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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해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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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海均
1953년 4월 1일[1] ~ ([age(1953-04-01)]세)

1. 개요2. 생애3.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활약4. 치료비 논란5. 기타6. 관련 기사

1. 개요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구출된 前 삼호주얼리호의 선장, 前 대한민국 해군 충무공리더십센터 군무원(군무3급). 본관은 충주(忠州)[2]로, 2011년 당시에는 58세였다. 원래는 무종교였으나, 2011년 천주교에 귀의하여, 세례명바오로이다.

2. 생애

1953년 4월 1일 경상남도 밀양군(現 밀양시) 무안면 마흘리 백안마을의 충주 석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석록식(2011년 당시 83세)와 어머니 손양자(2011년 당시 79세)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남동생 석영웅(51, 회사원, 경남 창원시 거주), 석재성(48, 회사원, 울산광역시 거주)등이 알려져 있다. 아내는 최진희 씨이며, 슬하에 두 아들이 있다.

가난 때문에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경상남도 부산시(現 부산광역시)에서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하고 싶었으나 이 역시 가정 형편 때문에 여의치 않아 1971년 8월 해군 부사관후보생 12기로 자원입대했다.

하사관 월급을 모아 1973년, 부모님에게 양옥을 지어드리고, 흑백 텔레비전도 장만해드렸다고 한다. 아우인 석영웅, 석재성도 해군 출신이다.

제대한 뒤 1976년 연안 화물선을 타면서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 5월 한국해양수산연수원(해기연수원)에 갑판원으로 정식 선원 등록을 하고 급유선과 화물선 등을 탔다.

5년간 선원생활을 하여 주경야독을 한 석해균 씨는 1982년 8월 3급 항해사 면허를 취득했다. 그 뒤로도 항해와 공부를 병행하여 1984년 2급 항해사, 1988년에는 1급 항해사 자격을 잇달아 취득했다.

1995년 6월 선장으로 진급했다. 대우해운 소속 2만 t급 오션페랄호를 시작으로 대형 민간 상선을 19척이나 이끌었다.

그리고 이러던 중 2011년 후술할 삼호주얼리호 피랍이 있었는데, 다만 원래는 삼호주얼리호가 아니라, 같은 삼호해운 소속인 삼호프리덤호의 선장이었다. 그러다 사건 한 달 전에 삼호프리덤호를 타고 귀환한 뒤, 회사 측의 요청으로 휴식시간도 가지지 않고 곧바로 주얼리호를 타고 출항했다고 한다.

하여간 죽다 살아난 이후 해군 충무공리더십센터에서 군무원 3급으로 근무하며 장병과 시민들의 안보교육을 했다. 2020년 5월 29일 8년간의 교관 생활을 마치고 67세 나이로 퇴직하였다. 퇴직하는 날 해군참모총장과의 오찬, 최영함의 고별강연, 제267기 부사관후보생 수료 및 임관식에 참여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새누리당 소속의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실제로 임용된 지 얼마 안 돼서 해군 안에서 퇴직(?) 인사명령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출마를 하지는 않았으며 영입은 된 것이 맞는데 공천을 받지 못해서 출마가 무산되었다고 한다.

3.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활약

석해균 선장은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여러가지로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1월 15일 삼호주얼리호에 올라탄 해적들이 소말리아로 배를 몰고 갈 것을 명령했을 때 석해균 선장은 일부러 배를 지그재그로 기동하거나 엔진오일에 물을 타 엔진을 정지시키는 등 시간을 끌었다. 이 때문에 해적들로부터 폭행당하는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1차 구출작전 시도 시점에서 소말리아 연안으로부터 700해리 거리에 있었던 삼호주얼리호를 다시 북쪽 오만을 향해 기동시켜 2차 구출작전 시도 시점에서는 소말리아로구터 900해리 떨어진 곳까지 멀어졌다. 해적들이 원하는대로 소말리아까지 내려갔을 경우와 비교하면 우리 장병들이 훨씬 유리한 환경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17일에는 해적들의 명령에 의해 영어로 해운사 측과 통신하는 과정에서 해적들이 한국어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 통상 교신을 하는 척 하면서 상선통신망으로 해군 최영함에 해적들의 숫자와 무장상태, 동선 등의 정보를 낱낱이 알려주었다. 특히 해적들이 링스 헬기의 위협사격에 지쳐있다는 것과 새벽에는 경계가 느슨해진다는 약점까지 알려서 작전 수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석 선장은 해적들 몰래 해군에 이메일을 보내기 위해 굉장히 대담한 방법을 쓰기도 했는데, 심심하다며 컴퓨터 게임을 좀 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해적들이 감시를 했으나, 하필 그 게임이라는 게 바둑 게임이다보니 감시하던 해적들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했는지 자리를 비워버렸다고 한다. 석 선장의 말에 의하면 "바둑은 규칙을 모르고 보면 더럽게 재미가 없기 때문에 일부러 바둑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의도가 적중한 것. 석 선장은 감시가 사라진 틈을 타 이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

21일 이루어진 구출 과정 중에 6발의 총상을 입었다. 그중 한 발은 해군의 유탄으로 밝혀졌다.[3] 오만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한국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한때 의식불명의 중태라 국민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다행히도 3월에 의식을 되찾으며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다.



교전 당시 왼손으로 가슴을 감싸고 있었는데, 정말 불행 중 다행으로 심장을 향하던 총알이 왼팔뼈에 부딪히면서 관통되지 않았다. 아직도 왼손에 뼈와 총알 파편이 남아있고 신경계가 끊겨 감각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4. 치료비 논란

2015년 석해균 선장의 수술을 집도했던 아주대학교병원을 운영하는 학교법인 대우학원에 따르면 이사회는 지난달 5일 회의를 열어 회수하지 못한 미수금 2억 4,000여만 원을 결손(대손상각)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병원비를 내야 할 삼호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 자산이 묶이면서 병원비를 모두 정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호석 아주대법인 이사장은 "대손금액 중 석해균 선장 치료비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부에서 조치를 해줄 수 없다면 추후 다른 국가적인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면서 "의료원 차원에서 문제제기 정도는 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다.

또한 에어 앰뷸런스 임대 후 비용지급이 늦어지자 해당 회사에서 주치의 이국종 교수에게 결제를 독촉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2011년 1월 28일 오만에 급파된 아주대병원 이국종 교수는 석 선장의 상태를 확인한 후 "오만에 더 놔두면 사망한다"고 판단, 에어 앰뷸런스를 이용해 한국으로 호송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또한 당시 석 선장의 후송에 이용하려는 에어 앰뷸런스는 국제 의료지원 기업 인터내셔널SOS사가 운영하는 스위스제로, 전세비용이 약 40만 달러[4]에 달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국내 정부 측과 연락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자 이 교수는 "내 돈이라도 낼 테니 앰뷸런스를 꼭 임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자비를 부담할 상황까지 갔었다. 다행스럽게도 대출은 이 교수의 명의로 하되 외교부가 보증을 서는 것으로 상황은 정리됐고, 이야기가 나온 바로 다음 날 에어 엠뷸런스를 이용해 석 선장을 한국으로 호송할 수 있었다.

이후 대출액은 그 누구도 아닌 한국선주협회에서 지불한 것으로 아주대병원 측에서 밝혔고, 이명박 대통령이 "석해균 선장이 완쾌되어야 작전이 끝난 것"이라고 말할 만큼 석 선장의 안위는 중대한 사안이었고, 국민적 관심도 지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대통령의 발언과 달리 정부의 대처는 정치홍보라고 할 만큼 안일하기 짝이 없었는데, 모든 상황을 이명박 대통령이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주치의 1명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에어 엠뷸런스 대출비용의 보증을 외교부가 서긴 했지만 그건 정권과 별개의 이야기고, 한국에 도착한 뒤의 치료비도 아주대병원이 전액을 떠안은 것. 아덴만의 영웅이라고 칭송하며 동전하나 던져주지 않은 것이다.[5]

3월 22일, 59세 생일을 맞아 병원에서 조촐하게 생일 잔치를 열었다. #

6월 16일, 아덴만 여명 작전의 최영함의 함장 조영주 대령이 회복 중인 석해균 선장의 병실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2011년 7월 1일, 국제해사기구에서 주는 용감한 선원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시상식은 2011년 11월.

2011년 11월 4일, 퇴원하였다.#

2017년 12월 26일 치료비를 정부에서 대납하기로 의결하였다. 2018년 초에 집행됨.

5. 기타

2014년 4월 17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배가 침몰한 것과 이준석 선장이 가장 먼저 탈출한 것에 대해 "솔직히 이해할 수 없다. 업무에 태만했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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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아덴만 작전 4주년을 앞두고 당시 소말리아 해적 마호메드 아라이에게 면회를 갔다. 간단한 대화를 나눈 뒤 기술을 배우라고 조언을 해주며 당시 자신에게 총을 들이댔었던 그를 직접 포옹하며 용서하는 대인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아덴만 여명 작전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겨 배를 못 타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바다 근처에만 가도 그날이 떠올라 두려울 정도였고, 지금은 많이 극복되었지만 아직도 배는 타지 못한다고 진해기지사령부 내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치료 후 건강 자체는 회복하였지만 아직까지 후유증이 남아 있고 때로는 이게 심해져서 긴급 후송된 적도 있다. 워낙 부상이 심했었기 때문에 후유증 치료도 이국종 교수가 계속 맡고 있다고 한다.

6. 관련 기사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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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연합뉴스
라포르시안


[1] 음력 2월 18일.[2] #[3] 물론 좁은 선상의 치열한 교전 상황에서 정확하게 인질을 피해 쏘는 것은 극도로 훈련받은 특수부대라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해군들의 실책보단 진압과정에서의 사고에 가깝다.[4] 약 4억 4,800만 원[5] 후술하겠지만, 결국에는 문재인 정부에서 치료비를 대납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