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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
<colbgcolor=#bf1400> 경희궁 융복전 慶熙宮 隆福殿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 |
건축시기 | 1620년 (창건) / 1865년 ~ 1868년 (철훼) |
<colbgcolor=#bf1400> CG로 재현한 융복전 정면의 서쪽과(왼쪽) 동쪽(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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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희궁의 침전으로,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내전 구역에 있었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먹고, 자고, 입고, 사람도 만나며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이 곳이 바로 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다.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로 융복전 서쪽에 위치한 회상전(會祥殿)이 있다.이 곳이 왕의 침전인지, 아니면 왕비가 머물렀는지 명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이는 같은 기능의 회상전도 마찬가지이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융복전이 경희궁의 정침(正寢)이며 회상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라 적혀있는데, 《궁궐지(宮闕志)》에는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 여기서는 내전의 정전을 의미한다.)이며 융복전은 단지 회상전 동쪽에 있는 건물'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회상전보다 동쪽에 위치한 점,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등에 왕과 왕비, 대비 등이 거처했단 기록이 전해지는 회상전과 달리, 융복전은 임금 외에 사용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왕의 침전’으로 추정된다.
이름은 '복(福)이 융성(隆)한다'는 뜻이다.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어졌으며 침전으로 기능을 처음 시작한 것은 1624년(인조 2년)부터이다. 현종 시기 승하한 인선왕후 장씨의 빈소로도 사용했으며, 숙종 시기 1693년(숙종 19년)에 수리한 것 이외엔 별 일 없이 19세기까지 제 기능을 했다. 숙종은 이 곳에서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펼치기도 하는 등 가장 많이 활용했다.#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경희궁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되어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다. 순조가 승하한 이후 즉위한 왕들인 헌종과 철종은 경희궁보다는 창덕궁에 오래 머물면서 융복전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쓸 때, 철거되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경복궁 중건일기》
<colbgcolor=#bf1400> 융복전, 회상전 자리에 일제가 만든 방공호 |
3. 구조
<colbgcolor=#bf1400>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 내전 영역. 주황색 원이 융복전, 보라색 원이 회상전, 초록색 원이 집경당이다. |
공통적인 부분은, 1층[1]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 기둥을 세운 뒤, 쇠서[2]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짓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또 건물 앞면엔 돌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폭이 좁은 돌판을 얹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넓은 월대를 정면에서 약간 서쪽으로 틀은 다음 놓아 침전의 위엄을 살림과 동시에 행사가 있을 때, 보다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계단은 월대의 동, 서, 남쪽에 각각 1개씩, 그리고 건물 정면의 동쪽 끄트머리에 5단의 계단을 하나 놓았다.
- 주변 행각과 담장에 다섯 개의 문을 달아 융복전 영역으로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동쪽은 금명문(金明門), 서쪽은 연경문(延慶門), 연경문의 서쪽에 청상문(淸商門), 그리고 남쪽은 일영문(日永門), 북쪽은 개경문(開慶門)이라 했다.
- 〈서궐도안〉 및 《서궐영건도감의궤》를 보면 지붕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바로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인데, 융복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왕과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3]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4]
4. 부속 건물
4.1. 회장각
<colbgcolor=#bf1400> CG로 재현한 회장각 |
융복전의 서쪽에 있던 부속 전각이다. 회상전 영역과 이어져 있었으며 평면은 ‘열 십(十)’ 자 형태였다. 역사는 융복전과 같다.
5. 여담
- 경종 시절 《선원보략》[5] 가운데 숙종의 어첩에서 '융복전'의 '전(殿)'이 '당(堂)'으로 잘못 적혔으므로 먼저 고치고 세제궁에 올린 책자도 내려주면 함께 고쳐서 들일 것을 교정청이 청한 일이 있었다.#
[1]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2] 소 혀 모양의 부재.[3]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4]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5]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첩》을 간략하게 적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