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uby(足利事件, ruby=あしかがじけん)]1990년 5월 12일 일본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에서 발생한 유아 강간 살인 사건이자 일본 사법계의 막장 흑역사 중 하나. 일본판 춘천 강간살인 조작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미국의 카타리나 브로우 사건이 있다.
2. 사건 소개
1990년 5월 12일 당시 만 4세였던 마츠다 마미(松田真実)라는 여자아이가 행방불명됐고 다음날 근처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시체가 발견된 후 삽시간에 전국으로 소식이 퍼져나갔으며 범인에 관한 각종 제보가 활발하게 들어왔다.그러나 일본 경찰은 사건 발생으로부터 7개월 뒤인 동년 12월에 갑작스레 수사방향 전환을 검토했다. 이 '수사방향 전환 검토' 라는 게 제보로 찾는 건 귀찮고 불확실하니 프로파일링에 의한 범인상 추측과 과학수사 쪽으로 수사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수사는 이미 막장 관료들의 귀차니즘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입한 프로파일링이라는 게 당시에는 아직 시작 단계라 충분한 연구도 없이 단순히 "독신남 중에는 로리콘이 많다", "생활패턴이 단조롭고 규칙을 중시하는 부류의 사람이 엽기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등 단순무식한 데다 오류투성이였는데 그것으로 범인상을 추려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규칙적 생활과 규율을 집단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표방하는 군대와 경찰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가장 위험한 인간들에게 가장 살상력 높은 무기까지 국민들이 알아서 쥐어준 엄청난 위험집단이며 법(규칙)을 중시하는 법조계 역시 사법권을 쥐고 있는 돌아이들이라는 막장 결론이 도출된다. 인종 프로파일링에 기대어 멀쩡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간 최악의 사례 중 하나다.
그렇게 프로파일링으로 지목된 범인이 당시 45세였던 스가야 도시카즈(菅家利一, 1946년 10월 11일~)라는 남성이었다. 셋집에서 자고 있다가 갑자기 경찰에 연행된 그는 1991년 12월 2일에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런 확증도 없이 외설목적유괴살인 혐의로 구속됐으며 그 결과 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17년간 무고하게 징역살이를 했다. 원래 그의 직업은 유치원 운전기사였는데 1991년 초 경찰이 그의 근무지로 조사를 나온 것 때문에 유치원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아서 체포 당시에는 무직 상태였다.
3심까지 항소했으나 초기 단계의 경찰 측 증거효력을 인정하여 2000년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물론 스가야는 이미 1992년부터 8년째 복역 중이었다.
3. 스가야 도시카즈는 정말 범인인가?
일본 경찰이 스가야를 구속한 결정적인 증거는 'DNA 감정 결과 스가야의 DNA가 피해자의 의류품에 묻어 있던 체액에서 채취한 DNA와 일치했다'는 것이었지만 2009년 공판에서 수사오류임이 밝혀졌다. 우선 이 '체액에서 채취한 DNA'라는 게 스가야 본인의 머리카락 같은 확실히 스가야 본인임을 증명 가능한 것이 아니라 스가야의 집에서 배출한 쓰레기 봉투 안에 있던 휴지에 묻은 체액이었으며 1990년대 초반의 DNA 감정은 아직 시작 단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의 DNA를 추출해도 일치할 확률(올바른 결과가 아닐 확률)이 1% 가깝게 있을 정도라 증거 능력으로서 부족했으나 일본 경찰은 이를 그대로 도입하여 증거로 채택했고 재판소도 그를 인정했다.[1]하지만 결정적으로 이것들의 증거 능력은 부족하며 경찰과 검찰 측은 공판을 확실히 스가야가 한 범행으로 몰고 가기 위해 자백을 강요했는데 이후 녹취록에 따르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스가야에게 자백을 시켰으며 스가야가 못 견디고 자백한 후에도 공판에서는 자신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호소했으나 전부 무시당했다는 점도 밝혀졌다.
스가야 도시카즈는 정말 평범한 직장인이었을 뿐이고 범행 동기 및 심리를 가질 이유도 없었으며 전과조차 없는 그야말로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검찰 측은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특히 유류품 중 체액이 검출된 상의와 속옷을 유족에게 반환하지 않고 '증거(보존)를 위해 보관하겠다'는 이상한 이유를 댔다. 각종 제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불려온 탓에 피해자의 유가족조차 스가야가 진범이라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4. 17년 후에야 밝혀진 진실
우연히도 1999년경 발생한 비슷한 종류의 사건에서 'DNA 감정 미스로 단편적 증거로 DNA 감정을 했을 경우 부정확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졌으며 니혼 TV의 시미즈 기요시(清水潔)[2]가 사건 발생으로부터 15년이 지났을 때 취재하기 시작하면서 어둠 속에 있던 이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전술한 당시의 막장 수사 사실은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건 발생으로부터 17년이 지난 2008년 'DNA 감식을 다시 해 달라' 는 요청을 하게 됐고 최초 지방재판소에서는 이를 기각했으나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이를 인정하여 무려 17년 만에 DNA 재감식을 실시했다.
결과는 '검사 측 감정인조차 '일치 부분이 적으므로 (의류에 부착된 DNA와 스가야의 DNA가) 동일 인물의 DNA가 아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 판정했다.
이 감정서가 제출된 지 5일 뒤인 2008년 6월 1일 스가야 측 변호인이 형집행정지를 신청했고 3일 뒤인 6월 4일 도쿄 고등 재판소의 심사를 거쳐 승인되어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재판 시작 전의 용의자 석방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스가야 도시카즈는 억울하게 살았던 17년의 복역 생활을 마치고 임시출소의 형태로 출소했다. 그러니까 아직 법적 신분은 죄인인 상태로 놔 둔 채 그냥 몸만 내보냈다고 이 말이다. 아무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 파문
일본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관료주의 행정과 일본 경찰, 검찰의 막장 행보로 억울하게 죄인 취급당하는 엔자이(한국식으로 읽으면 원죄)가 다시 부각되는 사건이었다.그러나 그 와중에도 당시 사건을 맡았던 모리시타 아키오(森下昭雄, 1934.03.17~) 형사부장은 자신은 규칙대로 수사[3]를 했으며 당시 자백도 받았으니 아직도 스가야가 진범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글을 블로그에 작성했는데 이로 인해 분노한 일본 네티즌들에 의해 블로그가 테러당하기도 했다.
'독신남은 로리콘이 많다'는 망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게 바로 이 인간이다. 위 사진은 체포 당시 의기양양해하며 언론사와 인터뷰할 때의 사진이다. 이 시기 경시청 홈페이지도 동일하게 마비 수준으로 갔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사건 이후에도 그 분노는 대단해 면허증 사진이 블로그 등에 올라왔을 정도다.
하지만 가장 억울한 사람들은 바로 말할 것도 없이 17년을 억울하게 옥살이한 스가야와 경찰이 삽질하는 사이 공소시효가 지나 이제는 진범을 잡아도 처벌할 수 없게 된 피해자의 유족이다. 스가야는 석방될 때 눈물을 흘리면서 검찰 측에 사죄를 요구했고 유가족들도 "너네 삽질로 이 꼴이 났으니 당장 사건을 재수사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6. 막장수사의 이유
말할 것도 없이 표면적 이유는 일본 경찰, 일본 검찰의 관료주의적 구조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더 중요한 것은 1990년 당시 아직 '도입 초기' 단계였던 DNA 감정과 프로파일링 수사를 했던 이유가 "실적을 남기고 싶다"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즉 중간층에서 윗선에게 '이 방법 좋아요' 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 해당 사건 담당자들은 이 공적으로 승진가도를 달리기 위해서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막장스러운 이유가 원인이었다.7. 결과
체포 당시 사진.
17년의 수감생활 끝에 석방되던 때의 사진.[4] 그야말로 보는 사람도 눈물이 난다.
결국 스가야 토시카즈는 임시석방 후 재심 최후공판인 2010년 3월 26일 19년만에 드디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죄가 확정된 스가야는 우츠노미야 지방검찰청장으로부터 "무고한 스가야 씨를 기소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복역시켜 고통을 안겨드린 점에 대하여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검찰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無実の菅家さんを起訴して長年にわたって服役させ、苦痛を与えたことについて大変申し訳なく思います。検察を代表し、心から謝罪します)" 라는 사과를 받았는데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이게 일본 재판 역사에 길이 남을 검찰 측의 완전패배다. 이놈들은 원래 이렇게 실수해도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단순한 사과 영상이나 사과문을 보낼 뿐이며 그나마도 높으신 분들의 종특인 배배 돌려 말하기를 시전하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만은 유일하게 공개석상에서 당사자 눈앞에서 직접 90도로 허리 숙이고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사과했다. 그만큼 이 사건의 여파가 굉장히 컸다는 방증(傍證)이었다. 당시 뉴스 기사(일본뉴스포털)[5]
스가야는 국가로부터 17년 간의 복역 생활에 대한 보상금 8천만 엔과 재판비용 1200만 엔, 총 9200만 엔을 받았다.[6] 하지만 이미 부모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체포된 지 2주만에 그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81세. 스가야는 자백을 강요당하고 조사로 인해 몸이 후들거리는 와중에 형사에게서 이 부고를 전해들었는데 형사는 "당신도 슬프겠지만 살해당한 사람은 더 비참하다." 는 말이나 했을 뿐이었다고 하며 어머니는 그 무렵 검찰 조사에서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원망스럽지만 원망만 할 수 없습니다. 얼굴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사형당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스가야는 이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들었다.체포된 지 한 달 후에 유치장에서 교도소로 옮겨진 스가야는 조사받을 일 없이 독방에 갇히자 자신과 대면할 시간이 많아졌는데 그때서야 처음으로 '가족이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매일 편지를 썼고 자신이 체포된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편지에 썼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으며 가족들은 면회도 오지 않았다.
체포된 지 16년 후인 2007년 겨울 스가야는 어머니의 사망 으로부터 6개월도 더 지난 후에야 부고를 전해들었는데 그나마 가족이 아니라 무죄 입증을 위해 도와주던 사람이 알려준 것이었다. 스가야는 감옥에서 어머니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계속 생각했다. 어머니만은 자신의 무죄를 믿어 주었는지, 아니면 어머니마저 자신을 범인이라고 의심했던 것인지. 그러나 그 이야기는 끝내 어머니에게서 듣지 못하고 말았다. 억만금을 보상으로 받는다고 한들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옥살이를 당하고 부모도 모두 여읜 크나큰 비극은 되돌릴 수 없었다.
여동생은 변호사를 통해 보낸 오빠에게 보낸 편지에 "어머니와 같이 몇 번이나 죽을 생각을 했고, 범죄자의 가족인 것을 숨기며 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오빠와 같이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라고 썼는데 스가야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도 고통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석방된 후 재회한 여동생은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던 스가야가 "오랜 시간 고생이 많았다."고 말하자 "더 이상 그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7]
스가야는 출소한 그 해부터 사회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엔자이- 어느 날, 나는 범인이 되었다'(冤罪 ある日、私は犯人にされた)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스가야의 무죄 입증에 결정적 역할을 한 니혼 TV의 시미즈 기요시 기자에 의하면 진범이 사건 당시 피해 아동을 하천부지로 데려가는 것을 목격한 목격자가 있었다고 한다. 1996년 군마현 오타시의 한 파칭코 가게에서 4세 여자 아이가 유괴됐는데 이 파칭코 가게의 CCTV에 아시카가 사건에서 목격된 진범과 용모가 흡사한 남자가 찍혔다고 한다. 따라서 진범은 그쪽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자세한 것은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 요코야마 유카리 유괴 사건 문서 참조.
2012년에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5부작 드라마 《추정유죄》(일본 WOWOW)[8]가 제작됐다. 그런데 드라마보다 실제 사건이 더 비극적인 점이 아이러니하다.
일본은 이 외에도 엔자이 사건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1997년 일어난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 역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느라 진범을 놓친 대표적인 사례다. 이 사건의 누명을 쓴 네팔인 고빈다는 15년이나 수감 생활을 했다. 고빈다에게 2심에서 유죄 판결을 한 타카기 토시오(高木俊夫) 재판장은 뒷말이 많은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이 문서의 아시카가 사건의 항소심도 기각했다고 알려져 지탄을 받았다.
[1] 당시 일본 경찰에서 시행한 DNA 검사는 DNA를 현미경 등으로 보면서 육안으로 모양이 일치하는지를 판가름하는 형태의 DNA 감정법이었다고 한다.[2] 일본에서 꽤 유명한 인물인데 이 양반의 경력이 심히 비범하다. 1999년 오케가와 스토커 살인사건 발발 후에는 경찰보다 빠르게 진범이 누구인지를 추리해내서 그 범인과 저 멀리 홋카이도까지 추격전을 벌이는가 하면 살인범이 해외로 도피하자 지구 반대편 브라질까지 쫓아가서 잡아오고 본 항목의 사건으로 억울하게 감옥 간 사람의 누명을 벗겨 주는 등의 사례가 있었으며 2011년에 저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의 진범을 찾아냈다고 하는데 역시 아시카가 사건의 범인과 동일인물이었다고 한다. 난징 대학살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밝혀내는 다큐(2015년 10월 4일 방영된 『NNNドキュメント』(니혼 TV))를 찍는 등 개념과 능력을 겸비한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3] 취조 당시 스가야를 직접 구타하지는 않았지만 스가야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 붙인다든지, 스가야가 앉아 있던 의자를 갑자기 발로 차 넘어트리는 등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4]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아직 무죄가 확정되기 전이었다.[5] 이 판결로부터 약 100년 전에 있었던 일본의 엔자이 사건 중 유명한 요시다 암굴왕 사건의 판결 때도 요시다 노인에게 무죄를 판결하며 재판관들이 사죄의 의미를 담은 90도 인사를 요시다 노인에게 올리며 경칭까지 써 주었다.[6] 한화 약 10억 3천만 원.[7] 출처: 스즈키 노부모토, <가해자 가족>[8] 참고로 일본에선 무죄추정의 원칙을 '추정무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추정유죄'는 한국식으로 하자면 유죄추정의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