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백성이 나를 비판하는 내용이 옳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니, 처벌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나를 오해하여 그릇된 마음으로 나를 비판하였다고 하여도, 그런 마음을 품지 않도록 만들지 못한 내 잘못이니, 어찌 백성의 잘못이 있겠는가?
조선 제4대 국왕 세종
민본주의(民本主義)는 유교적 통치철학과 통치행위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정리한 이념이다. 이를 직역하면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다."라는 뜻인데, 이 뜻에는 "백성이 국가를 이루는 근본이므로 그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야하며, 백성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통치를 해야한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조선 제4대 국왕 세종
인본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민주주의와 통치 목표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민본주의는 엘리트주의에 근거한 이념이라는 큰 차이가 있어서 같은 범주로 포함되지 않는다.
2. 설명
동아시아의 이러한 이념은 유럽과 중동에서 다신론에 대한 반발로 일신론이 등장하여 신학이 발전하게 된 것과 다르게, 동아시아에서는 기원전에 이미 생명의 본질[1]과 선악을 구분하는 논쟁을 넘어서 신의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고[2] 인본주의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의 발전으로 동아시아는 왕권신수설에서 일찍 탈피할 수 있었고, 덕분에 통치의 본질이 백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민본주의의 최종 목표는 유교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사회적 목표인 대동사회(大同社会)를 이루는 것이며, 이것을 떠받치는 세 가지의 이론이 정명론[3], 역성혁명론[4], 성선설[5]이다. 유학을 현대의 말로 대체하면 '예학'이라고 불러도 좋은데, 유학 자체가 예를 설정하는 학문이며, 유교의 이론들은 예를 설정하기 위한 기반 이론일 뿐이다.
유학이 등장한 시기는 춘추전국시대였고,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제자백가는 어떻게 질서를 확립할 것인가에 대하여 연구했었다. 유교와 양대산맥이었던 법가가 강력한 유형적 권위와 규칙으로 하여끔,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여 질서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유교는 도덕에 의한 질서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개인간, 집단간의 무형적인 권위와 규칙을 설정했고, 이것이 유교가 예의범절을 만들어 나가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예의범절을 만들기 위하여 성선설과 성악설 등 인간을 연구하는 이론이 나왔고 이 이론을 근간으로 정명론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유교 자체가 태평성대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거대한 무형의 질서를 만드는 학문이었던 것이다. 태평성대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하여, 유교는 지속적으로 지배층의 백성에 대한 책임을 강조해야했고, 지배층이 자의적으로 의무와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하여, '지배층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유교는 본질적으로 사람과 사람간[6], 사람과 집단간[7], 집단과 집단간[8]의 관계를 설정하는 학문인데, 높은 의무와 책임을 댓가로 '지배층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엘리트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여 시혜적인 색체가 짙다는 한계가 있다. 이는 자유주의와 인권이 생기기 전에 탄생한 이념이라는 태생적 한계 탓도 있다. 때문에 자유주의가 기본이 된 현 시대에는 민주주의에 도태된 상태이다.
3. 역사
3.1. 등장
유럽이나 여타 다른 대부분의 지역이 샤머니즘을 기반[9]으로 원시신앙을 성립한 것[10]과 별개로 동아시아의 원시종교는 토테미즘[11]이나 애니미즘[12]적인 성향이 대단히 강했다. 덕분에 동아시아에서는 체계적인 종교가 나오지 않았다.[13] 반면 종교에 크게 기대지 않고서도 정체성이 형성된 국가들이 생겨났다.당연하게도 고대에 신앙 없이 정체성을 형성할 대체제가 필요했고, 신에 대한 믿음을 대신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한 것은 인본주의에 기반한 그들만의 세계관[14]의 영향 덕이다. 체계적인 신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지 못한 만큼, 인간을 중심으로한 철학이 발전한 것인데, 구체적인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생존 경쟁에 놓인 인간들은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연구를 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 문명부터 신과의 소통이 주요한 요소였던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가 형성되어 치국안민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하며, 통치의 본질에 대하여 연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 덕분이다. 즉 실질적으로 옆 부족이나 옆 나라와 생존경쟁을 하는데, 뜬근없이 '신에게 빈다.'라는 선택지[15]는 자살이나 다름없었고, 신앙생활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동아시아에서는 인구를 늘리고 군대를 조직하여 옆 부족 혹은 옆 나라와 경쟁을 하는데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고 당연히 종교도 백성들의 생활양식을 결정해주고 국가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 압력이 갈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발전 압력'은 백성들을 통치할 관료와 군대를 형성하며,그 통치조직을 유지할 세수를 창출하고 그 세수를 상납할 백성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로 나아갔다.[16] 특히 국가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러한 발전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여, 유교와 도교같은 동아시아 특유의 철학적 요소가 강한 종교가 생겨났으며, 특히 노나라의 공자가 창립한 유교에서는 정명론을 기반으로한 민본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세수와 병력의 근간인 백성들을 잘 관리해야한다는 개념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애민정신이나 왕도정치같은 인간적인 요소가 부족했으나, 공자 이후로도 맹자나 묵자, 순자같은 사상가가 나와 정명론 위에 살을 붙여서 예학으로서의 요소를 발전시켜나가서 자배층에는 책임을,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민본주의적 요소가 강화되었다.
이렇게 초기 민본주의를 형성하던 유교에도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닌데, 법가를 중심으로 춘추전국시대를 종결하고 통일 중화제국을 수립한 진나라가 분서갱유를 일으켜 유교를 탄압하면서 민본주의 또한 사장될 뻔했지만, 진나라가 무너지고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한나라가 들어서자 유교가 복구되는 과정에서 민본주의 또한 재발견되어 이어지게 된다. 한나라 시절부터는 이성과 법리적 절차에만 몰입한 진나라를 반면교사 삼아서 유교의 예를 근간으로 나나를 통치했지만 정명론은 군주와 귀족들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었고, 민본주의는 겨우 명분용 생성용 생색으로 무늬만 존재했다.
3.2. 발전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유교와 민본주의는 다시 위기를 겪었다. 기본적으로 텡그리교나 불교를 신봉하던 북방유목민족이 내려와서 중국의 천명 쟁탈전에 가세하자, 유교를 중심으로 문명을 형성하던 한족 문명 자체가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17] 하지만 이러한 위기가 오히려 유교와 민본주의에 대한 발전 압력을 주었는데, 경험으로써 귀족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하면 계속 군현제가 무너지고 봉건제로 계속 회귀하는 꼴을 맞이한다[18]는 것을 체득한 중국인들은 귀족의 혈통이 아닌, 능력주의로 관리를 선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위진남북조가 수나라에 의해서 종결되고, 수나라가 과거제도의 모태인 선거제를 실시하면서 유교 문명에도 전환점을 맞이 했다. 비록 행정이나 경제에 대한 내용이 아닌 유교철학을 기준으로 관료를 발탁했지만, 시험으로 관료를 선출한다.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국가 행정제도의 건실함을 불러 왔을 뿐만이 아니라, 전문 지식인 계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탄생하게 된 것[19]이다. 이 전문 지식인 계층을 형성한 집단이 바로 유학자이며, 유학자들에 의해 형성된 지식인 계층이 바로 사대부라는 계층이다. 아 사대부 계층은 선거제를 더욱 진일보시킨 과거제를 실시한 당나라 시기에 본격적으로 육성되었다. 과거제도로 생산된 사대부 계층이 곧바로 귀족계급을 대체하지는 못했지만, 당나라가 시행한 빈공과 덕에 다른 나라에도 유교를 보급하고 유학자 계급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면서 민본주의가 유교권 전역에서 성행하는 기반을 닦았다.[20]
유교전통이 계속 이어질 수록 귀족의 힘은 약해지고 사대부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송나라 시기가 되면 사대부 계층이 귀족 계층보다 확실하게 더욱 강해진다. 유교 경전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대부 계층이 강화될 수록 형식적인 의미에서 멈췄던 과거 민본주의가 실질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다만 송나라 시절에 불교와 도교의 형이상학적인 교리를 수용하여 성리학이 탄생하였는데, 이 때문에 실용 학문적 성격이 강했던 유교가 실용과는 거리가 먼 학문으로 변질되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성리학은 어쨌든 백성들에게 초점을 맞춰서 정치를 하자고 주장하고 지배층이 민본주의를 행하도록 가르치는 등, 확실하게 인본주의적인 성향을 고수했다.[21] 능력주의에 의한 선발제도와 민본주의적 성향으로 국정의 페러다임을 장악한 사대부들은 귀족 계급의 시대를 종결짓고, 능력 위주의 새로운 신분제를 만들어 민본주의를 한 차원 더 발전시켰다.
송나라의 시대가 끝나고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사대부 중심의 나라는 다시 귀족 중심의 나라로 변질되었으나, 한물간 귀족 정치는 세계를 경영하기에 대단히 부족했다.[22] 원나라를 무너뜨리면서 귀족계급이 확실하게 붕괴[23]했고, 명나라는 순수한 사대부들의 나라가 되었다.
원나라의 증흥으로 귀족 계급이 완전히 몰락하고 명나라 건국을 주도한 사대부들은 온전한 민본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결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맺었는데, 넓은 영토에 만주족같은 이민족도 다스려야 했던 명나라는 민본주의를 전 백성들에게 베풀지 못하고 멸망했으나 조선은 민본주의 실천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명나라는 고도로 발전한 유교 행정국가를 만들었는데, 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후기에는 그 왕권이 태업을 해서 민본주의적인 국가를 만드는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민본주의는 한반도에서 성공적으로 시행되었는데, 너무나도 작은 정부와 사대부 계층의 도덕적 의무에 너무 기댄 나머지 국가적 잠재력이 깎인 대가로 이룩했다. 훗날 명나라를 병탄한 청나라는 사실상 유목민의 대칸과 중화의 천자를 겸직하는 사실상의 다민족 동군연합 체제로써 이민족 통제에 집중하느라 행정을 낭비했고 불교를 숭상했기에 민본주의 국가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지만 민본주의적 전통자체를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민본주의 적당히 체제는 유지되었다.
3.3. 쇠퇴
민본주의라는 이념이 실질적으로 완성된 것은 명나라과 조선이 등장한 14세기 쯤이다. 그리고 민본주의의 정점을 찍었을 때부터, 하락을 찍기 시작했다. 양명학을 근간으로 세워진 명나라의 경우에는 양명학의 실천적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 당시 행정기술로는 가장 이상적인 행정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왕권타툼 끝에 절대왕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애민주의를 상실했고, 그 이후 왕실이 민본주의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써 민본주의적 이상이 명나라에 실현되지 않았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워진 조선에서는 정도전과 이방원이 신권 중심 정치와 군주 중심의 정치를 결정하기 위한 타툼 끝에 이방원이 승리하여 군주 중심의 정치로 조선의 역사가 나아가게 하였으나, 이방원의 다음 왕인 세종대왕이 왕도정치를 중시하여, 애민정치를 행함으로써 민본주의적인 이상을 조선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장애인에게 직업교육을 시켜주고[24], 30대가 넘어서도 결혼을 못하는 가난한 미혼 남녀에게 나라에서 혼수를 장만해주어 결혼을 하게 도와주거나[25], 심지어 관노에게도 출산 휴가를 주는 등, 민본주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했으며, 전근대 국가로서는 상당한 성과를 이룩했다.하지만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민본주의가 퇴색되었다. 청나라의 애신각라 왕조 차제가 불교를 믿었고, 유교를 수용한 것은 원나라의 통치를 반면교사 삼아서 중국을 원할하게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다만 명나라에서 육성된 사대부 계층이 신사 계층으로서 계속 존속했기 때문에 민본주의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조선은 명나라와 달리 이념적 문제보다 구조적 문제 때문에 민본주의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조선을 건국할 적, 성리학자들은 관학파 실용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은 작은정부에 복지를 실현하는 기적의 행정을 구현했는데, 현대적 관점에서 말도 안되는 일을 해낼 수 있던 것은 지배층에 도덕적 책임을 강요하고, 관료들에게 명예를 대가로 적은 임금으로 국가에 봉사하게 했기 때문이다.[26] 문제는 중앙 교육제도가 건실하고 성리학이 교조화되기 전의 조선에서는 이런 도덕적 의무감에 의한 열정페이로 나라를 운영하는게 가능했지만, 당연하게도 후손들이 이런 구조적 문제에 순응할리가 없었다. 그나마 선조 초 때까지는 당쟁이 심각하지도 않았고, 세종대왕시기에 만들어둔 행정과 경제가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으나, 임진왜란와 병자호란 이후에는 경제적인 복구 이전에 제도적인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세수가 제대로 걷히지 않아서 행정운영에 차질이 생겼으며, 양란의 패전으로 성리학이 교조화의 길을 걸으면서 민본주의를 위한 제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 후기가 되면 민본주의 통치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3.4. 종말
민본주의는 중화제국과 유교 국가들의 분열과 천명 재정립을 통한 통합이 반복될 때마다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면서 발전해 왔었다. 이러한 순환구조는 유교사회가 비유교사회와 지리적[27], 정치적 단절[28]로 인하여 외부간섭이 없이 이어져 결국 안정으로 귀결되어 왔었는데, 청나라와 조선 그리고 베트남이 쇠퇴기에 접어 들었을 당시 하필이면 유럽에서는 자본주의가 발흥하여, 식민 제국주의가 꽃필 때였다.쇠퇴기에 들어선 유교 문명권 앞으로 유럽의 폭력이 다가왔고, 유교 문명의 내적 완결성 또한 유럽의 개입으로 무너졌다.
청나라의 경우 아편전쟁의 패전으로 인하여, 내부 성찰할 역량을 거세당했고, 양무운동등의 동도서기 운동으로 역량을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한 이유로 유교적 통치와 민본주의를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29]
베트남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가 쇠퇴기를 벗어나고 자롱 황제를 중심으로 국가를 팽창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도중에 프랑스의 도움을 많이 받는 바람에 유럽의 개입을 받기 시작하게 되었다. 외적 성장이 내적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은 베트남은 비유교 지역을 많이 정복한 주제에 유교에 너무 집착해서 다른 종교를 전부 탄압하는 실책[30]을 저질렀고, 결국 국력이 깍일대로 깍인 베트남은 프랑스가 침략할 때 대응하는데 실패했다.[31] 결국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서 유교 국가로서 수명을 다하고, 민본주의가 파괴되었다.
조선은 한참 쇠퇴기에 들어선 상태였다. 외부적 요인으로 강제로 무너지게 된 청나라나 베트남과 다르게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국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제국주의가 막 조선에 흉수를 들이 밀 때는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와 군제 개혁 등의 개혁으로 나라를 구하려 했고, 유교적 통치와 민본주의는 유의미하게 수복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무능한 고종과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전부 무위로 돌리는 조치를 하면서 식민지 신세를 면할 수 있는 황금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애초에 조선의 노력은 정작 가장 큰 문제인 교조화된 성리학을 포기하지 못했고, 선현이 만든 정책과 법률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는 성리학적 문화 때문에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여, 대한제국이 선포되어 근대국가를 선언한 이후에도 체제와 제도를 근본적으로 근대화시키는 실패하여, 세종대왕시기와 비교하기에도 애매한 나라를 만들어 놨다가[32], 서구화를 어느정도 달성한 일본 제국에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 1910년에 마지막 유교 문명국가였던 대한제국이 사라짐으로써 유교 군주정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민본주의 체제도 더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4. 의의
민본주의는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한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말이 지배층에 널리 통용되고, 민심을 신경쓰게 했던 것은 사실이므로 이는 부정할 수 없다.하지만 역으로 “백성을 위한다”는 말은 위로부터의 시혜나 자비를 긍정하는 말이기 때문에 엘리트주의적 성격이 대단히 강하여 한계 역시 명확했다. 민본주의는 국가간의 경쟁 속에서 통치원리의 하나로써 등장한 유교를 기반으로 등장했고, 유교 자체가 질서를 규정하는 학문이므로 세계가 안정될 수록 민본주의는 발전 압력을 받지 못했으며, 필연적으로 경쟁이 없어지게 되는 결과 안정된 환경에서는 오히려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반면 민주주의는 태생자체가 다른데, 중상주의 정책의 결과 젠트리 계급이 생겨났고, 젠트리 계급에 의한 유럽의 민주주의 혁명에 의하여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형식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엘리트주의적인 색체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민주주의는 각계 각층에 의한 경쟁을 상정하여 안정된 상황에서도 발전 압력을 받을 수 있었고, 이는 민본주의가 계속 쇠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민주주의는 계속 발전해 오게 되었다.
유교의 통치 이념은 자국 뿐만이 아니라 유교권 전체의 질서도 규정하기 때문에 일단 안정되면 변화할 일이 거의 없다. 민본주의가 국민에 대한 수탈도 제어하기 때문에 내부 압력으로 나라가 잘 망하지 않는다.[33] 문제는 이러한 내적 완결성이 발전 압력을 해소해버린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유교와 민본주의가 무한 경쟁의 제국주의 식민질서 아래서 무너져 사라질 수밖에 없던 이유가 이것이다.
결국 현재, 유럽의 민주주의 혁명들을 견디고 군주제를 유지하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한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유럽 민주주의 군주국들은 그들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공화주의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현재도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반면 민주 혁명은 커녕 공화주의 운동도 없었던 민본주의 유교 왕정을 가졌던 중국, 한국, 베트남은 전부 공화국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다만 이 왕정들이 자신들이 통치를 잘못해서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것은 아니고[34],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의하여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사라졌으나, 망하는 과정이 너무 추해서 군주정을 복구하지 않고 공화정으로 독립하게 된 것이다. 즉 민본주의 통치원리 자체가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힌 것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일본이나 태국처럼 식민지가 되지 않은 동아시아 왕조들은 왕정을 전부 유지했다. 그런 이유로 민본주의가 존재했던 국가들 사이에서 과거 군주제 시대의 민본주의 이념에 대한 전반적인 입장은 크게 적대적이지 않은 상태이다.
민본주의가 사라진 자리에는 권위주의 혹은 민주주의가 그 자리를 채웠다. 권위주의가 자리를 채운 곳에서는 유교와 민본주의적 질서를 체제유지에 쓰는 시도를 했고, 민주주의가 확립된 지역에서도 민심을 확인하는 등, 국민들의 집단적 의사나 기분에 주의를 하는 문화가 남았다. 유럽에서 다수의 폭정을 우려하기 때문에 대중의 감정을 반영하는 것에 일정 부분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과 반대이다. 따라서 민본주의는 무너졌지만 민본주의가 남긴 문화는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5. 민주주의와 민본주의
민주주의와 민본주의는 둘다 인본주의를 기반으로한 애민(愛愍) 정치를 해야함을 기본으로 전제하기에 두 이념은 국민/백성이 잘먹고 잘사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민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 국가에서는 전근대 기준으로 세율이 매우 낮은데, 이는 백성들의 생업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곡물을 적게 걷어감으로서 백성들이 자력으로 삶을 풍족하게 이어나가게 하기 위함이다. 민본주의 국가였던 조선과 같은 시기 일본을 비교해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세율은 약 7.5%(사료에 따라 최대 약 15%까지 변동된다.) 일본은 센고쿠 시대와 히데요시의 통일 직전 약 60%까지 올랐다가 에도막부 수립 직후의 공식세율은 21%였다. 이것도 인두세와 과징금을 제외한 수치로 실 세율은 터무니없이 높아서 마비키와 잇키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왕권신수설에 근거하여 폭주하는 군주의 권력을 제약하기 위하여 나온 사회계약론에 근거했고, 민본주의는 유교의 정명론에 근거하여 군주를 올바른 통치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다. 즉 두 이념은 "전제군주제의 폭주를 막기 위한 이념"과 "군주제를 정당하게 활용하기 위한 이념"이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에 비하여 명백한 장점도 있는데, 민본주의는 지배층의 권리를 일정부분 보장하는 대가로 지배층에게 의무와 책임을 강제하기 때문에 지배층에게 책임감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었다. 예를 들어서 조선의 관료들을 봉급은 현대 시점으로 보면 말도 안되게 적은데, 이는 관직이라는 것이 상당히 명예로운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본주의가 제대로 돌아가던 초중기까지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유교의 교조화와 함께 민본주의가 무너지자 관료계층의 타락을 불러와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된다. 따라서 지배층 한정으로 열정페이를 요구하는 이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6. 관련문서
[1] 아시아에서 놀랍게도 사형제 폐지는 한나라 시절에 이미 논의된 바가 있다.[2] 유교는 내세 보다 현세를 중시하라는 것을 넘어서, 귀신을 공양하는 것을 부정한다.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상님에 대한 효를 행하는 것이지 귀신을 모시려는 행위는 아니다. 단 유교도 각 지역의 토착종교와 합쳐져서 시대가 지날 수록 영적인 존재에 대한 부정이 희미해진다.[3]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자신의 주어진 위치에 걸맞게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진 이론이다. 즉 의무를 다하라는 이론이다.[4] 군주가 군주로써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는 군주가 아니니 그를 내쫓고 진정한 왕을 모셔야 한다는 이론이다. 동아시아에 있었던 천명과 연결이 되는 이론이다.[5] '인간의 본능은 선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본래 선하니, 선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인간이라면 인간다워야 하며, 인간답지 않은 인간은 인간이 아니란 이론이다.[6]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친구관계 등 모든 인간관계[7] 국가와 백성. 관청과 민간 등. 만약 현대에도 유교가 존속 발전했다면 법인과 직원 간의 관계도 설정하려고 하는 등 가장 발전할 여지가 많았던 부분이다.[8] 중앙과 지방, 종주국과 제후국, 대국과 소국 등[9] 현대에 샤먼이라고 부르는 원시적인 사제가 신과 인간을 중재한다는 점에서,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힘이 집중될 수 있는 구조이다. 이는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과는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다. 현대 일신교들은 모두 샤머니즘의 요소가 강력하게 들어가 있다.[10] 그리스 로마 신화나 중동의 신화, 인도의 신화 등을 보면 샤머니즘의 요소가 대단히 많다. 사제가 존재하고 사제가 매개가 되어 신 혹은 정령과 소통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제가 강력한 매개체가 되는 권력집중적 성격이 기독교나 이슬람교같은 일신론이 태동하는 근간이 되었다. 특히 힌두교는 아직도 브라만같은 사제 계급이 아직 존재한다.[11] 신을 내세우지 않고 정령이나 귀신 혹은 영물 등의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징하는 상징물을 세우는 것으로, 한국에서는 고대에 솟대를 세운 것 등이 토테미즘적 요소이다.[12] 중국의 경우에는 도교가 애니미즘적 요소가 강하고 한국에서는 단군설화부터 곰과 호랑이가 나오는 등 애니미즘이 민족 신앙의 기틀이 되었다.[13] 동아시아와 같이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적 요소가 강했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이 침공할 때까지 종교가 따로 없었으며 국가를 세우지도 못했다. 반면 샤머니즘이 강세였던 중부 아메리카부터는 복잡한 종교관이 존재했고, 그들은 철기도 없이 어느정도 규모있는 문명을 세웠다. 즉 종교는 문명형성과 발전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후에 인도에서 불교를 들여서 중앙집권을 강화하는데 이용했지만 고도의 종교없이 문명을 형성하고 발전시킨 동아시아 문명의 특색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14] 중국의 경우에는 제자백가 이전에 이미 초기적 중화사상이 나왔고, 예맥 문명 또한 그들만의 세계관을 적립했다.[15] 유교 문화권 밖에서 고대인들이 위기에 닥쳤을 때, 집단을 단결시키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으레 하던 신에게 빈다.라는 선택지도 공통된 신과 체계적 교리를 신봉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그나마 민족 내에서 엇비슷한 종교관을 형성했던 고조선이나 분열된 상태에서도 같은 텡그리 신앙을 믿었던 몽골도 정작 신앙 자체는 그다지 유용하게 써먹지 못했다. 십자군 전쟁이나 지하드로 쏠쏠하게 종교를 이용한 서쪽과는 다른 부분.[16] 한반도에서도 정체성을 형성하고 관료와 군대를 유지하는데, 종교를 쓰는 대신에 관료제를 형성했다. 위만 조선만 되어도 제정분리가 완성된 모습을 보였고 상이나 대부같은 관직도 자체적으로 만들어 냈다.[17] 당시 한반도는 유교 영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유교는 정치용 소양으로 소비될 뿐 유교보다는 불교가 강세였고, 한반도 삼국 중, 가장 먼저 유교를 접한 고구려도 중국이 유교를 밀어준다는 이유로 불교나 도교를 밀어 주기도 했다. 유교를 제대로 받아들인 것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의 신라였다.[18] 한반도에서도 조선시대 이전까지 군현제가 온전하게 정착하지 못한 이유이다. 신라는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실시했으나, 골품제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실패했고, 고려는 광종이 과거제를 도입했으나, 음서를 활성화하는 등 귀족들에게 양보를 해야만 했다. 능력주의로 사람을 뽑는 다는 말은 기득권 바깥에서 정치적 실력자를 계속 수혈할 수 있다는 말이고, 중앙정치든 지방 정치든 고이지 않아서 역설적으로 중앙집권을 유지하기 용이하다는 말이 된다.[19] 참고로 구미에서는 전문 지식인 계층이 형성되는 것은 중상주의로 젠트리 계급이 형성된 이후이다. 동아시아에 비하여 형성이 늦어졌지만, 동아시아의 전문 지식인 계층은 유학자였던 반면에, 구미의 전문 지식인 계층은 과학자나 기술자 등 실학자들어었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정치적 진보만 불러 왔던 것과 다르게 구미의 전문 지식인 계층은 사회 전반의 발전을 불러왔다.[20] 당나라의 빈공과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가 바로 신라이다. 신라에서 형성된 유학자 계층은 훗날 고려가 중앙집권화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훗날 조선 시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괜히 조선의 3대 유교의 근거지가 기호, 영남, 호서인 것이 아니다. 기호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 있었던 곳이라 어거지로 커졌다는 것을 보면 영남이야말로 한국 유교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호남은 유학보다 불교의 힘이 더 강했다.[21] 단 이미 역성혁명론을 상실한 유교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변질된 성격은 성리학의 교조화와 함께 훗날 근대화를 방해한 원인이 되었고 훗날 유교 세계의 종말을 결정짓게 되었다.[22] 원나라의 귀족 중심 정치의 문제는 이 귀족들이 몽골인 귀족들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몽골인 인구는 지금이나 그 때나 한족에 비하면 한줌에 불과했는데, 주요 지배층을 편집증적으로 몽골인으로 선출하면서 중국 대륙을 통치하는데 문제사항이 많았다. 교육이라고 해봤자 중국 부호 계층보다 제대로 못받은 몽골인 귀족들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었고 결국 통치능력이 모자라 망했다.[23] 당연하게도 유의미한 한족 귀족계층은 원나라 통치시기에 몽골인들에게 제거되었다. 몽골인 귀족들만 사라져도 귀족계급이 일소되는 것이었다.[24] 유럽과 다르게 한민족이 천부인권을 인정했다는 중요한 증거로 같은 시대 유럽에서는 장애인을 신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사회에서 격리했다. 과거 사람들이 현대 사람들보다 미개했다는 주장이나, 인권과 복지가 시대의 발전에 따라 발전했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기도 하다.[25] 그리고 혼인을 못한 사람이 있는 고을의 수령은 인사고과에서 감정을 받았다. 수령의 의무중 하나에 호구증(인구를 늘리다.)이 있기 때문.[26] 태종시기 영의정의 녹봉이 쌀 1백 석(180 가마니), 옷감 32필을 받았다. 동시기 명나라의 내각 총리가 2000석(3600 가마니)였고, 일본의 쇼군이나 다이묘는 원하는 만큼 자신의 영지에서 징수할 수 있었으니, 다른 나라에 비하여 재상부터 봉급을 조금 받은 것이다. 참고로 조선의 경우 녹봉을 1년에 2번 받았다. 재상조차 조금 받았지만 문제는 아래로 내려갈 수록 대단히 큰 비율로 줄어들었는데, 지방 실무관리인 아전의 경우 혈통에 의한 의무복무인데도 불구하고 무보수로 일하게 했다. 한국의 공익조차 월급을 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27] 아랍 문명과는 고비 사막으로 막혀 있었고, 러시아 제국과는 시베리아 동토로 막혀 있었으며, 인도와는 티베트 고원으로 막혀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해금정책으로 인한 해양로 단절로 막혔다.[28] 명나라 시대부터 해금정책으로 조선, 베트남을 포함한 기존 유교국가들이나 토번같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나라들 빼고 굳이 유교질서를 전파하려고 하지 않았고 천명질서를 강요하지 않았다. 송나라의 대몽항쟁으로 한족의 민족관이 거의 완성되어서 분열의 걱정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장강 이남의 강남 지역의 개발이 완료되어 중국 내부의 경제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중국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또한 명나라의 외교정책을 계승한 채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정치적 트로피였던 조선에만 집착했을 뿐이다. 그래서 조공책봉 체제와 조공 무역만 유지했기 때문에 비유교권과 정치적으로 단절되었다.[29] 대표적인 일로 조공책봉관계로 유교적인 질서로 조선을 대하던 태도를 근대적 식민지와 본국으로 개편하려던 시도였다. 청나라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고, 그 역할을 수행하려 했던 사람이 원세개였다. 청나라의 조공책봉 체제 포기와 조선에 대한 대우 변경은 조선이 자의적으로 조공책봉체제을 포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해서 주권제국 선포와 유교 문명의 계승을 선포하는 진화적 압력을 받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30] 조선의 경우에는 개화기 전까지 통제해야할 종교가 불교 하나였고, 불교를 통제한다고 불교를 믿는 모든 국민들을 박해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조선의 승유억불 정책은 사찰의 권력을 제한하고 사찰이 재산을 갖는 것을 제한한 거지 사찰 자체를 절멸하려는 짓은 하지 않았다.[31] 프랑스의 조선 침략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박해를 근거로 들어갔는데, 조선이 모든 역량을 동원해 막은 것과 반대로 베트남은 뻘짓만 하다가 약점만 노출했다.[32] 세종대왕 시기 조선인구는 약 8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칭제건원 이후 고종황제의 대한제국 인구는 약 18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세종대왕 시기의 총 세수를 넘긴 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이다. 일본제국이 경술국치로 나라를 뺏은 다음 행정제도와 세금제도를 손본 것만 해도 세수가 최소 2배 이상 증가한 것을 봤을 때, 조선의 행정제도에는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3] 명나라조차도 영락제가 제위기간 동한 파업을 하는등 사실상 통치행위를 하지 않거나 엉망으로 통치했는데도 내부 혁명으로 망하지 않았다. 청나라가 침략해서 망한 것이다. 즉 잘 정비된 유교 국가는 내부분열로 망하는 경우가 적다.[34] 중국의 경우 공화혁명이 있었지만, 그것은 한족이 만주족 왕실을 쫓아내려고 한 혁명일 뿐 자신들 왕조를 쫓아낸것은 아니다. 참고로 공화혁명 후에도 청나라 소조정은 중화민국 안에서 존속했다.[35] Democracy를 천황의 절대성에 반하는 민주주의로 번역할 수가 없어서 민본주의로 번역했다.[36] 삼봉집 참조.[37] 호민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