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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9 09:30:35

일본사의 후궁 제도

1. 개요2. 덴무 덴노 이전3. 아스카 시대 말기부터 나라 시대까지4. 헤이안 시대5. 내시사6. 헤이안 시대 말기 이후7. 근현대8. 번외: 오오쿠

1. 개요

일본사에 나오는 후궁 제도.

2. 덴무 덴노 이전

야마토倭의 왕권이 형성된 고훈 시대아스카 시대 초기에는 군주를 칭하는 명칭이 오키미(大王)였고, 정실은 오키사키(王后/王後)라고 칭했다.[1] 덴무 덴노 이후부터 국호가 야마토大和에서 일본日本으로 바뀌고 군주 명칭이 천황天皇으로 바뀌면서 정실의 명칭은 황후(皇后)로 승격되었다.

3. 아스카 시대 말기부터 나라 시대까지

정실의 명칭이 황후로 승격되었으며, 왕비의 호칭이 사라진다. 당풍(唐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라 시대로 가면 3부인 9빈 제도를 가져와서 사용했는데, 채녀를 볼 때 27세부나 81어처 비슷한 직책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 헤이안 시대

나라 시대 말미 코닌 덴노 시절에 처음으로 고유의 관등으로 여유(女嬬)가 나타나고 헤이안 시대의 시작을 연 간무 덴노의 시기에는 여어(女御)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다. 사실 주례에서 여어는 후궁을 모시는 시녀로 호칭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유래된 단어는 맞다. 이후 여유의 호칭은 사용되지 않는다.

이후 상시(尚侍)라는 명칭이 간무 덴노의 아들 헤이제이 덴노 때 처음 사용되며 갱의(更衣)가 준나 덴노 시절에 처음 사용된다. 여유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만 사용되었다 사장된다. 부인과 빈은 해당 호칭들이 나타나면서 사라졌으며, 비와 궁인의 호칭은 어느 정도 살아남아 궁인이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가 사라진다.

다이고 덴노의 갱의(更衣) 중 하나인 후지와라노 쿠와코(藤原 桑子)가 풍어식소(楓御息所)라고 불리면서 어식소(御息所)가 처음으로 사용되었지만 갱의에게 붙이는 특별호칭이었으며 어식소(御息所)는 몇몇 갱의에게 붙여주는 칭호로 사용되었던 호칭이다. 상시는 원래 음독인 しょうじ었는데, 무라카미 덴노의 죠간 덴노 상시(貞観殿尚侍)부터는 상시를 ないしのかみ라고 부르게 된다.

이 시대에는 후지와라씨 섭관정치의 권력다툼 때문에 일부다처제가 나타나기도 했다.

5. 내시사

[ruby(內侍司 ,ruby=ないしのつかさ)]

헤이안 시대에 정립된 일본의 궁녀 제도.

내시사에 속한 궁녀들은 '시녀'라는 뜻을 가진 여방(女房)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신분 높은 사람의 바로 측근으로서 모든 일을 대신 처리하기 때문에 교양 있고 똑똑하며 어느 정도 신분이 있어야 했다. 신변의 일처리, 편지 심부름, 둘을 이어주거나 구혼 상대를 부르기 위해 상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 아이들의 교육과 유모 역이 모두 여방의 담당이었다. 즉 단순한 시녀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들을 수행한 것이다. 다만 하급 궁녀로 가면 조선시대 궁녀들처럼 잡일 담당이었다. 후궁들은 신분이 높을수록 많은 수의 시녀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몇몇은 천황의 총애를 받아 자식을 가지는 등 후궁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내시사의 후궁이기 때문에 첩보다는 정부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6. 헤이안 시대 말기 이후

황실이 혼란에 빠지고 권위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본래 내시사의 시녀들에게 사용하던 해당 명칭들이 후궁의 명칭으로 자리잡았으며, 헤이안 시대에 주로 사용된 후궁의 명칭들이 소실된 대신 사라졌던 비나 궁인의 호칭이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미야스도코로는 후궁의 명칭이 아닌 동궁비나 친왕비를 칭하는 명칭이 되었으며, 이 또한 시대가 지나면서 사라진다. 수백 년간의 혼란기를 거쳐 사회가 자리잡힌 이후에는 다시 여어를 사용했지만, 변함없이 후궁의 명칭이나 다름없어진 궁녀들의 호칭을 사용했다.

후지와라 씨족의 셋칸정치가 몰락하면서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처제로 돌아왔지만, 황후가 아닌 중궁의 호칭이 더 일반적이었다.

7. 근현대

메이지 덴노의 처인 쇼켄 황후는 처음에는 여어(女御)였다고 하며, 이외에도 여러 후궁이 있었다. 메이지 덴노의 자식들은 5남 10녀의 총 15명이었지만 요절한 자식들이 많았으며 아들은 야나기하라 나루코 소생 3남 요시히토 하나만 살아남았고 딸들은 전부 소노 사치코의 4명만 살아남아서 결국 다이쇼 덴노는 불임이었던 쇼켄 황후의 양자가 된다.

다이쇼 덴노는 공식적으로 후궁을 들이지 않았고, 데이메이 황후가 아들 넷을 낳았으니 후계를 명목으로 한 후궁 역시 불필요했다. 이후 1922년에 섭정이었던 히로히토 황태자는 후궁 제도를 폐지할 것을 공언하고, 여어들을 미혼 여자에서 기혼 여자로 바꾸고 황거에서 숙식하던 것에서 외부에 거처를 마련해 출퇴근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후궁 제도에 비판적이었던 히로히토 황태자가 1926년에 쇼와 덴노로 즉위하면서 후궁 제도는 폐지된다.

후궁 제도를 폐지한 쇼와 덴노는 고준 황후와의 사이에서 딸만 줄줄이 4명을 낳는 바람에, 당시 일본 사회에서 측실 제도 부활이 거론된 바 있다. 그러나 쇼와 덴노가 이를 거부하고 고준 황후가 간신히 두 아들(아키히토, 마사히토)을 낳아서 잠잠해졌다.

현대 일본은 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이후로 여권 신장이 이루어져 아무리 황후가 아들을 못낳아도 후궁을 들일 가능성은 없어졌다. 현대 일본 황실은 황위를 계승할 남계 후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이 2005년에 측실(후궁)제도 부활 주장을 대놓고 잡지에 기고한 바 있으나 국내외를 불문하고 "구시대적인 발상"이라며 무시당했다.

8. 번외: 오오쿠

막부쇼군은 이들의 처첩을 칭하는 별다른 호칭이나 거주 구역은 없었다. 하지만 에도 시대에 접어들어 에도 막부에 쇼군의 후궁인 오오쿠가 만들어졌다. 카스가노츠보네가 만들었으며, 오만노카타 이후 거대하고 호화로운 오오쿠의 형태로 완성된다.

오만노카타 이후에 교토 공가 귀족풍으로 바뀐 만큼 엄격한 계급제였다. 쇼군의 자식을 낳아야 '様(님)'라는 경칭이 붙으며 측실로 인정되었으며, 그 전까지는 그냥 오오쿠에서 쇼군과 쇼군의 정실인 미다이도코로의 시중을 드는 고용인에 불과했다.

[1] 後는 한자로는 뒤라는 뜻이지만 임금이라는 뜻도 있어서 전한 시대에 황후를 황후皇後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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