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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0:57:32

타타라 잉굴다이

용골대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
2.1. 장수로서의 면모2.2. 조선 침공2.3. 정치가로서의 면모
3. 평가4. 한국에서의 이미지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로마자: Tatara Inggūldai(타타라 잉굴다이)
만주 문자: ᡨᠠᡨᠠᡵᠠ ᡳᠩᡤᡡᠯᡩᠠᡳ
한문 표기: 他塔喇 英俄爾岱(Tā tǎ lǎ Yīng é ěr dài, 타탑라 영아이대)
조선식 한문 표기: 龍骨大(용골대)

1596년 ~ 1648년 2월 24일, 향년 52세

청나라 개국 시기의 군인이자 외교관, 재무관, 행정관.

만주족으로 타타라(Tatara, 他塔喇) 씨족[1]의 사람이었으며 팔기(八旗) 중 정백기(正白旗) 출신이었다. 조선에서는 용골대(龍骨大), 명나라에서는 영아이대(英俄爾岱, Yīng é ěr dài), 영고이대(英固爾岱, Yīng gù ěr dài) 등으로 음차해 놓았지만 본래의 만주어 발음은 잉굴다이였다.[2]

동아시아 최대의 격동기였던 명청교체기의 만주족 유력 인사들 중 '용골대' 라는 조선식 음차 이름이 본명보다 유명한 몇 안 되는 사례로, 실제로는 《조선왕조실록》에 올라온 정충신의 보고서나 여러 특사 및 무관들이 작성한 《북방견문록》에서 귀영개(다이샨), 홍태주(홍타이지) 등 만주어 인명을 조선식으로 음차한 표기, 한어식 인명들이 많이 전해지긴 한다. 하지만 잉굴다이는 대조선 외교를 위해 조선에 많이 들락거린 최일선의 실무자였기에 조선인들에게 더 강렬하게 기억되었고, 《박씨전》이나 《임경업전》 등의 군담소설에서 '용골대'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고통받는 신세가 되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한국에서는 병자호란 때 함께 선봉에 선 마푸타와 마찬가지로 맹장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두 사람은 후금에서 재정이나 외교를 담당했기 때문에 문관에 더 가까웠다. 물론 당시 명나라도 그렇고, 조선도 그러했지만[3], 후금은 아직 유목국가에 가까웠고 능력이 있으면 문•무관의 역할을 모두 수행해야 했다.

명나라 만력 24년(1596)에 태어났는데 이재와 외교에 밝아 천명제 누르하치와 숭덕제 홍타이지를 따라 명나라와의 전투, 몽골 원정, 조선 침공(정묘호란 & 병자호란) 등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청나라 순치 5년(1648) 2월 24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실제로는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자주 맡았던 것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정치, 외교, 행정, 재정 관리 수완도 뛰어났다.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했고, 뭐든 간에 홍타이지의 기대를 200% 만족시켰다. 잉굴다이는 뛰어난 외교적 재능을 발휘하여 홍타이지가 대신들 앞에서
"6부의 여러 신하들 중에서 잉굴다이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서의 업무를 처리하고, 일처리가 분명하여 짐이 아주 좋아하고 인정한다. 나머지 각 부의 대신들 중에서는 힘을 다하여 일처리를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홍타이지는 잉굴다이를 크게 신임하여 참수당할 일이 발생하면 한 번은 면제받을 수 있는 특혜까지 부여했지만 정작 잉굴다이는 생전에 참수 면제권을 단 한 번도 사용한 적도, 사용할 일도 없었다.

2. 생애

잉굴다이의 타타라 집안은 대대로 현재의 랴오닝성 푸순시 동남쪽에서 거주했는데 그의 조부가 누르하치에게 귀순한 후 정백기에 예속되었다. 잉굴다이는 청년 시절에 매우 용맹하여 니루이 어전(niru-i ejen, 牛祿 額眞)[4]으로 승진했으며, 누르하치의 치세 동안 중요한 전투에 계속 참전했다.

2.1. 장수로서의 면모

타타라 잉굴다이는 1616년누르하치를 따라 현재의 랴오닝성 톄링시를 공격했고 명나라몽골의 장수들을 죽이는 공을 세운 적이 있었다. 1621년에는 랴오양, 묵던[5] 전투 때 전공을 세워 유격(遊擊)으로 승진한 후 다시 참장(參將)까지 했지만 같은 해 12월 사고 때문에 비어(備禦)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잉굴다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력하여 3등유격(三等遊擊, 1623년), 3등참장(三等參將, 1625년)[6]까지 올랐으며, 1629년홍타이지가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기습할 당시(기사의 변) 잉굴다이도 함께 참전하여, 현재의 허베이성 탕산시의 한 성에 머물면서 절반은 부상병인 겨우 800명에 불과한 수비군으로 명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막아냈고, 이어서 반격에도 성공하는 큰 공을 세웠다.

1634년, 동몽골 차하르부의 나머지 인원들을 찾아 청나라의 세력하에 흡수하기 위해 감행한 홍타이지의 정벌에 동참했다. 그해 6월, 후금군은 내몽골을 지나게 되었는데, 잉굴다이와 기오로 부르기(Gioro Burgi, 覺羅 布爾吉)는 병력 2,000명을 이끌고 정찰을 나갔다. 도중에 이들은 차하르부의 한 무리와 만나 장정 200명을 죽이고, 부녀자와 어린이 140명, 낙타, 말, 소, 노새, 양 등 600여 마리를 얻어서 홍타이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어 후금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산시성(山西省) 동북부의 우타이산(山) 인근에 이르렀고, 50여 일 간 약탈을 자행했다. 이런 도중 차하르부의 나머지 무리들이 속속 투항했는데, 잉굴다이는 이들을 안치하는 업무를 맡았다.

1641년 8월, 잉굴다이는 저명한 송산 전투에 참전했다. 이 해 7월, 명나라의 계료 총독 홍승주(洪承疇)는 13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있다가 금주(진저우)에서 포위되었다. 도르곤이 명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불리하여 퇴각했고, 후금군의 병마가 많이 다쳤다. 8월 초, 잉굴다이는 명령을 받아 도르곤을 도우러 갔다. 이때 홍타이지도 친히 전선에 나와서 지휘했는데, 그는 홍승주와 신속하게 결전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잉굴다이는 이 방안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도르곤 및 호오거 등과 함께 홍타이지에게 건의했다. 결국 홍타이지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포위전에 돌입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포위되어 양식이 떨어진 명군은 결국 패배했고, 홍승주는 포로가 되었다. 이때의 싸움에서도 잉굴다이는 후금군의 선봉에 서서 큰 활약을 했다.

마침내 후금군이 산해관에 들어갔을 때, 잉굴다이는 병력을 이끌고 명군의 보병 및 기병 200,000명을 무찔렀다.

잉굴다이는 아이신기오로 황실에 대한 충성과 공로로 홍타이지에게 중용되었고, 특수한 대우를 받았다. 1643년 7월, 홍타이지는 잉굴다이의 수하들 중 100명까지 인삼을 채굴할 수 있도록 하는 허가를 내렸다. 허가받은 인원 수가 공신들 중에서 두 번째였다. 이 해에 호부승정은 호부상서로 고쳐졌는데, 잉굴다이가 호부상서를 맡았다.

2.2. 조선 침공

홍타이지의 즉위 이후에도 잉굴다이는 뛰어난 재능 덕택에 정치, 군사의 여러 방면에서 임무를 맡았다. 1627년에는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기 위해 파견되었다.[7] 같은 해 5월, 잉굴다이는 부장(副長) 유흥조(劉興祚)[8]와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원창군(原昌君)을 귀국시켰고, 홍타이지에 대한 인조의 맹세를 이행하라는 국서를 전달했다.

또 같은 해 12월, 홍타이지는 명나라의 경제 봉쇄에서 벗어나고, 물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잉굴다이를 다시 조선에 파견하여 무역 문제를 협의하도록 했다. 힘든 협상 끝에 후금과 조선은 국경 시장인 변경 호시(互市)를 여는 것에 합의했다. 합의서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쌀 3,000석을 준비하여 그 중 2,000석은 후금에 직접 보내고, 1,000석은 변경 호시에서 매매하며, 다른 물자는 양국의 백성들이 변경 호시에서 교환하도록 허용하여 서로 가진 것을 없는 것과 바꾸도록 했다.

그 후 1628년에서 1632년까지 5년 동안 잉굴다이는 감시관(監市官)으로 묵던과 조선을 오가면서 후금에 시급히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631년, 후금과 조선의 형제 관계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인조가 보낸 사신 박난영(朴蘭英)이 후금으로 봄철 공물을 보내왔는데, 공물이 부족하다고 여긴 홍타이지는 인조가 고의로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공물을 받지 않았으나, 예전과 마찬가지로 인삼 등의 답례물은 준비해서 잉굴다이로 하여금 박난영이 머무는 관사로 보내도록 했다.

박난영은
"후금이 우리의 공물을 받지 않는데, 내가 답례품을 받을 수는 없다."
라고 하면서 이를 받지 않으려 했으나, 잉굴다이는
"공물을 받지 않는 것은 조선이 맹세를 어기고 공물을 갈수록 감소시켰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난영은 이에 반박했다.
"후금의 답례품도 계속 줄어들었다."
는 것이었다. 이때 잉굴다이는 이를 담담하게 인정했으며, 박난영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조선이 여러 번 명을 도와서 후금을 괴롭혔지만, 후금은 여전히 대의를 생각해서 조선을 대해주었다."
고 하나하나 나열해 박난영을 공격했다.

같은 해 3월, 잉굴다이는 다시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쌍방의 관계 및 봄철 무역에 관해서 계속 논의했다. 이 기간 동안 만주에서 도망친 385명이 배를 타고 조선의 경내로 들어왔는데, 잉굴다이는 이를 알고난 후, 즉시 사람을 보내 구금하여 묵던으로 송환시켰다.

1632년 11월, 조선은 함경도 회령(會寧)의 시장을 단속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문에 잉굴다이는 다시 조선에 가서 교섭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는 이 해에만 5번이나 조선에 가게 된 것이었다. 이번의 담판은 쉽지 않아서 홍타이지는 특별히 그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인조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적었다.
"잉굴다이를 파견했으며, 여러가지 논의거리는 그가 직접 전하게 했다."

1633년 4월, 잉굴다이는 또 조선으로 가서 담판을 벌였다.
"국경 인근에 주둔한 후금군의 식량 공급을 조선이 책임져 달라."
고 요구한 것이었다. 6월,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서 교섭을 벌였으며, 동시에 그는 팔기의 무역상 80인과 함께 인삼 900근을 가지고 조선으로 가서 무역을 했다. 잉굴다이는 협상에 능했기 때문에 비교적 조선에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협상은 원만하게 끝나서 인조는 조(粟)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이로써 변경 병사들의 식량 문제가 해결되었다. 8월, 잉굴다이는 묵던으로 돌아갔다가 9월에 다시 무역상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서 가을 무역을 벌였다.

1634년 3월, 잉굴다이는 마푸타(Mafuta, 마부대, 馬福大, 馬福塔) 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서 변경 호시를 열었다. 계속되는 무역으로 후금은 조선에서 대량의 물자를 얻어 통치자들의 수요를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화물을 다시 몽골에 팔고 말을 얻어왔다. 후금의 강력한 기병은 이렇게 무장된 것이었다. 즉, 잉굴다이는 후금 군대 건설에 큰 공헌을 한 셈이었다. 이 덕택에 같은 해 5월, 잉굴다이는 1등(一等) 잘란이 장긴(jalan-i janggin, 甲喇 章京)[9]으로 승진했다.

1636년 2월, 홍타이지는 황제를 칭할 준비를 했다. 당시까지 아직 '금'이란 국호를 쓰고 있었고, 명나라처럼 정식으로 황제를 칭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부터 정식으로 대청이라는 국호와 황제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홍타이지의 지시하에 8명의 호쇼이 버일러(hošo-i Beile, 和碩 貝勒), 17명의 구사이 어전(gūsa-i ejen, 固山 牛祿)[10], 버일러 49명이 조선의 인조에게
'우리와 함께 홍타이지에게 황제 칭호를 바치자.'
는 내용으로 서신을 썼다. 잉굴다이는 이 서신을 가지고 대량의 인원을 이끌며 조선으로 갔다.

그러나 이때 조선의 형세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주전파가 득세하여
'오랑캐 사신을 죽이고 오랑캐의 글을 불태워서 대의를 드높이자.'
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잉굴다이 등은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감시를 받았고, 항상 활과 화살을 든 병사들이 이들이 머문 관사를 밤낮으로 지켜봤다. 잉굴다이는 인조를 만나뵙기를 청했지만 인조는 거절했다. 그래서 서신을 제출하고자 했지만 인조는 이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난감해진 잉굴다이는 전체 인원을 이끌고 백성들의 말을 빼앗아 도망치기로 했다.

잉굴다이는 그렇게 조선 조정에 인사도 안 하고 떠났는데, 인조는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즉시 사람을 보내 조선 조정의 회신을 잉굴다이에게 건넸다. 동시에 인조는 명령을 내려 변방의 수비를 강화했다. 잉굴다이가 돌아가던 도중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주둔하던 명나라의 병사들이 길을 막았지만, 그는 이를 뚫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1636년 12월, 청 태종 홍타이지는 2차로 조선을 침공했다. 병자호란이 터진 것이었다. 잉굴다이는 군사적인 공세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정치 공세도 펼쳤다. 마침내 청나라와 조선의 협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잉굴다이가 이때 회담에 참석했다. 28일 간의 힘든 협상 기간 동안 잉굴다이는 양 진영 사이를 왕복하며 협상을 성사시키는데 힘썼다. 청나라는 군사적 우위라는 배경과 잉굴다이의 뛰어난 중재에 힘입어 협상을 타결하는데 성공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기로 했고,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관계를 맺기로 결정했다. 인조는 잉굴다이에게 감사하며 백은 2,000냥을 선물로 주었지만, 그는 이를 모두 위에 바쳤다.

2.3. 정치가로서의 면모

1631년 해 7월, 홍타이지는 관제를 정하고 6부를 두었는데, 잉굴다이는 호부승정(戶部承政)으로 임명되었다. 청나라의 재정과 물자 문제를 책임지는 중임을 맡게 된 것이었다.

1632년 4월, 홍타이지는 만주인과 몽골인으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내몽골의 강력한 부족 중 하나인 차하르(Chakhar, 察哈爾)를 정벌했다. 6월 무렵 원정군의 식량이 떨어졌는데, 잉굴다이가 이에 대한 책임을 맡아, 묵던에서 원정군의 캠프까지 식량을 운송했다. 이후에도 잉굴다이는 여러 번 조선에 가서 식량 공급과 무역을 요구했다.

1632년 9월, 홍타이지는 팔기 제도를 정비하기로 결정했다. 잡힌 포로나 획득한 물건을 팔기에 균분하게 분배하는 구제도를 바꾸고자 한 것이었다. 잉굴다이는 홍타이지의 어명을 받아 아이신기오로 다이샨(Aisin-gioro Daišan, 愛新覺羅 代善) 등 여러 버일러(beile, 貝勒)[11]들을 모아서 회의를 개최했다. 잉굴다이의 중재하에 이 중대한 회의는 마침내 의견 일치를 달성했다. 결의의 내용은 30니루를 1기로 하며, 30니루를 넘는 인원들은 팔기에서 빼버린다, 새로 얻은 포로나 가축은 8등분 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부족한 기에 보낸다 등이었다. 이는 태종 홍타이지가 3대 버일러들과 함께 국정을 다스리는 제도를 시행한 이후, 다시 한 번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조치였다. 이는 청나라 정권이 봉건화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잉굴다이는 홍타이지에게 더욱 큰 신임을 얻었고, 3등(三等) 머이런이 장긴(meiren-i janggin, 梅勒 章京)에 올랐다.

1637년 2월, 양식 부족 사태와 백성들이 농업에서 이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홍타이지는 호부를 통해 어명을 내려 곡식을 보관하는 관리들이 즉시 양식을 매각하도록 했고, 매점 매석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걸 금지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고, 봄에 씨를 뿌릴 수 있게 미리 준비하도록 했다. 잉굴다이는 이때 곡물 가격을 조절하고 춘경을 할 수 있도록 백성들을 조직했다. 그는 전쟁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경작지를 늘렸다. 1638년 4월, 그는 부하 관리들을 이끌고 요동 등지에서 수백 리를 개간했다. 1638년, 잉굴다이는 다시 사람을 이끌고 요서의 땅을 측량했다. 그는 요동의 농업 경제를 일으키고, 청나라 백성들이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청군이 베이징에 들어간 후, 잉굴다이는 할 일이 많아졌다. 당시 전쟁이 격렬했기 때문에 군수물자 보급이 급박했다. 잉굴다이는 호부를 맡았기 때문에 물자 책임도 맡고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곤란한 일들도 많았지만, 그는 도르곤을 도와 중국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는 반청 반란을 막는 데 힘썼고, 경제의 회복과 발전 그리고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만주족의 중국 통치를 공고히 하는 것에 힘썼다.

1637년 3월, 잉굴다이는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승진했다. 1639년 8월에는 정백기의 구사이 어전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외교, 군사, 정무의 중요 분야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1640년 10월, 그는 예부대신 및 형부대신 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갔다. 그리고 인조와 대신들이 명나라와 몰래 왕래한 문제를 따졌다. 1641년 3월, 잉굴다이는 아이신기오로 도르곤(Aisin-gioro Dorgon, 愛新覺羅 多爾袞), 아이신기오로 호오거(Aisin-gioro Hooge, 愛新覺羅 豪格) 등이 진저우(錦州, 금주) 포위전에서 병사들을 귀가시키고 병력을 멀리 주둔시킨 사건을 심리했다. 6월에는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Aisin-gioro Jirgalang, 愛新覺羅 濟爾哈朗)의 진저우 포위전에서의 공과에 대하여 조사했다. 1642년 10월, 잉굴다이는 조선의 최명길임경업이 명나라와 내통한 사건을 심리했다. 이상의 활동 등을 통해 잉굴다이는 조선의 친명파에 타격을 가하고, 명나라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내부의 여러 왕, 버일러, 대신들이 법규를 어겼을 때 그 집행을 맡았다. 이를 통해 황권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

1644년 7월, 잉굴다이는 도르곤의 명령을 받아 농업과 잠업의 발전 및 호구(戶口) 관리를 통해 사회 생산을 회복시키는 정책을 펼쳤으며, 8월에는 홀아비, 과부, 혹은 살기 힘든 자들을 봉양하는 정책을 펼쳤다. 전쟁 이후, 땅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도망을 가서 백성들이 곤궁해진 것을 본 잉굴다이는 인력을 동원하여 호구를 다시 정비하고 토지를 나눠주었다. 그리고 삼향(三餉)을 폐지했다.[12]

1645년 2월, 잉굴다이는 만주족 귀족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강매하는 행동을 시정하기 위해 백성들이 위법 사실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했다. 4월, 그는 만주족 귀족들이 일반 백성들을 노비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를 내리고 억지로 노비가 된 자는 석방하도록 했다. 물론 이 조치들이 모두 제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족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청나라의 통치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648년 2월 24일, 잉굴다이는 병으로 사망했다.

3. 평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하고 대륙을 장악하는 데 있어 특등공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숭덕제 홍타이지는 잉굴다이를 두고 이렇게 호평했다.
"모든 업무에 능하고, 명쾌히 처리하여 짐을 매우 기쁘게 한다. 나머지 신하들은 그의 일처리 솜씨에 미치지 못한다."
能盡心部務,辦事明决,朕實嘉之。其余各部大臣,不如彼之盡心辦事者甚多 (출처: 《황청개국방략》)

다만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반감 때문에 이런 업적이 부각되는 편은 아니다. 한나라로 따지면 소하와 비슷한 일을 했지만, 잉굴다이는 중국에서도 '영화 <남한산성>에 등장한 것 때문에 알았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숭덕제 홍타이지와 하르졸의 사랑을 다룬 중화권 사극에서조차 타타라 잉굴다이는 존재 자체가 생략되어 나오지도 않는다.

4. 한국에서의 이미지

한국에서는 병자호란 때 조선군을 격파한 것 때문에 관료보다는 군인이란 이미지가 강하고, 조선 땅을 짓밟은 청나라의 선봉장으로 취급되어 고전 소설 《박씨전》에 작가의 창작 인물인 동생 용울대[13]가 어이없이 죽임을 당하고 임경업을 피하는 겁쟁이로 나오는 등 잔뜩 좋지 않은 역할을 받는다.[14] 국어에는 용골때질 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심술을 부려 남의 화를 돋운다는 뜻이다. 이런 말까지 남을 정도였으니 이미지가 정말 좋지 않았던 듯하다.[15]

허나 실제로 잉굴다이 본인은 당시의 청나라 관료나 무장들 중에서도 상당히 예의를 갖추어 조선을 대했다. 청나라가 조선의 상국이 된 뒤에도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등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16] 몇 번이고 조선에서 들락날락거리면서 말썽 한번 일으킨 적 없었다.[17] 또한 김상헌최명길을 심문할 때도, 대답이 이치에 맞다 싶으면 오히려 수긍하고 넘어가줬다. 실제로 두 사람 모두 적국에 끌려간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심한 고초를 겪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5. 대중매체에서

파일:칼부림_잉굴다이.jpg
* 웹툰 《칼부림》에서는 홍타이지가 등장할 때마다 대부분 같이 나오는데 유독 정명수를 갈구거나 두들겨패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구수하게 생긴 인물들이 대부분인 칼부림 등장인물들 중 보기 드물게 미남으로 묘사되었다.

[1] 만주의 대귀족 가문. 여러 황후들을 배출했다.[2] 용골대(龍骨大)는 조선식으로 음차한 표기라 중국 웹에서 龍骨大로 검색하면 이 인물과 관련한 정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간체 표기인 영아이대(英俄尔岱)로 검색해야 제대로 나온다.[3] 명나라의 병부상서들은 직접 야전에 나섰고 조선에서도 최선임 야전군인이었던 도원수 권율이나 김자점 등은 모두 문신 출신이었다.[4] 니루(niru, 牛祿)는 '화살'이란 뜻으로, 원래 건주 여진족이 수렵을 갈 때, 한 사람당 화살 하나씩을 내던 것에서 유래했다. 본래 1니루는 10명이었으나 이것이 팔기제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1니루 = 300명으로 늘어났다. 니루이 어전은 '니루의 주인 혹은 우두머리'란 뜻이었다.[5] 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6] 이때 죽을 죄를 지어도 한 번은 면제받는 특권을 받았다.[7] 이 해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8] 만주족이 아닌 명나라 출신 한족이었지만, 후금에서 벼슬을 했다.[9] 잘란(jalan, 甲喇)은 니루를 합친 상급 조직이었다. 잘란이 장긴은 '잘란의 우두머리'를 의미했다.[10] 구사(gūsa, 固山)가 '기'(旗)라는 뜻이므로 팔기대신(八旗大臣)이라는 뜻이다. 즉 각 팔기의 대신들을 말한다.[11] 청나라 귀족의 작위 중 하나이다. 만주와 몽골 귀족들에게 내려졌으며, '부장'(部長)이라는 뜻이었다.[12] 삼향이란 요향(遼餉), 초향(剿餉), 연향(練餉)의 통칭이다. 명나라 말기에 청군의 침입을 방어하고, 농민의 반란을 탄압하기 위해 증가된 군비를 메우기 위해서 거둔 세금이었다.[13] 판본에 따라 '용울대'로도 나온다.[14] 병자호란 발발 후 청군이 정묘호란의 실패를 발판 삼아 신속한 남하를 결정해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을 우회한 것일 뿐 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임경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임경업은 실제 군공은 거의 없는, 야전형이라기보다는 행정가 타입의 군인이었다.[15]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가끔씩 이름조차 제대로 기술하지 않은 채 용호라고 칭한다. '호'가 오랑캐 '호'(胡)이므로 그를 오랑캐라 비하한 것이었다.[16] 딱 한번 횡의 문제가 불거지자 참고 참던 분노가 드디어 폭발했는지 그답지않게 공격적으로 소현세자에게 따졌다. 이때 세자가 "내가 포로여도 그렇지, 그래도 일국의 세자인데, 일개 장군이 이럴 수 있는 거요?"라고 해 즉석에서 사과했다고 한다.[17] 명나라 때부터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사적으로 조선에서 온갖 금은보화와 특산물을 가져 갔는데, 그나마 명나라의 보답품인 회사(回賜)의 존재와 문종 ~ 선조 시기는 덜해서 명나라 조정에서 "사신들의 사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좀 덜했다고 한다. 문제는 광해군 때 형 임해군과 관련된 일에서 트집잡자 뇌물로 해결했다. 청나라도 병자호란 시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청나라 사신으로 왔던 정명수는 궁에 기생을 들이고, 병조좌랑이 사신을 접대하는 기생에게 뭐라 하자 그 병조좌랑을 "좌랑밖에 안 되는 니까짓 게 뭔데 내 여자 건드냐"며 두들겨 패는 등 아주 갖은 민폐와 말썽은 다 부리고 갔다.[18] <임진왜란>에서는 정반대로 아군 무장인 최경회 역.[19] 정묘호란 때 침공해온 후금의 무장. 실제 만주어 이름은 '아이신교로 아민'으로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하치의 아들이었다.[20] 용골대와 마부대의 이름을 합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