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평 李雄平 | Lee Woong-pyong | |||
<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출생 | 1954년 9월 28일[1] | ||
평안남도 대동군 청계리[이북5도] (現 평양시 화성구역 청화1동) | |||
사망 | 2002년 5월 4일 (향년 47세)[3] |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2묘역-211판-4304호 | ||
본관 | 수안 이씨 | ||
복무 | 조선인민군 공군 | ||
1970년 ~ 1983년 | |||
대한민국 공군[4] | |||
1984년 ~ 2002년 5월 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부모 | 아버지 이광정[5], 어머니 맹성월 | |
형제자매 | 누나 2명, 여동생 3명, 남동생 1명 | ||
배우자 | 박선영 | ||
자녀 | 딸 이다빈, 아들 이준기[6] | ||
학력 | 김책공군대학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36기) | ||
임관 | 특별임관 | ||
최종 계급 | 상위 (조선인민군 공군) 대령 (대한민국 공군) | ||
최종 보직 | 공군대학 교수 | ||
주요 보직 | 조선인민군 공군 제1비행사단 책임비행사 대한민국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대한민국 공군대학 교관 | ||
상훈 | 보국훈장 천수장 | ||
신체 | 180c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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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탈북민 출신 군인.본래 북한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던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7]였으나, 1983년 2월 25일 인민군 미그-19기를 조종하여 대한민국 영공으로 탈북해 귀순했다. 탈북 후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특별임관하였으며, 이후 공군에서 18년간 복무하며 대령으로 진급했지만 200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2. 생애
1954년 9월 28일에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청계리(現 평양시 룡성구역 청계동)에서 아버지 이광정과 어머니 맹성월 사이에서 7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인민군 공군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상위로 진급한 후 제1비행사단 책임비행사로 복무하던 1983년 돌연 자신이 조종을 담당하는 전투기를 몰고 북한 영공을 이탈해 대한민국으로 향했다.2.1. 전투기 귀순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탈북 귀순용사들 중에서 가장 넓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북자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 케이스인데, 그 이유는 북한 공군 장교가 자기 비행기를 몰고 탈북한 드문 사례 중 하나이고(6건), 한국에 가져온 기종이 J-6(MiG-19 중국 라이센스 생산형)기로 동기종 최초였다. 또한 그가 탈북할 때 북한군의 기습공습인 줄 알고 전국에 경계경보가 발령되었기 때문이다.TV조선에 따르면 1983년 2월 이웅평이 탈북할 때 공습경보가 울렸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확히는 경계경보였다. 한국에서 휴전 이후 처음 울린 공습경보는 1983년 8월 7일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소속 손천근 조종사가 망명을 시도했을 때라고 한다. 한번 일어나기도 힘든 사태가 83년에 불과 6개월 만에 연달아 벌어졌기에 이 두 귀순 사건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8] 중국 공군보다는 이웅평 쪽이 아무래도 남북이 체제전쟁을 벌이던 시절에 더 선전 면에서도 효과적이었기에 이웅평이 부각되면서 두 사건을 이웅평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웅평 용사의 의거환영 및 북괴남침책동 분쇄궐기대회 등 성대하게 맞이했다.
앞서 비행기를 몰고 탈북한 최초의 사람은 1950년에 Il-10을 몰고 귀순한 이건순 중위이며, 6.25 전쟁 직후 1953년 노금석이 MiG-15기를 몰고 귀순한 것이 유명하다. 1955년에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가 Yak-18기를 몰고 귀순, 1960년에 정낙현이 귀순, 나머지는 각각 이웅평과 이철수다. 귀순 의도는 아니었지만 1970년에 불시착한 박순국 소좌의 경우 설득으로 귀순을 결심한 사례도 있다.
2.2. 귀순을 결심한 이유
전투기를 직접 몰고 영공을 통해 귀순하며 대한민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뒤 비로소 밝힌 귀순 사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어느 날 함경북도 경흥군의 바닷가에서 이상한 비닐 봉지를 줍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삼양라면 봉지로, 당시 그는 라면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림 등을 보고 국수라고 추측하며 포장지에 적힌 글을 읽어나갔는데 봉지에 적혀 있던 글귀는 이웅평 상위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판매나 유통 과정에서 변질, 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 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라는 문구를 읽었다. 그는 '남조선은 이런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소비자 인민의 편의를 도모하는구나. 그렇다면 인민의 지상락원이라던 우리 공화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충청타임즈(2016)에 수필가 박경희가 기고한 칼럼에서는 이웅평이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라면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계란을 풀어 넣는 게 좋다는 글귀가 있었다. 그건 남쪽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달걀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때 나는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다만 제도권 언론에는 딱히 나오지 않는 내용이며, 그나마 유사한 내용이라면 동아일보(2006)에 "남한 당국의 어떠한 선전물이나 대북 방송보다 계란과 파를 넣은 먹음직한 라면 사진이 더 강렬한 인상을 준 듯하다."란 구절이 있다. 사실 이웅평이 귀순 후 여러 언론과 인터뷰하거나 귀순 과정을 연재하기도 하고 회고록을 쓰기도 했는데, 오래된 관계로 팩트 체크가 쉽지 않다. 다만 역사저널에서 전문가는 이 썰에 대해 부정했으니 이웅평의 인터뷰가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9]
탈북자들이야 많지만 전투기 탈북이라는 흔치 않은 사례로 더 주목을 받았다. 한국은 1989년 벌어진 임수경 방북 사건처럼 북한으로는 직접 갈 수 없어도 타국을 경유해 가는 방법도 있고 합법적으로 한국을 벗어날 자유가 있기에 번듯한 공군 장교가 굳이 전투기를 몰고 불법으로 탈출할 이유가 없다. 외국에 있다 보면 향수병이 생기곤 하는데 유승준처럼 고향길이 막히면 괴롭기에 이민을 꿈꾸는 한국인들도 합법적인 이민 절차를 밟아 떠난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 북한은 우물을 탈출할 수 있는 합법적인 루트가 봉쇄되었기에 전투기를 몰고 탈출하자는 극단적인 결심을 하고야 만다.
항공 전문가인 소승호 기장에 따르면 당시 전투기 4대의 편대였다면 나머지 3대의 눈을 피해야 하기에 귀순을 결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탈북 디데이로 잡은 날은 최소 편대인 2대만 출격하는 날이었고, 이웅평이 뒤에 가는 상황이었기에 앞의 전투기 몰래 빛의 속도로 빤스런(...)을 하며 비교적 쉽게 탈북에 성공했다. 선두기를 몰던 편대장의 다급한 호출이 있어서 혹시 눈치채고 쫓아올까봐 불안했다는데, "완전하다"[10] 라고 시크하게 대답한 후 거리를 완전히 벌리면서 유유히 '지상락원'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이웅평의 절친 임영선은 좀 더 구체적으로 트리거가 된 사건을 소개했다. 이웅평이 평소 몰래 한국 라디오를 듣고 절친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게 높으신 분에게 흘러 들어가서 "너 이제 마지막 비행이 될 수 있다." 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다만, 가뜩이나 조종사들의 탈북을 경계하던 북한에서 그렇게 경고해버리면 '잃을 게 없다'의 심정으로 탈북할 것이 뻔한데, 어차피 체포할 거라면 굳이 그렇게 "너 돌아오면 끝이다!" 라면서 경고하고 전투기를 태워 보냈겠느냐면서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웅평의 친한 동료들이 "너는 이제 보위부에게 잡힐 수도 있으니 체포당하기 전에 빨리 도망쳐라." 라고 몰래 귀띔을 해줬을 가능성도 있다.
탈북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관문이 휴전선 인근의 북한 미사일 기지인데, 지대공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수원까지 닿기 때문에 거기에서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위험하더라도 초저고도 비행[11]으로 탈출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한영 암살 사건의 당사자인 금수저 이한영도 탈북 동기가 '미국 여행을 한 번 가보고 싶어서(…)' 였듯이, 상류층의 탈북 동기는 먹고 사는 것을 넘어 자유에 대한 동경인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엘리트 계층인 이웅평은 특히나 전투기 조종사로서 '리얼 헬조선' 지상감옥 북한에서 한 번씩 하늘을 향해 구름까지 날아올라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직업이다 보니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북한을 탈출하는 것이 가능한지라 새로운 세상에 대해 선망하며 마음이 뜨기가 용이한 환경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일반 북한인들은 삐라나 한류를 접하면서 한국에 대한 동경이 생겨도 탈북하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기에 체념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웅평은 조종사였기 때문에 상황이 달랐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북한 인민들보다는 나은 삶이었을 뿐이고, 별다른 희망도 없고 모든 것이 통제된 감옥같은 일상이었기에 여차하면 순간이동하듯 탈출할 수 있는 특성상 유혹에 넘어가기가 쉬운 상황이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나온 상류층 탈북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자유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는 것인데, 이웅평 역시 쳇바퀴 돌아가듯 지루하고 팍팍한 삶에서 뭔가 새로운 모험을 해볼 유혹이 들었을 수 있고, 우연히 본 라면 봉지가 탈북 유혹에 불을 질렀고 급기야 탈북에 성공했다.
삼양라면 운운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조작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훗날 정부가 시킨 것이라고 양심고백을 하거나 번복한 적도 없으니 정부가 대본을 줬다는 설은 단지 '당시 사회 분위기상 그렇지 않았겠느냐' 라는 추측일 뿐이다. 일부에선 라면은 북한에서도 즉석국수라고 해서 생산한다며 "이웅평이 라면 봉지를 처음 봤다고 거짓말 했다" 라고 조작의 근거라며 제시하나 "라면이란 것을 처음 봐서 감동했다"라고 한 적이 없다. 단지 라면에 성분 분석표가 투명하게 기재되어 있고 변질된 제품을 가져 오면 교환해준다는 문구를 보고 "한국은 가난하고 인민들을 착취하는 나쁜 자본국가라고 배웠는데 인민들의 편의도 배려하고 경제적으로 잘사는가보다"나 계란을 넣어먹으면 더 맛있다는 글귀를 보고 "그럼 한국은 이런 즉석음식을 사먹는 평범한 사람도 달걀을 쉽게 먹을 수 있다는 건가? 한국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구나"라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북한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서 고난의 행군이 벌어지는 가난한 실상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즉, 라면은 "북한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라면서 회의를 느끼게 하는 트리거로 작동한 것일 뿐이고, 고작 남한에서 라면 한 그릇이나 먹고 싶어서 귀순을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애시당초 명색이 전투기 조종사인데 굶주려 탈북할 계층이 아니다.
물론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정부가 어느 정도 인터뷰에 마사지를 했을 개연성도 있긴 하지만, 가난한 북한 사회의 처지에 회의감이 든 것 자체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민들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고위급 인민군 장교였던 비행군관으로 근무하였지만, 이런 사람조차 난방을 하려면 퇴근 후 배급받은 석탄가루를 물에 개어서 진흙과 섞는 식으로[12] 조개탄(일종의 연탄)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곳이 당시의 북한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고급 인력이라 보급해 주는 것이지, 그 외의 부대나 주민들은 땔나무를 알아서 구해야만 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남한에서는 돈만 있으면 공장에서 완제품으로 생산된 양질의 연탄을 구입할 수 있었으며, 1980년대 초중반 당시의 500원 정도면 좋은 연탄을 3장 정도를 구입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1980년대 초반 남한의 주택 난방은 연탄에서 석유나 가스 보일러로 전환되던 시점이었고, 무엇보다 조종사같은 엘리트 고급 인력들은 연탄 같은 건 난방으로 안 썼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의 남한은 조종사들이 민항사로 취업하고 연봉이나 처우가 어느 정도 나아진 후의 상황이고 군대의 관사나 주택에서 거주하던 조종사들은 소령까지는 기름 보일러를 썼다고 한다. 물론, 북한은 기름보일러는 커녕 군용 장비에 들어가는 석유도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또한 이웅평은 비행기 라디오로 남한의 방송을 몰래 청취했다고 밝혔는데, 이웅평과 친하게 지냈던 고영환에 따르면 특히 강인덕이 진행하는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를 매우 재밌게 들었고 탈북을 결심하는데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13] 사실 북한군 장교들은 남한방송을 청취하는 것 자체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북한에서는 그와 같은 신분이라면 남한 방송을 보다 걸리면 일반 감옥인 교화소와는 다른 관리소라는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웅평은 남한 라디오를 청취하며 이것저것 아무거나 말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 당시가 1983년, 즉 제5공화국 시절의 남한에서도 땡전뉴스와 보도지침으로 대표되는 언론 탄압이 대놓고 자행되던 시기였는데도, 그런 남한 언론조차 북한 언론에 비해서는 훨씬 자유로워보였다는 소리다.
만약 북한에서 대학생들이 김정은 비판 벽보를 붙이고 김정은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대학생이 카메라를 향해 "김돼지!" 외치는 장면이 전파되고 그 학생은 물론 가족들도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은 채 멀쩡히 살아있고 실질적인 야당 세력이 존재하는 수준만 돼도 '평양의 봄'이 찾아왔다고 느낄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14] 결국 이웅평은 라디오를 통해 남한의 경제사정도 어렴풋이 파악하고 "공산주의로는 절대 시장경제를 이길 수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거기다 당시 이웅평은 북한의 군생활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왔었다. 북한에서 비행교관같은 고위군관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탈북할 수가 있었고 열악한 북한 공군의 특성상 누가 큰 맘 먹고 전투기를 타고 도망가면 제지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사상교육이 매우 빡센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남한의 경우는 정훈교육이 복무신조나 조금 외우고 교육자료나 몇 번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수준의 정도인 것과 다르게 북한에서는 강령부터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모두 외워야 하며 시험도 보고 점수가 제대로 안 나오면 진급에 불이익을 주고 자아비판이나 한답시고 내리갈굼이나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스트레스와 함께 당시의 북한 체제에 대한 회의감과 자신이 수령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으로 인해 탈북을 선택하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이웅평은 결국 전투기의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2.3. 귀순 당시 상황
1983년 2월 25일 당시 한국에서는 팀 스피릿 훈련이 진행되었다. 이에 북한에서는 준전시상태에 해당하는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이날 훈련을 위해 오전 10시 30분쯤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MiG-19 편대 중 그의 전투기는 편대를 이탈하여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추격하는 북한기들을 따돌리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였다.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고도 50~100m를 유지하면서 시속 920㎞의 전속력으로 남하, 10시 45분 황해남도 해주시 상공을 지나 연평도 상공의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입했다. 이에 초계비행 중이던 한국의 F-5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다.[15]
남한의 F-5가 따라붙자 이웅평은 투항하겠다는 의사의 표시로 MiG-19의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른바 '뱅크 기동'이라 불리는 이 기동 방식은 군인을 포함한 항공 업무 종사자들이 적기 등을 만나거나 할 경우 귀순, 항복, 교섭 등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는 국제 공용 표현으로, 육상전이나 해상전의 백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웅평의 뱅크 기동을 확인한 F-5는 미그기를 유도하여 제10전투비행단이 있는 수원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시켰다.
파일:이웅평_귀순.jpg |
수원비행장에 착륙한 이웅평 |
결국, 이웅평은 몇 분 동안이지만 불안한 대치상황을 깨기 위해 조종석 안에서 손을 들고 "나 할 말 많습니다!!"(=내가 북한에 대해서 알고 있는거 많으니까 다 말하겠습니다!) 라고 공개적으로 외치면서 투항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국군 관계자가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 안심하고 나오셔도 됩니다." 라고 대답하자, 이웅평은 석연찮은 태도로 믿지 못하고 "나 총에 맞지 않게 해주시오!" 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국군측에서 그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헌병들을 물러가게 했고, 그제서야 이웅평은 조종석 밖으로 나와서 투항, 귀순을 선택한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조사를 받았다.
이 사진은 80년대 국군의 날에 여의도광장에서 열리던 열병식 중 공중분열 장면을 신문 게재를 위해 항공기만 확대해 수정한 사진으로, 다른 미그 19는 중국 공군 조종사가 대만 망명을 위해 한국으로 넘어올 때 타고 온 것이다. J-6(중국제 MiG-19) 항목에 그 명단이 있다.
공산 진영의 군수품을 가지고 올 경우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이 있으며 이렇게 주는 돈을 보로금(報勞金)이라고 하는데 이웅평은 MiG-19기 보로금으로 무려 15억 6천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16] 이를 2023년 기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61억 7300만이다.[출처]
참고로 당시 서울시 대치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2천만 원이었고[18] 라면이 1980년대 당시 100원, 1983년 안성탕면이 고급 라면으로 150원 정도였고, 500원이면 연탄을 3장 정도를 구입할 수 있었으니 당시 15억 원은 어지간한 사람은 꿈도 못 꾸고, 재벌이나 되어야 만져보는 수준의 어마무시한 거금이었다. 당시보다 물가가 엄청나게 오른 2020년대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4월 14일에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무려 130만 명이 운집한 귀순환영대회도 열렸다.
이웅평의 기자회견 |
2.4. 귀순 이후
이웅평은 귀순 한달 뒤 대한민국 공군의 소령으로 특별임관된 그는 다음 해에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결혼도 하는 등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또한 원조 조선인민공군의 엘리트 파일럿답게 알고있는 기밀사항도 많아서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줬다고 한다.하지만, 이 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된 남북관계 속에서 이웅평은 2남 5녀 중 맏아들이던 자신의 망명으로 인해 고통받을 가족 생각에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북한 당국은 그의 부모와 누이들 등 가족들을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하였다. 같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모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부모와 형제들은 완전통제구역, 누이들은 혁명화구역으로 보내졌으며, 부모는 끝내 처형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완전통제구역에 넣었다는 것 자체가 수감이라기보다는 그냥 서서히 죽게 하는 더 악랄한 처형 방식이다. 가족들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자신의 신변의 안전에 대해서도 대단히 두려워했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은제품을 쓰게 하고, 가게는 한 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떡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갑자기 아이 아빠가 없어지는 일이 생겼죠. 언제 어떻게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만큼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했어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여성동아 2000년 7월호 아내의 인터뷰 중)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여성동아 2000년 7월호 아내의 인터뷰 중)
이철수 대위 귀순에 대해 증언하는 이웅평 대령(진)
2.5. 사망
1996년에 대령으로 진급했고,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및 교관으로 활동하며 귀순해온 이철수 대위를 심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군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2002년 5월 4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소재 국군수도병원에서 간기능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북에 남은 가족들 생각에 지속적으로 폭음을 한 것과, 혹시 모를 테러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간을 망가뜨린 원인이라고 한다. 특히 1997년 이한영이 남한에서 암살된 사건이 일어나 이에 굉장한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아래 인용된 아내의 인터뷰를 보면 북한 사회에 대해 지나친 비방을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원인인 듯하다."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한다느니, 5호담당제(오가작통)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했죠. 5호담당제는 교사나 지식인이 낙후한 농촌 문화를 도시화시키기 위해 5명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것일 뿐이에요. 천 번을 삽질하고 한 번 하늘 쳐다본다는 얘기도, 개별적인 지휘관이야 그런 행동을 시킬 수 있지만 전부가 그런 것처럼 얘기를 해선 안 되죠. 일일이 얘기할 수도 없고, 침묵하자니 간이 성할 리 있었겠어요?" #[아카이브] 원본 기사
그 전에도 간이 상당히 안 좋아서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간 이식수술을 받고 종교에 귀의했었지만, 면역억제제를 투여하지 않았던 탓에 이식받은 간이 거부반응을 일으켜 결국 사망한다. 사람과 사람은 MHC(일종의 세포 주민등록증 내지는 피아 식별띠 같은 존재이다.)가 완전히 동일할 수 없으므로 이식한 장기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평생 투약해야 하는데, 이 경우 면역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의 노출이 쉬워진다. 또한 간, 심장 등 주요 장기를 이식받았을 경우 5등급 장애인 판정을 받기 때문에 군 복무를 할 수 없어 예편하게 된다. 사후 그의 유해는 2002년 5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2묘역에 안장되었다. 그가 타고 온 MiG-19는 북한에 반환되지 않고 그대로 한국에서 보관했으며 국군에서는 해당 MiG-19를 연구하여 한국 공군의 전술을 개량했다. 의외로 당시 북한도 딱히 이걸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1년 뒤인 1984년 소련이 군사지원의 일환으로 MiG-29가 논의중이던 때였고 소련도 멀쩡하던 때라, 북한에선 진짜 Su-27이나 MiG-29로 MiG-19같은 구형 전투기는 대체할만큼 충분히 도입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해당 기체는 현재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실에 전시되어 있어 누구나 볼 수 있다. 네이버 거리뷰
이웅평 대령은 탈북자로서 8번째 대령 진급자이다. 첫 번째는 1950년 4월에 ll-10을 타고 넘어온 이건순 공군 중위로 1974년에 공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2번째는 6.25 다부동 전투 때 귀순한 정봉욱 중좌로 대한민국 육군 대령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 7사단장과 3사관학교장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2018년 작고). 3번째와 4번째는 1955년에 Yak-18 훈련기로 함께 탈북한 북한 공군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이다. 5번째는 1960년에 MiG-15를 타고 귀순했던 정낙현 대한민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소위), 6번째는 1965년 보트를 타고 탈북하여 해군 정훈감을 지낸 이필은 해군 대령(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해군 대위, 1980년대 초반 작고), 7번째는 1970년에 MiG-15를 타고 넘어온 박순국 공군 대령(귀순 당시 공군 소좌. 1976년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중령이었으나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는 자료가 있음.), 8번째가 이웅평 대령이고, 9번째가 1983년 5월 귀순한 신중철 육군 대령(귀순 당시 육군 상위)이다. 하지만 신중철 대령은 전역 후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을 어려워하다 중국에서 잠적하는 사고를 쳐서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참조. 그리고 마지막 대령 진급자는 1996년에 귀순했던 이철수 소령이 대령으로 진급했고 2022년에 퇴역했다고 한다.
2.6. 간경화 투병 일화
부인 박선영씨의 눈물의 간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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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담
- 수많은 탈북 귀순용사들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고 폭넓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대략 50대 이상의 연령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다른 귀순용사는 몰라도 '이웅평'이라는 이름 석자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전투기를 몰고 귀순하면서 남한에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시킨 에피소드도 있거니와 귀순 후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훤칠한 키와 외모도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가장 유명한 귀순용사"임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
- 귀순 당시 놀란 민방위 관계자가 그날 오전 10시 58분경에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21], 경기도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라는 경보 방송을 울렸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무장을 갖추는 소동이 있었다. #.
- 사건 발생일은 봄방학 기간이라 등교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학교 수업 중 집에 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타고 남한으로 귀순을 선택했을 때의 예측 시뮬레이션을 직접 구상한 유튜버가 화제가 되었다.#
- 사실 공군 조종사라는 직책은 그 자체로도 직업의 난이도가 높고, 해당 국가의 항공 체계 등에 대하여 중요 정보를 많이 접할 뿐더러, 귀한 항공기를 조종해야 하기 때문에 나라를 막론하고 선별된 엘리트로서 대우받는다. 그럼에도 북한은 몇 차례 사례가 있었고, 특히 북한과 남한의 거리상 여차하면 5분 내로 남한으로 돌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북한은 공군 전투기 조종사에게 사상을 유달리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도 결국 자유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강명도 교수는 "그의 귀순으로 북한의 조종사들은 처우가 더 좋아졌고, 이에 조종사들이 '이따금씩 하나가 남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다.' 라고 몰래 수근댔다고 한다. 김일성이 괘씸죄로 집단으로 조지지나 않을까 두려워 했던 공군 조종사들 입장에선 본의아니게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사실 전투기 조종사 자체가 훈련에 엄청난 비용이 드는 고급 전력이므로, 김일성이 설령 괘씸했다고 하더라도, 늘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남한과 아직 체제 경쟁 중이던 당시에는 건드리지 않은 게 아니라 건드리지 못한 것에 더 가깝다.
- 이웅평이 공군 소령으로 근무를 시작한 뒤 며칠 즈음 지나서, 동료들이 사과를 깎고는 그 껍질을 전두환의 얼굴이 실려있던 신문에 막 버려대는것을 보고 지레 겁먹고는 "어떻게 너희 대통령의 얼굴에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느냐?" 라고 한소리 했는데, 이에 동료들은 "그게 뭐 어때서?" 라며 되묻는것 때문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인들은 태어날 때 부터 수령에 대해 엄청난 세뇌를 받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영향 때문에 충격을 크게 받은 듯. 북한에서 이 김씨 일가의 사진은 귀중하게 여겨져 아예 국가 단위에서 제품번호까지 새겨가면서 수량을 관리한다.
대통령 얼굴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큰 죄가 되는지 의아할 수 있지만, 북한 사회에서는 지도자의 얼굴 사진 위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엄연한 죄이다. 주성하 기자 블로그에 따르면, 북한의 모 간호장교는 신발깔창으로 신문을 몇 겹 덮어 썼는데 여기에 김일성 사진이 실려있었고 평소 사이가 안 좋던 동료장교가 이를 보고 고발을 했더니 바로 군단정치국에서 쏜살같이 내려와 쌍욕을 하며 패대기를 치고 온 가족이 생사불명이 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일화가 있었다고 하며, 2000년대 이후로도 바뀌지 않아 남북 경수로 사업으로 북한에 체류하게 된 우리 측 연구원들과 노동자들이 노동신문을 읽고 김정일 사진이 나오는 페이지를 대충 접어 숙소 밖에 내놨다가 북측 기관원들과 대판 싸웠다는 증언이 있다. 이렇다 보니 로동신문을 찢어서 담배를 말아 피울 때는 김일성 일가가 들어갈 가능성이 가장 적은 국제면을 쓴다고 한다. 다만 김일성 초상화에 먼지가 묻으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다는 말은 과장된 말이고, 실제로는 초상화가 찢어져야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다고 한다. 물론 지도자 초상화가 자기가 원해서 찢은거라면 모를까 사고로 찢어졌다고 3족이 감옥에 가는 것도 폭압적인 처벌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더구나 당시 북한은 김일성의 초상화에서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야 한다며(...) 향수를 뿌려야 했을 정도로[22] 초상화 숭배가 지금보다 극심했던 시절이었으니 그걸 알고있는 이웅평의 앞에서 동료들이 대통령 초상화를 극진히 아끼기는 커녕 사과 껍질을 막 버려대는데, 그런 '막심한' 짓거리를 하고도 아무런 탈도 없이 멀쩡히 살 수 있다는 것에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는 가늠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한국은 땡전뉴스로 대표될 정도로 대통령 우상화가 심했고, 군대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병영부조리가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정연관 상병 구타 사망사건처럼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된 군인도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절에도 신문에 실린 전두환 초상화에 사과 껍질을 버렸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가거나 가혹행위를 당하지는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명백한 독재국가였던[23] 당시 대한민국도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유롭다는 것을 알았던 순간 이웅평이 북한 체제에 대해 느꼈을 감정은 필설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당시까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같은 구심점이 될 만한 사건이 없었을 뿐이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충분히 컸다. 특히 군의 경우에는 하나회와 연줄이 있는 일부 육군 장교들 위주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육군의 비 하나회 출신들 및 해공군 장병들은 전두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두환 시대의 폭정이 심했다지만, 존영[24]도 아니고 고작 대통령 사진이 실린 신문에 과일 껍질을 버리는 것 정도로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위직의 귀순이기 때문에 음해성 뜬소문이 많이 돌았다. 폭음 때문에 이혼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북에서 귀순한 이유가 이웅평이 자기 상관의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다가 걸려서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혼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고, 가끔 남한에서 재혼한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과 텔레비전 출연도 했다.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적당히 사실과 거짓말을 섞어 퍼트린 루머로 보인다. 죽기 얼마 전 나왔을 때는 간 질환 치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지 어두운 낯빛과 머리가 다 빠진 모습으로 나와서 대중들을 안타깝게 했다.
- 김만철 일가가 일본의 항구에서 행선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설득하기 위해서 직접 찾아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 대표단에는 김신조와 같이 동행했다고 한다. 특히, 김신조는 김만철과 동향인 청진 출신에다가 동네까지 같았다고 하며, 김만철을 만나자 "만철이 형 아니오! 나 신조요! 정미소 집 아들." 이라고 반가워했다고 한다. 이웅평은 서울을 찍은 온갖 사진과 필름, 그리고 자신의 자동차 키 여러 개를 보여주면서 "나는 부모형제를 두고 홀로 내려와 이렇게 매일 눈물로 보내고 있는데, 댁들은 부모형제를 다 모시고 계시면서 왜 자유로운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저도 이만큼 잘 살고 있으니까 꼭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세요." 라면서 5시간이나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김만철은 5시간이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귀가 솔깃했고, 듣다가 질린 김만철의 처남이 "죽을 거면 가서 죽겠다" 라는 심정으로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항공 복제에 소소한 변화를 준 인물이기도 했다. 귀순할 당시 가죽 잠바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국군은 조종사와 승무원 등에게 예산 부족을 이유로 아라미드 잠바만 주고 가죽 잠바는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북괴도 조종사들에게 가죽 잠바를 주는데, 우린 뭔가?"하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미군의 각 군 조종사 등이 입고 다니는 가죽 잠바를 부럽게 바라보기만 하던 국군 공중 근무자들은 이웅평 덕분에 부사관 이상 공중 근무자 총원에게 가죽 잠바가 지급되어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남북 양쪽의 조종사들의 처우 개선에 큰 공헌을 한 셈이다.
- 북한 버금가는 독재국가인 에리트레아에서도 이웅평과 판박이인 사례가 있었는데, 2012년 10월 2일 에리트레아 공군 고위 장교 2명이 병력 규모가 850명밖에 되지 않는 에리트레아 공군의 유일한 고급 비행기였던 대통령 전용기 Hawker Beechcraft King Air 200을 몰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을 요청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 알바니아[25]에서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 당시 공군이 시위대에게 폭격하라는 알바니아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전투기째 이탈리아로 망명을 가기도 했다.
땅굴파고 토꼈나. 미그기 타고 날랐나.
- 2022년 영화 헌트에서는 작중 주요 사건으로 등장하며, 황정민이 우정 출연으로 연기한다. 배우의 분량이 많은 건 아니고 카메오 출연. 이웅평 하면 가장 유명한 라면 봉지 일화도 나오고[26], 이제 막 귀순했다 보니 강한 이북 억양을 쓰고 군인답게 대담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작중 심문 중 자신을 변절자라고 하자 극대노하며 책상을 뒤엎는다. 하지만 이내 진정하고 자신은 이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나 자신이 보기에도 북한 정권은 모든 인민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차분하게 답한다. 특히 인민의 당(조선노동당)을 자식(김정일)에게 물려주는 것에 대해 개가 웃을 일이라고 비판한다. 귀순 후 심문 때 안기부에게 북한의 최신 난수표를 건네줬고, 그것을 바탕으로 안기부가 간첩을 색출하기 시작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1] 198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북한 탈출 수기에서 자신의 생일을 밝혔다.[이북5도]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청계리[3] 이전에도 간이 안 좋아서 겨우 간 이식 수술을 마치고 복귀했으나, 면역 억제제를 투입하지 않아 간이 거부 반응을 일으켜 사망했다.[4] 군번 68680[5] 당시 사회안전부(대한민국 경찰청에 해당) 소좌[6] "중규"로 표기된 자료도 있다.[7] 대한민국 국군의 계급 체계와 비교하면 중위와 대위 사이 정도에 위치하는 계급이다.[8] 이웅평이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올 때 발령된 경계경보는 공습이 예상되니 대피를 준비하라는 뜻이다. 많이들 기억하는 한여름 날의 소동은 야구 봉황대기 결승전 날에 벌어진 중공군 조종사 귀순이었는데, 인천 지역이 폭격당하고 있다는 오보가 전해지며 난리 났었다. 시민들이 전쟁 나는 줄 알고 지하철역이나 지하 대피소로 대피하고 사재기가 벌어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귀순 조종사라고 하면 이웅평이 워낙 유명하니 이 소동을 이웅평 때문에 벌어졌다고 착각하기도 하며, TV조선에 나온 기자도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고 언급했다. 당시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한번 놓친 뉴스는 다시 보기가 힘들었기에 무더운 한여름 날의 소동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사람들은 83년 귀순 조종사라고 이웅평이 자주 나오니 연결시켜 기억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83년으로 시기가 겹쳤기에 더욱 착각하기가 쉬워 기억 왜곡이 일어났다.[9] 당시엔 지금처럼 인터넷 시대가 아닌지라 한번 지나간 뉴스는 다시 보기가 힘들어 입으로 전해지다 와전이 되기가 쉬운 환경이었다. 이웅평의 인터뷰를 본 사람이 "라면 봉지 보고 귀순했다 카더라"라고 전하는 과정에서 살이 덧붙여져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의외로 게시판 등에서는 이 썰이 팩트처럼 전해지기도 하는데, 공식 팩트는 삼양 라면 봉지의 교환 문구에 대한 언급이었다.[10] 두 전투기의 간격이 좁아서 보이지 않을 뿐 아무 이상 없으니 안심하라는 용어다.[11] 실제로도 엔테베 작전을 참고하여 따라한 것이다.[12] 페치카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남한에서도 무려 2000년 초에 병사들이 석탄가루를 물에 개어서 쓰는 자료화면이 있긴 하다. 다만 징병한 병사들이 쓰는 것과 국가의 최고 엘리트인 공군 조종장교들이 집에서 석탄가루를 쓰는 것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2000년 초 우리나라 공군 조종장교들이 집에서 어떻게 살았을지를 잘 생각해보자.[13] 북한에선 강인덕과 접촉할 때마다 이 방송을 중단해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다. 이에 강인덕이 북한이 대남방송을 중단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북한 측은 자기네는 대남방송을 하지 않으며 다 남조선 지하조직의 소행이라 자기들과 무관하다고 구라를 쳤지만 강인덕이 해당 방송이 나오는 기지국의 위치가 황해도에 있음을 지적하자 당황하며 알아보겠다고 했다고. 2024년 현재도 자유아시아방송에서 해당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14] 북한 고위 외교관 출신 고영환도 탈북한 이유가 황당한데, 당시 다른 국가의 독재자가 인민들의 봉기에 처형당한 뉴스를 보면서 "우리 공화국에 이런 일이 없어야 되는데" 라며 걱정스럽게 말했는데, 바로 그 말이 보고되어 추적조가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고영환은 북한에 엄청 충성하며 김일성 통역관까지 했었고, 그 문제의 발언(?)도 김일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성심에 걱정한 것이었음에도, "감히 최고존엄을 저딴데다 비유했다" 라며 바로 분노한 추격조가 고영환의 머리채 잡고 보위부로 끌고 가기 위해서 출동했다. 북한에 평생동안 충성한 결과가 이러니 이웅평처럼 배신감을 느끼면서 크게 실망할 법도 하다. 북한같은 독재체제에선 비판적인 생각보단 자기 검열에 에너지를 쏟게 되어 다들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살벌하게 충성 경쟁을 벌이는 현실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다.[15] 참고료 요격은 단순히 격추하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정된 경로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도 요격이라 한다. 이를테면 러시아가 Tu-95를 일본 방공식별구역에 띄워 일본을 엿먹이던 때에 F-15, F-4 등이 출동해 내쫓아버린 것도 요격. 물론 이런 요격 상황의 경우 굳이 격추하지 않더라도 임무 수행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대비한 경우이다.[16]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시행령 8조 3항: 전투폭력기 = 황금 20,200그램-황금 144,200그램 또는 이에 상당한 금액. 최대 금액인 144,200그램은 2022년 12월 말 기준 108억원이 넘는다.[출처] 한국은행경제통계시스템.[18] 다만 이 당시 강남은 지가가 지금수준처럼 뛰기 직전의 개발 상태였다.[19] 이걸 과장하여 당시엔 남한에서 북한 사람들을 뿔달린 도깨비로 생각했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는 똘이장군 류의 만화와 반공 포스터를 접한 현대인들이 당시엔 북한인을 이렇게 생각했었나보다고 착각한 오류다. 오히려 이웅평이 귀순한 1983년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2015년 유네스코에서 1983년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했다. 당시엔 이산가족이 엄청나게 많던 시절이었기에 이산가족 방송은 전국민적 관심사였으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어느 정도 진심이던 분위기였다. 지금도 김씨 3대를 증오하더라도 일반적인 북한 주민과는 선을 단호하게 그으며 별개의 존재로 보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이산가족들 대다수가 현역이던 당시에는 이러한 의식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장 군사정권 시절 반공 교육의 취지도 북한괴뢰정권을 무찔러 괴물화된 김일성으로부터 북한 동포를 구해내자였으며, # 이웅평 이전에도 노금석 상위나 이운용 상위, 이인석 소위 등 목숨 걸고 탈북한 군인들은 귀순용사로써 극진한 대접을 받고 보로금을 지급받았으며, 군사정권 시절에도 같은 기사에 '북괴'와 '북한 동포'라는 두 단어를 함께 씀으로써 북한 수뇌부와 북한 주민을 별개로 보는 기사들이 수두룩하다. 1983년이면 지구촌 축제인 1988 서울 올림픽도 코앞인데, 같은 조선인이 불과 수십년 만에 뿔달린 외계인으로 진화했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아카이브] [21] 인천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81년에 인천직할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되었다.[22] 익명의 탈북자의 과장된 증언이 아닌, 김만철과 주성하의 증언으로 교차검증까지 된 분명한 사실이다.[23] 당시 한국은 오늘날의 북한처럼 여당 민주자유당과 관제야당만 허용된 사실상의 일당제 국가였다.[24] 당시에는 군부대 및 관공서에 군 통수권자/행정 총 책임자인 국가원수를 상징하는 의미로 "존영"이라 불리는 대통령 초상화를 걸었다.[25] 참고로 이쪽도 공산정권 시절에는 그 북한이 양반일 수준으로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로 악명이 높았다.[26] 안기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라면을 아주 맛깔나게 먹으며 극찬한다. 그리고 왜 귀순했냐고 심문받을 때 북한이 싫어서 그랬다고 하지만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한 김정도(정우성)의 의심에 정말 억울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