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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23:23:39

붕당

당쟁에서 넘어옴
1. 개요2. 조선
2.1. 기본 원리2.2. 역사
2.2.1. 사림의 성장과 집권2.2.2. 이조전랑의 갈등과 동서분당2.2.3. 기축옥사 이후 인조반정까지2.2.4. 인조반정부터 예송논쟁까지2.2.5. 숙종의 환국 정치부터 이인좌의 난까지2.2.6. 영조의 탕평책과 붕당 정치의 실종2.2.7. 정조의 탕평책과 붕당 정치 복원 및 좌절2.2.8. 번외: 고종(조선)시기의 붕당(정당)
2.3. 평가
2.3.1. 옹호
2.3.1.1. 역사적 옹호자의 상실2.3.1.2. 사상에 따른 분파2.3.1.3.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의 옹호와 비판2.3.1.4. 다른 나라와 극단성의 비교
2.3.1.4.1. 한국사2.3.1.4.2. 세계사
2.3.2. 비판
2.3.2.1. 전제왕권 강화의 수단화2.3.2.2. 진영논리2.3.2.3. 사회적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2.3.2.4. 인사권의 구조적 문제
3. 중국4. 관련 문서

1. 개요

붕당()은 중국조선에서, 정치적 사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당파 집단을 이른다. 오늘날의 정당과 비슷하다. 실제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정당 중에서는 거슬러 올라가보면 구한말 붕당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독립협회는 1공의 한국민주당과 관계가 있다. 대한제국의 정당으로서 한반도 최초의 정당들로 개화당이나 친청도 있었다. 다만 정당은 명문화된 당규가 존재하고[1] 어쨌든 국민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완전 대응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한국 정당 역사의 시작점이 된 체제가 붕당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니만큼 어느 정도는 동류라고 볼 수도 있겠다.

2.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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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학파
사림파 훈구파
동인 서인
북인 남인 소론 노론
세도정치
위정척사파 개화파
친청파 개화당
대한제국 이후 (공산정당)
붉은 계열은 원리주의적 강경파, 노란 계열은 탈이념적 정파, 푸른 계열은 개량주의적 온건파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친청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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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想考)하건대 동서(東西)로 분당(分黨)하여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부끄러운데, 그 후 한쪽 사람이 별도로 당을 세워 북인(北人)이라고 하여 동인(東人)을 지목하여 남인(南人)이라 하였고, 의강(구의강)과 식(홍식)이 신국(김신국)과 이공(남이공)을 논핵(論劾)한 후부터는 신국과 이공을 지목하여 소북(小北)이라 하였으며, 의강과 식은 여순의 당으로 대북(大北)이라고 하여 추악한 말로 무함(無陷)하여 서로 공격하기를 마치 장사치나 여자들이 언쟁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 정상을 따져 보려 하면 말하는 입이 더러운데, 말류의 폐단이 끝내는 공도를 무너뜨리고 사(私)를 이루었으며, 임금을 잊고 국사를 그르쳤으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 33권, 선조 32년 6월 1일 기사, 사관의 비판
정쟁이란 것은 어느 역사에나 있기 마련인 것으로, 오히려 조선시대의 붕당간의 대립은 나름대로 이념 지향성을 가져 서양 근대의 정당 정치에 비견되는 것입니다.
안확(安廓, 1886∼1945)의 『조선정치사(朝鮮政治史)』(1923)#

다음은 대표적인 붕당 일람. 흔히 사색 당파라고도 불리는데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가리킨다.

2.1. 기본 원리

2.2. 역사

2.2.1. 사림의 성장과 집권

붕당의 시작 자체는 조선 성종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다.

사림의 시작은 조선 초,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유학자(신진사대부 온건파)를 중심으로 향촌 사회에서 학문에 임했던 집단에서 시작된다. 고려의 삼은(목은, 포은, 야은) 중 한 명이라 불리는 야은 길재의 학풍을 이어 받았으며 이게 지극히 당연한 것은 목은포은정도전공민왕시기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이였고, 포은공양왕시기 이성계, 정도전과 대립하면서 조선 건국을 막다가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인물이였다.

사람에 따라서 고려의 삼은에 넣기도 하는 도은은 조선 건국 직후 유배갔다가 과격한 곤장형 집행으로 살해되었으니, 야은 말고는 후계를 전할 인물이 없었다.[6] 성종 시기 성종이 훈구파(당시 여당)를 견제할 목적으로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을 등용하면서 사림파가 형성된다.

하지만 자생하지 않고 왕의 지원을 받아 타락해서인지 아니면 성종이 유약해서인지, 성종(조선)/생애 문서에서 보듯이 대간들은 수위 높은 발언들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연산군중종 시절에 여러 차례의 옥사와 사화에 시달리며 탄압받았고, 성종처럼 사림파를 등용한 중종도 조광조가 급진적인 것을 우려하여 숙청했다. 그 결과 정치 혼란이 발생하면서 관리, 군사, 조세, 학문이 본격적으로 문란에 빠졌으며 특히 15세기에 발달한 관학이 엄청난 속도로 쇠퇴했다. 사간원의 간언은 어디까지나 조언이었지 법적 효력은 전무했기 때문에, 임금이 파업을 할 경우 죽음을 무릅쓰고 반정을 일으키는 것 외에는 대책이 전무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중앙 관직을 내려놓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관원(산림)이 많아졌지만 덕분에 지방의 학문이 발달했고, 이들은 학문의 소양을 닦으며 성리학에 대해 연구하며 성리학에 대해 다양한 이론과 학설을 내놓았다. 또한 1545년에 건립된 백운동서원이 1549년에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지역 유지와 사림들이 너도나도 서원을 곳곳에 세우고 상술한 여러가지 이론과 학설을 계승할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러다 명종 대에 이르러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 겸 간신들이 축출되면서 조정이 안정되어 사림의 조정 진출이 증가하면서, 사림파는 선조 시기부터 핵심 계층으로 자리를 잡는다.

2.2.2. 이조전랑의 갈등과 동서분당

1574년에 이조(吏曹)의 전랑(銓郞) 문제가 터졌다. 이조전랑은 정랑(正郎, 정5품)과 좌랑(佐郎, 정6품)을 일컫는 말로 삼사(조선) 관(官)의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 내에서도 핵심에 속하는 실권직(이조 판서나 참판 등은 이조 전랑이 올린 결정 사항을 결재나 하는 정도)이었기에 자연히 이를 어느 파벌이 차지하는가에 따라 세력 균형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인사권이 아니라 언론기관이자 회의기구인 삼사[7]의 인사권 자체를 이조의 전랑이 가지고 있었다.[8]

이외에 다른 문관 인사권은 이조판서가 좌지우지할 수 있어서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고,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천대법(薦代法)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동인서인으로 나뉘게 되면서 본격적인 붕당이 이루어지게 된다.[9]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은 동인이 옹호한 김효원의 집이 건천동(현 충무로 일대)에, 서인이 옹호한 심의겸의 집이 정동에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건천동과 정동은 청계천 남쪽에 육조거리 - 숭례문 구간을 기준으로 경복궁을 바라보며 각각 동쪽, 서쪽에 있다.[10][11]

아무리 근세시대의 조선이라 해도 공론을 담당하는 삼사의 선출이 최소한의 선거도 아닌 조정관료의 추천이었기에 민의의 수렴보다는 대립을 부르는 구조였다.

선조 치세 전반기에는 율곡 이이가 죽기 이전까지는[12] 서인이 여당이면서도 동인이 경합세를 유지하다가 율곡 이이의 사망 이후에 동인이 득세[13][14]하였고, 임란 직전 당시 득세하던 동인은 남인북인으로 나뉜다. 계기는 정철에 대한 처벌 문제.

2.2.3. 기축옥사 이후 인조반정까지

1589년에 정여립 사건으로 인해 서자출신으로 정통성에서 문제가 있었던 선조는 자신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원하였다. 이에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명목상 반역사건이기에 자신이 직접 지휘하던 것을 나중에는 서인들의 책임으로 넘겨버리는 비열한 형태까지 보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류성룡을 필두로 하는 남인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 기간에는 남인이 서인에 온건적이었던 영향으로 서인도 다수 조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임란 종결을 전후로 북인 세력들이 남인들과 서인들을 탄핵하고 득세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승과 판서 자리는 서인, 남인 세력들이 꽤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후 정승 자리들도 소북 세력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판서급 대신들은 서인, 남인이 꽤 있었다. 이후 선조가 전쟁 때 활약한 광해군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에 빠지자 류영경을 필두로 한 소북은 1606년에 태어난 영창대군을 왕위 계승 후보로 올리고 이에 대북은 원래 세자였던 광해군을 지키는 것으로 해서 후사를 두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이 서로 정쟁을 겨뤘다.

그러나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등극한 전후로 소북은 다수가 숙청되었고 영창대군을 후보로 올렸던 유영경은 교형에 처하게 된다. 한편 광해군 시절에 사색 당파 모두가 참여하는 연립 내각이 형성되었다.[15] 하지만 광해군은 권력에 대한 욕구로 여러 차례의 대대적인 옥사를 벌였고 봉산옥사로 대북 세력이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고 계축옥사로 대북 세력이 완전히 정권을 잡았으며 폐모론 당시에는 폐모에 반대하는 일부 대북마저 숙청하고 이이첨 계열의 대북 세력들이 득세하나 점차 다시 소북세력에게 밀리기 시작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 이괄의 난으로 대북 세력들은 사형이나 유배 등으로 당했다. 소북 세력들은 살아남았으나 정치 혼란으로 이미 독립 당파로써의 힘은 상실했고 여타 당파로 흡수되었다. 이때 명종 시기부터 광해군 시기까지 집권한 영남 사림들은 조정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여기까지가 붕당 정치의 제1기로 붕당 정치의 틀이 마련되는 시기였다.

2.2.4. 인조반정부터 예송논쟁까지

인조반정이괄의 난이후에 기호 사림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지만, 광해군 시기에 정치 혼란을 경험했기에 대대적으로 옥사와 같은 유혈 충돌을 가급적이면 피했고 남인을 함께 기용하였으며 서로 공존, 상생하는 정치를 하였다. 서인들이 집권하였다고는 하나 서인들은 이 당시 정치적으로 유력하고 신뢰감 있는 인물이 없었다. 때문에 남인의 협조 없이는 조정의 무게감 자체가 극히 떨어질 지경이었다. 대표적으로 남인의 주자 이원익을 정승 자리에 올린 것이 이를 대표한다.

인조의 왕권이 강했던 시절에는 서인과 남인은 공존과 상생을 통해 서로 상호 견제를 했지만 1636년에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치르게 되었고 왕권이 약해졌다. 그래서 일부 대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권신화가 이루어졌고 서인이 남인을 억압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권신이 바로 심기원과 김자점이었다. 그리고 이 두 권신의 특징은 왕자를 끼고 권력을 장악했다.

처음에는 당시 세자였던 소현세자를 지지한 심기원이 권세를 누리나 처신을 잘하지 못했고 1644년에 인조가 정치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모반을 일으켜 인조를 상왕으로,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한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으나 조선이 유교의 나라라 이걸 지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회은군 이덕인으로 수정했으나 결국에는 고변자가 발생해서 자신 스스로도 죽고 인조가 소현세자를 의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심기원이 죽으면서 그하고 친했던 최명길도 실각했다.

심기원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은 소현세자가 1645년에 사망하자 즉시 봉림대군에게 편들었고 인조가 세자 교체라는 카드를 들자 김자점은 열심히 지원했으며, 봉림대군으로 세자가 교체된 이후에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강빈을 왕실 저주라는 누명을 씌어 사사시키고 소현세자의 자식들을 유배보냈다. 그리고 한 때 자신을 키워줬던 김류마저 실각시켰다. 이렇게 김자점은 권세를 누리나 문제는 자신은 친청파였고 봉림대군은 하필이면 반청파라서 상극이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다툼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고 북벌의 시대가 오자 김자점은 예상한 대로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에는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되었고 김자점은 최후의 발악으로 1651년에 모반까지 계획했으나 고변자로 인해 김자점은 심기원과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이후 효종 시기부터 현종 시기 까지는 인조 후반기의 왕권 약화와 권신 정치로 인한 경험으로 왕은 신하들을 억압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서인들은 왕을 허수아비로 부리지 않았으며, 서인과 남인들도 서로에게 유혈 충돌을 피했다.

그래서 이 시기 붕당의 양상은 서인과 남인간의 대립 양상을 띄게 되었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구도가 형성되었다. 실제로 이 시기를 붕당 정치의 이상이 그나마 잘 지켜진 시기로 평가된다. 이 때는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파벌의 경우도 유배나 낙향 정도였고 사약이 내려가는 사사는 정말 드문 경우였다.[16] 송시열예송논쟁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사실 송시열은 2차 예송논쟁이 끝나고서도 한참 뒤인 서기 1689년에 죽었으며[17] 사실 직접적인 원인은 숙종의 환국 정치 때문이다. 이 시기가 붕당 정치사의 제2기이다.

2.2.5. 숙종의 환국 정치부터 이인좌의 난까지

이후 숙종 시기 남인이 서인을 축출하면서 득세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안 갔다. 이후 숙종환국 정치를 거치면서 붕당은 낙향, 파직, 좌천 정도가 아니라 위리안치, 사사, 연좌제의 처벌(극형)을 받는 사람이 많아질 정도로 붕당이 변질되어 일당 전제화 형식으로 분화되었다.[18] 이것은 숙종의 왕권 강화책이기도 했다. 애초에 붕당이 제대로 불붙은 이유가 선조의 왕권 강화 노력도 한몫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위험한 불장난에 가까웠다. 일부에서는 편당적 인사 조치로 강한 붕당을 견제하여 붕당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숙종의 환국 정치 역시 탕평책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숙종 말기 여당이었던 서인은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이 자신을 도운 김석주를 비롯한 척신들을 옹호하자 이에 실망한 젊은 사림들이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는 기성 세력에게 반기를 들면서 노론, 소론으로 분당된다. 이는 송시열이 자신의 주장을 오락가락하면서 줏대없게 행동한 측면이 컸다. 그러나 당시 경신환국이 가능하였던 것은 오로지 척신 김석주의 공이었으니 기성 서인들은 그의 눈치를 봐야했다. 거기다가 문제가 터진 이유가 남인들 공격을 조작하다가 들킨 사건이기에 남인들로부터 역적이라고 공격당한 송시열은 덮을 수 있는 일이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이 이때 송시열에게만 의견을 구한 것이 아니고, 윤증박세채에게 동일하게 물어 본 것인데, 나중에 소론이되는 이 두 사람은 원론적인 주장만 하였을 뿐 특별하게 송시열에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한 것도 없는 것이다.

한편 척신 김석주는 사실상 당시 숙종의 대리인과 같이 행동하였다. 그런데 정작 직접적으로 걸린 사람만 비판하였을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고, 처음 송시열도 원론적으로 듣고서는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다만 걸린 사람이 자기 스승인 사계 김장생의 손자라는 것만 아니었다면 윤증박세채처럼 할 수 있었다. 한편 김석주가 1684년에 죽으면서 민유중과 김만기가 실세가 되었으나 민유중과 김만기도 1687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노론, 소론 대립이 격화됨과 동시에 다수당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는 사건이 터지니 남인 정권이 들어서는 와중에 송시열을 비롯한 거물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자 많은 젊은 소론들이 대남인 강경파인 노론으로 전향한 것이다.

소론은 권좌는 지켰고 갑술환국 이후에 주류가 되지만 숙종은 권신화가 되는 것을 싫어해서 노론을 지원했고, 점점 노론이 대간 자리를 차지하면서 소론을 강력하게 견제하기 시작했다. 숙종의 지원 속에 노론이 병권과 정승판서를 차지하면서 소론의 힘이 약화되더니 병신처분으로 소론을 날리면서 노론이 집권한다. 그러자 숙종은 이번에는 소론을 지원해서 노론을 견제했다. 그러면서 경종을 싫어했고 연잉군을 몰래 왕위계승권 안에 올리는 등 이중적인 행보를 했다.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올리고 대리 청정까지 요구했으나 경종은 연잉군을 세제로 세운 다음, 대리청정을 거부하여 노론이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든다는 이유 아래 오히려 노론은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여기에 1722년에 김일경의 지원을 받은 목호룡의 삼급수(三急手) 고변으로 노론의 신하들은 줄줄이 유배당하거나 사형을 당했다. 소론이 잠시 득세하는 듯 했고 소론 쪽에 줄을 선 남인들이 제법 벼슬을 얻으면서 남인도 잠시 부활하는 듯 했으나 경종이 덜컥 죽어버리는 바람에 즉위한 영조에 의해 영조 즉위에 많은 공을 세운 노론이 제1정당이 된다.

한편 소론 중에서 강경파는 경종의 죽음을 "연잉군이 게장과 생감을 올려 경종을 위독하게 해서 사망했다."라는 경종 독살설을 널리 퍼트려, 반란 분위기를 조성했고 때마침 김일경과 목호룡이 사형을 당하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상황을 주시했던 영조는 탕평책을 시행해서 노론과 소론의 권력을 견제하며 소론 강경파의 반란 분위기를 잠재우려 애썼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소론 강경파는 1728년에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지만 소론이 집권한 까닭은 바로 노론이 임금을 농단하고 심지어 반역까지 저지른다는 이유로 집권했는데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스스로 집권 명분을 저버리는 행위에 가까웠다.

물론 이인좌의 난은 경종 독살설을 통해 난을 일으켰음으로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소론 온건파인 완소가 가장 적극적으로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서면서 결국에는 실패했다. 한편 인조반정 이후 밀렸던 영남에는 이인좌의 난 이후 단단하게 쐐기를 박았고 100년이 더 지난 이후에야 철폐되는 대과응시 금지령이 내려져서 영남 남인들은 조선 정계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이 시기가 붕당 정치사의 제3기이다.

2.2.6. 영조의 탕평책과 붕당 정치의 실종

노론은 신임옥사로 인해 의리가 상실되었고, 소론도 역시 이인좌의 난으로 의리가 상실되었다. 그래서 영조 시기에는 노론이나 소론 모두 당파적 주장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였고, 그렇다고 자신만의 의리를 내세워서 당파적인 주장을 한다면 과거의 사례들처럼 되기때문에 주장을 하지 못했다. 한편 영조는 노론과 소론이 온건파만 남게 되자 탕평책을 시행해서 노론과 소론 간의 권력 견제를 했고 자신의 왕권도 키웠다.

영조 즉위 초반에는 소론에 대한 노론의 보복이 있었지만 자기들의 세상이 온 줄 알고 권력을 요구하던 노론을 견제하고 소론 중에서 비교적 온건파였던 완소를 대폭 요직에 등용하는 등 노론을 기본적으로 더 신임하면서도 소론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통성 컴플랙스가 있었던 영조가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론을 내치고 소론에게 주도권을 주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 것이다.

한편 민진원, 정호, 유척기 같은 노론의 강경파는 이런 분위기에 호응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이인좌의 난 이후에도 남인 강경파과 소론, 준론은 경종 독살설을 퍼트리며 아예 영조를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찬탈자'로 지목하고 계속하여 반역하여 1755년에 나주 괘서 사건으로 준론과 남인 강경파들은 아예 멸족되었다. 남은 소론, 완론들과 남인 온건파들도 영조 31년 이후에는 입지가 너무 좁아져서 주도권을 노론에게 내주는 정도를 넘어 아예 조정에서 거의 퇴출당한다. 그러나 노론들도 영조의 견제로 인해 그나마도 주도 세력이 되지도 못했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정권이 안정된 이후로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 세력 일부를 더한 탕평파를 구성해서 그 탕평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에 들어간다. 이른바 완론 탕평이다. 이는 영조의 왕권 강화 시도 정도로 탕평파는 또 하나의 붕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그 바람에 노론은 영조의 왕권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된 영조의 왕권에게 짓눌려서 거의 장난감 취급을 받게 되었다.[19]

이후에 탕평당의 장기 집권이 지속되자 당파의 의리보단 왕의 말이나 잘 듣는 척신 홍봉한과 그의 아우 홍인한이 주축이 된 풍산 홍씨 가문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노론계 외척들을 대거 끌어들이게 되어 영조 후반에는 당파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고 척신 정치가 강하게 자리잡는다. 영조 말년에는 이러한 '풍산 홍씨 척신당'에 과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파와 김종수, 심환지 등의 청명당[20]이 맞서게 된다.

정조는 즉위 이후 홍국영을 친위세력으로 해서 척신 정치의 상징이자 자신의 대리 청정을 방해한 홍인한, 화완옹주, 정후겸을 일단에 제거했고 사실 그마저도 홍인한을 제외하면 정조의 즉위 반대에 미온적인 편이었다. 애초에 임금이 후계자로 밀어주는 사람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것이 감히 생각키 어려운 일이었기도 했다. 사도세자의 복수로 죽은 김상로홍계희, 문성국의 벼슬을 추탈하고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를 폐서인하는 수준으로 마무리지었다.

2.2.7. 정조의 탕평책과 붕당 정치 복원 및 좌절



정조는 탕평당의 독주로 척신 정치로 변질되어가자 척신을 배제한 한편, 조정을 청명당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해서 소론 벽파인 서명선, 노론 벽파의 거두인 김종수심환지 등을 중용하였다. 그리고 당시는 홍봉한의 척신 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벽파가 상당수였다. 애당초 벽파라는 것이 '사도세자 죽어라!'가 아닌 '우린 척신이나 역적인 소론, 남인 애들하곤 못놀겠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벽파가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한 것도 사도세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신원은 당시 조정을 장악하던 노론의 잘못으로 귀결될 문제고 세자가 죽음까지 당했으니 노론은 반역자가 되어 일망타진 당할 처지가 된다. 실제로 채제공은 이걸 실현시켜 남인의 복귀를 꾀했다. 그러니 노론 벽파가 여기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가지 변수가 터지니 사도세자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흔히들 사도세자처분 문제를 두고 벽파, 시파 등으로 갈라지고 당파들이 싸움을 벌였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미 그 당시에는 당파라는 개념 자체 희미해지고 있었고 벽파니 시파니 분류된 것은 정조 때의 일이다. 주로 시파가 사도세자에 동정적이고 벽파가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하지만 영조 때는 벽파와 시파 구분 자체가 없었고 홍봉한의 탕평당과 척신 정권에 김종수, 심환지 등이 주축이 된 청명당이 서서히 반발하고 경주 김씨 일문이 홍봉한에 맞서면서 그들과 손을 잡는 모습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임오화변은 영조의 의지였지 노론은 별 잘못이랄게 없다.

정조벽파와 대결했다는 증거로 이조판서를 지낸 홍인한은 영조가 나이를 이유로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려고 한 것에 대해서 '세손은 노론, 소론을 알 필요도 없고,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에 누가 좋은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之說)을 내세웠다는 것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조선 시대에 세자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고 세자는 침선(砧選, 궁궐 내부의 문제)의 문제만을 살피면 되지 괜히 정치를 알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위험해지기 십상이었다. 이 발언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그때는 벽파, 시파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뒤에 밝혀지지만 정조의 정치적 성향은 오히려 벽파의 그것에 가까웠고 홍인한 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별 책임이 없었다. 정작 후에 강경 벽파로 분류되는 김귀주와 그의 아비 김한구, 사촌 김관주경주 김씨정순왕후 김씨 파는 정조를 크게 지지했고 김귀주 등은 번번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지원사격했으며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에게 세손의 승계(世孫之嗣係)가 당연하지 않냐고 정조를 대리 청정 등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정조는 이어 새로운 척신[21]이 되어가는 홍국영도 제거하면서 척신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고 정민시와 소론, 남인, 규장각 출신 소장파가 주축이 된 시파도 대거 끌어들여 오히려 붕당 정치를 다시 열었다. 정조의 경우는 영조와는 달리 붕당의 시시비리를 가린다는 이유로 소론과 노론의 과격파들과 역시 남인들을 중심으로 한 준론 탕평에 들어갔다.[22] 이후 신해통공과 천주교 문제, 문체반정 운동 등을 통해 정조는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 시기가 탕평 정치기로 붕당 정치사의 제4기이자 사실상 마지막 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는 붕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지만 사실상 영조와 정조의 왕권 강화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조가 끝내 종기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23]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 김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불과 4년 뒤 정순왕후 김씨가 죽고 순조의 장인이 된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집권[24]하면서 완전히 시파가 득세하게 된다. 이것으로 실질적으로 붕당의 역사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2.2.8. 번외: 고종(조선)시기의 붕당(정당)

이후 고종(조선)시기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개항하면서 다시 붕당이 부활했다. 위정척사파는 논외로 치고 개화의 논의에 대해서 급진개화파온건개화파간의 대립을 말한다. 일본인들과 서재필은 상대에 대해 수구당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이 표현은 실상 온건 개화파+왕실 종친+위정척사파가 아닌 보수세력까지 모두 싸잡아서 부르는 것에 가까워 이전의 붕당이라고 하긴 어폐가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대립이 갑신정변이었다.이후 조선이 무너지고 고종이 대한제국 건국을 선포하면서 이들은 독립협회황국협회로 이어지며,본격적인 한국의 정당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2.3. 평가

일제 강점기 이후 일제의 식민사관(당파성론)으로 인해 붕당 정치의 의미가 퇴색되어 단지 무의미한 당쟁에 불과하다고 깎아 내린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물론 붕당을 비판한다고 다 식민 사관이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붕당 정치에는 폐단 역시 적지 않았다. 당대 실학자들이나 서적들에서 붕당을 비판하는 말들이 꾸준히 나왔을 정도니.

사실 상술했듯이 명칭만 다르지 대부분 현대 국가에서 존재하는 정당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보니, 후술된 옹호와 비판의 내용들은 그대로 현대 정치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들이 많다.

2.3.1. 옹호

조선 붕당 정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안확, 이태진, 이시이 토시오(石井壽夫) 등이 있다.
2.3.1.1. 역사적 옹호자의 상실
조선 말기의 혼란과 양반층의 입장에 서서 역사를 남길 전승자가 한국 역사계에서 전무했던 탓도 존재한다. 한국 역사에서 일제강점기한국 전쟁을 거치며 사회의 고위층에 해당하는 양반계층은 거의 몰살하다시피 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비적 덕목과 그들의 예, 문화는 거의가 자의와 타의에 의해 소실되었다. 붕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이러한 '수혜 계층의 해체'에서 비롯되는 면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자업자득의 면도 있는데, "(일본과 협력 중인) 조정에 반항하는 것은 불충이요, 명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고루한 논리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도 있다.
2.3.1.2. 사상에 따른 분파
또한, 붕당은 단순히 권력만을 쫓아서 나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정확히는 학파)에 따라 나뉘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성리학은 학문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상[25]이고, 따라서 사상에 따라 정치적 입장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숙종, 영조, 정조조에 신하들이 놀고 있지는 않았다. 도리어 지속적인 당면 과제를 위한 인구 조사나 수효과 토론에 바빴다. (이점에서 노론 = 대지주, 기득권 = 대동법 반대, 소론, 남인 = 중소지주, 비기득권 = 대동법 찬성 => 실학으로의 진행이란 식의 구도는 무리한 분석이다.) 흥선대원군과 같은 개혁이 뒤늦게 구현된 것은 민란이라는 실제적 위협과 강력한 지도력 발휘가 가능했던 세도 정치였기에 가능했던 거지, 이전의 군주들이 수십년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조선 사회 자체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체제였기 때문에(지배층의 청렴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구조였다) 붕당과 권력 다툼의 목적이 '권력 획득' 자체에 있지 '권력을 휘둘러 이득을 본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조선의 정치 체제가 무너지는 건 세도 정치 시기부터이지, 오히려 붕당 시대에는 왜란 / 호란 이후 국가 재건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2.3.1.3.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의 옹호와 비판
'은둔의 나라 한국'의 저자 그리피스는 이면에서 정치 공작이 벌어지는 유럽 정치에 비하면 조선의 당쟁은 나름의 규칙과 도덕성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출처)

다만 여기에서 그리피스의 조선에 대한 기록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중 임진왜란 부분만큼이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 사람은 단 한번도 조선에 직접 와 본 적이 없다. 국화와 칼에서처럼 저자가 직접 가지 않더라도 그 나라에 대해서 잘 쓸 가능성도 아주 드물지는 않지만 이 책은 그런 류는 아니어서 카더라 통신이나 어이없는 소문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장 이야기가 이 사람 책에서 나왔다.

서양 학자들에는 다른 지역의 문명을 '빗대어서' 자국을 비판하는 경향이 전통적으로 존재했다. 말하자면 "(흔히 야만인이라고 여겨지는) 동양인들도 이렇게 나름대로 훌륭한 제도나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데, (문명인이고 훌륭한) 우리 나라는 아직도 이런 문제점이 있다니, 이런건 타산지석 삼아서 고쳐야 한다."는 논조이다. 이러한 논조는 고대 로마 제국 시절 타키투스게르마니아에서도 나오는 유서 깊은 것인데, 자국 비판을 위해서 타 문명의 '도덕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객관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류의 주장은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한다.
2.3.1.4. 다른 나라와 극단성의 비교
조선시대 붕당은 미개한 당파 싸움, 파벌 싸움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잦다. 겉으로는 일치 단결하는 것처럼 보이는 독재 국가, 일당 독재 국가에서도 파벌과 대립은 존재한다. 이것은 정치의 속성 때문이다.

한 국가와 조직이 가진 자원, 노동력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이러한 자원, 노동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에 대한 선택 문제가 발생하게 되며, 조직에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정치'라고 부른다. 현대 국가의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경제 성장에 역점을 두어 나눌 파이를 키우자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경제 성장 할 만큼 했으니 사회적 빈부격차를 줄이고 전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자고 주장하는 경우가 이것이다. 결국 인간 사회는 재화(자본)와 인간의 삽질로 굴러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어떤 정치 체제를 가졌든, 인간 사회의 정치는 힘의 논리로 굴러간다. 대표적인 것이 다수결로 상징되는 쪽수이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확보한 유권자의 수가 곧 정치적 파워로 연결된다. 독재 체제에서는 힘을 독점한 독재 세력에 의해 비교적 쪽수의 영향력이 줄어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쪽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힘 없는 민중인 것처럼 보여도 쪽수는 힘이기 때문이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열강들도 마냥 식민지를 총칼로만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열강에 빌붙는 부역 세력(매국노)을 키워 정치적 파워를 늘렸다.

그러므로 파벌과 붕당의 형성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붕당정치라고 해서 더 욕을 먹어야 할 필요는 없고 무조건 한국사를 깎아 내리려했던 식민사관이나 정당 정치를 파벌싸움으로 매도하려던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로 볼 여지도 있다. 다른 전근대 국가들의 위정자들의 통치나 파벌싸움의 행태를 보면 조선시대와 다를 것이 없었고 오히려 훨씬 더 부정적인 모습이 많았다. 조선시대는 위정자나 왕조차 욕심많은 토호세력이나 무식한 무인들이 아닌 수신하며 군자를 표방하는 학자의 나라였고 이런 모습은 전근대치고는 우수한 모습이였다. 오히려 조선의 붕당정치가 훨씬 양호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붕당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여 "조선 민족의 타율성과 정체성"의 근거로 삼기로 했다. 이런 인식은 현재 한국인에게도 스며들어 한국인 스스로도 "한국인은 단결을 못한다", "한국인은 누구 잘되는 걸 보지 못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파벌 싸움의 극단성이 정말 붕당 정치에서 유독 특별하게 강하게 나타나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칼부림은 안 난 붕당 정쟁이 더 온건해 보일 정도. 어느 나라나 정당과 같이 정치 집단의 의견이 갈릴 경우 엄청나게 싸웠다.

특히, 붕당을 근거로 조선을 폄하했던 일본은 아예 그 역사가 수많은 내전연속이었기 때문에 조선보다 더하면 더했지 분열이 덜 했다고 보기 힘들다. 오다 노부나가의 암살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바타 카츠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두고 대립한 것은 파벌싸움이 아니란 말인가? 차라리 조선은 조정 내에서 신하들이 파벌을 두고 싸웠지, 일본에서는 다이묘들이 조정과 천황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총칼들고 싸웠다. 서구에 의해 개방된 이후에도 이런 일은 딱히 달라지지 않아서 보신 전쟁 같은 자신들 만의 내전까지 벌였다. 그래서 이때 서양이 일본 이권에 깊게 개입했으면 일본도 청나라 꼴이났을 거라는 평가가 있던 내전이었는데 1860년대에 영국은 2차 아편 전쟁을 끝내고 중국을 뜯어먹기 바빴고 미국은 남북 전쟁 중이었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때리는데 바쁜 시기 였기 때문에 외세의 간섭없이 무사히 넘어갈수 있었다. 이런일이 있었는데 일본이 문명국이라고 자칭하게 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달랐을까? 메이지 유신에서 공을 세운 조슈사쓰마도 정권을 잡자 자기들끼리 파벌을 만들어 싸우기 바빴고, 이것은 세이난 전쟁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이어진다. 일본 제국 육군은 조슈의 영향 아래 있었고, 일본 제국 해군은 사쓰마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 육군, 해군 내에서는 멀쩡했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육군의 경우 황도파통제파, 만주파로 나뉘어 육군 내부에서도 파벌 싸움이 이어졌고, 결국 통제파가 이기면서 희대의 전범이자 추물인 도조 히데키가 집권한다. 해군 역시 크게는 조약파,[26] 함대파로 나뉘어 자기들끼리 싸웠다. 육해군에서 대표적으로 큰 파벌이 저 정도이며, 그 와중에 또 병과끼리 파벌을 이루어 싸웠다. 소위 삼간사우, 삼대오물 같은 작자들이 이런 파벌 싸움 잘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고, 군 전체를 말아먹었다. 그나마 해군 내부 파벌 싸움이 육군보다는 좀 덜한 편이었다. 이런 파벌싸움의 결과, 밀리환초 학살사건 같이 육군과 해군이 서로 잡아먹겠다는 너무한 일을 벌였고, 마침내 일본은 핵폭탄 2방옥음방송, 인간선언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런 나라가 조선시대 붕당에 대해 매도할 자격은 없다.

비슷한 근세의 유럽 왕정 국가들의 경우는 장미전쟁, 위그노 전쟁, 잉글랜드 내전, 천날만날 일어나는 지방 귀족 세력의 사주를 받은 민란, 암살, 그나마 좀 양지에서 벌어지는 경우인 결투 등, 지배 계급간의 분쟁은 베네치아 공화국 같이 일찍 과두 정치가 자리 잡은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법외에서 진행되는 사적 폭력을 기반으로 해결되었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통제된 문투, 그것도 조정이라는 공식 국가 기관을 통해 법적인 절차를 바탕으로 사약을 사하는 것은 보다 온건하다고 할 만하다. 실제로 왕정보다 앞선 민주정조차 남북 전쟁이라는 거대한 내전을 치른 적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나마 이괄의 난 같은 조선 내부의 내전이라 부를 만한 정치 투쟁은 비슷한 시기의 십만, 백만 단위로 희생자를 수십년에 걸쳐 쌓은 위그노 전쟁이나 영국의 삼왕국 전쟁, 등 성리학권 외부 근세 국가의 내부 정쟁에 비하면 훨씬 더 빨리 진압 되고 안정화 된 편에 속한다. 이 또한 '저런건 종교 전쟁이니 예외로 쳐야 하지 않냐'라는 반론을 할 수 있으나, 구교와 신교의 유혈낭자한 대립도 큰 무리 없이 지배 계급의 합의와 법적 절차를 통해 해소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의 경우를 보면 종교 자체보다 봉건 귀족제와 근대 중앙 집권 국가의 과도기에 있었던 근세 유럽 왕정 국가들 정치 체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통해 그 정도 스케일로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설명하는 학술적 테제가 휴 트레버-로퍼, 존 헉스터블 엘리엇과 그 제자인 제퍼리 파커 등의 역사학자들이 명명한 '조정과 나라의 대립(court versus the country)' 이론이다.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신교냐 구교냐의 문제는 피상적인 문제이고, 종교 갈등의 핵심에는 갈수록 비대해 지고 권력과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왕실 중심의 중앙 권력과, 봉건제로부터 내려오는 특권과 지방 자치를 유지하려는 토착 귀족, 자유 도시, 대학 등의 '주변부' 기관의 충돌이 있었다는 것이다.
2.3.1.4.1. 한국사
이렇듯 대립의 수준이 가히 원초적이며 무법지대라 할만하다. 조선 시대 붕당의 세련됨과는 비교도 안 된다.
2.3.1.4.2. 세계사

2.3.2. 비판

2.3.2.1. 전제왕권 강화의 수단화
정여립기축옥사는 그 주동자 부터 분명하게 조선의 임금 선조였고#, 조선시대 무수한 환국 사태 역시 붕당을 구실로 전제왕권을 강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선조 대에 벌어진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가져온 기축옥사. 이밖에도 광해군 때의 북인에 '의한' 숙청,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서인의 북인에 '대한' 역숙청,[27]

효종 대에 벌어진 김자점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한 분파인 낙당에 대한 숙청[28][29] 등 그야말로 대간들이 틈만 나면 숙청되는 역사가 바로 붕당이었다.[30]

조선의 붕당에 소속된 조정 신료들은 그 지지기반이 봉건적 영지도, 시민들의 투표도 아닌 이었기에 왕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역모로 몰려 숙청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붕당의 지지기반인 왕의 권한도 강해지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붕당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지지자인 왕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군주와 대신대간의 견제와 균형을 파멸로 몰고 간 환국 정치였다.

결론적으로 붕당 정치는 왕에 의해 처사가 결정된다는 모순점을 안고 있었고, 전제군주제가 더욱 공고화됨에 따라 견제를 상실한 세도정치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2.3.2.2. 진영논리
후기 붕당 정치에서는 진영논리에 휘말려 상대를 소인당이라 비하하고 자기네 당을 군자당이라고 미화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당내 의견에만 휘둘리고, 창의적인 의견은 신변 안전 문제로 나오지 못했다. 율곡 이이는 이를 두고 상대 당의 군자까지 싸잡아 소인으로 비하하는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했지만 이로 인한 색깔론 시비로 정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중종~명종 시기 정적을 몰아낼 때는 붕선 혐의가 많았고[31] 이준경이 죽으면서 선조에게 붕당을 경계하라는 말을 남겼을 때는 선조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나 조정에서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조광조가 죽게 된게 붕당 혐의인데 어따대고 붕당붕당거리냐? 저 인간 죽으면서도 헛소리하네?" 라는 반응이었다.

더욱이 붕당은 지역감정을 키웠다. 서인은 경기 남부, 충청도, 전라도 기반이고, 남인은 경상도와 전라남도 동부 쪽과 가까웠는데, 효종 때는 경상도 서인 유생들이 율곡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남인 유생들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쫓아내버리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2.3.2.3. 사회적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
따지고 보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가령 미국의 경우, 양당 체제가 구축되어 공화당과 민주당이 열심히 싸웠고, 심지어 남북전쟁이라는 빅 이벤트까지 벌이면서 유혈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노예제 철폐'와 같은 국가 운영과 직접 연관 있는 문제를 가지고 싸웠다. 조선 조정에서 붕당이 피튀기며 싸웠어도, 그 결과가 부국강병이나 현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다면 붕당이 이렇게 조선의 폐단으로 지적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조선 최고의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주제에 목숨 걸고 지능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장 임진왜란 때만 해도 문제가 발생했다. 서인황윤길을 정사로, 동인김성일을 부사로 삼아 일본에 통신사로 보냈었는데, 당장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담력이 있어보이고 조선을 침략할 것이다.'라고 했던 반면, 김성일은 '딱히 전쟁이 날 것 같지도 않구요, 히데요시도 별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상반된 답을 했던 것이다.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우선해 평상시 하던 전쟁 준비 정도만 하게 되었고,[32] 이는 20일만에 한성이 털리고 선조가 파천하는 막장 상황을 유발하게 되었다. 사실 조선도 여러 이유가 있어 율곡 이이십만양병설과 같은 극단적 전쟁대응체계를 택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란 초기의 혼란에 붕당 갈등이 미친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붕당 정치에서 중요한 문제들이 실제 조선 후기의 사회 문제 해결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왕위의 정통성과 같은 성리학적 문제는 결국 국가 체제에도 관련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가 국가 질서를 공고화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상당히 회의적이라 할 수 있으며, 국가 운영의 이념으로서 성리학을 논의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현대인들이 예송논쟁을 결국 '상복 얼마 입는지 정하는 하찮은 정쟁' 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은 결국 이 때문이다. '성리학적 국가 질서를 확고히 하자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그렇게 치고 받아서 현실적으로 뭐가 바뀌었는데? 상복 입는 기간? 왕의 정통성? 어차피 직계 후손이 툭하면 단절되어서 방계가 왕의 자식으로 입적되는 절차를 밟은 후, 왕을 하는 나라인데 무슨?' 이라고 물으면 뾰족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세습군주제의 특성 상 왕의 정통성 자체는 중요하나, 왕의 정통성 자체를 계속 따지는건 민주정으로 치환하면 선거불복 같은 행위로 국정 운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임은 마찬가지다. 차라리 예송논쟁을 빌미로 왕의 권한을 약화시켜 영국의 명예혁명처럼 보다 효율적인 정치체제로 바꾸거나 했다면 몰랐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예송논쟁 사이에는 경신대기근이 터졌으며[33] 2차 예송논쟁에서 현종이 보인 반응이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예송논쟁이 '조선의 정치체계가 선진적이기에' 과연 평화롭게 끝날 만해서 끝났는지조차 아리송하다.

요컨대 예송논쟁이 평화롭게 끝난 것 자체가 조선 현종의 끝을 모르는 아량 덕인 것이지, 왕권과 신권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조선의 선진적 시스템 덕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이다. 당장 현종이 '이 빌어먹을 놈들이 경신대기근 끝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는데 상복 가지고 지랄이지? 썩어빠진 니네 대가리 속에는 왕에 대한 공경도 백성에 대한 불쌍함도 없나 봐?' 딱 한 마디 했으면 바로 핏빛 숙청이 몰아닥쳤을 것이다. 당장 다음 임금인 숙종이 벌인 환국만 봐도 그렇다. 당장 경신환국의 빌미가 2차 예송논쟁이었다. 붕당이 선진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왕이 잘 참고 이야기 들어줘서 의미가 있었지 않았겠냐는 뜻이다.

결국, 붕당정치가 합리적인 정치적 토론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려면 다양한 이익집단의 의견을 반영하고 이념에 따라 그런 해결책을 각 붕당이 다르게 도출하는 구조를 갖춰 정치를 통해서 당시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도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붕당 정치에서의 논점들을 보면 붕당정치가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만한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붕당 정치의 옹호자들이 흔히 드는 사례가 대동법 등이 붕당 정치의 틀 안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이지만 이는 잘못되었다. 실제 대동법 논의 과정을 보면 이원익은 남인이고 김육은 서인인 등 대동법의 옹호자들은 딱히 붕당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대동법의 실시 여부나 그 결과가 붕당 간의 경쟁에 영향을 준 흔적도 없다. 대동법이 붕당 정치의 틀에서 논의되었다고 하려면 각 붕당이 대동법 실시 여부나 방법 등에 대해서 서로 다른 당론을 가지고 논쟁을 벌여서 이것이 각 붕당간의 발전적 경쟁으로 이어졌어야 하지만, 단지 대동법의 옹호자들이 이 붕당 저 붕당에 속해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동법이 붕당 정치의 틀 안에서 논의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대동법이 시행되게 된 원인인 '공납의 폐단'도 이미 율곡 이이가 지적한 사안이었다.(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그런데 붕당 정쟁에 휩쓸리면서 대동법이 조기에 시행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실학에서 주로 언급되던 북학파라든지 중농학파니 하는 이론은 당시 붕당 정치판에서는 주류가 아니었다. 붕당 싸움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 저런 생산적인 학문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마냥 농담만은 아닌 것이, 정약용의 저서 상당수가 유배 기간에 완성되었다.
2.3.2.4. 인사권의 구조적 문제
상기했듯 붕당의 형성은 대간의 강화와 그들에 대한 인사권자인 이조전랑과 관련된 문제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대간을 선출하는 방식인 통청(삼사 인사에 대한 추천)은 견제의 대상인 임금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 대간이 왕권을 견제한다고 하나 구조적으로는 실제로는 최종권력은 결국 왕에게 남아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대간이 언론적 기능을 한다고 말하나, 대간에 대한 추천권도 이조전랑이 독점 행사하는 구조는 다수의 언론과 민의를 전혀 반영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뚜렷했다. #

또한 이조전랑직은 그 후임자를 현임이 추천하는 구조이기에, 해먹던 파벌이 또 해먹으면서 점점 극단화되고 갈등을 키울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3. 중국

후한 말 십상시들에 영합하며 권세를 누리던 탁류, 그 반대파 청류가 있다.

중국의 붕당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귀족 가문의 후예와 과거로 등용된 신진 세력과의 마찰 과정에서 당 후기에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40년간의 당쟁을 우이당쟁이라고 부른다.[34] 여러 황제를 거쳐 전개된 이 붕당 정쟁은 당시 정쟁에 환멸을 느낀 황제가 두 당파를 모두 탄압하면서 종결되었다.

명나라 시기 환관 위충현을 따르는 엄당, 반대파인 동림당도 있다.

4. 관련 문서


[1] 사실 이 또한 점진적으로 발전한 것이지 제1공화국 시절 정당들은 전반적으로 당규 등의 요소들이 부실했다.[2] 쉽게 말하면 여론. 하지만 이것도 양반, 지주들의 여론이었지 농민과 같은 일반 평민의 여론은 세종 시절을 제외하면 반영한 적이 없다.[3] 언관들과 같이 젊고 유능한 관료들이었다.[4] 이 때문에 붕당들이 이조전랑직을 놓고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5] 정치에 입문하지 않고 지방에 두문불출하듯 자리잡고 있는 학문적 스승들을 말하며 제자들의 후학 양성에 힘쓴다. 사림(士林)과 뿌리는 같지만 근거지가 다른 셈이다.[6] 다만 두문동에서 72명의 사람들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가 사망했다는 것은 그냥 야사이다.[7]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8] 요즘으로 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를 공무원 몇 사람이 축약해서 선출했다고 보면 된다.[9] 그런데 아래의 중국의 붕당에서의 일 때문에 대명률에서 붕당을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붕당"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진 않았다. 사림파가 득세하는 과정에서 교묘하게 관원 대신 사림이 붕당의 주체가 된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갔다.[10] 동인은 기존 훈구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반면 서인은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11] 서인 가문들 중에는 훈구파 출신 가문들도 많았다.[12] 동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이황은 이미 1571년에 사망해서,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오르지 못한 1572년은 물론 심충겸의 이조전랑 취임 문제로 동서 분당이 발생한 1575년에도 개입할 수 없었다.[13] 초기 동인 우위 →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인한 동인의 타격 → 정철의 처벌에 따른 서인 몰락 등의 전개가 있었다. 다음 각주에 나온다.[14] 다만 정여립 사건으로 인해 다수파는 서인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조정의 의결 기준은 대간들의 다수결이 아닌 임금의 의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 남인(이원익), 서인(이항복), 남인(이덕형)이 삼정승 직을 맡았다.[16] 단, 예송논쟁 속에서 남인들의 송시열에 대한 비판은 사약을 넘어서 사사하고 남을 정도였다.[17] 2차 예송논쟁은 1674년에 끝났다.[18] 유배도 가벼운 유배가 아니라 무거운 유배로 변질되었다.[19] 노론이 소론, 남인을 마구 폄하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걸려서 다시는 붕당 안하겠다고 싹싹 빌며 울고불고 난리친 사건이 여럿 된다.[20] 벽파로 이어진다.[21] 이때쯤 되면, 친위세력을 이끌던 홍국영도 정조의 후원과 뒷배 덕분에 권력을 맛본 상태라 자기 여동생, 즉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내세워 권력욕을 보이던 시기라 새로운 척신이자 간신이 되어 간다.[22] 여기에는 온건론자들인 영조 시기의 탕평파의 상당수가 결국 시파에 들어갔던 것도 이유가 되었다.[23] 사실 이 문제는 맨처음 정통성 없다고 생각한 선조가 당시 우후죽순으로 유입된 사람들의 사이를 갈라서 자신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려는 것에서 시작하여, 역시나 폐주를 몰아낸 공 이외에 왕위순위에서 높지 않았던 인조가 자신의 정통성을 구축하려고 헛짓거리를 하다가 일을 키웠고, 역시나 왕실권위를 높이려고 하다가 일을 키운 현종에, 이 문제를 과격하게 처리하여 자신에게 힘을 집중시킨 숙종, 당파의 주장에 사로잡힌 경종, 왕이 조정자로서 붕당을 조정하려고 한 영조정조의 정책방향으로 결국 세도정치라는 폐단을 키웠다.[24] 엄밀하게 따지자면 김조순은 정조의 친위 세력으로 김조순 시기를 세도 정치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존재한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본격화되는 것은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의 시대부터이다. 다만 막후에서 여러 가문들과 정계를 좌지우지하였다는 측면에서는 세도정치라고할 수 있다.[25] 고려 무렵에는 유학이 단순히 도덕과 이상을 추구했지만, 고려 말부터 점차 실천 위주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신진 사대부가 권문세족들을 몰아낸 이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26]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지지하는 파벌로, 일부는 추축동맹에 반대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있다. 진주만 공습을 지휘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이소로쿠는 미국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했다. 2022년 시점에서 보면 그나마 정상적인 파벌이다.[27] 결국 이 과정을 통해 '북인'들은 아주 그냥 역적으로 낙인이 찍혀서 다시는 조정에 등장하지 못했다.[28] 효종 대 서인들은 원두표의 원당과 김자점의 낙당 그외에 산당, 한당이라는 4대 분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를 통합한 양반이 바로 송시열.[29] 다만 김자점은 죄를 받을 만 했다. 왜냐하면 김자점은 악행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30] 입헌군주정도 아닌 전제군주정인 조선 사회에서 붕당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31] 붕선이란 붕당을 선동한다는 것, 즉 붕당을 형성함을 이른다.[32] 당연하지만 조선도 엄연히 정상국가이고, 고려말부터 왜구의 침략으로 고생하던 한편, 당시 기준 꽤 최근에 을묘왜변까지 겪었으므로 기초적인 방위체계 정비는 당연히 했다. 여기서 언급하는 '전쟁 준비'는 풍신수길의 20만 드랍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전면전'에 대응할 수 있는 한타 싸움 병력 및 방어시설 확충 여부의 의미고,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조선은 이 정도 수준의 준비는 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히젠 나고야성까지 쌓아가며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말이다.[33] 이 때는 예송과 관련된 상소가 올라오지 않았다. 애당초 4대문 안에서 사대부가 기아로 고통받고, 고위 관료도 죽어나가는 막장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랬다.[34] 붕당의 두 영수라고 하는 우승유와 이덕유의 성을 따서 이렇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