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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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출삼려 五出三犁 | ||
<colbgcolor=#F0C420,#000080><colcolor=#800000,#D0FC5C> 시기 | 1409년, 1410년, 1414년, 1422년, 1423년, 1424년 | |
장소 | 몽골초원 | |
교전 세력 | 명나라군 (공세) 승 | 몽골, 오이라트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영락제 (명 황제) 구복 † 왕총 † 하진 † 왕충 † 이원 † | 지휘관 올제이테무르 칸 (몽골 카간) 아룩타이 마하무드 |
병력 | 명나라군: 500,000명[2] | 몽골&오이라트: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명나라의 초원에 대한 우위 달성 | |
영향 | 명나라의 경제 침체, 몽골의 약화, 오이라트의 초원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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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락제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을 5차례 친정한 사건. 오출삼려(五出三犁)[3]라고 불리기도 한다. 참고로 아래 타임라인은 모두 음력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니 유의.2. 배경
몽골을 중원에서 쫓아낸 홍무제는 대외정책에 소극적인 편이었다. 홍무제는 몽골을 다시는 중원으로 오지 못하게 밟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1388년 대정벌을 마지막으로 몽골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이러한 기조는 영락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락제는 몽골을 절대 무시하지 않았다. 조공국을 확대하고, 베트남을 정복하고, 여진족까지 자기 수중으로 만든 영락제였지만 몽골만큼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영락제는 북방의 정세를 주시하는 한편 그들이 명나라로 내려오지 않도록 방어를 철저히 강화했다. 그러던 중 북원에서 부냐시리가 즉위하면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어느날 영락제는 몽골이 굴리치를 쫓아내고 부냐시리를 새 칸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영락제는 부냐시리는 사마르칸트에 있는데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와서 칸이 될 수 있냐고 의심했다. 하지만 실제로 굴리치는 아룩타이에게 살해당했고, 마침 베쉬발리크에 있던 부냐시리에게 칸의 자리에 올라와달라고 요청한 상태였다. 영락제는 이를 모르고 몽골에 사신을 보내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한다. 하지만 사신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영락제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1409년 3월 도독첨사 오윤성이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 등 22명을 잡아왔다. 영락제는 이들이 부냐시리 칸의 즉위사실과 몽골의 여러 구체적인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사신이라고 판단했다. 영락제는 마침내 몽골과 명나라 사이의 우호관계가 맺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월에 급사중 곽기를 사신으로 보내고 잡아들였던 몽골인들을 동행시켜 몽골로 다시 보냈다. 이 때 영락제가 작성한 편지에는 서로 왕래와 우호를 다져 화목하게 지내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때 영락제는 진짜로 몽골과 잘지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감숙총병관 좌도독 하복에게 변방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몽골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함부로 잡아버릴 수 있다면서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당부했다. 황태자도 곧 몽골에서 사람이 내려올테니 접대할 때 실수가 있어선 안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9월에 곽기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내려왔다. 부냐시리는 곽기를 살해하고 우량카이 3위[4]를 공격하려고 했다. 영락제는 분노하면서 내가 몽골과 좋게 지내기 위해 잡아들인 사람도 돌려보내고 선물까지 보내줬는데 이렇게 나올 수 있냐고, 사신을 죽이고 약탈을 벌일 생각을 하냐고 거침없이 몽골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곽기 이전에 보냈던 사신이 돌아오지 않은 이유도 이젠 명백해졌다. 부냐시리는 영락제와 좋게 지낼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통수를 심하게 맞은 영락제는 하복에게 곧 장수를 임명해 몽골을 토벌할 예정이니 앞으로 몽골족이 침략하면 보고하지말고 즉시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1409년 7월 3일 기국공(淇國公) 구복(丘福)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 총병관(總兵官)으로, 무성후(武城侯) 왕총(王聰)을 좌부장군(左副將軍)으로, 동안후(同安侯) 화진(火真)을 우부장군(右副將軍)으로, 정안후(靖安侯) 왕충(王忠)을 좌참장(左參將)으로, 안평후(安平侯) 이원(李遠)을 우참장(右參將)으로 임명하고 이들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몽골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부냐시리에게 서신을 보내 정로대장군 구복이 곧 사신을 죽인 이유를 물으러 갈 것이니 목 닦고 기다리라고 경고했다.
3. 전개
3.1. 구복의 원정
장성을 빠져나온 원정군은 8월 무렵 부냐시리와 아룩타이가 있는 케룰렌강에 도착했다. 마침 강 주변에 떠돌아다니고 있던 병사가 보여 이들과 전투를 벌이고 포로를 잡는데 성공한다. 포로를 심문해보니 부냐시리는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으로 도망치려고 하고 있는 상황. 이에 승리를 확신한 구복은 군사들에게 당장 부냐시리를 쫓아 잡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포로의 말만 듣고 적진 깊숙히 들어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케룰렌강은 카마그 몽골 때부터 몽골이 생활해온 완전한 몽골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원과 왕총 포함 대부분의 장수들은 크게 반대했지만 구복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원정군이 몽골에 공격을 가해도 몽골군은 후퇴만 할 뿐이었다. 구복은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화진에게 몽골의 진영으로 가서 거짓으로 화친을 구하라 했다. 몽골이 방심한 틈을 타 경무장한 기병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당연히 화진은 가기 싫어했지만 구복이 안가면 참수하겠다고 하니 별 수 없이 명령에 따라야 했다. 명나라 실록에 따르면 장수들의 말을 잡아주는 말잡이꾼들도 죽는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나아갔다 한다. 사실 이것은 몽골의 계략으로 일부러 적을 유인해서 한번해 포위해 섬멸할 계획이었다. 곧 구복의 원정군은 포위되었고, 분전 끝에 왕총은 전사, 구복과 화진, 왕충, 이원은 몽골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한다. 이 때 이원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욕을 퍼부었다고 하는데, 구복에 대한 욕인 것인지, 몽골에 대한 욕인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전투 한번에 원정군은 허무하게 무너졌고, 지휘관 전부가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3.2. 1차 친정
구복의 원정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명나라로 전해졌다. 영락제의 반응은 말 그대로 분노 그 자체였다. 영락제는 남경에 있는 황태자에게 내년 봄에 몽골을 친히 정벌하러 갈 것이니 국가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장정들과 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명나라에 있다가 조선에 돌아온 사신들의 말에 따르면 동원되지 않은 남자를 찾기 어렵고, 성 밖의 모든 군사들이 군수물자를 나르는데 동원되었다고 한다.1409년 10월 1일에 영락제는 여러 장수들을 부르고 구체적인 원정 계획을 논의했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방식은 다음과 같다. 몽골이 오이라트를 공격하면서 몽골의 말이 지치기를 기대하고, 풀이 자라기 시작하는 2월 쯤에 원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식량을 보급하는 방법같은 경우, 가히 대륙의 기상이 느껴지는 방식을 사용한다. 먼저 선부[5]까지 가는 길은 북경성과 장성 바깥 위소에 있는 식량창고에서 담당하게 한다. 그다음 장성을 벗어나면 거기서부터는 무강차(武剛車) 3만대를 동원해 약 20만 석의 식량을 운반하면서 군을 따라가게 한다. 그리고 초원으로 진군하면서 10일마다 성을 쌓고 거기에 식량을 저장한 다음, 군사를 주둔시킨다. 몽골군을 발견할 경우 따라가면서 이 짓을 반복한다. 즉, 몽골 때려잡는 길따라 식량탱크를 만든다는 것으로 지극히 중국이라 가능한 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성의 이름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는데 평호성(平胡城), 살호성(殺胡城)[6] 등으로 부르기로 했다. 명나라는 조선에도 원정에 사용할 말을 요구했는데, 이에 조선은 500마리 정도의 말을 보내는 것으로 성의를 표시했다.
1410년 2월 1일, 황장손에게 북경의 수비를 맡기고 호부상서 하원길에게 황제가 친정 가있는 동안 북경 수비와 전반적인 국정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3일에 메뉴얼이 완성되었다. 중요한 업무는 남경에 있는 황태자가, 기타 짜잘한 업무는 북경을 지키는 황장손이 담당하게 했다. 1410년 2월 4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반포하였다.
짐은 하늘의 명을 받아 태조 고황제의 위대한 기초를 이어받아, 만방을 통치하고 모든 백성을 어루만졌다. 먼 지역의 오랑캐들까지도 모두 교화에 따랐으나, 북쪽 오랑캐만은 잔여 세력이 황야에 머물며 흉포한 행동을 자행했다.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교화를 전하려 했으나, 그들은 사신을 억류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들이 변방을 침범하고 변방의 장수들이 그들을 붙잡아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어 돌려보내려 했으나, 다시 사신을 억류하고 죽였다. 은혜를 여러 번 배반하고 덕을 어겼으니 어찌 관대히 여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들은 승냥이와 같은 마음으로 탐욕스럽고 교활하며, 그들의 무리는 짐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하늘의 도리에 따르면 그들의 운명은 이미 다했고, 인간의 일에 따르면 그들의 무리는 모두 흩어졌다. 짐은 이제 직접 군을 이끌고 정벌하여 무위(武威)를 엄숙히 진작하고 하늘의 벌을 드러낼 것이다.
또한 짐이 반드시 승리할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큰 힘으로 작은 힘을 공격하고, 둘째, 순리에 따라 거역하는 자를 정벌하며, 셋째, 다스림으로 혼란을 공격하고, 넷째, 편안함으로 피로를 대신하며, 다섯째, 즐거움으로 원한을 달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거의 모두를 멸망시키고 죄 있는 자를 소탕하여 사막을 청소하고 어지러운 사람들을 어루만져 경계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장수들은 전투의 염려 없이 갑옷을 벗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중외에 알리니 모두 알도록 하라
또한 짐이 반드시 승리할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큰 힘으로 작은 힘을 공격하고, 둘째, 순리에 따라 거역하는 자를 정벌하며, 셋째, 다스림으로 혼란을 공격하고, 넷째, 편안함으로 피로를 대신하며, 다섯째, 즐거움으로 원한을 달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거의 모두를 멸망시키고 죄 있는 자를 소탕하여 사막을 청소하고 어지러운 사람들을 어루만져 경계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장수들은 전투의 염려 없이 갑옷을 벗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중외에 알리니 모두 알도록 하라
그리고 마침내 2월 10일 영락제가 타는 거가와 그의 병사 50만명이 북경성을 출발하면서 몽골 친정이 시작되었다.
2월 20일 선부에 도착한 영락제는 며칠동안 머무르면서 군사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오이라트의 마하무드도 자신이 영락제 편임을 보이기 위해서 선부에 있는 영락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 사신은 원정군의 열병식 행사에 참석했는데, 원정군의 규모를 보고
천병(天兵)이 이러하니 누가 이 칼날에 감히 맞설 수 있겠는가?[7]
라며 무서워 했다 한다. 황제는 이에
짐 또한 전쟁이 없도록 하는게 최선인 것을 알고 있다. 짐도 오래토록 이것을 싫어했다. 오늘의 일은 어쩔 수 없다.
라고 답했다 한다. 열병식을 마친 뒤 선부를 빠져나가고 본격적으로 몽골땅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구복의 원정군이 전사한 곳. 케룰렌 강이었다.
4월까지 원정군은 별다른 저항을 만나지 못했다. 몽골군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영락제는 진군 과정이 심심했는지 지나가는 길에 있는 기암괴석에 글을 새기기도 하고, 처음보는 자연지형에 이름도 지어주었다.[8]
그리고 마침내 5월 1일 케룰렌강에 도착했다. 영락제는 케룰렌강에 음마하(飮馬河)라는 이름을 내리고, 주위에 평막진(平漠鎭)이라는 이름의 진지를 구축했다.
며칠뒤 몽골군을 사로잡고 심문한 결과,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게 된다. 부냐시리는 대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겁을 먹어 아룩타이와 함께 서쪽으로 도망가려고 했으나, 아룩타이가 이를 반대하고 서로 싸웠다 한다. 결국 부냐시리는 서쪽으로, 아룩타이는 동쪽으로 도망갔고, 부냐시리는 지금 올고아례(兀古兒禮)를 향해 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영락제는 부냐시리를 잡기 위해 음마하를 따라 서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13일 영락제는 드디어 오논강에서 부냐시리를 따라잡는데 성공한다. 영락제는 산에 올라 직접 전투를 지휘했고, 부냐시리는 크게 패해 일곱 기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 도망쳤다. 영락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산에 멸호산(滅胡山)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부냐시리를 추격하는데 실패한 영락제는 방향을 동쪽으로 돌리고 아룩타이를 공격하기로 한다. 케룰렌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던 중, 정변진(定邊鎮)[9]에 도착한다. 이 곳은 작년 구복의 원정군이 몰살된 장소였다. 영락제는 전사한 장수와 병사들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영락제의 원정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몽골에 사로잡혔던 명나라 포로들이 원정군이 있는 곳으로 탈출했다.
6월 9일, 진군을 계속하던 영락제는 앞산 계곡에서 아룩타이가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는 초병의 보고를 듣게 된다. 영락제는 산의 지세를 한번 살펴본 뒤, 병사들에게 산을 넘어 진을 치라고 명령했다.[10] 몽골군은 지나가는 명나라 병사들을 공격했다.
이와중에 아룩타이가 영락제에게 항복 의사를 보낸다. 영락제는 믿지는 않았지만 한번 떠보기로 한다. 영락제는 사람을 보내 사람은 무릇 사리판단을 잘해야 하며, 기회가 있을 때 잘 판단하라는 내용의 말을 전한다. 아룩타이는 진짜 항복하려고 했지만 수하 장수들이 반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이 때 반대하는 쪽에서 뜻 밖의 말을 하는데, 바로 아룩타이가 곽기를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곽기를 살해한 아룩타이가 명나라에 투항해봤자 명나라에서 멀쩡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며 계속해서 반대한다. 아룩타이는 "지금 싸우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지만 패배하면 항복도 못한다"고 말하고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옆에서 답을 기다리고 있던 명나라 사람도 답답했는지 그냥 영락제에게 돌아가버렸다.
영락제는 잠시 병사들을 쉬게한 후 전투를 시작한다. 아룩타이는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나름 분전했지만 영락제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적의 진영을 돌파하고, 뒤에서 화살을 비처럼 쏟아부으니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룩타이는 놀라 말에서 떨어졌고, 수많은 몽골군이 죽게 된다. 아룩타이는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늦었다."라고 말한 뒤 부하들을 탓하고 가족을 데리고 멀리 도망쳤다. 영락제는 추격을 지시했지만 아룩타이가 빛의 속도로 도망간지라 잡을 수 없었다.
그 뒤 영락제는 몽골 잔당들을 해치웠다. 이 과정에서 우량카이 3위 소속 몽골군을 사로잡게 된다. 우량카이 3위는 명나라로부터 특별한 관리를 받는 몽골집단이었다. 이들은 명나라에 조공했고, 이에 따라 명나라와 교역이 가능했다. 몽골이 명나라와 교역할 수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꽤 혜택을 받던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지금 영락제의 원정군에게 사로잡힌 것이었다.[11] 영락제는 이놈들은 조정에 와서 작위만 받고 아무런 공이 없는 놈들이라 하고 참수를 명했다.
이후 영락제는 공식적으로 원정을 종료하고 자운곡(紫雲谷)에서 장수들과 함께 승리를 축하했다. 그뒤 황태자에게 몽골 평정 사실을 전하고 복귀를 시작했다. 남경에 있던 황태자도 이 사실을 전달받고 잔치를 벌여 축하했다 한다. 7월 17일 마침내 영락제가 북경에 복귀한다. 이후 원정에 참여했던 장수, 병사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고, 논공행상을 했다. 이로써 영락제의 1차 몽골 친정이 끝마치게 된다.
3.3. 2차 친정
몽골의 세력이 약화하자 이젠 오히려 오이라트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아룩타이는 이들의 확장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아룩타이가 장성 부근까지 내려오면서 영락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영락제는 오이라트에 대한 지원을 거두고 다시 몽골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영락제의 의도를 간파한 마하무드는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가두고 명나라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에 1414년 2월 6일 영락제는 친히 오이라트를 정벌하겠다는 조서를 반포했다. 이번 원정은 1차 원정과 달리 화포를 적극 사용했다. 화포에 익숙하지 않은 오이라트 기병들은 명군의 공격에 속속 무너졌다. 1414년 8월 1일 영락제가 북경으로 돌아오면서 2차 몽골 원정도 명나라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오이라트는 이듬해 명나라에 말을 바치면서 사죄했다. 하지만 오이라트는 이미 큰 타격을 받은 상황이었다. 아룩타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몽골 황족이었던 아다이와 함께 오이라트를 공격하면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기 시작한다.3.4. 3차 친정
아룩타이는 오이라트원정에 도움을 준 대가로 경제적 보상을 바랐지만 명나라는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았다. 아룩타이는 명나라에 대한 조공을 끊고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에 영락제는 1421년 7월부터 다시 친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신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영락제는 반대하는 이들을 감옥에 가두면서 자신의 친정 의지를 보였다. 1422년 3월 18일, 아룩타이가 흥화를 점령하면서 명의 수장 왕환을 살해한 것을 계기로 3차 원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룩타이는 겁을 먹고 이미 달아난 상태였다. 영락제는 돌아가는 길에 우량카이 3위를 공격했다. 뜬금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당시 우량카이 3위는 명나라와의 교역이라는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 아룩타이 편에 붙어있었기 때문에[12] 이를 건방지다고 본 것이었다. 우량카이와의 전투에서 수령 수십명의 목을 베고, 10여만 마리의 가축을 포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게 우량카이와의 전투에서 성과를 낸 영락제는 1422년 9월 8일 북경으로 돌아갔다.3.5. 4차 친정
그런데 이듬해 아룩타이가 또다시 변경을 침탈한다는 소식을 듣자 7월 24일 4차 원정을 개시했다. 하지만 이미 아룩타이는 오이라트와의 싸움에서 패한 뒤 숨어있던 상태였다. 돌아가던 중에 몽골 왕자 에센토곤의 투항을 받은 것 말고는 별다른 소득없이 원정을 마쳤다.3.6. 5차 친정
마지막 5차 원정은 에센토곤의 권유로 시작되었다. 1424년 4월 3일 친정을 시작한 그는 또다시 아룩타이가 멀리 도망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좌절했다. 아무리 수색해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자 결국 회군했고, 회군 도중 영락제가 병사하면서 영락제의 대몽골 원정은 끝을 맺는다.[1] 지도에서 황하의 물길이 오늘날과 조금 다르게 그려져있는데, 이는 당시의 황하의 물길을 나타낸 것이다. 황하는 물길이 자주 바뀌는 것으로 옛날부터 악명이 높았다. 고대 중국에서 자주 했던 일 중에 하나가 황하의 물길이 바뀌지 않도록 보를 쌓는 일이었을 정도.[2] 이만한 병력을 다른 지역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사막과 초원지대로 보내자면 수십만 대군의 병참은 오로지 공격측인 명나라 측에서 담당하여야 한다. 이런식의 원정은 영락제 시절 전성기 명나라의 국력과 행정망이 뒷받침 해주기에 가능한 것이었다.[3] 다섯번 나가고, 세번 엎었다는 뜻이다.[4] 명나라 편에 붙은 몽골족이라고 보면 된다.[5] 중국에서 몽골로 나가는 장소 중 하나다.[6] 말그대로 오랑캐를 평정하고, 죽인다는 뜻이다.[7] 무기와 깃발이 해를 가릴 정도였다 한다.[8] 이렇게 해서 지어진 이름들도 상당히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대표적으로 금호산(禽胡山), 위로진(威虜鎮), 평막진(平漠鎭) 등등(...)[9] 아마 영락제가 내린 이름으로 보인다. 원래 지명은 불명.[10] 표현이 애매해서 정확히 어떻게 넘어갔는지 알 수없다. 산을 넘어가는 인원들의 좌우거리가 수십리를 넘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산을 뺑둘러 간 것으로 보인다.[11] 우량카이 3위의 수장이 아룩타이와 혼인관계였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12] 아룩타이와 혼인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