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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1:26:08

강달룡

파일:조선공산당 마크.png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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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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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達龍
파일:강달룡1.png
1926년 8월 5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이명 강달영(姜達永)·황산(黃山)
출생 1888년 5월 5일[2]
경상도 진주목 중안면 이동
(現 경상남도 진주시 봉곡동·상봉동)[3][4]
사망 1940년 7월 12일[5] (향년 52세)
경상남도 진주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16호
본관 진주 강씨[6]
가족 아들 강병순[7]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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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8년 5월 5일 경상도 진주목 중안면 이동(現 경상남도 진주시 봉곡동·상봉동)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진주군 진주면 동성동(現 진주시 동성동) 9번지, 129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으며, 상경한 뒤 1928년을 전후해 경기도 경성부 삼각정(現 서울특별시 중구 삼각동) 28번지에 거주했다.

그는 6살부터 10여년간 한학을 수학했으며, 이후 경남도립 낙육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21세까지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그 뒤 1919년 그는 3.1 운동이 경성부에서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남도 진주군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 같은 마을의 청년들과 함께 구체적인 거사 방법을 논의했다. 그들은 3월 10일경에 기미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해 비밀리에 배부하면서 인근 각면의 유지와 민중을 규합했다. 이때 그는 김재화(金在華), 박진환(朴進煥)과 함께 각 사회단체를 찾아다니며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고했다.

이윽고 3월 18일 오후 1시경,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애국가를 제창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일본 경찰은 시위행렬을 저지, 해산시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다가 그날 저녁 주동 인물들을 체포했다. 이때 체포되었으며,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여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가 더 추가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했으나 9월 6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1921년 3월 8일에 출소한 뒤 1922년 10월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 상무위원에 취임하였고, 조선노동연맹회가 기존에 여러 노농단체들과 통합되어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창립되자 집행위원으로서 창립총회에 참석했다. 그 해 7월 시대일보(時代日報)의 편집·발행권이 보천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진주지국장으로서 이를 저지하는 데에 적극 동참했다.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으로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일어나 조직이 와해되고 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 등 30여명이 검거되자 후계 당조직의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1926년 3월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으로 근무하면서 도망 중이던 김재봉의 밀지를 받고 경성부에서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에 착수했다. 한동안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 등과 함께 권동진천도교유억겸 등의 기독교 세력, 안재홍 등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접촉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시도하였고, 그러던 중 4월 26일 순종이 붕어하자 인산일인 6월 10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비밀리에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대한독립당 명의의 '격고문' 인쇄물이 발각되면서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발전, 당조직은 또 와해되기에 이른다.

일제 경찰은 6월 7일 권오설을 검거하여 모진 고문 끝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강달룡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는 한동안 경성부 본정(現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서 아이스크림·바나나 상인으로 위장하여 도피생활을 하다가 7월 17일에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그 후 모진 고문을 받고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이후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었으며 옥중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정신질환을 얻어 1933년 9월 18일 다소 일찍 석방되었다.
파일:강달룡(1928).png
1928년 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출옥 후에도 그에 대한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는 계속되었고, 특히 옥중에서 얻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았다. 결국 1940년 7월 12일에 별세했다. 그의 부음을 알리는 1940년 7월 14일 동아일보 기사는 당시 그의 하나뿐인 아들 강병순(姜炳淳)도 거취를 알 수 없어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라 장례식도 그의 동지들이 모여 주선할 계획이라고 전했다.[8]

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으며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4년 3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국립대전현충원에는 강[2] 192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2월 29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192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면 비봉리 111번지로 기재되어 있는데, 비봉동은 1939년 10월 일본식 명칭인 서봉정(西鳳町)과 동봉정으로 분할되었으며 1946년 각각 봉곡동(鳳谷洞)과 계동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를 참조하면, 비봉리 111번지는 지금의 상봉동 999번지·1000번지·1004번지·1438번지 일대로 추정된다.[4] 봉곡동과 상봉동은 인근의 망경동·남성동·본성동·장대동·옥봉동·수정동·봉래동과 함께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생몰연대가 1887년~1942년으로 기재되어 있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와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사망년월일이 1940년 6월 7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강달룡의 부음을 알리는 1940년 7월 14일 동아일보 기사에 7월 12일에 별세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것이 좀 더 신뢰가 갈 만하다고 생각되어 이 설을 채택하였다.[6] 2005년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공산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진주 강씨 족보에서 빠졌다는데, 지금은 어떤지 알 수 없다.[7] 姜炳淳.[8] 이러한 남겨진 가족들의 고초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어 강달룡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진주 강씨 족보에서도 누락되었고, 독립기념관에서 1980년대부터 후손들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하며 지금도 역시 그 행적이 묘연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