활하지 않아서, 한인 사제의 양성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1914년 3월에 발표한 '주교통신부록' 의 제1항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지금의 조선성공회에 제일 긴급한 일은 본국인을 교육하여 부제와 사제신품을 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론 어느 나라든지 외국인 신품자들이 성교를 전파하여 성사를 맡아 다스리되 차차 본국인을 양성하여 신품을 받게 하고 또한 성교회가 오래되고 건실하여 본국인 성직자 중에서 주교를 책정하게 되면 그 성교회는 온전히 성립된 것이며 천하의 모든 성공회와 같이 한 반열에 임했던 것이니라.
主教通信附錄[11](1914)
위에서 봤듯이 트롤로프는 한인 주교의 선출까지도 내다보면서, 한인 주교가 선출될 때야말로, 완전히 독립된 교회가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2.4.2.2. 신학원 설립
트롤로프는 상당한 토의끝에 학교로서는 부적합하지만 항구적인 장소를 물색한다는 전제하에 강화성당 옛 사제관을 개조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다. 학교 운영 자금은 범성공회원 모금(Pan-Anglican Grant)에서 지원한 3000파운드로 하고, SPCK가 연 50파운드씩 지원하기로 한것은 장학금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1914년 4월 30일 강화성당에서 트롤로프의 축복으로 신학교가 공식 출범하게 되었다.
파일:Anglican_ordination_1914.jpg
1914년 첫 한국인 성직 서품 당시 마크 트롤로프 주교[12]
이후 1914년 6월 7일 성 삼위일체 대축일에 김희준(金熙俊, 1869–1946) 마가와 구건조(具建祖, 1866–1932) 바나바에게 부제성직을 베풂으로써 첫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 신학교가 현재의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이다.

2.4.3. 서울대성당을 건축하다

대성당을 건축하려는 움직임은 전임 터너의 임기 때부터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고, 트롤로프 임기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초 £5000 정도로 예상 하고 있었던 예산이 £10,000로 늘어나고, 최소한 £3,000는 있어야 공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의견에 따라 트롤로프는 1912년 부터 전국적인 모금을 시작하여 다수의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공사는 1차대전으로 인해 1920년대로 미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트롤로프는 1920년 말, 임시 주교관을 팔아 대성당 예정지 주변 부지를 구입하여 확장하였고, 건축자금도 앵글로-가톨릭 의회(Anglo-Catholic congress)에서 £5000, 터너 기념 헌금에서 £5000를 받아 총 £10,000를 마련하였다.

대성당은 1922년 3월 착공해서 1922년 9월 24일 주일에 성대한 정초식을 치렀는데 조선성공회월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성에 건축하는 대성전 정초식은
...(중략)...
9월24일 상오 9시30분에 거행하였는데
...(중략)...
경향 각처에서 모든 신도들은 건축중인 성전에 가득히 찼으며
...(중략)...
정각이 되매 성전의 중앙에서 청아하게 흘러나오는 풍금소리를 따라 화창하게 화답하는 남녀찬양대의 노래로 모인 무리를 신비한 지경으로 인도할 때에 주교 네 분[13]이 일반 성직자와 더불어 성전의 남편문에서
...(중략)...
성당으로 들어오시니 본성 순행례는 장림성당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중략)...
이에 성전에 들어와 각각 자리를 정한 후에 주촛돌을 놓는 예식이 있을 때에 "천주 과연 이곳에 계시니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를 성시 절절마다 화답하여 불러 찬양하고 이에 세 주교가 각각 다른 방언(한국, 일본, 영국)으로 정초기도를 외우셨고, 그 다음에는 "천주의 성전은 반석위에 세운 것이로다"를 성시 절절마다 화답하여 불러 찬양하니이다.
朝鮮聖公會月報, No.59(1922. 11. 28), p.8-9
이날 정초식에는 경성부윤(오늘날의 서울시장), 각국 영사, 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이 참석했다.

1926년 5월 2일, 마침내 완공하여 국내외 교계 관계자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가졌다. 순종의 승하와 만주사변으로 인해 외부인사는 초대하지 않았다. 부족한 자금 때문에 1/3정도의 크기로 밖에 지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였을 것이다.

트롤로프는 대성당을 축성한 후 월보에서 대성당의 기능과 위상을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경성교인들이 주교의 허가대로 대성당을 사용할지라도 이 성당은 저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오 조선에 있는 온 성공회 교인의 공유인 大聖堂이니, 성공회교인은 누구든지 자유로이 이곳에서 예배할 수 있으며 또한 각 지방교회에서 매년 한 주일 봉헌전을 대성전 유지비로 드리기를 바라나이다.
...(중략)...
우리 육신의 생명이 심장운동에 매인 것 같이 온 교구의 활동력도 그 중심인 대성전에서 얻는 것이니이다.
...(중략)...
작은 성당에서 큰 성당의 모든 것을 모방하기 어려운 일이나 그러나 대성당은 모든 성당의 표준이니 다른 성당에서 형편대로 대성당 법을 준행하여 온 교구 안에 있는 각 지방성당의 예법이 일치케 할 것이다.
朝鮮聖公會報, No.100, p.2-3
이 기능과 위상은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는것 같다.

2.5. 사망

트롤로프는 조선선교참여 40주년, 주교서품 20주년을 맞는 1930년 람베스 회의와 앵글로-가톨릭 의회(Anglo-Catholic conference) 참석차 영국으로 출국하였다. 그리고는 귀국길에 올랐는데, 11월 6일 일본 고베항에 입항하는 중 타고있던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하는 사고 중 심장마비가 일어나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고베대성당으로 옮겨졌다가 시모노세키를 거쳐 11월 10일 도착하였으며, 11월 12일 헨리 존 드레이크(민재은, Henry John Drake) 총감사제의 집전으로 장례미사가 서울대성당에서 엄수됐다.[14] 당초 시신은 대성당 지하에 안장하려 했으나, 국내법 규정상 문제가 되는 바람에 영국총영사의 도움을 통해 11월 16일 성 세례자 요한 성당[15]에 안장되었다.

3. 여담

4. 참고자료

5. 둘러보기

파일:대한성공회 문양.svg 파일:조마가 사제.jpg 파일:영국 국기.svg
제3대 조선교구장
마크 네이피어 트롤로프 주교 각하
3rd Bishop of Korea
His Excellency Mark Napier Trollope
파일:조마가 사제.jpg
파일:대한성공회 문양.svg 역대 성공회 조선–한국교구장
제2대 아서 베레스포드 터너 주교 제3대 마크 네이피어 트롤로프 주교 제4대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파일:성공회대학교 UI.svg 역대 성공회대학교 총장
조선성공회신학원장
원장서리 헨리 존 드레이크 신부 제2대 마크 네이피어 트롤로프 주교 제3대 어니스트 아놀드 신부

[1] 서울 도착일[2] 19년 9일[3] 영어권 성씨인 Trollope는 /ˈtrɒləp/(트롤럽)에 가깝게 조음하나 대한성공회에서는 관용적으로 트롤로프로 표기한다.[4] 관련 자료 1, 관련 자료 2, 관련 자료 3.[5] 1890년 6월 24일[6] 이 의회는 대한성공회의 첫 의회(synod)로 기록된다. 터너대에 실시한 의회는 'synod'가 아닌 'conference'이다.[7] 여기서 말하는 가톨릭 교회는 '보편교회'를 뜻한다.[8] 성체성사와 성세성사[9] 여기에서 말하는 공도문은 1662년 영국 캔터베리와 요크 관구가 정한 것이다.(The Book of Common Prayer and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and Other Rites and Ceremonies of the Church according to the use of the Church of England, together with Psalter or Psalms of David, pointed as they are to be sung or said in Churches: and the Form and manner of making, ordaining and consecrating of Bishops, Priests and Deacons)[10] 조선성공회법규[11] 주교통신부록[12] 좌측으로부터 구건조 바나바 부제, 미야자와 구마조(宮澤九萬象) 부제, 마크 트롤로프 주교, 김희준 마가 부제이다.[13] 북중국교구장에서 은퇴한 찰스 페리 스콧(Charles Perry Scott) 주교, 일본 대판교구장 휴 제임스 포스(Hugh James Foss) 주교, 중국 산동교구장 토머스 아널드 스콧(Thomas Arnold Scott) 주교, 마크 트롤로프.[14] 11월 13일 영국 성 마태오 성당에서는 런던교구장이 참석한 가운데 트롤로프를 기념하는 장엄예식이 행해졌다.[15] 서울대성당 지하성전[16] 당시, 조선(1911년 이후 '경성')대목구장[17] 1926년, 개인자격 대주교 승품[18] 더 놀라운 점은 이 사실이 무려 <성공회신문>에 뮈텔 주교가 기고한 글로 인해 밝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당시에도 천주교와 성공회의 관계가 상호우호적이었음을 말해 주는 귀중한 사료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