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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사건·사고 송림사건 松林事件 | |
<colbgcolor=#bc002d,#222222><colcolor=white> 다른 이름 | 황해제철소 사건 |
발생일자 | 1998년 8월 |
발생장소 | 황해북도 송림시 |
당사자 | 동원부대 보위국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 제4군단 |
피해자 11명 처형 | |
원인 | - 고난의 행군으로 인한 민심 동요 - 선군정치의 개시 |
결과 | - 공포심을 이용한 일시적인 체제 단속 성공 - 의도와는 달리 장기적인 민심 이반 유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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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난의 행군이 거의 끝나갈 무렵 1998년 8월 황해북도 송림시[2] 송림제철소(사건 이후 황해제철소로 개명)에서 일어난 숙청 사건.탈북민 사이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주성하 기자 같이 여러 명의 탈북자를 취재한 바에 따르면 숙청까지만 있었다고 보고 있다. 주성하 기자의 주장도 다른 탈북자의 주장과 일치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제철소는 북한에서 두 번째로 큰 제철소다.
2. 알려진 내용
아래 내용은 이춘구, 김화순, 박승학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2021년 탈북민인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를 중심으로 반론이 제기되었으며, 이 반론은 사실 여부 문단에 기록하였다.
2.1. 배경
1994년경 김일성의 사망 이후 송림제철소의 가동률이 떨어지고 1996~1997년부터는 완전히 멎어 버렸다. 이에 따라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실업자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황해도에 위치한 철광인 은률광산(은율광산), 재령광산에서 철광석을 캐기 어려워졌고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콕스탄을 대치물자(돈 대신 주는 물자)로 주지 않아 제련도 어려워졌다. 석탄 생산량 자체도 감소하여 화력발전도 어려워지고 수력 발전도 힘들어지자 전기 공급도 어려워져 다시 제철소의 가동을 어렵게 하였다.이런 사정으로 경제 불황이 찾아와 배급이 끊어졌다. 그나마 송림에는 먹을거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주민들과 노동자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다 못한 송림제철소의 지배인, 책임비서, 후방담당[3] 부지배인, 업무담당 부지배인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 8명은 지배인과 책임비서가 주동이 되어 긴급 토의에 들어갔다.
그들은 제철소가 만든 압연 철판으로 가공된 선철을 배에 싣고 중국 다롄으로 건너가 옥수수와 교환해 오기로 결정했는데 노동자들이 굶주리지 않아야 당의 목표를 완수할 수 있고 이들에게 먹거리를 전하는 것이 곧 당과 수령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밖에도 노동자들이 이런 자재와 기계를 중국에 옥수수나 밀가루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편 송림항에는 외부에서 지원한 것으로 보이는 쌀이 있었고 이것이 쌓여 있기만 한 것을 본 송림항의 노동자들이 송림제철소 노동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 노동자들이 무기고를 털 계획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2.2. 시작
제철소의 간부와 노동자들이 제철소의 자산을 팔아 식량을 구하는 행위는 국가의 재산을 팔아먹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보위사령부의 검열이 행해졌다.제철소 후방 부지배인, 판매과장을 비롯한 간부 8명이 제철소 전용 어선으로 남포항에 나가 있는 배를 이용해서 압연 철판을 싣고 중국에 가서 옥수수로 바꾸었다. 옥수수를 싣고 온 배가 남포항 부두에 정박하는 순간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가 나타나서 배에 타고 있던 일행을 전원 체포하여 포승줄로 묶어서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들은 고문을 당한 후유증 때문에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에 의해 송림시 공설운동장의 공개처형장으로 이송되었는데 명목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위반하고 국가물자를 외국에 팔아먹는 국가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총살까지 시키는 건 너무합니다."라는 주민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공개처형은 진행되었다. 평양 봉화진료소에서 김일성의 담당 간호사였던 여자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총살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철소 간부들이 위대한 장군님께 생산을 많이 하여 기쁨을 드리자는 일념으로 강냉이[4]를 바꾸려 했는데, 방법이 틀렸으면 처벌을 주어야지 총살까지 하는 건 너무합니다. 총살당한 간부들이 노동자들을 먹여 일을 시켜보자고 했지,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사형까지 하는 건 너무 무지막지 합…" 라고 말하자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은 이를 무시하고 즉시 그 여자를 처형했다.
2.3. 농성
첫번째 공개 총살 다음날 송림시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간부들을 숙청하지 말라", "우리를 먹여 살리고 제철소를 위한 간부들의 행동은 잘못이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공장 구내 길에서 몇 천 명이 모여 앉아 밤을 세워 가면서 농성하였다.2.4. 학살
- 여기서부터 대부분 거짓이다.
군에서는 이를 탱크로 밀어 붙이자고 하여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 국무총리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의 '2006 연차보고서'에서는 이 과정에 김정일이 연루되었다고 봤다.
농성 시작 다음 날 새벽 4시쯤 4군단 예하 전차연대의 열댓 대 정도 되는 탱크와 트럭에 탄 수백 명의 조선인민군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해산하라는 군대의 명령에도 시위대가 앉아서 버티자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던 조선인민군은 인민에게 총을 쏘고 탱크로 깔아뭉개 전부 죽였다고 한다. 깔아 버렸다는 증언은 이춘구, 국방부 안보강사로 활동했던 박승학, 황해북도에서 간부였던 김화순이 공통적으로 증언했다.
2.5. 마무리
새벽 5시 경 송림시는 군 부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경보여단(특전사와 유사) 등이 송림 인근 황주군, 평양 강남군, 평양 오류동으로 통하는 찻길, 뱃길을 모조리 막아 버렸다. 날이 새자 송림시민들은 계엄령이 내려진 것을 감지했으며[5] 심지어는 창문 밖도 보지 말라는 방송이 울려퍼졌다.아침 10시가 지나자 폭동 진압군은 철산광장에 사람을 모아서 "송림시민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제철소에서 석탄 한 배낭, 못 한 개라도 훔쳐 간 사람은 모두 자수하라. 1주일간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자수하지 않으면 그 대상이 누구든 관계없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가두방송을 하였다.
새벽에 제철소에서 학살이 일어난 다음날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시위 주모자를 심판한다는 포고문이 사회안전부(현 사회안전성)[6] 명의로 나붙었으며 이날 송림시 당 선전부장 같은 송림시의 고위 관료들이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틀 후 송림시의 공설운동장에서는 폭동 주모자라는 3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또 한 명의 중학교 선생과 어린 처녀를 총으로 쏴 죽여 버렸다. 중학교 선생과 처녀의 죄명은 한 재일교포의 집에 들어가 녹음기를 훔쳤다는 것이다.
죄과라는 것을 읽고 총살에 처한다는 판결과 함께 두 명의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이 처녀에게 다가가서 턱을 주먹으로 올려 쳐 턱뼈가 빠지게 한 뒤 손바닥 안에 쥔 자그마한 용수철을 그 처녀의 입에 넣었다. 순간 그 처녀의 입에 들어간 자그마한 동그란 용수철이 쫙 퍼지더니 그의 입이 고통스럽게 불어나 처녀는 몸부림쳤다. 이어 말뚝에 묶여서 엽기적이고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며칠 뒤 체포 당한 송림의 고위 관료들도 총살당했다. 남조선 간첩이 끼어들어 제철소가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설비들을 훼손시키도록 의식적으로 조장하여 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거기 놀아났다는 혐의가 씌워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하루 평균 5~7명이 총살당하고 제철소의 가동 중단도 남조선의 간첩 때문이라는 주장이 송림시민 사이에 유포되었으며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사람만도 십 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쩌다가 점 한 번 봐 준 사람, 신수 한 번 봐 준 사람 등 관상쟁이들까지 조사대상으로 끌려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김화순에 따르면 100명 정도가 총살당했으며 탱크에 깔려 죽은 사람도 수십 명이라고 한다. 총살당한 사람들은 송림 외곽의 어느 지역에 봉분이 없이 묻혔는데 날이 밝자 봉분이 생기고 수백 개의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사건으로부터 1년이 지나도 학살이 벌어진 곳에는 혈흔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 송림제철소는 황해제철소로 개명되었다.
3. 사실 여부
2021년 들어 위의 내용에 대해서 반론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탈북민 출신 주성하 기자는 처음엔 사실로 여겼으나 2021년 9월 자세한 취재 결과 상당한 과장이 있었다는 것으로 결론지었으며 탈북자 사회의 과장된 거짓말이 악용된 사례임을 기사와 유튜브를 통해 밝혔다. 북한군 탱크로 노동자들을 깔아죽였다는 송림 황해제철소 노동자 시위는 애초에 없었다.주성하가 재구성한 사건 개요를 정리한다.
-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서 굶주린 노동자들이 공장의 철판, 기계 등을 팔아먹는 행위가 있어 사회질서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군대가 동원되었다. 당시 김정일은 '총소리로 사회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선군정치를 내세웠는데 보위국이 숙청에 동원되었다.
- 무단으로 공장자재를 내다파는데 관여한 11명의 간부가 1998년 8월 철산광장에서 처형된 것은 맞다. 보위국 중좌가 거래상으로 위장해 제철소 간부들에게 접근해 증거자료들을 수집했으며 지배인의 집에 도청장치까지 설치해 연루된 인원들을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 11명의 숙청으로 송림제철소는 바로 정상화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시위나 농성은 전혀 없었다. 105 전차사단 소속 탱크와 장갑차가 동원되긴 했지만 무력시위에 지나지 않았다. 공포분위기 속에서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송림제철소를 지키던 북한 기갑부대는 10여일 더 있다가 총알 한 발 쏘지도 않고 그냥 철수했다. 송림제철소에 기갑부대가 동원되었다는 소문은 북한 전역에 빠르게 퍼졌고 여론은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김정일마저도 악화된 여론을 빠르게 파악하고 '총소리가 너무 크다.'고 교시를 내려 도망친 책임자 한 명은 죽이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7]
- 김일성의 전담 간호사 출신 여성이 항의했다거나 봉분을 다시 세워서 헌화했다는 이야기는 완벽한 거짓이다. 특히 헌화는 온 가족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없다.
주성하의 취재결과는 고위급 탈북자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태영호는 송림사건을 "공장 노동자들이 황해제철소 기계와 철판 바닥을 다 뜯어 가자 북한군이 총살을 예고하는 계엄령을 내렸다"고 언급하고 "당시 노동자들은 무서워서 기계를 다시 갖다 놓았는데, 지금(2017년)은 당국의 정책에 반발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이춘구의 주장과 배치되는 주장이다.
3.1.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
아래 3명의 증언들은 다른 탈북자들에 의해서 대체적으로 부정되었다.-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을 목격한 탈북자 이춘구가 쓴 수기. 이 문서의 주된 내용이 된 가장 널리 퍼진 수기로, 노동자들의 항의를 진압하는 과정을 언급한다. 원본
댓글에는 직접 보았다는 사람, 소문으로는 들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주성하 기자도 처음엔 믿었을 만큼 사실에 과장이 덧붙여져 거짓임을 확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의 증언(NK조선) - 배나TV 박승학의 증언. 진압 병력의 정체에 대한 언급도 있고 송림제철소뿐만 아니라 송림항 노동자들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증언을 했다. # 가장 과장이 심한 주장으로 보인다. 사실, 박승학의 주장들은 송림사건 이외에도 다른 탈북자들과의 교차검증의 과정에서 과장이 심해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다만, 진위여부를 떠나 일단은 본인이 송림사건의 현장에 없었던 경우였으니 "이런 일도 있었다더라" 라고 소문을 들었다는 주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 2021년에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무역국장이었던 김화순의 증언도 등장하였다. 통일신문
3.2. 기타 증언
- 이 사건 당시 송림에 거주했다는 정철민 씨의 수기. 송림시에서, 제철소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다. # 정철민의 수기에 따르면 군대가 와서 송림을 장악하고 황해제철소가 폐허가 된 것을 남조선 간첩의 소행으로 몰아서 송림시의 간부들을 처형하고 무고한 사람들, 점쟁이들을 고문하고 죽였다고 한다. 탱크까지 동원되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고문치사된 것은 인정하지만 시위대를 마구 깔아뭉개고 학살했다는 내용은 없다.
- 2006년 10월 5일 탈북자 동지회 게시판에 달린 어느 탈북자의 증언 댓글. 이 증언이 실제와 가장 일치하는 증언으로 보인다. #
당시 황해제철소는 멎은지 몇 해 잘되였으므로 거기 노동자들은 사실 상 실업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식량을 공급받을 데도 없고 가만히 앉아 죽을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이 설비를 뜯어내고 전기설비에서 동을 뜯어내 팔아먹어 공장은 거의 페허로 되다 시피 하였습니다.
황해제철소는 북한에서 규모가 김책제철소 다음가는 큰 제철소였으므로 김일성이와 김정일이가 가장 많이 관심을 두는 공장이였습니다.
한 때는 자동화 수준이 어느 정도 되였다고 자랑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장이 페허가 되다시피 하였으니 김정일이가 노한겁니다.
저는 당시 청진에 있는 김책제철소에서 기사로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황해제철소가 보위사령부에 의해 죽탕을 맞자 다음차례는 김책제철소가 아니겠느냐 하고 사람들이 모두 근심에 쌓여있었습니다.
김책제철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좀 나은 편이였습니다.
그 소문이 나자 공장내에 예 전에 설비를 뜯어 팔아먹었거나 전기선을 절단해 팔아먹은 전적이 있는 사람들은 부들 부들 떨었습니다.
직장들에서는 설비를 사다 보충한다 소동이 났구요.
또 공장당위원회에서는 그런 전과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건지려고 그들에게 미리 가벼운 처벌을 내린다 야단법석이였습니다. (북한에는 어지간해서는 2중처벌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 추가로 밝혀지는 경우를 다소 제외)
좌우간 그때 황해제철소 사건으로 뒤숭숭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더우기 탱크가 동원되였다는 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습니다.||
- 중앙방송위원회 작가 출신 장해성의 '비운의 남자 장성택'에서는 송림시에 탱크를 진주한 것은 사실이나 공장당 비서, 송림시 책임비서 및 일부 간부를 총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언급한다.
- 통일연구원의 '2006 연차보고서'에서 언급된 2명의 탈북 인사의 증언도 참조하였다.
4. 기타
- 고난의 행군 시기 주민 위협을 위해 탱크를 동원한 일이 송림제철소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가와 체제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이 커지자 김정일은 민심 이반 동향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총소리가 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숱한 탱크들이 수도 평양시의 거리를 활보하면서 시민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혁명의 수도'라고 부르며 김정일이 노골적으로 민심을 챙겨준다던 평양 시민들조차 이런 취급이었으니 지방 사람들을 탱크로 위협하는 것은 북한 측에서는 식은 죽 먹기였던 셈이다.
- 기존 증언과 달리 대량학살은 없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이 밝혀진 현 시점에서도 학살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건이다. 14명이 사살당한 피의 일요일 사건(북아일랜드)도 학살로 불린다는 것을 감안하면 동시에 11명이 공개적으로 처형당한[8] 송림사건을 사실상의 학살로 보는 것은 딱히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증언] [2] 대한민국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림시[3] 북한에서는 물자보급업무를 "후방사업"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북한 군인들의 피복과 식료품, 생필품 공급은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관할이고 기업소 후방담당 부지배인이면 소속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식량과 생필품을 책임지는 위치다.[4] 옥수수. 표준어에서는 옥수수가 표준어로 강냉이는 영호남 지방 방언이지만 문화어는 강냉이가 표준이다.[5] 공교롭게도 남한의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가 비슷한 방식으로 광주로 가는 모든 교통로를 틀어막아 봉쇄한 바 있다.[6] 한국의 경찰청과 유사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기관이다.[7] 실제로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으로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채문덕을 빠르게 토사구팽하고 처형한 바 있으며 화폐개혁 당시에도 민심이 폭발하자 개혁조치를 빠르게 중단시키고 박남기에게 책임을 돌려 처형한 일이 있었다. 김정일은 이처럼 악화된 민심은 빠르게 파악하고 책임을 간부들에게 돌린 뒤 자신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능력이 뛰어났다.[8] 사법살인도 아니다. 형식적인 재판도 하지 않은 채 고문 후 바로 처형한 것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