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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9:58:11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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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숙청자.jpg 파일:숙군사진.jpg
<rowcolor=#fff> 수색 부근 야산에서 총살된 군인들의 모습 서울시 은평구 수색에서 총살되는 군인들의 모습 1950.04
1. 개요2. 배경
2.1. 군사단체2.2. 조선경비대의 창설
2.2.1. 군경갈등
3. 전개
3.1. 미군정 시기 숙군3.2. 한국정부 시기 숙군3.3. 여순사건의 발발과 숙군 그리고 학살
3.3.1. 송호성에 대한 숙군 시도
3.4. 사면계획과 숙군의 재추진3.5. 강·표월북사건과 숙군의 종식
4. 숙군의 결과5. 기타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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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방정국 시절 대한민국 국군에서 이루어진 군내 좌익세력에 대한 숙군.

한국군의 숙군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서 군 내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위해 단행한 작업으로 기존 군의 성격을 완전히 변화시킨 작업이었다. 이때 군은 숙군을 통해 전체 인원 중 최소 5% 가량을 숙청했고 본래의 정치적 중립을 버려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1]

2. 배경

2.1. 군사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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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초를 서는 국군준비대 소속 장병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광복을 맞이한 한국의 상황은 자주독립국 건설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군대 창설이 절실했고 각 정치세력은 군대 창설을 주요 과제로 뽑았다. 그러나 이들이 추진한 군대 창설이라는 목표는 추상적인 수준에 불과하였다. 군대가 어떻게 운용되고 행정관리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는 해방 이전부터 각 정치세력들이 가졌던 문제인데 왜냐하면 이들은 군에 대한 상세한 연구보다는 그 외(外)적인 일에 더욱 집중했기 때문이었다.[2]

이후 일제강점기에 군에 복무한 군인 출신들이 등장하면서 창군에 대한 본격적인 활동이 개시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귀국한 군인들은 주로 만주군과 일본군, 그리고 광복군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로 귀국함과 동시에 수십개의 군사단체를 조직하고 군대 창설 운동을 전개하여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르던 군대 창설 운동을 실천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때 각 군사단체의 정치적 성향은 불분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군사단체가 조직됐던 시기가 아직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사단체는 일본군, 만주군, 독립군 등이 중심이 되어 편성되었으나 오히려 군의 정치적 중립을 내걸며 다양한 세력을 포괄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활동을 전개한 군사단체는 학병동맹이다. 1945년 9월 8일 학병동맹은 종로경찰서로 가 경찰과 협의를 나눈 뒤 무기를 인계받았다. 이어 군사단체 국군준비대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무기를 인계받았다. 이후 이들은 치안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당시 미군은 남한의 군사단체들을 보며 다음과 같은 논평을 했다.

신사가 불탔고, 경찰들은 폭행당했고, 한국인들은 일본인 거주지로 이주하였다. 이것이 무정부 상태나 폭동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건준의 치안대가 일본 병사와 경찰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한 질서를 유지하는데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다.
제24군단 정보참모부(G-2)의 보고서


주한미군이 보기엔 당시 남한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치안대의 횡포와 그로 인한 총기난사치안이 붕괴된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 경찰 조직을 부활시켜 이들에게 치안유지 임무를 부여했다. 그러자 치안대는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고 경찰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이에 미국은 개인 무기 소유 금지, 치안대 활동금지라는 조치를 취함으로서 치안대의 반발을 수그러뜨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경고였을 뿐 실질적인 효과는 전혀 없었다. 치안대는 계속해서 활동했다.

결국 9월 20일 군정장관 아놀드는 담화문을 발표해 일본군이 남긴 무기들을 9월 23일까지 전부 경찰에게 반납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9월 23일과 29일에는 군정 법령 제3호와 제5호를 공포함으로서 일반인의 무기소지는 물론 탄약까지 소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같은 미군정의 강경대응으로 인해 치안대는 물론 군사단체들도 크게 약화됐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군사단체는 해산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중 국군준비대는 당시 군사단체들 중 가장 많은 활동을 한 단체인데 1945년 12월 이후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미군정에 의해 해산명령을 받고 1월 7일에는 해산을 선포했다.

이후 1월 25일 건청 습격과 관련된 혐의로 구속된 국군준비대장 이혁기가 군법재판에 회부됐다. 이혁기는 최후 진술에서 건청이 국군준비대 대원들을 납치했기에 구출하러 간 것 뿐이며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조선을 해방시킨 연합군에 감사하며 미군정에 적극 협력한 국군준비대 대원들이 재판정에 선 것이 유감이라고 진술했다.

이윽고 군정 포고령 제20호 3조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자 “여러분 우리는 조선을 위해 왔으며 조선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자기 희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여러분의 기대에 만족히 해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감옥에 구금됐다.[3]

한편 학병동맹은 1946년 1월 19일 경기도 경찰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이는 1월 18일 전개된 반탁시위에서 학병동맹이 폭력행위를 사주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이 습격 과정에서 3명의 학병동맹원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병동맹은 강제해산됐다.

이렇게 학병동맹마저 해산되자 이제 남아있는 사람들은 새로 창설된 조선경비대로 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2.2. 조선경비대의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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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미군정은 해산된 군사단체들을 통해 조직화된 군대를 편성하고자 했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부터 북한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여 북한이 1만 명의 한인 군대를 조직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남한 내 군대 창설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1945년 11월 13~16일 간 3차례에 걸쳐 모임을 가졌고 군대 창설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이후 미군정 관리들은 'Estimate of Military and Political Situation'를 작성하여 군대 창설의 필요성을 다시금 강조하였다. 해당 보고서는 한반도에 둘러싼 각 세력들을 남한의 잠재적인 적으로 평가했고 특히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을 가장 경계하며, 통일 이후 북한 정권을 인수하기 위해서는 2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보고서는 한국을 미국의 동맹국으로 남겨두기 위해서는 한국군 장교, 사병들을 미군의 감독 하에 둘 것을 지적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과거 군 경력자에 대해 실용적인 면에서 중국 국민당 출신보다 잘 조직화된 일본군, 만주군 출신을 더 활용하는게 낫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미군정 관리들은 11월 18일 한국 군대 규모에 관한 보고를 주한미군사령부에 제출하였다. 경찰 25,000명, 육군, 공군 45,000명, 해안 경비대 5,000명 등 총 75,000명의 한국군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또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비행학교, 해안경비학교 그리고 경찰학교 등 군사교육시설을 설치 및 운영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계획은 알파 계획으로 명명됐고 보고를 받은 하지 중장은 맥아더에게 제출해 한국군 창설 문제를 문의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판단을 보류했고 미 육군 참모총장에게 최종적인 판단을 맡겼다. 미 육군에서는 군대 창설 계획은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 국제 공약과 관련되는 문제이므로 연기돼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본 결정은 합동참모부를 통해 맥아더에게 전달됐다. 다만 이때 미군정은 군대 창설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국방사령부 사령관 쉭크 준장은 알파계획을 보다 확대시키고 구체화한 보고서를 미군정에 제출했다. 그러나 본 보고서는 매우 정교했기 때문에 상부로부터 승인을 받기 어렵다는 이유로 재검토 되었다.

하지 중장은 국방사령간 쉭크 준장을 참페니 대령으로 교체한 후, 그를 불러 실질적이며 소규모적인 군대 창설 계획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참페니 대령은 새로운 군대 창설 계획안을 제출했는데 바로 뱀부계획이었다. 뱀부계획은 병력 25,000명인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각 도에 1개씩 총 8개 연대를 창설함과 동시에 그 권한은 경찰예비대로 제한한다는 계획이다. 미군정은 본 계획을 채택하고 1946년 1월 15일 마침내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미군정은 해산된 군사단체 소속 단원들을 국방경비대로 입대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들로 하여금 군 인원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5일,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를 개교하여 200명의 학생을 받고 그 가운데 110명을 국방경비대로 임관시켰다. 본래 미군정의 계획은 정원은 60명으로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출신에게 각각 20명씩 배정한 뒤, 군사단체 대표들에게 적격자를 추천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광복군, 중국군 출신들이 건군의 주역은 광복군 정통론이 되어야 한다며 입교를 거부하였다. 또한 국군준비대원들 역시 입교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군영 임관자 110명 중 광복군,중국군 출신은 고작 2명이었다.

다만 광복군 출신들은 추후 입장을 바꿔 경비대로 입대하였다. 1946년 1월 31일 ,광복군 국내지대 총사령관 오광선은 군사단체 해산 이후 상황을 묻는 미군의 질문에 대해 그의 부하 740명 중 250명은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100명은 경찰에 들어갔으며, 130명은 일없이 지내고 있으나 국방경비대에 들어갈 것이라고 답했다.

한편, 당시 국방경비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연대명 창설일 한국인 창설요원 주둔지 초대 지휘관
제1연대 1946년 1월 15일 채병덕, 정일권, 장석윤, 강문봉, 백인엽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채병덕 정위
제2연대 1946년 2월 28일 이형근, 심언봉, 정진원, 조상철 충남 대전비행장 이형근 정위
제3연대 1946년 2월 26일 김백일, 김종오, 이한림, 정래혁, 백인기 전북 이리 김백일 부위
제4연대 1946년 2월 15일 김홍준, 조암, 최홍희 전남 광산군 극락면 김홍준 부위
제5연대 1946년 1월 29일 박병권, 이치업, 오덕준 경남 부산시 감천동 박병권 참위
제6연대 1946년 2월 18일 김영환, 하재인, 김원룡, 장도영 경북 대구시 중동 김영환 참위
제7연대 1946년 2월 7일 민기식, 문용채, 오일균, 이희권, 최창언 충북 청주군 사천면 개설리 민기식 참위
제8연대 1946년 4월 1일 김종갑, 황헌친, 김병일 강원 춘천시 김종갑 부위
제9연대 1946년 11월 16일 제주도 장창국 정위
1연대에서 9연대로 이르기까지 조선경비대는 늘어나는 인력에 맞춰 부대를 창설하였다. 가장 먼저 창설된 1연대는 장교 6명, 사병 225명으로 발족하였다. 초대 연대장은 채병덕 부위로 이후 통위부 보급국으로 전출됨에 따라 이성가 참령이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1연대 모집공고에 따르면 군대 훈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지원이 가능하며 대신 나이는 21부터 30세까지로 제한하였다. 이때 수많은 청년들이 자원에 나섰는데 이는 남한의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수백만의 월남민으로 인한 식량부족 등 여러 악재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물론 경찰의 탄압을 피해 경비대로 들어온 자도 있었다. 대구 10.1 사건 이후 제6연대 지원자가 급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군정은 입대하는 이들에 대한 신원조사를 하지 않고 대신 불평부당과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부 부대에서는 신원조사를 자체적으로 한 것으로 판단된다. 제2연대의 경우 연대장 이형근의 지시에 따라 국군준비대 출신은 2연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고 학병단은 군사영어학교에 신원검사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일부였을 뿐 대부분의 부대에서는 신원조사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경비대 내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했는데 대표적으로 미 제24군단의 정보일지인 G-2 Report에 따르면 '경상북도와 전남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경비대 침투를 목적하고 있다...(중략)...이들은 경비대가 남한에서 권력탈취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던 대구의 민전부의장이 조선경비대에 입대했으며 그 외 다수가 침투해 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존 리드 하지 장군도 1947년 8월 "경비대와 경찰을 포함한 모든 핵심 기구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침투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며 숙군의 필요성을 시사했고 같은 시기 CIC에서도 하지와 동일한 판단을 내렸다.[4] 이처럼 경비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공산주의자의 침투가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군 내부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규모는 얼마나 컸을까?

1949년 1월 29일 미 육군부에 제출된 주한미군 CIC의 감찰 보고서는 당시 조선경비대 내 공산주의자들의 침투율을 확인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자료 중 하나이다. 해당 보고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의 침투가 가장 극심했던 시기는 1948년 여름으로 이 시기의 침투율은 최대 3%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관해 C.S. Myers 대령은 '한국 경찰, 한국군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수는 미미한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즉 많았던 적도 없었고 이 때문에 경비대 내부에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압도하는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다.[5]

2.2.1. 군경갈등

한편 조선경비대는 내부와 외부에서 큰 갈등을 겪고 있었다. 왜냐하면 새로 입대한 경비대 장병들이 경비대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경비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원인은 첫째,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의 갈등 둘째, 경찰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먼저 첫 번째 문제의 경우에는 당시 조선경비대를 구성하는 지휘관들의 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경비대 지휘관들은 대부분이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고 이들은 경비대에서 일본군의 사고방식과 가혹행위를 그대로 따라했다. 또한 이들은 각종 부정부패를 일삼아 군 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새로 입대한 하사관과 사병들은 계속해서 불만을 표출하였다.

'구 일본군 장교들과 사병들이 거의 모든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국방경비대의 장래가 걱정된다. 이 사람들은 아직까지 '친일정신'과 일본식 사고로 가득차 있다. 그들의 사고는 국민들의 사고와는 매우 다르다. 나는 이같은 분위기에서 복무하는걸 원치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곳을 떠나 학교에 들어갈 것이다.'
1947년 1월 주한미군 제24군단 정보참모부 문서 제442호에 수록된 조선경비대원의 편지


이때 불만을 품은 장병들은 즉각 행동에 나섰고 '일제잔재 청산'과 '부정부패 추방'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이들의 활동 사례는 다음과 같았다.

①1946년 5월 25일 제1연대에서는 영등포 보급중대 보급품 부정처분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제1연대 사병들은 보급중대에서 양말 20만족을 부정처분한 것에 항의하여 보급품을 부정처분한 관련 장교의 즉각 파면, 비애국적 좌익성향 장교들의 자진 사퇴 일본제국주의 군대식 통치에 반대, 사관학교에 문호개방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주동자들은 불명예 제대하였다.

① 1946년 10월 3일 군산 주둔 국방경비대원 43명은 그들의 장교에게 진급제도의 불고정, 이름표에 한글만 사용 미군 고문관의 영향력 배제 등을 요구하였다. 이들 중 34명이 구금된 채 해산 당했으나 다음날 A,B 중대장들이 제2대대장 백인기 부위(副尉)의 지휘아래 명령서에 한글만 사용할 것, 국방경비대는 현재의 엄격한 미군 감독으로부터 해방될 것 오랫동안 영창에 있는 2명의 국방경비대원들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 연대장 김백일은 이북 출신이므로 사퇴할 것, 친근감을 가지고 미국인들을 존경하라는 명령과 훈화의 중지, 국방경비대는 한국군이 될 것이므로 미군의 통제를 줄일 것 등을 요구하며 연대사령부가 위치한 이리까지 행진하였다. 제3연대장 김백일은 이들과의 면담에서 사퇴하겠다고 말했고 시위대는 토의 후에 군산으로 되돌아갔다.


경비대원들은 연대장을 압박, 책임자들을 자체적으로 처벌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고 이 가운데 3연대는 연대장 김백일이 스스로 퇴진하면서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경비대는 내부에서 발생하는 각종 부조리에 큰 갈등을 겪고 있었고 이는 곧 시위로 번지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두 번째 문제인 경찰과의 갈등 경우에는 당시 경찰의 막강한 권한과 향토연대라는 특성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이때 조선경비대원들은 경비대가 차후 군대로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막강한 치안권 행사를 통해 경비대를 통제하여 경비대를 경찰보다 아래인 것처럼 취급하였다. 특히 1947년 1월 15일 유동열 통위부장의 성명으로 발표된 담화문은 당시 경찰이 경비대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려 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데 당시 그는 '시민의 의무를 지키지 않을 경우 경비대원들은 경찰의 지배를 받을 것'이라며 경비대원들에게 주의를 요구하였다. 마치 경비대가 경찰에게 강압적인 통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또한 당시 창설된 경비대는 마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부대원들 대부분이 현지에서 급히 모집한 청년들이었다. 이 때문에 해방전후 경찰의 악행을 목격한 이들도 함께 경비대에 입대했고 이로 인해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상태였다. 따라서 장교들은 사병들에게 경비대와 경찰을 서로 비교하며 조선경비대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사병들 역시 경찰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 경찰과 본격적으로 대립하였다.

① 1946년 4월 8일 대구에서는 국방경비대원과 경찰간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경찰이 국방경비대원을 연행하였다. 이것을 보고 받은 제6연대장 김종석 정위가 그 대원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이에 불응하였다. 결국 미군정 경찰부장의 중재로 국방경비대원이 석방되었다.

② 1947년 7월 서울에서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담배불 문제로 국방경비대원과 시비가 붙었다. 장택상은 경찰에게 그 대원을 연행하라고 명령했는데, 오히려 장택상 자신이 다수의 국방경비대원들에게 붙잡혀 국방경비대 본부까지 연행되었다. 장택상은 시비가 붙었던 국방경비대원을 경찰에 인계하라고 요구하였고 국방경비대 장교는 경찰은 국방경비대에 관한 어떠한 권한도 없다고 말하며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장택상은 국방경비대원들의 조롱과 웃음 속에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③ 1947년 6월 2일 전남 영암에서는 국방경비대와 경찰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외박을 나왔다가 귀대하던 국방경비대원과 영암경찰서 신북지서 소속 경찰간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었다. 말다툼은 격렬한 싸움으로 번졌고 국방경비대원은 영암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제4연대 군기대장 정지웅 중위와 이관식 중위는 석방교섭을 하러 영암에 갔다 그런데 동행했던 국방경비대원들이 경찰을 구타하자 영암경찰이 다시 군기병들을 연행, 구타하였다. 경찰에게 구타 당하여 광주 도립병원으로 후송된 군기대원이 부대에 이 사실을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제4연대원들은 완전 무장을 하고 영암경찰서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영암경찰서는 국방경비대의 습격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고, 군경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은 제4연대장 이한림 소령이 미군 고문관을 대동하고 와서 싸움을 중지시킴으로써 끝났다. 총격전 결과 국방경비대원 6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하였다.


대표적으로 영암사건은 당시 군경갈등이 어떠했는지 잘 알려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이 사건에서 경찰과 경비대원은 사소한 말다툼을 시작으로 총격전을 벌여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경찰측은 1명 전사, 경비대측에서는 6명 전사, 10명 부상 등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후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4연대는 전남 광산군 극락의 한 숲에서 비밀회담을 열어 영암경찰서에 대한 습격논의를 하였고 총격전을 벌였던 선발대(300명 가량) 외에도 후발대가 완전무장을 한 채 출동대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작전도중 미 고문단의 중재로 후발대의 투입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에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이 와 제4연대장 이한림을 불러 '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며 호된 기합을 주었다고 한다. 즉 영암지서 습격은 경비대 지휘부에서 직접 계획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이후 경찰은 '국방경비대는 빨갱이의 소굴'이라고 비난했고 이에 경비대는 경찰을 '일본놈 앞잡이하던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와 동시에 경찰은 경비대를 비난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미군정 당국에 제출하였으며 경비대는 경찰을 멸시하며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보고를 미군정에 올렸다.

보고를 받은 미군정은 경비대와 경찰 모두 서로 왜곡된 보고를 올리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후 서로 화해시키도록 함과 동시에 문제가 되었던 경비대원에 대한 경찰의 조사, 처벌 등을 전부 금지시켰다. 이때 경비대의 화해 대상자 중에는 우익청년단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국방경비대가 경찰 뿐만이 아닌 청년단과도 대립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국방경비대와 우익청년단은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집단이었고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군대라는 자부심, 그리고 불평부당 의식 등등이 겹쳐 양측 모두 첨예하게 대립했다, 아래 예시는 당시 경비대와 청년단과의 충돌 사례들이다,

① 1947년 4월경 충북 영동 주둔 국방경비대 1개 중대가 서북청년단 영동 지부 합숙소를 습격하여 서청 회원 10명을 살해하였다. 서청의 행동대장 박일은 이 소식을 듣고 서청 행동대원들을 이끌고 현지에 내려가 보복테러를 자행하였다.

② 1947년 5월 22일 6명의 국방경비대원이 백산면에서 4명의 우익 인사들을 납치,구타하였다.

③ 1947년 9월 한독당 창동리 당원들이 10명의 국방경비대원들에게 구타당하였다.

④ 1947년 8월 청주의 국방경비대원들에게 반탁청원에 서명하라는 우익단체의 요구가 있었다. 국방경비대 장교는 국방경비대의 ‘무당파 ,정치 불개인’ 등을 이유로 서명을 거절하였고, 우익단체에서는 “국방경비대는 빨갱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며 비난하였다. 그뒤 국방경비대 대원 1명이 우익단체원들에게 구타당하였고, 국방경비대에서는 구타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국방경비대 장교들이 취해야 할 조치들을 토의하고 있는 동안 사병들은 우익단체 성원들을 국방경비대 본부로 연행 • 구타하였다. 국방경비대 장교들은 그들을 석방하고 그 습격에 참여한 사병들을 조사하였다.

⑤ 1948년 5월 20일 영천의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국방경비대원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국방경비대원과 그 가족을 습격하였다. 국방경비대원의 아버지는 살해당했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심하게 구타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대구 6연대 군기대에서는 부상당한 국방경비대원을 구출하는 한편, 국방경비대원을 무장시켜 서청 건물을 포위하고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서청 회원 4명을 검거하였다. 국방경비대는 이들을 국방경비대 본부로 연행하여 수사를 끝낸 뒤 경찰에 인계하였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오히려 이들이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비난성명을 발표하였다. 경찰의 발표에 대해 6연대장 김종갑 소령은 이를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경비대는 내부에서는 일제잔재 청산과 부정부패 추방을 위해 투쟁했고 외부에서는 경찰, 우익청년단과 대립하여 경비대의 위상을 마음껏 표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의 행각을 전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바라보았다. 경찰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이들 대부분이 대체로 좌익성향을 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때문에 경비대는 미군정의 주선 하에 경찰, 우익청년단과 화해하는 수 밖에 없었다.

① 1947년 9월 30일 부산에서는 국방경비대와 서북청년회 대원들이 상호간의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합동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는 장래 모든 문제를 곤봉 대신 말로 해결한다는 합의에 도달하였다.
② 김해에서는 국방경비대원과 서북청년회간의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 양층의 지휘자들은 과거의 차이를 떠나 지금부터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③ 1947년 10월 부산에서는 국방경비대와 경찰, 우익조직간의 화해를 위한 모임이 시도되었다.


미군정은 이들의 봉합을 메꾸면서 동시에 국방경비대에 대한 숙군을 단행하였다. 왜냐하면 미군정은 군경갈등의 원인을 국방경비대 내부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이러한 태도는 한국정부 수립 직전까지도 지속되었다, 제일 먼저 이루어진 경비대의 숙군은 제7연대에서 이루어졌다.

3. 전개

3.1. 미군정 시기 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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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제1연대장 이성가는 연대 내 좌익 계열 군인들을 숙군하기 위하여 박기병에게 추천을 받은 김창룡을 연대 정보장교로 임명했다. 김창룡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헌병으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부임한 지 한 달만에 제7연대장 이병주 소령을 비롯해 2기생인 노재길 등 총 8명의 군인들을 검거해 재판에 넘겼다.

재판결과 이병주 소령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1947년 10월부로 파면 되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상당한 의문점이 있다. 먼저 김창룡은 자신의 회고록에 연대장 자리에 오른 이병주 소령을 수사를 통해 검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연대장직은 당시 경비대로선 최고위급 자리였다. 반면 김창룡은 정보장교로 부임한지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막 부임한 신병이 영관급의 장교를 검거하고 재판에 회부했다는 건 어느 누군가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원자는 누구일까. 이는 김창룡의 비밀일지에 정확히 나와 있다. 당시 김창룡이 남긴 일지를 살펴보면 이병주 소령 체포에 대해 '일개 소위가 어찌 최고 계급인 소령급과 그 일파를 검거할 수 있겠냐'고 하면서 어떻게 체포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오로지 나의 신념인 타공정신'과 '당시 통위부 고문관 가소(Kasso)소령의 후원이 컸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본 사건은 미군정이 개입하여 김창룡을 통해 이병주 소령을 체포한 것이다.

당시 미군 방첩대는 남한 내 공산주의자를 잡기 위하여 각 지부에 조선경비대와의 연락관계를 형성한 뒤 경비대 내 공산주의자 제거에 지원을 해주었다. 아울러 미국은 경비대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에 대해 좌익과 연결지어 숙청시켰다. 1947년 6월 초 조선경비대 일병이 장교들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그만 적발됐다. 이에 미군정은 이 사건과 연루된 이들은 모두 남로당원이며 공산주의자를 투옥하라고 명령한 장교를 없애려다가 들킨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또 미군정은 군에서 발생하는 가혹행위에 대한 반발에도 남로당와 연관지어 숙군시켰다. 1947년 4월 6일 제8연대 제3대대에서 하사관, 사병들이 3대대장 송요찬을 창고에 감금하고 그를 수십분 가량 구타했다. 이후 미군이 현장으로 출동하자 사태는 수습됐다.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당시 송요찬 대대장이 구사했던 훈련 방식이었다. 당시 제8연대 제3대대는 3개월간의 신병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훈련이 기상하자마자 연병장으로 나가 밤 9시까지 하는 고된 훈련이었다.

이 때문에 장교들도 코피가 터지고 목에서 피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송요찬 대대장은 훈련 기간 중에는 장병을 막론하고 외출과 가족면회도 금지시켰다. 결국 불만이 극에 달한 장병들은 4월 6일 송요찬에게 찾아가 '왜 가족면회를 안 시키느냐' 혹은 '상사들을 비인도적으로 취급하느냐' 등 여러 불만사항을 말한 뒤, 송요찬을 감금하고 전구로 폭행을 가하였다.

정리하면 이 사건은 명백히 대대장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해당 사건에 대해 주동자 박인욱, 홍민규 상사가 사실은 남로당원이라고 발표함과 동시 군법회의를 열어 이들을 구금시켰다. 추후 이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사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주동 하사관 박인욱 홍민규 상사를 위시하여 50여명은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받았고 일부만이 훈계방면(訓戒放免)되었다. 사건의 핵심주동자 박인욱 상사는 제1연대 영창에 구속 중 탈출하여 월북하고 말았다.
韓國戰爭史 제1권-해방과 건국,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67, 414p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주동자 박인욱 상사는 추후 월북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억압적인 방법을 통해 경비대를 통제하려는 미군정에게 실망하여 월북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군정은 초기부터 숙군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숙군은 어떠한 목적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닌 단순히 사건 대응 차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사회 전반에 걸쳐 레드 퍼지(Red Purg)가 시작되자 미군정은 숙군을 다시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숙군은 이전과 다르게 그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단정, 단선 수립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진행된 숙군은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다.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마저 이 숙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내며 숙군에 반대하는 입장만을 냈을 뿐이었다.

지금 남조선 상태로 봐선 남으로 어느 기관에든지 ‘그거(공산당)’없는 데는 없을줄 내 안단 말야. 경비대에라구 없다구 내 부인 못하지요. 허나 덮어놓구 ‘그거’라고 모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단 말야. 장삼이사(張三李四)하지말구선 어디에 어떤 놈이라고 꼬집어 보란 말야. 그렇지는 못하구서 ‘그걸’보는 것은 사람을 ‘그걸’루 맨드는 거나 다름없단 말야.
송호성, 1947


1947년 12월 하순부터 미군정은 숙군 작업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강릉 주둔 8연대에서 비밀 공산당 조직원 7명을 체포했다. 이어 48년 1월 경에는 8연대 사병 10여명을 파면 조치했다. 미군정은 8연대에서만 숙군을 두 번 이상 했는데 이는 송요찬 대대장 구타사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은 해당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부터 미군방첩대를 통해 8연대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부산 주둔 5연대에서 숙군이 진행되었다. 당시 5연대는 인민해방군 사건과 연루되어 있었는데 인민해방군 사건이란 1948년 1월 조병옥 경무부장이 적발한 사건으로 무장봉기를 통하여 정권을 획득하고자 ‘인민해방군’을 조직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300여명이 넘는 5연대 군인들이 체포됐고 그 중 2명의 장교는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후 숙군은 계속됐으며 규모는 더욱 커졌다. 특히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은 이 숙군의 도화선을 지폈다. 제주 4.3 사건 초기 제9연대장 김익렬은 무장대와 평화적인 해결 방법을 추진하였다. 이는 4월 27일 맺어진 평화협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경찰이 오라리 방화 사건을 일으키면서 이 평화협상을 무의로 되돌렸다.

오라리 방화사건 직후 9연대장 김익렬은 해임됐다. 그리고 미군정이 추천한 사람인 박진경이 부임했다. 그는 취임식 자리에서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연설했다. 이윽고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수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폭도 혐의로 끌려왔는데 약 6주 간 4,000명의 사람들이 끌려왔다.

이같은 무분별한 검거에 제9연대 내부에서는 동요가 발생했다. 장병들이 대거 탈영하거나 입산하는 등의 행동이 나타났다. 이는 박진경 연대장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같은 반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격화됐다. 9연대 장병들이 무기 수십정을 들고 탈영하는 일과 심지어는 경찰서까지 습격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리고 6월 18일에는 박진경 연대장이 문상길 중위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미군정은 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조선경비대원 전원에게 사상검열을 실시한다.

1948년 7월 9일부터 16일까지 보고된 주한미군 주간보고서에는 "사상검열은 계속되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이전부터 사상검열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미군정은 숙군 확대를 위한 목적으로 인적,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했다.가장 먼저 미군정은 참정심사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1947년 11월부터 사병심사위원회를 설치해 장병들의 진급 심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당시 경비대에서 복무 중이었던 김영만씨의 증언에 의하면 1948년 6월 하사관 진급 심사를 받았을 때 심사위원회로부터 박진경 암살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진급심사에서 사상 검증도 함께 수반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미군정은 인력이 확대되는 경비대의 상황에 맞춰 통위부 정보국과 조선경비대총사령부 정보과를 1947년 6월 1일부로 통합해 조선경비대총사령부 정보처를 발족함으로써 숙군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설치하였다.

초대 정보처장은 백선엽으로 과거 만주군 출신 장교였다. 부임 초기 그는 방첩임무에 대해 아는게 없었기 때문에 방첩활동 대부분은 미군정에서 주도했다고 한다. 이때 정보처는 매우 작은 규모였으나 1948년 경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이들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1948년 3월 15일, 미군정은 김점곤, 빈철현, 이존일 등을 비롯한 총 11명의 장교에게 경비대 정보처로 근무하라는 특명을 지시했고 이어 4월 18일, 김창룡 중위를 경비대 정보처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김점곤 대위 8연대
빈철현 중위 4연대
유병철 중위 3연대
이존일 중위 6연대
박상순 소위 1연대
김충량 소위 7연대
오성규 소위 2연대
김상룡 소위 5연대
김재영 소위 3연대
김영조 소위 9연대
김순철 소위 7연대
이후 정보처는 커지는 규모에 따라 변화를 꾀하게 되는데 1948년 5월 27일 정보처는 방첩대 기능을 수행하는 특별조사과를 창설하였다. 초대 특별조사과장은 김안일(金安一)이었고 부산, 진주 등 남한의 주요 도시에 파견대를 조직했다. 이때 특별조사과의 임무는 주로 정부 인물들에 대한 뒷조사,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간첩활동 조사, 대북첩보 및 정보수집 그리고 이승만이 지시한 특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보처 규모를 확대한 통위부는 1948년 7월 1일 특명을 내려 24명의 장교들을 경비대 정보처로 발령했고 9월 27일부터 10월 30일까지 37명의 장교와 장교 후보생들을 교육시켜 각 지대로 파견하였다. 이때 미군정은 이들에 대한 신원검사와 지문채취작업을 실시히였다. 진급심사제도와 더불어 사상검열을 더욱 강화시킨 것이었다.

이렇듯, 1948년에 이루어진 미군정 시대의 숙군은 조선경비대를 바꿔놓았다. 앞서 미군정은 조선경비대로 자원하는 이들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대신 신원조사는 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 이후 미군정은 태도를 바꿔 신원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신원조사에서 미군정은 한국경찰과 협력해 경비대원 중 이른바 불순분자라고 불리는 자들을 잡아내었다. 또한 미군정은 숙군을 하기 위해 정보처를 대대적으로 확대했고 정보처로 하여금 숙군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도 마련해 놓았다.

이러한 숙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지속됐다. 아래 인용문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번 주 동안에 전복 활동(subversive activities) 혐의가 있는 국방경비대원들의 검거와 조사가 이루어졌다. 부산 인근에서 11명의 국방경비대 장교가 전복 활동 혐의로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명돼 석방될 것이다. 제10연대에서는 68명이 체포됐다. 제1연대는 지난주의 85명 외에 4명이 추가 체포됐고, 제15연대는 102명을 체포했다. 다른 연대의 보고는 완료되지 않았다. 이외에도 광주의 제4연대는 8월 15일 기념행사를 앞두고 불온한 계획을 수립했다는 죄목으로 하사관들을 구속했다. 9월 15일부터 시작된 국방경비대의 공산주의자 제거로 제10연대에서 장교 10명을 포함해 적어도 58명이 체포됐다.
-C.G, PMAG, PMAG Weekly Activites, 1948. 8. 16.
이상과 같이 흔히 숙군의 원인이라 지적됐던 신원조사는 이미 박진경 대령 암살 이후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숙군은 1947년부터 시작해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직후까지 계속됐고 미군정의 정책에 대해 반대를 표하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자 등 미군정과 반대되는 인물이면 대부분 숙군 당했다. 그러나 이 숙군은 대부분 형식은 갖춘 채로 재판에 회부한 뒤 처벌하는 형식이었다. 게다가 처벌 형식도 매우 큰 사건이 아니면 대부분 파면조치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제1공화국 시기의 숙군은 그 양상도 형식도 완전히 달랐다. 1948년 8월 10일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로버츠 군사고문단장과 만났다. 그는 로버츠에게 '대한민국의 국가정책은 반공이 되어야 하며 대한민국 군대는 공산주의에 최후의 한 명까지 저항하는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목표를 말했다. 이에 로버츠는 그에게 '정치군인'적인 행보를 보인다고 전했다. 이범석의 이같은 발언은 당시 조선경비대의 규칙인 군의 정치적 중립을 어기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는 제1공화국 정부 출범 이후 현실화됐다.

이 시기의 숙군 방식은 단순한 파면이 아니라 그저 무차별적인 검거와 고문 그리고 학살이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군에 관한 불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조선경비대를 빨갱이로 인식했다. 대표적인 예로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이범석은 1946년 11월, 경비대가 '붉은색'을 띈다고 경비대를 비난함과 동시에 경비대 고문직에서 사임했으며[6] 이승만의 사설 정보조직인 KDRK는 이승만에게 올리는 정보 보고서에서 현 통위부 산하 병력 중 80%가 좌익측 인물로 구성되어 있고 차후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하다고 명시했다.[7] 즉, 애시당초 이승만 정부는 조선경비대를 사상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조직으로 바라봤고 언젠가는 숙청을 해야하는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다.[8]

3.2. 한국정부 시기 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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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시기 숙군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숙군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당시 한국 정계 상황을 볼 필요가 있다. 이때의 숙군은 당시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에 맞춰 초대 내각구성이 발표됐다. 당시 여당이라고 평가받는 한국민주당이 각료직을 다수 이상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민당 계열의 철저한 배제였다. 당시 한민당은 정부 수립 이전부터 이승만과 함께 단정론을 지지했고 이승만과 동맹으로 지냈다. 이승만과 동맹사이였던 한민당이 어째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됐을까?

사실 이승만과 한민당과의 관계는 5.10 총선 직후 대립관계로 변화하고 있었다. 총선 이후 제대로 된 정부 수립을 위해 한민당은 내각 구성 방안과 헌법의 권력 구조 방안을 내놨다. 당시 한민당이 내걸었던 방안은 내각책임제였다. 이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올리는 대신 국가원수에 한정시키고 한민당은 다수당으로서 내각을 장악한다는 뜻이었다.

이 계획은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의 현실화되었다. 선거 결과 한민당은 공식적으로 29명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이때의 한민당 의원들은 하나의 정당으로 결집된 것이 아닌 크게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다. 주로 무소속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퍼져 있었다. 이는 한민당 뿐만 아니라 진보적 성향의 정당에서도 나타나는 당시 한국정계의 전반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한민당 계열의 의원들의 수를 제대로 알려면 독촉국민회 소속과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 자들을 합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한민당은 총 70~80석을 얻은 정당이 되므로 사실상 제1정당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한민당은 국회 내에서 유일하게 응집력을 갖춘 정당이 되었다. 이어 한민당은 자신들의 구상을 헌법기초위원회를 통해 구체화시켰다. 헌법기초위원회는 1948년 6월 10일부터 11일까지 권력구조와 관련해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간선제, 단원제 의회 구성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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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중심제 가결을 보도한 조선일보의 기사문
그러던 도중 한민당은 이승만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6월 15일 기초위에 참석해 헌법기초위원회의 정부 형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이에 이승만은 21일 다시 기초위에 참석하여 내각책임제의 헌법이 채택된다면 자신은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이 선언으로 한민당은 결국 이승만의 뜻을 수용했다. 6월 21일 밤 김성수 집에 모인 한민당 간부와 소속위원들은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변경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한민당의 목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변경된 초안을 보면 먼저 대통령 선출 방식을 간선제로 진행하고 또 하나는 국무원을 ‘합의체 의결기관’으로 규정한 것과 아울러 국무와 관련된 모든 문서에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를 명시했다.

이는 정부 행정에 대한 국회의 개입을 합법화시키고 또 행정의 책임을 내각에게 지도록 한 것이다. 다시말해 한민당은 대통령중심제로 변경했지만 이와 함께 대통령의 권력행사에도 상당한 제약을 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한민당은 국회 내 주도권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고 나아가 내각에 대한 통제권도 가져 실질적으로 제1정당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후 한민당이 제시한 초안은 국회를 거쳐 7월 12일 헌법으로 제정됐다. 이제 한민당은 내각 구성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를 위해 한민당은 김성수를 포함해 총 7명의 입각자 명단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초당파주의와 무소속 구락부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한민당의 내각 구성 계획은 차질에 빚게 된다. 특히 이승만은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처음부터 한민당을 버릴 생각이었다. 당시 그는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한민당을 계속 내버려 둘 필요가 없다고 보았으며 때문에 양측간의 관계는 이미 깨진 것으로 보았다. 이때 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내각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첫 번째는 거국내각을 보여주기 위해 이북출신 인사를 등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폭 넓은 기반 위에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북출신 이윤영을 국무총리 후보로 뽑았다.

두 번째는 한민당의 내각을 배제하는 것이다. 한민당과 관련해 당시 이승만의 계획은 총리직을 제외한 각료직 4석만을 한민당에게 양보하는 계획이었다. 이승만은 국무총리직에 대해 “대통령을 보좌하는 의미에서의 권한 없는 총리”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국무총리직 획득이 권력투쟁의 시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만은 자신의 세력을 가진 의원과 또는 정당의 추천을 받는 의원들을 꺼렸다. 이에 의거해 이승만은 한민당이 국무총리로 추천한 김성수에게 국무총리 대신 재무부장관직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봤듯이 이승만은 정치적 균형을 고려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측근들로 내각을 구성하고자 했다. 이는 이승만 자신의 직접통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구성된 초대 내각구성은 당연히 한민당계가 배제될 수 밖에 없었다. 한민당은 이에 격렬히 저항했다. 특히 1948년 9월, 국무총리 임명을 둘러싼 공방에서 한민당은 이승만과 크게 대립했다.

당시 이승만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국무총리직을 “대통령을 보좌하는 의미에서의 권한 없는 총리”를 원했고 거물 정치인 배제와 이북 출신이면서 동시에 부자계급이 아닌 자를 찾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이윤영을 내정했다. 이를 두고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랄 사람은 이윤영씨일 것 입니다'고 발언했다. 당시 이윤영 지명은 한민당의 입장에선 매우 뜻밖의 지명이었던 것이다. 이때 한민당은 김성수를 국무총리 후보로 뽑았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윤영을 지명했기 때문에 한민당에서는 즉각 반발에 들고 나섰다. 그 결과 7월 17일 이윤영의 국무총리 내정은 국회본회의에서 부결처리됐다. 이에 이승만은 두 번째 후보를 뽑았다. 그가 내정했던 후보는 바로 이범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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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국무총리의 초상화

이범석이 후보로 지명되자 한민당은 김성수 국무총리안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김성수는 이범석과 만났다. 그는 이범석에게 총리인준에 협력해 줄 것이니 대신 각료직을 8석으로 늘려 달라고 요구했고 이범석은 이를 승낙했다. 그렇게 1948년 8월 2일 이범석은 국무총리 인준에 성공한다.

그러나 당시 이범석은 김성수의 약속을 이행할 처지가 아니었다. '각료직 4석안'은 본연히 이승만 개인의 구상이었고 그 생각도 확고했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김성수와의 약속은 지켜질리 없었다. 결국 총리직 양보의 대가로 내각의 2/3를 차지하려 했던 한민당의 기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이 외, 다른 장관직에서도 한민당은 실패했다. 내무부장관은 이승만의 최측근이던 윤치영이 임명됐고 상공부장관은 임영신, 외무부장관은 장택상 등 모두 이승만 계열에게 자리를 내줬다. 한민당은 오직 김도연 재무부 장관만을 가질 수 있었다. 이로써 한민당은 이승만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

한민당은 이에 대한 반발로 반이승만으로 돌아섰다. 한민당은 세력을 수습하며 야당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승만을 공격했다. 이승만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윤치영 내무부장관과 장택상 외무부장관을 필두로 태백구락부, 한민당 탈당파와 민족청년단계, 독촉정통파를 모아 따로 여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한편 우익 진영에서는 1948년 9월부터 우익의 대동단결 할 목적으로 신당창설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조소앙, 안재홍, 신익희 등 총 6인의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됐다. 이 운동 과정에서 조소앙과 지청천은 한민당과의 합동도 추진했다. 이승만 정부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1948년 9월 28일 제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이어 10월 1일 최능진과 서세충도 체포됐다. 그리고 내무부는 이들에게 반란을 주모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두고 공산주의와 극우가 협력해 국가를 전복하려 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혁명의용군 사건은 이미 사전에 전부 계획되어 있던 사건이었다. 물론 백선엽 회고록에서는 부하들이 멋대로 수사했다고 밝혔지만 미 G-2 보고서에 따르면 정보국은 혁명의용군 사건이 발생할 것을 이미 1948년 5월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 보고에 의하면 혁명의용군 사건이 발발할 무렵 그들의 목표가 국방경비대에 침투하는 것이고 주요 대상은 오동기를 통해 침투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 한국방첩대가 수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백선엽은 이범석 국방부장관이 설치한 특별장교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한 바 있었는데 이 위원회의 설치목적은 오동기 소령을 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부하의 행동과 상관 없이 백선엽 본인도 오동기 소령 체포에 관여했던 것이다. 이때 위원회에 참여했던 장교는 백선엽(위원장), 이기형, 김종평, 김안일 등이었다.[9]

이상과 같이 혁명의용군 사건은 대숙군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사건이었다. 신생정부인 이승만 정부는 한민당의 공세를 타개하고자 혁명의용군 사건을 일으켜 제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을 체포했다. 정계에서는 이 혁명의용군 사건을 두고 여러 공방전이 전개됐다. 그러던 와중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3.3. 여순사건의 발발과 숙군 그리고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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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새벽 제14연대 연병장에서 난데없이 기상나팔 소리와 총성이 울려펴졌다. 이 소리로 인해 전 장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했다. 여기서 걸어나온 인물은 바로 지창수 상사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통해 대원들을 선동시켰다.

'지금 곧 경찰이 이곳을 습격해 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 때문에 비상소집한 것이다. 즉시 응전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지금부터 경찰은 우리들의 적이다. 총을 들고 저주스러운 경찰을 타도해야 한다. 우리들은 동족상쟁하는 제주도로 출동하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 경찰을 타도하게 되면 우리들은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위하여 궐기한다. 실은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하여 38도선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진격중이다. 우리들은 여기에 호응 북진하여 미국의 괴뢰들을 소멸시켜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인민해방군이 된다. 그래서 조국통일을 볼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韓國戰爭史 제1권-해방과 건국,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67, 453쪽


당시 제14연대는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총사령부에 1개 대대를 배속시켜 10월 19일 제주도로 출병해야 했다. 따라서 제14연대는 충성심 높은 장병들을 중심으로 1개 대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제주도로 출병한다는 소식은 이미 전 부대에 퍼진 후였고 이 때문에 10월 19일, 연대 내 공산주의자였던 지창수가 장병들을 선동시켜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14연대 장병들은 이에 호응했다. 여순사건 초기 로버츠 준장이 판단한 14연대 반란군의 수는 총 2,400여명이었다. 당시 연대 편성이 2,400~2,600여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는 사실상 1개 연대 전체가 반란에 가담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국회에서는 조선경비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박해정 의원은 10월 29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경북의 10・1 폭동사건에 가담한 자들이 도피할 곳이 없으면 전부 국방경비대로 갔고", "지금 남한에 있는 사태를 수습하는 데 제일 포인트는 국방경비대 안에 있다"며 조선경비대를 비판했다.

하지만 제14연대 장병들이 이렇게 많이 가담하게 된 원인에는 당시 경비대의 반경감정과 숙군, 그리고 14연대 장병들에 대한 처우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경비대의 반경 감정은 상술한대로 조선경비대가 창설된 이래부터 시작된 문제였다. 경찰은 조선경비대를 치안대 혹은 빨갱이라고 격하시켜 비난했고 경비대는 경찰을 '일제 앞잡이' 등으로 부르며 비난했다. 이 싸움은 제4연대의 영암사건이 발생하면서 절정에 치달았다. 경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은 일주일의 한 번 꼴로 발생했다.

특히 제14연대는 영암사건을 일으킨 제4연대를 모체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반경감정이 매우 심했다. 또한 14연대는 9월 24일 구례사건으로 인해 경찰과 충돌했고 그 결과 부대에는 반경(反警)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10] 지창수는 이러한 점을 이용했다. 그는 연설하면서 경찰이 먼저 습격했고 이에 총을 들고 저주스러운 경찰을 타도해야 한다고 거짓 선동했다.

따라서 사병들은 이 말에 쉽게 넘어갔고 반란에 호응했다. 이를 증명하듯 여순사건 때 잡힌 포로들 중 한 명은 "경찰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제14연대가 경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 다음으로 숙군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정부 수립 직후에도 전군차원을 통해 계속되고 있었다. 14연대는 창설요원 김영만을 비롯해 제1대대장, 연대장 오동기 등 고의급 장교들이 숙군 당했다.[11] 이뿐만이 아니었다.

1948년 9월 28일 정일권이 작성한 9월 28일자 '第十四聯隊檢閱結果報告'를 보면 S-2 즉, 14연대 정보과 장교만 무려 3명이 교체됐으며 관련 재판 역시 일반법원 사건 1건, 특별재판 사건 4건, 간이재판 1건 등 총 6건의 재판이 열렸다.[12] 이로 인해 제14연대 내부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한순간에 연대장을 비롯해 대대장까지 전부 숙군 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경비대 시절 연대 편성은 주로 향토연대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연대원 다수가 서로에 대한 유대감을 가진 편이었다.

일례로 대구 6연대 사건은 대대장이 남로당과 연루되어 숙군될 뻔하자 장병들이 이에 대한 항의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제14연대 역시 이같은 향토연대의 특성을 따랐다. 마지막으로 14연대 장병들에 대한 처우는 당시 건군 과정에서 일어난 부당한 처우 때문이었는데 이는 조선경비대의 주요 문제였던 모병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상술한대로 경비대는 주둔지 인근 마을주민들로부터 모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비대는 임의로 각 마을마다 할달량을 제시하여 이른바 강제모병을 통해 인원 수를 채워 나가고 있었다. 당시 제14연대 의무대에서 복무했던 곽모 씨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이장이 할달량을 채워야 한다며 마을 청년들을 강제적으로 14연대에 입대시켰고 이로 인해 부대원들은 각자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부대 내에서 진행되었던 가혹한 훈련은 사병들로 하여금 엄청난 피로와 스트레스를 동반하였다. 제14연대 출신 곽 모씨는 당시 훈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하루 일과라는 것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훈련이지요. 아침 5시에 일어나면은 오후 10시가 되야 끝납니다. 기합 받느라고. 식사는 그 당시 매일 모병해지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오늘의 일보가 100명이면 100명 식사를 타와 가지고 오늘도 100명이 들어오면 200명이 갈라 먹어야 하니까, 그게 일본말로 '니기리메시', 주먹밥이고, 그릇도 없고, 주먹밥으로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밥을 해서 먹고 그러면서 살았어요....그래가, 저녁으로 잘 때는 전부 다 그냥 헛소리를 합니다. 배가 고프고 그러니까. 그러니 도망을 가고, 빤스만 입고 도망다가다 붙잡혀서 맞고 한 사람도 있었죠."
아침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이어지는 가혹한 훈련에, 지급되는 배식도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다. 결국 훈련도중 탈영한 병사들이 대거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하루에 50명이 입소한다면 50명이 집단탈영하는 수준이었다. 이때 연대는 붙잡은 탈영병을 결코 순조롭게 석방시키지 않았다. 영창에 한달간 구금시키거나 아예 본보기로 삼아 빠따로 탈영병을 폭행하였다.[13] 물론 장교들이 이같은 상황을 마냥 방관하진 않았다. 당시 제12중대장을 지냈던 김 모씨는 탈영병이 검거될 경우 영창 구금 기한을 1주일~한 달에서 최대 일주일까지 단축시켰고 때로는 3시간 만에 석방시킨 적이 있다고 증언했으며 배식문제도 해결하고자 제3대대 보급관에게 정량급식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병들의 불만은 결코 해결되지 못했다. 특히 강제모병으로 입대한 사병들의 불만은 이미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들은 여순사건 터졌을 때 제14연대 장교들을 가장 먼저 죽였다. 제1대대장 김왈영 중위와 2대대장, 3대대장 등이 반란군에 의해 즉결처분되었다. 결과적으로 14연대 장병들 대부분이 반란군에 가담한 것은 이전부터 이어져 온 경비대의 반경감정과 숙군으로 인한 내부 혼란, 그리고 열악한 부대환경 등이 모두 겹친 까닭이었다.

이후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군 수뇌부에서는 반군토벌 사령부를 즉시 창설해 진압작전을 펼쳤다. 총사령관 송호성은 사건 초기 최대한 온정적으로 사건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10월 24일 미평 전투로 인해 송호성은 실권을 잃었다.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진압이 늦어진다는 명목으로 현지에 출동하여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이에 풀러는 송호성에게 '김백일 대령에게 1천명의 병력을 붙여 여수로 보내라'는 지시를 했다.[14] 그 결과 제5여단장 김백일이 실질적인 총사령관이 되어 보다 적극적인 작전을 추진했다.

이 작전의 성과로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됐다. 그러나 반군은 10월 21일을 기점으로 이미 1/3이 중도이탈한 상황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안 장병들이 반란을 거부하고 탈영한 것이었다. 이때 반란군은 장기전을 대비하고자 지리산으로 입산하려 했다. 이에 김백일은 사전에 지리산 입구를 봉쇄하려 시도했으나 방첩대의 여러 잘못된 보고로 인하여 적의 규모가 많다고 오판하게 되었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함에 따라 반군이 지리산으로 도피할 수 있는 시간을 내주고 말았다.

결국 반군이 지리산으로 도피하는데 성공하자 토벌대는 반군토벌 사령부를 해체하고 지리산 전투 사령부를 창설해 지리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10월 21일 여순사건의 발생배경을 두고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공격했다. 이어 이범석은 "여순사건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라고 밝혔다.

여기서 이범석은 '몰락한 극우정객'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사실상 한독당, 즉 김구를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당시 한독당은 김구의 지시에 따라 5.10선거에 불참했으며 대신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이로 인해 김구는 한국 정계를 떠났다. 결국 이범석의 이같은 발언은 대중으로 하여금 김구가 여순사건의 배후자라는 소문을 돌게 만들었다. 이에 김구는 이범석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성일보, 1948.10.28
또 이범석은 제14연대장 오동기에 대해 '여수에 가서 소위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하여 단순한 하사관들을 선동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극우 진영인 해외와 국내의 실의 정객들과 직접간접으로 연락하여 가지고 로서아 10월혁명기념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기습 반란을 책동'했고 '이것이 군정이양을 시작하면서 약 20일 전에 吳와 관련자를 검거하게 되었으며', '吳와 관계자들을 잡자, 군 내에 吳와 통하던 자들은 공포심이 일어난 모양'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혁명의용군 사건을 의미하는 발언이었다.

이와 같이 이범석은 혁명의용군 사건과 여순사건을 서로 연결시켰다. 그가 지칭하는 극우정객인 김구와 오동기와 연결시켜 숙군의 명분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특히 10월 22일 '정부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거나 혹은 선동하는 분자에게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고 한 발언은 숙군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어필한 것이었다.

이 발언은 현실화됐다. 군 정보국은 재빠르게 군 내 불순분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은 백선엽 중령이 필두로 조사반을 편성했다. 당시 조사대원은 빈현철 대위를 반장으로 이세호, 김창룡, 박평래, 양인석, 이희영 대위로 구성됐다. 이를 통해 정보국은 본격적인 숙군을 전개했다. 헌병대도 똑같이 숙군에 참여했다. 당시 헌병총사령부는 김인경 대위의 지시 하에 여수에 여수지구 군기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 자리에 박승헌 중위를 임명시켰다. 이때 백선엽은 경찰로부터 넘겨받은 남로당 명단으로서 숙군작업을 실시했고 김창룡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숙군명단을 통해 숙군을 진행했다.[15]

이들은 단기간 1천명을 조사해 남로당 계열 150명을 적발했다.[16] 11월 29일까지 이들은 총 1,664명의 군인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때 정보국과 헌병대는 체포한 군인들을 즉각 민간 형무소로 보냈는데 원래대로라면 군 형무소에 가둬야 했으나 당시 군 형무소는 수용 가능 인원이 최대 150명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민간 형무소로 보내야 했다. 따라서 형무소에는 수 천명의 군인들이 갇혀 정보국의 취조를 받았다. 1948년 11월 15일 로버츠 준장에게 보고된 바에 따르면 대전형무소에만 723명의 사병들이 구금됐고 기타 형무소와 부대까지 합하면 총 1,998명의 군인들이 국가전복 혐의로 구금됐다고 전했다. 이들은 취조를 받은 후 혐의가 입증된다면 곧바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가장 먼저 이루어진 대전 군법회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지역 재판 사형 무기징역 비고
대전 417 211 167 90.6%
순천 169 98 17 68%

대전 군법회의에는 총 417명이 회부됐다. 그러나 그들 중 211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167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재판에 회부된 이들 중 90.6%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받은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11월 12일 로버츠 준장에게 보고된 대전군법회의 판결이다. 당시 판결은 다음과 같다.
사형 80
무기징역 15
징역 5년 5
100

당시 군 재판부는 총 100명의 군인을 회부했는데 그 중 사형이 80명, 무기징역이 15명으로 무려 95%가 사형 및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후 이들에 대한 처형도 이루어졌는데 이는 대통령의 승인에 따른 것이었다. 처형은 제2사단 헌병대가 맡았다. 그렇다면 군법회의는 어째서, '왜 이렇게 많은 수의 군인들에게 사형을 내렸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당시 대전군법회의의 실상에 달려 있다. 당시 대전군법회의 진행 방식은 먼저 군 법무관이 형무소에 도착한 후, 형무소 창고에 재판을 열어 혐의자들을 창고에 불러모은 뒤 '너는 몇 년, 너는 사형, 너는 무기징역'이라고 낭독해 형을 확정하는 이른바 현장재판을 하는 형식이었다. 즉, 형량은 법무관의 기분에 따라 정해졌고 이 때문에 사형과 무기징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이다.[17] 일례로 당시 대전형무소로 이송됐던 공학원씨는 군법회의를 받을 때 자기를 포함한 60명이 한꺼번에 재판을 받았으며 재판방식은 현지에서 법무관이 가기고 온 서류로 진행되었다고 증언하였다.[18]

이는 순천도 마찬가지였다. 순천에서 재판부는 총 169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지만 그 중 115명, 즉 68%의 인원에게 무기징역 내지 사형을 언도했다. 광주에서도 8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같은 무차별한 재판은 당시 제4연대장으로 복무했던 이성가 장군의 증언에서 더더욱 뚜렷해진다.
(김상겸 대령이) 내 부하들을 재판하여 죽이는데 내가 어떻게 입회하느냐고 거부해서 내가 대리로 나갔는데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 10명이 즉결 당할 때 보면 6~7명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나머지가 인민공화국만세를 불러요. 이것을 보고 내가 당시 재판장 양○○ 보고 면담하자고 건의하였는데 전군에 수천 명 씩이나 숙군 대상자가 있는데 어떻게 일일이 면담을 할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하루는 내가 형무소 감옥 순시를 갔더니 이 감옥 저 감옥에서 연대장님 연대장님 하면서 통곡을 하는 것을 보고 나도 느끼는 바 있어 그렇게 하였던 것이나 결사적으로 구제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처형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가슴 아픈 일이였어.
이성가, 당시 제4연대장
이러한 숙군은 곧 학살로 귀결됐다. 정보국과 헌병대가 넘긴 1,664명의 군인들은 11월 29일까지 군법회의를 통해 886명이 사형을, 150명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같은 날 처형된 자는 67명이었다. 이에 대해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연락 사무소는 1949년 7월 28일 이 군법회의를 두고 '즉결재판소'라고 지칭했다. 이어 고문단은 당시 재판 절차에 대해 '즉결재판소에서 근무하는 훌륭한 장교라면 오전에 60~70건을 판결'하고 '오후에는 처형을 감독할 수 있다'고 밝히며 정상적인 재판이 아닌 것을 언급하였다. 또한 고문단은 처형 방식도 언급했는데 죄수들을 처형할 시 탄약이 부족하다면 '죽창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면서도 동시에 '죽창은 여러번 찔러야 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쉬 지쳐 버린다'며 이러한 처형 방식을 비효율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고문단은 '그렇지만 많은 병사들은 피곤한 줄 모르고 제비뽑기를 한다'며 이같은 처형을 마냥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이때 '대한민국헌병사'에 따르면 제2여단 군기대는 대전형무소에 반란과 연루된 병사 총 3천여명을 감금해 그 중 3백여명을 총살했다고 서술했다. 당연하겠지만 이들에 대한 재판기록은 전혀 없다. 또 제주도에서는 9연대 장병 100여명이 헌병대에 의해 학살됐다. 당시 9연대 장병들은 군법회의 절차에 거치지 않고 연대장의 재량에 따라 즉결처분됐다.[19] 이외 지리산 토벌 현지에서도 토벌대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하급사병을 즉결처분하기도 했다.[20]
그때는 송요찬 연대장 시절입니다. 연대본부가 제주농업학교 운동장 한켠의 콘센트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원래 모슬포에서 창설된 9연대 기존 병력들이 제1대대로 재편되어 그곳에 함께 주둔하고 있었지요.

어느날 아침에 비상나팔이 울려 퍼졌습니다. 단독무장을 하려니까 그냥 작업복 차림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부대원들이 연병장에 집결하자 서종철 부연대장이 앞에 나와 ‘지금부터 한라산 토벌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대원들을 표창할터이니 호명받은 사람들은 나오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호명되는 대원들을 가만히 보니까 전투원들이 아니고 막사에서 빈둥대던 기간요원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었지요.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처음엔 꽉 찼던 연병장이 듬성듬성 빌 정도로 꽤 많은 인원이 불려나가 한쪽에 집결하였습니다. 얼마뒤 ‘호명 끝!’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것이 신호이었던지 기관총으로 무장한 헌병대원들이 막사 뒤에서 갑자기 뛰쳐나와 그들을 포위하더군요. 눈 깜짝할 사이였습니다. 그때야 말채찍을 치켜든 송요찬 연대장이 나타나 '앞에 나온 군인들은 모두 가짜 군인이다. 즉결에 처한다'고 소리치더군요.
양성팔(梁成八)씨의 증언.
이와 같이 대대적인 학살극이 이루어지자 제9연대 수용소에서 집단 탈옥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수감된 장병들이 숙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벌인 것으로 오직 살기 위해 탈옥한 것이었다.[21] 1948년 11월 4일 제9연대 수용소에 수감된 14명의 9연대 장병들은 담당 헌병과의 협조를 통해 위병을 억누르고 카빈 한 정을 훔친 채 산 속으로 달아났다. 9연대는 탈주한 경비대원들을 다시 붙잡기 위해 수색작전을 벌였고 그 결과 탈주한 14명의 장병들 중 6명을 다시 체포했으며 11월 5일에는 2명의 탈주병을 사살했다. 이 탈옥사건의 결말은 그리 좋지 못했다. 탈옥한 군인들 중 대부분이 군에 의해 다시 체포되거나 사살됐으며 살아남은 군인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9연대 장병은 이후 특무대에 체포되어 9연대 본부로 압송되었으나 군적을 살펴보니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한편,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10월 말 로버츠 준장에게 '공산주의와 연관된 군인 400명을 파면했고 공산당과의 연결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300명의 군인들은 현재 구금하고 있다'며 숙군의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22] 그는 11월 11일 육사 제7기생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군은 사상, 의사, 행동, 명령계통 전부가 선명히 일치되어야 한다. 이에 위반되는 군의 존재라는 것은 절대로 불가한 것이다. 과거에 있어서는 공산분자가 군에 잠입하여 단순한 청년군인을 유혹하여 이에 감염시켰던 것이다. 군 당국은 건전한 건군을 위하여 지금까지 총 5, 6백 명이나 되는 불순분자를 芟除한 것이다. 이리하여 군의 질은 나날이 향상되어가며 단결도 신속히 공고화하고 있다. 이 금후에도 숙군이라기보다 인재 보충에 각별 유의하여 불순분자의 유입을 방지하며 과거와 같이 추천인이 불책임한 일을 함이 없도록 주의하겠다.'
여기서 이범석은 숙군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하면서 5~6백명의 불순분자를 제거했고 인재보충에 각별 유의하여 불순분자 유입을 방지하겠다고 했다. 이러한 국방부장관의 강경한 발언을 통해 숙군은 더더욱 가속화됐다. 11월 3일 제1차 대구 6연대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헌병대가 숙군을 시작하자 이에 대한 남로당의 저항이었다. 제1차 대구 사건은 미군의 개입과 헌병대의 신속한 대처로 조속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대대적인 숙군이 시작되어 392명이 체포됐고 모두 취조를 받았다. 이 가운데 112명이 군법회의로 넘겨졌으며 6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제6연대 대대장 최창근도 불순분자로 체포되었다. 대대장이 체포되자 6연대에서는 최창근 대대장을 석방하라며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제2차 반란이었다. 다행히 연대장 최창근은 금방 풀려났으며 연대장은 연대본부 잔여 병력과 경찰을 투입해 사태를 수습했다. 다만 반란를 일으킨 주모자들은 산으로 도피하였다.

제2차 반란이 끝났을 무렵 제3차 반란이 일어났다. 1949년 1월 30일 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6연대 소속 4중대의 곽종진 상사는 백달현 소위와 하사관 한 명을 살해한 후 중대 무기고를 장악하여 사병들을 선동했다. 그러나 사병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당황한 곽종진 상사는 포항 서쪽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대구 6연대는 반란만 3번이나 발생한 연대가 됐다. 제6연대는 대대적인 숙군을 통해 해체됐고 남은 6연대 2개 대대는 사상검증을 통해 7연대와 18연대로 각각 1개 대대씩 보내져 분리됐다. 이후 연대는 1949년 4월 15일, 제22연대로 재편됐다. 이 과정에서의 숙군은 무려 1천여명을 체포하고 이들을 처단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제3사단 작전교육국 소속 변아무개씨의 증언에 의하면 대구 '6연대 좌익 혐의자를 색출하여 부대 뒷산에서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여순사건과 동일한 방식으로 숙군이 이루어졌고 학살도 동반됐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한편 1948년 11월 중순 육군본부 정보국 조사대는 12연대 소속 김응록을 비롯해 3명의 12연대 장교들을 체포했다. 이들의 죄목은 여순사건 당시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점과 반군에 동조했다는 점 등이었다. 이 중 김응록 제5중대장은 여순사건 당시 제3연대 6중대장으로 활동했는데 그는 진압과정에서 대대장인 조재미에게 기관총을 사격한 바 있었고 이로 인해 명령 불복종으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김창룡의 심문을 거쳐 군법회의에 회부된 이후 전부 총살됐다.

육군본부 정보국은 민간인 학살을 한 이들에게까지 숙군을 했다. 바로 제3연대 2대대 5중대장 김용을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총살시킨 것이 그 예다. 당시 제5중대장 김용은 중국 국민당군 출신으로 중대장 신분이었으나 상관인 조재미 대대장을 빨갱이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대대의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순천에서 직접 BAR 자동소총을 들고 5~6명의 사람들을 일렬로 세운 뒤 즉결처분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대도(大刀)로 학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리산 토벌이 시작됐을 때 김용은 막상 전투에 나서면 공포에 빠져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 이에 격분한 마을주민들과 휘하 병사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이 얘기는 김창룡에게 전달됐고 김창룡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여 취조를 개시하였으며 이후 김용을 김응록과 같이 군법회의에 넘겼다.

이때 김창룡은 김용에게 그가 이북 출신인 점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빨갱이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죽인 거 아니냐고 김용을 몰아세웠다. 결국 김용은 김응록과 함께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48년 12월 28일 순천경찰서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됐다. 김용의 숙군 직후 3연대에도 숙군이 진행되어 최소 200명 가량이 숙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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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하여 재편성할 터 사상선도(思想善導)도 고려 중
동아일보, 1948.11.24
그러던 가운데 육군본부 정보국은 1948년 11월 11일 최남근 중령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다.[23] 그는 여순사건 당시 반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한국군 내 최고위급 장교였다. 그는 제8연대장 시절 유재흥이 유사 시 방어계획에 대해 언급하자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같은 동족끼리인데 무엇 때문에 총부리를 겨누려 합니까.”라고 반문할 정도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여순사건 때 제15연대장으로서 진압작전에 주력했다. 그러나 10월 22일 15연대가 반군의 기습으로 인해 와해되면서 그는 결국 포로로 붙잡혔다. 이때 최남근은 김지회와 만난 뒤, 탈출하여 진압군에게 약 400명의 반군이 지리산으로 간다는 정보를 제공했다.[24] 이후 최남근은 제4여단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군에서 탈영했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 때문에 최남근은 정보국 조사대로 보내져 끔찍한 고문을 받아야 했고 결국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재판 당시 최남근은 반군에게 붙잡혔을 때, 김지회로부터 지령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해 최남근은 '김지회 부대와 합류를 하였다. 반군인 김지회 부대와 접적하였을 때 김지회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같은 말이고 같은 얼굴이고 같은 함경도이고 해서 나도 인간적인 양심에서 그를 죽이지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이어 탈출한 것에 대해 묻자 '비록 내 자신이 좌익사상을 가졌다고 하지만 반란이 야기되어 어제까지의 전우들이 골육상잔(骨肉相殘)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며 또한 나를 아껴준 상관이나 동료 부하들에게 더 이상 배신할 수가 없어 탈출을 하였다'고 했다.

이후 최남근은 총사령부에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법회의에 참석했다. 재판부는 그에게 왜 탈출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미 국군을 배반한 반역자가 되었는데 필경 중앙에 가면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재차 김지회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이중의 배반자가 되기 때문에 군인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살기 위해서 도피하였다.'

최남근은 반군에게 포로가 된 것을 근거로 군법회의에 회부될까봐 탈영을 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재판은 박정희 소령을 비롯해 총 73명의 군인들이 피고인 신분으로 참석했다. 결국 최남근 중령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박정희 소령, 배명종 중위, 조병간 소령은 무기징역을, 나머지는 5~15년의 형량을, 한동석 중위를 비롯한 3명의 장교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25]

이때 최남근은 반군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인해 바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최남근 중령의 사형은 이미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다. 당시 재판을 맡았던 법무관 김완룡씨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은 평소 최남근과 친해 그의 재판을 꺼렸고 때문에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찾아가 최남근을 사형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자 채병덕은 '이게 무슨 소리냐'며 격분했고 이에 김완룡은 채병덕을 데리고 국방부장관 이범석에게 찾아가 자초지경을 설명하며 최남근을 구제하려 했으나 이범석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곤 김완룡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한다.

"채 장군 말이 맞다! 다른 사람은 다 사형시키는데 그 사람만 왜 빼느냐?"

당시 이범석은 채병덕의 말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최남근은 사형 당해도 될 마땅한 자였고 사면시킬 필요성 또한 없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다음 날 김완룡은 서면으로 최남근 사형을 통지하고 사표를 제출한 뒤 청주로 내려갔다. 사형장으로 가기 전, 최남근은 동생 최남오에게 '남오야! 큰형은 좌익 손에 맞아죽고 나는 우익에게 죽는다. 이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생각해서 처신하고 아무쪼록 부모님께 잘해드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1949년 5월 26일 수색 부근 산록에서 총살되었다. 죽을 때 그는 애국가를 제창하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이 시기를 두고 어느 한 미국 고문은 '한국군 사령부의 10%가 현재 형무소에 있는데 대부분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논평했다.[26]

한편 이때 숙군을 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당시 미군사고문단 참모장이던 라이트 대령이 언급한 바와 같이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윤리적인 압박을 통해'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다. 고문에 못 버틴다면 자백을 해야 했고 자백을 한다면 자백서를 써야 했다. 자백서는 곧 증거로 판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그러나 이 군법회의도 이미 사전에 형량을 정한 뒤 재판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재판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로 이같은 방식은 1949년에 이르렀을 때 보였던 방식이었다. 여순사건이 발발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 1948년 11월에는 그저 무차별 검거와 학살이었다.[27]

1949년 초 로버츠 준장이 작성한 비망록에 의하면 '숙군이 시작됐을 당시 입소문은 체포에 대한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고 논평했다.[28] 같은 시기 미 CIC는 한국군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규모는 1948년 여름 최대 3%를 기록했으나 10월 이후 1% 미만으로 축소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와 함께 C.S. Myers 대령은 1949년 2월 1일 '한국 경찰, 한국군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수는 미미한 수준'이라고 미 육군부에 보고하였다. 또 미 군사고문단의 한국군 종합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고문단이 숙군명부를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65명의 사병과 25명의 장교만이 계속 수사 받을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당시 구금된 군인의 수는 무려 1,466명이었다. 결국 숙군은 제대로 된 수사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잡아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제18연대 1대대장 한신 소령 체포사건이다.

1949년 7월 제18연대 소속 한신 제1대대장은 방첩대의 부정행각을 적발하고 이들을 훈계한 뒤 돌려보냈는데 얼마 안 가 김창룡이 찾아와서 '월북한다는 정보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여관에 감금시켰다. 그러자 제1대대 장병들이 '방첩대를 모두 부숴버리겠다'며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안 미 군사고문단이 김창룡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창룡은 '내가 잘못한거 같다'고 한신에게 사과한 뒤 곧바로 한신을 풀어줬다고 한다. 당시 숙군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었다.[29]

3.3.1. 송호성에 대한 숙군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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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병을 사열하는 송호성 준장의 모습, 1948.11.19
경비대는 대규모 숙청을 진행했는데 여순 반란 이후 강화된 공산주의자 검열로 1,000명이 넘는 장교와 병사들이 불순분자라는 이유 하에 제거되었다, 이와 함께 상부에서는 이범석이 이전에 숙청하지 못했던 송호성 준장을 사령관직에서 해임하는데 성공하였다.
주한미국 대표단의 보고, 1948.12.17
1956년 특무대장 김창룡이 암살되면서 그의 비밀수기가 풀렸다. 이 비밀수기는 총 9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로 숙군에 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송호성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이 비밀수기 내용에 따르면 송호성은 남로당 세포조직원이자 공산주의자이며 숙군 때 잡아야 했었던 인물로 명시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백선엽의 정보국 조사대 소속인 김창룡이 경비대총사령관인 송호성마저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는 것이다.[30]

그러나 송호성은 숙군되지 않았기에 이같은 서술은 단순한 의혹에 그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송호성에 대한 숙군 시도는 분명히 있었는데 이것에 대해 설명하려면 먼저 이범석과 송호성 간의 관계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과거 광복군 시절 이범석과 송호성은 중국군 왕계현 대령이 중재할 정도로 사이가 굉장히 안좋았다. 그 이유는 당시 이범석이 보기에 송호성은 사상적으로 불순했고 또 광복군 시절에 서로 모시는 군벌이 달라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양측 간 경쟁을 일으킨 바 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이해관계에 있어 굉장히 안좋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특히 송호성의 성향과 이범석의 성향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시 송호성은 미군정에 배척받는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포옹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봤고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한 김창룡을 보자 격한 화를 냈을 정도로 공산주의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면 이범석은 공산주의에 대해 '천인공노'라고 표현할만큼 대단히 경계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공산주의를 포옹하려는 송호성의 태도를 결코 좋게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이범석은 출신지 자체가 운남지역 군벌이 운영하는 운남강무당 출신이었고 송호성은 북양정부가 운영하는 보정군관학교 출신이었다. 즉 서로 모시는 군벌이 달라 대립할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광복군 운영에 있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해방 이후로도 이어지는데 이범석의 경우 해방이 되자 김구를 떠나고 이승만의 곁으로 가 그를 숭상했으며 반대로 송호성은 김구를 숭상하였다.

주지하듯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이후부터 김구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본 사건을 두고 '극우와 극좌의 합작'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어 김구가 나서서 이범석의 담화문을 반박하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정보국 장교인 알렌 일라덴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시경은 여순사건 배경에 대해 김구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그 근거는 외무부장관 장택상과 내무부장관 윤치영의 담화문이라고 밝혔다.[31] 이처럼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근거로 김구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었고 이와 함께 이범석도 이승만 정부의 공세에 동참하여 김구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송호성은 김구를 모시고 있었기에 이범석의 입장에서는 송호성 역시 김구와 동일한 정치적인 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이범석은 1947년 12월 경비대 생도 사열식에서 “송호는 단을 내리라!”고 송호성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을 정도로 매우 격하게 나왔다.

이때 송호성은 그 말을 듣고 곧장 자리에서 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범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광복군 출신 입대에 대해 자신의 부관 김웅수 앞에서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나라를 위한 것이지, 개인 영달을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대함과 동시에 광복군 출신의 입대를 일시적으로 막았다. 이는 광복군 내부에 평판이 크게 갈렸던 이범석의 독단적인 행위였다.[32]

이범석은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송호성을 불러 그를 크게 질타했으며 책임을 지고 사태를 수습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후 여순사건이 어느정도 진압이 되자 이범석은 송호성을 인사에서 제거하였다. 그의 후임은 이응준으로 내정되었다. 이후 송호성은 준장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부관이나 전용 차량도 없을 정도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숙군이 시작되자 송호성은 이범석과 이승만에 의해 1948년 10월 28일 프라이스 대령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의 입대를 방조했다는 혐의로 군법회의에 기소되었고 이어 1948년 11월 18일에는 주중대사관(대만) 무관으로 임명되었다.[33]

이때 주중대사관 임명은 국방부장관 이범석이 내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이유는 당시 로버츠 준장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949년 7월 로버츠 준장이 볼테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송호성을 이범석 계파가 중국으로 보내려 한다는 인물로 평가했으며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져 있는 장군이라고 밝혔다. 더구나 당시 전속명령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의 승인 또는 명령 여부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이범석의 짓이었다.[34] 한편 송호성과 관련된 인물들도 하나 둘씩 숙군되기 시작했다. 먼저 박정희 소령의 경우 여순사건 당시 송호성의 참모였으나 1948년 11월 11일 채병덕의 명령에 따라 체포됐고 제15연대장 최남근은 송호성의 계열로 분류됐지만 이를 안 김창룡에 의해 검거되어 총살되었다. 사실상 송호성을 겨냥한 정치적인 거세 시도였다.

이렇게 송호성이 중국으로 쫓겨나기 직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는데 1949년 1월 21일 갑자기 중국대사관 무관 임명이 보류되더니 23일에는 전속명령마저 취소되었기 때문이다.[35] 이때 국무총리의 명령을 바꿀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바로 이승만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크게 견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범석이 그가 추진하고 있던 대통령 직속 정보국 설치를 국방 제4국 설치와 국무총리 직속 사정국 설치를 통해 무산시켰고 족청 통합과 관련된 문제로 여러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족청 통합 문제는 당시 국방 제4국 설치 문제와 관련해 이승만과 이범석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인데 당시 족청통합은 이승만이 이범석에게 하달한 명령으로 여순사건 이후 조직된 대한청년단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의 청년단 통합 계획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특히 이승만은 여순사건 발발 이후 한민당으로부터 지속된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내부의 불순분자의 반란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한다는 입장을 내비쳤고 이어 대한청년단, 호국군을 편성해 각 청년단체들을 두 조직으로 하여금 통합하고자 했다. 이후 이승만은 지방순시를 통해 10개의 청년단체를 방문하고 청년단 대표와의 논의를 거쳐 각 청년단에게 대한청년단에 통합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족청은 갑작스러운 통합을 하는 것 대신 단계적인 통합을 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족청이 이범석의 친위그룹이고 또 이범석의 야망을 실현시킬 조직이기 때문에 단번에 통합될 경우 이범석의 지위가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있어 통합을 늦추도록 했던 것이었다. 앞서 이범석은 국무총리 인준을 한민당과의 협상을 통해 간신히 입각하는데 성공하였다. 비록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대해 “대통령을 보좌하는 의미에서 권한 없는 총리”로 여겼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범석의 생각은 달랐다.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인 후지이 다케시(藤井たけし)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지만 무려 70세의 나이로 상당한 고령이었고 그의 건강 문제는 곧 후계자 문제로 이어졌는데 이때 이범석은 중국 장제스의 정치를 본 받아 이를 한국 정계에 그대로 적용시키려 했으며 마치 장제스가 쑨원을 국부로 모시고 자신을 후계자로 자처해 권위를 높였던 것처럼 이범석 본인 역시 자신을 장제스로, 이승만을 쑨원으로 모셔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려 했다고 분석하였다.

이 분석을 토대로 하면 국방 제4국 설치와 족청 문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국방 제4국의 경우 국방부장관 직속 정보국이기 때문에 이범석 직계 계통이므로 그의 정치적 권의를 넓히는 장치였으며 족청 역시 그를 지지하는 친위그룹이기 때문에 그가 정계에서 힘을 발휘하고자 할 때 원동력이 되어주는 지지기반이었다. 하지만 국방 제4국은 설치과정에서 이승만과 충돌을 빚었다. 당시 이승만은 해방정국 시절부터 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는 광범위한 정보를 통해 확실한 통치기반을 마련한다는 그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기반을 어느 누구보다 빠르게 마련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이승만은 서둘러 KDRK를 조직해 사설정보조직을 운영했고 1948년 7월에는 미군정과의 협상을 통해 민간정보기구인 대한관찰부를 조직하여 규모를 확충하였다. 이승만은 이렇게 조직된 대한관찰부를 정부 수립 이후 정부 내 공식적인 정보기구로 두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임시고문단장 로버츠에게 찾아가 NSB, NSRB,CIA의 창설을 합의하고 1949년 11월 30일 법률 제9호인 국군조직법을 통하여 이를 법제화 시켜 대한관찰부를 CIA(중앙정보국)로 이전하려 했다.

그러나 본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는데 이는 바로 이범석의 독단적인 행위 때문이었다. 당시 이범석은 군사고문단과의 상의도 없이 국방 제4국을 조직했고 휘하에 족청계인 김근찬을 국장으로 임명시켜 체계상으로 혼란을 가지고 왔다. 즉 법률상으로 최상위 정보기구가 두 조직으로 양립하는 기이한 상황에 놓이게 되므로 이를 통제할 위치였던 이승만은 법률상의 혼란을 멈추기 위해 중앙정보국 창설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사정국 설치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사정국 설치는 이범석 계획의 일환으로 대통령 직속 정보국이 아닌 국무총리 직속의 정보국을 두는 계획이었다. 결국 국방 제4국과 사정국 설치 문제로 이승만은 대한관찰부를 어디에 둘 것인지 굉장히 모호해졌기 때문에 이범석과의 관계 또한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래서 이승만은 청년단 통합으로써 그의 지지기반인 족청을 대한청년단에 흡수하여 그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하였고 이범석은 자신의 야망인 후계자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족청 통합에 반대했던 것이다.

1949년 1월 4일 이승만은 말을 듣지 않는 이범석을 향해 "이범석 장군이 정권을 탐내서 세력을 부식하려는 의도가 없는 인도자임을 누구나 다 믿는 바이요 만일 이런 의도가 있다면 나로서는 아무런 지우간이라도 결코 호응치 않을 터인 것을 이범석 장군이 이 또한 아는 바이므로 민족청년단을 자기개인의 파당(派黨)으로 만들려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라고 하며 그가 족청 해산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직접 이범석에게 경고장을 내민 것으로 이범석 역시 행동에 나서야만 했다. 처음에 이범석은 여전히 단계적인 통합을 유지하겠다는 성명을 내놨지만 이승만의 동일한 지시가 또한번 내려졌기 때문에 얼마안가 입장을 바꿔 1월 20일 족청을 완전히 해산시켰다. 즉 이범석은 이러한 월권행위를 계기로 이승만과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상태였고 이승만 역시 족청해산을 기점으로 완전히 그를 견제하는 태도로 나서게 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승만은 이범석을 견제할 겸 그가 숙청하려 했던 송호성을 살림으로써 그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36] 다시말해 송호성이 전출되지 않고 군에 남아 있을 수 있던 것은 이범석을 견제하려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상호견제 전략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김구파 제거에도 박차를 가했다. 1948년 말 미 제971CIC의 보고서에 의하면 여순사건은 정부를 '반공으로 형성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고 이는 김구가 자신의 계열 사람들을 군대에 입대시켜 여순사건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논평했다.[37] 그리고 이는 숙군으로 실현됐다. 이범석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혁명의용군 사건을 두고 김구와 오동기를 연결시키려 했으며 여순사건 때는 혁명의용군 사건과 여순사건을 하나로 묶어 몰락한 극우와 극좌의 합작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김구파에 대한 숙군 사례로는 대표적으로 해상의용군 사건이 있다. 1948년 11월 해군통신학교 교장 전호극 소령과 이상규 소령은 백범 김구를 지지했던 장교였으나 해상의용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35명의 장교들과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됐으며 1949년 3월에는 35명의 군인들 중 한 명이 진해에서 총살됐다.[38] 또 강표월북 사건으로 유명한 강태무 소령도 김구파였다. 당시 그는 김구의 추천장을 받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할만큼 김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강태무는 자신이 숙군 당할 위기에 처하자 친구인 표무원과 함께 대대를 이끌고 월북하였다.

여운형 계열의 군인들도 숙군을 당했다. 일례로 만주군관학교 제7기생 13명의 장교들은 광복 직후 여운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소군정에 대항하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얼마못가 소련 군정에 발각되었고 곧장 남한으로 도피하였다. 이후 이들은 한국군에 입대해 군 장교를 역임했지만 여순사건 발발 직후 김창룡에 의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대부분 처형되었다.

이렇듯 숙군은 당시 국방부장관 이범석이 직접적으로 개입했고 숙군으로서 중간파 군인들과 광복군계 군인들까지 공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3.4. 사면계획과 숙군의 재추진

최근 이루어진 한국군의 숙군은 해당 집단의 이빨을 효과적으로 뽑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주한 미 군사 고문단장(KMAG) 로버츠 준장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을 계기로 크게 확대된 숙군은 한국군의 변화를 의미했다. 기존의 다양한 사상을 가진 이들을 포옹하던 경비대가 사라졌고 오직 하나의 사상, 즉, 반공을 기초로 하는 국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국방장관 이범석은 이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숙군을 단행했다. 그러나 초기 숙군은 제대로 된 형식도 없이 이루어졌다. 군 법무관이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하거나 취조도 없이 총살장에 보내는 일도 잦았다.

그나마 1948년 12월부터는 형식적인 재판이라도 이루어졌다. 최남근 중령과 이재복을 재판에 회부한 것이 이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나 이 재판도 실질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먼저 재판에 회부되기 전, 군인들은 정보국 조사대에 의해 고문을 받아야 했고 이 때문에 무조건 진술을 하게 되어 남로당원증에 사인을 하거나 아니면 도장을 찍어야만 했다.

이후 정보국은 이 명부를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하는데 재판부는 이를 전부 증거로 받아들여 신속하게 재판하였다. 그 결과 억울한 피해자들이 대거 발생했고 심지어는 무죄를 선고 받았음에도 형무소에 수감되거나 파면을 받은 자들도 있었다.

1949년 1월 27일 제12연대 군법회의 판결문을 보도록 하자
이름 계급 군번 판결 비고 소속 부대
김종명 중위 12038 파면 5개 혐의중 4개 혐의 유죄 제12연대
한만현 소위 11124 파면 5개 혐의중 4개 혐의 유죄 제12연대
오경석 이등상사 1304488 무죄 2개 혐의 중 2개 혐의 무죄 제12연대
박천선 하사 1300034 징역 3개월 4개 혐의 중 2개 혐의 유죄 제12연대

오경석을 제외한 4명의 군인들이 모두 유죄를 받았다. 그러나 오경석은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그의 군적부 기록이 파면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기타 4명의 군인들 역시 군적에 존재하지 않는다.[39] 뿐만 아니라 육사 제3기생 한동석은 1949년 2월 최남근과 함께 재판을 받아 무죄를 선고 받았는데 군적기록에서는 1949년 5월 10일 파면조치가 되어 있었다. 또 해군 대위인 이항수는 해상의용군 사건과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1948년 12월 7일 해군 고등군법회의로부터 무죄를 언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1년 넘게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0년 7월 5일 마산 앞바다 무인도에서 재소자들과 함께 총살 당했다. 그저 최소한의 형식만을 갖춘 재판이었을 뿐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붙잡힌 군인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40]
계급 검거 미검거자
장교 126 25
사병 1,170 51
1,296 76

1,296명의 군인들이 정보국과 헌병대에 의해 체포됐다. 군 조사국은 경찰로부터 얻은 명부를 토대로 숙군명부를 만들어 이들을 사전에 감시한 뒤, 체포했다. 해당 표에서 미검거자가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추후 기록을 보면 미검거자에 대한 체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에 대해 미 군사고문단은 '숙군 명부에 오른 일부 장교와 사병들이 반군에 맞서 죽었거나 아니면 장기간에 걸쳐 한국군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했기 때문에 체포하지 못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즉, 전향과 전사(戰死) 때문에 체포가 잘 이루어지 못한 것이다.

이어 1949년 3월부터는 아예 숙군이 사실상 종식되기에 이르는데 이는 당시 국방장관 이범석이 해임되기 직전이었고 또 제주 4.3사건과 지리산 토벌 작전이 미 군사고문의 계획에 따라 온정적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강경적인 모습이 많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이었다.[41] 즉, 숙군 역시 이같은 시기에 맞춰 기존의 강경적인 숙군을 버리고 온건적인 숙군을 택한 것이었다. 미 군사 고문단은 이러한 계획을 사면계획(Amnesty Programs)이라고 일컬었다.[42]

이후 이범석이 나가고 제2대 국방부장관이 된 신성모는 처음 숙군에 대해 매우 온정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43] 그는 1949년 3월 말부터 숙군을 당한 군인들의 형량을 면제해주거나 석방하는 등, 점차 숙군을 중단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일례로 1949년 3월 15일, 252명의 군인, 민간인들이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고등군법회의에 넘겨졌는데 이들 중 225명이 유죄를, 나머지 27명은 무죄를 언도받았다.[44] 이때 국방장관 신성모는 유죄를 받은 159명 군인들의 형량을 1/3, 1/2 가량 감면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신성모는 이범석 계열에게 숙청당할 뻔한 송호성을 숙군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도 했다.

다만 정보국에서는 자체적으로 미리 숙군할 대상자를 선정했다. 1949년 4월 말 군사고문단의 보고에 따르면 정보국은 108명의 장교와 560명의 사병을 감시하고 있으며 이들은 개별사건이 발생할 경우 전부 체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는 추후 발생할 사건들을 대비할 목적으로 조치한 것으로 숙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이전 국방부장관이 그러했듯 신성모 역시 숙군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군 내부에 간첩이 아직 남아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51년 8월 신성모가 일본대사로 부임하고 있을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 정보원들은 신성모를 찾아가 한국군 내부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물어보았는데 이때 신성모는 숙군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전쟁 이전 숙군명부에 올라온 한 연대장이 정보국의 배려로 숙군되지 않았다는 것과 이로 인해 해당 연대장이 전쟁 발발 직후 손쉽게 월북했다는 것을 근거로 기존 숙군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즉 신성모는 기존 숙군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보았으며 또한 추가 숙군이 단행되어야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모는 숙군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강표월북사건이 발생하기 이전 국방부장관 명의로 숙군 당한 군인들의 형량을 1/3 감면해준 것을 생각하면 신성모 역시 처음에는 숙군에 대해 온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이 변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후술하듯 강표월북사건은 숙군에 대한 대대적인 전개를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전 국방부장관 이범석의 경우에는 숙군을 단순히 공산주의자 제거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수많은 정치적인 공세를 타개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다. 이는 당시 이범석의 상황이 같은 광복군 출신이던 이청천마저 반(反)이범석 운동에 참가할 정도로 굉장히 좋지 못했기 때문인데[45] 앞서 이범석은 족청 통합 문제와 국방부 제4국 설치 문제로 대통령과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상태였으며 그가 추진하던 대북공세 계획 또한 실패하여 정치적으로 거세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특히 이범석의 대북공세 계획은 국방 제4국 설치와 함께 이루어진 계획으로 체제 내 반대파의 시선을 체제 외 세력인 북한으로 돌릴 것을 목적으로 둔 작전이었다. 물론 이러한 대북공세 계획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던 문제였으므로 단순한 이범석의 독자적인 행위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당시 38도선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먼저 38도선은 철조망을 비롯한 안전장치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북한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간에 38도선을 비교적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양측간의 접전이 많았고 이 과정에서 교전이 뒤따랐다.[46]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38도선 충돌을 이용하여 단순한 교전이 아닌 38도선 이북으로 침투할 수 있고 공세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는 대북공세를 기획하였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내무부장관 윤치영에게 특별경비대를 조직할 것을 지시하고 이들로 하여금 38도선에 주둔하도록 해 대북공세를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다. 그러나 미국측에서 특별경비대에 대해 미국과의 협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부대라는 점과 특별경비대의 성격이 매우 공격적이라는 점을 들어 특별경비대의 존재로 인해 38도선에서 큰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특별경비대 조직을 당장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47] 이때 미국측이 언급한 특별경비대의 공격적인 성격은 당시 특별경비대 부대원이 전부 재향군인회원, 우익청년단원들이라는 것에서 기인하는 문제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북한에 대한 보복 심리도 품고 있었다. 즉 이들이 38도선을 담당한다면 얼마든지 대북공세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지명된 특별경비대장은 대북공세로 유명한 김석원이었으므로 특별경비대의 성격은 너무나도 뚜렷했다.[48] 다시말해 미국이 봤을 때도 특별경비대는 대북공세를 하기 위한 정치적인 부대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봤듯이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초기부터 대북공세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앞서 서술한대로 대북공세는 체제 내 반대파의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정치적인 생명을 마련할 수 있는 장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범석은 이승만의 뜻을 이루기 위해 국방 제4국을 설치하고 이와 함께 대북공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이범석은 국방 제4국 요원들을 북한으로 침투시켜 북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정해진 기일에 맞춰 폭동을 일으킬 것을 사주하였다. 이에 따라 제4국 요원들은 사리원-재령-해주의 공공시설을 공격하여 그 일대를 무력화하도록 작전계획을 수립했다.[49] 이후 1949년 1월 18일 제4국은 해주에 폭동활동을 전개했고 해주에 주둔한 북한경비대를 일시적으로나마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얼마안가 해주사건은 북한측의 빠른 대응으로 진압되었고 제4국 요원들은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제4국 요원들은 해주사건이 이범석의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진술했는데 이에 이범석은 1월 26일 성명을 발표하여 "해주에 사람을 보낸 일은 없다"며 개입사실을 전면 부정하였다.
李국무총리는 지난주일 북한 해주에서 일어난 의거를 동 총리가 조종한 테러리스트의 소행이라는 평양으로부터의 공산주의자 방송을 분개하며 부인하였다. 평양 방송은 “남한 수상이 자금을 주어 테러리스트를 해주에 보냈다”고 하고 14명의 테러리스트는 19일 해주의 여러 건물에 방화한 후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인민재판에 회부되리라고 방송하였다. 그런데 이총리는 “해주에 사람을 보낸 일은 없다”고 말하고 이러한 공산주의자의 방송은 유엔한국위원단에 영향을 주려고 하는 선전이라고 공격하였다. 남한측이 공산정권에 대한 의거라고 하는 해주사건을 당지 미국인측에서는 도외시하고 있다.
경향신문 1949년 01월 27일
그러던 한편 제4국은 사리원-재령에 대한 공작활동을 전개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이범석은 해주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승만에게 "자신의 부하들(his boys)이 해주를 점령했다"고 자신만만하게 보고했을 정도로 대북공세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추진하던 대북공세 계획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사실상 끝나버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이승만은 족청통합 문제와 국방 제4국 설치 문제 등으로 인해 이범석과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상태였는데 여기서 그가 준비했던 대북공세 계획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면서 이승만의 입장에서 이범석은 더이상 활용할 가치가 없는 인물이 되었다. 결국 이범석은 최후로써 숙군을 다시 꺼내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이범석은 1949년 1월 20일 국방부 참모총장 채병덕, 정보국장 백선엽, 국방차관 최용덕 등 자신의 계열 군인들을 국방부로 불러 회의를 진행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이범석은 '우리는 국방부, 육군, 해군 내에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과 또 정부 내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며 숙군의 필요성을 강하게 시사했으나 문제는 이 시기의 숙군은 거의 끝난 상황으로 평가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범석이 주장했던 것과 달리 대대적인 숙군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때 미 CIC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한국군의 공산주의자 침투율은 1% 미만으로 축소된 상황이었다.[50] 즉 명확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범석은 사실상 국방부장관직에서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숙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2월이 되면서 뜻밖의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숙군이 다시한번 전개되었기 때문인데 바로 경찰이 이재복의 비서인 김영식을 체포했기 때문이었다.[51] 당시 경찰은 김영식의 집에서 다량의 문서들을 확보했는데 여기서 입수한 가장 중요한 문서는 한국군에 침투한 남로당원들의 명단이 적힌 문서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본 문서를 접하자 싹 쓸어버리라는 구두명령을 하달하여 숙군을 다시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백선엽 정보국장은 즉각 경찰에게 해당 문서를 군에 이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거부했고 이로부터 4일이 지난 2월 19일이 돼서야 해당 문서를 백선엽에게 넘겼다. 문서를 이첩할 당시 백선엽 정보국장은 자체적인 정보라인을 통해 숙군명부를 작성하고 있었다. 백선엽이 작성한 숙군 명부에는 약 700~1,000명 이상의 군인들이 등재되어 있었다.

이후 백선엽은 경찰에게 받은 남로당 명부를 검토해봤는데 신뢰성이 매우 의심스러웠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예 군에 복무하지도 않은 민간인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거나 등재 이름에 중복된 이름이 있는 등 오류가 많아서 제대로 구별하기 어려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선엽은 이러한 오류를 모두 제거하도록 한 뒤 명부를 재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명부에 등재된 군인들 가운데 약 80%가 이미 체포되어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백선엽은 숙군명부를 수정하여 장교 112명, 사병 141명을 숙군명부에 올렸다. 이에 대해 미 정보부는 '초기 보고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국군의 과장된 보고가 또 한번 발생하였다'고 논평했다.

이들의 체포일자는 본래 2월 23일부터였다. 그러나 체포일자는 미뤄졌다. 이는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또다른 남로당 명부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본 명부는 로버츠 준장을 통해 이응준 중장과 백선엽에게 전달되었다. 이때 보고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로버츠 준장을 불러 그에게 487명의 육군 장병들의 이름이 남로당 명부에 등재되어 있고 이 중에는 채병덕도 포함되어 있다고 전했다. 또 이승만은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물었는데 여기서 이승만은 상당히 불안감에 휩싸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로버츠 준장은 이승만에게 '이범석 국무총리, 신성모 내무부장관을 만나 대책을 논의해보겠다'며 그를 안심시켰고 이후 김태선 서울시경국장, 채병덕 국방부총참모장을 만나 본 명부를 상세히 조사하였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로버츠는 채병덕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굉장히 불안해 하였는데 이는 채병덕이 남로당 명부에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로버츠는 자리를 옮겨 KMAG 참모진들에게 찾아가 명부를 번역 및 검토할 것을 지시한 뒤 이응준, 백선엽에게 찾아가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로버츠는 이응준에게 남로당 명부에 등재된 군인들 중에는 김홍일 중장, 채병덕 중장, 그리고 송호성 준장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을 속히 체포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응준 중장이 즉각 거절의사를 표했기 때문에 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로버츠는 명부에 등재된 기타 군인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며 물었고 이에 이응준은 모두 체포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이때 백선엽은 명부에 등재된 군인들 가운데 2/3은 이미 체포된 상태라고 로버츠에게 말했다.[52] 이후 로버츠 준장은 남로당 명부를 이응준에게 넘긴 채 사라졌고 명부를 받은 이응준은 명부를 즉각 백선엽에게 넘겼다.[53] 이외 로버츠는 남로당 명부에 6연대장 김종갑, 15연대장 김현수, 18연대장 최석 등도 함께 등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추후 KMAG과의 면담에서 로버츠는 이 연대장들이 명부에 등재된 것은 경찰 때문이거나 아니면 정치적인 경쟁 때문에 등재된 것이라고 밝혔다.

여하간 명부를 받게 된 정보국장 백선엽은 자신이 적은 숙군명부와 로버츠에게 받은 남로당 명부를 대조하며 새로운 숙군명부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두 가지의 문제점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명부에 적힌 이름이 모두 한자라는 점과 중복된 이름이 많다는 점이었다. 백선엽은 이 두 가지의 문제점을 모두 해결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한자로 적힌 이름은 모두 한글로 변환하고 중복된 이름은 제거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많은 시간이 소요되면서 결국 숙군 단행 시일은 2월 26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2월 26일이 되자 정보국은 마침내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새로운 숙군 명부가 완성됐고 같은날 김안일 소령에 의해 김종석 중령이 체포됐으며 아울러 제10연대에서 사병 8명이 긴급 체포되는 등 숙군의 성과가 곧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54] 2월 26일부터 3월 3일까지 정보국은 장교 64명, 사병 68명을 검거했고 미검거자인 121명(장교 48명, 사병 73명)의 군인들은 정보국의 감시 하에 두도록 하였다. 한편 이날 각 형무소에 수감된 장병의 수는 장교 203명, 사병 1,263명 등으로 총 1,466명이었다. 반면 미검거자의 수는 368명(장교 113명, 사병 255명)이었다. 이렇게 높은 성과를 보이자 채병덕은 다음과 같이 밝히며 숙군은 계속할 것이지만 군 내 남로당 조직은 완전히 탄로되었다고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남사건을 전후하여 숙청을 단행하고 있는데 반란사건 관계자 이외에도 장교 126명, 병사 1,170명 외에 지방민으로써 관계한 자 수십명을 검거하였는데 지방민중의 책임자인 이재복(李在福), 이용수(李龍洙), 김영식(金永植-비서)과 군인 최고 책임자인 김종석(金鍾碩-중령), 최남근(崔南根-소령[55]), 오일균(吳一均-소령)을 수일 전에 체포함으로써 국군 내의 세포조직은 완전히 탄로(綻露)되었다. 그러나 숙군은 남북통일과 아울러 세계적인 배후를 가진 공산사상을 격멸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조선일보, 1949.03.04
이때 형무소에 수감된 군인들에 대한 처리는 1949년 5월 3일 로버츠 준장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로버츠는 '이전에 공산주의 활동한 것으로 의심되었던 군인들에 대한 한국군의 추가 조치는 없었'고 또 '한국군은 현재 숙군이 약 90% 이상 달성했다고 보고 있으며 천천히 추가체포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즉,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정보국에서 전송한 '불순분자 체포 보고'를 보면 실제 체포자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검거자의 경우 고작 205명 밖에 되지 않았으며 미검거자 역시 149명 밖에 되지 않았다.[56] 사면계획이 이때까지도 계속 유지된 것이다.[57]
계급 검거 구금 검거 비율 미검거자
장교 124 316 39% 50
사병 81 1,518 5.3% 99
205 1,834 11.1% 149

이때 검거비율이 낮은 이유는 신성모 국방부장관 시절에 숙군을 하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버츠 준장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군과 정보국은 이제 체포에 대한 허가를 받기 전 최소 3개의 기관에다 체포 보고를 올려야 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명시한 3개 기관들의 명칭은 현재로선 파악하기 어렵다.[58] 다만 이 기관들을 통해 이전처럼 무차별적인 검거가 줄어든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와같이 숙군은 1949년 3월부터 5월 초까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당시 군 내에서 반란사건이나 혹은 대규모 소요사태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으며 사면계획이 시작됨에 따라 기존의 강경적인 모습이 다소 사그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는 숙군을 당한 이들을 감면하는 등 온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49년 5월 4일 강릉 8연대 2개 대대가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숙군은 다시 부활하게 된다.

3.5. 강·표월북사건과 숙군의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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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 부근 야산에서 군인들을 총살하는 모습

강·표월북 사건은 강태무, 표무원 총 2명의 8연대 대대장이 총 3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이다.[59] 1967년 국방부에서 편찬된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표무원과 강태무 둘 모두 오일균, 최남근과 같은 세포조직원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들은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단행된 숙군을 피하기 위해 월북을 감행했다고 하며 이때 북한과 사전 내통한 뒤, 안전하게 월북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당시 군사고문단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제8연대 2대대 소속 한정희 중위는 월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중대로 돌아가 탈출을 감행했는데 탈출도중 같은 8연대 소속인 최동섭 중위와 지청룡 중위를 봤다고 한다.

이들 중 한 명은 북한군에게 발각되어 총상을 입었고 얼마안가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고 한다. 이같은 사례를 봤을 때 사전에 통지한 뒤, 월북을 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사전통지를 했다면 북한군이 총격을 가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강태무가 남로당계 세포였다는 것도 매우 의심스럽다. 월북 직후, 강태무는 즉각 북로당에 신규가입을 했는데 본래 남로당원이었다면 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 강태무는 박갑동과의 대화에서 월북한 것에 대해 전부 털어놨는데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강태무는 오직 숙군이 두려워서 월북을 했다고 시인했다.[60]

이때 강태무는 김구 계열 군인이었으나 평소 불순한 언행을 해 왔기 때문에 육군본부 정보국과 헌병대에서 자신을 찾아올까 하는 두려움에 빠졌으며 이로 인해 강태무는 형인 강태열에게 겁이 나서 군에 있지 못하겠다고 하소연까지 했다고 한다. 즉, 강태무가 월북한 것은 순전히 숙군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태무의 무모한 선택은 곧 참혹한 대가를 가지고 왔다.[61] 당시 육군총참모장 이응준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62] 기존 숙군에 대해 온정적으로 대하던 신성모 국방부장관 역시 “국방군이 금후로는 여사(如斯)한 소란이 없도록 숙군을 철저히 하기 위하여 비상수단을 취하겠다”고 강경한 의지를 내비쳤을 정도로 숙군을 다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로써 숙군은 다시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숙군을 담당하는 기구가 매우 많아서 만약 진행된다면 굉장히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 뻔하였다. 당장 정보국 조직만 해도 무려 50여개에 이르고 있었고 체포조직도 헌병대, SIS, 정보과 등 독립적인 조직이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아 지휘계통마저 혼란스러웠다.[63] 그러나 이는 숙군이 곧바로 단행되었기 때문에 개선을 전혀 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군인들이 별다른 조사없이 숙청되는 결과를 가지고 오고 말았다.

1949년 5월, 숙군으로 인해 체포된 자의 수는 다음과 같다.[64]
계급별 검거자 감시 하에 석방된 자 미검거자
장교 100 19 127 246
사병 1,579 4 714 2,297
1,679 23 841 2,543
무려 단기간에 1,679명의 장교와 사병을 체포했다. 너무 많은 수의 군인들을 체포한 결과 각 연대에서는 제대로 된 재판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전에 장성들과 협의한 후 미리 형량을 정해 놓은 뒤 재판하였다. 이 재판은 수십명의 군인들을 단기간에 처리하는 용도였다. 당시 8연대 소속 박윤진씨는 1949년 6월 재판을 받을 때 이와 같이 회고했다.
구술자: 그러니까니 절차가 정상적으로 하지 않고 대량적으로 하니까. 피고 인자 검찰관이나 법무관이 있어가지고 이름 쭉 부르고 죄상 누구누구 전부 국가보안법 몇 호 위반.… 국방경비법 위반. 군법이 형법이지. 그 위반으로 그걸 했다고 고발하면 재판관이 말이여, 그 인자 조사 날짜 한 기록을 갖다가 누구누구는 몇 년 몇년 판결을 하고 끝난다고. … 변호인은 없어요.

면담자: 그걸로 그냥 수십 명을.

구술자: 그래, 10분 될까 말까
박윤진씨의 증언[65]

재판은 단 10분만에 끝났다. 피고인들은 변호인도 없이 재판을 받았고 재판을 받는 이유조차 몰랐다. 이후 그들은 형무소에 수감됐다. 증언자인 박윤진씨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다행히 박윤진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대문형무소에서 탈출했고 곧바로 일본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때 이루어진 군법회의 실적은 1949년 9월, 군 법무장교가 로버츠 준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66]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된 군인들을 계급별로 나눠 보자면
계급/소속 고등군법회의 특별군법회의 약식 군법회의
장교 83 - - 83
하사관 206 19 3 228
사병 158 28 7 193
민간인 98 - - -
합계 545 47 10 602

주로 하사관들이 가장 많이 군법회의에 회부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병은 고작 193명에 불과하나 하사관은 무려 228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반면에 장교는 83명만이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재판에 회부된 이들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받았다.
구분 공산주의자 판결 비공산주의자 판결
사형 9 - 9
무기징역 18 1 19
징역 20년 93 - 93
징역 5~10년 128 9 137
미확인[67] 167 128 295
합계 415 138 553
해당 판결 내용을 살펴보면 사형과 무기징역 비율이 적은 대신, 징역 10~20년을 언도받은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68]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재판의 형식이 거의 즉결처분에 가까웠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제대로 된 절차 없이 판결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판을 받은 군인들은 곧바로 형무소로 끌려갔다. 이들은 형무소에서 각종 노역을 하다가 종종 탈옥 사건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는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두 학살됐기 때문이다. 공주형무소 학살과 목포형무소 학살 및 마산형무소 학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정보국은 1949년 6월부터 광복군 출신 군인들에 대한 사찰 지시를 하달하여 숙군의 범위를 더더욱 확대해 나아가고 있었다. 일례로 당시 광복군 제3지대 출신이었던 최세득 중위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면서 숙군을 담당했다 하는데 1949년 6월, 김구 주석이 암살되고 며칠 정도 지나자 상부로부터 '임정계열 장교들의 사상을 살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최 중위는 즉각 의심을 받았다. 그는 조사과 동료들로부터 '술 한잔 마시더라도 몸 조심해'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러자 최 중위는 자신이 조사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 중위는 결단을 내렸다. 정보국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피신을 하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는 도피하기 위해 평소 자신과 친하게 지냈던 웜스(Benjamin Weems) 예비역 소령에게 찾아가 '임정 계열 장교들에 대한 뒷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나도 예외가 아닌거 같다'며 군 보직을 변경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웜스 소령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어 1949년 8월 최 중위를 맥아더 사령부 정보부에 소개시켜주곤 그곳에 복무하도록 권유하였다. 최세득은 그곳에서 연락장교로 일하다가 1952년 무사히 전역했다.

이외에도 중일전쟁 당시 국민혁명군 출신이자 광복군에 협조했던 김소 중위는 1949년 말 서부전선에서 중대장으로 복무하던 중 특무대원인 엄자명 중위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았는데 당시 특무대는 정보국으로부터 광복군에 대한 조사방침을 하달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김소 중위에게 먼저 이 사실을 전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사 과정에서 숙군 당한 광복군 군인도 있었다. 채원개의 경우 제2여단장으로 복무하던 중 정보국에 의해 체포되어 1949년 7월 30일 육군본부 특명 제164호에 따라 불명예 파면되었다.[69]이처럼 정보국은 이미 광복군에 대한 조사는 물론 이들에 대한 숙군 작업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숙군은 계속되었는데 1949년 6월 13일자 정보국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까지 좌익혐의자 중 체포되지 않은 자'의 수가 '장교 20명, 하사관 83명, 사병 78명' 등으로 총 181명으로 보고하였다. 이어 7월 1일에는 6월 불순분자 검거실적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계급 검거 군법회의 회부 석방 취조중
장교 56 23 15 18
하사관 282 127 40 115
사병 244 110 72 62
582 260 127 195
정보국은 6월 1일부터 30일까지 총 582명의 군인을 검거하여 이들 중 260명을 재판에 회부했고 127명은 석방, 나머지 195명은 취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5월에 진행된 숙군에 비하면 규모가 다소 줄어든 것이었다. 미 정보부는 이 보고에 대해 '숙군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서도 동시에 '과거와 같이 연대장의 보증이 있으면 불순분자에 대한 체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사라졌다'고 전했다.

이같이 숙군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 1949년 8월부터 정보국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갑자기 신성모 국방장관이 채병덕의 빈자리를 신태영으로 앉히고 정보국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1949년 5월 당시 신성모는 숙군을 진행하라고 시사했지만 실제로는 군에 대한 영향력을 제대로 끼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이는 호림부대의 공작 사건과 정보국의 난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신성모는 정보국에서 주도하는 6월 대북공세에 대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이를 통제할 수도 없었다. 이는 신성모가 이때까지 군에 대한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걸 의미했다. 그중에서 정보국은 신성모가 거의 손을 댈 수 없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해체가 절실했고 결국 1949년 5월 2일 국방 제4국을 해체하는 것을 시작으로 1949년 10월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신태영을 앉힌 다음 군부를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곧바로 정보국에 대한 개편을 시도하였다.

신성모는 1949년 8월 말, 정보국과 헌병대 SIS 등등 숙군을 담당하는 기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나는 헌병대와 정보국, 군사법원, 감찰부가 군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제거하고 규율을 확립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군의 빠른 발전과 개선이라는 더 큰 목표를 달성하고자 이 기관들의 주장을 칭찬하는 것보다는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되도록이면 솔직하게 오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의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 목표와 크게 멀어질 것이고 군의 실책과 군의 존엄성을 해치며 나아가 국민들의 신뢰까지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각 기관의 권한범위를 명확히 하고 잘못된 행동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겠다.

SIS: 이 기관은 간첩과 방첩활동 그리고 숙군에만 그 권한이 적용된다. 다만 군 공산주의자와 관련이 있는 민간인을 대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부터 SIS는 군대와 관련이 없는 상인과 민간인을 위해 모든 일을 중단하라. 영장 없이 양민들을 체포하는 것을 멈춰라. 군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통제 받아야 한다.

재판부: 재판부는 공정한 재판을 하도록 노력하라 재판부는 수많은 범죄자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불공정하게 재판을 하였다. 만일 이러한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군 지도부는 이를 심히 고려할 것이다. 또 법무관은 상급자에게만 보고해야 한다. 이외에도 나는 법무관들이 종종 인원 부족을 핑계로 죄수들을 몇 달 넘게 형무소에 가두는 모습을 보았다.

감찰부: 감찰부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장교들을 조사하는 것은 임무가 아니다.

헌병대: 헌병대는 군의 규율을 확립하고 군 전체에 모범을 보여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헌병대는 영장 없이 군 장교와 사병들을 체포할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거 같았고, 많은 헌병들이 취조 과정에서 장교들을 고문하였다.

SIS에 대한 조언을 덧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1. 다음 사항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라.
ㄱ. 군기에 어긋나는 행동과 생각을 하지 말고 또 특권도 버려라.
ㄴ. 이기심과 편견을 버려라
ㄷ. 불법적인 요구를 금지한다.
ㄹ. 고문을 금지한다.
ㅁ. 특히 사복을 입을 때는 주의해라.
ㅂ. 민간인, 장교, 경찰을 대하는 태도를 개선해라.
ㅅ. 조사할 시, 취조인을 보호해라.
ㅇ.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 음모를 다각도에서 수사하고 이를 예의주시해라.'

신성모는 정보국과 헌병대의 이탈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이를 막고자 했다. 이어 1949년 9월 29일, 민보단장 고희두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자 신성모는 점차 수사기구를 일원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1949년 10월 5일 제5회 14차 국회본희의에 참석한 신성모는 고희두 민보단장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동대문 高민보단장사건은 내가 그 보(報)를 물었을 때 당장에 가해자를 잡아다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총살을 하고 싶었으나 법치국가의 체면이 있으므로 법에 의하여 조사중에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서라도 이런 행사가 없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동한 목표이다. 한편에서는 이렇게 안하고는 공산도배를 잡을 수 없다 하나 이런 행동은 도리어 공산당 아닌 사람을 공산당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가 올 것이다'고 발언하여 방첩대의 비행을 맹비난하였다.

신성모는 9월 28일 "앞으로 방첩대가 민간에 대해서 비행(非行)을 하면 총살할 터이다"고 발언한 것에 이어 10월 1일에는 SIS대장 김창룡을 5사단 광주로 전출보냈다. 이는 고희두 사건과 연관지어 김창룡을 좌천시킨 것으로 숙군의 또 다른 변화를 의미했다. 이후 1949년 12월 신성모는 해군 CIC와 항만방첩대를 폐지했는데 해군 CIC의 경우 민간인 취조와 고문을 근거로 해서 페지시켰고 항만방첩대 역시 동일한 이유로 해체하였다. 이때 신성모는 '앞으로는 방첩대라는 것은 육군 해군을 물론하고 두지 않을 방침이다'며 방첩대의 완전한 폐지를 발표했다.

1950년 1월 13일, 신태영 육군참모총장의 발표에 따르면 당시 신성모는 방첩대를 없앤 다음 새로운 수사기구를 편성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방첩대를 모두 없애 수사기구를 일원화하려는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구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특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해당 자리에서 신태영이 새로운 수사기구에 대한 질문을 '그 내용은 있어 말 할 수는 없'다며 질문을 일축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어서 신태영이 '이번 기구에 일대 혁신을 가하여 정보활동을 유기적으로 하는 동시에 종래의 결함을 교정하게 되어 국민에게 끼치는 페단은 일소될 것이라고 본다'고 답변한 것을 보면 신성모가 추진한 수사기구는 기존 방첩대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할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숙군을 담당한 정보국, 즉 방첩대의 존재가 서서히 사라지자 숙군 역시 다시 안정화됐다. 1949년 11월 25일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숙군에 대해 '숙군은 부단히 실행하여 온 바인데 극소수의 어리석은 사병이 혹 있을까 해서 군 내부에서 자수기간을 정하여 방금 자수를 권고하고 있는 중'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숙군의 실적은 1949년 8월 5일~30일까지 163명의 군인을 체포했고 9월에는 기갑연대 소속 6명의 장교들을 체포했다. 나아가 1950년 2월 24일까지 체포된 군인의 수는 56명(공군 7명)이었다. 이전처럼 대대적인 숙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1949년 12월 21일 형무소에 복역 중인 54명의 사형수들을 모두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10년 미만의 형을 선고 받은 257명의 군인들은 전원 석방하도록 했는데 이는 숙군이 소규모로 축소되면서 이전에 중단됐던 사면계획이 필요해지자 죄수들을 감형 및 석방해준 것이었다.

이처럼 숙군은 실질적으로 1949년 6월까지 진행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진행된 숙군은 소규모에 불과하였다. 이는 신성모의 정보국 해체와 아울러 강·표 월북사건과 같은 사건들이 더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된 이들 중에는 감형 및 석방되어 복직한 자도 존재했다. 김청 중위와 노재길 대위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숙군을 당한 피해자들 중 일부는 복수극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서 제8사단 제10연대 2대대장 정승일 소령 살인사건이 있겠다.

1950년 1월 13일 아침, 정승일 소령은 운전병과 함께 지뢰부설을 감독하기 위하여 대대 지휘부에서 떠났는데 당시 김청 중위는 그의 옆에서 지도와 서류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운전 도중 정승일 소령이 탄 지프차가 오성리 부근에서 도랑에 빠졌고 정승일 소령은 서둘러 자신의 부관과 소 중위를 본부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때 운전병은 차에서 내려 상황을 살피고 있었는데 여기서 갑자기 김청 중위가 총을 꺼내더니 옆에 있던 정승일 소령을 사살했다.

이어 그는 운전병에게 총을 쏘았으나 맞추는데 실패했고 이에 놀란 그는 재빨리 오성리로 달아났다. 김 중위는 그곳에서 대대장이 보낸 장교들을 모두 죽인 뒤 야산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안가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었고 부상당한 채 본부로 압송되었다. 당시 김 중위는 3개월 전, 대대장의 신고로 인해 숙군을 당할 뻔했고 이로 인해 대대장과의 사이가 굉장히 안좋았다. 비록 그는 군법회의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군에 복직했지만 분을 풀지 못했으며 결국 참지못한 그는 정승일 소령과 휘하 장교까지 모두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사건 발생 이후 10연대는 곧바로 군법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10연대 헌병사령관이 그를 이해한다는 취지로 그를 석방시켜 주었고 결국 재판은 빠른 시일 내에 끝났다. 이때 사망한 정승일 소령의 군적부는 파면되었다.

이외에도 숙군을 피해 달아난 강득진 중위 등 숙군이 두려워 군에서 도망치는 사례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1950년 이후에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숙군이 소규모로 축소됐기 때문이었다. 신성모는 이 시기에 숙군을 담당한 방첩대를 해체하는데 주력했으며 나아가 군 정보기구를 없애고 새롭게 다시 출발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숙군은 그 예전의 모습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4. 숙군의 결과

'국방부의 모든 계획은 국방부 장관에 의해 통제된다. 그가 어떤걸 시작하거나 중단하는걸 원한다면 절차를 통해 빠르게 이루어진다. (중략) 한국군 참모부의 모든 장교들은 국방부 장관 이범석을 두려워한다. 그가 '진행하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그들은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미 군사고문단의 논평, 1948.11
여순사건 이후, 이루어진 숙군으로 인해 최소 4,749명의 군인들이 1949년 7월까지 총살,유죄, 감면 등으로 숙청됐다. 당시 한국군 전체인원이 46,251명인걸 감안하면 무려 10%에 해당하는 인원이 숙군된 것이다.[70] 이 중에는 김종석, 최남근 연대장을 비롯한 고위급 장교들도 숙청됐다.[71]사병들은 이보다 훨신 많았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숙군으로 인해 한국군의 인력공백 현상은 더더욱 심해져만 갔다.

따라서 군 당국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기존의 모병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모병 방식을 택했다. 당시 새로운 모집방식이란 우익 청년단체 회원과 '신원보증제'에서 통과된 청년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방식이었다. 신원보증제는 일종의 사상검증과도 같은 것이었다. 1948년 12월 부산 제5연대의 모집공고를 보면 지원자격으로 '18~30세까지 국민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에 민족정신 위대하고 신체 건강한 자'와 구비서류로 "면장의 신원조사서, 경찰청장의 신원증명서, 지방 유지의 보증서"를 요구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면장의 신원조사서, 지방유지의 보증서, 검찰청장의 신원증명서'는 모집자의 과거행방을 참고해 과거 좌익적인 행동을 한 바가 있는지를 검사하는 것이었다.

반면 청년단체 회원들은 이미 신원보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에 안정적으로 입대하는 게 가능했다. 군에 입대한 청년단체 회원들은 곧바로 군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일례로 제2여단에 입대한 서청단체 회원들은 특별중대로 활동하여 부대 내 적색분자를 잡아내는 역할을 수행했고 나아가 민간인을 학살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대표적으로 제주 제2연대 제3대대는 서북대대라고 불리며 서청 회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는데 이들은 제주 4.3 사건 당시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인 북촌리 학살사건을 일으켰다.[72]

이와 같이 청년단체로 군을 메꾸자 이범석은 곧바로 군의 사상을 통일하는 방안으로 나아갔다. 이미 그는 1948년 11월 11일 육사생도들 앞에서 '군은 사상, 의사, 행동, 명령계통 전부가 선명히 일치되어야 한다. 이에 위반되는 군의 존재라는 것은 절대로 불가한 것이다'라고 연설한 바가 있었던 만큼 군의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이범석은 1948년 12월 1일 여순사건 합동위령제에서 '국군 3대 명서'를 선포했다.
國軍 三大 宣誓
一, 우리는 선열의 혈적(血跡)을 따라 주검으로써 민족국가를 지키자.
二, 우리의 상관 우리의 전우를 공산당이 죽인 것을 명기하자.
三, 우리 군인은 강철같이 단결하여 군기를 엄수하며 국군의 사명을 다하자.
또 이범석은 군에 대대적인 반공 이념을 정착시킬 것을 주문했는데 이 명령을 받은 이응준은 11월 20일 아래의 사병훈을 채택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군인이 되자. 진정한 군인이란
1. 군기가 엄정하여 상관의 명령에 충심(衷心)으로 복종할 것이며, 상관을 존경하고 부하를 사랑하여 화목단결할 것이며,
2. 각자 맡은 책임에 성심성의 사력을 다하여 이것을 완수할 것이며,
3.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여 그들로부터 애(愛)를 받을 것이며,
4. 공직에 용감하고 사투에 겁내며 특히 음주폭행을 엄금할 것이며,
5. 정직결백하여 부정행위가 전무할 것이며,
6. 극렬파괴분자를 단호 배격하여 그들의 모략선동에 엄연(嚴然) 동치 말 것이다. 이러한 군인이라야 비로소 우리 대한민국의 간성이 될 것이며 우리 동포의 옹호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범석은 국방 제2국 정훈국을 토대로 본격적인 반공 교육에 나섰다. 정훈국은 창설 초기부터 정훈교재를 제작하고 이를 민간,군 부대에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정훈교재 주 내용은 공비토벌작전,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양하는 내용들이었다. 그 중에서 고위급 장교들은 정훈교재에서 '군신(軍神)'이라 부르며 찬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인기와 위대선이 있다.[73]

이와 같이 군을 완전히 장악한 이범석은 얼마 안 가 대북공세에 나섰다. 그가 이끌던 국방 제4국이 해주사건을 일으켰고 수풍댐을 파괴하고자 하는 공작이 개시됐으며 나아가 전방부대의 대북공세도 시작됐다. 이때 이범석은 이러한 대북공세에서 발생하는 각종 학살 행위에 대해 방조, 묵인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국방부 소속 신중위 부대가 1949년 1월 20일 이북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학살, 납치하는 행위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가 이범석에게 항의를 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다.[74]

또 이범석은 3월 18일 '적비(赤匪)의 무자비한 범죄행위를 처단하기 위해 국방경비법 제32조, 33조에 해당하는 범인은 신분 여하를 불문하고 군법회의에서 처단해야 한다'는 명령을 전 부대에 하달했는데 이는 군이 사법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민간인 학살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었다. 법무부는 즉각 반발하였다. 법무부장관 이인은 이범석의 이같은 지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헌법 제76조는 그 재판권은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하는 법원이 행한다고 하고 있으므로 국방경비법에 의한 군법회의는 대법원을 최고심으로 하지 않은 현재에 있어서 위헌이므로 적어도 군인, 군속 이외의 자에 대하여서는 하등 재판권을 행사치 못할 뿐만 아니라 국방경비법 제32조 및 제33조는 적국의 존재를 전재로 하는 규정이므로 남한의 현 사태를 전시라고 하여 계엄이 선포되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동 각 본조를 군인, 군속 이외의 자에 대하여 적용함이 부당함을 재언을 요치 않는 바임
이인 법무부장관은 민간인에 대한 군법회의 적용의 근거가 되는 제32조 및 제33조에 대하여 ‘군법회의가 현재 대법원을 최고심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과 계엄이 아닌 상황에서 국방경비법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들어 해당 명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범석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949년 7월 14일 공문을 통해 ‘국방경비법 제32조 및 33조 해당 민간인은 헌병만이 개정형사소송법에 의거하여 법원의 영장을 얻어 처리하며, 기타 범죄로 현행범이 아닌 경우에는 검찰청이나 경찰에 연락 통보할 것’을 지시했다. 즉, 이범석은 국방경비법을 민간인에게도 적용시켜 군법회의에 넘길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결국 이범석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군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더욱 넓혀갈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계엄지구에 주둔한 토벌군은 민간사회를 통제하고 때로는 포고령을 내려 명확한 규정 없이 총살 대상자를 구분하였는데 특히 1949년 9월 10일 제3사단 제23연대가 사단장 이응준의 명의로 발포(發布)한 포고령은 총살 대상자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끔 유도하였다.
(1) 반도에게 정보 무기 금품식량 의류 등을 제공하여 이적행위를 한 자
(2) 공산도배들의 소위 9월 총선거에 참가하는 자
(3) 살인방화 또는 통신교통 기타 국가공익기관에 방화 파괴하는 자
(4) 허위선전과 유언비어로 군경관민을 이간 또는 민심을 소란케하는 자
(5) 반도에 관한 정보를 알면서 이것을 군경에게 통보치 않은 자
(6) 무기 기타 폭발물을 은닉하는 자
(7) 기타 군경의 작전행위를 불리케하는 자 등은 총살 또는 엄벌에 처할 것이며, 반도의 소재지, 기타행동을 고하는 자 무기 및 폭발물 등을 가지고 또는 은닉장소를 보고하는 자, 기타 군경작전 행동을 유리케하는 자는 포상을 받게 할 것이다
당시 토벌대는 총살 대상자 또는 엄벌 대상자의 범위를 '기타 군경의 작전행위를 불리케하는 자'라고 규정하여 적용의 범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아 자의적인 처리를 가능하게끔 하였다. 뿐만 아니라 토벌대는 '반도에게 정보 무기 금품식량 등을 제공'한 자 역시 처벌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국방경비법 제32조, 제33조에 등장하는 내용과 완전히 동일한데 이범석은 앞서 본 법령을 민간 사회에 적용시컸으므로 군이 반도에게 의류, 금품식량, 정보 무기 등을 제공한 민간인을 국방경비법에 의거하여 별다른 문제 없이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군의 영향력이 막강해지자 토벌군은 지방순시를 온 국회의원들을 향해 '계엄령 지대에서는 국회의원도 소용이 없고 대통령도 소용이 없다'는 폭언을 하기까지 했다. 민간 사회의 강압적인 통제와 학살, 그것이 바로 토벌지구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숙군은 이러한 행위를 가능케 해준 열쇠와도 같은 수단이었다. 군은 숙군을 통해 반대파를 매우 성공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고 우익청년단원들의 입대와 군의 적극적인 반공활동을 통해 군을 정치화시켰다. 조선경비대 시절부터 내려오던 '군의 정치적 중립'과 '불편부당'을 완전히 폐기한 것이 대표적인 에시이다. 그리고 1949년 3월,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오자 이러한 정치군대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이는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군의 정치개입을 묵인,방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1949년 6월 말 신성모는 대통령 이승만의 계엄령 선포 계획을 '북한의 인민공화국과의 협력을 옹호하는 좌익 및 “중도파들”의 완벽한 숙청'을 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적극 지지한 바 있었는데 해당 계획은 수도권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좌익단체들을 모두 탄압한다는 계획이었다.[75] 즉, 신성모는 계엄령으로서 중도파를 숙청시키기 위해 군의 정치개입을 승인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과 헌병사령부를 중심으로 군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군은 국회의원들을 연행하여 곧바로 군법회의에 회부했으며 나아가 김구 암살사건의 피의자 안두희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이때 채병덕은 군의 정치개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며 군의 정치개입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76]
군은 국방력 강화 및 정신무장을 위하여 정화와 肅軍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타기관 내에 잠입 蠢動하는 불순분자 및 파괴분자가 아직도 남아있음은 유감이다. 군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절의 파괴행동에 대하여 단호 용서치 아니할 방침이니 全애국국민의 협력지원을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자유일보, 1949.06.26
당시 국회의원들은 면책특권이 전부 보장된 상태였으나 군은 이를 무시하고 헌병대를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체포하였다. 1949년 6월 21일부터 헌병대는 김병회, 김옥주, 박윤원, 강욱중, 노일환 의원을 체포했고 6월 25일 국회 부의장 김약수 의원도 체포하였다. 군의 이러한 행위는 곧 대한민국을 수호하려는 군의 애국적인 활동으로 소개되었다.

6월 공세가 끝난 이후에도 군은 또다시 정치에 개입하려 하였다, 1950년 4월 신태영 육군참모총장과 치안국장은 헌병,경찰을 출동시켜 인민군 부사령관이라고 하는 자인 최동석을 체포하고 민국당 고위당원들이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누명을 씌웠다. 그런 다음 군부는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88구락부, 서울시장 윤보선, 전임 내무장관 김효석 그리고 이기붕, 오반영 등 대통령 측근들까지 용공혐의를 씌웠다. 그러나 선우종원오제도 검사의 수사로 인해 해당 사건은 조작으로 밝혀졌고 다행히 아무런 피해 없이 사건을 끝낼 수 있었다. 군은 이 과정에서 헌병사령부를 동원해 국방부장관 신성모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본 사건의 책임자로 몰린 신태영 육군총참모장은 곧바로 신성모에게 사표를 내고 총참모장 대행 자리에서 물러나갔다. 이후 군의 정치개입은 한국전쟁 발발과 부산정치파동으로 인해 더욱 극심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숙군은 실질적으로 1949년에 끝났지만 그 영향은 지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군은 군의 정치화와 군의 대민통제 등 군의 권한을 이른바 무소불위로 만들어주었고 각종 공안사건을 일으켜 반공활동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백범 김구 암살사건, 그리고 대한정치공작대 사건도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군의 이같은 관행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도 지속되어 정치군대로서의 행보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5. 기타

숙군 당시 정일권, 백선엽, 강문봉, 원용덕 등 최고위급 장교들도 이때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생했다고 한다.

공군에서도 숙군이 일어났다.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 L-4 한 기, L-5 한 기 등 총 2기의 연락기가 월북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창룡은 공군 창설요원을 비롯하여 파일럿 등을 모두 체포했다. 약 50여명이 군인들이 구금됐고 이중에는 김신, 김정렬, 장덕창 등 공군의 주요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가 개입하여 숙군을 멈출 것을 김창룡에게 요구하면서 결국 전원 석방하게 됐다고 한다.

숙군 덕분에 한국전쟁 때 국군이 버틸 수 있었다고 하는 애기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

여순사건에서 숙군 과정과 포로 심문 과정을 모두 지켜 본 풀러 대령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했다.
한국군의 정보기관 상태는 열악하다. 한국군 정보과(s-2)는 정보 수집 및 평가에 대해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정보과는 경찰의 보고와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민간인의 보고를 전적으로 의존했고 또 정보를 얻기 위해 포로들을 신속하게 심문하는 체계적인 시스템도 갖추지 못했다.
Deficiencies Noted in Operations, 1948, 3p

박정인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이 당시 숙군과 관련된 일화가 존재한다.
일제 때 만주에서 일본군 헌병으로 활약한 김창룡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일단 빨갱이로 보고 대했다.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 아래 군 서열과 계급을 무시하고 닥치는대로 사람을 잡아 가두고 족치니 배겨날 사람이 없었다. 그런 때에 박원석 대위와 홍승화 소위가 잡혀 간 것이다.

이런 김창룡의 포악성을 알고 있는 김교장은 “이 일을 어떡해야 하나”하고 거듭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제가 특무대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래라. 생사람이 안 다치게 노력해 봐.”

나는 이날 오후 특무대로 달려갔다. 특무대는 명동 한복판의 명동극장을 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본부는 어두컴컴하고 음산했다. 방 여기저기서 몽둥이로 사람을 패는 소리가 들려왔고 매를 견디다 못해 에구구 숨넘어가는 소리, 다른 쪽에서는 비수보다 더 날카로운 비명이 복도를 타고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 왔으나 김교장의 지시도 있고 특히 두 사람을 체포해 간 이한진이 나와 육사5기 동기생이라는 점에 유의하면서 어떻게든 그를 만나 볼 작정이었다. 생도 시절 그와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형편이었다.

이한진을 찾아 신분을 밝히자 그는 나를 아는 눈치였으나 모른 체하고 내 위아래를 훑더니 “너는 여기 올 자격 없어!”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니, 날더러 자격이 없다고? 친구 두 사람이 잡혀 왔는데 올 자격이 없다고?”
“빨갱이가 아니면 나가 인마!”

그는 벌써 동기생도 안중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박원석은 우리 동기생 아닌가. 동기생이 좋다는 게 뭐냐. 그리고 홍승화는 내 고향 친구야. 내가 그들의 사상을 더 잘 알아.”

“네까짓 게 뭘 안다는 거야. 그래, 홍승화는 빨갱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 새끼가 더 악질이야. 전혀 협력을 안 해. 불평불만만 늘어놓는단 말야. 단단히 혼이 나야 돼. 대신 박원석은 협력을 잘해 준다. 그래서 풀려날 수도 있다. 그럼 됐나? 나가 봐.”

빨갱이가 아닌데 혼이 나야 한다는 이 모순. 그리고 협력을 잘해 주면 풀려날 수 있다? 그건 또 무슨 기준인가. 나는 전신의 힘이 쏙 빠지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한편 육군사관학교 3기생은 동기생 김창룡으로부터 엄청난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는 김창룡이 '동기생 중 8할이 공산주의자'라는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창룡은 같은 육사 동기생을 적으로 바라보았다. 이 때문에 숙군이 시작되자 3기생 임관자 281명 중 258명이 취조를 받았고 60여명이 숙군 당했다. 숙군을 당한 임관자 중 일부는 한국전쟁 때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었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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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영기, "陸軍 創設期(1947년~1949년)의 肅軍에 關한 硏究,"국내석사학위논문 成均館大學校, 1998, 서울, 61~65p[2] 대한민국 임시정부중국 대륙장강 유역에서만 최소한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의식주에 투자할 돈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싱크탱크를 운영할 수 없었으며 한국광복군은 완전하게 분리한 독자적인 군사력으로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구김학규이범석지청천중화민국 국민정부위원회를 방문하여 일본 육군일본 해군조선인 병사들을 한국광복군에 편입하는 특혜를 베풀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여운형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무위대를 창설하여 8월 18일 치안대와 함께 한반도의 치안을 담당하게 했지만 조선군사령부참모장교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일본 육군일본인 병사들을 출동시켜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경성부대전부부산부의 치안을 계엄령에 걸맞게 유지했기 때문에 창군 운운은 아예 말도 못 꺼냈다. 이후 9월 8일 출범한 한국민주당은 '국방군의 편성'을 주요 과제로 내걸었지만 어디까지나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3] 약 2년 후 이혁기는 미소공동위원회의 건의대로 석방됐으나 1948년 2월, 인민혁명군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형무소로 수감됐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 다만 그의 친구였던 김계원 장군은 이혁기의 최후를 기억하고 있다. 김계원 장군은 나중에 그가 월북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사살됐다고 증언하였다.[4] 출처: G-2 P/R, no. 255(46.6.17), p. 2/no. 507(47.4.17), p. 3; COMGENUSAFIK to JCS(47.8.25), SWNCC Case Files, nos. 166 to 176.[5] 이는 군정당국이 조선경비대 상황에 대해 "민간인 중의 정상적인 좌우 비율이 경비 대원들 안에서 나타난다"고 논평한 것에서 확인 가능하다. G-2 P/R, no. 559(47.6.18)[6] 출처: Biographic Reports on the Cabinet of the Korean Republic. August 11, 1948, 이범석은 1946년 6월 한반도로 귀국함과 동시에 통위부 예하 경비대 고문직을 5개월 간 맡았다.[7] 출처: 제8호 보고서, 1946.08.02[8] 1948년 11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대사에게 서한을 보내 군 내 불충한 요소들이 아직 완벽히 제거되지 않았으므로 한국군의 완전한 충성도가 보장될 때까지 주한미군 주둔을 계속 유지시켜달라고 요구하였다. 駐韓美軍政治顧問文書: 1948.11~1949.11, 國史編纂委員會, 1994, 61p[9] 출처: Memorandum from Chae Byong Duk to Brig. General W. L. Roberts, Commanding General, PMAG: Special Investigating Board[10] 1948년 10월 23일 열차를 타고 여순사건 현장으로 가던 강영훈 중령은 합동통신 설국환 기자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사회경제의 혼란에서 오는 일부 행정관리 내지는 경찰의 부패를 곁에 보면서 국군병사들은 완전히 목표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군의 고민은 경찰 측에서 왕왕 말하듯 하는 국군의 불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입의 부족을 비행(非行)으로써 보충하는 많은 경관은 다만 묵묵히 어느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국군병사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대한 국군병사의 반경감정(反警感情)은 결코 상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공산당의 모략으로 발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제주상태만 하더라도 진압이 어려운 것은 경찰의 비행 때문입니다."[11] 이 가운데 김영만은 남로당 세포조직원으로 같은 조직원의 폭로로 붙잡혔다.[12] 정일권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14연대는 군법재판소가 없어 이렇게 회부했다고 한다.[13] 의무병 곽 모씨의 증언에 따르면 무려 1개 대대 병력 전체가 빠따로 탈영병을 한 대씩 때렸다고 한다. 총 400여대를 맞은 것이다.[14] 출처: Report of Military Operations against the Communist Revolt in South Korea, 3p[15] 이들이 언제부터 숙군작업에 착수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1949년에 작성된 '육군역사일지'를 보면 10월 29일부터 숙군 공작이 단행됐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정보국 조사대의 활동 역시, 10월 29일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미 군사 고문단의 기록에 의하면 군과 경찰은 10월 29일 따로 회의를 열어 해안경비대와 국방경비대 내에 있는 불순분자를 어떻게 조사하고 보고할지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회의 결과 경찰은 경비대원을 체포하지 않기로 합의했고 대신 불순분자들을 경비대에 신고하여 체포에 협조하기로 했다. 군사 고문단은 이에 대해 '경찰의 뜻은 모든 인원을 조사하고 신고하는 것이지만 먼저 용의자 명부를 초기에 조사한 다음, 즉각 행동에 나설 것이다'라고 평했다.[16] 1948년 9월 15일부터 11월 8일까지 한국군은 31명의 장교와 1~3학년 생도생 242명 및 기타 345명을 검거하여 총 618명의 군인들을 숙청시켰다.[17] 이같은 재판 방식은 제주 4.3 사건 당시 9연대와 2연대의 군법회의에 그대로 적용됐다.[18] 제14연대 장교 출신이던 김 모씨는 자기가 받았던 군법회의에 대해 이와 같이 증언하였다."그래 군법회의 그저 검찰관이 엉터리로 말한 것, 나한테 곧 당했지. 그땐 그랬습니다. 하도 많으니까. 뭐 누구 누구 했다, 누구 누구 했다 그냥 도매급으로 넘어가요. 그런데 나를 부르는데 김●●이라고 딱 왔는데 엄한 소리를 딱딱 했어 그래서 '검찰관! 똑바로 김●● 서류를 보고 심사를 해야지 다른 사람 서류를 보고 심사를 하면 되것냐고?' 반말을 했거든 그래가지고 사람 죽이냐고 말이여. 그러니 법무관들이 말이여 그럼 김●● 서류 내봐라. 그러면서 요래 아 이랬는데 어떻게 하다가 진압을 하고 오고 뭐 해서 6연대 해가지고 그러고 그러냐 이래가지고 딱 하니까 알았다고 끝났어. 그래가지고 다음 날 석방이 되어버렸어."[19] 9연대 숙군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던 이모씨는 숙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대체 죄가 있으면 취조해서 그걸 밝혀내야 하지 않습니까. 처형자 가운데 상당수가 취조 한번 받지 않고 학살터로 보내졌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채 희생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희생자들 모두가 산쪽과 내통했다면 학살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사람들이 왜 산쪽으로 가지 않았겠습니까. 여러 사정으로 볼때 산쪽에서 대단히 환영할 것이 아닙니까. 왜 생존자들이 귀향하다가 경찰의 손에, 혹은 산폭도의 손에 잡혀 죽었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산쪽과 연계가 없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강국형의 경우 5여단에 출장갔다가 돌아오던 날 잡혀왔는데 감방에 들어오면서 '1900군번 팔자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라며 한탄하더군요. 당시 9연대 군번은 1900으로 시작되었습니다. 9연대 장병들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지요."[20] 당시 즉결처분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했는데 단순히 민간인 학살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즉결처분했을 정도였다.[21] 9연대 수용소에 갇힌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우린 며칠 안으로 총살당한다. 그러니 도망칠 방안을 세워야 한다'며 탈옥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22] 로버츠의 비망록, 1948.10.30[23] 이때 반란기도 혐의로 체포된 장교는 박정희 소령, 안기수 소령, 나학수 소령, 이영섭 사령관, 오동기 소령 등이었다. 한편 체포되지 않았지만 체제전복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던 장교는 병기사령관 소병기 소령, 제14연대장 박승훈과 제4여단장 유재흥, 제7연대장 심언봉, 제13연대장 김익렬 그리고 공병단장 오규범 중령 등이었다. 이 가운데 김익렬 중령은 제14연대장을 역임했다는 이유 때문에 감금됐다가 풀려났고 오규범 중령은 이후 숙청되어 총살 당하였다.[24] 출처: History of the Rebellion of the Korean Constabulary at Yosu and Taegu, Korea, 1948.11.15[25] 이날 김안일 소령은 군사고문단에게 6연대, 15연대, 16연대에서 불순분자를 찾아내 검거했다고 전했다. 장교 3명, 사병 132명이 헌병에 의해 검거됐고 수용소 상황은 400명의 군인들이 구금되어 있다고 전했다. 김안일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다음 기사 참조. #[26] 공교롭게도 최남근이 재판에 회부되자 광주 주둔 4연대에서 200명의 군인들이 반란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27] 9연대 숙군과 형무소에서의 학살이 대표적인 예다.[28] 3월 말 군사고문단장 로버츠의 보고를 보면 정보국이 '적색계열 군인들을 취조하는 방식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군인들을 숙군명부에 올릴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즉, 로버츠 본인도 숙군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다 알고 있던 셈이다.[29] 당시 숙군에 도움을 줬던 정보경찰 김찬씨는 숙군의 전개방식에 대해 '그때 국군 숙청이 있을 때였어요, 기간병에는 경비대에 있던 고참병들이 왔거든요. 기존의 하사관들이죠. (숙군 때) 나는 경찰이었으니까 구속영장을 신청해서 사령관의 결재까지 받았거든요. 다른 곳은 엉터리였습니다. 그냥 잡아다가 조졌지. 합법적인 서류는 없었습니다. 내각 서류를 해서 사령관에게 올리기만 하면 도장이 찍혔어요.'라고 증언하였다. 즉 절차도 밟지 않고 현장에서 즉시 잡아가는 형식이었다.[30] 비밀수기의 내용을 보면 김창룡이 송호성에게 숙군에 관한 보고를 올리자 송호성이 격한 화를 내며 김창룡을 크게 질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창룡이 송호성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게 됐고 실제로 그와 연결된 최남근을 체포했다.[31] 출처: Impressions of Korean Conditions, 1948.10.26[32] 한국군 초기 역사를 듣다-군사영어학교 출신 예비역 장성의 증언, 국사편찬위원회, 133p[33] 이때 공석으로 남게 된 육군총참모장직은 국방부총참모장이던 채병덕이 한동안 대행하고 이후 김홍일이 부임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김홍일은 부임하지 못하였고 결국 총참모장직은 김홍일이 아닌 이응준으로 교체되었다. 당시 이응준은 이범석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34] 로버츠는 볼테에게 '2사단장 송호성은 준장이며 한국군 최초의 장성입니다. 그는 중국군 출신이며 원래 국방부장관이었던 이범석과 정치적으로 대립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져있으며 이범석 계파는 그를 가을 쯤에 외국(아마도 중국대사관 무관)으로 보내려고 합니다'라고 송호성을 소개했다. 출처:https://panzerbear.blogspot.com/2008/10/blog-post_15.html[35] 출처: 경향신문, 1949.01.23[36] 이범석이 국방부장관직에서 물러나가자마자 송호성을 호국군 사령관으로 등용시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37] 출처: 971st CIC Detachment Progress Report, Korea, 1948, 1p~95p[38] 출처: C.G, PMAG, KMAG Weekly Activites, 1949. 03.07[39] 당시 숙군은 군적기록을 지워버리는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9연대 숙군 당시 9연대 군인 약 100여명이 재판절차도 없이 불법적으로 학살됐는데 이때 학살된 군인들의 신원조사를 해보자 놀랍게도 극소수의 군인들만이 군적기록에서 확인이 될 뿐, 나머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9연대 1기생 윤태준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것은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고 봐야지요. 그때는 무법천지였습니다. 어떤 법적인 절차를 밟은 것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의문이 가면 군인들까지도 흔적없이 사라졌지요. 집행자쪽에서 보면 나중에라도 후환이 있을까봐 빗자루로 쓸듯 그 흔적조차 없앴다고 봐야 합니다. 만약에 이런 행위가 정당한 절차를 밟았다면 무슨무슨 죄목으로 사형시켰다는 기록이 있을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없어요. 처형자들의 군적도 없어졌습니다. 가족들에게도 통보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린 실종자들이 된 것이지요'[40] 기간: 1948.11.01~1949.02.20[41] 사면계획이 미 군사고문단에 의해 추진된 것은 로버츠와 이승만의 편지에서 확인이 된다. 1949년 3월 이승만은 로버츠에게 제주도와 전라도에서 이루어진 사면계획의 결과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로버츠는 답신을 하였는데 여기서 로버츠는 '우리가 추진 중인 사면계획'이라고 언급했다.[42] 이 사면계획으로 인해 민간인 집단 학살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먼저 제주도의 경우 제주도총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 유재흥의 지시에 따라 한라산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을 적극적으로 구조했다. 그 다음 호남의 경우는 1949년 1월부터 3월 21일까지 7,481명의 사람들이 정부군에게 투항했다. 그리고 지리산 일대에는 약 2만명의 민간인들이 군과 정부의 지원을 약속하는 서류를 지리산전투사령부(사령관 정일권) 본부에서 사인했다. 마지막으로 경상남도 일대에는 10,064명의 민간인들이 집단 자수하여 투항했다.[43] 신성모가 국방부장관직을 권유 받았을 당시 그는 '내가 국방을 맡아도 괜찮겠는가? 무슨 부작용 같은 것이 없겠느냐?'며 처음엔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채병덕을 비롯한 장성급 장교들이 '부작용은 없을 터이니 맡아 말십시요'라고 설득해 결국 국방부장관직을 승낙했다고 한다.[44] 당시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민간인은 한 명이고 군인은 251명(장교 79, 사병 174)이었다. 그 중 사형이 6명이었고 나머지는 징역 9년~6개월 등을 선고받았다.[45] 출처: Information Regarding Youth Movement, W.L. Roberts, 1949.01.20[46] 1948년 10월 4일 내무부 보고에 따르면 38도선 이남에 거주 중인 농부가 자신의 집에 북한군이 왔다며 경찰에 신고했고 이에 경찰은 즉각 38도선 이북으로 진출해 이북지역에 주둔한 북한군과 교전을 벌여 납북 당한 주민들을 구조하는 등 정부 수립 직후에도 남북간의 교전은 끝임없이 이어졌다.[47] 출처: Special Parallel Guard, 1948.10.06[48] 당시 김석원은 대한국민당 창당을 위해 군 부대 예산을 윤치영에게 줄 정도로 윤치영-임영신과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부정행위였고 이를 발견한 미 군사고문단은 신성모에게 정치군인적인 행동을 하는 김석원을 당장 해임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49] 이범석은 해주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하지 않겠다고 표했으나 작전을 지지할 의향은 있다고 밝혔다. G-2 Highlight 368, 1949.01.06[50] 많은 문헌에서 당시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 침투율은 매우 심각했다고 평가하는데 미 CIC 조사보고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 침투율은 최대 3%에 불과했다.[51] 흔히 박정희 소령이 체포된 이유를 설명할 때 이재복,김영식이 체포됐기 때문이라고 소개하는 문헌이 많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체포된 날짜는 1948년 11월 11일인데 김영식이 체포된 날짜는 1949년 2월 15일이고 이재복은 1948년 12월 28일에 검거됐기 때문이다. 즉, 박정희가 체포된 것은 김영식보다는 다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52] 이때 명부를 접한 김창룡은 송호성이 남로당 조직원이라고 확신하며 분통을 터트렸다.[53] 로버츠가 남긴 비망록을 살펴보면 해당 명부가 원본이 아닌 수필로 쓴 복사본이라는 이야기와 채병덕, 김홍일 장군이 남로당이라는 이야기가 있는 걸 봐선 아무래도 해당 명부는 조작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54] 이 가운데 김종석 중령은 사형을 선고받고 1949년 8월 2일 서울 수색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다.[55] 원본에서는 소령으로 적혀있지만 실제 계급은 중령이다.[56] 기간: 1949.03.01~03.21[57] 3월 28일 군사고문단의 보고에 의하면 정보국은 기존 숙군명부에 숙군 대상자 이름이 중복되거나 신원미상의 명부가 올라오는 등, 여러 문제점들을 포착했다고 한다. 정보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숙군명부를 새로 작성했고 해당 명부를 실험용으로 쓰고 있다고 전했다. 또 해당 숙군명부에는 정보국의 취조 방식에 불만을 표하는 군인들을 포함시킬 것이라고 전했다.[58] 애초에 숙군에 대한 기록 자체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본래 숙군 기록은 군에서 다 보관하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이 '숙군자 명단'이나 '군법회의기록'을 모두 '소각조치'(한국전쟁사 제1권, 498p)해버렸다. 이로 인해 숙군에 대한 연구 대부분이 개괄적으로 서술되는 현상이 나타났다.[59] 8연대는 이후 대대적인 숙군 작업을 거쳤는데 이 과정에서 6사단 작전참모인 김병희 중령이 1950년 3월 3일 간첩 혐의로 체포되고 8연대 소속 11명의 사병들도 함께 체포되는 등 여러 불상사가 있었다.[60] 출처:https://www.joongang.co.kr/article/1353246[61] 당시 8연대 정보주임을 지냈던 김인철씨의 회고에 따르면 월북사건이 발생한 당일, 제8연대 제3대대가 현장으로 출동해 월북대대를 추격했고 추격도중 38선을 넘으며 북한군 진영에 포격을 전개했으나 끝내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철수 이후 대대의 작전은 연대방침에 따라 일체 비공개되었고 월북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6여단장 김백일이 요시찰 장교로 지목되었다고 한다.[62] 당시 이응준은 강태무에 대한 체포영장을 일축한 바 있었다. 그러나 월북사건이 발생하자 이응준은 백선엽을 불러 그를 크게 질타하였고 이에 백선엽은 억울하다며 이응준이 거부한 영장신청서를 보여주자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즉석에서 사표를 썼다고 한다.[63] 1949년 7월 기준 공산주의자 체포를 담당한 기구는 무려 16개였다[64] 기간:1949.03.22~05.25[65] 출처: 노영기. (2022). 구술로 본 한국군 창설과 변화.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10, 291-327.[66] 1949년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실적이다.[67] 판결을 받았으나 판결 내용이 확인되지 않음.[68] 전체의 57%이며 미확인은 제외한 값이다.[69] 아르노 모이츠(Arno P. Mowitz) 소령의 문건을 살펴보면 채원개에 대한 해임건의 문서가 존재하는데 본 문건에 따르면 채원개는 일주일에 1~2번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병가를 써서 안오거나 서울,부산에서 휴식하느라 오지 않는다고 한다. 더구나 채원개의 측근들은 오직 유흥을 위하여 따로 장교 클럽까지 만들려고 했고 이 때문에 2여단의 질적저하가 우려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인해 불명예 파면됐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군적 기록을 살펴봤을 때 채원개가 여단장 자리에서 물러나간 시점이 1949년 5월이라는 점, 또 채원개가 처벌 받은 시점이 1949년 7월 30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모이츠 소령의 건의대로 처벌됐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다만 노병의 증언을 보면 채원개가 밀가루 수천 포대를 중공으로 반출하려다가 적발됐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 이야기가 사실일 경우 채원개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파면됐을 가능성이 높다.[70] 그러나 이 통계도 정확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당시 숙군에 관한 기록이 전부 소각되어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신성모는 1951년 하순 숙군된 군인의 수는 총 6천명이라는 증언을 남겼다.[71] 이때에는 정일권, 백선엽, 강문봉, 원용덕 등 당시 최고위급 장교들도 공산주의자로 몰려 숙군될 뻔 했다.(한국전쟁사 제1권, 497p)[72] 이에 대해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서북청년단을 '건방진 외지인'이라 칭하며 그들이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 학살하고 있다고 이범석에게 보고했다. 이후 군사고문단의 사면계획에 따라 제주도총사령부가 설치되고 사령관 자리에 유재흥이 임명되면서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대량학살은 끝나게 된다.[73] 먼저 백인기는 여순사건 당시 제12연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48년 11월 14일, 5여단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매복공격을 당해 반군에게 포위됐고 끝내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 다음으로 위대선은 1949년 3월 19일 20연대장으로서 전남 나주 봉황면 부근 장성리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토벌에 나섰다가 전사했다.[74] 특히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서청의 군 편입에 대해 처음에 긍정적으로 평했지만 서청이 제주도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한 것을 보고 곧바로 태도들 바꿔 이범석에게 군 내 서청부대를 해체하도록 요구했다.[75] 이도영 박사가 공개한 CIA 문건들 중에는 7월 1일 한국정부의 계엄령 선포계획 문건이 있는데 해당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와 육해군 지휘관들은 '북한의 인민공화국과의 협력을 옹호하는 좌익 및 “중도파들”의 완벽한 숙청'을 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계엄령 선포계획을 지지하고 있다고 논평했다.[76] 김구가 암살된 날 신성모는 몸이 아프다며 관저에 누워 있었는데 김구의 암살소식을 듣자 바로 일어서며 '이제 민주주의가 됐군'이라고 말한 뒤 이 대통령과 낚시하러 떠났다고 한다.[77] 3기생 김일수(金一洙)는 공주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때 헌병대에 의하여 총살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버지와 동생은 인민군에게 국군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었다. 형은 빨갱이로 몰려 죽고, 동생과 아버지는 국군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