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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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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5262ac> 이태영 李兌榮 | Lee Tae-young | |
출생 | 1914년 8월 10일 |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 | |
사망 | 1998년 12월 17일 (향년 84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 |
본관 | 광주 이씨 (廣州 李氏) |
학력 | 평양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1]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 박사) 이화여자대학교 (법학 / 명예 박사) |
경력 | 가사심판법 기초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장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기초발기위원 국제법률구조연합회 부회장 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 부회장 국제법률가위원회 위원 통일원 고문 |
가족 | 남편 정일형, 아들 정대철 외 3녀[2], 손자 정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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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 12월 13일 KBS1 <수요기획> 방영분.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독립운동, 여성운동, 민주화운동을 한 사회운동가이다.[3]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하여 가정 내의 법적 분쟁 해결에 힘썼으며, 가정법원 설립 청원, 호주제 폐지 운동, 동성동본 결혼 가능 운동 등을 직접 주도하며 당시 전국에 만연해 있던 성차별과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많은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3.1 민주 선언 서명에도 적극 참여하고 민주화 운동가들의 변호에도 활발하게 참여한 덕에 이태영을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2. 일생
2살 때 광산업에 종사하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와 두 오빠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보내 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가사과를 수석 졸업한다.[4] 이후 도산 안창호의 연을 통해 독립 운동을 하던 남편 정일형과 1936년 결혼한 후 남편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자 옥바라지와 가사를 맡는 등 광복 당시까지 집안을 책임졌다.[5]광복 이후 1946년, 아이까지 넷이나 둔 30대 시절에 남편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950년 졸업[6], 전쟁통에 부산까지 피난 갔지만 1951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도전해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홍일점으로 합격하였다. 이에 당시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그녀를 최초의 여성 판사로 임용 건의했지만,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크게 2가지 이유로 임용을 거부했다. 하나는 사회 분위기상 아직 여자가 판사직을 하는 것은 시기상조로 가당치 않다는 것이고[7], 둘째는 야당 의원 정일형의 아내라는 것을 트집 잡았다. 이에 그녀는 1954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8]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야당 국회의원의 아내라는 프리미엄 때문인지, 소박맞은 아내, 첩, 시국 사범 등이 그녀의 변호사 사무실을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웃픈건 그런 사연을 가진 사람들 중엔 돈이 없는 사람들도 많아서, 이태영 본인도 이제 변호사 개업하면 사람들이 돈을 들고 찾아올 것이라고 배웠는데, 돈이 없어서 달걀 한 알이라도 들고 와서 상담하는 사람들 보면 마음이 아파 도저히 거부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1956년 아예 무료법률상담소를[9] 세우게 된다. 돈이 모자라면 부자집 친구한테 자기 장례식 부조금 먼저 달라는 식으로 농반진반을 하며 일부 손을 벌리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1958년에는 김흥한, 장대영 변호사와 함께 국내 최초의 로펌인 김장리 법률사무소를 설립했으며, 김장리는 법무법인 양헌(영문명 김장리)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가, 다시 법무법인 김장리로 변경되어 운영 중이다.
이 과정에서 이태영은 헌법은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있음에도 하위법인 실정법은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한 현행법률의 모순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태영은 계몽 운동과 함께 가족법 개정과[10] 불합리한 법률의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호주제 폐지 운동 등에 앞장서며[11] 1994년까지 활동하다가 은퇴한다.
1996년 5선 국회의원에 도전한 아들 정대철이 KBS 9시 뉴스 앵커 출신의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게 패해 낙선하자 정신적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노환이 겹쳤는지는 몰라도 치매에 걸려 2년간 가족도 잘 못 알아보는 등 투병 시기를 겪다가 1998년 12월 17일에 별세했다. 향년 84세. 당시 장례식에 각계 사회 인사들이 몰려와 그녀를 추모했다.
장면, 남편 정일형과 함께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대중의 최대 후원자이자 정치적 선배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정일형이 김대중과 같은 계보에서 활동한 인연도 있었겠지만,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상실해 폐인처럼 지내던 김대중에게 자신의 후배 겸 비서이자 이후 영부인이 되는 이희호와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도 바로 이태영이었다. 1980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때는 증인으로 출석해[12] 김대중을 변호하며 서슬퍼런 시절 군 검사를 향해 호통을 치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1982년 남편 사망 이후 1987년 6월 항쟁 당시엔 이미 암이 발병해서 수술까지 받은 몸임에도, 노구를 이끌고 다시 한번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다.
1998년 사망 후, 서울특별시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다. 사실 단독 안장 자격도 충분히 되었으나 본인의 유언인 듯 하다.
2.1. 참여 운동
1970년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국제법률구조연합회 이사가 되고 같은 해 국제법률구조연합회 부회장에 선출 되었다. 1971년 가정법원 조정위원으로 재직 중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1971년 '법을 통한 세계평화센터'로부터 '법을 통한 세계 평화상'을 받았다. 1973년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남편인 정일형과 함께 1974년 11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였다. 1976년 3.1 민주 선언 서명에도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또 많은 민주화 유공자들을 법적으로 변호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여성 인권, 여성운동에 주력하여, 1989년 가족법 개정의 발판을 마련했다. 가족법 개정 운동을 추진하여 이혼녀의 재산 분할 청구권 인정과, 기존의 친척 관계를 모계·부계 혈족을 모두 8촌 이내로 축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 밖에 호주제 폐지[13], 부모친권, 동성동본 결혼 금지 제도의 폐지 운동을 주관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 때문에 남존여비 사상을 가진 당시 일부 유학자 등은 "인간관계와 질서를 어지럽힌다", "참고 살면 될(?) 문제도 이혼까지 몰고 가서 가정 다 파탄낸다"[14]는 식으로 그녀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1976년 국내외 여자 정치인 및 여자 지식인 100명의 서명·동의 지원을 얻어 서울에 여성 운동가들의 회관인 여성백인회관 건물 부지를 매입,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3월 3·1 민주 선언에 참여 하다가 이듬해인 1977년 실형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 뒤 여성 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1980년 복권해 변호사 자격을 돌려받았다.
3. 가계도
자세한 내용은 정일형 문서의 가계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여담
2015년 8월 10일에 올라온 탄생 101주년 기념 구글 두들. 좌측에는 호주제 폐지 및 가족법 개정을 위해 애쓴 법조 활동을, 우측 상단에는 저술 및 학문 활동을, 우측 하단에는 가정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며 여성 및 가정 문제 관련 상담 활동을 하던 장면을 담았다.
가족법 개정안 진정서를 들고 당시 대법원장인 김병로를 찾아가자 김병로가 "1,500만 여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다 잘 살고 있는데, 법률줄이나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승만이 판사 임용을 거부할 당시 이태영을 임용할 것을 건의한 사람이 김병로였다는 것이다. 판사 임용을 건의할 권한이 대법원장에게 있긴 했지만 말이다.[15]
이태영이 그 시절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고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된 데에는, 남편 정일형의 공도 컸다. 여성이 일방적으로 남편의 내조에 힘쓰는 게 당연시되던 시대였지만, 정일형은 아이까지 낳은 아내가 대학(서울대 법대)에 진학하는 것에 찬성했고 아내가 갓난아이에게 젖을 줄 수 있게 아이를 데리고 아내가 공부하는 대학에 드나드는 등 외조를 열심히 했다. 이태영 본인도 정일형을 존경해 그가 사망했을 당시 남편이자 스승, 동지이자 아버지를 잃었다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아들인 정대철 기억에 따르면 자기들은 어머니가 변호사나 사회 운동 일로 밖에 자주 있다보니 가정 교육은 아버지와 할머니가 더 자주 했다고 하며, 그럼에도 어머니 역시 함께 있을 땐 늘 대화하고 야단칠 땐 야단도 치는 교육자셨다고 기억했다. 특히 인류 절반인 여성의 불행은 인류 전체의 불행이자 동반자인 남성의 불행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신게 기억에 남는다고.
사후 5만원권 인물 선정 작업이 한창 이루어질 즈음 국회 여성 의원을 상대로 한 여성 인물 적격성 설문에서 여성 의원들의 선호 후보로 신사임당을 이어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결국 신사임당이 5만원권의 인물로 채택되었지만, 이태영이 근현대의 산 증인[16]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생전에는 아직 여성 변호사가 증가하기 이전 시기라, 사법시험 여성 합격자들이 사법연수원 입소 전후로 단체로 인사 드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등이 그녀의 제자이다. 신인령이 2000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선생님은 법이 강자를 위해 쓰여서는 안되고 어떻게 서민의 것이 될 수 있게 하는가에 대해 일관된 자세를 보였다고 한다.
2017년 구글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던 여성들을 기념해 제작한 '구글 두들, 13인의 세계 여성'에 소개됐다.#
2024년 SBS 프로 과몰입 인생사 7화에 일생이 소개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 〈제5공화국〉에서는 최은숙이 연기했다.눈이 나빠 사람이 잘 보이지 않으면 안경을 하나 더 끼고 사람을 똑바로 봐! 김 선생이나 나를 뭘로 보고 이따위 행동들을 하는거야. 가슴에 손을 얹고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편에서 등장. 실제 역사대로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용공적 행동이나 발언을 하거나 들은 적 있냐는 김대중의 질문에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까지 지냈는데 어떻게 10.26 이후에 갑자기 공산주의자가 되겠냐며 신민당 사람들은 다 바보 아니면 공산주의자냐는 팩폭을 날린다. 이에 군 검사가 유도신문이라며 트집을 잡자 안경을 벗어던지며 위의 일갈을 날려 군 검사를 단번에 데꿀멍시키는 장면이 일품. 이에 방청객들도 박수를 보낸다.
5.1. 음악극
자세한 내용은 백인당 태영(음악극) 문서 참고하십시오.2023년 우란문화재단과 목소리프로젝트가 제작한 음악극 百人堂 태영이 상연되었다. 약 40여 년의 세월을 바쳐 가족법 개정을 이끌어 낸 대한민국 최초 여성 변호사로서 이태영의 삶을 조망하는 전기물 형태의 작품이다.
6. 상훈
- 1971년: 제1회 법을 통한 세계평화상
- 1975년 막사이사이상
- 1982년: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 1984년 국제변호사협회 국제법률봉사상
- 장한어머니상
- 법률문화상
- 1989년 브레넌 인권상
- 199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 1990년 3‧1문화상
- 제3회 세계법률구조상
- 세계감리교 평화상
- 1991년 제1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
7. 저서
-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
- 《가정법률상담실기》(1958)
- 《한국 이혼제도 연구》(1969)
- 《북한의 여성생활》
- 《여성으로 태어나서》
- 《여성운동사》
- 《현대여성의 모럴》
-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1972)
- 《쪽박으로 한강물을》(1985)
-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
- 《나의 만남 나의 인생》(1991)
- 《가족법개정운동 37년사》(1992)
- 《북한 여성 연구》
- 《정의의 변호사가 되라 하셨네》
[1]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2] 1남 3녀를 두었으며, 정대철 외에는 딱히 정계엔 진출하지 않고 일반적인 사회 생활을 했다.[3] 독립운동은 본인이 주도했다기보단 독립운동하는 남편을 도와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입장이었으며, 해방 이후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에선 주요 인사 중 한명으로 활동했다.[4] 재학 시절인 1934년 이대학보에 여학생도 법률을 알 필요가 있다며 기사를 쓴 적이 있는 것을 보면 이때부터 법률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누비이불을 팔고 삯바느질을 하느라고 손가락이 휘어질 정도로 손 상태가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또 저녁에는 합창 대회에 나가서 손을 가리고 노래하며 돈을 벌었다고.[6] 수업이 끝나면 코스모스 밭에서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집에서 안고 온 넷째 모유수유까지 하며 필사적으로 공부했다고 한다.[7] 당시는 직전까지만 해도 간통죄가 여성에게만 적용되고 최병주처럼 일부 대법관조차 그게 생리, 심리, 성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던 지금 보면 희한한 시절이었다.[8] 참고로 여성 최초로 판사에 임명된 인물은 황헌의 8촌 손녀이기도 한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황윤석이다. 1954년 서울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한편, 여성 최초의 검사는 1980년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배숙(임명 당시 서울지방검찰 검사), 박숙경(당시 인천지방검찰청 검사)이다. 이후 조배숙은 판사로 전직하여 판사로도 근무하였으며 법복을 벗은 후에는 정계에 입문하여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9] 오늘날 한국가정법률상담소.[10] 처의 무능력제도 폐지, 여성의 재산상속권 보장 등.[11] 국회의원인 남편을 통해 관련 법 제정에 힘썼고, 반대하는 의원들은 미국 방송 등에 나가 낙선 운동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무려 1950년대부터 그랬던 것.[12] 중앙정보부에서 법정에 나오면 재미없을거라는 노골적인 협박 전화까지 와 다른 재야 인사들은 법정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태영만 유일하게 출석해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13] 남편인 정일형 등도 운동에 같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는 그녀가 사망하고 7년 후인 2005년이 되어서야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말미암아 2008년 최종 폐지되고 대체 입법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이태영 생전엔 끝내 폐지시키진 못했다. 그래도 그녀는 1989년 가족법 개정에도 37년이 걸렸다며 만족감을 보였기 때문에 호주제 폐지도 언젠간 이뤄질 역사적 과제로 여기고 최재천 등 많은 후배들에게 바통을 넘겼다고 볼 수 있다.[14] 허나 이태영은 섣부른 이혼 성립을 막기 위해 4주후에 봅시다 이 분야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가정법원 도입 건의를 주도했으며, 국내 결혼 증가에도 도움을 준 동성동본 결혼 합법화에도 적극 나섰다.[15] 그렇다고 김병로가 마냥 꼴통 유학자였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고 보여지는 것이, 민사 소송에서 피고 측이 남편의 허락 없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자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남녀는 평등하다'며 반박한 적도 있다. 그러므로 그가 유학자여서 여성의 권리에 몰지각했다기보다는 법에 대한 도전을 눈뜨고 봐줄 수 없다는 다른 의미의 꼰대 비슷한 기질이 나왔다고 보는 것이 좀 더 그럴듯하다. 민법 초안을 작성한게 본인이라 좀 찔린 것도 있었을듯.[16] 국내에서 근현대 인물은 특유의 정치 노선과 과실로 인해 평가가 크게 상반되는 경향이 있어, 지폐 후보자에서 쉽게 탈락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