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50A3E5><colbgcolor=#000> 연희공략 등장인물 건륭제 애신각라 홍력 | |||
이름 | 애신각라 홍력(愛新覺羅 弘曆) | ||
배우 | 섭원 | ||
민족 | 만주족 | ||
가족관계 | 아버지: 옹정제 어머니: 숭경황태후 생모: 가흥 전씨 동생: 화친왕 홍주, 과군왕 홍염 아내: 부찰 용음, 휘발나랍 숙신, 위영락[1] 자녀: 영황[2], 영련[3], 영성, 영기[4], 영용, 영종[5], 영염, 소화공주, 소유공주 등 | ||
거주지 | 양심전(養心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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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라마 《연희공략》의 등장인물.2. 작중 행적
첫 등장은 1화에서 수녀 선발로 자금성에 온 아가씨들을 보기 위해 간택 장소로 오면서였다. 황제는 자신의 후궁이 될 여인들 중, 만주족의 전통 운운하면서 한 귀에 3개의 귀걸이를 한 납란 순설만 직접 뽑고 귀인으로 삼아서 봉호까지 내렸는데, 나머지는 부찰 황후에게 일임하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이를 깔끔하게 잊어버렸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3화에서 태후가 "황상께서는 늘 황후를 총애하는데, 황후가 정실이고 적자를 낳았으니 지금까지 편애해도 제가 별말을 안 하였지만, 지금은 황후의 몸이 안 좋다고 후궁에 발걸음을 안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기왕 새 사람이 들어오니까 후궁에도 눈길을 좀 주세요."라고 잔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부찰 황후를 보필하는 장춘궁의 궁녀 위영락의 맹랑하고 당돌한 인상 때문에 초반에는 안 좋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되며, 그녀가 황후 옆의 시녀로 있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한다.[6] 무슨 사건만 생기면 그 사건에 위영락이 연관되어 있자, 끊임없이 그녀를 황후에게서 떼어내려고 한다.
그 와중에 위영락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고, 부찰 부항과 위영락의 결혼을 결사 반대한다. 겉으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심복이자 처남인 부항이 위영락과 같이 제멋대로에 품격이 없는 여자가 엮이는 것이 싫다면서 "부항. 팔기 명문가의 그 어떤 규수들이라면 너의 뜻대로 해도 상관없지만, 위영락 그 계집만은 안 된다."라는 말을 하면서까지 막았다.
그러다가 부찰 용음이 죽은 이후 위영락을 후궁으로 삼고 가장 총애한다. 즉, 황제는 위영락만 봉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함께 있을 때 인간 애신각라 홍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다른 후궁들이라고 해서 이름을 안 부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영락에게만큼은 항상 이름으로만 부른다. 참고로 가장 총애하는 아내인 부찰 용음, 악독하지만 황제에게 언제나 진심이었던 고녕형, 그리고 언제나 품위와 현숙함을 잊지 않는 휘발나랍 숙신, 그리고 왕부에서부터 꽤 오랫동안 같이 함께 한 소정호가 이에 해당된다. 이들 모두 건륭제가 보친왕이었던 시절부터 쭉 함께 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영락만 유일하게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 만난 여인이다.
심지어 원춘망의 계략으로 화친왕이 역모를 꾸며 불이 났을 때 시위를 죄다 위영락에게 보내 보호하게 했다.[7][8]
3. 출생의 비밀
건륭제는 여태까지 숭경황태후 뉴호록씨를 친어머니로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생모는 따로 있었다. 건륭제의 생모는 다름 아닌 가흥 전씨라는 여자인데 옹정제가 옹친왕이었던 시절에 그를 모시던 시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전씨가 병에 걸렸던 옹친왕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자 이에 감동한 옹친왕이 전례를 깨고 전씨를 격격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건륭제의 사주가 너무 좋았는데 점쟁이의 말에 따르면 신묘, 정유, 경오, 병자년에 태어난 사람은 오복을 타고난 부귀한 상이라 옹친왕을 반드시 지존의 자리로 올린다고 하는데 건륭이 전씨 손에 자라게 된다면 그 타고난 운명을 막는다고 하여 건륭은 태어나자마자 뉴호록씨가 돌보게 된 것이다.라고 태후가 말했다. 그러나 뉴호록씨가 명문가긴 하지만 방계이고 격격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식 없는 효경헌황후도 있고 다른 측복진도 있는데 왜 굳이 뉴호록씨에게 맡기겠냐고 숙신이 주장한다. 실제로 위영락이 태후와 함께 원명원에 갔을 때, 마차 안에서 태후는 영락에서 "그래서 전씨는 어떻게 됐냐고 묻고 싶은 거냐? 어떨 거 같으냐?"라고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경귀인은 선황이 황위다툼으로 활을 맞아 산속으로 도망쳤는데 전씨가 농가에 선황을 숨게하고 선황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 전씨는 태항산 정상에서 뛰어내렸거나 도적한테 정조를 잃지 않기 위해 자결했고 태후가 건륭을 생각해 숨긴 것이라고 한다. 당시 옹정제의 측근 시위인 왕천일의 말에 따르면 전씨는 건륭의 명예를 위해 옹정제가 사사했다고 한다.
4. 후궁들과의 관계
황제는 본디 위영락을 거슬리는 궁녀 1로만 생각했지만 사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푹 빠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두려워하고, 복종하는데 영락은 가끔씩 그런 건 아랑곳않고 황제에게 직설적인 발언을 수도 없이 내뱉는다. 그러면서 자신을 한 사람으로 봐주는 모습에 때로는 영락에게 화를 내고, 짜증도 내지만 그게 사실은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잊어버렸던 인간성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위영락은 어떻게 봐도 당시 시대적 기준으로 요구하는 어질고, 현숙한 여인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생각하는 말을 가감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황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고 있는 덕에 부찰 황후가 죽고 나서 그녀의 공백을 메워줄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이다. 젊어서는 이런 맹랑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에 반해서, 함께 늙어가면서는 오래 함께 있던 정이 깊어져서, 영락은 황제의 으뜸가는 총비가 되었다.[9]부찰 용음의 경우에는 실제 역사에서의 건륭제가 효현순황후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매우 아끼고 존중한다. 용음이 황제의 조강지처인 것도 있고, 본래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현숙하고 어진 황후의 표본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7황자 영종이 죽은 직후에 미쳐가던 용음이 자신의 곁을 떠날까봐 두려운 나머지,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따뜻하게 위로를 하기보다는 황제로서 황후에게 엄정한 책무를 강요하였다.[10] 그러다가 그만 용음이 가슴속에 쌓인 화증을 터트리고, 끝내 투신자살을 하게 만든걸 보면 황제는 용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다.[11] 심지어 용음은 죽어서도 편하지 못하였는데 황제는 용음이 죽은 후, 마음에 안 드는 신하들을 쳐내려는 목적으로 용음의 죽음을 이용하기까지 하였다. 이 시절의 황제는 용음을 어떻게든 자기 옆에 두고 싶은 욕심과 두려움에 그녀에게 집착하였고, 결국 그게 용음의 명줄을 앞당기게 만든 셈이다. 허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영락이 이청을 살해하면서 용음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게 된 건륭은 그때 자신이 용음에게 무정하게 굴어서 이 지경까지 온 거라고 깨닫고 후회하였다.
휘발나랍 숙신의 경우에는 그녀가 전적으로 황제에게 베풀어주는 입장이지만 황제가 그 소중함을 몰라주는 관계다. 황제가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숙신의 동생 상수를 옥사하게 만들었고, 태후가 숙신의 아버지 나이포를 독살시키기까지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숙신은 끝까지 황제만을 바라보았다. 숙신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위영락과 끊임없이 소싯적의 자유를 갈망하던 부찰 용음과는 다르게 시대가 요구하는 현숙한 여인이었다. 실제로도 숙신은 처음부터 몰락 직전까지 현모양처의 자세를 잃지 않으며 황제를 보필하였다. 허나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최악의 불행은 황제도 숙신도 사랑에 서툴렀던 것이었다. 결국 숙신은 마지막에 와서 황후 나랍씨가 아니라 인간 휘발나랍 숙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제가 자신의 가족을 풍비박산냈을 때도, 다른 후궁들을 총애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참아주고 이해해줬다. 하지만 황제는 홍주가 반역을 하였을 때, 숙신이 권력을 쥐려는 욕심에 종친들과 대신들과 결탁한 게 아니냐며 의심하자 숙신은 이제껏 황제에게 품었던 서러움과 애증 섞인 원망을 토하면서 대폭발하였다.[12] 결국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행 관계에 지나지 않았으니 끝내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여자 취향에 대해서는 확실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까탈스럽지만 어떤 면에서는 수더분한 취향을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피부가 하얗고, 깔끔한 여자를 선호하고 키는 그렇게까지 따지지는 않는다. 키가 작은 납란 순설, 장신인 육만만만 봐도 키를 보고 뽑지는 않은 게 분명하다. 의외지만 코스프레를 매우 좋아하는데 용음이 낙신 분장을 했을 때랑 녕형이 곤극 분장을 할 때 그녀들의 궁에 머무른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13] 심지어 돌싱조차도 받아줬다는 언급이 있는 걸로 봐서는 이혼을 하든, 사별을 했든 그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반대로 싫어하는 여자는 위선적이고, 저급하고, 속물적인 타입이다. 그리고 위영락은 37화에서 황제의 승은을 거부하기 위해서 그가 싫어하는 스타일의 여인 연기를 하여 다시 장춘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14] 사실 특별히 여색에 관심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황제가 총애하거나 신경써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잠저 시절부터 함께한 후궁들이다. 그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사랑보다는 오랫동안 함께해온 사람에 대한 정과 의리에 가까워보인다. 황제는 젊고 예쁜 새 후궁이 들어온다고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도 않으며, 온 자금성이 긴장할 정도로 경국지색이었던 뉴호록 침벽에게도 넘어가지 않았다. 아마 황제는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본인도 어쩔 수 없다며 인정했듯 황제의 이상형은 위영락이다. 위영락처럼 당돌하고 솔직하면서도 영리해서 자기 기분도 잘 맞춰주고, 겉은 차가워도 속정이 깊은 반전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후술하겠지만 황제는 비록 겉으로는 냉정한 척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군주의 역할을 원만하게 수행하기 위해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 그는 황제라도 엄연히 사람인지라 자기 부인들이 자신에게 고충을 토로해주면 이를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편이다. 용음이 2황자 영련을 잃은 슬픔에 괴로워할 때, 자신도 겉으로는 표현을 못했지만 나중에 영련에 대해 그리움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녕형의 경우에는 자기가 친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토로하면서 훗날 그녀가 죽기 직전에 선산에 친모를 안장해달라는 요청을 들어줬으며, 위영락이 나중에 피임약을 복용한 이유가 태어나면서부터 버림받은 트라우마 때문에[15] 그랬다는 말에 "니가 원하면 굳이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까지 해줬을 정도다.[16]
그래도 남편이기 이전에 황제라는 입장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에 후궁에서 잡음이 터져나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1화 때 각 후궁마다 편액과 태사회자도를 하사하여 후궁들이 황제가 무슨 뜻으로 이것들을 하사했나 고민하도록 만들어 한동안 후궁을 조용하게 만들었을 정도다.
다만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후궁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위에서 황제는 용음의 죽음을 이용한 것 외에도 용음이 살아있던 당시였던 초반부에서는 고귀비가 속한 고가씨 가문을 키워줘서 대신들의 파벌 싸움을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려고 했었다. 게다가 18화에서 고귀비가 유귀인이 갓 출산한 5황자 영기를 생매장하려고 한 것과 더불어서 유귀인의 요리사를 매수한 혐의로 금족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고귀비의 아버지인 고빈이 황하의 치수 공사라는 큰 국가 사업을 담당하자 고가씨 가문의 유능한 신하들을 얻기 위해[17], 그리고 고귀비의 체면을 위해서 금방 그녀의 금족령을 풀어줬다.[18] 또한 대가빈이 냉궁에서 유폐된 도중에 사망하자 금가씨 가문을 달래주기 위해 대가빈의 동생인 소가빈을 후궁으로 삼았다.
5. 성격
대부분의 후궁암투물 드라마의 군주들과는 다르게 인성이 파탄나지 않았다는 독보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다. 비록 황제가 되면서 많이 냉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 원래는 나름 인간적인 면모도 있었다. 자기 유모의 딸인 완아라는 시녀와 격의없이 지내다가 이 모습을 본 옹정제가 완아를 죽이면서 자신이 누군가를 특별 취급한 것이 그 누군가의 목숨을 재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책하였고, 여기에 황제가 되면서부터 그 무거운 의무감에 짓눌려서 그만 냉정하게 변한 것이다.[19] 따라서 건륭제는 황제로서의 자신과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해왔던 거다.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후궁들에 대해 잔정은 깊은 편이다. 고귀비가 술을 먹고 그에게 주정을 부려도 그걸 받아주고, 나중에 고귀비가 자결하기까지 하자 충격을 받아서 업무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원래 냉정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워낙 불같은 성질머리를 자랑한데다가[20]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제법 강해서 한 번 신뢰하는 자라면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끝까지 신뢰를 해주는 편이지만 반대로 한 번 밉보이면 그때부터는 정말 가차없게 된다. 후궁이 됐든, 자식이 됐든, 종친이 됐든, 신하가 됐든, 하인이 됐든 간에 모두 건륭제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면 이후에는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 정도다.
그래도 그와 반대로 근면성실한 군주이기는 해서 자금성에서 제일 궂은 일을 다 하는 신자고의 노비들보다도 늦게 자고, 그들보다도 빨리 일어난다. 혼자 양심전에 있을 때마다 늦은 시각까지 업무에 집중을 하는 것을 보면 나라 걱정, 백성 걱정에 좀처럼 쉬지 않는 모범적인 성군인 셈이다.
또한 신임하는 신하들에게는 후하게 대접한다. 한 예로 해란찰이 명옥을 잃고 절망하여 술독에 빠져 지낼 때, '네가 정신을 차려야 명옥이 하늘에서 지아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며 일으켜 세우고 침벽의 뒷조사를 맡겼다.
의외지만 초딩적인 모습도 자주 보여준다. 특히 위영락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런데, 툭하면 위영락에게 시비를 걸다가 정작 처남이 위영락과 이어지려는 기미를 보이려고 하자 기를 쓰고 질투하는 걸 보면 츤데레가 확실하다. 그래도 후궁이 된 위영락에 대한 애정만큼은 확실하다. 위영락이 후궁이 된 이후에 자기 몰래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격노하기도 했고, 순귀비의 몰락 이후 영락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 혹시 용음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의심하기도 하며, 그 의심이 사실이다 싶었을 때는 정말 화가 나서 절연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 위영락이 회임하면서 황제에게 직접 말한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만을 낳죠."라는 말 한마디에 껌뻑 죽는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은근히 자뻑을 하는 경우도 잦다. 33화에서 위영락이 황제 본인 앞에서 황제가 쓴 시를 배우기 싫다면서 황후에게 반항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벌컥 화를 내려고 한 적도 있었고 후에 후궁이 된 뒤에도 자꾸 까불면 자기 시를 베껴 쓰는 벌을 내리려고 할 때 영락이 "황상의 시 말고 차라리 당나라 시를 쓰게 해주세요"라고 하자 삐쳐서 눈을 안 마주쳤다. 이에 영락이 백허그를 시전하며 애교를 부리자 또 바로 풀렸다. 또 툭하면 명작 그림들에 자기 인장을 마구 찍는 바람에 반창고 붙인 것 같다고 나중에 그의 후궁이 된 위영락으로부터 한 소리 듣기도 한다.[21] 나중에는 본인이 먼저 영락에게 "너도 많이 늙었네?"라고 장난쳐 놓고 "늙긴 했지만 그래도 신첩은 황상보다 16살이나 젊어요.(=황상이 나보다도 더 늙음)"이라고 본의 아니게 돌려까자 웃으면서[22] 영락의 볼이 쭉 잡아당기기도 했다.
연희공략: 금지옥엽에서도 등장하며 소화공주의 혼사 문제에 대해 위영락의 눈치를 꽤나 보는 모습을 보여준다. 심기가 불편하면 버럭 화를 내는 성질은 부녀가 똑같다.[23]
6. 기타
이 드라마에서 건륭제는 함께 성년까지 자란 형제들이 5황자 홍주와 10황자 홍염 밖에 없었는데[24] 실제로도 건륭제의 아버지인 옹정제는 슬하에 10명의 아들을 가졌지만 대다수가 어린 나이에 요절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건륭제와 같이 가장 오래 살아남은 형제들이 바로 5황자 홍주와 10황자 홍염인데 이 두 사람마저도 형인 건륭제보다도 먼저 사망하였다.[25]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나면 웃는다. 19화에서 위영락이 황제를 감히 기생하고 비교를 할 당시, 그는 웃고 있었는데 그 직후 황제는 벽에 걸린 칼을 뽑아서 그 자리에서 영락을 베어 죽이려고 했었다.
7. 실제 역사
자세한 내용은 건륭제 문서 참고하십시오.[1] 황후만이 황제의 아내이고, 나머지 후궁들은 내명부의 관리일 뿐이다.[2] 대황자라고 언급은 되지만 직접적인 출연은 없다.[3] 작중 시점 이미 요절했다.[4] 나중에 원춘망에 의해 총기사고를 당하고, 치료 과정에서 죽는다.[5] 순귀비가 장춘궁에 불을 질러서 죽인다.[6] 위영락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흡사 나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7]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건지, 본인이 부항과 위영락을 갈라놨던 전적 때문인지 영락의 마음 속에 자신이 있는지 항상 알고 싶어 한다. 영락이 회임했을 때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만 낳는다라고 하자 세상 다 가진 듯한 표정이 압권이다.[8] 이 명령의 스노우볼로, 서비와 경비는 시중 드는 이들이 하나 없어 비(妃)급의 후궁들이 거지 몰골로 단 둘이서 살아남아야 했다.[9] 이 때문에, 건륭과 영락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낼 때에는 현악기가 주를 이루는 화기애애하고 따뜻한 배경 음악이 깔리며, 이는 정궁인 용음이나 계후인 숙신도 받지 못한 특별 대우다. 침벽의 음모를 분쇄하고 서로가 사랑을 확인했을 때 한 번, 마지막에 황귀비 책봉례 이후 밀당하면서 다시 한 번 나온다.[10] 변호의 여지는 있었다. 이때 본인도 잘못된 방법으로나마 용음을 위로하려 하고 법도도 어겨가며 영종의 장례도 본인이 치르려 했지만, 하필 반란이 터져서 슬퍼할 여유도 없이 나랏일을 돌보러 가야 했다. 이 때문에 황제는 자신이 그래왔던 것처럼 아내인 용음도 국모이니 본인의 행복보다는 황후로서의 체통과 의무를 우선시하길 바랐던 것이다. 다만 용음은 너무나도 심하게 망가져 있었고 황제, 아니 이 시점에서만큼은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충실해야 했을 애신각라 홍력은 그런 망가진 용음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국을 맞았다.[11] 부찰 용음 항목을 보면 이 사람이 용음에게 어떻게 책무를 강요했는지 나오는데 정말 상대를 생각했다면 이러면 안 된다는 반응이 절로 나올 정도로 최악의 대응이었다. 이 때문에 용음은 유서에다 영락을 자유롭게 살려달라는 유서를 남겼지만 그 유서에는 황제를 위한 언급은 빈말조차 없었다. 그만큼 용음은 자신을 한 사람으로 봐주지 않고, 황후라는 직책과 책무만을 강요한 황제를 원망하고 있었던 거다. 앞서 황제가 용음의 장례식 때 "용음은 황후로서 이렇게나 나약하고, 이렇게나 못났으니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영락에게 말하였는데 그게 고스란히 황제 본인에게 돌아간 셈이다.[12] 정확히는 여기까지는 분통을 터트리었을 지언정 의심해도 어쩔 수 없던 상황이라 차분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바로 뒤에 자신은 시녀 진아 한명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은 녹아내리고 머리는 산발에 화상까지 입은 재투성이 자신과 비교해 머리 한올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시위에게 보호 받으며 나타난 영락을 보고 폭발하고 만다. 즉 황제는 까딱하다간 진짜 다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황후가 아니라 위영락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했던 것이다.[13] 영락도 그걸 파악하고 시위나 태감, 소주 아낙네 분장을 했다.[14] 물론 황제는 극중 상당히 머리가 좋은 편이기 때문에 위영락이 연기를 하는 걸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위선적인 여자라 생각했다면 장춘궁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15] 위영락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아이라고 아비인 위청태에 의해 버림받았었다. 다행히 언니인 위영녕이 다시 영락을 찾아서 돌아왔지만 영락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기 충분했다.[16] 전제군주정 기반 봉건제 사회에서 이게 얼마나 굉장한 말이냐면 저 시대에서 여자는 자손을 번창케하기 위해 아기를 가지는 게 당연한 도리다. 하물며 적합한 후계자 후보를 하나라도 더 늘리려는 황실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황제는 영락을 배려해주기 위해 그 의무를 면제해주려는 것이다.[17] 그리고 악이태(시린교로 오르타이)의 당여였던 고씨 가문 사람들이 출세하게 되면 조정에서 악이태를 지지하는 세력이 둘로 나뉘어 당파가 생기는 것을 막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18] 그런데 그런 것 치고도 고귀비는 다른 후궁들 같았으면 진작에 강등되거나 냉궁으로 쫓겨날 잘못을 저질러도 비교적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끽해야 금족령 아니면 봉급 압수, 혹은 불경 베껴쓰기로 끝나기 일쑤다.[19] 뿐만 아니라 건륭제는 그 이후에 선황인 옹정제가 총애하는 연귀비(돈숙황귀비 연씨)가 죽은 직후에 그녀의 관 앞에서 소리없이 흐느끼면서, 한 달 후에 연귀비의 오라버니인 연갱요를 죽인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기에 더더욱 후궁들에게 사랑을 쉽게 베풀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용음의 죽음을 이용해 마음에 안 드는 신하들을 숙청한 다음, 용음의 빈소에서 홀로 흐느끼는 것으로 부황인 옹정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20] 툭하면 찻잔을 던져서 깨먹고, 발길질도 주저하지 않고 하기 일쑤다. 물론 가장 많이 당하는 사람은 수석 태감인 이옥이다. 심지어 아버지도 이런 아들의 성질머리에 대해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묘사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본인이 본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아들들에게는 화가 난다고 물건을 던지면 안된다고 가르쳤다.[21] 더 재밌는 사실은 건륭의 이런 유치한 면모들은 고증이 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실제 역사의 건륭제도 시 짓는 것을 즐긴 것과는 별개로 솜씨가 영 잼병이었으며, 그림에 인장을 함부로 찍어서 명작을 망쳤다고 까인 적이 많다.[22] 본작의 건륭제는 화나면 웃는다.[23] 다만 물건 집어던지길 밥 먹듯 하던 건륭제와는 달리, 소화는 던지려던 물건들이 죄다 어른들의 선물이라 못 던지고 제 성질을 못 이겨 머리를 쥐어 뜯는 일이 잦다.[24] 건륭제가 즉위하기 전 시점까지 포함하자면 3황자 홍시가 있긴 하다. 허나 홍시는 옹정제에게 밉보인 탓에 황실에서 제명당하였다.[25] 홍염은 건륭 30년(1765년), 홍주는 건륭 35년(1770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