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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00:23:50

이규풍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규갑의 친형이다.

2. 생애

1865년 11월 2일 서울 묵동에서 덕수 이씨 충무공파 9대손 이도희와 밀양 박씨 박안라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동생으로 이규갑을 두었다. 자는 낙서, 호는 우풍이며, 이명은 이규목이다. 본적지는 충청도 아산 탕정면 매곡리인데, 어렸을 때는 인주면 공세리에서 살다가 매곡리로 이사했다고 전해진다. 후에 해주 오씨 오태근의 딸 오세라와 결혼하여 장남 이민호를 낳았으며, 전주 이씨를 둘째 부인으로 들여 차남 이민생과 삼남 이민재를 낳았다.

<오충비>에 따르면, 이규풍은 무과에 급제한 후 궁성 내직에 봉직했다고 한다. 또한 <각사등록>에 따르면 1895년 남해군수를 지냈지만 1896년 3월 사임을 청원했다고 한다. 다만 1905년 함경도 성진군 감리 겸 영천군수를 지낸 이규풍이 그와 동일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관직 경력에 관한 기록은 극히 한정되었지만, 적어도 그가 무과에 급제한 뒤 무관으로서 여러 관직을 맡았던 것은 확실하다.

이규갑이 <신동아> 1964년 4월호에 기고한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전말'에 따르면, 모친 박안라는 충무공 이순신의 가문에 시집 온 것에 깊은 자부심을 느끼고 두 아들을 장차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바쳐 싸우는 인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그녀는 을사조약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손수 척화토적의 상소를 올리고 두 아들에게 의병을 일으키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녀가 남다른 애국심을 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규풍은 이러한 모친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경 가족을 고향에 두고 홀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망명했다. 1908년 이범윤, 안중근 등과 함께 약 300명의 의병 부대를 평성하여 두만강 근처 노브키에프스크에 근거지를 두고 국내진공작전을 실행했다.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 부대,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잇달아 격파했으나, 그해 9월 일본군 토벌대의 습격으로 회령 전투에서 패한 뒤 연해주로 퇴각했다.

1909년 1월 안중근 등과 함께 12명의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1910년 8월 23일 이범윤, 김치보 등과 함께 성명회를 조직하고 한일병합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 및 배포하는 한편, 연해두 일대의 일본인을 공격했다. 이에 일본 정부가 항의하자, 러시아 당국은 성명회 지도부 42명을 체포했고, 이규풍을 비롯한 8명은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어 고초를 겪다 7개월 뒤인 1911년 5월 석방되었다.

석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이규풍은 어머니를 봉양하려 했다. 이규갑이 신동아 1969년 4월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모친 박안라는 집에 돌아온 장남을 한참 노려보다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고 한다.
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만약 귀신이라면 그 자리에 있어도 좋지만 사람이라면 냉큼 물러가라.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죽어서 돌아온다면 환영하겠지만, 살아서 어미를 만나러 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

결국 이규풍은 밥 한끼 먹지 못하고 러시아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1912년경 우시하와 함께 의병 재건을 꾀했으며, 1918년 12월 이동녕, 조완구,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문창범, 안정근, 윤세복, 이탁, 이상룡, 최병학, 한흥, 황상규 등 39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4월 23일 국내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등과 함께 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좌익 활동을 수행하던 그는 1926년 3월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만주 길림에서 민족혁신파 대표대회가 개최되자 같은 공산주의자인 최소수, 주진수와 함께 참석했다. 이후 정의부의 양기탁, 오동진, 고활신, 현정경, 곽종대 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 이동락, 송헌, 최동희, 형평사의 오성환, 이동구 등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연합정당인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만주 지린성의 소수분에서 활옹하다가 다시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수행했다고 전해지며, 1932년 6월 1일 만주 토문 근처인 석두하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묘소 또한 그곳에 있다. 다만 <충국순의비>에는 1931년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규풍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