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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 國際通貨基金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 |
<colbgcolor=#004C97><colcolor=#fff> 설립 | 1944년 7월 22일 ([age(1944-07-22)]주년) |
본부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워싱턴 D.C. |
가입국 | 190개국 |
공용어 | 영어 |
협력기구 | 유엔(UN) |
총재 |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2019년 10월 1일 ~ 현재) |
링크 | | | | | | |
국제통화기금 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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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제통화기금(國際通貨基金;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은 1945년 브레턴우즈 체제가 출범하면서 세계은행과 함께 창설된 국제 기구이다. 한국 국내에는 1997년 외환 위기(통칭 'IMF 사태')를 계기로 많이 알려졌다.선진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일정량 기금 형태로 출자해 기금을 조성한다. 특정 국가에 달러가 부족할 경우 달러를 융통해주는 기능을 하며, 국가별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에 맞춰 배당량(Quota) 형식으로 출자를 한다. 이 때문에 IMF 내에서 각 국가의 의결권도 특별인출권에 의한 배당량에 따라 부여받는다.
주로 유동성의 위기로 갑자기 달러화 부족을 겪는 국가나 방만한 재정 정책으로 외화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국가들[1]이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다. 재정 지원을 받게 되면 해당 국가의 신용도가 깎이는 것은 물론이고, IMF의 지시에 따라 그 나라 경제 구조 자체를 재편해야 하는 것이 무서운 점이다. 명분은 경제 개혁이지만 그 과정에서 해당 국가의 기업 등이 외국에 싼 값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제금융을 받았던 국가들에게 IMF가 좋은 소리를 듣는 경우는 많지 않고, IMF의 정책에 따르는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정권이 뒤엎어지는 건 그나마 양반. 이집트 같은 경우 군사독재 정권이 재수립 되기도 하였다. 심하면 사회 갈등으로 전쟁까지 일어난 일도 있다.
IMF는 사안을 의결할 때 배당량 85% 이상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미국은 17.86%를 가지고 있어서, 사실상 IMF 안건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미국을 대변하는 기구라는 말이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IMF는 어떠한 안건도 처리할 수 없다.[2] 투표권 참고 2018년 국제통화기금에서 파키스탄에 대한 구제금융안을 제의하자, 미국이 반대해서 부결시켰다. 미국의 거부권 행사 이유로는 직접적으로 중국을 겨냥했다. 미국이 대놓고 "파키스탄은 중국의 후원을 받는 국가이므로 IMF의 구제금융이 중국공산당 정부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을 거부 이유로 내세웠다.
이외에도 평시에 세계 경제에 대한 연구 및 통계를 많이 발표하고 있으며 '세계은행'과 함께 국제 금융기구들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크다. 때문에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IMF발 정보를 자주 접하게 된다.
2. 역사
2.1. 브레턴우즈 체제와 IMF의 출범
18세기부터 국제금융체제를 지배하던 영국 파운드 스털링 중심의 금본위제가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대공황을 거쳐 마감하면서 새로운 국제금융체제와 국제무역체제 대한 논의가 대두됐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1944년 7월 22일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턴우즈에서 국제연합 금융·재정 회의를 통해 브레턴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출범하게 됐다. 이 브레턴 우즈 체제를 통해 IMF와 세계은행(IBRD)이 창설됐다. 하지만 국제무역기구(ITO)는 창설하지 못하고 50년 동안 무역과 관세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GATT 1947)에 의해 유지되다 비로소 1995년 우루과이 라운드(GATT 1994)가 시행되면서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게 된다. IMF의 첫 참가국은 29개국이었고 1947년 3월 1일 IMF 협정이 발효되어 업무 개시, 국제연합과 협정을 맺어 전문 기관이 되었다.IMF 설립 최초에는 미국 달러화와 연동된 금태환제를 기초로 한 고정환율제로 운영됐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만일 한 국가가 유동성의 문제로 달러가 급히 필요한데 달러화를 융통하기 위해 한 국가가 보유한 금 1온스를 IMF에 내고 이에 상응하는 35달러를 받는 작용원리였다. 즉 통화 스와프(Monetary Swap)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1% 범위 내에서 변동환율 조정이 가능하며,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그 이상의 변동이 허용된다. 미국은 달러화를 융통해 주는 대신 어느 정도 통화수지의 적자는 감수해야 했지만 2차 세계 대전 직후 세계경제를 재편한 미국의 정책 때문에 가능한 얘기였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국가들이 전후 경제 부흥을 통해 세계경제의 강대국으로 발돋움 했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늘어나게 되자 이 브레턴 우즈 체제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또한 많은 나라들이 달러를 필요로 하지만 미국도 국가이기에 통화수지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 무작정 달러를 찍어낼 수는 없기에 자연스럽게 달러화의 유동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생겼고, 이와는 반대로 달러화의 국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달러를 무작정 찍어내면 그만큼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문제도 생기게 되면서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Triffin Dilemma)'에 빠져들고 말았다.
2.2. 스미소니언 협정-킹스턴 체제를 거쳐
이렇게 브레튼 우즈 체제가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에서 미국과 IMF는 이를 막아보고자 1971년 12월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 스미소니언 협정을 출범했다. BW 체제에서 금 1온스=35달러의 금 태환을 금 1온스=38.02달러로 조정, 미국 달러의 평가절하와 여기에 상응하는 독일 마르크화 일본 엔화의 대 달러화에 대한 평가절상에 합의했다. 또한 브레튼 우즈 체제에서 합의한 ±1% 변동환율폭도 2.25%로 넓히게 됐다.하지만 이 스미소니언 체제도 2년도 안 되어 파기되고 다시 금 1온스=42.22달러로 다시 한번 평가절하 되지만 이마저도 1973년 오일 쇼크로 인한 세계경제의 둔화라는 크리를 먹으며 이것 역시 붕괴되고 만다.
결국 1976년에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기존의 미국 달러화와 연동된 금 태환제를 포기하고 대신 과도한 환율 조작을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가의 외환시장 개입을 존중하여 국가가 고정환율제와 변동환율제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는 킹스턴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또한 미 달러화 연동 금 태환제의 포기에 대한 보완으로 각국의 경제 능력에 맞춰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을 지급하여 IMF의 펀드 출자와 비상시 각국이 달러화를 융통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후 국제금융질서는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의 기본 방향과 킹스턴 체제의 협정 내용에 의해 운용돼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3]
21세기에 들어서 신흥국들이 부상함에 따라 미국과 유럽 역시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G20 경주 재무장관회의에서는 기존에 과대평가를 받았던 유럽 국가들의 특별인출권과 쿼터를 줄이는 대신, 과소평가를 받던 신흥국의 특별인출권과 쿼터를 늘렸다. 그리고 그 동안 IMF 사무총장이 미국이나 유럽 출신이었던 관례를 깨고 2012년에 중국 경제학자 린젠하이(林建海)를 IMF의 새 사무총장으로 임명했고, 뒤이어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Jim Yong Kim) 전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을 임명했다.
2015년 12월에 중국 위안이 10.92%의 비율로 미국 달러, 유로 다음으로 3위의 특별인출권이 되었다.
3. 대한민국과의 관계와 아시아 외환위기의 원인제공 논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일본 Top 3인 야마이치 증권이 파산하고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이던 홋카이도타쿠쇼쿠 은행이 파산하는 등 제발 저리는 상황이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대신도 아시아 통화기금을 통해 타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려는 의지를 미국과 IMF측에 타진했는데. 미국과 IMF는 번복해서 반대했다. 11월 6일, 미국과 IMF가 아시아 통화기금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혔으나 이후 자신들의 불이익을 예상하여 번복해서 반대한 유명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IMF 자체에 대한 신뢰성에 의구심이 퍼지게 되었다.[4]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미국 로렌스 서머스 재무부차관보는 아시아 통화기금은 위험하다며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고[5] 사흘이 지난 11월 11일, 미국과 IMF의 반대로 일본주도의 아시아 통화기금 창설은 무산되었다.[6] 그로 인하여 당시 미국과 일본간의 강한 신경전이 오갔으나[7] 결국엔 11월 15일 일본 대장상이 아시아 통화기금 창설을 철회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일본주도의 AMF 아시아 통화기금 창설계획은 무산되었다.[8]이 아시아통화기금은 국민의 정부의 집권 이후 김종필 국무총리에 의해 다시 제안되기도 했다.[9] 당시 정부의 입장도 아시아통화기금을 김종필 국무총리의 사견으로 여겼으나 아시아통화기금에 대해 현상황에서는 한중일 금융협력이 최우선이나 장기적으로는 검토할 만하다는 입장을 밝혔다.[10]
대한민국은 1997년 11월 21일 외환보유고 파탄으로 결국 이 기구로부터 외화를 조달받는 대가로 국내 경제 구조를 전반적으로 거의 재편하는 수준의 강도 높은 요구 사항에 순응해야 했다. 김영삼 임기 말에 재정 파탄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다음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모두 대통령에 당선되면 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며 경제 구조를 재편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선거를 치렀다. 따라서 유력 후보 중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도 이때부터 대한민국 경제 구조는 IMF의 지시에 따른 신자유주의 방식의 극단적 불균형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 대신 이로인해 김대중 정부 시기의 사회안전망 구축[11]으로 최소균형시스템은 생겨났다.
당시의 혼란의 원인을 제공한 주체가 IMF가 아니었던 만큼 학술적인 자리에서는 'IMF 사태'보다는 1997년 외환 위기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학술적인 정식 명칭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Asian Financial Crisis in 1997)를 많이 사용한다. 당시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연쇄적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 IMF에서 돈을 빌린 것은 1997년이 처음이 아니다. IMF 공식 자료. 1965년부터 1985년까지 지속적으로 IMF에서 돈을 빌렸으나 1997년 외환 위기와 같은 IMF 관리 체제는 아니었다. IMF 대출 계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마이너스 통장과 같이 제한된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빌릴 수 있는 차입예약협정(Stand-by Agreement)과 무제한 한도인 대신 1998년 IMF 사태와 같이 부채 상환이 완료될 때까지 IMF가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긴급수혈자금(Supplemental Reserve Facility)으로 나뉘어진다. 위의 링크 내용과 같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IMF에서 돈을 빌린 횟수는 차입예약협정과 긴급수혈자금 모두 합쳐 18회이지만 긴급수혈자금은 1997년이 처음이었다. IMF가 지시내린 강도 높은 경제 구조조정으로 인해 그 충격파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12]
당시 IMF 외환위기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이권다툼에 한국이 희생양이었다는 앤드류 월터 교수의 칼럼이 동아일보에 게제되기도 했다.[13] 김대중조차도 1998년 1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외국자본의 무차별 유입이 경제 식민지를 초래할 지 모른다는 세간의 우려에 대해서는 “미국은 약 17%가 외국 자본입니다. 우리나라는 얼만지 아십니까? 불과 2%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급해져도 누가 안 도와주는 겁니다.”라고 답변했다.[14]
4. 평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는 27%라는 살인적인 고금리 정책과 강도높은 구조조정 정책, 공기업 민영화를 한국에 요구했고, 이로 인한 엄청난 정리해고와 뒤이은 비정규직법의 등장으로 1997년 외환 위기 이전과 이후의 한국 사회는 많이 다른 사회가 되었다. 외환위기 당시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IMF를 한국을 침탈하는 외세로 보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리스 경제위기 때는 한국보다 더 나라 꼴이 개판인 그리스에, 오히려 한국보다 훨씬 더 관대하고 온건한 긴축안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보다는 사정이 나았던 한국은 그렇게나 죽어라고 줘패서 헬게이트를 열어 놓은 놈들이, 정작 한국보다 더 꼬라지가 개판인 그리스는 같은 서구국가라고 솜방망이로 봐주는 거냐?" 라면서 IMF를 욕하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게 나왔다. 사설 - 인종차별적인 IMF의 이중잣대IMF는 일반적으로 소방관에 비유된다. 불 붙은(경제위기) 건물(국가경제)에 급하게 물(돈)을 쏟아부어 화재를 진압한다는 것으로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다. IMF와 소방관의 결정적 차이점은 화재가 진압된 건물을 재건하는 벽돌공의 역할(원조 대상국 경제의 재편)까지 맡으려 한다는 것이다. [15]
1980년대 부터 시작된 제3세계의 외채위기[16]를 빌미로 미국은 IMF를 가지고 새로운 판짜기를 시도했다. 1980년대에는 베이커 플랜, 1990년대에는 브래디 플랜이 IMF의 요구를 대표하여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위기가 발생한 이유를 유동성의 부족에서 찾았다. 즉 자금의 통로만 터주면 제3세계가 국내 산업을 육성하느라 투자한 고정 자본을 곧 회수할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자금 중심적이던 IMF의 관점은 이후 구조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때문에 IMF 패키지 정책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구조조정에 대한 요구로 정리될 수 있다. 구조조정의 핵심적 요구들은 다음과 같다.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고금리로 해외 자금을 유치하고,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성을 늘리고, 정부의 재정 지출을 대폭 삭감하라는 것이다.
제2세계인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는 외채 문제 때문에 IMF 패키지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고, 결국 이들 나라의 경제 붕괴를 촉발시켜 체제를 전환시키는 데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제위기가 일어나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켰다. 이후 전두환은 물가를 잡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긴축정책을 펼치게 되며, 그러다가 80년대 중반에 '3저 호황'이 일어나서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서유럽과 미국 등의 자본이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IMF의 속성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런 일이 세계적으로 벌어졌던 것은 미국과 영국에서 고금리 정책을 취하면서 제3세계 국가들이나 동구권 국가에서 이자율이 급속히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한창 이자율이 낮았을 때 빌린 돈을 갚을 시기가 되자 이자율이 올라가 갚을 빚이 급속히 늘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늘어나는 빚에 대한 본격적인 대책은 80년대 후반에나 나왔고, 그 사이에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파산해버리고 말았다. 이를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부르는데, 이에 반대하여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같은 IBRD 측의 인사들이 포스트-워싱턴 컨센서스를, 중국에서는 베이징 컨센서스 같은 것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IMF에 워낙 호되게 데여서인지 한국 현대 판타지 소설중 기업인이 되는 소설은 환생자라 미래의 기억을 통해서 IMF를 예방한다거나 하는 소설이 있다. 또 한국 정부의 재정정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관계자들은 농담삼아 기획재정부의 가장 깊은 곳에는 IMF에 대한 척화비 하나쯤은 서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당시 한국의 외환위기는 기업의 부실경영과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이 주 원인임에도 IMF하면 이를 가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IMF가 밀어붙인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직한 사람들의 퇴직금을 노리고 벌어진 사기로 인해 그 피해자가 자살하거나, 직장에서 짤린 충격으로 자살, 또는 이때까지 모은 돈으로 증권 같은 곳에 투자를 했는데 휴지조각이 되어 그 충격으로 자살하거나 범죄를 일으키는 등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자살하고 치안이 악화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여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 당시 페루 측에게 출산율을 줄이라는 권고를 했고, 후지모리는 이를 이행하기 위해 불법적 강제 불임수술을 자행했는데 IMF 측에서는 페루 정부가 이런 일을 하는 데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묵인했다. 민주화 이후 이집트에서는 구제금융 조건으로 생필품 가격과 공공요금을 폭등시켜 민심이 흉흉해지고 민주 정권이 다시 군사독재 정권으로 교체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아이티에서 원조를 조건으로 휘발유 값을 리터당 5달러로 인상하도록 해 대규모 시위를 유발시키거나[17], 니카라과에게 연금 삭감을 권고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유발한다거나[18], 아르헨티나나 태국에서 정권과 협력하는 조건으로 공공요금을 수십 배 이상 인상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다른 나라들이 보기에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국가의 외환보유고에 집착하는 것도 20세기 말 IMF의 쓰라린 구제금융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외환이 모자라서 피를 봤던 대한민국[19], 태국, 인도네시아[20], 말레이시아는 물론이고 이웃 나라들이 호되게 고생하는 걸 본 중국과 대만, 일본도 역시 외화 모으기에 혈안이 되었다. 고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세계에 산재한 달러를 거의 닥치는 대로 폭풍흡입해 자신들의 외환보유고에 쌓아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국채 매입 역시 대부분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미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에 대한 집착은 이제 세계 전체의 경제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커졌다. 일각에서는 이를 '동아시아의 복수'라고 한다.
실제로 한국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신호탄을 쏘고[21] 그 여파인 대침체로 인해 미국과 유럽이 휘청댈 때 한국은 (IMF 사태 이후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동안 닥치는 대로 쌓아놨던) 외화를 풀고 성장시장인 중국과 거래하면서 피해를 완화했는데, 이것을 두고 한국이 서구[22]에게 제대로 복수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한국이 IMF 구제금융 위기로 입은 타격보다 미국과 유럽이 대침체로 입은 타격이 훨씬 클 정도다.[23]
동아시아에서 IMF의 이미지가 얼마나 안 좋은지 2021년에 한국 기획재정부에 공매도와 관련해 일부 조언을 했다가 '무슨 주제로 내정간섭이냐, 당장 꺼져라'는 국내의 맹비난까지 나왔다.
5. 역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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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구트 | 이바르 루트 | 일페르 야콥 | 피에르폴 슈바이처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요하너스 비터베인 | 자크 드 라로지에르 | 미셸 캉드쉬 | 호르스트 쾰러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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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
미국인을 총재로 선출하는 세계은행과는 반대로 관례상 유럽인을 선출한다. 대신에 미국은 수석부총재 자리를 가져간다. 현재까지 7개국(벨기에, 스웨덴,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불가리아)에서 선출되었으며 프랑스인이 제일 많이 선출되었다.
<rowcolor=#fff> 대수 | 이름 | 국적 | 임기 | 비고 |
1 | 카미유 구트 | 벨기에 | 1946년 5월 6일 ~ 1951년 5월 5일 | |
2 | 이바르 루트 | 스웨덴 | 1951년 8월 3일 ~ 1956년 10월 3일 | |
3 | 일페르 야콥 | 스웨덴 | 1956년 11월 21일 ~ 1963년 5월 5일 | |
4 | 피에르폴 슈바이처 | 프랑스 | 1963년 9월 1일 ~ 1973년 8월 31일 | |
5 | 요하너스 비터베인 | 네덜란드 | 1973년 9월 1일 ~ 1978년 6월 16일 | |
6 | 자크 드 라로지에르 | 프랑스 | 1978년 6월 17일 ~ 1987년 1월 15일 | |
7 | 미셸 캉드쉬 | 프랑스 | 1987년 1월 16일 ~ 2000년 2월 14일 | 한국의 사회·경제는 캉드쉬 전과 후로 나뉜다. |
8 | 호르스트 쾰러 | 독일 | 2000년 5월 1일 ~ 2004년 3월 4일 | |
9 | 일로드리고 라토 | 스페인 | 2004년 6월 7일 ~ 2007년 10월 31일 | |
10 |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 프랑스 | 2007년 11월 1일 ~ 2011년 5월 19일 | |
11 | 크리스틴 라가르드 | 프랑스 | 2011년 7월 5일 ~ 2016년 2월 20일 |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재 |
12 | 크리스틴 라가르드 | 프랑스 | 2016년 2월 20일 ~ 2019년 10월 31일 | 역사상 최초의 재선 총재 임기 중간에 유럽중앙은행 총재로 이적 |
13 |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 불가리아 | 2019년 10월 1일 ~ 현재 | 역사상 최초의 개발도상국 출신 총재 |
6. 기타
IMF에서는 매년 4월과 10월에 세계경제전망(WEO) 보고서를 내고, 1월과 7월에 기존 전망치를 일부 수정한 WEO 업데이트를 내놓는다.[1] 1980년대에는 주로 비싼 이자율을 감당하지 못해서 지불 유예를 선언한 국가들이 IMF의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2] 이 점이 반미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3] 물론 킹스턴 체제 이후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간의 협정이었던 플라자 합의이나 루브르 협정 등 굵직굵직한 국제통화 관련 협정들이 있었다.[4] IMF 아시아 통화기금 설립 지지 매일경제 1997.11.6, 아시아 통화기금 연내 창설 경향신문 1997.11.6, IMF 아시아통화기금 설립 지지 한겨레 1997.11.6, 미국 아시아 통화기금 설립 지지 조선일보[5] 1997.11.7 미 아시아 통화기금은 위험 매일경제, 1997.11.7 아시아 펀드 필요없다 미 국무부장관 밝혀 동아일보[6] 일본 아시아 통화기금 철회 경향신문 1997.1111[7] 미국 일본 아시아통화기금 신경전 19971113 동아일보[8] 일본 아시아 통화기금 설립 포기 매일경제 19971115[9] 김종필 총리 아시아통화기금 제안[10] AMF 아시아통화기금 계획 사실상 백지화[11]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등[12] 전두환 정권 시절 IMF 관리 체제를 겪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긴급수혈자금이 아닌 차입예약협정으로 빌린 기금에 대해선 IMF의 의사를 따를 강제적 구속력이 없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의 IMF 관리 체제는 긴급수혈자금을 빌린 기간인 1997년~01년이 유일하다.[13] 아시아에서 미일의 대결 1999.9.1 동아일보[14] mbc뉴스 김대중 당선자 98.1.18일 국민과의 대화 mbc.[15] '돈을 빌려주는 대신 상대방이 자기가 빌려준 돈을 확실히 갚을 수 있게 만들어 놓는다'고 해석하는 곳도 있다.[16]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폴 볼커 연준 의장이 21%까지 금리를 올리자 세계의 달러 자금들이 미국으로 몽땅 흘러들었다. <트리핀의 딜레마>를 참고할 것.[17] 아이티가 원채 가난한 나라이고, 철도가 잘 갖춰지지 않아 주 교통수단이 버스라는 것을 감안하면 나가 걸어다니거나 죽으라는 얘기다.[18] 다만 이건은 그 동안 쌓인 것이 폭발해서라는 것이 주 요인이라는 평이다.[19] 한국만 봐도 현재 외환보유량이 4000억 달러를 돌파해 세계 9위인데, 이 정도도 부족하다며 외환보유량을 8000억~9000억 달러로 늘리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다.[20] 인도네시아는 IMF 구조조정의 여파로 당시 인도네시아기업을 장악하고있던 화교들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화교살인사건이 빈번히 일어났으며 또한 32년동안 집권했던 독재자 수하르토가 실각하는 계기가 되게된다.[21] 자세한 건 리먼 브라더스 문서 참고. 정확힌 한국 입장에서도 리먼 브라더스를 일부러 망하게 하려 한 건 아니고 오히려 미국 측에서 (자기네 기업 빚 짬때려서) 한국을 등쳐먹으려다 한국 산업은행이 국정감사의 집중공격을 받는 동안 하나 둘 "이건 위험하다"고 칼럼을 내는 전문가가 나오는 등등 여러 요인이 엮여 인수가 물 건너가자 바로 파산한 것. 즉 자업자득. 비유하자면 우리가 총을 쏜 게 아니라 저쪽이 쏜 걸 운 좋게 막았더니 그대로 튕겨서 돌아가 헤드샷을 맞힌 셈이다(...).[22] 정확히는 조지 소로스의 헤지펀드와 서구의 입김이 강한 IMF.[23] 대한민국이 외환위기 당시 IMF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빌린 돈이 550억 달러이고, 엄연히 제조업 기반을 가진 국가이기 때문에 그 체급은 비교를 불허한다. 온 힘을 다해 물건을 팔고, 지독한 대가를 치르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면 타격을 회복할 수 있고 실제로 회복했다. 반면 램버스처럼 제조업을 할 만한 기술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돈을 굴려 돈을 먹어온 일개 금융 회사인 리먼 브라더스가 당시 대한민국의 1년치 예산을 넘어서는 6,130억 달러의 빚을 갚을 만한 재간이 없는 것이 당연지사. 그들이 파산하니 그 빚의 돌려막기로 엄청나게 팽창한 금융계가 거품이 확 꺼지며 무너지고, 그 거품경제를 성장동력 중 하나로 삼은 미국과, 그 미국에 연계된 전세계가 난리가 난 것. 한국과 중국 등 피해가 덜하다 싶은 곳은 이전의 사태를 교훈삼아 비축한 외환과 함께, 그 빚의 고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기에 중국과의 무역으로 숨 돌릴 수 있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