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6:40:56

이웅평

이웅평
李雄平 | Lee Woong-pyong
파일:htm_20151127155422854201.jpg
<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출생 1954년 9월 28일[1]
평안남도 대동군 청계리[이북5도]
(現 평양시 화성구역 청화1동)
사망 2002년 5월 4일 (향년 47세)[3]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2묘역-211판-4304호
본관 수안 이씨
복무 조선인민군 공군
1970년 ~ 1983년
대한민국 공군[4]
1984년 ~ 2002년 5월 4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부모 아버지 이광정[5], 어머니 맹성월
형제자매 누나 2명, 여동생 3명, 남동생 1명
배우자 박선영
자녀 딸 이다빈, 아들 이준기[6]
학력 김책공군대학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36기)
임관 특별임관
최종 계급 상위 (조선인민군 공군)
대령 (대한민국 공군)
최종 보직 공군대학 교수
주요 보직 조선인민군 공군 제1비행사단 책임비행사
대한민국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대한민국 공군대학 교관
상훈 보국훈장 천수장
신체 180cm }}}}}}}}}

1. 개요2. 생애
2.1. 전투기 귀순2.2. 귀순을 결심한 이유2.3. 귀순 당시 상황2.4. 귀순 이후2.5. 사망2.6. 간경화 투병 일화
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탈북민 출신 군인.

본래 북한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던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7]였으나, 1983년 2월 25일 인민군 미그-19기를 조종하여 대한민국 영공으로 탈북해 귀순했다. 탈북 후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특별임관하였으며, 이후 공군에서 18년간 복무하며 대령으로 진급했지만 200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2. 생애

1954년 9월 28일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청계리(現 평양시 룡성구역 청계동)에서 아버지 이광정과 어머니 맹성월 사이에서 7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인민군 공군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상위로 진급한 후 제1비행사단 책임비행사로 복무하던 1983년 돌연 자신이 조종을 담당하는 전투기를 몰고 북한 영공을 이탈해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2.1. 전투기 귀순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탈북 귀순용사들 중에서 가장 넓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북자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 케이스인데, 그 이유는 북한 공군 장교가 자기 비행기를 몰고 탈북한 드문 사례 중 하나이고(6건), 한국에 가져온 기종이 J-6(MiG-19 중국 라이센스 생산형)기로 동기종 최초였다. 또한 그가 탈북할 때 북한군의 기습공습인 줄 알고 전국에 경계경보가 발령되었기 때문이다.

TV조선에 따르면 1983년 2월 이웅평이 탈북할 때 공습경보가 울렸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확히는 경계경보였다. 한국에서 휴전 이후 처음 울린 공습경보는 1983년 8월 7일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소속 손천근 조종사가 망명을 시도했을 때라고 한다. 한번 일어나기도 힘든 사태가 83년에 불과 6개월 만에 연달아 벌어졌기에 이 두 귀순 사건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8] 중국 공군보다는 이웅평 쪽이 아무래도 남북이 체제전쟁을 벌이던 시절에 더 선전 면에서도 효과적이었기에 이웅평이 부각되면서 두 사건을 이웅평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웅평 용사의 의거환영 및 북괴남침책동 분쇄궐기대회 등 성대하게 맞이했다.



앞서 비행기를 몰고 탈북한 최초의 사람은 1950년에 Il-10을 몰고 귀순한 이건순 중위이며, 6.25 전쟁 직후 1953년 노금석이 MiG-15기를 몰고 귀순한 것이 유명하다. 1955년에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가 Yak-18기를 몰고 귀순, 1960년에 정낙현이 귀순, 나머지는 각각 이웅평과 이철수다. 귀순 의도는 아니었지만 1970년에 불시착한 박순국 소좌의 경우 설득으로 귀순을 결심한 사례도 있다.

2.2. 귀순을 결심한 이유

전투기를 직접 몰고 영공을 통해 귀순하며 대한민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뒤 비로소 밝힌 귀순 사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어느 날 함경북도 경흥군의 바닷가에서 이상한 비닐 봉지를 줍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삼양라면 봉지로, 당시 그는 라면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림 등을 보고 국수라고 추측하며 포장지에 적힌 글을 읽어나갔는데 봉지에 적혀 있던 글귀는 이웅평 상위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판매나 유통 과정에서 변질, 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 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라는 문구를 읽었다. 그는 '남조선은 이런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소비자 인민의 편의를 도모하는구나. 그렇다면 인민의 지상락원이라던 우리 공화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충청타임즈(2016)에 수필가 박경희가 기고한 칼럼에서는 이웅평이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라면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계란을 풀어 넣는 게 좋다는 글귀가 있었다. 그건 남쪽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달걀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때 나는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다만 제도권 언론에는 딱히 나오지 않는 내용이며, 그나마 유사한 내용이라면 동아일보(2006)에 "남한 당국의 어떠한 선전물이나 대북 방송보다 계란과 파를 넣은 먹음직한 라면 사진이 더 강렬한 인상을 준 듯하다."란 구절이 있다. 사실 이웅평이 귀순 후 여러 언론과 인터뷰하거나 귀순 과정을 연재하기도 하고 회고록을 쓰기도 했는데, 오래된 관계로 팩트 체크가 쉽지 않다. 다만 역사저널에서 전문가는 이 썰에 대해 부정했으니 이웅평의 인터뷰가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9]

탈북자들이야 많지만 전투기 탈북이라는 흔치 않은 사례로 더 주목을 받았다. 한국은 1989년 벌어진 임수경 방북 사건처럼 북한으로는 직접 갈 수 없어도 타국을 경유해 가는 방법도 있고 합법적으로 한국을 벗어날 자유가 있기에 번듯한 공군 장교가 굳이 전투기를 몰고 불법으로 탈출할 이유가 없다. 외국에 있다 보면 향수병이 생기곤 하는데 유승준처럼 고향길이 막히면 괴롭기에 이민을 꿈꾸는 한국인들도 합법적인 이민 절차를 밟아 떠난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 북한은 우물을 탈출할 수 있는 합법적인 루트가 봉쇄되었기에 전투기를 몰고 탈출하자는 극단적인 결심을 하고야 만다.

항공 전문가인 소승호 기장에 따르면 당시 전투기 4대의 편대였다면 나머지 3대의 눈을 피해야 하기에 귀순을 결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탈북 디데이로 잡은 날은 최소 편대인 2대만 출격하는 날이었고, 이웅평이 뒤에 가는 상황이었기에 앞의 전투기 몰래 빛의 속도로 빤스런(...)을 하며 비교적 쉽게 탈북에 성공했다. 선두기를 몰던 편대장의 다급한 호출이 있어서 혹시 눈치채고 쫓아올까봐 불안했다는데, "완전하다"[10] 라고 시크하게 대답한 후 거리를 완전히 벌리면서 유유히 '지상락원'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이웅평의 절친 임영선은 좀 더 구체적으로 트리거가 된 사건을 소개했다. 이웅평이 평소 몰래 한국 라디오를 듣고 절친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게 높으신 분에게 흘러 들어가서 "너 이제 마지막 비행이 될 수 있다." 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다만, 가뜩이나 조종사들의 탈북을 경계하던 북한에서 그렇게 경고해버리면 '잃을 게 없다'의 심정으로 탈북할 것이 뻔한데, 어차피 체포할 거라면 굳이 그렇게 "너 돌아오면 끝이다!" 라면서 경고하고 전투기를 태워 보냈겠느냐면서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웅평의 친한 동료들이 "너는 이제 보위부에게 잡힐 수도 있으니 체포당하기 전에 빨리 도망쳐라." 라고 몰래 귀띔을 해줬을 가능성도 있다.

탈북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관문이 휴전선 인근의 북한 미사일 기지인데, 지대공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수원까지 닿기 때문에 거기에서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위험하더라도 초저고도 비행[11]으로 탈출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한영 암살 사건의 당사자인 금수저 이한영도 탈북 동기가 '미국 여행을 한 번 가보고 싶어서(…)' 였듯이, 상류층의 탈북 동기는 먹고 사는 것을 넘어 자유에 대한 동경인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엘리트 계층인 이웅평은 특히나 전투기 조종사로서 '리얼 헬조선' 지상감옥 북한에서 한 번씩 하늘을 향해 구름까지 날아올라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직업이다 보니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북한을 탈출하는 것이 가능한지라 새로운 세상에 대해 선망하며 마음이 뜨기가 용이한 환경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일반 북한인들은 삐라나 한류를 접하면서 한국에 대한 동경이 생겨도 탈북하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기에 체념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웅평은 조종사였기 때문에 상황이 달랐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북한 인민들보다는 나은 삶이었을 뿐이고, 별다른 희망도 없고 모든 것이 통제된 감옥같은 일상이었기에 여차하면 순간이동하듯 탈출할 수 있는 특성상 유혹에 넘어가기가 쉬운 상황이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나온 상류층 탈북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자유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는 것인데, 이웅평 역시 쳇바퀴 돌아가듯 지루하고 팍팍한 삶에서 뭔가 새로운 모험을 해볼 유혹이 들었을 수 있고, 우연히 본 라면 봉지가 탈북 유혹에 불을 질렀고 급기야 탈북에 성공했다.

삼양라면 운운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조작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훗날 정부가 시킨 것이라고 양심고백을 하거나 번복한 적도 없으니 정부가 대본을 줬다는 설은 단지 '당시 사회 분위기상 그렇지 않았겠느냐' 라는 추측일 뿐이다. 일부에선 라면은 북한에서도 즉석국수라고 해서 생산한다며 "이웅평이 라면 봉지를 처음 봤다고 거짓말 했다" 라고 조작의 근거라며 제시하나 "라면이란 것을 처음 봐서 감동했다"라고 한 적이 없다. 단지 라면에 성분 분석표가 투명하게 기재되어 있고 변질된 제품을 가져 오면 교환해준다는 문구를 보고 "한국은 가난하고 인민들을 착취하는 나쁜 자본국가라고 배웠는데 인민들의 편의도 배려하고 경제적으로 잘사는가보다"나 계란을 넣어먹으면 더 맛있다는 글귀를 보고 "그럼 한국은 이런 즉석음식을 사먹는 평범한 사람도 달걀을 쉽게 먹을 수 있다는 건가? 한국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구나"라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북한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서 고난의 행군이 벌어지는 가난한 실상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즉, 라면은 "북한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라면서 회의를 느끼게 하는 트리거로 작동한 것일 뿐이고, 고작 남한에서 라면 한 그릇이나 먹고 싶어서 귀순을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애시당초 명색이 전투기 조종사인데 굶주려 탈북할 계층이 아니다.

물론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정부가 어느 정도 인터뷰에 마사지를 했을 개연성도 있긴 하지만, 가난한 북한 사회의 처지에 회의감이 든 것 자체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민들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고위급 인민군 장교였던 비행군관으로 근무하였지만, 이런 사람조차 난방을 하려면 퇴근 후 배급받은 석탄가루를 물에 개어서 진흙과 섞는 식으로[12] 조개탄(일종의 연탄)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곳이 당시의 북한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고급 인력이라 보급해 주는 것이지, 그 외의 부대나 주민들은 땔나무를 알아서 구해야만 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남한에서는 돈만 있으면 공장에서 완제품으로 생산된 양질의 연탄을 구입할 수 있었으며, 1980년대 초중반 당시의 500원 정도면 좋은 연탄을 3장 정도를 구입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1980년대 초반 남한의 주택 난방은 연탄에서 석유나 가스 보일러로 전환되던 시점이었고, 무엇보다 조종사같은 엘리트 고급 인력들은 연탄 같은 건 난방으로 안 썼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의 남한은 조종사들이 민항사로 취업하고 연봉이나 처우가 어느 정도 나아진 후의 상황이고 군대의 관사나 주택에서 거주하던 조종사들은 소령까지는 기름 보일러를 썼다고 한다. 물론, 북한은 기름보일러는 커녕 군용 장비에 들어가는 석유도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또한 이웅평은 비행기 라디오로 남한의 방송을 몰래 청취했다고 밝혔는데, 이웅평과 친하게 지냈던 고영환에 따르면 특히 강인덕이 진행하는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를 매우 재밌게 들었고 탈북을 결심하는데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13] 사실 북한군 장교들은 남한방송을 청취하는 것 자체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북한에서는 그와 같은 신분이라면 남한 방송을 보다 걸리면 일반 감옥인 교화소와는 다른 관리소라는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웅평은 남한 라디오를 청취하며 이것저것 아무거나 말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 당시가 1983년, 즉 제5공화국 시절의 남한에서도 땡전뉴스보도지침으로 대표되는 언론 탄압이 대놓고 자행되던 시기였는데도, 그런 남한 언론조차 북한 언론에 비해서는 훨씬 자유로워보였다는 소리다.

만약 북한에서 대학생들이 김정은 비판 벽보를 붙이고 김정은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대학생이 카메라를 향해 "김돼지!" 외치는 장면이 전파되고 그 학생은 물론 가족들도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은 채 멀쩡히 살아있고 실질적인 야당 세력이 존재하는 수준만 돼도 '평양의 봄'이 찾아왔다고 느낄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14] 결국 이웅평은 라디오를 통해 남한의 경제사정도 어렴풋이 파악하고 "공산주의로는 절대 시장경제를 이길 수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거기다 당시 이웅평은 북한의 군생활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왔었다. 북한에서 비행교관같은 고위군관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탈북할 수가 있었고 열악한 북한 공군의 특성상 누가 큰 맘 먹고 전투기를 타고 도망가면 제지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사상교육이 매우 빡센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남한의 경우는 정훈교육복무신조나 조금 외우고 교육자료나 몇 번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수준의 정도인 것과 다르게 북한에서는 강령부터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모두 외워야 하며 시험도 보고 점수가 제대로 안 나오면 진급에 불이익을 주고 자아비판이나 한답시고 내리갈굼이나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스트레스와 함께 당시의 북한 체제에 대한 회의감과 자신이 수령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으로 인해 탈북을 선택하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내가 살 곳은 공화국이 아니다. 인민을 진정으로 배려해주는 남조선으로 가야겠다. 내가 믿고 따른 수령이 나를 배신했으니, 내가 수령을 배신해도 죄가 될 것이 없다."

그리하여, 이웅평은 결국 전투기의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2.3. 귀순 당시 상황

1983년 2월 25일 당시 한국에서는 팀 스피릿 훈련이 진행되었다. 이에 북한에서는 준전시상태에 해당하는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날 훈련을 위해 오전 10시 30분쯤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MiG-19 편대 중 그의 전투기는 편대를 이탈하여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추격하는 북한기들을 따돌리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였다.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고도 50~100m를 유지하면서 시속 920㎞의 전속력으로 남하, 10시 45분 황해남도 해주시 상공을 지나 연평도 상공의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입했다. 이에 초계비행 중이던 한국의 F-5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다.[15]

남한의 F-5가 따라붙자 이웅평은 투항하겠다는 의사의 표시로 MiG-19의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른바 '뱅크 기동'이라 불리는 이 기동 방식은 군인을 포함한 항공 업무 종사자들이 적기 등을 만나거나 할 경우 귀순, 항복, 교섭 등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는 국제 공용 표현으로, 육상전이나 해상전의 백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웅평의 뱅크 기동을 확인한 F-5는 미그기를 유도하여 제10전투비행단이 있는 수원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시켰다.
파일:이웅평_귀순.jpg
수원비행장에 착륙한 이웅평
이웅평은 수원 비행장에 착륙하고 난 뒤, 급히 출동해 미그기를 둘러싼 공군 헌병들이 을 겨누고 있어서 섣불리 나오지 못하고 계속 대치를 하고 있었다. 헌병들은 이웅평이 돌발적으로 공격할까봐 총을 겨누고 있었고, 반대로 이웅평은 조종석에서 나오면 곧바로 총을 쏠까봐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헌병들도 악의를 갖고 총을 겨눈 것은 아니었고 무슨 돌발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웅평은 몇 분 동안이지만 불안한 대치상황을 깨기 위해 조종석 안에서 손을 들고 "나 할 말 많습니다!!"(=내가 북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거 많으니까 다 말하겠습니다!) 라고 공개적으로 외치면서 투항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국군 관계자가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 안심하고 나오셔도 됩니다." 라고 대답하자, 이웅평은 석연찮은 태도로 믿지 못하고 "나 총에 맞지 않게 해주시오!" 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국군측에서 그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헌병들을 물러가게 했고, 그제서야 이웅평은 조종석 밖으로 나와서 투항, 귀순을 선택한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조사를 받았다.

파일:agressor2-asdfgh1000.jpg

이 사진은 80년대 국군의 날여의도광장에서 열리던 열병식 중 공중분열 장면을 신문 게재를 위해 항공기만 확대해 수정한 사진으로, 다른 미그 19는 중국 공군 조종사가 대만 망명을 위해 한국으로 넘어올 때 타고 온 것이다. J-6(중국제 MiG-19) 항목에 그 명단이 있다.

공산 진영의 군수품을 가지고 올 경우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이 있으며 이렇게 주는 돈을 보로금(報勞金)이라고 하는데 이웅평은 MiG-19기 보로금으로 무려 15억 6천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16] 이를 2023년 기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61억 7300만이다.[출처]

참고로 당시 서울시 대치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2천만 원이었고[18] 라면이 1980년대 당시 100원, 1983년 안성탕면이 고급 라면으로 150원 정도였고, 500원이면 연탄을 3장 정도를 구입할 수 있었으니 당시 15억 원은 어지간한 사람은 꿈도 못 꾸고, 재벌이나 되어야 만져보는 수준의 어마무시한 거금이었다. 당시보다 물가가 엄청나게 오른 2020년대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4월 14일에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무려 130만 명이 운집한 귀순환영대회도 열렸다.
파일:PG-1983-0051-301.jpg 파일:1607A73A4FBB929F20.jpg
이웅평의 기자회견
당시 남한 사회에서는 6.25 전쟁의 공포가 생생하던 시절이고 잊을만하면 한번씩 무장공비가 쳐들어와서 민간인들을 죽였기에 북한군은 비쩍 마르고 독기를 품은 사악한 이미지가 있었는데[19] 이웅평 상위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훤칠한 외모에 체격도 건장했으며 키도 180cm나 되는 말끔한 엘리트 이미지였다. 당시 남한의 2~30대 성인 남성의 평균 키는 170cm가 안 되었기에 그 당시 기준으로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체감상 상당한 장신이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이웅평은 평범한 군인이나 민간인이 아닌 최고 엘리트급인 전투기 조종사였던 만큼 일반화할 순 없었다. 애초 전투기 조종사 자체가 신장 제한 조건이 있어 키 작은 사람은 되려야 될 수가 없는 직종이다. 고학력 사회로 진입한 현대 한국에서 일반 민항기 조종사만 돼도 엘리트 취급받는데, 하물며 군국주의 북한에서 전투기 조종사의 위상은 차원이 다르며 당시 김일성은 전투기 조종사들 이름을 수첩에다가 적어놓고 다녔다고 할 정도니 국보급 엘리트 인사였다.

2.4. 귀순 이후

이웅평은 귀순 한달 뒤 대한민국 공군소령으로 특별임관된 그는 다음 해에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결혼도 하는 등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또한 원조 조선인민공군의 엘리트 파일럿답게 알고있는 기밀사항도 많아서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줬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된 남북관계 속에서 이웅평은 2남 5녀 중 맏아들이던 자신의 망명으로 인해 고통받을 가족 생각에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북한 당국은 그의 부모와 누이들 등 가족들을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하였다. 같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모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부모와 형제들은 완전통제구역, 누이들은 혁명화구역으로 보내졌으며, 부모는 끝내 처형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완전통제구역에 넣었다는 것 자체가 수감이라기보다는 그냥 서서히 죽게 하는 더 악랄한 처형 방식이다. 가족들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자신의 신변의 안전에 대해서도 대단히 두려워했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제품을 쓰게 하고, 가게는 한 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갑자기 아이 아빠가 없어지는 일이 생겼죠. 언제 어떻게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만큼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했어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여성동아 2000년 7월호 아내의 인터뷰 중)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952276-00_01350319.jpg
이철수 대위 귀순에 대해 증언하는 이웅평 대령(진)

2.5. 사망

1996년에 대령으로 진급했고,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및 교관으로 활동하며 귀순해온 이철수 대위를 심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군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2002년 5월 4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소재 국군수도병원에서 간기능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북에 남은 가족들 생각에 지속적으로 폭음을 한 것과, 혹시 모를 테러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을 망가뜨린 원인이라고 한다. 특히 1997년 이한영이 남한에서 암살된 사건이 일어나 이에 굉장한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아래 인용된 아내의 인터뷰를 보면 북한 사회에 대해 지나친 비방을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원인인 듯하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한다느니, 5호담당제(오가작통)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했죠. 5호담당제는 교사나 지식인이 낙후한 농촌 문화를 도시화시키기 위해 5명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것일 뿐이에요. 천 번을 삽질하고 한 번 하늘 쳐다본다는 얘기도, 개별적인 지휘관이야 그런 행동을 시킬 수 있지만 전부가 그런 것처럼 얘기를 해선 안 되죠. 일일이 얘기할 수도 없고, 침묵하자니 간이 성할 리 있었겠어요?" #[아카이브] 원본 기사
그 전에도 간이 상당히 안 좋아서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간 이식수술을 받고 종교에 귀의했었지만, 면역억제제를 투여하지 않았던 탓에 이식받은 간이 거부반응을 일으켜 결국 사망한다. 사람과 사람은 MHC(일종의 세포 주민등록증 내지는 피아 식별띠 같은 존재이다.)가 완전히 동일할 수 없으므로 이식한 장기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평생 투약해야 하는데, 이 경우 면역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의 노출이 쉬워진다. 또한 간, 심장 등 주요 장기를 이식받았을 경우 5등급 장애인 판정을 받기 때문에 군 복무를 할 수 없어 예편하게 된다.

사후 그의 유해는 2002년 5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2묘역에 안장되었다. 그가 타고 온 MiG-19는 북한에 반환되지 않고 그대로 한국에서 보관했으며 국군에서는 해당 MiG-19를 연구하여 한국 공군의 전술을 개량했다. 의외로 당시 북한도 딱히 이걸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1년 뒤인 1984년 소련이 군사지원의 일환으로 MiG-29가 논의중이던 때였고 소련도 멀쩡하던 때라, 북한에선 진짜 Su-27이나 MiG-29로 MiG-19같은 구형 전투기는 대체할만큼 충분히 도입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해당 기체는 현재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실에 전시되어 있어 누구나 볼 수 있다. 네이버 거리뷰

이웅평 대령은 탈북자로서 8번째 대령 진급자이다. 첫 번째는 1950년 4월에 ll-10을 타고 넘어온 이건순 공군 중위로 1974년에 공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2번째는 6.25 다부동 전투 때 귀순한 정봉욱 중좌로 대한민국 육군 대령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 7사단장과 3사관학교장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2018년 작고). 3번째와 4번째는 1955년에 Yak-18 훈련기로 함께 탈북한 북한 공군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이다. 5번째는 1960년에 MiG-15를 타고 귀순했던 정낙현 대한민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소위), 6번째는 1965년 보트를 타고 탈북하여 해군 정훈감을 지낸 이필은 해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해군 대위, 1980년대 초반 작고), 7번째는 1970년에 MiG-15를 타고 넘어온 박순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공군 소좌. 1976년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중령이었으나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는 자료가 있음.), 8번째가 이웅평 대령이고, 9번째가 1983년 5월 귀순한 신중철 육군 대령(귀순 당시 육군 상위)이다. 하지만 신중철 대령은 전역 후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을 어려워하다 중국에서 잠적하는 사고를 쳐서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참조. 그리고 마지막 대령 진급자는 1996년에 귀순했던 이철수 소령이 대령으로 진급했고 2022년에 퇴역했다고 한다.

2.6. 간경화 투병 일화

부인 박선영씨의 눈물의 간병기
[ 펼치기 · 접기 ]


분단의 사선을 넘어왔던 이웅평씨가 이번엔 간경화 말기라는 죽음의 사선을 넘었다. 그런 이씨의 기적같은 생존은 투병생활을 함께 해온 부인 박선영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웅평씨가 간이식으로 건강을 되찾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박선영씨의 간병 과정을 들어보았다.

17년 전 북한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한 조종사 이웅평씨(47). 분단의 사선을 넘어왔던 그가 간경화로 쓰러져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다 기적처럼 생존해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여자의 간을 통째로 달고 다니는 사람은 딱 두 명입니다. 그래서 여성들한테 장난치면서 나도 여자야, 합니다. 간이 여자니 여자지, 뭐."

이웅평 대령은 농담을 할 만큼 건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가 건강을 되찾기까지는 혼신의 힘을 다한 부인 박선영씨(38)가 있었다. 혈혈단신인 남편을 정성을 다해 간병해온 박씨. 어쩌면 이웅평씨보다 할 말이 더 많은 사람은 그일지도 모른다.

"말못하고 긴장하다보니 간이 썩어 문드러지죠"

건강하기만 하던 이씨가 쓰러진 것은 97년 11월. 간이 굳을 대로 굳어 피가 원활하게 순환하지 못해 정맥 중

가장 약한 식도 정맥이 열두 군데나 터지면서 대전에서 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된 것이다.

"입을 벌려 목구멍으로 지름이 2cm 되는 관을 집어넣고 그 관 안으로 또 다른 선을 넣더니 모니터를 보면서 휘젓는데 목이 찢어질듯 아프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요. 그렇게 세 차례나 식도정맥 수술을 했죠."

하지만 그것은 임시변통일 뿐이었다. 이미 간은 70%나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간을 치료할 뚜렷한 치료법도 없었다. 이씨는 퇴원을 서둘렀다. 병원에 있어봤자 별 뾰족한 수도 없는데 병원비만 축내느니 민간요법으로 잘 치료하면 더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면서.

그때부터 박씨의 극진한 간병은 시작됐다. 간에 좋다는 미나리를 집에서 직접 길러 찌개에도 넣고 무치고 볶고, 생즙도 만들었다. 영지버섯이나 상황버섯을 달인 물, 미꾸라지 원액을 달인 물 등 좋다는 것은 다 먹였다. 침도 맞고 쑥뜸도 뜨고, 기 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가구도 옮겨보고 물을 바꿔야 한다기에 이온 정수기도 새로 들여놨다.

"한번은 간에 땅벌 둥지가 좋다고 하기에 3개를 사와 베란다에 뒀어요. 근데 이삼일 지나자 집안이 온통 벌떼로 가득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거라도 소홀히 넘길 수가 없었어요. 할 수 있는 것은 다해봐야 나중에 후회를 안하죠."

사실 이씨는 병원에서 고분고분한 환자가 아니었다. 주사를 맞을 때 무슨 주사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따진 다음에 맞는 환자였다. 그런 이씨인데도 아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었다.

"제가 너무 발버둥치니까 안쓰러웠나봐요.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던지 남편이 잘 따라줬어요."

하지만 박씨의 정성에도 이씨는 먹으면 바로 토해버렸고 겨우 소화를 시켰나 싶으면 심한 설사를 했다. 황달기마저 생기면서 고열과 한기에 수시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러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며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전북 정읍에 좋은 요양소가 있다기에 내려갔다가 병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요양소는 깊은 산속의 황톳집으로 주인 할머니가 직접 채소를 길러 음식을 해주는 곳이었다.

"처음엔 호전되는 듯했어요. 음식도 잘 먹고, 일주일 뒤에 가보니 얼굴에 부옇게 살이 올라 있더라고요. 근데 일주일 뒤에 가보니 얼굴이 시커멓게 되고, 발은 짓물러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배에 물이 차면 모든 음식에 간을 해선 안 되는데 그동안 남편은 짭짤하게 간이 밴 음식을 먹었던 거예요.

오랜만에 간이 밴 음식을 먹었으니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통합병원으로 실려갔다. 오른쪽 늑막에 물이 차서 숨을 쉬기 힘든 상황에서 심장에도 물이 차기 시작했다.

이씨는 이때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다고 한다.

"남편은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가족들에게 하듯 간호사들에게 신경질이라도 부리면 그 뒷수습은 박씨의 몫이었다. 무엇보다 베개나 시트 밑에서 한움큼씩 나오는 약을 볼 때면 이를 악물고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만약 당신이 이 땅에서 태어났으면 그렇게 의심할 필요도 없을 거야. 긴장하면서 살 필요도 없었을 테고, 간경화 따위의 병에 걸리지도 않았겠지. 그냥 그렇게 반듯하게 자라서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집안의 자랑이 되었을 텐데.' 침상에 누운 남편을 바라보는 박씨의 마음은 한없이 아려왔다.

스물두살에 이씨와 결혼한 박씨는 일찌감치 남편에 의존해 뭔가를 한다는 것은 포기했다. 어쩌면 그것은 이씨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은제품을 쓰게 하고, 가게는 한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떡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갑자기 아이 아빠가 없어지는 일이 생겼죠.

언제 어떻게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만큼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했어요. 생명의 위험을 느낀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그게 습관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는 것은 박씨에게 큰 스트레스였다. 그런 스트레스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테러에 대한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는 이씨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에 대한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들에 침묵해야 하는 것 또한 곤욕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한다느니, 5호담당제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했죠. 5호담당제는 교사나 지식인이 낙후한 농촌문화를 도시화시키기 위해 5명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것일 뿐이에요.

천번을 삽질하고 한번 하늘 쳐다본다는 얘기도 개별적인 지휘관이야 그런 행동을 시킬 수 있지만 전부가 그런 것처럼 얘기를 해선 안되죠. 일일이 얘기할 수도 없고, 침묵하자니 간이 성할 리 있었겠어요?"

그렇게 이씨는 분단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장지 정하고 장례 치를 준비해

이씨의 상태는 여전했다. 대소변도 보지 못하고 겨우 눈동자만 굴리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급기야 병원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길어야 하루 이틀이라며 영안실 시설이 좋은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군대에서는 1계급 특진에 국립묘지에 묻는 계획까지 마련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다시 치료가 시작되었고 간이식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씨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사실 이씨는 이미 책을 통해 간이식은 성공해도 살 수 있는 기간이 짧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도 없다고 알고 있었다.

"집을 망하게 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자유민주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지만 경제력이 없을 때 기회의 평등이란 없잖아요. 차리라 아이들한테 경제적 여유를 갖도록 하고 가는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막무가내로 간이식을 거부하는 이씨를 박씨는 끈질기게 설득했다.

간이식 후 관리를 잘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결국 이씨도 마음을 바꿨다. 이식을 결심하면서 수술을 위해 체력도 단련했다. 다음은 이식할 수 있는 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식할 간이 나타났지만 여자의 간이어서 성공확률이 낮았다.

"간이식 수술을 하기 6시간 전에 알려주더군요. 여자의 간을 남자에게 이식할 경우 성공률이 20% 정도밖에 안된다고요."

이씨는 "수술하다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하고 의과대학 실습용으로 시신을 쓰라"는 말과 "통일을 못보고 죽는구나"하는 말을 남기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에 들어간 지 15시간이 넘어서자 박씨는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여자 분이 장기를 다 기증해 일곱 사람이 모두 수술을 같이 시작했어요. 다른 사람은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가는데 혼자만 불이 안 꺼지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전광판이 꺼졌어요. 그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면서 '잘못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제정신이 아니었죠."

다행히 이씨는 무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술 1, 2주 후면 회복실로 옮겨가는 게 대부분인데 이씨는 중환자실에서 두달을 보냈다. 쇼크 상태를 여러번 맞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밤 12시가 넘으면 쇼크 상태가 오는 거예요. 자정만 지나면 머리칼이 다 설 정도로 초긴장 상태였죠. 언제 부를지 모르니까 대기실에 들어가 쉬지도 못하고 복도에 앉아서 밤을 꼬박 샜어요."

그런데다 이씨는 수술 후 6일이 지나면서 약이나 음식물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또 바늘이며 호스 등을 잡아 뽑아버려 손발을 다 묶어놓기도 했다.

"환각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느낀 거예요. 의사들이 자기를 고문했다고 하기도 하고, 누가 찾아오지 않았냐고 생판 모르는 사람 이름을 대기도 하고." 심지어 아내조차 의사랑 한통속이라며 의심했다.

이씨는 아이들을 본 후에야 약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씨가 병원 밥을 거부하는 바람에 박씨는 세끼 식사를 집에서 만들어 날라야 했다. 병원에서 새벽 4시에 나와 아침 준비를 해서 아침 7시에 밥을 먹이고, 다시 나와 점심을 준비했다.

"운전하면서도 온통 어떤 음식을 먹일까, 원기 회복에 좋은 게 뭘까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이런 힘든 과정을 헤쳐가면서 이씨의 건강이 차츰 나아졌다.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회복실에서 집으로 옮겨왔다.

"이북에 계신 형제, 고모들
이름 줄줄이 외워요"

간혹 부부를 두고 정보기관에서 연결해준 것 아니냐고 묻는다. 물론 아니다. 박씨는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로 이씨가 아버지를 집에 모셔다드릴 때 이씨와 첫 대면을 했다. 당시 박씨는 대학 3학년인 스물두살. 이씨와는 아홉살 차이다.

"결혼 전 친구들은 무서워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며 놀라요. 하지만 전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이북에서 왔다는 것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줄도 몰랐다니까요. 게다가 처음에 남산타워에 갔는데 음료수 4개와 쥐포를 엄청 많이 사왔어요. 여자 앞에서 폼잡는 것도 없고 순수하더라고요."

박씨는 처음 결혼했을 때에는 전쟁나는 꿈과 도망다니는 꿈만 꿨다고 한다. 아기 낳고 나서는 아이들에 대한 불안감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결혼한 지 10년쯤 되어서야 테러를 당하든 어떻게 되든 다 팔자려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아이들 교육은 박씨가 전담하다시피 한다. 이씨는 초기에 아이들은 저절로 큰다느니, 뭐 하나 하는데 돈 들여가며 극성을 부린다느니 하며 가끔 참견을 하더니 요즘은 그것도 뜸하다. 하지만 늘 마음 졸여야 되는 게 아이들 교육이다. 해마다 홍보용 전단사진을 찍을 때는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곤혹스럽기도 했지만 잘 자라준 다빈이(15)와 준기(14)가 부부는 대견하기만 하다.

"아이들을 안고 있으면 몸에 전기가 흘러요. 그리고 아버지 생각이 나지요. 아버지도 나를 이렇게 키웠을 텐데, 아버지한테 내가 죄를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효가 먼저고 충이 뒤인데 젊은 기분에 충과 효를 혼동하고 산 거죠. 그건 내 죄예요."

하지만 귀순을 선택한 것은 후회가 없다고 한다. 단지 남한 정권과 북한 정권, 두개의 정권 중에서 남한정권을 선택했을 뿐이며, 북한의 노동당에는 반역했지만 조국을 배반한 것은 아니라고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한다.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얘기가 나오자 이들 부부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이미 박씨는 얼굴도 모르는 7명의 시동생은 물론 고모할머니 이름까지 다 외워두었다. 아이들한테도 건강하게 자라야 통일이 되었을 때 이북의 친척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요즘 이씨는 건강을 위해 자전거 타기를 한다. 골프 한번 치는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자전거를 한대 사면 평생을 탈 수 있는데다 운동 효과도 좋으니 자전거타기 만한 운동이 없다고. 그리고 이제 막 새로운 일을 하나 시작했다.

"수기집 <기수를 삶으로 돌려라>의 수익금을 소아 간질환 환자들에게 기증하기로 했어요. 나도 남한테 받았으니 뭔가를 남에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3. 여담

땅굴파고 토꼈나. 미그기 타고 날랐나.


[1] 198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북한 탈출 수기에서 자신의 생일을 밝혔다.[이북5도]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청계리[3] 이전에도 간이 안 좋아서 겨우 간 이식 수술을 마치고 복귀했으나, 면역 억제제를 투입하지 않아 간이 거부 반응을 일으켜 사망했다.[4] 군번 68680[5] 당시 사회안전부(대한민국 경찰청에 해당) 소좌[6] "중규"로 표기된 자료도 있다.[7] 대한민국 국군의 계급 체계와 비교하면 중위대위 사이 정도에 위치하는 계급이다.[8] 이웅평이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올 때 발령된 경계경보는 공습이 예상되니 대피를 준비하라는 뜻이다. 많이들 기억하는 한여름 날의 소동은 야구 봉황대기 결승전 날에 벌어진 중공군 조종사 귀순이었는데, 인천 지역이 폭격당하고 있다는 오보가 전해지며 난리 났었다. 시민들이 전쟁 나는 줄 알고 지하철역이나 지하 대피소로 대피하고 사재기가 벌어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귀순 조종사라고 하면 이웅평이 워낙 유명하니 이 소동을 이웅평 때문에 벌어졌다고 착각하기도 하며, TV조선에 나온 기자도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고 언급했다. 당시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한번 놓친 뉴스는 다시 보기가 힘들었기에 무더운 한여름 날의 소동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사람들은 83년 귀순 조종사라고 이웅평이 자주 나오니 연결시켜 기억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83년으로 시기가 겹쳤기에 더욱 착각하기가 쉬워 기억 왜곡이 일어났다.[9] 당시엔 지금처럼 인터넷 시대가 아닌지라 한번 지나간 뉴스는 다시 보기가 힘들어 입으로 전해지다 와전이 되기가 쉬운 환경이었다. 이웅평의 인터뷰를 본 사람이 "라면 봉지 보고 귀순했다 카더라"라고 전하는 과정에서 살이 덧붙여져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의외로 게시판 등에서는 이 썰이 팩트처럼 전해지기도 하는데, 공식 팩트는 삼양 라면 봉지의 교환 문구에 대한 언급이었다.[10] 두 전투기의 간격이 좁아서 보이지 않을 뿐 아무 이상 없으니 안심하라는 용어다.[11] 실제로도 엔테베 작전을 참고하여 따라한 것이다.[12] 페치카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남한에서도 무려 2000년 초에 병사들이 석탄가루를 물에 개어서 쓰는 자료화면이 있긴 하다. 다만 징병한 병사들이 쓰는 것과 국가의 최고 엘리트인 공군 조종장교들이 집에서 석탄가루를 쓰는 것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2000년 초 우리나라 공군 조종장교들이 집에서 어떻게 살았을지를 잘 생각해보자.[13] 북한에선 강인덕과 접촉할 때마다 이 방송을 중단해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다. 이에 강인덕이 북한이 대남방송을 중단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북한 측은 자기네는 대남방송을 하지 않으며 다 남조선 지하조직의 소행이라 자기들과 무관하다고 구라를 쳤지만 강인덕이 해당 방송이 나오는 기지국의 위치가 황해도에 있음을 지적하자 당황하며 알아보겠다고 했다고. 2024년 현재도 자유아시아방송에서 해당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14] 북한 고위 외교관 출신 고영환도 탈북한 이유가 황당한데, 당시 다른 국가의 독재자가 인민들의 봉기에 처형당한 뉴스를 보면서 "우리 공화국에 이런 일이 없어야 되는데" 라며 걱정스럽게 말했는데, 바로 그 말이 보고되어 추적조가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고영환은 북한에 엄청 충성하며 김일성 통역관까지 했었고, 그 문제의 발언(?)도 김일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성심에 걱정한 것이었음에도, "감히 최고존엄을 저딴데다 비유했다" 라며 바로 분노한 추격조가 고영환의 머리채 잡고 보위부로 끌고 가기 위해서 출동했다. 북한에 평생동안 충성한 결과가 이러니 이웅평처럼 배신감을 느끼면서 크게 실망할 법도 하다. 북한같은 독재체제에선 비판적인 생각보단 자기 검열에 에너지를 쏟게 되어 다들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살벌하게 충성 경쟁을 벌이는 현실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다.[15] 참고료 요격은 단순히 격추하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정된 경로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도 요격이라 한다. 이를테면 러시아Tu-95일본 방공식별구역에 띄워 일본을 엿먹이던 때에 F-15, F-4 등이 출동해 내쫓아버린 것도 요격. 물론 이런 요격 상황의 경우 굳이 격추하지 않더라도 임무 수행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대비한 경우이다.[16]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시행령 8조 3항: 전투폭력기 = 황금 20,200그램-황금 144,200그램 또는 이에 상당한 금액. 최대 금액인 144,200그램은 2022년 12월 말 기준 108억원이 넘는다.[출처] 한국은행경제통계시스템.[18] 다만 이 당시 강남은 지가가 지금수준처럼 뛰기 직전의 개발 상태였다.[19] 이걸 과장하여 당시엔 남한에서 북한 사람들을 뿔달린 도깨비로 생각했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는 똘이장군 류의 만화와 반공 포스터를 접한 현대인들이 당시엔 북한인을 이렇게 생각했었나보다고 착각한 오류다. 오히려 이웅평이 귀순한 1983년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2015년 유네스코에서 1983년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했다. 당시엔 이산가족이 엄청나게 많던 시절이었기에 이산가족 방송은 전국민적 관심사였으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어느 정도 진심이던 분위기였다. 지금도 김씨 3대를 증오하더라도 일반적인 북한 주민과는 선을 단호하게 그으며 별개의 존재로 보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이산가족들 대다수가 현역이던 당시에는 이러한 의식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장 군사정권 시절 반공 교육의 취지도 북한괴뢰정권을 무찔러 괴물화된 김일성으로부터 북한 동포를 구해내자였으며, # 이웅평 이전에도 노금석 상위나 이운용 상위, 이인석 소위 등 목숨 걸고 탈북한 군인들은 귀순용사로써 극진한 대접을 받고 보로금을 지급받았으며, 군사정권 시절에도 같은 기사에 '북괴'와 '북한 동포'라는 두 단어를 함께 씀으로써 북한 수뇌부와 북한 주민을 별개로 보는 기사들이 수두룩하다. 1983년이면 지구촌 축제인 1988 서울 올림픽도 코앞인데, 같은 조선인이 불과 수십년 만에 뿔달린 외계인으로 진화했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아카이브] [21] 인천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81년에 인천직할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되었다.[22] 익명의 탈북자의 과장된 증언이 아닌, 김만철주성하의 증언으로 교차검증까지 된 분명한 사실이다.[23] 당시 한국은 오늘날의 북한처럼 여당 민주자유당관제야당만 허용된 사실상의 일당제 국가였다.[24] 당시에는 군부대 및 관공서에 군 통수권자/행정 총 책임자인 국가원수를 상징하는 의미로 "존영"이라 불리는 대통령 초상화를 걸었다.[25] 참고로 이쪽도 공산정권 시절에는 그 북한이 양반일 수준으로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로 악명이 높았다.[26] 안기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라면을 아주 맛깔나게 먹으며 극찬한다. 그리고 왜 귀순했냐고 심문받을 때 북한이 싫어서 그랬다고 하지만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한 김정도(정우성)의 의심에 정말 억울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