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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13:00:44

이철수(군인)

대한민국 공군 대령
이철수
Lee Chul-su
파일:SSI_20101117015505.jpg
[1]
출생 1966년 6월 2일 ([age(1966-06-02)]세)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읍
(함경북도 어랑군 어대진로동자구)
역임보직 조선인민군 공군 제1비행사단 57추격비행연대 2대대 책임비행사
공군대학 안보정책과정 교관
합동군사대학교 공군대학 항공전력학 처장
공군본부 항공전투발전단 교리발전처 부처장
공군본부 항공정보단 북한공군전술선임분석관
복무 조선인민군 공군
1986년 ~ 1996년
대한민국 공군
1996년 ~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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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가족관계 아버지 이춘상
전처 이성옥
장남 이명진
장녀 이명심[2]
부인 박지영[3]
학력 삼지연인민학교 (졸업)
삼지연중학교 (졸업)
조선인민군 공군 비행군관학교[4] (졸업 및 임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 / 석사)[5]
임관 특별임관[6]
최종 보직 57추격비행연대 2대대 책임비행사 (조선인민군 공군)
공군본부 정책관 (대한민국 공군)
최종 계급 대위 (조선인민군 공군)
대령 (대한민국 공군)
상훈 3급 국기훈장
3대 혁명훈장
보국훈장 삼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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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수를 돌리다4. 대한민국 공군에 합류하다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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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웅평 의 귀순 이후 1996년 MiG-19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조선인민군 공군 출신의 새터민.

탈북 직후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특별임관되었으며, 대한민국 공군에서 26년 간 복무한 후 최종 계급 대령 으로 예편하였다.

군사특기는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공군 모두 조종이었으나 대한민국 공군에서는 출신 성분의 특성을 고려하여 실제 전투기 조종 임무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조선인민군 출신의 전투기 조종사라는 점을 살려 조선인민군 전략, 전술 분석 및 전투정보 등을 교육하는 교관직 임무를 주로 수행했었다.

2. 생애

함경북도 어랑군 출신이다. 즉,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으로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읍 출신.

아버지는 삼지연공항에서 1987년까지 군관으로 군복무를 했다.[7] 2대가 북한 공군에서 복무한 셈이다.

북한 공군 군관이었던 아버지를 동경해 비행사가 되기를 꿈꾸다가 1982년 경성군 소재 공군 비행군관학교에 입학해 4년간 훈련을 받고 1986년 북한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3. 기수를 돌리다




그렇게 대위까지 진급했으나 조선인민군 공군 인사과정에서 불이익을 보고 이러한 현실에 귀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1996년, 평안남도 순안군 온천비행장 에서 자신에게 배정된 미그19기를 이끌고 황해남도 태탄군 쪽으로 남하, NLL을 넘어서 수원 군비행장에 우리 공군의 호위를 받으며 안착했다.

탈북 과정에서 몰고 온 미그기 보상금을 포함한 정착금 4억 7800만원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수령하였다.[8]

귀순 당시의 소지품이나 발싸개를 반으로 잘라 착용하고 있었던 것 등 북한의 열악한 사정을 그대로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

4. 대한민국 공군에 합류하다


파일:이철수.jpg

탈북 당시 기자회견에서부터 이미 대한민국 공군에 복무하기를 간절히 희망했고, 공군본부에서 이를 받아들여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특별임관되었다. 이후 국군 동화교육, 정치외교학 석사학위 위탁과정을 거쳐 2003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2010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철수는 탈북자로서 10번째 대령 진급자다. 첫 번째는 1950년 4월에 IL-10을 타고 넘어온 이건순 공군 중위로 1974년에 공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2번째는 6.25 다부동 전투 때 귀순한 정봉욱 중좌로 대한민국 육군 대령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 7사단장과 3사관학교장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2018년 사망). 3번째와 4번째는 1955년에 야크-18 훈련기로 함께 탈북한 북한 공군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다. 5번째는 1960년에 미그-15를 타고 귀순했던 정낙현 대한민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소위), 6번째는 1965년 보트를 타고 탈북하여 대한민국 해군 정훈감을 지낸 이필은 해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해군 대위, 1980년대 초반 사망), 7번째는 1970년에 미그-15를 타고 넘어온 박순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공군 소좌. 1976년에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중령이었으나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는 자료가 있음.), 8번째가 1983년 2월에 미그-19로 귀순한 이웅평 대령(2002년 작고), 9번째가 1983년 5월 귀순한 신중철 육군 대령(귀순 당시 육군 상위)이다.[9][10] 그리고 마지막 대령 진급자가 1996년 귀순한 이철수 소령이다.

그렇게 군생활을 하다 2022년 7월 31일 부로 공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복무 중 잡음도 전혀 없었고, 건강 역시 문제가 없으며, 전역 이후에도 대외적 활동을 드물게나마 이어가는 등 현시점에서는 가장 성공적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삶에 적응한 북한군 출신 인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5. 기타



[1] 귀순 후 대한민국 공군 소령 임관 당시 사진.[2] 본인이 직접 밝힌 탈북 동기 및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가족들은...[3] 충남대학교 출신 연구원[4] 함북 경성군 위치[5] 미래캠퍼스 소속 대학원생이었다.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은 신촌캠퍼스와 미래캠퍼스가 통합되어 있다.[6] 임관구분에는 '현임 1'로 되어 있으며, 인사행정 상으로 공군사관학교 35기와 동기로 취급받고 있다. 박인호 전 공군참모총장과 동기인 셈.[7] 귀순 당시에는 예편 상태로, 노병으로 대우받으며 기업소 지배인으로 근무중이었다고 한다.[8] 2023년 화폐가치 기준으로 10억 정도 된다.[9] 특히 신중철 대령은 북한군 병으로 입대해 강건종합학교를 입학해 소위로 임관하고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해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과 1, 2등을 다투는 학교에서의 엘리트였고, 이후 상위까지 진급하며 북한군에서도 엘리트중의 엘리트였다. 그는 북한군의 전술을 온전히 배운 장교로, 북한군의 전술과 실무를 전부다 깨고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인물이 귀순을 했다는것은 정부로서는 초 고가치 정보들이 뭉텅이로 품에 들어온것 이었다. 신중철을 통해 북한군의 자세한 전술과 전략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왔고 심지어 당시엔 발견도 못하고있던 제4땅굴을 7년 뒤 수km오차로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이후 그는 정보사령부로 전입하였고 해당 부대에서 대령으로 초고속 승진한 뒤 모든 전방부대를 찾아 북한군의 입장에서 어디가 취약점인지 철저하게 분석하며 우리군 작전체계에 엄청난 역할을 하였다.[10] 하지만 신중철 대령은 전역 후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을 어려워하다 중국에서 잠적하는 사고를 쳐서 흑역사로 여겨지고 있다. # 당시 국정원정보사령부, 기무사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그가 만들어낸 전략과 전술들이 이번에는 고스란히 북한이나 중국의 손에 들어가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중철 대령은 북한출신이기 때문에 진급상한선이 사실상 대령까지였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중철과 비슷한 동기뻘들 이었던 육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학군단 출신 대령들이 한명두명 준장소장으로 진급을 하며 상급자로 마주해야하는 순간이 너무 많아졌고 급기야 그들과 다투는 일이 생겼고 결국 그는 회의감을 느끼고 1995년 홧김에 전역을 해버렸다. 하지만 그가 복무기간 20년을 못채워 군인연금 대상자가 되지 못했고, 취업도 쉽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불운이 겹쳐 1997년 IMF가 찾아와 더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11] 고난의 행군으로 온 인민이 염장무(무짠지)로 끼니를 때우는 상황이 오자 김정일은 "군인들만큼은 세가지 반찬을 먹이라"고 지시했는데, 그 해결책이 북한군이 주 반찬으로 사용하는 염장무를 모양만 다르게 썰어서 세가지 반찬이라고 퉁쳤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