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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
<colbgcolor=#bf1400> 경희궁 숭정문 慶熙宮 崇政門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신문로2가) | |
건축시기 | 1620년 (창건) / 1991년 (복원) |
<colbgcolor=#bf1400> 숭정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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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으로 들어와 금천교를 건넌 뒤 살짝 왼쪽으로 틀어 건명문을 쭉 지나다 동북쪽으로 꺾은 뒤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보인다. 이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있는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된 정궁인 반면, 경희궁은 이궁인데다 인왕산 자락에 들어서 산세에 맞게 지었기 때문이다.이름은 당연히 ‘숭정전의 문’이란 뜻이며 ‘숭정(崇政)’ 이름 자체는 ‘정사(政)를 드높인다(崇)’는 뜻이다.
2. 역사
1617년(광해군 9년)에 경희궁 창건 당시에 착공하여 1620년 연간에 완공했다.이후 여기서 왕과 신하가 함께 조회하는 조참, 과거합격자들의 시상, 외국 사신 접견 등 많은 행사를 거행했다. 1829년(순조 29년)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내전 주요 건물들이 불탔으나 숭정문은 숭정전과 함께 다행히 피해를 면했다.
1860년대 경복궁 중건 때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 자재로 쓰였다. 경희궁에는 건물 10여 채 정도만 남았는데 숭정전과 숭정문도 그 중 하나였다. 경희궁 영역에는 창고와 양잠소가 들어섰는데 이 때 세운 곡식 창고를 숭정문 밖에 두었다.# 그나마도 1889년(고종 26년)에 숭정문의 일곽이 화재를 당해 곧 재건했는데#, 1900년 경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엔 숭정문과 행각이 없는 것을 보아 이마저도 그 사이에 철거한 듯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숭정전과 숭정문 언저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2]가 들어섰다. 8.15 광복 이후에도 경성중학교가 서울 중,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학교 자체는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서울시가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 사적 공원 조성 계획'를 세워 서울고등학교를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전시킨 뒤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1991년 복원했고, 1993년과 1994년에는 행각 공사까지 완료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colbgcolor=#bf1400>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숭정문과 숭정전 |
-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아 공포를 받치게 했다. 공포는 다포 양식으로 했고 어칸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3개의 공포를 두었으며 이를 주간포라 부른다. 협칸에는 각각 2개의 주간포를 얹었으며,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단초머리의 모로단청[4]으로 했으며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 숭정문의 좌우에는 각각 정면 8칸, 측면 2칸의 행각이 뻗쳐 있고, 가장자리 쪽 2칸은 다른 칸보다 폭이 좁다. 행각은 직각으로 북으로 꺾여 숭정전 좌, 우의 행각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방과 월랑이 혼합된 형태의 행각으로, 예문관 · 무예청 · 선전관청 ·향실 등의 관청과 숭정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으나 현재는 벽체없이 복도로만 뚫려있다. 그리고 행각 사방마다 문이 있어 통행을 자유롭게 했는데, 남행각엔 바로 이 숭정문, 동행각과 서행각엔 여춘문과 의추문, 그리고 북쪽 행각에는 편전인 자정전의 정문 자정문이 있다.
4. 여담
- 왕들의 즉위식장으로도 활용했다. 정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한 이유는 대부분 선왕의 장례기간에 즉위식이 이뤄지는 것이라 화려함과 웅장함보다는 슬픈 분위기에서 했기 때문이다.# 단, 이궁이기에 많이 열리진 않았다. 20대 경종과 22대 정조, 그리고 24대 헌종 등 임금 3명이 이 곳에서 왕위에 올랐다.
- 이 곳에서 임금이 직접 죄인을 국문하는 친국을 몇 번 행했다. 사안의 중대함에 따라 장소가 달라졌는데 꽤 무거운 죄를 저지른 중죄인들을 주로 숭정문에서 심문했다.[5] 즉 여기까지 왔다는 건 사실상 끝장났단 얘기다.##
사망 플래그
[1]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른 학교다. 거기는 '景'城.[3]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4]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5] 창덕궁에 왕이 머물 땐, 인정문에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