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기독교를 포함한 각 종교들의 교리에 대해 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창조과학회 등에서 펼치는 유사과학 이론인 창조설에 대한 내용은 창조설 문서
, 인류의 창조를 다루는 각국의 신화에 대한 내용은 인류창조신화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
創造論, Creationism / Theologies of Creation[1]창조론은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내부의 한 신학적 체계System로서, 창조 교의에 의해 유발되는 신학적 질문과 연구 담론 전반의 체계System를 말한다. 비슷한 말인 '창조신화'와 달리 문학적 장르가 아닌 신학 체계를 일컫는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또한 일상에서는 '창조 교의를 자연과학에 강요하는 유사과학'을 지칭하기도 하는 표현이지만[2], 관심 분야 자체가 달라서 쉽게 구별할 수 있다.[3]
2. 신학으로서의 창조론
2.1. 고대 희랍 철학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습관적으로 "원자론자Atomist라고 불리는 사실은 그들의 교설을 뒤덮은 오해의 두터운 그름이 대해 책임이 있다. 그리스어 아토모스atomōs(atom, 원자)는 "부분들로 갈라질 수 없는 것",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에프쿠로스의 "원자"는 이미 레우키포스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가상디가 말한 "원자"도 에피쿠로스의 그것과 매우 달랐다. 그리고 물질의 내적 구조에 관한 이론의 부분인 근대 과학의 "원자"는 그것과 동음이의어인 선행자들 가운데 어느 것과도 유사하지 않으며, 최근의 물리학 이론에서 그것은 최소한 그것이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길 그쳤기 때문에 원자가 아니다. 그리하여 일련의 상이한 개념들을 지칭하기 위해 동일한 용어가 사용됨으로써 창조된 혼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계속해서 철학자들이 부주의하게 비역사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더 확대되었다.
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그리스 철학과 神: 소크라테스 이전 찰학자들에게서 신 개념의 역사』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이신철 번역, 도서출판 b, 2011, p.189
탈레스 등 수많은 고대 희랍 철학자들은 우주가 '살아있는 신적 실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이 '살아있는 신적 실재'는 피타고라스에게는 '신적인 불'과 동일시되는 '신적인 하나'였으며, 이오니아 학파에게는 '나누어질 수 없는 것'atomōs(영어: atom) '원자'였다. 근대 자연과학에서 이 '원자'라는 이름을 차용한 바람에 희랍 철학과 근대 자연과학을 혼동하는 막대한 혼란이 발생하기는 하였지만, 이들 철학자들이 말한 '원자'는 하나의 신으로서 말해진 것이다.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그리스 철학과 神: 소크라테스 이전 찰학자들에게서 신 개념의 역사』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이신철 번역, 도서출판 b, 2011, p.189
신들과 우주만물에 관하여 그 당시
Hack, 같은 책 p.54
[
발췌자 주- 헤시오도스 시대]
통용되고 있던 관념들의 세 가지 특징은 특별히 강조될 만하다. 그 당시 그리고 그 후 피타고라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하나의 자연적 실재가 뒤이어 나타나는 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의 신적인 기원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
탈레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포함하여 우주 내의 모든 것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했다. 어떤 실체가 그 자신으로부터 우주만물을 발생시키는 살아있는 실체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가장 잘 주장할 수 있는가? - 같은 책 67쪽]
둘째, 이 신적인 기원의 이름과 본성에 관한 점증하는 관심이다. 이러한 관심은 헤시오도스가 호메로스의 선택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사실과, 이 시기 동안에 다른 많은 신발생론들이 지어지고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 몇몇은 신적인 기원을 선택함에 있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그 둘과 달랐다는 사실에 의해서 증명된다. 셋째, 신이나 인간의 본성과 힘이 그가 유래한 실체에 의해 설명될 수 있고 또 그 결과라는 관념이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 ... 어떤 다른 행위자의 개입 없이 자기 자신과 닮은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있는 능동적 실체라는 이 관념은 물론 그리스 사유에 대해 너무도 심원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Hack, 같은 책 p.54
오르페우스의 교설들은 7세기에 '제우스'라는 이름이 일정한 양과 질의 신적인 힘을 감싸 안고 있으면서 또한 디오니소스나 자그레우스라 불리는 또 다른 유사한 상징으로 마음대로 변환될 수 있는 단순한 상징으로써 다루어질 수 있음을 상세하게 예시해 보여준다.
Hack, 같은 책 p.59
[
폴 몽소Paul Monceaux(『오르페우스교의 말들』s. v. orphici, Daremberg et Saglio)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이른바 오르페우스교의 신들은 다만 하나의 유일한 신의 서로 다른 이름이거나 다양한 형식들 또는 연속적인 화신들일 뿐이다..]
오르페우스교들 역시 하나의 신적인 힘이 우주만물의 근원이라는 그리스의 지배적인 믿음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들은 신적인 근원을 현실의 신적인 우주만물과 동일시함으로써 그 믿음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다.Hack, 같은 책 p.59
모든 신발생론이나 우주발생론에서 다양한 살아 있는 신적인 힘들은 다양한 실체들과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역사들이 말해지는 동안 모든 이야기에 고유한 모순에 의해 신들은 종종 의인화된 외관에서 표현되곤 했다. 하지만 화학자마저도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을 낳는다고 말할 때 온건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학자는 그의 짧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물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준다. 그리고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카오스가 땅을 낳았고, 땅과 하늘이 결합하여 대부분의 다른 신들을 낳았다고 말하는 신발생론자는 우레에게 신들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주었던 것이다.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인은 우리가 산소와 수소에 친숙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땅과 하늘에 친숙했다. 그가 땅과 하늘을 실체라고 간주한 것은 우리가 산소와 수소를 원소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일한 차이는 그가 땅과 하늘이 살아 있으며, 신적인 힘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Hack, 같은 책, p.62.
Hack, 같은 책, p.62.
2.2. 크리스트교의 창조론
창조신학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 인간학을 위한 진지한 주제들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상이자 유사함'으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호세 모랄레스José Morales, 『창조론』El miterio de la creación (2000) , 윤주현 번역, 가톨릭출판사, 2015, p29.
호세 모랄레스José Morales, 『창조론』El miterio de la creación (2000) , 윤주현 번역, 가톨릭출판사, 2015, p29.
크리스트교(기독교)의 창조론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성경을 바탕으로 신이 세상과 인간과 동물 등을 각각 창조했고 창조 중이고 창조할 것이란 입장이며, 이는 고대에나 현대에나 근본주의 개신교부터 가톨릭, 자유주의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흔히 '창조론'이라고 하면 '수천년 전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명제' 정도로 인식되지만, 이는 '창조론'이라는 하나의 신학 체계System 속에 있다가 퇴출된 명제 하나를 창조론 그 자체와 혼동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모세오경은 모세가 저술했다"[4]라는 명제를 고집스럽게 고수하여 이를 역사학에 강요해놓고는 구약학 내지는 성서학이라 하는 것과 같다.[5]
창조론에서 묻는 질문의 예시는 다음과 같은 것이며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것이다: "신은 세상을 왜 창조했는가", "신은 세상을 필요에 의해 창조했는가", "인간 존재의 최종 목적은 단일 목적[6]인가 이중 목적[7]인가", "악은 왜 관찰되는가", "악은 존재하는가".
또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창조는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며,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자Ens를 존재하게Esse하는 신의 실현Actus이다. 이 실현Actus은 신 그 자체와도 '존재한다'Esse 그 자체와도 구별되지 않는데, 그렇기에 스콜라학, 더 정확히 말해 토마스주의에서는 신을 순수 현실태Actus라고 부른다.
존재하다의 특수성은, 존재한다 또는 존재는 결코 하나의 개념에 포착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에서 명백히 해 보겠다. 저기 눈앞에 한 그루의 나무, 떡갈나무가 서 있다. 나의 눈앞에 말이다. 그러나 이 나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것들이 나의 눈에 나타날 수 없으며, 감각기관 일체에 잡힐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나는 알고 있다. 이 수많은 것은, 본래적인 것은 오직 나의 정신과 통할 수 있을 뿐이며, 즉 생각될 수 있을 뿐이며, 오직 생각 속에만 담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나무의 생명 기능을 생명 기능 그 자체로 볼 수 없으며, 현미경을 통해서도 볼 수 없다. 나는 이제 나무의 본질essentia을 묻게 된다. 이는 아직도 전혀 형이상학적인 것이나 철학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단순히 나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다. 누구든지 이런 물음을 던지며, 게다가 그 사람은 이 물음에 대답하기까지 하며, 그는 물론 나무란 물이나 바위, 유리 또는 동물과는 다른 무엇quidditas[8]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무라는 본질성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완벽하게 헤아릴 수 있으며, 결국 나무가 무엇이라는 것을 남김없이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어떤 징표도 어떤 개념 요소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결국에는 '나무,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완벽하게 대답했다고 가정 해보자. 누가 이런 대답에 직면하여 이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본질의 서술은 아마도, 이렇게 완벽하게 서술된 나무가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또 하나의 진술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에 대해 나는 우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런 것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으며, 이는 본래 나의 관점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렇게 물었던 사람은 아마도 반론을 제기할 것이며, 그는 나무가 무엇인지만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런 나무가 실제로 있는지도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즉, 그는 '본질'이나, 무엇임 또는 본질성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존재'existentia, 사실, 현존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존재함이나, 현존재의 요소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고 의논하게 된다. 이는 물론 위에서 살펴본 기타의 특징들에 덧붙여 나열될 수 있는 어떤 개념 요소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밝혀질 것이다.
존재라는 요소는 다른 특성들과 동등하게 취급될 없는 것이며, 이는 원칙적으로 다른 어떤 것에 관계된다. 존재한다는 차라리 무엇을 한다는 작위(作爲)의 일종이다. 이러저러한 모든 내용적 특성을 통하여 규정되는 그 나무는 또한 무엇을 하고 있다. 즉 그 나무는 성장하고 녹색으로 변하며,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외에도 이 나무는 이러한 모든 하나하나의 작위에 앞서 그 이전에 다른 무엇을 하고 있다. 즉, 존재한다. 그렇다. 이렇게 존재함은 일종의 무엇함일 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선하는 유일무이한 의미의 완전한 행함(작위)을 뜻한다. 고대인들은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어떤 규정이나 제한도 두지 않고 그냥 행함 그 자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를 그냥 '현실태'actus[9]라고 불렀다. ... 최종적으로 진실되이 말한다면 사물들은 그들이 무엇이라는 것을 통해서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하게 하는 행위'actus essendi'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존재하게 하는 행위'를 나누어 주는, 그야말로 존재다. 바로 이것이 완전한 의미의 창조다. "사물에 끼치는 하느님의 제일 작용은 바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며, 그 외의 모든 다른 작용은 이를 전제한다"Primus effectus Dei in rebus est ipsum esse, quod omnes alii effectus praesupponunt(『신학대전』 I, 8, 1.).[10]
요셉 피퍼Josef Pieper,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Thomas von Aquin: Leben und Werk (1958), 신창석 옮김, 분도출판사, 1994, 214ff (볼드체: 원문 강조)
나무라는 본질성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완벽하게 헤아릴 수 있으며, 결국 나무가 무엇이라는 것을 남김없이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어떤 징표도 어떤 개념 요소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결국에는 '나무,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완벽하게 대답했다고 가정 해보자. 누가 이런 대답에 직면하여 이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본질의 서술은 아마도, 이렇게 완벽하게 서술된 나무가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또 하나의 진술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에 대해 나는 우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런 것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으며, 이는 본래 나의 관점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렇게 물었던 사람은 아마도 반론을 제기할 것이며, 그는 나무가 무엇인지만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런 나무가 실제로 있는지도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즉, 그는 '본질'이나, 무엇임 또는 본질성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존재'existentia, 사실, 현존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존재함이나, 현존재의 요소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고 의논하게 된다. 이는 물론 위에서 살펴본 기타의 특징들에 덧붙여 나열될 수 있는 어떤 개념 요소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밝혀질 것이다.
존재라는 요소는 다른 특성들과 동등하게 취급될 없는 것이며, 이는 원칙적으로 다른 어떤 것에 관계된다. 존재한다는 차라리 무엇을 한다는 작위(作爲)의 일종이다. 이러저러한 모든 내용적 특성을 통하여 규정되는 그 나무는 또한 무엇을 하고 있다. 즉 그 나무는 성장하고 녹색으로 변하며,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외에도 이 나무는 이러한 모든 하나하나의 작위에 앞서 그 이전에 다른 무엇을 하고 있다. 즉, 존재한다. 그렇다. 이렇게 존재함은 일종의 무엇함일 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선하는 유일무이한 의미의 완전한 행함(작위)을 뜻한다. 고대인들은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어떤 규정이나 제한도 두지 않고 그냥 행함 그 자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를 그냥 '현실태'actus[9]라고 불렀다. ... 최종적으로 진실되이 말한다면 사물들은 그들이 무엇이라는 것을 통해서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하게 하는 행위'actus essendi'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존재하게 하는 행위'를 나누어 주는, 그야말로 존재다. 바로 이것이 완전한 의미의 창조다. "사물에 끼치는 하느님의 제일 작용은 바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며, 그 외의 모든 다른 작용은 이를 전제한다"Primus effectus Dei in rebus est ipsum esse, quod omnes alii effectus praesupponunt(『신학대전』 I, 8, 1.).[10]
요셉 피퍼Josef Pieper,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Thomas von Aquin: Leben und Werk (1958), 신창석 옮김, 분도출판사, 1994, 214ff (볼드체: 원문 강조)
세속적, 종교적 사상사에서는 하느님과 세상이 동일한 실재라고 여기는 철학자들이 있다(스토아 학파, 17세기 스피노자의 일원론 등). 반면,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과 세상은 서로 다른 실재라고 보았다(신화적 유출설: 그에 따르면 세상은 신적 존재 또는 그 존재의 일부를 바탕으로 물질적으로 형성된다. 철학적 유출설: 이는 보다 다듬어진 신(新)플라톤적 유형의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하느님에 대해 필연적이고 비시간적인 의존 관계를 유지한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창조가 비존재에서 존재를 향하는 근본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이행(移行)을 내포한 신적 행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존재 이전과 무(無)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다.
따라서 창조는 '사물 전체가 존재하도록 생산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나 모든 본질에 따라 제반 사물을 생산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Productio rei secundum totam suam substantiam": 『신학대전』 I, 65, 3.) 하느님은 창조 행위를 통해 존재하는 한에서 존재자들을 만드신다. 존재자들은 '존재 현실'(actus essendi)[11]에 힘입어 존재한다. 이 존재 현실은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 안에서 드러나는 모든 완전함 중에 최고의 완전함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한에서 존재를 만든다 함은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느님에 의한 창조는 상당히 광범위한 종교적 진리이며, 동시에 존재와 그 존재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하는 위대한 신비와 직접 접촉하게 해 주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호세 모랄레스José Morales, 『창조론』El miterio de la creación (2000) , 윤주현 번역, 가톨릭출판사, 2015, pp.185-186.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창조가 비존재에서 존재를 향하는 근본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이행(移行)을 내포한 신적 행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존재 이전과 무(無)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다.
따라서 창조는 '사물 전체가 존재하도록 생산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나 모든 본질에 따라 제반 사물을 생산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Productio rei secundum totam suam substantiam": 『신학대전』 I, 65, 3.) 하느님은 창조 행위를 통해 존재하는 한에서 존재자들을 만드신다. 존재자들은 '존재 현실'(actus essendi)[11]에 힘입어 존재한다. 이 존재 현실은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 안에서 드러나는 모든 완전함 중에 최고의 완전함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한에서 존재를 만든다 함은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느님에 의한 창조는 상당히 광범위한 종교적 진리이며, 동시에 존재와 그 존재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하는 위대한 신비와 직접 접촉하게 해 주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호세 모랄레스José Morales, 『창조론』El miterio de la creación (2000) , 윤주현 번역, 가톨릭출판사, 2015, pp.185-186.
2.2.1. 가톨릭의 창조론
자세한 내용은 창조론/가톨릭 문서 참고하십시오.2.2.2. 개신교의 창조론
루터가 만인제사장을 외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 주교, 교황으로 봉헌한 이래로 개신교는 무수히 많은 교파가 갈라져 나왔고 교파별로 창조론에 대한 입장이 차이가 있다. 한국의 주류 개신교 교파인 장로회는 대체적으로 진화론을 부정하는 형태의 창조론을 지지하고 있으나 각 교파의 공식적인 입장과 무관하게 진화론을 긍정하는 개신교 신자는 꽤 있다.[12][13]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의 참/거짓을 따질 때 진화론의 성립여부를 중심으로 설명을 하는데 이는 중요 초점을 놓친 것이다. 개신교는 창조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창조주의 존재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진화론의 성립 여부와는 어떤 면에선 관련이 깊지만 실상 본질상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 아래의 서술에서도 창조론에 대한 서술을 진화론을 중심으로 구분하며 자연스럽게 진화론의 성립 여부가 창조론과 양립불가능한 식으로 서술이 되었다.
여기서는 임의로 개신교의 창조론을 보수적 개신교과 진보적 개신교라는 명칭으로 진화론의 인정 여부를 구분하겠다. 원래 개신교의 성격이 보수적이다, 진보적이다를 구분짓는 엄밀한 구분은 진화론의 인정여부는 아니지만, 딱히 적절한 표현이 없어 그나마 포괄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1. 창조론/보수적 개신교: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의 입장. 창조설 문서 참고.
진화론만 해도 관련 논문이나 책이 쏟아지는데, 창조론 역시 교회에서 강의도 하고 책도 권하는 등 신도들에게 제공하는 정보가 많은 편이다. 여기서 교회측이 내놓는 논리 중 진화론에 대해 공부해본 적이 없는 일반인으로서 반박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파충류가 조류로 진화를 했다고 치면 그 '중간 과정'에 해당하는 생물은 파충류로서의 장점을 버렸지만 아직 조류로서의 장점(비행, 깃털 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인데 이런 '연약한' 종은 중간에 도태되는 것이 맞지 않은가"와 같은 주장은 관련된 과목을 공부해 본 일이 없는 일반인 대다수가 반박을 하기 어려우며, 아예 개념 자체에서 컬쳐 쇼크를 받고 '그런가?' 하는 쪽으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물론 자주 착각하기 쉽지만 그 중간과정은 중생대의 지배자인 공룡이고 대멸종 이후 살아남은 공룡은 오히려 연약해보이고 상대적으로 작은 깃털공룡이었다는 점이 진화론의 자연 선택을 잘 설명해준다.
2. 창조론/진보적 개신교: 진화론을 인정하는 개신교의 입장.[14]
각자가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세계가 창조된 것은 맞지만 창조된 이후 진화가 별개로 일어났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노아의 방주 이야기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거나, 규모는 작더라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긴 했으나 구전되면서 스케일이 커졌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꽤나 현실성 있는 생각인데, 애초에 성경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아 모두 필사되었기 때문.
2.2.3. 정교회의 창조론
2.2.4. 주요 문헌
- 로널드 L. 넘버스,《창조론자들》2016.
- 로후스 레온하르트, "하나님의 창조와 세계 통치",《조직신학 연구방법론》2018.
- 위르겐 몰트만,《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2017.
- 하랄트 바그너, "창조를 향한 하느님의 뜻",《교의신학》2017.
- 미하엘 벨커,《창조와 현실》2020.
-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기독교신앙》2006, 201-213쪽.
- 한스 큉,《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2011.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세계의 창조",《조직신학》II, 2018, 28-294쪽.
2.3. 이슬람의 창조론
2.3.1. 창조된 것들
이슬람에서는 꾸란에 의거하여 모든 존재의 근원을 알라[15]로 본다. 꾸란에 따르면, 알라는 인간과 우주를 창조했으며 인간들에게 다른 피조물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신은 천사(43:19), 진(55:15 - 진은 연기 없는 불로 창조), 하늘과 땅(14:19), 태양과 달, 낮과 밤(41:37), 천둥(13:3), 나무, 과일, 곡식과 향기로운 꽃(55:10~12), 수중 생물(24:45) 등을 창조했다고 한다.2.3.2. 이론적 쟁점
이슬람 신학에서 다루는 창조론에서 생기는 이론적 쟁점은 다양한데 그 중 하나는 꾸란에서 '알라'를 배타적인 창조주로 취급하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있다. 수라 (13:16)의 아래와 같은 구절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일러가로되 천지의 주님이 누구이뇨 일러가로되 하나님이라 일러가로되 스스로를 위하여 유용함도 해악도 없는 그분 아닌 다른 것을 보호자로 택하였느뇨 일러가로되
장님과 보는 자가 같을 수 있으며 암흑과 빛이 같을 수 있느뇨 또한 그들은 그들이 만든 우상을 그분이 창조한 것처럼 숭배하여 창조된 것이 그들에게 혼돈됨인가 일러가
로되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그분은 홀로 전능하심이라 - 사우디 국왕역 《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 수라 (13:16).
장님과 보는 자가 같을 수 있으며 암흑과 빛이 같을 수 있느뇨 또한 그들은 그들이 만든 우상을 그분이 창조한 것처럼 숭배하여 창조된 것이 그들에게 혼돈됨인가 일러가
로되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그분은 홀로 전능하심이라 - 사우디 국왕역 《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 수라 (13:16).
여기서는 알라와 다른 '샤리크'(타 종교의 신)에게도 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듯한 언급이 있다. 일반적으로 꾸란에서 창조의 능력은 알라(유일신)에게만 귀속되나 이 구절만이 예외이다.
이는 아래의 번역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말하라. 하늘들과 땅의 주님은 누구인가? 말하라. 알라 말하라. 왜 너희들이 그 분(알라)이 아닌 (다른) 보호자를 취했니? 그들 자신에게 유익과 해로움도 주지 못한다. 말>하라. 시각 장애자가 시각 정상인과 동등하냐? 또는 깜깜한 어둠이 빛과 동등하니? 또는 그들이 알라의 슈라카(동반자들, 샤리크의 복수)를 만들어 알라가 창조한 것과
유사한 것을 슈라카가 창조한 것이 알라의 것과 구별이 안 된다는 말인가? 말하라.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다. 그 분은 한 분이시다.
- 공일주, 《꾸란의 이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0, 122쪽
유사한 것을 슈라카가 창조한 것이 알라의 것과 구별이 안 된다는 말인가? 말하라.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다. 그 분은 한 분이시다.
- 공일주, 《꾸란의 이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0, 122쪽
그러나 이는 정통 교리를 따르는 한 심각한 쟁점이 되지 않는다. 신 자체의 존재론, 또 이에 의거해 신이 이룬 창조의 특성과 꾸란의 존재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설명할 것이냐가 보다 중요한 쟁점이 되는데, 이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개진하느냐에 따라 신학의 학파가 무으타질라파, 아슈아리파, 마투리디파 등으로 다양하게 갈리게 되었다.
2.4. 힌두교의 창조론
힌두교의 가정 오랜 경전이며 모태인 리그베다(B.C.1500)에 근거한 힌두교 문헌에서는 여러 가지 창조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 이러한 베다의 언급을 근거로 세계의 창조 문제를 논하는데 힌두교의 창조론은 매우 신화적이며 창조에 관련된 신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으나, 힌두교에서 정의된 신은 결코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다. 신은 항상 어떤 사물이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창조하며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부터 창조하지는 않는다. 초창기의 힌두교가 후기로 나가면서 힌두교의 교리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4.1. 일신교적 창조론
- 초기 리그베다 문헌 : 건조(建造) 또는 출산을 본뜬 원시적인 우주의 창조 설을 담고 있지만 명확한 창조신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프라자파티'가 거론되지만, 이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 후기 문헌에서는 보다 분명한 언급이 보인다. 우주의 창조신을 '비슈 바카르마'라 언급하며 이 신은 천지를 창조할 때 집을 짓듯이 양팔로 부채질하여 접합시켰다고 한다.
- '브리하스파티'(기도의 주인)를 창조신으로 하는 찬가에서는 브리하 스파티가 대장장이처럼 만물을 단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찬가에서 '유(有)는 무(無)에서 생기지 않는다.'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 구절은 이후 철학적으로 중 요한 쟁점이 되었다. 여기의 '무'는 비존재라기보다는 혼돈 상태를 가리킨다.
- 리그 베다의 내용 중 가장 추상적인 창조론은 우주 개벽의 찬가(10:129)에서 전 개된다. 이 찬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태초에 무(無)도 없고 유(有)도 없었 다. 공계(空界)도 없었으며 그를 뒤덮는 하늘도 없었다…' 이 찬가는 우주의 발생 원인을 중성(中性)의 근본 원리인 절대의 유일자에게로 돌린다.
- 브라흐마(산스크리트어: ब्रह्मा) 또는 범천(梵天) : 후기에 정리되어 정형화된 창 조의 신으로 비슈누, 시바와 함께 힌두교의 삼주신을 이룬다. 브라흐마는 힌두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적 원리이자 최고 원리인 지고의 우주적 정신 또는 존재인 브라만이 인격화된 남신으로 브라만을 상징한다. 브라흐마의 배우자는 배움의 여 신인 사라스바티이다. 브라흐마는 베다에서 프라자파티라 불리기도 한다.
- 프라자파티 : 브라흐마는 세상을 만들면서 인간의 조상이라고 하는 열한 명의 프라자파티를 만들었다. 그들은 각각 마리치(Marichi), 아트리(Atri), 아기라사(Angirasa), 풀라스티아(Pulastya), 풀라하(Pulaha), 크라투(Kratu), 바시쉬타 (Vasishtha), 프라체타스(Prachetas, 다크샤(Daksha)라도도 함), 브리그(Bhrigu), 나라다(Narada)라고 불린다. 브라흐마는 그를 도와 우주를 만드는 데 함께할 사 프타리쉬(Saptarishi)라 불리는 일곱의 현자도 만들었다. 이들 모두는 그의 몸에서가 아니라 정신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이 때문에 정신적 자식이라는 의미의 마나스 푸트라스라 불린다. 베다와 푸라나에 실린 신화에서 브라흐마의 작업은 다른 신들에 의해 종종 방해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한 방해 중 어떤 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다고 한다.
2.4.2. 범신론적 창조론
'푸루샤 숙타'(원시 찬가)에서는 범신론적 창조론을 보이고 있다. 원시의 인간 '푸루샤(Purusha)'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가졌으며 신들이 푸루샤를 희생시켜 제사를 지냈을 때 거기서 말, 소, 산양, 양 등이 태어났고, 푸루 샤의 마음에서는 달이, 눈에서는 태양이, 입에서 인드라와 아그니가, 숨결에서 바람 이, 배꼽에서 공계(空界), 머리에서 천계(天界), 양 발에서 대지, 귀에서 방위(方)가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찬가는 거인 해체 신화의 한 예다.2.4.3. 힌두교 창조설의 교의적 발전 : 우주론적 교의
- 브라흐마 신 : 힌두교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생성, 발전, 소멸을 반복한다. 브라흐마 신이 우주를 생성하고 비슈누신이 우주를 유지, 발전시키며 시바신이 우주를 소멸시킨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우주의 시간도 바뀌어 결국에는 낡은 우 주 가 소멸되고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
- 기본 교의 : 힌두교는 결국 이러한 창조 신화를 바탕으로 우주의 법칙과 인간의 윤회를 근간으로 하는 교리를 발전시켰는데, 결국 인간 역시 우주 안에서 끊임 없이 낳고 죽기를 반복하며 윤회한다. 인간이라 하더라도 다음 생애에는 짐승으 로 태어 나기도 하며 천신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수없이 많은 윤회의 과 정에서 사람은 한 인생을 살면서 쌓은 업(산스크리트어: Karma)에 의해 다음 생애가 결정된다. 다르마에 따른 삶을 살다 죽으면 다음 생애에는 보다 고귀한 존재로 태어난다. 다르마에 어긋나는 삶을 살면 고귀한 존재라 할지라도 다음 생애에는 비천한 존재로 태어난다. 이러한 힌두교의의 기본 개념들은 대부분 이 후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등 인도에서 발원한 다른 종교에 도입되었다.
- 브라만(산스크리트어: Brahman) : 우주의 진리 또는 우주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기도 하다. 힌두교의 최상위 목표는 '참된 나'인 아트만이 '우주의 진리'인 브라 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카스트 제도의 가장 상위 계층을 브라만이라고 칭한 것은 이들이 스스로 우주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자신들의 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아트만 : 생명은 숨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아트만의 원래 뜻은 숨쉰다는 뜻이 다. 한국에서 생명을 목숨으로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숨쉬는 생명 아트만(산 스크리트어: आत्मञ्,Atman)은 '나'를 말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윤회하는 삶에서 지금의 나는 '참된 나'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윤회를 거치는 동안 내가 쌓은 업(산스크리트어: Karma, 業)에 의한 것이다. '참된 나'는 윤회의 과정에서 계속하여 존재하여 없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나 라는 생명의 본질'을 뜻 한다.
2.5. 불교의 창조론
불교는 우주와 만물의 존재를 설명함에 있어 창조주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존재와 현상이 특정한 원인과 조건에 따라 생겨난다는 연기법(緣起法)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다양한 전통에서는 상징적 표현으로 창조와 관련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대승불교에서 비로자나불은 우주적 진리를 상징하는 부처로 간주된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비로자나불의 본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며, 석가모니는 이 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 해석된다. 비로자나불은 창조주로서의 신적 존재라기보다, 우주와 존재의 본질적 실상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이해된다. 한편, 원시불교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등장하지 않는다. 우주와 만물의 존재는 특정한 창조주가 아닌 자연적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설명하며, 이를 연기법으로 정의한다.
연기(緣起)는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인해 저것이 생긴다"는 원리에 따라 모든 존재와 현상의 상호 의존성을 설명한다. 연기법은 모든 존재가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지해 생겨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음을 강조한다.
석가모니가 《잡아함경》 제299경에서 연기법에 대해 설명한 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든 아니든, 연기법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닫고 이를 중생들에게 드러낸다.”
3. 관련 문서
[1] 창조에 관한 이론이 아닌 창조에 관한 신학론. 외국 신학서적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로 본 항목의 본래 뜻에는 이게 더 가깝다.#[2] 이러한 유사과학은 애초에 신학이 아니기에 '창조론'이 아니라 '창조론의 잘못된 타 학문 적용'에 불과하다. 이는 창세기를 자연과학에 적용하는 것을 성서론Bibliology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오류이다.[3] 가령 앞에서 이야기한 유사과학의 관심사는 "다윈의 진화론은 틀렸다" 같은 것이지만, 창조론의 관심사는 "인간 존재의 최종 목적", "세상이 창조된 이유", "악이란 무엇인가" 같은 것이다.[4] 현대 성서학에서 퇴출된 명제.[5] 물론 '수천년 전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명제가 과거 창조론에 속해 있던 건 맞다. 그러나 천동설이 17세기의 제도권 과학에 속했다는 이유로 21세기에도 천동설을 고수해버리면, 그건 과학이 아니라 그냥 유사과학일 뿐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노예가 되기에 적합한 민족도 있다고 한 것을 근거로 21세기에도 철학의 이름으로 그 명제를 고수해버리면, 아무도 그것을 진지한 철학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곧, 한 학문에서 이미 퇴출된 명제를 그 학문의 이름을 도용하여 고수하는 건 유사학문에 속한다.[6] 곧, 단일한 초본성적Supernatural 목적[7] 초본성적Supernatural 목적과 본성적Natural 목적의 병행[8] (발췌자 주석) quidditas는 '무엇' 내지는 '하성(何性)'으로 번역되는 말로, 본질essentia의 동의어이다. 곧, 본질essentia이란 "X라는 것은 무엇quidditas인가"라는 뜻이다.[9] (발체자 주석) actus는 형이상학에서 '현실태'로 번역되지만, 라틴어에서는 그냥 담백하게 '행함', '작위', '실현'을 의미한다. 이 라틴어에서 파생한 영어 act와 유사하다. 사실 한자어 현실(現實)도 그냥 실현(實現)을 뒤집었을 뿐인 단어이며, 한자 의미는 real보다는 act에 가깝다.[10] (발췌자 주석) '존재한다'esse는 '생물이다', '동물이다', '지성적 동물이다' 같은 무엇임(본질)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행한다actus는 작위actus의 영역에 속하며, 동시에 가장 순수한 의미의 작위actus이고 우리가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작위actus이다. 이 순수한 형태의 작위, 곧 '순수 현실태'actus purus를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며, 이를 통해 (범신론과 달리) 피조물과 창조주를 엄격히 구별하면서도, 모든 피조물을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게 하는 작위actus로서의 신 개념, 곧 '존재한다'esse와 동일시되는 신 개념을 말할 수 있게 된다.[11] (발췌자 주석) 곧, 존재한다는 행위actus. 이 '존재한다는 행위'actus essendi를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라 부른다.[12] EBS 신과 다윈의 시대 2008년3월9일(월) 코리아 리서치 조사 개신교 40%[13]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여론조사 2012년7월16일 갤럽조사 인간이 다른 생물 종에서 진화했다 개신교 14%, 천주교 31%[14] 관련 저서로는 다음이 있다. 《신의 언어》,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다윈주의자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예수와 다윈의 동행》,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창조론자들》 등.[15] 이슬람의 교리상 야훼와 동일한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