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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50A3E5><colbgcolor=#000> 연희공략 등장인물 납란 순설 | |||
이름 | 납란 순설 (納蘭 淳雪)[1] | ||
배우 | 이춘원(李春嫒) | ||
민족 | 만주족 납란부 | ||
가족관계 | 증조부: 납란 명주 아버지: 납란 영수 어머니: 관씨[2] 남편: 건륭제 아들: 10황자 영모 | ||
거주지 | 저수궁 | ||
<rowcolor=#50A3E5> 품계 | 5품 | 4품 | 3품 |
서(舒)귀인 → | 서빈 → | 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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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희공략의 등장인물. 건륭제의 후궁인 서비 예허나라씨, 혹은 엽혁나랍씨를 모티브로 하는 인물이다.2. 작중 행적
2.1. 입궁 초기
순설은 본디 만주 8대가문(정황기 엽혁나랍씨 금태석 가문)으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으로 짐작된다.[3] 건륭 6년에 16살의 나이로 수녀 선발에 임하였고, 거기서 합격하면서 바로 귀인이 되었다.1화에서 항상 같이 다니던 친구들인 오아 청대[4]와 육만만과 함께 궁에 온 것으로 첫 등장하였다. 그런데 위영락의 계략에 빠진 오아 청대는 전족을 했다는 사실이 황제에게 들통나고, 바로 자금성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같이 연루되어 벌을 받게 되었다. 그 직후에 순설은 황제와 황후, 고귀비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왜 귀를 세 군데를 뚫었냐는 황제의 물음에 순설은 "신녀의 부친 말씀이 귀에 세 개의 귀걸이를 하는 것과 화분저 신발을 신는 건 조상님들로부터 이어 받은 풍습이라 하셨는데 만약 이런 풍습을 버리고 한족 여인처럼 하나의 귀걸이를 하면 조상님들을 잊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폐하?"[5] 라는 대답을 하여 황제를 만족시켜 바로 합격되는 것도 모자라서 귀인에 봉해지게 된다.
합격 직후 순설은 절친한 언니인 오아 청대를 골로 보낸 영락에게 이를 갈면서 언젠가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얼마 못 가고 청대에 관한 걸 깡끄리 잊어버렸다. 후궁이 된 순설은 황제의 총애를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없었는데 순설은 작게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크게는 가문의 생존을 위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싶었다.
허나 황제는 보친왕 시절부터 함께한 비빈들 위주로 총애를 줬기에 신입인 순설에게는 좀처럼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 시기, 가장 큰 총애를 받은 사람은 바로 황제가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황후였고, 그 다음이 고가씨 가문에 유능한 인재가 많기 때문에 그들을 달래주기 위해 형식적으로나마 아껴주는 시늉이라도 하던 고귀비였다. 그래서 순설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황제의 승은을 입으려고 머리를 굴린다.
그리고 때마침 황후가 황제에 대한 오해가 풀리면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다시 내명부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후궁의 판도가 황후 쪽에 무게가 실리게 됐다. 그리하여 순설은 이빈이 고귀비에 의해 모욕을 당하다가 자살하였음에도 황후가 병사하였다고 주장하자 "황후마마께서 틀리실 리가 없죠. 병사가 맞을 겁니다."라고 하면서 황후의 눈에 들려고 애를 쓴다.[6] 그러나 이때 황후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황후의 안위만을 신경쓰는 시녀 명옥이 있었다. 명옥은 평소에 황후가 다른 후궁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기를 원하여 황후를 찾아온 순설에게 무례하게 굴어 그녀를 내쫓았는데 결국 이 때문에 순설은 고귀비에게 접촉을 시도했다.[7]
2.2. 고귀비에게로 환승
그런데 순설은 본래 고귀비를 전혀 신경쓰고 살지 않았다가 갑자기 고귀비를 찾아갔다는 게 문제. 순설은 평소에 아프다는 핑계로 고귀비한테 문안 인사 한 번을 안 갔는데 이제 와서 인사라니? 아무리 고귀비가 머리가 나쁘기로서니 순설이 불순한 뜻으로 자길 찾아왔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순설은 "제가 나중에 잘나가게 될지 어떻게 알아요?"라고 당당한 태도로 말하며 고귀비의 심복이 된다. 때마침 고귀비는 기존의 심복이었던 대가빈이 몰락해 새로운 조력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순설도 나름 계략에 능한 사람이라 고귀비를 도와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닌다.우선 고귀비의 눈에 들기 위해 위영락을 해치려고 드는데, 첫 번째 시도는 바로 황제의 생일에 유리불탑 속 사리를 이용해 황제의 환심을 사고, 동시에 불교 신자인 태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유리불탑 속 사리를 훔쳐가면서 영락을 해치려고 했고,[8] 이에 영락이 어찌하여 본인을 해치냐고 묻자 비천한 개는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자 영락은 복수로 황후를 선녀로 꾸민 다음 황제가 보게 해 모처럼 순설이 황제의 시침을 들 기회를 빼앗는다.
그리고 고귀비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 뻔한 순설은 자기가 미개봉 반납된 게 황후의 선녀 분장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궁녀를 선녀 분장시킨 뒤, 추락사시켰다. 하지만 또 영락의 재치 덕분에 변장한 궁녀가 사실은 고귀비의 연극에 나오는 양귀비를 따라한 것이라고 태후에게 알린 덕분에 오히려 고귀비가 연극 무대와 소품들을 모두 잃게 된다.
이에 순설은 정말 고귀비로부터 쫓겨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지만 태후와 비빈이 참석한 중앙절 기념 어경정 연회에서 사슴의 선지를 준비하여 연회장 주변에 있는 박쥐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박쥐 때문에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고귀비가 임신한 황후를 높은 누각에 밀어버려 아이를 유산시키면서 신뢰를 되찾았다. 참고로 이게 순설이 저지른 악행들 중에 유일하게 성공한 거다.
하지만 얼마 후, 한비의 음모에 의해 고귀비가 등에 화상을 입고 생명이 위독하자 문병 한 번 가지도 않고 바로 손절을 하였다.
2.3. 계황후에게로 환승
고귀비가 사망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찰 황후가 7황자 영종의 죽음으로 인해 상심하여 투신 자살하게 된 후, 순설은 귀인에서 빈으로 승급하였고 황귀비에서 황후가 된 숙신에게 붙는다. 그런데 태후의 환심을 산 위영락이 황제의 후궁이 되자 순설은 이제껏 순귀비와 소가빈에 이은 총애 랭킹 3위 자리에서 터져나가 순식간에 4위로 추락하였다.[9] 때문에 순설은 위영락을 철천지원수 취급을 하게 된다.그러던 중, 위영락이 이청을 죽이고 난 뒤, 피임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들키면서 위영락이 거주하는 연희궁은 거의 냉궁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순설은 이제껏 당한 원한이 남아있는지 전부터 고깝게 여기던 위영락의 수석 궁녀인 명옥을 괴롭힌다. 헌데 이때 영비로 승급한 위영락은 불심이 깊은 태후에게 혈경을 써서 바치는 등, 성심성의껏 태후를 모시는 덕분에 태후를 뒷배로 둔 상태였다.
당연히 순설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총애를 잃기 무섭게 태후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위영락이 아니꼬울 수 밖에 없었기에 뒤에서 신나게 위영락을 욕하였다. 그렇지만 오히려 위영락에게 싸대기를 한 대 쳐맞고 "내가 너보다 품계가 위니까 함부로 기어오르지 마라."는 일침을 듣게 된다.
그런데 얼마 후, 위영락이 태후와 함께 원명원에 거주하던 중에 순설은 총애를 되찾아 10황자 영모를 낳았다. 허나 불행히 영모는 어린 나이에 요절하게 되는데 이를 가엾이 여긴 황제에 의해 서비로 승급하게 된다. 그러던 사이, 독보적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순빈의 등장으로 인해 계황후, 위영락, 가비와 연합을 하여 순빈을 상대하지만 영락의 배신, 가비의 몰락, 그리고 순빈의 자멸로 인해 이 연합은 흐지부지된다.
그렇게 다시 위영락에게 총애가 집중되자 순설은 그동안 자기가 위영락에게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른 것도 잊고(또는 무시하고), 계황후에게서 위영락으로 노선을 갈아타게 된다.[10]
2.4. 영귀비에게로 환승
위영락이 마침내 15황자 영염을 낳게 되니 영염을 양육하는 경비와 함께 위영락에게 붙게 된다.[11][12] 그러면서 그렇게나 영락을 싫어했던 것과는 별개로 영락이 낳은 영염을 매우 아껴 붓이나 장난감 등 여러 물품을 보내준다. 하지만 15황자의 양육을 맡고 있던 경비가 전혀 사용하지 않자 자신이 15황자를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냐며 경비에게 화를 내고 이에 경비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며 물건들을 사용하기 시작한다.그런데 때마침 계황후의 측근 태감인 원춘망이 순설이 준 붓에 독을 발라 영염이 중독되면서 육만만과 사이가 벌어질 뻔하였고, 이에 열받은 순설은 황자들이 연이어 해를 입어 득을 보는 것은 황후라는 판단을 내리고 증거도 없이 황후와 대적하지 말라는 영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후를 찾아가 이 사실에 대해 다 까발린다.[13]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태후는 진노하여 계황후를 질책하였다. 이 뒤로는 당연히 황후와는 멀어졌고 반대로 영락과 많이 친해진 듯하다.[14]
얼마 뒤, 항주로 남행을 떠나는 뱃길에서 화친왕 홍주와 결탁해 반역을 일으킨 나랍 황후에게 뼈를 때리는 팩트폭행을 일삼고 그녀의 변명을 지적하면서 사실 나랍 황후가 화친왕과 결탁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15] 그리고 반란이 평정되면서 위영락은 황귀비로 승급하였고, 서비도 무사히 살아남게 되었다.
이처럼 순설은 초반에 영락을 줄곧 싫어하여 여러 차례 괴롭히기도 하고, 반대로 영락이 후궁이 되고 나서는 당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영락이 영귀비가 되자 의외로 영락의 편에 서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모로 현명하게 라인을 잘 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에 영락이 황귀비가 될 때까지 서비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사실 꽤 현명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일하게 작중에서 영락을 괴롭혔음에도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은 캐릭터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악행으로 인해 더 이상 승급하지 못하고, 하나뿐인 자식을 잃고 양자도 없이 홀로 사는 업보를 갖게 되었다.
3. 성격
입궁 초기에는 상당히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만군기 팔기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서 그런지, 노비들을 매우 하찮게 여기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선을 넘는 수준의 악행까지는 저지르진 않았다. 위영락의 아들인 15황자 영염이 중독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마치 자신의 친자식이 당한 것처럼 길길이 날뛴 걸 보면 잘 알 수 있다.[16] 영염을 아끼게 된 이유는 친아들 10황자 영모가 죽은 후 상심에 빠져있었는데, 그 상처를 영염이 자라는 것을 보며 달랬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죽하면 폐하를 만나는 것보다 영염을 만나는 것이 더 좋다고 할 정도.4. 기타
납란 순설 배우인 이춘원은 이 드라마에서 굉장히 자주 나오는 OST인 궁장류(宫墙柳)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춘원은 우정이 제작한 호란전에도 출연하였는데 거기서는 주인공 이호란[17]의 동생 수옥 역할을 맡았다.5. 실제 역사의 서비 엽혁나랍씨
드라마와 달리 서비 엽혁나랍씨의 입궁한 후 초반 승진 속도는 꽤 빨랐다. 입궁하자마자 서빈이 되었고 효현순황후 사망 후에는 비의 신분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21세였다.[18]서비는 비(妃)의 신분으로 건륭 16년 10황자 영모를 낳았으나 영모는 얼마 살지 못하고 3살에 요절한다. 이후 죽을 때까지 서비로 살았으며 사후 추존도 없었다.[19] 아들을 낳고도 진봉되지 못한 후궁은 서비가 유일하다.
서비는 엽혁나랍 가문의 영애였으며 만주 팔기 중 상3기 중 하나였던 정황기에 속해 있었다. 서비의 집안과 혈통은 건륭제의 후비들 중 독보적으로 좋았다.[20] 허나 아들이 요절한 이후에는 적당한 대우만을 받으면서 살았으며, 효의순황후가 황귀비의 신분으로 사망한 후에도 내명부 통솔 권한을 완전히 받지 못했다.[21] 이를 통해서 볼 때 훌륭한 가문에 비해 그다지 많은 총애와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서비의 동복 언니 엽혁나랍 씨는 당시 청 제일의 미녀로 손꼽히던 인물이었으며 효현순황후의 남동생 부찰 부항에게 시집갔다. 건륭제는 이 엽혁나랍 자매의 경우 말고도 다양한 경우로 부찰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많이 맺었는데, 대표적인 사례 두 가지를 꼽자면 순혜황귀비 소씨의 딸 화석화가공주와 부항의 차남 복륭안의 결혼과 숙가황귀비 금가씨 소생의 11황자 영성과 부항의 차녀의 결혼이 있다.
[1] 참고로 원래의 성씨는 엽혁나랍(叶赫那拉)이라고 불리는데 순설의 성인 납란은 그녀의 성인 엽혁나랍 중, 나랍과 같은 거다. 만주어의 '나라'라는 말의 음차인데 한자만 변형시킨 거다.[2] 한군기 정황기 소속이며 부도통 함태공의 딸, 1품부인이다.[3] 계황후인 휘발나랍 숙신조차도 하5기에 속하는데 순설은 상3기에 속한다. 하지만 1기에 속하는 인구가 20만명 가까이 되므로 순설의 가족이 상3기에서 어떤 지위였는지가 중요한 데 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역사에서 서비 엽혁나랍씨는 직계 출신으로, 부찰씨에 버금갈 정도의 가문이었다.[4] 궁녀 선발을 위해 입궁한 길상의 발을 밟은 처자다.[5] 참고로 만주족 명문 귀족들은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양쪽의 귀를 3개씩 뚫는다.[6] 그리고 이때 황후는 "보게나, 고귀비. 이제 막 입궁한 귀인조차도 고귀비 자네보다 궁중 법도에 대해 잘 아는군? 참으로 놀라운 일이야." 라고 고귀비를 깠다.[7] 사실 명옥은 순설의 의도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순설이 황후를 이용해 황제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게 대놓고 눈에 보였으니 거절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굉장히 싸가지없게 내쫓은 게 문제.[8] 영락은 순설이 사리를 가져간 것을 눈치 채고 마술쇼를 이용해 순설에게 사리를 도로 받아냈다.[9] 영락이 아직 궁녀이던 시절에도 영락의 계략에 걸려서 미개봉 반납된 적이 있었는데, 영락이 후궁이 되었을 때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10] 다만 후술되었다시피 이때는 줄 잘 서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갈아타는 게 아니라 계황후가 황자를 독살하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다고 생각해서 매우 분노했다. 그래서 이 일을 태후에게 꼰지른 뒤 자연스레 계황후와 사이가 안 좋아졌다.[11] 참고로 육만만이 영염을 양육하는 이유는 평소에 그녀가 위영락을 호의적으로 대한 것도 있지만, 위영락이 유비 가리엽특 아연에게서 넘겨받은 5황자 영기의 양육에 집중한 것도 있다.[12] 와중에 앙금은 여전히 남아있는지, 영락에게 태후에게 애를 바쳐서 환심을 사다니 대단하다며 비꼬기도 한다. '자네는 바칠 애도 없잖나?'라는 영락의 응수에 발끈하는 건 덤.[13] 친자식 급으로 아낀 영염이 중독되고 본인이 그 범인으로 몰린 것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났는지, 항상 웃는 모습으로 나랍 황후에게 굽신대던 순설이 태후에게 사건을 일러바치고 난 후 나랍 황후를 상당히 아니꼬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간다.[14] 황제 앞에서 영락이 수위가 아슬아슬한 말을 해서 분위기가 싸해졌다 싶어지자 영락에 말에 맞장구치며 농담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예전이었으면 황제 앞에서 영락을 내려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꼬았을 것이다.[15] 와중에 황제가 영락에게로 시위들을 모두 보내는 바람에, 순설은 시중 드는 사람 하나 없이 만만과 함께 난리통이 된 선내에서 고생을 해야 했다.[16] 물론 이건 자기가 영염을 해친 범인으로 몰린 탓도 있지만.[17] 이호란의 배우가 위영락을 담당한 오근언이다.[18] 여담이지만 드라마에 비해 실제 역사에서 승진이 빨랐던 서비와 달리 드라마에서 경공황귀비는 실제 역사에 비해 드라마에서 승진이 빨랐다. 경공황귀비는 효현순황후 부찰씨 사후 귀인의 신분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효의순황후 위가씨가 영비가 된 후에야 상재에서 귀인으로 진봉되었다.[19] 이후 건륭 42년인 1777년에 5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건륭 42년은 건륭제의 생모인 숭경황태후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20] 계황후 휘발나랍씨는 대기(抬旗)를 받기 전에는 만주 귀족에 속하기는 했어도 만주 하5기에 속해 있었다. 혜현황귀비 고가씨, 숙가황귀비 금가씨, 효의순황후 위가씨의 경우에는 포의 출신이었으며, 순혜황귀비 소씨, 경공황귀비 육씨, 방비 진씨 등은 아예 민인 출신이었다.[21] 다만 이는 건륭제가 효의순황후 위가씨 사후 비빈들에게 내명부 통솔 권한을 완전히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부 시절 격격 출신으로 건륭제 자신을 오랫동안 모셨고 또한 그가 아끼던 아들 영기의 생모인 유귀비 가리엽특씨나, 유귀비 사후 가경제 초기까지 황후를 대신해 내명부를 통솔했던 영귀비 파림씨에게도 육궁통솔권을 주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