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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3:15:59

영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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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발단과 전개4. 결과5. 둘러보기

1. 개요

영암사건(靈巖事件)은 1947년 6월 2일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조선경비대[1] 제4연대와 경찰 사이에 벌어진 교전 사건이다. 치안조직과 준군사조직이 단순히 주먹다짐도 아니고 자동화기까지 동원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8.15 광복 직후의 정치적 혼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2. 배경

일단 사건을 이해하는 데 앞서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국방경비대경찰예비대의 일종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한국에서 경찰예비대라고 하면 종전 이후 일본에 있었던 자위대의 전신을 의미하지만 이런 한국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로는 해군을 제외하면 한국의 육군과 공군도 이런 경찰예비대가 전신이었다. 당시 미군정은 한반도의 분단이 사실상 확정된 것을 보고 남한의 독자적 군대 보유를 원했다. 그런데 정작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남한에 정규군을 창설해 버린다면 이는 남한의 단독적인 정부 설립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었고 소련을 자극할 가능성이 컸다. 미군정 내의 한국계 준군사조직이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 밖에 없던 상황에서 미국은 결국 군대를 대신해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사실상 군대를 지향했으나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경찰예비대를 표방했다.

그러나 국방경비대는 경찰의 예비대였으므로 경찰보다 후순위 기관이었으며 급식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경찰보다 뒤쳐졌다. 경찰이 미제 무기와 미군 차량으로 무장했고 독자적인 전화와 무선 통신망을 갖추고 있었던 것에 비해 국방경비대는 일본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남기고 간 일제 무기로 무장했고 군복도 일본군의 것을 모표와 계급장만 바꿔서 착용했다.[2] 훈련도 기본적인 것과 치안 유지를 위한 것들을 제외하면 못 하게 했고 개인화기 이외의 다른 무기들의 훈련도 금지했다. 기껏 모은 병사들도 태반이 탈영하는 등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했다.[3] 거기에 자신들이 경찰의 2선급 단체에 불과하다는 인식까지 겹쳐 경찰에 대한 국방경비대의 열등감은 매우 심했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의 인적 구성도 갈등을 부추겼다. 국방경비대 간부의 대다수인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은 군국주의적 사고를 갖고 경찰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으며 국방경비대의 일부 간부들과 많은 병사들이 좌익들이었다.[4] 또 지방색도 매우 강했다.[5] 심지어 반정부주의자로 수배되어 경찰에게 쫓기던 인물들이 기존 국방경비대 내의 인맥을 통해 입대하는 경우까지 있었다.[6]

거기에 국방경비대가 보기에 경찰은 친일파의 온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관리를 지내던 자들과 같은 민족을 탄압하던 경찰들이 해방 이후 그대로 공무 및 치안직에 등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처럼 여전히 일본도를 차고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일례로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공출정책을 수행하는 임무를 경찰이 맡았는데 일제강점기처럼 폭력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쌀을 수탈했기 때문에 민중의 원망이 상당했다. 결국 이는 국방경비대 내에도 조금씩 전해졌다.[7]

이것은 이승만이 조장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한국독립당)나 지하운동하던 공산주의 세력(조선공산당), 심지어 친일하던 김성수 세력(한민당) 등도 해방 후 정당을 만들어 정당정치를 하며 권력 다툼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당내에서 당권 경쟁을 하는 정당 정치 자체를 혐오하였다. 이승만은 당을 만드는 대신 일제강점기부터 근무하던 관료 조직과 경찰 조직에 손을 뻗었고 특히 경찰을 이용해 자신의 정적들을 탄압했다. 그에 반해 군인들은 일본군, 학병, 만주군, 국민당군, 독립군 세력들이 섞여 있어서 이승만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승만이 친위 세력이자 극우 테러 단체인 대한청년단원들을 단체로 군에 입대시켜 친정부 쪽으로 기울이게 함으로서 어느 정도 해소되다. 다만 이로 인해 훗날 행해질 학살 사건들에서 군인들이 맹목적으로 묻지마 학살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 경찰 측에서는 경비대를 경찰 조직의 하부 기관쯤으로 보아 무시했고 사상적으로 불순한 오합지졸로 인식했다. 제1연대 연대장 배로스 중령이 경비대와 경찰의 충돌이 일주일에 한번 꼴로 발생한다고 말한 바와 같이 경비대와 경찰 사이의 충돌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경비대원들은 경찰에게 모욕을 당하고 얻어맞고 유치장으로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는 사병뿐 아니라 부사관이나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군인들도 휴가 나가면 친일 경찰들을 두들겨 팼다며 자랑하며 복귀하는 것이 기본이고 경찰들은 반대로 휴가 나온 군인들을 불러 세워 불심검문하며 괴롭혔다.

경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은 좌익 세력이 강한 지역일수록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고 경비대가 팽창하면서 점점 심화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 제4연대는 화약고나 다를 바 없었다.

3. 발단과 전개

제4연대에서는 경찰과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군인이 외출만 하면 경찰에게 얻어맞고 돌아오자 제2중대장 최홍희 참위는 대원들에게 맨손 무술[8]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외출하여 얻어맞고 귀대하는 대원을 제대시켜 버렸다.

1947년 4월에는 이른바 순천 사건이 일어났는데 4연대의 어떤 병사의 형이 소요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순천경찰서에 수감되었고 일을 전해들은 4연대 사병들이 광주에서 90km 이상 떨어진 순천까지 원정하여 경찰서를 습격했다.

순천 사건이 수습되기도 전에 영암 사건이 터졌다. 1947년 6월 1일 고향에 가 있던 한 명의 4연대 하사가 귀대하려고 경찰차에 편승했다. 그런데 경찰이 군인의 모표를 소재로 삼아 사쿠라꽃 같다며 경비대를 조롱했고 당연히 반일 감정이 드세던 당시에 일본과 관련해 비아냥과 시비를 떨어 대니, 친일파를 대거 기용한 경찰의 적반하장[9]을 못 참고 하사는 참지 못하고 상호 구타가 벌어졌고 결국 하사를 폭행 현행범으로 연행해 버렸다. 제1대대 부관이 사정을 알아보러 영암경찰서로 갔지만 경찰은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이고 위법 행위를 취조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부대로 돌아오던 일행이 지서에 이르렀을 때 보초 순경이 공포를 발사했다. 이에 격분한 헌병이 순경을 구타하자 경찰은 헌병을 연행하고 미 고문관에게 경비대 폭행으로 경찰관 8명이 부상했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다.

한편 4연대에 사건의 경위가 알려지자 병사들 300여 명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총과 실탄을 휴대한 채 ‘경찰 타도’를 외치며 영암으로 질주했다.

6월 2일 새벽 영암 경찰은 망루에 기관총을 장치해 놓고 경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경비대는 기껏해야 일제 99식 소총, 38식 소총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상대가 되질 못했다.

이때 부대를 수습하려고 급히 출동한 연대장 이한림 소령이 호위병을 데리고 협상을 위해 다가갔으나 경찰이 수류탄을 투척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가까스로 경찰서에 뛰어 들어간 연대장은 사격 중지를 경찰에 요구했지만 그 또한 체포되었다. 이렇게 비정상의 극치를 달리던 상황은 미군 경찰고문과 경비대 고문이 와서야 진정될 수 있었다.

4. 결과

충돌 결과 제4연대 6명이 사망했고 10여 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경찰은 우세한 화력을 통해 한 명이 사망하는 것 외에 피해는 없었다. 제4연대에서는 이 사건 관련자들이 전출, 면직되었지만 경찰에서는 오히려 이 사건에서 공을 세웠다 하여 진급한 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 뒤에도 경찰은 군대에 정보 수집 왔다 하여 군인들을 붙잡아 폭력을 행사하는 등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

이후 14연대가 여순사건을 일으킬 때 주동자였던 4연대 출신의 좌익계 장교와 하사관들이 “경찰들이 쳐들어온다. 응징하러 가자”고 선동했는데, 그동안 경찰이 자행한 수많은 패악질 때문에 대다수의 부대원들이 이 선동에 넘어갔으며, 여수와 순천에 진입하였을 때, 당연하게도 경찰을 제일 먼저 처단했다.[10]
이런 사건들을 보면,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동안 군민의 원한과 불신을 착실히 쌓아온 경찰에게 총부리가 향하지 않은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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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방경비대에서 1946년 6월에 변경된 명칭이다.[2] 때문에 국방경비대 인원들은 종종 일본군으로 오인받았다. 이와 관련된 황당한 사건이 하나 있는데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국방경비대 모 소위가 부임지로 출발하려고 부산역에 갔더니 그를 일본군으로 착각한 시민들이 기겁해 경찰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체포된 소위는 당연히 자신의 신분을 밝혔는데 경찰들은 그를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비웃는 것도 모자라 구타한 뒤 칼까지 빼앗았다. 결국 이 문제는 합의를 통해 유야무야 묻히긴 했으나 당시 국방경비대는 이렇게 경찰에게 굴욕적인 취급을 받았다. (출처: 우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 윤용남 저)[3] 특히 이 사건의 주동자인 제4연대는 사병의 1/3이 도망갈 정도로 탈영이 심각했고 그 때문에 병력은 정원의 60~70%에 불과했다.[4] 이는 사실 미군정이 병력 수 불리는 데 급급해 성향을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끌어모아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5] 국방경비대는 각 도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한 '향토연대'로 구성되었는데 해당 지역에서 인원을 모집했으므로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6] 이후 여순반란을 주도한 제14연대는 부대의 남조선로동당 조직원들이 이렇게 수배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아예 경찰서장에게 수배자 명단을 보여주며 "군대에 가면 사상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군사훈련에 열중하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염려하지 말라"면서 대놓고 허락을 받기도 했을 정도.[7] 조미공동회담에서 최능진은 "매일 많은 사람들이 증거도 없이 체포된다. 어떤 경찰관은 '저 놈이 맘에 안드니 데려다 두들겨 패고 감옥에 쳐 넣자.'는 사례를 들며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인민의 80%는 공산주의로 돌아설 것이다."며 우려했다. 경상도의 어느 지식인은 미군정 관리에게 "친일 경찰을 제거해 주면 한국인은 모두 공산주의를 반대할 것"이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8] 태권도는 1955년 이후에 생겼다[9] 당시 반민족행위자인 순사 출신들이 대규모로 경찰로 그대로 기용되며, '친일파 순사 -> 대한민국 경찰'로 신분 세탁을 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10] 지금도 경찰의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당시 경찰들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매우 부정적인 평이 주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