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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민자당에서 넘어옴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대한민국 여당
<nopad> <nopad>
민주정의당
(1981.1.15.~1990.1.22.)
민주자유당
(1990.1.22.~1992.10.5.)
(1993.2.25.~1996.2.7.)
신한국당
(1996.2.7.~1997.11.7.)
파일:민주자유당 로고.svg
창당 당시의 로고
<nopad> 파일:민주자유당 지방선거 로고.svg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의 로고[1]
민주자유당
<colbgcolor=#003990,#003990><colcolor=#ffffff,#ffffff> 한문 명칭 民主自由黨
영문 명칭 Democratic Liberal Party (DLP)
고유번호 116-82-03628
등록번호 제52호
등록일 1990년 2월 15일 (3당 합당)
당명 변경 1996년 2월 7일 (신한국당)
해산일 1997년 11월 24일
(통합민주당과 합당, 한나라당 창당)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5-1
(여의도동, 극동VIP빌딩)
스펙트럼 우익 빅 텐트[2]
대표위원 김윤환 / 4선 (10·11·13·14대)
원내총무 서정화 / 3선 (12-14대)
사무총장 강삼재 / 3선 (12-14대)
정책위의장 김종호 / 4선 (11-14대)
대통령 / 총재[3] 노태우[4] / 제13대 (1990.1.22.~1992.10.5.)
김영삼[5] / 제14대 (1993.2.25.~1996.2.7.)
국제조직

(1992년 10월 2일 가입)
정책연구소 여의도연구소 (1995년 2월 3일 설립)
국회의원 <nopad>
166석 / 291석 (당명 변경 직전)
당 색
남색 (#003990)
파란색 (#0070BB)
당원 수 4,960,665명
(1997년 11월 24일 기준)[6]

1. 개요2. 성향
2.1. 분파
3. 강령과 정책4. 당가
4.1. 1990년~1995년4.2. 1995년
5. 역사
5.1. 창당 배경
5.1.1. 당명을 둘러싼 잡음
5.2. 집권에서 분열 이전까지5.3. 분열기부터 당명 변경 이전5.4. 당명 개명 이후
6. 보수의 중시조7. 역대 전당대회8. 역대 지도부
8.1. 총재8.2. 대표최고위원/대표위원8.3. 원내총무8.4. 사무총장
9. 출신 대통령10. 역대 선거 결과11. 기타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1. 개요

파일:attachment/3danghapdang.jpg
파일:민주자유당 현판식.jpg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으로 출범하여 1996년 2월 7일 신한국당으로 개명하기 전까지 존속한 대한민국의 집권 보수정당. 약칭은 민자당. 국민의힘의 실질적인 뿌리이다.[7][8][9]

주 지지기반은 세대별로 보면 40대 이상이었고[10][11][12], 지역별로 보면 영남권에서 지지율이 높았으며, 강원도충청도에서도 어느 정도 지역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권에서는 지금보다 개발이 덜 되었던 인천광역시경기도에서는 지지율이 잘 나왔던 편이었지만, 서울에서는 지지율이 낮았으며 충청도의 경우에도 통일국민당자유민주연합으로 제각기 이탈했고, 강원도도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부터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한동안 스윙보터 성향을 보였다. 또한 TK에서도 김영삼에 대한 반감으로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PK보다 민주자유당 지지세가 약했다.

2. 성향

1990년 현재 보수정당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민주자유당은 보수정당들의 합당으로 장기집권을 한 일본처럼 한국의 자유민주당을 꿈꾸면서 이질적인 정치세력이 뭉쳐서 창당되었다. 이로 인해서 1980년대 집권여당이자 강경보수 성향의 1981년 창당된 민주정의당[13]과 1960~70년대 집권 여당이자 마찬가지로 보수 성향의 1987년 창당된 신민주공화당[14], 그리고 1960~1980년대 앞의 군사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신민당-신한민주당을 계승한 온건보수 성향의 통일민주당[15]이 ‘보수대연합’을 기치로 3당 합당을 통해서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2.1. 분파

3. 강령과 정책

강령
1. 우리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의 폭넓은 정치참여를 통하여 진취적이며 화합하는 정치문화를 정착시키고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2. 우리 국민의 창의와 활력을 북돋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형평과 균형을 통하여 모두가 잘 사는 복지경제를 실현한다.
3. 우리는 도의를 바탕으로 서로 돕는 미덕을 함양하고 정의와 양심이 지배하며 법과 질서가 존중되어 모두가 믿고 살 수 있는 공동체사회를 이룩한다.
4. 우리는 교육의 자율성과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국민 모두가 스스로의 개성과 능력을 발휘케 하여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민족문화를 창달한다.
5. 우리는 국력을 배양하고 민주역량을 발휘하여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앞당기며 자주적인 외교 노력과 적극적인 교류와 협동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주역이 된다.
기본정책
1. 책임정치를 구현한다.
2. 성숙한 정치문화를 정착시킨다.
3. 고도 과학기술의 선진산업국가를 건설한다.
4. 경제정의를 실천한다.
5. 건전한 사회를 이룩한다.
6. 교육개혁을 꾸준히 실천한다.
7.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국민의 문화생활을 향상시킨다.
8. 지역간의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
9. 국토의 이용을 극대화한다.
10. 해양개발을 촉진한다.
11. 국민복지를 증진시킨다.
12. 공존공영의 노사관계를 정착시킨다.
13. 중소기업을 육성지원한다.
14. 농어민의 소득을 획기적으로 늘린다.
15. 노동자의 중산층화를 도모한다.
16. 청소년이 꿈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17. 여성의 권익을 보장한다.
18. 노인복지의 사회적 기반을 확충한다.
19. 장해자의 복지를 증진시킨다.
20.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한다.
21. 교통난을 해소한다.
22. 주택문제를 해결한다.
23.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외교를 펼친다.
24. 국가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한다.
25. 한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조국통일을 앞당긴다.

4. 당가

4.1. 1990년~1995년

파일:민주자유당 당가 가사내용.jpg


2025년 11월 15일, 1990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민주자유당의 당가영상이 포착되었다. 보기 원본
(1절) 온겨레 하나되어 큰 뜻 펼치려
역사의 부름앞에 굳게 굳게 뭉쳤다
민주 번영 통일의 기틀을 닦고
영광된 선진조국 이룩하리라

(2절) 삼천리 한 나라로 통일 이루려
겨레의 참일꾼들 한데 한데 모였다
자유 복지 전진의 깃발을 들고
희망의 새시대를 맞이하리라

(후렴) 나가자 넓은 세계 밝은 미래로
새 역사를 열어가는 민주자유당
당가는 응모를 통해서 추첨된 편완범씨의 공모작품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4.2. 1995년

1995년 2월 7일 민주자유당 제3차 전당대회때 세계화를 위한 새 강령과 기본정책 그리고 당헌을 제정했는데 개편 과정에서 민주자유당은 당 로고와 당가를 바꿨다. 이후 이 당가는 신한국당까지 쓰였다.

작사는 김병걸, 작곡은 김강섭이 맡았다.

듣기[22]


(1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달린다 세계로 미래로

개혁의 큰 물결로 꿈과 희망을
민주 복지 통일의 선봉에 서서
세계속의 한국을 이끌어 나가자

(후렴) 아 세계로 미래로 힘차게 가는 그 길
그 길에 우뚝 선 민주자유당

(2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뭉쳤다 하나로 뭉쳤다

희망의 새 정치로 더 크고 넓게
자유 평화 통일의 역군이 되어
세계속의 한국을 드높여 보자

5. 역사

민주자유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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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창당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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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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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석)[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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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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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석)

기존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야권 분열로 정권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전체 299석 가운데 125석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이루어진 '제5공화국에 대한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 등에서 탈탈 털리면서 민주정의당야당과의 합당을 통해 정국을 돌파하려고 했다.[24]

처음에 민정당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진보 세력을 미리 견제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보수대연합'을 주장, 자당과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모두 참여하는 4당 합당을 추진했다. 자당을 포함한 이 4개 당이 지역 기반과 중심 인물만 다를 뿐 이념 스펙트럼과 정책 노선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니, 범보수로 묶일 수 있는 4당이 하나로 합쳐 거대한 보수정당을 창당하면 압도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 이에 반발하는 민주당계 일부가 이탈하거나 원외 재야 세력이 뭉쳐 진보정당을 만든다 해도, 아무리 이들이 선전한다고 한들 절대 합당세력인 자신들을 이길 수 없는 거대 보수정당 중심의 1.5당 구도가 정착되어 안정적으로 장기 집권을 꾀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25]

하지만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시 의석수 기준으로 제1야당이었던 70석의 평화민주당에게 합당을 제의했을 때, 이 당의 수장이었던 김대중 전 총재는 공식적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반면 통일민주당 김영삼 전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전 총재는 합당 제의에 응했고, 결과적으로 평화민주당을 제외한 3당의 합당이 성사되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김영삼 전 총재, 김종필 전 총재는 3당 합당을 전격 발표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양대 세력 중 한 곳이었던 통일민주당 의원들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김영삼 전 총재의 개별 설득 끝에 대부분 합당에 응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끝까지 합당에 반대하며 통일민주당을 이탈한 의원은 부산 해운대구의 이기택, 부산 중구의 김광일, 부산 영도구의 김정길, 부산 동구의 노무현, 서울 영등포갑의 장석화 5명뿐이었고, 신민주공화당에서는 대전 동구갑의 김현 의원만이 합당 반대 의견으로 이탈[26]했다. 한편 무소속이었던 정몽준 전 의원과 유한열 전 의원이 3당 합당에 합류를 선언, 통합 신당은 총 의석수 299석 중 217석[27]을 보유한 초거대 여당으로 출범하였다. 이로써 노태우 정부의 골머리를 썩히던 여소야대 정국은, 한순간에 극도로 기울어진 여대야소 구도로 전환되었다.

5.1.1. 당명을 둘러싼 잡음

민주자유당이란 이름은 일본 자유민주당과 어순이 반대인 데다 유력 정당간의 합당[28]이라는 형성과정의 유사성[29], 의석의 과반을 넘는 집권 거대 보수 정당이라는 점 등이 비슷했다. 이 때문에 이름을 자유민주당에서 따왔다는 속설이 야권에서 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김영삼 전 총재의 경우 신당 창당 과정에서 일본자유민주당을 여러 번 강조했다고 하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외국 나가서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부정하기도 했다.[30] 한편 김종필은 이미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자민당과 교섭이 잦았던 데다 자민당의 정국 안정 수완을 높이 샀기에 일본 자민당의 예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민주자유당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노태우 전 대통령의 말실수[31]를 두고 같은 해 2월 연설에서 10월 유신메이지 유신을 따라하더니 신당도 그렇다면서 일본 자유민주당 한국 지부라고 하지 그러냐고 비꼬았다. 결국 실증성보다는 이런저런 정황상의 심증이 속설을 부풀린 셈이다.

사실 자유민주는 별로 특이하다고 할 것도 없이 전통적으로 한국 정당명에 흔히 붙었던 단어였다. 실제로 이미 1960년대에 야권 계열에서 창당된 같은 이름의 자유민주당도 존재했던 데다 민주자유당 이후에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쪽도 어감이 비슷하긴 마찬가지. 또 초창기 창당 과정에서는 민주통일당 등의 다른 당명이 거론되기도 했다. 더구나 그렇게 의미심장한 이름이라면 불과 창당 5년, 대선 3년 만에 바꿀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32], 반면 그런 민자당을 "김영삼당"[33]신한국당으로 바꾼 김영삼이 더 압박이란 해석도 있다.

노태우 회고록 등에서 보듯, 민정계 인사들은 민자당 창당을 정치 안정의 초석으로 보았다. 그래서 훗날 민정계, 공화계를 축출하고 민자당이라는 '좋은 이름'을 바꿔서 총선과 대선에서 졌다라고까지 해석했다. 미련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정당명 개명은 민정계를 축출하고 민주화를 추진하며 자신의 슬로건인 "신한국 창조"를 상징하는 당연한 마무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당 자체가 한국판 자민당을 꿈꾼 노태우, 김종필 등과 김영삼의 동상이몽, 오월동주였을지도 모른다.

5.2. 집권에서 분열 이전까지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이 2026년에 이르러서야 차지한 전체 의석의 2/3를 확보했다. 그랬기 때문에 1990년 당시에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자민당의 55년 체제처럼 "90년 체제"가 이루어질 것이란 분석이 상당히 우세했다.

마땅한 차기 대선 후보가 없는 민정당과, DJ나 YS와의 정면승부에서 승산이 없는 JP는 내각제에 적극적이었지만, 내각제 개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태우와 김종필, 김영삼은 합당 당시 내각제 개헌을 하기 비밀리에 약속했으나, 김영삼은 합당 직후 당초의 약속을 깬다. 내각제 합의 비밀 문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언론에 유출되어 내각제에 반대하던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김영삼은 자신이 내각제를 하겠다고 합의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밝히며, 내각제를 할 수 없다고 표명한 것이다. YS가 3당 합당에 찬성한 이유가 DJ와 후보 단일화 문제로 싸우기 싫었던 것임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었던 것.[34]

합당하고 나서도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의 계파 갈등이 상당했다. 이를 두고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민당처럼 하하호호하기에는 기존 지지층의 차이도 너무 컸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하며 김영삼을 지지하던 민주당 지지층과 반공, 경제발전을 이유로 민정당을 지지하던 민정당 지지층간의 간격이 너무도 컸고, 공화당 지지층들도 민정당과 그냥 합당하기에는 뭔가 꺼림직한 것은 매한가지였던지라 지지층의 화학접 결합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날치기가 심심하면 벌어진 데다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나고 더군다나 물가상승률마저 높아졌기에 1990년 양대 재보궐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1991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기초의회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명목상으로 전원 무소속이었음에도 의원의 절반에 가까운 수를 확보하는 승리를 거두었고,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막판 계란 투척 사건과 야권 단일화 실패, 투표율 저조로 광역의원 선거에서 564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웠다.

그러나 공천 잡음으로 인한 무소속 후보자 난립 + 군 부재자 투표 부정사건 + 안기부 흑색 선전물 배포사건이 겹쳐지면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9석만을 확보하며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다.[35][36] 한편 1992년 10월 2일, 김종필 대표위원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민주연합(IDU) 당수회의에 참석, 가입의결을 받고 수락연설을 하면서 정회원이 되었고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을 거쳐서 2020년 현재 국민의힘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정계와 공화계 중 일부가 이종찬을 중심으로 새한국당을 창당해서 독립했다. 이종찬과 같이 당을 나간 사람들은 특히 YS에게 원한이 컸던 박철언, 이 외에도 김용환, 장경우, 이영일이 있었다. 다만 일부는 다시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37] 다만 이때만 해도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 민정계 인사들과 공화계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38] 이후 김영삼이 14대 대선에서 승리하고, 정주영이 조직한 통일국민당에 압력을 넣어 붕괴시키면서 이들 중 일부를 끌어들여 안정 과반 확보에도 성공한다. 1994년 12월 19일 여의도연구소 재단의 설립을 발표하고 21일 당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시기에 김영삼은 민주계의 부족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재야세력 및 운동권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대표적인 정당이 바로 1992년에 해산된 진보정당인 민중당이다. 1994년 민중당의 지도부였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가 입당하였다. 이외에도 김성식, 정태근의 경우 민중당에 이어 2차 꼬마 민주당을 거쳐서 한나라당 창당 때 합류했으며, 그 외 박형준, 김용태, 신지호, 차명진, 임해규 등이 존재한다. 이름만 들어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2020년대 현재 보수정당에서 중량감이 있는 인물들이다. 일부는 지나치게 우경화되어서 강경우익이 되었지만 상당수가 중도~중도우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개혁보수의 원천이자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스펙트럼이 너무 커져서 계파로서 의미가 없지만 민중당계로 불러도 될 정도다.

5.3. 분열기부터 당명 변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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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주요 정계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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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재집권 후 YS계와 JP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각종 당직에서 JP계가 축출되자 1995년 2월 김종필을 위시한 공화계와 일부 민정계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그리고 1995년 2월 3일에는 여의도연구소 재단법인의 설립을 허가받으며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정당연구소를 세웠고 4월 15일에 개소했다. 이 연구소가 2013년에는 여의도연구원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2020년 현재 국민의힘의 정책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생겨나며 처음으로 치른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15개 광역단체장 중 5곳만을 건지고, 서울에서는 서울특별시장은 물론 강남구서초구를 제외한 모든 구청장을 내주면서 패배한다.

1995년 11월 하순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노태우가 구속되고, 김영삼의 대선 자금과의 연관성을 밝히라는 요구가 커지자, 당 쇄신 및 다음 총선을 대비하고자 당명을 바꿀 것을 검토한다.[39] # 이후 12월 들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한 후[40]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 중에 민정계와 공화계는 민주계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다. 반면 민주계는 김영삼을 따라 들어오거나 영입된 몇몇 인사들에 불과했다. 그보다 앞서 1995년 초에 김종필과 김영삼 양자 간의 갈등이 지속되자 일부 민정계와 공화계가 이에 가담해서 당을 나갔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를 중심으로 해서, 8선의 박준규 등의 대구경북권의 민정계와 충청권의 공화계 상당수가 짐을 싸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이후 통일국민당으로 이탈했던 세력들이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으로 간판을 갈았다가, 다시 자민련으로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처남인 김복동 의원이다.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의 다수는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다.

흥미로운 건 민자당이 간판을 내리자 자민련은 쾌재를 부르며 "정통 보수" "원조 보수" "민자당 적통"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사실 자민련은 창당 전에도 민자당이 통일한국당으로 당명 개정을 추진하자 그럼 우리가 민자당으로 창당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민자당은 당명 유지를 선언했다. 이 시기 당명 변경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이미지 변신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동시에 개혁공천[41]과 함께 민정계 중심+민주계, 공화계의 1강 2약 구도는 민정계 대거 탈락+민주 중심의 구도로 바뀐다. 수도권에서 분열 상태에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통합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했다.[42]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민정계는 점점 쇠퇴하였다. 다만 제15대 국회, 제16대 국회 때까지는 여전히 민정계가 건재했었고 수도 적지 않았지만 제17대 국회를 기점으로 민정계가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43]

5.4. 당명 개명 이후

당명 변경으로 이미지 쇄신을 노렸던 신한국당은 1996년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과반 확보에 실패하고[44][45],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46] 이는 정통 여당 신한국당(민주자유당)과 정통 야당 민주당(통합민주당)의 결합이라고 선전되었다.[47] 이로서 탈당한 JP의 자민련과, DJ의 동교동계를 제외한 상당수의 舊 야당파(비 호남파) 정치인들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야권의 영남 출신들이 대거 사라지면서 지역감정이 가장 강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당명을 다시 바꾼 보람도 없이 대선에서 불과 1.6%차로 석패하면서, 결국 이들의 여당으로서의 입지는 막을 내렸다. 한국판 자민당이 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1+1이 반드시 3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48][49]

6. 보수의 중시조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계 정당의, 민주노동당진보정당중시조로 평가받듯이 점차 보수정당의 중시조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커져가고 있다. 왜냐하면 1987년 6.29 선언으로 민주화된 이후에 1988년 2월 25일에 출범한 제6공화국이 탄생하고 만들어진 첫 번째 보수정당으로 독재세력으로 평가받는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과 다르게 보수적이지만 민주주의 체제를 긍정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정당계보에서 산업화 세력을 자임하는 반공독재, 군부독재를 추구한 정치세력들과 보수적 민주화세력이었던 통일민주당이 합당해서 탄생한 정당이었는데 옹호자는 보수대연합, 비판자들은 야합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민주독재의 대결로 점철되었던 시대는 타협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져서 1990년대 이후 보수진보의 대결로 프레임이 전환되었다는 상징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민자당이 탄생하고 199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에 대한 언급이 늘어났다.

7. 역대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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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역대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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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최고위원 및 대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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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제2대
김종필
제3대
이춘구
제4대
김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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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총재

8.2. 대표최고위원/대표위원[54]

8.3. 원내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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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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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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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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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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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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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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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황명수
제8대
문정수
제9대
김덕룡
제10대
김윤환
제11대
강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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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출신 대통령

||<-7><tablewidth=100%><tablebgcolor=#fff,#222><tablebordercolor=#005ba6><bgcolor=#005ba6> 대한민국 대통령 ||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문장.svg
이름 임기 선출 방식 정당
취임일 퇴임일
6 파일:President_RTW.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노태우
(1932 ~ 2021)
13 1988년 2월 25일 1993년 2월 24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선 36.64%
민주정의당 (1988 ~ 1990)
민주자유당 (1990 ~ 1992)
무소속 (1992 ~ 1993)
7 파일:Kim_Young-sam_presidential_portrait.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김영삼
(1927 ~ 2015)
14 1993년 2월 25일 1998년 2월 24일 제14대 대통령 선거
직선 41.96%
민주자유당 (1993 ~ 1995)
신한국당 (1995 ~ 1997)
무소속 (1997 ~ 1998)

10. 역대 선거 결과

11. 기타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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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대회 민주자유당/역대 전당대회
선거 1991년 지방선거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제14대 대통령 선거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비판 및 논란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 · 초원복집 사건
대통령 노태우 · 김영삼
집권정부 노태우 정부 · 문민정부
관련 단체 여의도연구소
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자유한국당
기타 국제민주연합
관련 틀 역대 사무총장 · 역대 원내총무 · 역대 정책위원회 의장 ·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 제13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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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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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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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7.~1951.12.)자유당 (1951.12.~19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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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우회^[1]^ (1973.3.~19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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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국민의힘 (2022.5.~2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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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더불어민주당 (2025.6.~현재)
[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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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제5공화국 ~ 노태우 정부
(1981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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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치​개혁당 통일​국민당 민주자유당
신정치​개혁당 민주자유당 새한국당
* 3당 합당으로 보수정당에 합류
노태우 정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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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정당
문민정부
(1993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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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국당-민주당 합당으로 보수정당에 합류
문민정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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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자당계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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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1990~1995
신한국당
1995~1997
한나라당
1997~2012
새누리당
2012~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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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2017~2020
미래통합당
2020
국민의힘
2020~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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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파일:1px 투명.svg제13대 국회
원내 구성
''' 1988.5.30. ~ 199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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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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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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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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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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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석
무소속
8석
재적
299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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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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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석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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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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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석
무소속
2석
재적
299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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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대통령이 당의 체질을 대대적으로 혁신하기로 하면서 로고가 변경됐다. 기존에는 당명까지 "통일한국당"으로 개칭할 예정이었으나, 당 안팎의 반발로 당 로고와 당 대표만 교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당 대표 자리에서 사실상 쫓겨난 김종필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2] 민주계는 중도~중도우파, 공화계는 우파, 민정계는 우파~극우로 분류된다.[3] 동시에 당 총재직도 겸임.[4] 1992년 8월 28일부터 9월 18일까지 명예총재직 역임.[5] 1992년 8월 28일 당 총재 취임.[6] 등록 당시 당원 수는 3,687,465명이었다.[7] 현재 국민의힘의 국회 내 회의실에 산업화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민주화의 상징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이 같이 걸려 있을 수 있게 된 시초가 된 정당이다. 민주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보수적인 군부세력과 보수+진보적인 민주화세력이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놓고 대립하는 구도였으나 민주화 이후 제6공화국 사회가 민간인 정치인들의 문민정권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는 가치와 이념 위주의 정치로 바뀌게 되었다.[8] 보수주의 정당의 복지국가 전략:영국과 한국의 보수주의 복지정치[9] 2026년 현재 국민의힘은 공식적으로는 자당 및 그 계열 정당 출신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3명만을 사진까지 걸어놓고 인정하고 있으며, 김영삼은 국민의힘 계열 정당 출신 대통령 중 유일하게 사망 시점까지 전직 대통령 예우를 제공받았다. 국민의힘 계열 다른 대통령은 전부 예우가 박탈당했고 공식적으로는 흑역사 취급 중이다. 그렇기에 김영삼이 만든 민주자유당은 국민의힘 입장에서 근본이 되는 정당으로 기릴 수밖에 없다.[10] 20대, 30대 층에서는 지지율이 저조했다. 김영삼만 해도 1980년대 후반에는 당시 20대인 86세대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1992년 대선에서 20대에서 지지율이 겨우 20%대가 나왔을 정도로 지지율이 저조한 인물이 되었다. 또한 1990년대 당시의 40대 이상 층은 당대에 제3지대 정당을 지지했던 층까지 죄다 보수정당을 지지하게 되어서 보수 성향이 2/3 이상으로 고착화된 반면, 30대 이하 층은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기를 거쳐 민주당계 정당의 강력한 지지층이 되었다가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경합 우세를 차지하며 스윙보터화되었다.[11] 다만 세부적으로 보면 30대 이하 층에서도 꽤 다른데 김영삼 정부 때 당시 30대는 보수정당 지지자가 꽤 어느 정도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에서는 30대가 보수정당 지지층에서 이탈할 조짐을 보이다가 노무현 정부에서는 30대가 보수정당 지지층에서 완전히 이탈해서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으로 완전히 이동했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다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정치무관심층과 무당층 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정치무관심층, 무당층 비율이 늘어나다가 이후 보수화도 진행되면서 스윙보터화가 되었다. 20대 남성의 경우 김영삼 정부에서는 초기에는 보수정당 지지가 약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반보수 성향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노무현 정부에서도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이 높았으나 이후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이 낮아지면서 무당층 비율이 높아졌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무당층 비율이 높은 가운데 북한의 도발 등으로 인해서 조금씩 보수정당 지지가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박근혜 정부에서도 안보 이슈 등에서 보수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보수정당 지지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문재인 정부의 공정성 논란과 페미 정책에 대한 반발로 완전히 보수화가 되었다. 20대 여성의 경우에는 김영삼 정부 당시에는 의외로 보수정당 지지자들이 어느 정도 있었고 김대중 정부 때도 사안에 따라서 보수정당 지지를 하는 경우가 꽤 있었으나 노무현 정부 들어서면서 민주당계 정당 지지를 하는 경우가 늘어갔다. 다만 노무현 정부 때까지는 여전히 20대 여성들이 고수정당을 찍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광우병 파동 등의 영향으로 민주당계 정당 지지를 하는 경우가 고착화 되어갔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세월호 참사나 각종 사건사고, 메르스 사태 등으로 민주당계 정당 지지를 하는 경우가 계속해서 고착화 되어갔다. 다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까지는 여전히 20대 여성들도 정치무관심층이나 무당층, 단순 반보수 정도에 그쳤지만 문재인 정부 때 젠더갈등이 복구불능 급으로 격화되고 각종 페미니즘 정책이 시행되면서 민주당계 정당의 적극 지지층으로 변했다.[12] 반면 40대의 경우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때까지는 여전히 보수정당 지지 성향이 강했지만 노무현 정부 때부터 보수색이 약화되면서 스윙보트 성향을 띄다가 이명박 정부 때부터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으로 약간씩 변화하기 시작했고, 박근혜 정부 때는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으로 변화했으며 문재인 정부 때는 완전한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으로 변했다. 50대는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때는 보수정당 지지가 매우 강했고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보수정당 지지가 강했으며 이명박 정부 때만 해도 보수정당 지지가 상당히 강했다. 박근혜 정부 때도 보수정당 지지가 강했지만 점차 스윙보트화 되었으며 문재인 정부 때는 스윙보트화가 되었다. 60대의 경우는 보수정당 지지 성향이 계속 강했다.[13] 하나회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서 창당되었던 정당으로 강경보수 성향 전두환의 파벌과 온건보수 성향 노태우의 파벌로 나눠졌는데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태우 파벌의 주도로 합당에 참여하였다. 민정계로 불린다.[14]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박정희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김종필이 창당한 정당이다. 공화계로 불린다.[15] 창당 당시의 양대 파벌 중 하나였던 동교동계가 탈당한 이후 상도동계만 남았던 정당이다.[16] 1997년 외환 위기, 대학설립준칙주의,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아들 김현철에 대한 비리 등.[17] 특히 강경파 성향의 젊은 세대들이 김영삼을 싫어하는 경우가 꽤 있다.[18] 대표적으로 민중당 대표였던 이우재, 사무총장이었던 이재오 등이 있었고 이외에도 노동운동계의 전설이었던 김문수차명진, 박형준 등도 이에 해당한다. 다만 김문수, 차명진은 이후 우경화했다.[19] 이러한 행보는 신한국당 시절에도 그대로 이어져 민주당계 정당으로부터 "극우와 극좌를 모두 영입하니 보수인지 진보인지 모르겠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20] 다만 전두환도 집권기 때는 자기가 향락적인 성향을 지닌 것도 있고해서, 교복 자율화나 프로스포츠 출범, 에로영화 규제 완화같은 문화적으로는 제법 리버럴한 정책을 펴기는 했었다. 물론 검열은 여전히 심했기 때문에 반쪽짜리이기는 했다.[21] 1988년 당시에는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연간 3000시간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22] 해당 당가는 당명 개칭 이후인 신한국당의 당가이지만, 후렴구 부분을 제외하면 기존 민주자유당 당가와 동일하다.[23] 127+59+35=221석이지만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장석화 의원과 신민주공화당 김현 의원이 참여하지 않았고 무소속 유한열, 정몽준 의원이 입당하며 최종 217석이 되었다.[24] 실제로 84년도부터 민정당에서 자민당을 모델로 한 '2000년대 장기 집권 계획'을 계획하기도 했다고. (#)[25] 실제로 당시 4당 합당이 성사되고 (후술한 대로) 민주당계 일부의 이탈과 무소속 의원 2인의 합류까지 완료됐다면 통합 신당 민주자유당은 국회 전체 299석 중 무려 287석에 달하는, 일당우위를 넘어 일당제 수준인 사상 초유의 거대 여당이 될 수 있었다. 만약 4당 합당이 현실이 된 뒤 계속 유지됐다면 대한민국은 옆나라 일본처럼 정말 1.5당 체제인 일당우위지배가 고착화되었을 수도 있으며, 결과적으로 한국 정치의 역동성이 사실상 소멸하는 것은 물론, 군사정권 시절 '반독재'를 기치로 모였던 민주당계더불어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전성기는커녕 독자 세력화를 통한 집권조차 꿈꾸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26] 김현 의원은 이듬해인 1991년 통일민주당 탈당파 5인이 결성한 민주당에 합류했다. 당시 이 민주당은 '꼬마민주당'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27] 민주정의당 127, 통일민주당 54석, 신민주공화당 34석, 무소속 2석.[28] 더구나 자유(보수) + 민주의 구도라는 점이 그렇다.[29] 한국의 경우는 평민당, 일본의 경우는 일본사회당이 부상할 때 이루어졌다.[30] 1990년 2월 9일자 동아일보.[31] 당시 초대 총재 겸임. 첫 전당대회 날부터 실수로 민주자유당을 자유민주당이라고 불렀다... (1990년 5월 12일자, 5월 7일자 동아일보, 1990년 5월 7일자 매일경제 참조)[32] 사실 공화당, 민정당이야 그렇다 치고, 민자당의 정당사 5년은 최근의 정당사 가운데서는 '그나마' 나름 오래간 것이긴 사실이다. 또 그 반면으로 한나라당이나 자유민주연합이 1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심오한 뜻을 품은 당 의미도 아니었다.[33] 1992년 당시 김영삼 후보의 선거 슬로건이 '신한국 창조'였다.[34] JP는 훗날 YS와 결별하고 DJ 측과 연합하면서 다시 내각제 개헌을 공동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하나, 약속은 또 지켜지지 않았다. 이건 사실 DJ 측도 내심 바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을 넘는 의석을 움켜쥐고 반대했기 때문이다.[35] 총선 직후 무소속 의원 영입으로 14대 국회가 개원할 때는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였다.[36] 사실 자민당도 처음 선거인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 125석 가운데 고작 61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기는 했다. 다만 참의원에서 별개의 교섭단체인 추풍회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지지세를 굳히는 데 성공, 장기 집권의 길을 열게 되었다.[37] 새한국당 잔류파는 이종찬을 따라서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38] 이들을 소위 민주계로도 부른다. 다만 14대 대선 때는 신민주계 이외에도 일부를 제외하면 다수의 민정계, 공화계 인사들이 김영삼을 지지한다.[39] 이때는 아직 5.18 특별법 제정을 하겠다는 발표를 하기 전이었다.[40] 현역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이었던 허삼수, 허화평도 구속되었다![41] 혹은 민정계 몰아내기.[42] 2000년, 2004년 총선에서도 계속 진행된 이런 '탈민정계' 흐름은 17대 국회에 당선된 소위 민정계 의원이 이상득, 박희태, 강재섭 등 소수였다는 것으로 잘 드러나며 민정계 휘하 정권에서 관료, 군인 등을 했던 범 민정계 의원들을 합해봐도 20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으로도 잘 나타난다. 한편 공화계 역시 지역들의 표심 변화와 탄핵 역풍으로 쇠퇴하게 되어, 17대 국회에서 자민련은 4석의 소수당으로 전락한다. 17대 국회를 기점으로 민정계, 공화계는 계속 쇠퇴하기 시작한다.[43] 물론 민정계, 공화계는 상당수가 친박계나 친이계 중에 이상득계나 친이계 중에 강경파로 이어진다.[44] 이는 수도권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구경북에서 자민련과 민정계 축출에 의한 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준 영향이 크다. 관련 해프닝으로 방송 3사의 공동 조사에서 신한국당이 무려 175석을 얻는 걸로 나타났지만, 예측이 완전히 빗나가면서(실제 결과는 139석)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참고로 1995년 지방선거 때 MBC에서 예측 보도를 했는데, 이때는 15개 광역단체장 당선자를 전부 맞혔다.)[45] 그 다음 총선인 2000년 총선에선 새천년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된다는 예측이 등장했으나 이 역시 빗나가면서 출구조사 무용론이 나온다. 이후로도 총선 출구조사 결과는 번번이 망신을 당했고, 반면 대선이나 지방선거의 광역 결과는 매우 잘 맞추는 경향을 보면 표본의 크기 차이 문제라고 봐야 한다.[46] 김영삼이 민정계 색을 지우기 위해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듯이 역시 이회창 대선 후보가 김영삼 색을 지우기 위해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 임기말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는 건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박근혜도 한나라당의 이름을 이명박 색을 지우기 위해 새누리당으로 변경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위기에 몰리자 새누리당도 자유한국당으로 개명했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말까지 40%대의 고정 지지층을 유지했기에 예외였지만 정권교체당했다.[47] 형식은 신설 합당이지만, 실질은 흡수 합당으로 인식된다. 통합민주당의 거두 이기택이 2000년 총선 공천에서 바로 짤리기도 했다.[48] 애초에 득표율부터가 30% 중반에서-40% 초반대로 생각외로 시너지 효과를 못냈고, 20대와 30대층으로부터 지지율이 별로 높지 않았다. 당시 20대는 IMF 등의 영향으로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으로 완전히 변해가고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보수색이 강했던 20대 여성들도 IMF 등을 겪으면서 민주당 지지층으로 변신을 했고 20대 남성들 역시 완전히 민주당 지지층이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당시 30대의 경우는 여전히 보수색이 꽤 남아있었다. 이인제 후보가 표를 꽤 빼가기도 했다.[49] DJP 연합을 통해 여당 지위를 얻은 새천년민주당 역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분당과 하향세 등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다만 새천년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것에 비해 한나라당은 여전히 대형 정당으로 남았다는 차이점이 있다.[50] 1990.5.9.~1992.5.18. 제13대 대통령 겸임[51] 1992.5.19.~8.27. 제13대 대통령 겸임[52] 1992.8.28.~12.18.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
1992.12.19.~1993.2.24. 제14대 대통령당선인 겸임
1993.2.25.~1995.2.6. 제14대 대통령 겸임
[53] 1996.2.7.~12.6. 제14대 대통령 겸임[54] 김종필부터는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최고위원이 아니라 총재 단일지도체제 아래 속한 '대표위원'이다. 민자당이 창당될 당시에는 총재 아래 대표최고위원 1명(민주계 김영삼)과 각 계파별 최고위원 1명씩을(민정계 박태준, 공화계 김종필) 전당대회에서 선출하는 혼합형 지도체제였다. 그러나 19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정계를 대표하던 최고위원 박태준은 김영삼과의 갈등 끝에 탈당하고 만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민자당 당헌을 개정하여 최고위원제를 폐지하고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은 민주정의당과 똑같은 임명직 대표위원으로 격하시키는 지도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김종필은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에서 임명직 대표위원으로 입지가 약화되었다.[55] 1993년 4월 9일부터 1995년 1월 20일까지는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최고위원이 아니라 총재 단일지도체제 아래 속한 '대표위원'이었다. 그래도 김종필의 위상이 있기에 총재급 위상을 가진 대표로 김영삼 정부 초반에는 사실상 실세이자 2인자 정도로 어느 정도 정권 지분과 국무총리 이상의 행정부 내부 영향력을 가졌다.[56] 과반수 확보(194석->149석)에 실패하여 패배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민주당도 크게 의석 수(75석->97석)를 늘린 건 아니고 오히려 제3당인 통일국민당이 선전했다.[57] JP계가 자유민주연합으로 빠져나갔다는 걸 감안하면 비교적 선전한 편이었지만 민주화 + 지방자치제 직후였기에 패배로서 여겨졌다. 특히 서울특별시장 선거 패배와 서울특별시 지역 구청장 선거에서 서초구청장, 강남구청장 제외한 23곳을 내준 것이 패배의 결정적인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