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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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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6002d><colcolor=#fff> 쌍용
雙龍 | SSANGYONG
파일:쌍용 국문 로고.svg파일:쌍용 국문 로고 화이트.svg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다국적 기업)
창립일 1939년 3월 15일
해체일 1997년 4월 30일 (그룹 구조조정 돌입)
2024년 7월 9일[1]
규모 대기업
유형 복합 기업, 기업 집단
창업주 김성곤
회장 김성곤 (1939~1975)
김석원 (1975~1995)
김석준 (1995~1998)
김석원 (1998~2000)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24-1[2]
(쌍용빌딩, 現 씨티센터타워)
사업 분야 시멘트, 건설, 자동차, 제지, 중공업, 무역, , 정유, 해운업, IT, 관광
웹 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웹 아카이브)

1. 개요
1.1. 이름 관련 여담
2. 역대 로고3. 기업 정신
3.1. 1974~19893.2. 1989년 이후
4. 역사
4.1. 창업과 초기 성장기 (1939~1975)4.2. 김석원 체제 (1975~1995)4.3. 해체 (1995~2006)
5. 역대 임원6. 계열사 목록7. 산하 기관8. 공익재단9. 여담

[clearfix]

1. 개요

1962년 설립한 시멘트 업체인 쌍용양회공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기업집단이었다. 60년대말부터 99년까지 오랜기간 동안 재계 10위 안에 들던 대기업이었다.

이름인 쌍용은 쌍용양회의 첫 공장인 영월공장의 소재지인 서면[3] 쌍용리에서 따왔다. 현재 태백선 쌍룡역이 있는 그 동네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ssy.co.kr이었다.[4] 과거 주소였던 www.ssangyong.co.kr로도 접속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이 두 홈페이지 도메인도 전부 쌍용양회가 소유하고 있다.

2023년 쌍용자동차KG모빌리티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사명에 '쌍용'이라는 이름이 존속[5]하는 회사는 쌍용C&E(시멘트, 한앤컴퍼니), 쌍용건설(건설, 글로벌세아), 쌍용C&B(제지, 모건스탠리PE), 쌍용정보통신(SI, 아이티센) 등으로 4곳이 있다. 쌍용C&E와 쌍용C&B는 사모펀드가 최대 주주로 있어 추후 매각이 된다면 사명을 변경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1.1. 이름 관련 여담

이 기업의 명칭은 쌍용(雙龍)으로서, 처음부터 한글로 표기된 기업명이었다. 만약 한자구성에 따른 통상적인 한글표기를 적용한다면 쌍룡으로 표기하였을 것이다. 또한 모태인 쌍용시멘트의 60년대 광고 등에서 제2음절을 철자대로 /joŋ/으로 발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음절 조합은 ㄴ삽입의 조건[6]을 만족하기 때문에 ㄴ삽입을 적용한 잘못된 발음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만약 ㄴ삽입을 할 경우 발음은 [쌍뇽]과 같이 되는데, 창업자 인터뷰나 60-70년대 녹음/녹화자료 기준으로 이는 타당하지 않다.

2. 역대 로고

파일:Screenshot_20230521-163604~2.png 파일:Screenshot_20230521-163604~4.png 파일:쌍용 로고(1978-1989).svg 파일:쌍용 로고.svg
<rowcolor=#fff> 1963~1969 1969~1978 1978~1989 1989~2006

3. 기업 정신

3.1. 1974~1989

3.2. 1989년 이후

(1절) 온 세상에 펼쳐라 널리 펼쳐라
광활한 우주에 환히 비춰라
눈부시다 찬란하다 우리의 미래

(2절) 뛰는 가슴 안아라 힘껏 안아라
설레는 소리로 크게 외쳐라
높푸른 꿈덩이 황금빛 우리날

(후렴) 일하자 더욱 일하자 한없이 일하자
겨레 위해 나라 위해 인류를 위해
쌍용 쌍용 쌍~용 영원하라

4. 역사

4.1. 창업과 초기 성장기 (1939~1975)

1939년 성곡 김성곤(1913~1975) 창업주가 경북 대구부에서 설립한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모태로 했으며, 1948년 금성방직을 세워 면방직에 진출 후 고려화재 설립에도 참여해 금융업에 처음 손을 뻗었다. 1954년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을 인수해 언론사업을 시작했고, 1959년 학교법인 국민학원을 인수해 육영사업을 개시했다. 1962년 쌍용양회를 세워 '쌍용' 명칭을 쓰기 시작했으며 1967년에 태평방직과 금성방직을 대한농산에 팔았고, 같은 해 삼화제지와 금성해운을 세웠다. 1969년에 종합조정실을 발족해 그룹의 형태를 갖췄다.

김성곤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였는데[7] 1965년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아 재벌의 정치자금 모금을 담당하였다.[8] 김성곤 회장은 집권당 정치인(공화당 재정위원장) 겸 재벌총수(쌍용그룹 회장) 겸 언론사주(동양통신 사장)로 정계, 재계, 언론계를 아울러서 1971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룹도 이 시기 급성장했다.[9] 이 시절에는 공무원 겸직금지 제도가 없어서 회장직 사퇴 없이도 회장직과 겸임해서 국회의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정몽준, 김호연, 아들인 김석원처럼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면 퇴직하고 공석으로 비우거나 바지사장을 앉혀야 한다.

1975년 김성곤 회장이 사망한 후 장남 김석원(1945~2023)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4.2. 김석원 체제 (1975~1995)

1995년 쌍용그룹 PR 신뢰의 쌍용 세계와 함께
1976년 쌍용중공업을 세우고 이듬해 쌍용종합건설을 세운 뒤 1976년 이란국영석유공사와 합작해 '한이석유'(현 에쓰-오일)를 세웠고, 1983년에 효성그룹으로부터 효성증권(현 신한투자증권)을 인수하고 1986년에 동아자동차까지 인수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는 계열사로 쌍용(무역업-현 GS글로벌), 쌍용자동차(현 KG모빌리티), 쌍용중공업(현 STX), 쌍용양회, 쌍용건설[10], 남광토건, 쌍용화재(현 흥국화재), 쌍용정유(현 에쓰-오일), 쌍용투자증권(현 신한투자증권) 등을 거느린 총매출 25조원, 재계 순위 5~6위의 거대재벌이었다.

4.3. 해체 (1995~2006)

그러나 문어발식 경영과 과도한 부채로 위기 요인이 계속 누적되어 오다가, 1997년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열혈 자동차 애호가였던 김석원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화근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11]

김석원 회장은 1986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였고, 외국 자동차 회사도 인수했다. 영국의 팬더 웨스트윈즈로, 1970년대 후반에 이미 망해서 법정관리 중이던 곳을 모피를 수출하던 진도에서 1980년 인수하였다가 1987년 쌍용에 넘긴 것이다. 쌍용은 아예 생산라인을 국내로 옮겨와 칼리스타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으나 1994년까지 단 78대만 판매되고 단종되었다. 사실 1997년 이전까지 쌍용자동차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은 대부분 흑자였다. 시멘트, 정유, 제지 등 경기를 별로 타지 않는 업종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쌍용자동차 한 회사의 적자가 나머지 계열사 전체 흑자의 몇 배였다. 회장의 과도한 관심에 따른 고급, 고가차 위주의 정책이 적자가 누적된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12] 1990년대만 해도 소형차나 준중형차들이 한국 자동차 시장의 주류였는데, 쌍용자동차는 이 분야에선 전혀 힘을 못쓰고 있었다.[13]

이런 와중에 정작 김석원 회장은 금배지를 노리고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14]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61억원을 사과상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가 들통이 나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15] 이렇듯 최고경영자의 정치 외도와 각종 구설수로 힘든 사이에 경영실적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김석원 회장은 결국 쌍용자동차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자동차산업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던 삼성과 자동차업계 만년 3위였던 대우에 매각을 제안하였으나, 삼성은 빚이 너무 많다면서 거절했고, 대우는 쌍용의 위급한 상황을 감지하고 가격을 후려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모든게 끝났다.[16]

김석원 회장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17] 경영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상태였다. 결국 국내외 채권단들이 김석원 회장의 경영권을 박탈하고 직접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쌍용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한 마디로 개인의 취미와 회사경영을 구분 못한 무능한 재벌 2세 때문에 그룹 전체까지 부실화된 것이다. 2000년에는 모기업 쌍용양회에 일본 태평양시멘트 지분까지 유치하기도 했으나 2002년 워크아웃 후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후 김석원은 2004년 회사자산 310억원을 빼돌렸다가 구속됐으나,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을 기념해 특별사면을 받고 친인척 및 옛 참모들과 함께 재기를 모색하다가 신정아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2008년 7월에는 위장계열사 4곳에 부당지원한 혐의로 징역 4년을 받고 항소했지만 이듬해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및 집행유예 2년을, 2011년 서울고법으로부터 징역 2년 6개월 및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후 2023년 8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모기업이던 쌍용양회는 채권단이 최대 지분을 갖고 2대 주주인 일본 태평양시멘트가 경영권을 행사해 오다가, 채권단과 태평양시멘트가 2016년 한앤컴퍼니라는 사모펀드에 지분을 매각하였다.

5. 역대 임원

6. 계열사 목록

7. 산하 기관

8. 공익재단

9. 여담



[1] 쌍용C&E는 그룹이 사실상 해체되어 독자경영을 하고 있는 기업으로 한앤컴퍼니가 지분 100%를 인수, 상장폐지하여 그룹이 완전히 해체되었다.[2]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로 34[3]한반도면.[4] 현재 본 도메인으로 접속하면 쌍용그룹의 모태였던 쌍용양회 홈페이지로 접속된다.[5] 및 CI를 옛 파일:쌍용 국문 로고.svg파일:쌍용 국문 로고 화이트.svg 로고를 사용[6] "두 형태소 사이에서 선행 형태소가 자음으로 끝나고 후행행태소가 /i/나 /j/로 시작할 때, 형태소 사이에 \[n\]을 삽입한다." 출처[7] 삼공유지를 경영하면서 박정희의 형 박상희를 남몰래 도왔다고 하고, 해방 이후에는 박상희와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앞장섰으며, 해방정국 시기 미군정 시기 친일경찰의 횡포에 의해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박상희, 황태성과 같이 핵심적 위치에서 활동한적 있었다. 박상희를 통해 박정희와 친해졌다고. 나이차가 나는 큰형 박상희를 사실상 아버지처럼 따랐던 박정희와도 사석에서 자녀들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의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8] 당시 정부발주 공사와 해외차관의 10%를 무조건 상납하게 하였다. 재벌들도 창구 단일화로 한쪽에서만 뜯기게 되자 오히려 좋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뇌물의 제도화이다.[9] 여담으로 이 시기 가봉에 백화점을 세웠다가 한국인 직원들이 현지 가봉인들에게 인종차별을 해버려서 이에 크게 분노한 가봉인들에게 큰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한국-가봉 관계 항목 참조.[10] 아파트 브랜드로는 더 플래티넘을 쓴다.[11] 같은 시기 유명 클래식카만 100대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동차 애호가로 유명했던 이건희 삼성 회장도 자동차 산업에 무리하게 진출했다가, 외환위기 직후에 간신히 포기하고 삼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삼성은 삼성화재,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를 통해서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쌍용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1997년 외환위기에도 자동차를 포기하고 몇몇 공장과 비주력계열사를 매각하는 수준의 부분적인 구조조정만으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반면에 쌍용은 쌍용차의 부실이 워낙에 심각한데다가, 뚜렷한 캐시카우가 없었고, 쌍용화재 등 금융계열사의 규모가 삼성에 비해서 현저하게 작았다.[12] 당시 기아차도 고급차와 고가차 위주 정책을 폈다가 시원하게 망했고, 재계 8위 기아의 부도에 한몫했다.[13] 쌍용차가 준중형차 분야의 선구자가 될 기회는 있다. 그러나 일본 기업과 기술제휴를 맺기 싫다는 독불장군 회장의 황소고집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던 스바루 레오네 라이선스 생산 계획이 그대로 엎어졌고, 그 결과 쌍용은 현대 엘란트라, 대우 에스페로, 기아 세피아가 모두 잘 팔리는 광경을 그저 구경만 해야했다.[14] 1971년 10.2 항명 파동으로 인해 반 강제로 정계를 은퇴한 부친 김성곤 회장의 유언은 "절대로 정치를 하지 마라"였다.[15] 당시 청와대검찰총장의 중단압력을 무시하고 사건을 수사했던 주임검사는 결국 좌천되자 사표를 제출하고 삼성 법무팀으로 스카웃된다. 이 인물이 바로 훗날 삼성의 비자금을 폭로하고 삼성을 생각한다를 출판한 김용철 변호사이다.[16] 사실 쌍용차를 제외하면 다른 계열사들은 재무상태가 그닥 나쁘지 않은 편이라서 쌍용차를 조금만 더 일찍 포기했다면 쌍용그룹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김석원 회장이 쌍용차 포기를 주저하면서 부채 해결을 한답시고 알짜로 꼽히던 제지사업 등을 매각하면서 자충수를 둔게 결정적이였다는 분석이 많다.[17] 이로 인해 1998년에 치러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엄삼탁을 꺾고 당선된 박근혜.[18] 창업주 김성곤의 둘째아들, 김석원의 동생이다.[19] 배우 김동원의 장남이자 가수 김세환의 친형. 기타리스트 키이스 킴의 아버지[20] 가수 겸 예능인 탁재훈의 부친.[21] 2012년 7월 이후의 건설업계는 초상집 분위기. 100대 건설사 중 20개 이상이 부도 혹은 워크아웃 상태이다.[22] 세아그룹과는 무관한 회사이다.[23] 그 악명높은 주수도의 제이유가 맞다.[24] 폭스바겐과 GM도 제휴관계였다. 전자는 냉전시기에 제휴했고 후자 상해GM은 외환위기때 제휴했다.[25] 1995년 킴벌리크라크와 합병됨.[26] Clean & Best의 약자.[27] 전임 이사장은 김성곤 회장의 조카이자 쌍용그룹 총괄부회장, 쌍용양회 회장을 지낸 김채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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