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명나라 후반 17세기의 당파. 궁중에서 환관의 힘이 강해져서 관료들 가운데 나타난 반(反)환관 세력이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을 거점으로 삼아 동림당 혹은 동림파라고 불렸다. 이에 반하여 위충현과 친환관 세력은 동림당 측에서 비하하는 '엄당'이라고 불렸다.동림서원은 본래 송나라 때, 양시(楊時)가 개창한 서원인데, 명나라 때는 고헌성(顧憲成)이 귀향한 뒤 고향 마을의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재건하였다. 고헌성은 명나라 후기에 인기를 끌었던 왕양명의 양명학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양명학에서는 인간의 양심인 '양지'를 강조하였으나 명나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실천적이고 수양적인 부분은 사라진 채 인간의 욕망이나 본능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면서 사회 기강이 흐트러지는 풍조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헌성은 주자학을 새롭게 연구하게 되었다.
2. 역사
고헌성이 정부 쇄신을 강조하며 수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당시 명나라의 황제는 정무 거부로 유명한 만력제였다. 결국 누차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헌성은 귀향을 선택하고 송대에 매우 유명했던 동림서원을 복구하고 유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되자 많은 유학자들이 동림서원을 찾아와 학문을 공부를 하면서 말기 증상을 보이던 명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림서원이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게 되어 당대에 이들을 '동림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만력22년(1594년) 고헌성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인사 추천에 분개한 만력제가 고헌성을 파직하고 귀향시킨 이후, 절강성 영파(寧波) 출신 심일관(沈一貫)을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로 입각(內閣)시키고, 만력29년(1601년) 심일관을 수보내각대학사(首輔內閣大學士)로 임명하였다. 심일관은 요종문(姚宗文), 유정원(劉廷元), 방종철(方從哲) 등 절강 출신 사인들을 기용하면서 절당(浙黨)을 조직하였다. 이후, 관응진(官應震)과 오량사(吳亮嗣)를 주축으로 하는 초당(楚黨), 산동 출신 기시교(亓詩教)를 주축으로 하는 제당(齊黨)이 절당에 가세하여 제초절당(齊楚浙黨)이 만들어졌다. 제초절당은 '비동림당(非東林黨) 또는 반동림당(反東林黨)'이라 지칭되었고, 동림당을 공격하였으니, 이를 이르러 동림전쟁(東林戰爭)이라 한다.
만력제가 1620년 붕어하고 천계제가 즉위하자[1] 동림당이 정치 일선에 잠시 복귀했으나[2], 천계제 역시 정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권력을 환관 위충현에게 몰아줬다. 위충현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동림당을 눈에 가시로 여기고 반동림당 세력을 결집해 동림당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고 아예 1625년에는 학문적 근거지였던 동림서원도 파괴해 권력 일선에서 다시 몰아냈다. 숭정제가 즉위하여 위충헌이 몰락하자 동림당은 다시 재건되었다.
3. 평가
동림당은 자신들 스스로를 부패하고 사악한 환관 세력인 엄당에 맞서 싸우는 정인군자라고 자처하였다. 하지만 사정을 자세히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동림당 출신 중에서도 엄당과 결탁하여 자기 잇속을 채우는 부패한 무리들도 있었으며 1644년 명나라에 맞선 반란군 대장인 이자성이 북경에 쳐들어와 숭정제가 자살하자 아예 이자성한테 빌붙어서 "대왕께서는 무공과 덕이 고대의 성군인 탕임금과 요순보다 더 낫습니다."라고 낮부끄럽게 아부를 떨던 자들도 나타났다.또한 동림당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반대파인 엄당을 극도로 증오하였고, 엄당 역시 동림당을 증오하여 서로 간의 당파 싸움이 매우 심하게 벌어졌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러한 당파 싸움이 명나라 말엽 조정의 내분을 극도로 격화시켜 국가 단합을 저해하고 결국 명나라가 청나라에 힘없이 무너지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