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21:46:52

장(성씨)

장씨에서 넘어옴
한국의 성씨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a495,#2d2f34><colcolor=#fff> · · · · · 강전 · · · · · · · · · · · · · · · · · · · · ·
· · · 남궁 · · · · ·
· · · · · · · 독고 · · · 동방 · · · 등정
· · · · · · · ·
· · 망절 · · · · · · · · 무본 · · · ·
· · · · · · · · · · · · · ·
· 사공 · · · · · 서문 · · · 선우 · · · · · 소봉 · · · · · · · · ·
· · · · · · 어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장곡 · · · · · · 제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파일:하위 문서 아이콘.svg   하위 문서: 장(성씨)/목록
,
,
,
,
,
#!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

1. 개요2. 종류
2.1. 張
2.1.1. 인동 장씨2.1.2. 안동 장씨2.1.3. 단양 장씨2.1.4. 흥덕(흥성) 장씨2.1.5. 울진 장씨2.1.6. 결성 장씨2.1.7. 덕수 장씨2.1.8. 목천 장씨2.1.9. 구례 장씨2.1.10. 순천 장씨2.1.11. 옥구(옥성) 장씨
2.2. 蔣2.3. 章2.4. 莊2.5. 長
3. 나무위키에 등재된 장씨
<colbgcolor=#dddddd,#222>로마자 표기
RR식 표기 Jang
MR식 표기 Chang
통용 표기 Jang

1. 개요

한국중국에서 볼 수 있는 성씨이다.

한자로는 베풀 장(張), 글 장(章), 씩씩할 장(莊), 줄 장(蔣), 길 장(長) 등의 글자를 사용하며, 이 중 張씨가 97%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로마자 표기는 보통 Jang으로 한다. 2011년 외교부 여권 통계에 따르면 Jang이 약 75%, Chang이 약 24%, Jhang 등 기타 표기는 1% 미만이다.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Jang,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르면 Chang이다.[1]

한국의 장씨들 중 장씨(張氏)는 2015년 992,721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인구 순위는 9위이며 대한민국 전체 인구(2015년 당시 51,069,375명) 중 약 1.94%를 차지했다.

2. 종류

2.1.

'장씨' 하면 통상적으로 이쪽이고 중국을 비롯한[2] 아시아 및 북미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그 수는 1억 명을 넘는다. 이씨에 이어 전세계에서 2번째나 3번째로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3] 대한민국에서도 9번째로 많은 성씨이며 인구는 2015년 통계청 기준으로 992,721명. 인동 장씨, 안동 장씨, 단양 장씨, 순천 장씨, 부안 장씨, 흥성 장씨, 결성 장씨, 목천 장씨, 덕수 장씨(德水 張氏), 울진 장씨, 옥구 장씨[4], 구례(봉성) 장씨, 절강 장씨[5], 태원 장씨, 농서 장씨, 창녕 장씨 등이 있다. 인구 수도 가장 많고 인지도 또한 가장 높은 본관은 인동 장씨다.

2.1.1. 인동 장씨

인동(옥산) 장씨의 인구는 593,320명(2000년 통계청)[6], 681,825명(2015년 통계청)[7]으로 대한민국 장(張)씨의 2/3 이상을 차지한다.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도 전국 12위에 이를 정도로 상위권에 속해 있다.

인구가 많은 만큼 현재 전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경상도 지역에 특히 거주 밀도가 높다. 또한 전라남도에서도 비교적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8]

장씨 성을 가진 유명인물들 대다수도 여기에 속한다. 장씨 성씨 중 가장 많은 수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역대 인물로 조선조 중기 대표 성리학자 장현광, 팔도도원수 장만, 삼도군통제사 장태소, 삼도수군통제사 장지항, 경상북도관찰사 장승원, 경기도관찰사 장헌상, 조선조 후기 대표 재야 유학자·교육자 장복추, 어영대장 장현택 등 많은 명현석학을 배출하였다. 장희빈도 인동 장씨이다. 근현대 인물로는 장지연, 장택상, 장면, 장기영, 장도영, 장재식, 장태완, 장기오, 장상, 장세동, 장하성, 장하준, 장하석, 장제원 등이 있으며 경북 구미시장 장세용, 1996년 서울대 인문계 수석 합격자이자 변호사인 장승수 또한 인동 장씨이다. 근현대 기업인으로는 장직상, 장길상, 애경그룹 회장 장영신, 동국제강 회장 장경호장세주, 한국철강 사장 장세홍 등이 있으며 특히 기업 오너 경영인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예계 및 체육계 인물로는 가수 장우혁, 장윤정, 개그우먼 장도연, 장동민, 장효인, 배우 장가현, 장근석, 장동건, 장현성, 장희령, 재일교포 야구인 장훈, 역도 선수 장미란, 미스코리아 장윤정, 아나운서 장예원, 래퍼 토미보이(장동현), NO:EL(장용준), 전 프로게이머이자 해설자 DawN(장현재), 트위치 스트리머 괴물쥐(장지환), 배우 겸 가수 장규리, 가수 장동우, 장문복, 장송호, 장현승 등이 있다.

2.1.2. 안동 장씨

인구는 83,961명(2000년 통계청)에서 39,939명(2015년 통계청)으로 줄었다. 이는 조사 방법의 차이에 따른 것으로, 스스로 안동 장씨로 알고 있던 수만 명이 인동 장씨로 등록된 상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본관인 경상북도 안동시를 비롯한 경북 지역, 그리고 함경도 일대에도 많이 거주한다.

유명 인물로는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장계향, 장기려, 장준하, 장운서, 장성규, 헤이즈, 장지선, 장기하 등이 있다.

시조는 장정필로, 후삼국시대에 김선평(안동 김씨 시조), 권행(안동 권씨 시조)과 함께 왕건에게 공을 세워 성씨를 하사받은 삼태사 중 한 명이다.

2.1.3. 단양 장씨

인구는 33,295명(2000년 통계청), 44,334명(2015년 통계청)이다.

2.1.4. 흥덕(흥성) 장씨

인구는 44,705명(2000년 통계청), 59,396명(2015년 통계청)[9]으로 전체 장씨 중 3위이다. 본관인 흥덕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을 가리킨다.

시조는 나말여초에 중국에 유학하고 고려에서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지낸 장유(張儒)로, 흥덕은 그의 고향이다. 고려 초 중국 사신들을 맞는 역할이었다고 한다.

유명인으로는 고려의 장연우, 조선 연산군장녹수#, 장서희, 장종훈, 매일경제신문 사주 장대환, 장선우, 장태평, 장동열, 장병완, 장윤창, 장종훈 등이 있다.

2.1.5. 울진 장씨

인구는 20,791명(2000년 통계청), 26,374명(2015년 통계청)이다.

2.1.6. 결성 장씨

인구는 21,068명(2000년 통계청), 24,921명(2015년 통계청)이다.

항렬자는 다음과 같다. 장정필을 1세로 한다. 홀수 세수의 항렬자는 이름 뒤에, 짝수 세수의 항렬자는 이름 앞에 오는 것으로 보인다.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41 淳(순) 47 植(식) 53 烈(열)
42 來(래) 48 赫(혁) 54 遠(원)
43 勳(훈) 49 珪(규) 55 鎬(호)
44 均(균) 50 鏞(용) 56 漢(한)
45 善(선) 51 演(연)
46 澤(택) 52 東(동)

2.1.7. 덕수 장씨

인구는 21,006명(2000년 통계청), 24,185명(2015년 통계청)이다.

이칭 풍덕 장씨(豊德 張氏). 위구르에서 유래한 성씨이다. 시조 장순용(張舜龍)은 회회인(回回人), 정확히는 위구르계 무슬림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백창(張伯昌)으로, 원나라 세조 때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냈다. <덕수장씨족보(德水張氏族譜)>와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장순용은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왔고 1275년(충렬왕 원년)에 고려에 귀화했다.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져 덕수현(德水縣)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으므로 후손들이 덕수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효종의 왕후 인선왕후가 덕수 장씨이다.

2.1.8. 목천 장씨

인구는 11,160명(2000년 통계청), 15,740명(2015년 통계청)이다.

2.1.9. 구례 장씨

인구는 10,570명(2000년 통계청), 15,571명(2015년 통계청)이다.

2.1.10. 순천 장씨

인구는 10,086명(2000년 통계청), 13,317명(2015년 통계청)이다.

2.1.11. 옥구(옥성) 장씨

인구는 5,708명(2000년 통계청), 6,536명(2015년 통계청)[10]이며, 서울시를 제외한 청주와 광주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회미(澮尾) 장씨라고도 하는데, 회미는 지금의 군산시 회현면으로 옥구읍 바로 옆에 있다.

2.2.

장(蔣)씨는 전승에 따르면 주공단의 삼남 령(齡)이 기원전 11세기경에 장백(蔣伯)이 되어 세운 희성(姬姓)제후국 장(蔣)나라[11]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12] 일설에는 장나라가 전국시대에 망한 후 왕과 귀족 및 그 백성들이 국호를 성으로 하면서 내려온 성이라고도 한다. 중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장제스가 있으며, 삼국지의 촉한 재상 장완, 유세객 장간, 오나라 장군 장흠, 위나라 태위 장제 등이 유명하다.[13]

한국에서는 아산 장(蔣)씨의 시조인 장서(蔣壻)가 송나라의 신경위대장군이었는데 고려 예종 시절에 금나라의 침입을 당한 후 한반도에 망명하여 아산군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또한 4세(世) 장숭(蔣崇)이 영남의 청류 명문가와 통혼한 인연으로 영남지역에도 후손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세종 시절의 최고의 발명가인 장영실이 이 장(蔣, 아산 장씨)씨라고 한다. 이외에도 정몽주의 문인으로 확인된 장성발(蔣成發)[14], 김종직의 문인이자 경기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절의를 지켜 은둔하다 노년에 온성부사[15]로 조선시대 4군6진의 북방경계선을 안정화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한 장처용(蔣處勇) 등 고려와 조선 시대에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의병장으로도 장희춘[16], 장문익, 장헌문 등이 활약하였다. 또한 시조 장서 이전에도 장극맹(蔣劇孟)이 거란과의 3차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천리장성 방어선을 구축하던 고려 덕종 때 병부상서 및 상서우복야[17]를 역임하였고, 대각국사 의천이 진행한 속대장경으로 알려진 교장의 목판의 글씨를 장모가 구양순의 서체로 썼다는 사실이 현존하는 대반열반경소에 나타나는 등[18] 蔣씨 인물들이 한반도에서 활발하게 활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구는 21,508명이다.

현대 인물들 중에서는 국회의원 장영모소설가 장정일,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 전투의 영웅 장세풍 중령 등이 유명하다. 본관은 충청도에 있지만, 대부분 영남 지방에 존재하므로 경상도 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2.3.

장(章)씨는 본래 강(姜)씨에서 유래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시조인 강태공(姜太公)의 증손자 강호(姜虎)가 장국(鄣國)을 세운 장목공(鄣穆公)이다. 장목공(鄣穆公) 강호(姜虎)의 아버지가 강은(姜隐)이고, 강은의 아버지가 제나라 2대 군주인 제정공(齊丁公)이며, 강태공의 아들이다. 장목공(鄣穆公)의 후손이 14대 약 500년(기원전 11세기~기원전 664년)에 걸쳐 장국(鄣國)을 통치하였고, 장국(鄣國)이 망하자 후손들이 鄣의 우부방 阝을 떼고 장씨(章氏)를 성씨로 삼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장국(鄣國)의 수도는 오늘날 산동성 장성촌(鄣城村)이다.

무신보(戊申譜) 에 따르면 장씨는 중국 남당(南唐)때 건주자사(建州刺史)를 지낸 장자조(章仔釣)를 시조로 한다. 그 아들 장빈(章賓)은 송나라 진종 때 형부낭중을 했으며, 십수대에 걸쳐 번성하였고, 그 후손 장감(章鑑)이 남송에서 1274~1275년 우승상을 지내다 잔혹한 몽골의 정복전쟁을 피하여 고려(高麗)로 귀화하여 벼슬을 음습(蔭襲)했으나 소목이 분명치 않다.

거창 장(章)씨의 시조 장종행(章宗行)은 자는 평보(平甫)이며, 고려 충렬왕 때 광록대부 판도판서 예문관대제학 겸 춘추관사를 지냈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고려의 대학자 안향의 사위로 장씨보에 전한다. 그 아들 장두민(章斗民)은 충숙왕 때 광정대부 판삼사사를 지내고, 충혜왕이 원나라에 갈 때 배행했으며, 공민왕 때에는 홍건적의 난으로 수도 개성이 함락된 위기 상황에 상장군으로 나서 홍건적을 토평한 공으로 아림군(거창군의 옛이름)에 봉해져, 거창을 본관으로 삼게되었다. 장두민(章斗民)은 고려 대학자 역동 우탁의 사위이고, 그의 아들 장영순(章永巡)은 고려의 절신 이양중(李養中)의 사위로 공민왕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보문각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장두민의 손자 장대장(章大莊)은 공양왕 때 돈령부부정을 지내다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벼슬을 버리고 거창으로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조선개국 후 거창 일대에 은둔 했지만 국란에는 어김없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의로운 선조가 많다.
임진왜란 때 장헌휘, 장헌부, 장헌서 삼형제가 모두 전투에 참가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장헌휘(章獻輝)는 통덕랑훈련원정(通德郞訓鍊院正)으로 충무공을 따라 노량 해전에서 순절하였고, 장헌부(章獻富)는 통훈대부훈련원주부(通訓大夫訓練院主簿)로 당숙 장응해(章應海)와 함께 거창일대에서 의병 수백명을 일으켜 진주성 전투에서 싸우다가 장열히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봉되고, 후에 병조 참의로 추증되었다. 장헌서(章獻瑞)도 무과 급제 후 판관(判官)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장만리(章萬里)는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6진에서 변란을 일으키자 자원하여 전투에 참가하여 여러차례 뛰어난 전공을 세웠고,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왜군이 지척에 닿은 위기에 왕을 직접 업고 십여리의 빗길을 달려 왜군의 칼날을 피한 공으로, ‘영세불망자(永世不忘子)’ 교지를 받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 책봉되었다. 후에 승지(承旨)로 증직되었으며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장일남(章逸男)은 무과 급제 후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에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 후 적을 막았으며, 소현세자를 심양(瀋陽)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장봉익(章鳳翼)은 영조 무신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과거 급제자로는 1728년(영조 4) 한량(閑良)으로서 별시 무과에 병과 480위로 급제한 장위한(章緯漢, 1699 ~ ?)이 보인다. 당시 본관과 거주지 모두 거창(居昌)이었고, 자는 순징(舜徵), 아버지는 현신교위(顯信校尉) 장시걸(章時傑)이었다.

현대 인물로는 독립유공자 장화윤(章化潤)이 있다. 장화윤 애국지사는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 1919년 고향 창성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창성군에서 항일독립운동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1920년 또 한번 체포돼 징역 2년6개월형을 받고 다시 옥에 갇혔다. 갖은 고문 끝에 그는 결국 불구의 몸으로 출옥했지만 중국 산서성으로 망명해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현대 인물로는 한국남동발전 사장을 지낸 장도수(章道秀)와 음악평론가인 장일범(章一範)이 있다.

인구는 2015년 기준 5,764명이다.

2.4.

장(莊)씨도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인데 유명한 인물로는 장자가 있다.

본관은 금천(衿川), 전주(全州), 봉산(鳳山) 등이 보인다. 금천 장씨의 시조는 장숙(莊叔)이다. 장숙은 금천현(衿川縣)의 아전 출신으로 1414년(태종 14) 식년 생원시에 3등 26위로 입격한 뒤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 이후 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 19위로 급제해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또한 1773년(영조 49) 별무사(別武士)로서 증광 무과에 병과 33위로 급제한 장인대(莊麟大, 1737 ~ ?)도 본관이 금천이었다. 장인대는 당시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에 거주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학생(學生) 장귀찰(莊貴札)이었다.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인물로는 1882년(고종 19) 별시 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한 유학(幼學) 장석황(莊錫滉, 1861 ~ ?)[19]이 있었다. 당시 거주지는 평안도 평양부였고, 아버지는 유학 장제철(莊濟喆)[20]이었다.

봉산을 본관으로 하는 인물로는 1637년(인조 15) 겸사복(兼司僕)으로 별시 무과에 병과 4515위로 급제한 장업룡(莊業龍, 1568 ~ ?)이 있었다. 장업룡은 당시 한성부에 거주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보인(保人) 장업(莊業)이었다. 아래로 남동생 장업련(莊業連)이 있었다.

한명제 즉위 당시에는 피휘로 인하여 엄(嚴)씨로 성을 갈아야 했던 일이 있었으나 워낙 오래된 일이라(신라 시대) 현대 엄씨와의 연관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적 인물이 많은 것에 비해 현대 인물이 거의 없는 이유는 해당 성씨가 북한에 대부분 거주하였기 때문인데 실제로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총 122가구 중 남한지역 거주 가구수는 전체의 약 3%인 4가구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북한지역에 거주했다.

인구는 445명으로 장씨 중 두 번째로 적다.

2.5.

장(長)씨는 역시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인데 상당히 희귀한 성씨라서 본관과 시조도 불투명하다. 인구도 400여명으로 장씨 중 가장 적다.

3. 나무위키에 등재된 장씨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장(성씨)/목록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중국에서는 Zhang(張/章), Zhuang(莊), Jiang(蔣)으로 표기한다. 張씨의 경우 대만에서는 Chang으로, 홍콩, 마카오에서는 Zoeng 또는 Cheung(쬥)으로, 민남어로는 Teo(티오)로 표기한다. 베트남에서는 Trương(뜨엉)으로 표기한다.[2] 한국 고사성어로 치면 갑남을녀 정도의 의미를 갖는 장삼이사(张三李四)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 흔한 성씨 중 하나이다. 이(李)씨와 왕(王)씨가 1, 2위를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는 반면에 장씨는 부동의 3위를 유지하고 있다. 대만에서도 장(張)씨가 4위에 들 정도로 많다. 대표적으로 장비, 장료, 장로삼국지에도 흔히 등장하는 성씨이며, 장위안도 베풀 장을 쓴다.[3] 전세계 성씨 순위는 각 나라에서 정확한 데이터를 제공을 안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을 할 뿐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s_of_most_common_surnames[4] 이칭 예산 장씨. 그 계보에 대해선 구보서는 장원 - 장정필 - 장익을, 신보서에서는 장보고 - 장경 - 장익을 주장한다.[5] 시조 장해빈이 임진왜란 당시 귀화한 중국 절강 출신 장수이다. 덕수 장씨, 옥구 장씨와 더불어 張씨 중에는 이 세 장씨만이 도시조가 다르다.[6] 인동 591,315명, 옥산 2,005명.[7] 인동 666,652명, 옥산 15,173명.[8] 전라남도 고흥군을 비롯한 남해안 지역[9] 흥덕 37,423명, 흥성 21,973명.[10] 옥구 6,051명, 회미 485명.[11] 주나라 시대 제후국 분포도 지도(간체자 버전)에 따르면 회수 중류 이남에 세워졌던 제후국으로 보인다.[12] 주나라 무왕의 둘째 아들 장(蔣)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13] 이각, 곽사와 함께한 군벌 장제하고는 다른 인물이다.[14] 한국학중앙연구원 웹사이트의 조선유현연원도 10a 페이지에 정몽주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15] 후에 신립이 역임하였다고 한다.[16] 문신이자 학자이기도 했다.[17] 고려사 세가 권제5, 덕종 즉위년(1031) 7월 5일 조. 이 시기 유소에 의해 건설된 고려 천리장성을 진정한 방어선으로 만들기 위해 변경에서 조직과 편제를 정비하고 관리하는 데 매진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아쉽게도 상세한 사료가 없다.[18] 보물 90호 대반열반경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2,00900000,36&pageNo=1_1_1_0[19] 1883년 2월 12일 장석홍(莊錫泓)으로 개명했다.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정7품), 권지(權知) 성균관 학유(學諭, 종9품), 겸(兼) 양현고(養賢庫) 봉사(奉事, 종8품), 성균관 학록(學錄, 정9품), 성균관 박사(博士, 정7품), 양현고 직장(直長, 종7품),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 부사직(副司直, 종5품), 맹산현감(孟山縣監, 종6품), 예조 좌랑(佐郞, 정6품), 병조 좌랑 등을 역임했다.[20] 1884년(고종 21) 7월 22일, 나이 70세를 맞이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이튿날인 7월 23일 부호군(副護軍, 종4품)에 임명되었다. 1885년 12월 14일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임명되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