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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집단 외의 다른 문서에 대한 내용은 쌍용(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colbgcolor=#e6002d><colcolor=#fff> 쌍용 雙龍 | SSANGYONG | |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다국적 기업) |
창립일 | 1939년 3월 15일 |
해체일 | 1997년 4월 30일 (그룹 구조조정 돌입) 2024년 7월 9일[1] |
규모 | 대기업 |
유형 | 복합 기업, 기업 집단 |
창업주 | 김성곤 |
회장 | 김성곤 (1939~1975) 김석원 (1975~1995) 김석준 (1995~1998) 김석원 (1998~2000) |
소재지 | |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24-1[2] (쌍용빌딩, 現 씨티센터타워) | |
사업 분야 | 시멘트, 건설, 자동차, 제지, 중공업, 무역, 금융, 정유, 해운업, IT, 관광 |
웹 사이트 | (웹 아카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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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2년 설립한 시멘트 업체인 쌍용양회공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기업집단이었다. 60년대말부터 99년까지 오랜기간 동안 재계 10위 안에 들던 대기업이었다.이름인 쌍용은 쌍용양회의 첫 공장인 영월공장의 소재지인 서면[3] 쌍용리에서 따왔다. 현재 태백선 쌍룡역이 있는 그 동네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ssy.co.kr이었다.[4] 과거 주소였던 www.ssangyong.co.kr로도 접속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이 두 홈페이지 도메인도 전부 쌍용양회가 소유하고 있다.
2023년 쌍용자동차가 KG모빌리티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사명에 '쌍용'이라는 이름이 존속[5]하는 회사는 쌍용C&E(시멘트, 한앤컴퍼니), 쌍용건설(건설, 글로벌세아), 쌍용C&B(제지, 모건스탠리PE), 쌍용정보통신(SI, 아이티센) 등으로 4곳이 있다. 쌍용C&E와 쌍용C&B는 사모펀드가 최대 주주로 있어 추후 매각이 된다면 사명을 변경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1.1. 이름 관련 여담
이 기업의 명칭은 쌍용(雙龍)으로서, 처음부터 한글로 표기된 기업명이었다. 만약 한자구성에 따른 통상적인 한글표기를 적용한다면 쌍룡으로 표기하였을 것이다. 또한 모태인 쌍용시멘트의 60년대 광고 등에서 제2음절을 철자대로 /joŋ/으로 발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음절 조합은 ㄴ삽입의 조건[6]을 만족하기 때문에 ㄴ삽입을 적용한 잘못된 발음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만약 ㄴ삽입을 할 경우 발음은 [쌍뇽]과 같이 되는데, 창업자 인터뷰나 60-70년대 녹음/녹화자료 기준으로 이는 타당하지 않다.2. 역대 로고
<rowcolor=#fff> 1963~1969 | 1969~1978 | 1978~1989 | 1989~2006 |
3. 기업 정신
3.1. 1974~1989
- 사훈: 성실하고 정직하자, 창의를 발휘하고 노력하자
3.2. 1989년 이후
- 기업이념: 신뢰, 혁신, 인화
- 사가 <쌍용찬가>: 작사는 이은석, 작곡은 유병무가 맡았으며, 창립 50주년을 맞이했던 1989년 2월 10일에 제정되었다.
(1절) 온 세상에 펼쳐라 널리 펼쳐라 광활한 우주에 환히 비춰라 눈부시다 찬란하다 우리의 미래 (2절) 뛰는 가슴 안아라 힘껏 안아라 설레는 소리로 크게 외쳐라 높푸른 꿈덩이 황금빛 우리날 (후렴) 일하자 더욱 일하자 한없이 일하자 겨레 위해 나라 위해 인류를 위해 쌍용 쌍용 쌍~용 영원하라 |
4. 역사
- 영상 내내 기업명을 잘못 발음하는 과오를 범한다. 항목 참조.
4.1. 창업과 초기 성장기 (1939~1975)
1939년 성곡 김성곤(1913~1975) 창업주가 경북 대구부에서 설립한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모태로 했으며, 1948년 금성방직을 세워 면방직에 진출 후 고려화재 설립에도 참여해 금융업에 처음 손을 뻗었다. 1954년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을 인수해 언론사업을 시작했고, 1959년 학교법인 국민학원을 인수해 육영사업을 개시했다. 1962년 쌍용양회를 세워 '쌍용' 명칭을 쓰기 시작했으며 1967년에 태평방직과 금성방직을 대한농산에 팔았고, 같은 해 삼화제지와 금성해운을 세웠다. 1969년에 종합조정실을 발족해 그룹의 형태를 갖췄다.김성곤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였는데[7] 1965년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아 재벌의 정치자금 모금을 담당하였다.[8] 김성곤 회장은 집권당 정치인(공화당 재정위원장) 겸 재벌총수(쌍용그룹 회장) 겸 언론사주(동양통신 사장)로 정계, 재계, 언론계를 아울러서 1971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룹도 이 시기 급성장했다.[9] 이 시절에는 공무원 겸직금지 제도가 없어서 회장직 사퇴 없이도 회장직과 겸임해서 국회의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정몽준, 김호연, 아들인 김석원처럼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면 퇴직하고 공석으로 비우거나 바지사장을 앉혀야 한다.
1975년 김성곤 회장이 사망한 후 장남 김석원(1945~2023)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4.2. 김석원 체제 (1975~1995)
1995년 쌍용그룹 PR 신뢰의 쌍용 세계와 함께 |
4.3. 해체 (1995~2006)
그러나 문어발식 경영과 과도한 부채로 위기 요인이 계속 누적되어 오다가, 1997년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열혈 자동차 애호가였던 김석원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화근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11]김석원 회장은 1986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였고, 외국 자동차 회사도 인수했다. 영국의 팬더 웨스트윈즈로, 1970년대 후반에 이미 망해서 법정관리 중이던 곳을 모피를 수출하던 진도에서 1980년 인수하였다가 1987년 쌍용에 넘긴 것이다. 쌍용은 아예 생산라인을 국내로 옮겨와 칼리스타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으나 1994년까지 단 78대만 판매되고 단종되었다. 사실 1997년 이전까지 쌍용자동차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은 대부분 흑자였다. 시멘트, 정유, 제지 등 경기를 별로 타지 않는 업종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쌍용자동차 한 회사의 적자가 나머지 계열사 전체 흑자의 몇 배였다. 회장의 과도한 관심에 따른 고급, 고가차 위주의 정책이 적자가 누적된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12] 1990년대만 해도 소형차나 준중형차들이 한국 자동차 시장의 주류였는데, 쌍용자동차는 이 분야에선 전혀 힘을 못쓰고 있었다.[13]
이런 와중에 정작 김석원 회장은 금배지를 노리고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14]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61억원을 사과상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가 들통이 나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15] 이렇듯 최고경영자의 정치 외도와 각종 구설수로 힘든 사이에 경영실적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김석원 회장은 결국 쌍용자동차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자동차산업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던 삼성과 자동차업계 만년 3위였던 대우에 매각을 제안하였으나, 삼성은 빚이 너무 많다면서 거절했고, 대우는 쌍용의 위급한 상황을 감지하고 가격을 후려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모든게 끝났다.[16]
김석원 회장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17] 경영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상태였다. 결국 국내외 채권단들이 김석원 회장의 경영권을 박탈하고 직접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쌍용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한 마디로 개인의 취미와 회사경영을 구분 못한 무능한 재벌 2세 때문에 그룹 전체까지 부실화된 것이다. 2000년에는 모기업 쌍용양회에 일본 태평양시멘트 지분까지 유치하기도 했으나 2002년 워크아웃 후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후 김석원은 2004년 회사자산 310억원을 빼돌렸다가 구속됐으나,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을 기념해 특별사면을 받고 친인척 및 옛 참모들과 함께 재기를 모색하다가 신정아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2008년 7월에는 위장계열사 4곳에 부당지원한 혐의로 징역 4년을 받고 항소했지만 이듬해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및 집행유예 2년을, 2011년 서울고법으로부터 징역 2년 6개월 및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후 2023년 8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모기업이던 쌍용양회는 채권단이 최대 지분을 갖고 2대 주주인 일본 태평양시멘트가 경영권을 행사해 오다가, 채권단과 태평양시멘트가 2016년 한앤컴퍼니라는 사모펀드에 지분을 매각하였다.
5. 역대 임원
- 총괄부회장
- 김채겸 (1991~1992)
- 부회장
- 김채겸 (1990~1991)
- 이승원 (1991~1993)
- 김석준 (1991~1995)
- 이주범 (1991~1996)
- 우덕창 (1994~1997)
- 김기호 (1997~1998)
- 회장 비서실장
- 김태문 (1980~1993)
- 김영주 (1994~1995)
- 성영소 (1995~1998)
- 종합조정실장
- 이승원 (1969~1976)
- 진성섭 (1976~1979)
- 우덕창 (1979~1980)
- 장석환 (1980~1990)
- 차형동 (1990~1993)
- 김덕환 (1994~1998)[19]
- 구조조정본부장
- 홍금표 (1998~2000)
- 장기택 (2000)
- 강복수 (2000~2002)
6. 계열사 목록
- (주)쌍용 (현 GS글로벌): 구 금성산업-쌍용산업. 종합무역상사로 2002년 워크아웃을 받다가 2005년 계열제외 후, 2006년 4월 미국 모건 스탠리 PE에 완전 매각되어 4년 만에 채권단 관리에서 졸업했으며#, 2009년 GS그룹에 매각되었다. 과거 르노 25와 르노 21을 수입하기도 했으며 게임사업을 하던 시절에는 온라인 쇼핑몰 '조이파크'도 지녔다.
- 쌍용양회 (현 쌍용C&E): 1964년 강원 영월군 한반도면 쌍용로 89(쌍룡역)에서 최초 사업을 시작한 시멘트 제조업체로 그룹 이름이 쌍용그룹으로 정해진 이유가 되는 쌍용그룹 전체의 정신적 지주로써 그룹의 모체답게 서열상 최상위에 위치한 핵심회사였고 쌍용그룹을 지배하는 지주회사 역할이었지만 2000년 일본 태평양시멘트에 일부 지분을 유치했다가, 2002년 워크아웃 후 채권단 관리를 거쳐 2016년 한앤컴퍼니라는 사모펀드에서 지분을 인수하였다. 2006년 4월엔 쌍용건설과 쌍용건설 자회사인 한국민자도로운영을 계열사에서 제외시켰다. ##
- 시멘트사업부문
- 골재사업부문: 2009년 쌍용레미콘으로 분사됨.
- 쌍용머티리얼 (현 유니온머티리얼): 2000년 쌍용양회의 신소재사업부문이 분사하여 설립되었으나, 동일 과정을 거쳐 2017년 3월 유니온에 인수되었다.
- 쌍용자원개발: 동일 과정을 거쳐 2017년 쌍용양회에 합병됨.
- 오주개발: 레미콘 업체로, 1997년 정식편입 후 2002년 쌍용양회에 합병됨.
- 우진산업: 1998년 오주개발에 합병됨.
- (주)국민: 한동안 위장계열사였다가 1998년 정식편입 후 이듬해 오주개발에 합병됨.
- 국민콘크리트공업: 2002년 워크아웃 후 이듬해 청산됨.
- 국민레미콘: 1999년 배조웅[20]에게 매각됨.
- 대한양회공업: 옛 개풍그룹 계열사로, 1975년 쌍용양회에 합병됨.
- 쌍용건설: 2006년 4월 계열분리 후 2020년 기준 도급순위 28위의 중견 건설사로서, 고급 건축과 인프라 분야에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그 유명한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도 쌍용건설의 작품. 워크아웃을 거쳐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최대주주가 되었는데, 캠코에서 계속 매각을 시도하다가 무산된 상태에서 자본이 완전잠식될 정도로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2013년 2월 다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21] 결국 2013년 12월 30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정관리 하에서 M&A가 추진되어 2014년 12월 두바이 투자청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고 # 2015년 3월 법정관리에서 벗어났다. 창업주 김성곤의 차남이자 김석원의 동생인 김석준 회장이 계속하여 회장직을 맡고 있기는 하나, 이는 오너로서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워크아웃 당시 채권단이나 새로운 대주주인 두바이투자청이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였기 때문.#1 #2 2022년 10월 글로벌세아그룹[22]이 두바이 투자청의 지분을 매수하면서 최대주주로 등극, 다시 한국 기업 소유로 돌아왔다.#
- 남광토건: 1947년 배정일 창업주(1919~1993)가 설립해 한때 업계 순위 10위권 안에 들었던 건설업체. 1986년 쌍용그룹에 인수되었고, 2003년 골든애셋플레닝 컨소시엄으로 매각됐다가 2005년 알덱스를 거친 뒤, 2010년 대한전선에 인수되었다가 모기업이 어려워짐에 따라 워크아웃을 거쳐 2013년 8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2016년 중소 건설업체인 세운건설에 인수되었다.#
- 파슨스퍼시픽: 쌍용건설과 미국 파슨스 오버시즈의 합작사로, 1994년 폐업됨.
- 수정산터널: 2000년대 중반 이후 법인명이 '한국민자도로운영'으로 바뀌었고, 2006년 쌍용건설에 합류 후 2010년 폐업됨.
- 경북직물염공: 1967년 대한농산에 매각됨.
- 금성방직: 1967년 대한농산에 매각된 후 1972년 태평방직에 합병됨.
- 태평방직 (현 (주)대농): 1967년 대한농산에 매각됨.
- 한남무역: 1973년 금성산업에 합병됨.
- 동해전력: 1972년 한국전력공사에 매각됨.
- 유일개발: 제주 오라지구 개발사업자로, 2003년 계열제외 후 2005년부터 제이유네트워크[23]가 소유해 '탐모라리조트'가 됐으나, 2006년 모기업 부도로 2009년 폐업됨.
- 서해에너지: 2001년 STX그룹으로 합류 후 2005년 STX에너지에 합병됨.
- 오산에너지: 2001년 대성그룹에 매각된 후 2005년 대성산업에 합병됨.
- 쌍용해운: 외항해운 및 연안해운을 하는 해상 물류업체로, 2017년 쌍용양회에 흡수 합병되었다.
- 쌍용정보통신: 구 쌍용양회 종합전산실 전산팀-우성정보산업-쌍용컴퓨터. 대표적인 대기업계 SI로, 2017년 한앤코시멘트홀딩스에 매각됐다가 2020년 아이티센에 매각되었다. 현재는 수익성 좋은 중견 SI로 취급받고 있으며 공공 분야에서 특히 경쟁력이 뛰어나다.
- 쌍용엔지니어링 (현 인본건설): 2001년 그룹에서 분리된 뒤 인본건설이 되었다.
- 쌍용자동차 (현 KG모빌리티): 국내 5대 완성차 메이커 중 하나로, 1998년 대우그룹이 인수했다가 채권단 체제를 거쳐 2004년부터 중국 상해기차[24]한테 또 인수되었다가 기술력 먹튀당하고 2009년에 버림받아 또 법정관리를 받았으며, 2011년 인도 마힌드라 그룹에 다시 인수되었지만 만년 하위권을 면치 못하다가 마힌드라에서 경영권을 포기했으며 법정관리를 또 거쳐 2022년 KG그룹으로 또 팔린 후 이듬해인 2023년 KG모빌리티로 사명을 변경했다.
- 쌍용제지 (현 쌍용C&B): 전문용지(크라프트지) 제조업체로 설립되었는데, 미국 스카트[25]와의 기술제휴로 미용티슈도 생산했다. 1998년 미국 P&G에 인수되었다가, 화장지 사업부문은 (주)모나리자, 크라프트지 제조 사업부문은 소프트뱅크벤처스에 매각되었다. 모나리자에 매각된 쌍용제지의 화장지 사업부문은 회사명을 쌍용C&B[26]로 바꿔 새로 출범했다. 쌍용C&B는 모기업인 모나리자와 함께 모건 스탠리 PE에 매각되어, 2,000여 억의 매출과 300여 명의 근로자가 종사하는 중견기업으로 유지되고 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로 팔린 크라프트지 제조사업 부문은 2015년에 지류 제조사업을 중단하였다.
- 쌍용스카트제지: 미국 스카트 사와의 합작사로, 1982년 쌍용제지에 합병됨.
- 소피아: 1981년 쌍용제지에 합병됨.
- 쌍용유니참 (현 LG유니참): 일본 유니참과의 합작사로, 1998년 미국 P&G에 세트로 매각된 후 '유니참'이 됐다가 1999년 이후 제일제당그룹에 넘어간 뒤 2006년 LG생활건강에 지분매각됨.
- 쌍용정유 (현 S-OIL): 1999년 2대 주주 아람코가 쌍용그룹 지분을 자사주로 매각함.
- 범아석유: 쌍용정유의 직영대리점 자회사로, 1998년 퇴출 후 인력이 쌍용정유로 넘어감.
- 한주석유: 1993년 범아석유에 합병됨.
- 쌍용중공업 (현 STX): 2000년 한누리투자증권 컨소시엄에 일부 지분이 매각됐으나 이듬해 강덕수 전무가 사들이면서 계열 분리되어 STX그룹의 모체가 되었다. STX엔진, STX메탈(舊STX엔파코) 등으로 각 사업부문이 분리되었는데, 실질적인 후계 회사는 STX엔진. STX그룹도 쌍용그룹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서(...) 과도한 차입경영과 무리한 해외투자를 감행한 끝에 지금은 사실상 해체된 상황이다. #
- 쌍용정공 (현 심팩): 구 동성개발. 2001년 그룹에서 분리된 뒤 심팩(SIMPAC)으로 독자생존. 금속을 성형하는 프레스 기계를 주로 생산하며 인수합병을 통해 주물 및 산업기계에도 진출했다. 매출 비중은 프레스와 기타가 8 : 2. 전방산업으로 자동차 산업이 매출의 80%를 차지하며 가전이 13%, 나머지가 기타이다. 프레스 분야에서 점유율이 50%에 달하며 15년 기준 매출 2,700억에 영업이익 210억에 달하는 알짜 기업으로 거듭났다.
- 진방철강: 2004년 미국 모건 스탠리에 의해 신규법인 '진방스틸코리아(현 진방스틸)'로 자산매각된 후 2007년에 폐업됨.
- 용평리조트: 구 고원개발-유국개발-쌍용종합건설 용평사업부-쌍용양회 용평사업본부. 국내에서 가장 큰 스키장과 골프장을 운영하는 종합 리조트 기업으로, 2000년 재분사 후 2003년 세계일보가 인수했다.
- 용인개발 (현 은화삼컨트리클럽): 골프장 은화삼CC 운영법인으로, 2001년 개인 사업자에게 매각됨.
- 쌍용운수: 1981년 쌍용종합건설에 합병됨.
- 동성고속관광: 1998년 폐업됨.
- 쌍용투자증권 (현 신한투자증권): 구 효성그룹 계열사였던 효성증권이 전신이다. 1999년 미국 H&Q AP에 매각되어 굿모닝증권이 되었다가 2002년 신한금융지주에 인수되어 신한증권을 먹고 굿모닝신한증권을 거쳐 신한금융투자가 되었다가 2022년 다시 신한투자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 쌍용템플턴투자신탁운용 (현 프랭클린템플턴투자신탁운용): 구 쌍용투자자문-쌍용템플턴투자자문. 1999년 미국 프랭클린템플턴에 지분 매각함.
- 쌍용종합금융: 구 인천투자금융. 1998년 퇴출 후 2011년 폐업됨.
- 쌍용캐피탈: 구 쌍용화이낸스-쌍용할부금융-쌍용여신금융. 2003년 골든브릿지에 인수되어 2006년 GB캐피탈, 2007년 골든브릿지캐피탈로 각각 바뀌었으나, 2014년 남이산업에 매각된 후 사명을 '인터레드캐피탈'로 바꾸었다가 2015년 여신전문금융업 허가가 말소되고 2016년 폐업됨.
- 쌍용경제연구원: 구 쌍용경제연구소. 1997년 청산됨.
- 삼공합자회사: 1949년 윤정화에게 경영권이 양도됨.
- 승리전자공업: 오디오 수출업체. 1991년 폐업.
- 텍스텍: 구 승리기계제작소-쌍용중공업 섬유기계본부. 2001년 STX그룹에 합류 후 2005년 STX엔파코에 합병됨.
- 서울일일신문: 구 연합신문사. 1954년 인수 후 1961년 폐간.
7. 산하 기관
- 쌍용중앙연구소
- 쌍용중앙연수원: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함. 해당 건물은 원래 풍문여고 터에 있던 안동별궁 정화당으로, 1975년 개설 이전엔 김성곤 창업주의 별장이었으며 1997년 동양화재에 매각됨.
8. 공익재단
- 성곡미술문화재단: 성곡미술관 운영재단이다.
- 성곡언론문화재단
- 학교법인 국민학원
- 학교법인 현풍학원
9. 여담
- 앞서 말했듯 현풍중학교 및 현풍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현풍학원과 국민대학교를 운영하는 국민학원을 소유했던 적이 있는데 아직도 국민대 이사진 중에는 쌍용그룹 출신 인사나 쌍용그룹에 관련되었던 인사가 많으며 현 국민대 이사장도 창업주 김성곤 회장의 손자인 김지용 씨가 재임하고 있다.[27]# ##
- 스포츠로는 창업주 김성곤 회장이 학창시절 유도를 했었고, 한때 대한유도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유도단을 운영하였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김석원 회장이 한국스카우트연맹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때문에 1991년 강원도 고성에서 열린 세계 잼버리에 쌍용그룹에서 많은 인력과 물자를 지원하였다.
광고를 전공한 이들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나치다 한 번은 봤을 "오늘은 속이 불편하구나"로 시작되는 기업광고를 낸 곳이다. 이 작품은 1984년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주요 신문에 게재했던 것으로서, 보릿고개 시절에 유년기를 겪고 산업화 시기에 청장년기를 보낸 당시의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얻어, 지금까지도 한국적인 기업PR의 주된 성공사례로 종종 회자되곤 한다.
- 이 기업에서 발행했던 사외보인 '여의주'가 유명했는데, 2013년 4월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 계열사인 (주)쌍용이 90년대에 PC 게임 시장에 진출했던 적이 있었는데, 화제작인 게임들을 유통했다. id 소프트웨어의 둠을 출시하였고, 루카스아츠의 스타워즈 게임 시리즈 일부와 샘 앤 맥스, 에이도스 인터랙티브의 툼 레이더 시리즈와 코만도스 등을 출시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게임 유통사인 EB Games와의 제휴로 국내에 EB Games 매장을 여러 군데 오픈한 후, 1999년에는 인터넷 게임 쇼핑몰 '조이파크'를 오픈했으나 2001년 황선규 등의 주도 하에 'GNC인터렉티브'로 독립했다. 그러나 당시 온라인 게임의 대중화로 패키지 시장이 사양화되자 모바일 게임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2018년에 문을 닫았다.
[1] 쌍용C&E는 그룹이 사실상 해체되어 독자경영을 하고 있는 기업으로 한앤컴퍼니가 지분 100%를 인수, 상장폐지하여 그룹이 완전히 해체되었다.[2] 現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로 34[3] 현 한반도면.[4] 현재 본 도메인으로 접속하면 쌍용그룹의 모태였던 쌍용양회 홈페이지로 접속된다.[5] 및 CI를 옛 로고를 사용[6] "두 형태소 사이에서 선행 형태소가 자음으로 끝나고 후행행태소가 /i/나 /j/로 시작할 때, 형태소 사이에 \[n\]을 삽입한다." 출처[7] 삼공유지를 경영하면서 박정희의 형 박상희를 남몰래 도왔다고 하고, 해방 이후에는 박상희와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앞장섰으며, 해방정국 시기 미군정 시기 친일경찰의 횡포에 의해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박상희, 황태성과 같이 핵심적 위치에서 활동한적 있었다. 박상희를 통해 박정희와 친해졌다고. 나이차가 나는 큰형 박상희를 사실상 아버지처럼 따랐던 박정희와도 사석에서 자녀들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의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8] 당시 정부발주 공사와 해외차관의 10%를 무조건 상납하게 하였다. 재벌들도 창구 단일화로 한쪽에서만 뜯기게 되자 오히려 좋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뇌물의 제도화이다.[9] 여담으로 이 시기 가봉에 백화점을 세웠다가 한국인 직원들이 현지 가봉인들에게 인종차별을 해버려서 이에 크게 분노한 가봉인들에게 큰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한국-가봉 관계 항목 참조.[10] 아파트 브랜드로는 더 플래티넘을 쓴다.[11] 같은 시기 유명 클래식카만 100대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동차 애호가로 유명했던 이건희 삼성 회장도 자동차 산업에 무리하게 진출했다가, 외환위기 직후에 간신히 포기하고 삼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삼성은 삼성화재,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를 통해서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쌍용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1997년 외환위기에도 자동차를 포기하고 몇몇 공장과 비주력계열사를 매각하는 수준의 부분적인 구조조정만으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반면에 쌍용은 쌍용차의 부실이 워낙에 심각한데다가, 뚜렷한 캐시카우가 없었고, 쌍용화재 등 금융계열사의 규모가 삼성에 비해서 현저하게 작았다.[12] 당시 기아차도 고급차와 고가차 위주 정책을 폈다가 시원하게 망했고, 재계 8위 기아의 부도에 한몫했다.[13] 쌍용차가 준중형차 분야의 선구자가 될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일본 기업과 기술제휴를 맺기 싫다는 독불장군 회장의 황소고집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던 스바루 레오네 라이선스 생산 계획이 그대로 엎어졌고, 그 결과 쌍용은 현대 엘란트라, 대우 에스페로, 기아 세피아가 모두 잘 팔리는 광경을 그저 구경만 해야했다.[14] 1971년 10.2 항명 파동으로 인해 반 강제로 정계를 은퇴한 부친 김성곤 회장의 유언은 "절대로 정치를 하지 마라"였다.[15] 당시 청와대와 검찰총장의 중단압력을 무시하고 사건을 수사했던 주임검사는 결국 좌천되자 사표를 제출하고 삼성 법무팀으로 스카웃된다. 이 인물이 바로 훗날 삼성의 비자금을 폭로하고 삼성을 생각한다를 출판한 김용철 변호사이다.[16] 사실 쌍용차를 제외하면 다른 계열사들은 재무상태가 그닥 나쁘지 않은 편이라서 쌍용차를 조금만 더 일찍 포기했다면 쌍용그룹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김석원 회장이 쌍용차 포기를 주저하면서 부채 해결을 한답시고 알짜로 꼽히던 제지사업 등을 매각하면서 자충수를 둔게 결정적이였다는 분석이 많다.[17] 이로 인해 1998년에 치러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엄삼탁을 꺾고 당선된 박근혜.[18] 창업주 김성곤의 둘째아들, 김석원의 동생이다.[19] 배우 김동원의 장남이자 가수 김세환의 친형. 기타리스트 키이스 킴의 아버지[20] 가수 겸 예능인 탁재훈의 부친.[21] 2012년 7월 이후의 건설업계는 초상집 분위기. 100대 건설사 중 20개 이상이 부도 혹은 워크아웃 상태이다.[22] 세아그룹과는 무관한 회사이다.[23] 그 악명높은 주수도의 제이유가 맞다.[24] 폭스바겐과 GM도 제휴관계였다. 전자는 냉전시기에 제휴했고 후자 상해GM은 외환위기때 제휴했다.[25] 1995년 킴벌리크라크와 합병됨.[26] Clean & Best의 약자.[27] 전임 이사장은 김성곤 회장의 조카이자 쌍용그룹 총괄부회장, 쌍용양회 회장을 지낸 김채겸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