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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
<colbgcolor=#bf1400> 경희궁 숭의문 慶熙宮 興元門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길 (추정) | |
건축시기 | 1617년 ~ 1620년 (창건) / 철훼시기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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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희궁의 동쪽 궁문이다. 정문 흥화문의 북쪽에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흥화문 자리는 현재 위치한 곳이 아니라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이다.대비전 및 동궁 영역과 가까웠다. 그래서 해당 권역에 볼 일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2. 역사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1] 지었다.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부분 경희궁 건물들을 공사 자재로 쓰려고 없앴다. 그러나 영역만은 살아남았고, 흥원문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868년(고종 5년)과 1879년(고종 16년)에는 흥원문 북쪽 담장이 무너져 고쳐지었고, 1891년 5월 19일[2]에 근처 민가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불이 흥원문으로 옮겨붙어 서까래 6개가 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저 때 문 전체가 불에 타진 않은 듯 하다. 1890년대에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3]를 보면 경희궁 궁장과 궁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가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4]를 짓고, 그나마 남아있던 경희궁 건물과 영역을 매각하면서 흥원문도 같이 헐렸다.
3. 구조
4. 여담
- 1625년(인조 3년)에 소성대비(인목왕후)가 복을 기원하려고 중관을 시켜 시각장애인 7명을 흥원문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자 당시 병조좌랑이었던 김육이 "임금의 명 없이 감히 금문(禁門)에 아무나 받아 들일 수 없다"며 저지했다. 중관이 온갖 공갈을 함에도 끝까지 들여보내지 않아 결국 시각장애인들은 못들어갔다고.#
- 1712년(숙종 38년)에 한 스님이 훈련도감에 가려다 실수로 흥원문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다. 스님은 일종의 야간통행증인 물금첩(勿禁帖)을 소지했으나, 신분증인 호패가 없어 형조에 갇혔다.#
[1]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2] 음력 4월 12일.[3]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였던 헤론(J. W. Heron) 박사의 유품으로,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펜으로 새로 필사한 후 한글과 영어로 지명을 수록한 것이다. 제작 연대의 경우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러시아공사관인 아라사공사관이, 1896년(건양 원년)에 헐리는 서대문 밖의 모화관이 적혀 있어 그 사이에 필사한 듯 하다.[4]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