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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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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
<colbgcolor=#bf1400> 경희궁 무덕문 慶熙宮 武德門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4길 | |
건축시기 | 1617년 ~ 1620년 사이 (창건) / 철훼시기 미상 |
<colbgcolor=#bf1400> 무덕문 터[1] |
[clearfix]
1. 개요
경희궁의 북쪽 궁문이다. 사직단과 연결되는 통로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2. 이름
'무덕(武德)'의 '무(武)'는 사신(四神) 중 하나인 현무(玄武)를 뜻한다. 현무는 전통적으로 북쪽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북문의 이름으로 쓴 듯 하다.3. 역사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2] 지었다.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부분 경희궁 건물들을 공사 자재로 쓰려고 없앴다. 그러나 영역만은 살아남았고, 무덕문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890년대에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3]를 보면 경희궁 궁장과 궁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가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4]를 짓고, 그나마 남아있던 경희궁 건물과 영역을 매각하면서 무덕문도 같이 헐렸다.
2000년대 초중반에 풍림산업에서 옛 무덕문 터 근처에 주상복합아파트 풍림스페이스를 지을 계획을 세웠다. 이에 앞서 풍림산업에서는 혹시 모를 문화재가 있을지도 몰라 중앙문화재연구원에 발굴 조사를 의뢰했다. 그래서 2005년 1월 ~ 3월에 조사를 한 결과, 경희궁 담장 일부와 우물 터, 무덕문 터로 보이는 곳에서 유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조사 후 그 자리에 경희궁 유구 확인 지역 표지판을 설치했다.# 표지판은 두 개가 있으며, 왼쪽에는 글을 적어둔 표석이, 오른쪽에는 표석 위에 유구 모습을 그린 동판이 있다.
경희궁지 일원 유구 확인 지역
풍림스페이스본 주상복합건물 신축과 관련한 발굴조사를 통해 경희궁의 담장 일부와 우물지, 그리고 무덕문지(武德門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무덕문((武德門)은 경희궁의 북문으로 사직단과 연결되는 통로상에 위치하며, 조사를 통해 지하배수로의 기단의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유구를 원위치에 복원했으며, 이 곳이 경희궁의 권역이었음을 알리고자 표석을 세운다.
경희궁지 일원 유구 확인 지역 표석
풍림스페이스본 주상복합건물 신축과 관련한 발굴조사를 통해 경희궁의 담장 일부와 우물지, 그리고 무덕문지(武德門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무덕문((武德門)은 경희궁의 북문으로 사직단과 연결되는 통로상에 위치하며, 조사를 통해 지하배수로의 기단의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유구를 원위치에 복원했으며, 이 곳이 경희궁의 권역이었음을 알리고자 표석을 세운다.
경희궁지 일원 유구 확인 지역 표석
4. 구조
5. 여담
- 1630년(인조 8년)에 인조가 풍정례[5]를 치르러 경덕궁[6]에서 인경궁으로 갈 때와 돌아올 때 무덕문을 이용했다. 단순히 왕이 드나든 것을 굳이 여담 항목에 따로 적어둔 이유는, 저게 인조가 인경궁을 존치시키고 활용하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인경궁 문서의 2.3 항목 참조.
[1] 사진 출처: 카카오맵.[2]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3]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였던 헤론(J. W. Heron) 박사의 유품으로,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펜으로 새로 필사한 후 한글과 영어로 지명을 수록한 것이다. 제작 연대의 경우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러시아공사관인 아라사공사관이, 1896년(건양 원년)에 헐리는 서대문 밖의 모화관이 적혀 있어 그 사이에 필사한 듯 하다.[4]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5] 豊呈禮. 왕실의 어른에게 올리는 큰 연회.[6] 초창기 경희궁의 이름.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