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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普, ruby=ふ)][ruby(代, ruby=だい)][ruby(村, ruby=むら)] 후다이무라 / Fudai Village | ||
<rowcolor=#fff> 촌기(村旗) | 문장(紋章) | |
기본 정보 | ||
국가 | 일본 | |
지방 | 도호쿠 | |
도도부현 | 이와테현 | |
면적 | 69.66km² | |
인구 | 2,602명[1] | |
촌장(村長) | [[무소속(정치)| 무소속 ]] 마사야 노부오(柾屋伸夫) | |
촌의회 (10석) | ||
의장(議長) | [[무소속(정치)| 무소속 ]] 나카무라 히로시(中村裕) | |
회파 | 무소속 (10석 / 100%) | |
상징 | ||
촌화 | 하마유리(ハマユリ) | |
촌목 | 회화나무(エンジュ) | |
촌조 | 바다가마우지(ウミウ) | |
북위 40도 지점 조형물 |
[clearfix]
1. 개요
[ruby(普,ruby=ふ)][ruby(代,ruby=だい)][ruby(村,ruby=むら)]일본 이와테현 북동부에 위치한 촌(村). 일본에서 북위 40°선이 지나는 지자체 중 가장 동쪽에 있다. 북위 40도 서쪽 끝에 위치한 아키타현 미타네초와 우호협력 지자체 협약을 맺었다.
후다이가와(普代川) 하류에 위치한 중심구역과 북부에 위치한 호리나이(堀内)를 제외하면 권역 대부분은 산지이다. 바닷가도 일부를 제외하면 절벽으로 되어 있다.
2019년 기준 인구는 약 2600명으로, 1965년에 4800명 수준에서 계속 떨어지고 있다. 관내 학교도 소학교와 중학교 각각 하나밖에 없다.
2. 역사
1889년에 자연촌인 후다이무라(普代村)가 행정촌으로 승격되면서 만들어졌다.산리쿠 지방의 다른 지자체와 마찬가지로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마을 내에 있는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는 피해가 빈번했다. 1896년에는 메이지 산리쿠 지진(明治三陸地震)으로, 1933년에는 쇼와 산리쿠 지진(昭和三陸地震)으로 쓰나미가 몰려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 때 역시 쓰나미가 몰려왔는데, 밑에 나오는 에피소드 덕분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
3. 후다이의 기적
쓰나미 직후의 후다이 수문(출처)
마을과 해안까지의 거리가 1.7 km밖에 안 됐지만 마을로 들어오는 강 하구에 위치한 후다이 수문(普代水門)이 쓰나미를 거의 막아 주었기 때문에 피해가 없다시피 했다. 이 수문은 1984년에 당시 촌장 와무라 고토쿠(和村幸得) 주도 아래 완공되었다.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와무라 고토쿠 和村 幸得 / Kōtoku Wamura | |
출생 | 1909년 2월 21일 |
일본 이와테현 | |
사망 | 1997년 10월 18일 (향년 88세) |
학력 | 모리오카 중학교 (졸업) 게이오대 (중퇴) |
직업 | 정치인 |
와무라 촌장은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어느정도 안정화 된 뒤 1947년에 당선되어 1987년까지 40년을 재임한 10선의 촌장이었다. 재임 막바지, 마을에서는 쓰나미 피해를 두 번[2] 입은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후다이가와(普代川) 하구에 수문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촌장은 당시 논의되던 10m로는 부족하다며, 14미터짜리 쓰나미는 있었으니까 15.5m로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촌장이 재임하던 1967년에 5837만 엔을 들여 같은 높이로 건설된 오타나베 방조제(太田名部 防潮堤)도 '언제 올지 모르는 쓰나미 때문에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했다.'고 욕을 먹는 마당에, 똑같은 높이에 폭 두배짜리를 또 짓겠다는 촌장의 의견에 마을 사람들은 '차라리 마을을 옮기는 게 더 싸게 먹히겠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와무라 촌장은 "쓰나미에 두 번이나 당했지만 세 번 당할 수는 없다." 하며 공사를 강행했고, 결국 35억 6천만 엔(약 158억 원)[3]을 들여 수문을 완공했다.
그는 1987년 4월 30일 퇴임했는데, 퇴임식에서
村民のためと確信をもって始めた仕事は反対があっても説得をしてやり遂げてください。最後には理解してもらえる。これが私の置き土産です。
촌민들을 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반대가 있어도 설득해서 이뤄주십시오. 마지막에는 이해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남기고 가는 선물입니다.
라고 말했다. 물론 퇴임 후에도 예산낭비라는 욕만 먹다가 1997년에 88세로 별세했다.촌민들을 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반대가 있어도 설득해서 이뤄주십시오. 마지막에는 이해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남기고 가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14년 뒤, 그의 고집이 정말로 마을과 주민들의 목숨을 구했다.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자마자 원격 조정으로 수문을 닫았고, 도중에 정전되자 마을 소방대원들이 직접 수동으로 수문을 닫아 방비에 들어갔는데, 인명피해는 수문 바깥에 어선 보러 갔다가 실종된 단 1명뿐이었고, 가옥 피해는 전무했다. 이를 두고 일본 언론에서는 후다이의 기적(普代の奇跡)이라고 불렀다.
붉은색이 메이지 산리쿠 지진의 쓰나미 피해 영역, 푸른색이 도호쿠 대지진의 쓰나미 피해 영역이다. 가운데 위쪽에 붉은 선으로 표시된 것이 후다이 수문. 사실 그 높이로 수문을 만들었는데도 쓰나미의 최고 높이는 23.6m로 수문보다 8.1m나 높아서 침수를 완전히 막는 데는 실패했으나, 수문을 넘어온 물의 양이 많지 않아서 끝내 마을까지는 닿지 않았다. 따라서 수문 안쪽의 재산 피해는 거의 없었다.
추가로, 지도 오른편의 붉은 선도 같은 촌장이 지은 오타나베 방조제인데, 이쪽은 심지어 쓰나미를 완벽히 막아냈다. 15.5미터로 같은 높이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난 이유는, 오타나베 쪽은 항구라서 방파제가 겹겹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방파제에 막혀 쓰나미 높이가 낮아지면서 방파제에 다다를 때는 수위가 11.8m 정도였기 때문이다. 반면 후다이는 강 하구에 설치된 수문이라 수문 바깥은 뻥 뚫려 있었기 때문에 쓰나미가 그대로 직격한 것이다.
재산 피해는 수문 바로 아래에 있는 다리가 파손된 것, 마을에 있던 어선 600척 대부분이 파손되어 40척 정도만 남을 정도였지만 인명은 돈으로 따질 수 없다. 만약 원래 예정대로 10m 높이로 수문을 건설했다면 수문을 넘어온 쓰나미 탓에 사상자는 최소한 수백 명에 재산피해도 훨씬 거대했을 터이다.[4]
기적을 경험한 마을 사람들이 와무라 고토쿠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오른쪽 뒤로 수문이 보인다.
이 문서가 작성되기 전에 이 내용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2023년 현재도 15.5미터는 도호쿠 지역에서 제일 높은 방조제다.
4. 교통
철도는 산리쿠 철도 리아스선 후다이역~호리나이역 구간이 속한다.버스는 후다이 촌영버스(普代村営バス)가 있으며, 전 노선이 후다이역을 중심으로 각지를 잇는다. 그 외에 타노하타 촌영버스(田野畑村営バス) 일부 노선이 후다이역까지 운행한다.
고속도로는 산리쿠키타 종관도로가, 국도는 45번 국도만이 지난다.
[1] 추계인구, 2019년 6월 1일 기준.[2] 와무라는 1933년 쇼와 산리쿠 지진 당시 이곳을 덮친 파고 15m 쓰나미로 137명이 희생되고 450명 이상이 부상당하는 참극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이전 1896년 산리쿠 해역 지진도 있었다.[3] 1985년의 엔화와 한화간 환율을 근거로 변환함[4] 쓰나미에 쑥대밭이 된 미야코시의 수문 높이가 10m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