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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20 16:19:36

제일라

파일:사일락 소말리아.jpg
사일락 대사원

1. 개요2. 역사
2.1. 전성기2.2. 근현대의 쇠퇴

1. 개요

소말리어 Saylac
아랍어 زيلع
영어 Zeila

소말릴란드 북서부의 항구 도시. 하르게이사에서 서북쪽으로 200km 떨어져 있고, 인구는 2만명이다. 서북쪽 지부티와의 국경과 불과 25km 떨어져 있으며, 그 수도인 지부티(도시)와도 40km 거리로 가깝다. 천연 부두 역할을 하는 모래 사구로 형성된 만 속에 자리한 제일라는 중세부터 근대까지 수아킨, 마사와와 함께 동북 아프리카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구도심은 5개의 성문을 지닌 성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9세기부터 제일라는 아달 왕국, 이파트 술탄국, 아달 술탄국 등 소말릴란드 일대를 지배했던 왕조들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16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으며, 이후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쳤다. 소말리아 내전 당시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고, 현재 복구 중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소말리아계 부족들 중 하나인 디르 가문에 속한다.

2. 역사

파일:제일라 소말리아 1.jpg
7세기에 지어져 '아프리카의 첫 모스크'라 불리는 알 키블라틴 모스크

중세의 유대인 학자 투델라의 벤자민은 구약 성경창세기 2장과 역대상 1장 등에 나오는 하윌라가 바로 이곳이라 추정하였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 나오는 아발리테스 (Αβαλίτες) 역시 이곳으로 추정된다. 소말리아 반도의 도시 국가들 중 하나였던 제일라는 7세기 초엽 메카 기득권층의 박해를 받은 초기 이슬람 공동체가 악숨 왕국으로 피신했을 당시 상륙한 곳이라 전해진다. 당대 세워졌다고 하는 알 키블라틴 모스크는 메디나예언자 모스크와 함께 전 세계의 이슬람 사원들 중 유일하게 키블라 (예배 방향)를 표시하는 미흐랍이 2개가 있는 경우이다. (무함마드가 본래 예배 방향을 예루살렘으로 삼았다가 메카의 카으바로 바꿨기 때문) 9세기의 지리가 알 야쿠비는 소말리아 북부 해안에 무슬림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제일라는 현지 아달 왕국의 수도라고 기록하였다. 1185년 제일라는 이파트 술탄국의 수도가 되어 더욱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2.1. 전성기

파일:아달 궁전 소말리아.jpg
아달 술탄국 시절 궁전

13세기 초엽 이븐 사이드는 제일라와 베르베라가 부유하고 큰 도시이며 주민들이 전부 무슬림이라 기록하였다. 14세기에 이르면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소말리아 해안은 '자일라 지방'으로 알려질 정도로 도시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당시 아달로도 불린 제일라는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 간의 중개 무역을 통해 번영하였다. 시장에서는 유향, 몰약, 노예, 금, 은, 낙타 등이 거래되었다. 또한 소말리인 외에도 아랍, 페르시아 상인들도 거주하였다. 그외에 도시는 오로모인 등 에티오피아 부족들에게 이슬람을 전파하는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집트 역사가 알 우마리는 아달 (자일라)에 대해 기록하며 여름과 겨울에 비가 와서 2모작이 가능한데, 해당 계절의 장마는 각각 현지어로 카람과 블리로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그 무렵부터 현재까지 제일라 주민들은 고대 소말리아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제일라가 소말리아 색채가 짙은 도시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4세기 중반 도시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주민들은 샤피이파 순니 이슬람을 따라는 소말리 인들이며, 번성하는 시장이 있고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아덴에서 배를 타고 나흘 만에 제일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흑인으로서 샤피이파에 속한다. 그들의 나라는 제일라에서 모가디슈까지 두 달 여정이나 되는 사막지대이다. 이들은 낙타와 양을 키우는데 이들이 키우는 양은 살집이 많아 잡으면 고기가 많이 나오기로 유명하다. 도시는 크고 굉장한 시장도 있지만 매우 지저분하고 악취가 풍긴다. 시장에서 생선을 많이 파는 데다가 거리에서 함부로 낙타를 마구 도살해서 피를 뿌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 시가지가 너무나 지저분해서 차라리 위험한 바닷가에서 잠을 자는 것을 택했다.

한편 에티오피아 정복에 나선 이파트 술탄국은 수도를 내륙의 셰와로 옮겼지만, 여전히 제일라가 대표 무역항이었다. 다만 에티오피아의 반격으로 이파트 술탄국은 해안으로 밀려났고, 1410년경 재차 패배하고 제일라로 후퇴한 이파트 최후의 술탄 사드 앗 딘 2세는 결사 항전에 나섰으나 전사하였고, 도시는 함락되었다. 예멘으로 피신했던 사드 앗 딘 2세의 아들 사브르 앗 딘은 5년 후 제일라로 돌아와 아달 술탄국을 세워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을 지속하였다.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그는 이파트 술탄국과 마찬가지로 1433년 내륙의 다카르로 천도하였다. 16세기 하라르로 천도한 아달 술탄국은 이맘 아흐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 가지의 지휘 하에 에티오피아와의 전면전에 나섰다.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았던 아흐마드는 제일라를 통해 대포를 수입하여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는 에티오피아와 맞섰다. 따라서 1517년과 1528년 포르투갈 군이 도시를 습격하였고, 이후 근처 유목민들도 습격하였다. 수륙 양면의 공격에 시달린 현지 지도자 가라드 라도는 아틀야 이븐 무함마드를 고용하여 도시를 두르는 견고한 성벽을 축조하였다. 16세기의 이탈리이 상인 루도비코 디 바르테마와 포르투갈인 탐험가 두아르테 바르보사에 의하면 제일라는 여전히 번영하였고, 온갖 종류의 가축을 기르며 대부부 석조인 주택들에는 테라스가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또한 만 건너편의 아덴과의 교류가 잦았다. 1630년대부터 제일라는 예멘 서부 모카의 지배자에 복속되었다. 그는 모카의 관료들 중 한 명에게 싼 값으로 제일라 항구를 빌려주었고, 관세를 수합을 맡겼다. 제일라의 아미르는 비록 그 권력이 도시에 국한되었지만 소수의 총병들과 대포로 현지 유목민과 해적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2.2. 근현대의 쇠퇴

파일:제일라 소말리아.jpg
19세기의 제일라

19세기 전반 무렵 제일라는 크게 쇠퇴해 있었고, 낮은 진흙 성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을에 불과 2천여 주민만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여전히 하라르와 셰와 지역의 외항이었지만 지부티의 타주라로의 새 교통로가 개척되며 중요성이 하락한 결과였다. 당시 제일라의 태수는 모하메드 엘 바르였는데, 모카와 호데이다의 오스만 총독이 후임으로 핫지 샤르마르케 알리 살리흐를 파견하자 불복하였다. 이에 후자는 50명의 소말리 화승총병과 2 문의 대포와 함께 제일라에 당도하여 공격하였고, 신무기에 당황한 모하메드 엘 바르는 자신의 세력과 도주하였다. 총독에 오른 샤르마르케는 현지 무역을 독점하여 제일라의 부흥에 나섰고, 1845년에는 화승총병들과 함께 소말리아 부족들이 내분을 일삼던 베르베라 점령에 나섰다. 그러자 후자의 종주국이자 샤르마르케와 경제적으로 대립하던 하라르의 아미르 아흐마드 3세 이븐 아부 바크르는 1852년 부족들을 화해시키고 저항에 나서게 하였다.

1855년 샤르마르케에 이어 현지 아파르인 관료 아부 바르크 파샤가 제일라의 총독이 되었는데, 2년 후 전자가 무력으로 태수에 복귀하였다. 다만 1861년 샤르마르케는 프랑스 영사를 죽이겠다가 협박했다가 축출되어다, 1874년에는 이집트의 이스마일 파샤가 오스만 조정의 승인 하에 마사와에 이어 제일라의 지배권을 얻었다. 이집트는 영국의 소말리아 반도 남부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다만 이집트의 지배력은 미약하였고, 1876년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에는 더욱 약화되었다. 1885년 하라르의 이집트 주둔군이 철수되었고, 이후 지부티의 프랑스와 남쪽의 영국이 아덴 만의 지배권을 두고 제일라를 노렸다. 협상 끝에 프랑스가 양보하며 1888년 2월 영국이 제일라를 포함한 소말릴란드를 접수하였다. 하지만 수심이 얕아 서양의 큰 선박들이 입항할 수 없었던 제일라는 수심이 깊었던 지부티에 밀려 작은 아랍 선박들만 왕래하였. 이러한 우위는 아디스아바바-지부티 철도 건설로 확실시되었다. 당시 제일라는 아덴에서 쌀, 대추야자, 비단, 면화 등을 수입하고 에티오피아산 커피, 가죽, 상아, 가축, 버터, 진주 등을 수출하였다.

세계 2차 대전 중인 1940년 8월 제일라는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 군에게 점령되었다가 1941년 초엽 영국군에게 탈환되었다. 소말리아의 독립 후 제일라는 아달 지역의 주도가 되었다. 도시의 운명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1990년대의 소말리아 내전이었다. 그 결과 시내의 유서깊은 건물들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도시를 떠났다. 다만 21세기 들어 소말릴란드가 안정을 회복하자 제일라 역시 어업과 상업을 통해 조금씩 회복하고 있으며, 해외 원조를 통해 일부 유적들도 복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