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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
<colbgcolor=#bf1400> 경희궁 자정문 慶熙宮 資政門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신문로2가) | |
건축시기 | 1620년 (창건) / 1998년 (복원) |
<colbgcolor=#bf1400>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복원한 자정문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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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희궁의 편전 자정전의 정문이다. 경희궁 정전 숭정전의 서북쪽 뒷편에 있다.'자정(資政)' 뜻은 '정사(政)를 돕는다(資)'이다.# 현재 현판은 서예가 송천 정하건 선생(松泉 鄭夏建. 1939 ~ )이 썼다.#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었다. 처음 지은 후 화재 한 번 겪지 않고 260년 간 별 탈 없이 존재했다.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경복궁 중건일기》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 시 경희궁을 헐어 경복궁 공사의 자재로 쓸 때 헐렸다. 흔히 일제가 훼철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 1901년(광무 5년)에 숭정전을 찍은 사진을 보면, 자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정문이 없다. 이로 보아 아무리 늦어도 그 이전에 이미 철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colbgcolor=#bf1400> 1901년 이전에 촬영한 경희궁 숭정전 사진 (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
<colbgcolor=#bf1400> 복원 공사 중인 자정전. 왼쪽 사진은 북쪽에서, 오른쪽 사진은 남쪽에서 바라 본 모습이다.[1] |
3. 구조
- 경희궁 자체가 원래 이궁으로 잠시 머물 목적으로 지은데다 산자락이란 지형의 한계 때문인지 일반적인 편전 정문의 배치와는 좀 다르다. 숭정전 - 자정전 축에서 서쪽으로 치우쳐있다. 또한 숭정전과 자정문 사이의 길이 굉장히 가파르고 폭이 좁은데, 이런 지형은 훗날 경종 즉위 초에 자정전에 모셨던 선대왕 숙종의 재궁[2]을 발인할 때 문제가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해결했느냐면 자정문부터 숭정전 내부까지 흙으로 메워(...) 길을 만들었다.#
- 하지만 산자락의 지형을 역이용해 기단을 높임으로써 편전 정문의 위엄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다른 궁궐의 편전 정문들은 기단과 계단이 없거나 있어도 높지 않고 소박한 형태이지만, 자정문의 기단은 무려 장대석을 7단이나 쌓은 높은 기단이고, 계단도 무려 8단이며, 계단 가운데에 봉황을 새긴 답도를 놓고, 소맷돌 아래 끝 부분에 서수를 조각해서 화려하게 꾸몄다.
- 원형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2칸, 총 6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또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4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평방 없이 창방 위에 바로 공포를 놓은 형태로 공포는 익공 양식이며 공포 사이마다 화반 1개 씩을 두었다. 이는 자정전과 비슷하나 자정전과 달리 공포와 화반 사이를 벽으로 메꾸지 않고 트이게 했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을 조금 더 높게 만들었으며,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우고 위, 아래
위위아래를 벽으로 마감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colbgcolor=#bf1400>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자정전 |
[1] 사진 출처: MBC Archive.[2] 梓宮. 임금의 관.[3]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4] 가칠단청 위에 선만을 그어 마무리한 단청으로, 가칠단청은 무늬없이 단색으로만 칠한 단청이다.[5] 魂殿.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 뒤 3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6] 殯殿. 국상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