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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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의 변 | ||
■ 15세기경 오이라트의 판도 / ■ 16세기경 몽골의 판도 | ||
시기 | 1550년 | |
장소 | 베이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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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庚戌之變. 1550년[1] 6월 몽골 6부족(투멘) 연맹의 하나인 튀메드부의 알탄 칸이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포위한 사건이다.2. 전개
1368년 중원에서 원나라가 축출되고 명나라가 들어서자 몽골족은 막북의 몽골 고원으로 도주하여 북원을 성립시켰으나, 1388년 원 세조 세첸 칸 쿠빌라이의 황통인 북원의 제3대 천원제가 아리크부카의 후예인 조리그투 칸 예수데르에게 시해당하면서 북원 제국은 와해되어 서쪽의 오이라트와 동쪽의 몽골 6부족 연맹체가 성립되었다.이후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성조 영락제가 대군을 이끌고 몽골 고원을 침공하여 몽골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오이라트가 제국을 세워 몽골 고원을 장악했고, 1449년 명나라의 제6대 황제인 영종 정통제를 사로잡은 초유의 사건인 토목의 변을 일으켰다.
한편 몽골의 만둘 칸의 왕비 만두하이는 만둘 칸의 후계자였던 바얀 뭉케의 아들인 바투 몽케를 다얀 칸으로 옹립한 다음, 그를 대신해 섭정을 하는 동안 오이라트를 서쪽으로 몰아냈고, 이후에 장성한 다얀 칸이 몽골 6부족을 통일하면서 몽골은 중흥에 성공했다.
몽골은 명나라에 대해 관계 개선과 무역의 재개를 원했지만 명나라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분노한 몽골이 명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기 시작했다.
특히 오르도스 지방에 분봉된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은 16세기 중기부터 빈번하게 명나라 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하여 1550년 6월 경에는 아예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포위하는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를 경술의 변이라고 부른다.
1550년 알탄 칸은 명나라에 세첸카이 등 수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공무역을 요구하였으나, 명나라는 알탄 칸의 사신을 살해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분노한 알탄 칸은 10만 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명의 대동을 침공하자 그곳을 지키던 대동총병 구란은 알탄 칸을 매수하여 다른 지역을 치도록 유도했고, 이에 알탄 칸은 고북구(古北口)로 이동한 뒤 곧바로 남하해 명의 수도인 북경을 포위했다.
베이징이 몽골군에게 포위되자 위급해진 세종 가정제의 조정에서는 각 지방에 구원군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6월 28일 각지에서 모였으나 구원군 병사들은 식량이 떨어진데다가 겁을 먹어 몽골군에 응전하지 않았다.
명나라의 황제였던 가정제는 위기를 초래한 구란을 오히려 평로대장군에 임명하여 항전을 명령했지만 구란은 몽골군과 싸우지 않고 베이징 내에서 약탈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고, 당시 간신이었던 재상 엄숭도 각 군사들의 출전을 엄격히 금지하면서 명군은 수비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알탄 칸의 몽골 군대는 북경 근방을 계속해서 약탈했다.
이후 알탄 칸이 가정제에게 무역의 재개와 세폐를 지급하면 철군하겠다는 요구 조건을 제시했고, 가정제가 이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게 하면서 8월 23일 알탄 칸의 몽골군이 북경에서 철군하는 것으로 멸망의 위기였던 경술의 변은 일단락되었다. 명나라는 알탄 칸에게 순의왕(順義王)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1571년 화친 이후 몽골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선부, 대동, 산서에 연 1회 정기 교역시장인 호시(互市)를 개설하기로 했다. 몽골의 가축과 가죽제품, 유제품 등이 중국으로 넘겨졌고 명나라의 일용잡품과 직물 농산물 등이 몽골로 넘겨졌다. 강화조건에 따라 명나라는 몽골의 영주들에게 수당까지 지급했다.
3. 영향
명나라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수도 베이징이 북방민족들의 침입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제대로 드러나고 말았다.명나라는 건국 당시 난징에 수도를 두었으나 연왕 주체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조카인 건문제 주윤문을 제거하고 영락제로 즉위하면서 수도를 자신의 거점인 동시에 몽골족의 침입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막북 지역 진출의 교두보로 쓸 목적으로 베이징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수도인 베이징은 만리장성 국경에서 불과 60km 정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산해관만 넘으면 베이징이 순식간에 유린당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고, 경술의 변 사건으로 그 맹점이 노출되고 말았다.
영락제 시기에는 명나라가 북방 민족에 공세를 가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베이징이 유리했지만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며 원정 대신 수세에 집중하면서 국경과 가까운 베이징은 오히려 방어에 불리했고, 결국 이 문제는 청나라의 베이징 입관으로 또다시 중국 대륙이 이민족에게 지배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2]
4. 여담
경술의 변 이후, 명나라 조정에서는 자금성을 둘러싼 내성만으로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베이징에 외성을 쌓기 시작했으나 재정 부족으로 1564년 남쪽 성벽만 완성하여 베이징 성은 자금성과 남쪽 외성이 합쳐져 凸(...) 모양이 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명나라는 만성적인 재정 부족으로 1644년에 멸망할 때까지 북쪽 성벽을 완성하지 못했고, 이후에 들어선 청나라는 이미 몽골족을 복속시켜 베이징 주변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성벽을 확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보수만 하는 정도로 그대로 두었다.베이징 성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존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시기부터 성벽이 서서히 훼손되기 시작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도로와 도심지 건설을 위해 성벽을 허물었으며, 문화대혁명 시기까지 거치면서 내성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경술의 변은 이전의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의 거주권역 경계선의 역할만을 수행하던 만리장성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석조 성벽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