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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9:07:42

청성잡기


靑城雜記

1. 개요2. 내용
2.1. 김자점2.2. 가학증2.3. 일본 무협 소설2.4. 참수된 장사 장후량2.5. 투전(鬪牋)놀이와 나라 정세2.6. 임금님도 무서워하는 사람들2.7. 유자(儒者)들의 역사 왜곡2.8. 밥 한 끼로 위기를 넘긴 부자2.9. 사람이 개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나2.10. 홍대용에게 바치는 제문
3. 작가 관련

1. 개요

18세기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대중(1732~1809)의 저서. 원문 읽기(한국 고전 종합 DB).

2. 내용

100여편의 국내외 야담 등을 소개하는 총 5권의 책으로 잡기(잡다한 기록)라는 이름대로 온갖 시덥잖고 자질구레한 야사(野史)들을 기록한 책이다. 평범한 내용이 많지만 개중에는 비범한 이야기도 여러가지 있다. 3권부터 그 진면목(?)이 나타난다.

2.1. 김자점

김자점의 최후에 관한 야사가 이 책에 실려 있다. 김자점이 능지처참을 시행하는 법을 건의했지만 결국 자신도 그렇게 죽었다는 것.
심기원이 김자점과 권력을 다투어 서로 원수가 되었는데, 심기원이 역적으로 몰려 주벌될 때에 김자점이 수상으로 있었다. 이에 김자점은 심기원에게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沈器遠 與 金自點 爭權相仇 器遠 以逆誅 自點 爲首相 乃 請爲 生凌遲 法 曰)
"이 역적은 상률로 단죄해서는 안 되니, 먼저 팔과 다리를 자른 뒤에 죽여 반역자들을 징계하소서."
("是逆 不可 以常律斷 宜 先斷其肢脚 而 戮之 以懲亂逆.")
심기원이 형을 받을 때에 집행하는 자가 먼저 그 다리를 자르려 하자, 심기원이 형틀에 엎드려 있다가 놀라며 말했다.
(器遠 就刑 刑者 先解其股 器遠 伏椹 驚 曰)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
("此何刑也?")
그러자 집행하는 자가 "김 상공이 명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심기원은 탄식하며 말했다.[1] "나를 대신해 김자점에게 말해 주시오. 당신도 반드시 이런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刑者 曰 "相公令也." 器遠 嘻 曰 "爲我語 自點. 若必當此.")
그런데 김자점이 주벌될 때에 과연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형벌을 받았고, 그 후 이 법은 폐지되었다.
(自點之誅 果亦 生凌遲 而 其法乃罷)
『제3권』, 「성언(醒言)」, 악법을 만들고 악법에 걸리다.

2.2. 가학증

홍인한[2]기생들을 학대하는 것을 즐긴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다만 이미 홍인한이 역적으로 낙인찍힌 후 쓰여진 글이라 사실성을 따져볼 필요는 있다.
홍인한이 감사로 있을 때 언제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끝날 즈음이 되면 기생의 잘못을 트집 잡아 곤장을 쳐서 피를 본 뒤에야 통쾌해하였다. 그래서 음악을 연주할 때면 뜰 한쪽에 반드시 형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으니, 이는 석수가 미녀들을 치장하여 잔치를 즐기고는 결국 삶아 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체로 여자에게 미색이 있는 것은 남자에게 재주가 있는 것과 같으니, 하늘이 부질없이 그들을 낸 것이 아닌데 포악하게 대한다면 어찌 천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잘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유독 기생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더구나 일부러 곤장을 쳐서 통쾌해하는 것은 시랑보다 더 포악한 짓이니, 그가 역적으로 패망한 것은 당연하다.

2.3. 일본 무협 소설

삼랑전이란 일본 소설이 18세기 조선에서 너무나 인기를 끌어서 패관문학을 좋아하는 티를 내면 혼이 나던 계층[3] 점잖은 양반인 통신사들이 체면 불구하고 성지순례까지 가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4] 웃긴 건 정작 이 삼랑전이 일본에선 히트하지 못했는지 현지인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아마도 소설이 건너오기 이전 일본에선 이미 유행이 지나가 버렸거나 당대 일본에서는 그저 그런 통속소설 중 하나인 작품이 조선 사람들의 취향에 맞아 조선에선 히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삼랑전》 언해(諺解)[5]가 우리나라에 유행하였는데, 삼랑(三郞)[6]의 뛰어난 무용과 원전(源𤩴)의 흉포하고 탐욕스러움과 월약(月藥)의 대단한 정절과 비곤(比琨)의 효성과 의로움이 사람들의 이목을 풍미했다.[7] 그래서 예전에는 그 내용을 외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 원전의 경우는 심지어 욕을 할 때 그의 이름을 들먹일 정도였는데 지금은 조금 시들해졌다. 삼랑은 금시(今市)[8]에서 죽었는데 강호(江戶)에서 30리 떨어진 곳이다. 우리나라 사신이 일광산(日光山)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에 금시에 들르곤 했는데, 남호곡(南壺谷)도 그를 동정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내가 일본에 갔을 때 그곳 사람에게 물어보니 삼랑을 아는 자가 없었는데 하물며 금시를 알겠는가. 진자점(榛子店)에 쓰여 있다는 계문란(季文蘭)의 시를 우리나라 문인들은 모두 줄줄 외지만 정작 중국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삼랑의 일과 비슷한 경우이다.
이미 당대에 홍길동전, 춘향전 같은 한글 소설이 무수히 창작되었고 삼국지, 수호전 등 중국 소설들도 많이 유입되어서 인기를 끌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일본 소설도 비슷한 맥락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당대에는 색다른 무협소설로 여겨졌던 것이다. 아마도 왜관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려니 하고 덮을 수 있는데 의외로 내용을 잘 생각해 보면 현대에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이다. 당사국에서는 별다른 호응이 없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작가나 작품이 정작 엉뚱한 타국 땅에서 엄청나게 히트하는 현상이나 본국에서 이미 잊혀진 지 오래인 클래식한 서브컬처 작품이 한두 세대를 건너뛰어 뒤늦게 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거나 한참 늦게까지도 본국보다 굳건한 팬덤을 거느리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소설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들이라든가 애니메이션 마동왕 그랑조트, 합신전대 메칸더 로보, 꾸러기 수비대 등 정보의 비대칭성이 심하던 시절의 각종 대중매체에서도 꽤 흔히 있는 에피소드.

2.4. 참수된 장사 장후량

야사를 모은 책이다 보니 어디서 들은 카더라로 인해 잘못된 이야기를 서술한 사례도 있다.
《삼연집(三淵集)》에 ‘장사를 애도함〔哀壯士〕’이란 시가 있는데 장후량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장후량은 숙종(肅宗) 때에 무예와 용력으로 이름이 났는데, 조정에서 그를 변방에 쓰고자 하여 부령 부사(富寧府使)를 제수하였으나 장후량이 부임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문(軍門)에 명하여 진법을 연습하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그를 참수하여 군중에 군명(君命)의 지엄함을 보였다. 이 일은 당 태종(唐太宗)이 노조상(盧祖尙)을 참수한 일[9]과 같으니, 옛날에는 국가 기강의 지엄함이 이와 같았다.

그렇지만 허사첨사 장후량은 부령 부사 자리를 거부하여 참수된 것이 아니고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황당선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이 일은 나중에 대사성 이선이 조정의 처분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살짝 비판한다.# 아마 후대에 윤색되면서 주는 벼슬자리 함부로 고르면서 거부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2.5. 투전(鬪牋)놀이와 나라 정세

투전에 대해 걱정하며 투전으로 점을 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성대중의 말처럼 투전은 조선시대 내내 도박의 폐해로 악명이 높았다.
투전놀이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숭정(崇禎) 말엽에 장현(張炫)이 북경에서 배워 가지고 왔다. 그 방법은 8가지 물건을 4짝으로 나누되 물건마다 장수(將帥)를 두고 패의 수는 모두 80개인데 노소(老少)가 서로 대결하여 많이 얻은 자가 이기는 것이다. 사람〔人〕ㆍ꿩〔雉〕ㆍ새〔鳥〕ㆍ물고기〔魚〕는 모두 노(老)를 사용해서 소(少)를 이기는데, 황제〔皇〕ㆍ매〔鷹〕ㆍ봉황〔鳳〕ㆍ용(龍)이 각각 이들의 장수가 된다. 별〔星〕ㆍ말〔馬〕ㆍ토끼〔兎〕ㆍ노루〔獐〕는 소를 사용해서 노를 이기는데, 북극성〔極〕, 수레〔乘〕, 수리〔鷲〕, 호랑이〔虎〕가 각각 이들의 장수가 된다. 장현이 처음에는 국수(國手)로 일컬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나라에 퍼져 사람들이 바둑이나 장기보다 더 탐닉하게 되었다.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은 이 투전놀이를 보고 앞으로의 정세를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남인과 서인으로 분당된 지 오래되었는데, 노론과 소론으로 또 나눠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황제가 노(老)에 있으니, 국가의 정권을 장악할 자는 반드시 노론일 것이다. 물고기와 새는 모두 그물에 걸리는 물건인데 노(老)에 모여 있으니, 노론이 패하게 되면 반드시 떼죽음을 당할 것이다. 별은 밤에 빛나는 것이니, 비록 문채 나긴 하나 정국을 전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호랑이와 수리가 한 짝이 되었으니, 반드시 많은 사람을 해칠 것이다. 말은 12지지(地支) 중 오(午)에 해당하니, 남인이 반드시 소론과 합할 것이나 80년이 못 되어 모두 종식될 것이다.”이후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당송(唐宋) 이후에 엽자(葉子)라는 것이 있었는데, 만력(萬曆) 말엽에 민간에서 이것을 좋아하여 《수호전(水滸傳)》에 나오는 도둑들의 이름을 붙여서 놀았다. 숭정 연간에는 엽자가 매우 성행하여 틈(闖), 헌(獻), 대순(大順)이라고 하는 것도 있었는데, 후에 모두 징험되었으니 바로 이것이 투전이다.

2.6. 임금님도 무서워하는 사람들

전반적으로 교훈적이고 해학적인 일화가 많다.
숙종이 일찍이 말씀하셨다.
“나이 오십이 되도록 제 앞가림도 못하고 궁벽하게 사는 선비와 젊은 과부는 나도 겁내는 대상이다.”
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두려워할 대상을 아신 것이다.
삼가 신부맹(申鳧盟)의 말을 끌어와 주석으로 다니 그는 말했다. “나이가 많은데도 덕이 없고 극도로 가난한데도 아끼는 것이 없는 두 부류의 사람은 따질 것도 없다.”

2.7. 유자(儒者)들의 역사 왜곡

성대중은 유학자들이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비판했다.
유자는 세 치 붓으로 백세(百世)의 권한을 마음대로 부린다. 역사의 평가가 그들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어, 좋아하면 하늘 높이 추어올리고 유감이 있으면 구덩이 속에 밀쳐 넣는다. 은밀히 써서 비밀리에 전하며 근거 없는 증거를 꾸며내어 거짓으로 거짓을 전하여 마침내는 믿을 만한 문서가 되게 하니, 백세 뒤에 누가 진위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진 시황(秦始皇)이 열두 달 만에 태어났다고 써서 여씨(呂氏)의 아들이라고 지목하니, 이것은 유생(儒生)들을 묻어 죽인 것에 대한 원한을 보복한 것이다. 유안(劉安)은 반역죄를 지어 죽었는데도 정상적으로 죽었다고 썼으니, 선비들을 좋아한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부생(苻生)의 포학함은 역사책에 기록되었지만 어떤 이는 거짓이라고 여기고, 고병(高騈)이 여용지(呂用之)와 장린(張璘)에게 현혹된 것은 참으로 난리를 부르기에 충분하였지만 《요란지(妖亂志)》에서는 사실을 과장하였으니 수재(秀才) 나은(羅隱)이 고병에게 한을 품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송나라 태종(太宗)이 촛불 그림자에 꺼림칙해했다는 것은 결단코 거짓이다. 옥새를 담은 금궤(金櫃)가 앞에 있고 고명(顧命)이 옆에 있었으니 귀신이 죽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치이다. 다만 조정미(趙廷美)와 조덕소(趙德昭)의 죽음은 사람들 마음에 맞지 않아 야사(野史)에서 태종에게 악명(惡名)을 씌운 것이다. 심지어 알리불(斡離不)의 모습이 송나라 태조와 비슷하다는 것과 점한(粘罕)의 배에 도끼 자국이 있었다는 것으로 그 무고를 증거하여, 마치 송나라 태조가 송나라를 망친 자에게 원한을 보복한 것처럼 하였으니, 유자들의 붓놀림은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2.8. 밥 한 끼로 위기를 넘긴 부자

덕을 베풀어 위기를 넘기는 일화도 있다. 호러스토리 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진천(鎭川) 사는 부자 유선기(兪善基)는 - 선기가 아니라 성기(聖基)이다. - 젊어서 매우 가난하였는데 머슴살이와 장사로 생활을 꾸려 수만 냥의 재산을 모았다.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등에 아이를 업은 여자 거지가 문으로 들어오더니 대뜸 국을 가져다가 선 자리에서 반이나 마시고 또 반찬을 집는 것이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꾸짖으며 못 하게 하려 하자 유선기는 눈짓으로 만류하고, 자기 밥의 반을 덜어 그 여자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국과 반찬을 먹었는데 밥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여자는 위아래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밥을 받아서 다 먹고는 그릇을 품은 채 나갔다. 유선기는 종을 불러다가 그녀의 뒤를 밟게 하였는데, 마을 앞 풀숲에 거지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여자가 이르자 거지들은 다투어 일어나며 물었다.
“왜 이리 금방 돌아왔느냐?”
여자는 사실을 자세히 말하고,
“점잖은 분이어서 차마 범할 수가 없었다.”
하더니 품고 있던 그릇을 꺼내 보였다. 높은 곳에 앉아 있던 자가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갔더라도 너와 같이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밥을 얻어먹고는 어째서 밥그릇을 훔쳤느냐?”
여자가 대답하기를,
“이것이 없었으면 당신들은 필시 나를 의심했을 것이다.”
하고는 뒤를 밟던 자를 불러 그릇을 돌려주고, 땅에다 포대기를 던졌는데 거기에는 죽은 아이가 싸여 있었다.[10]

2.9. 사람이 개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나

개들의 추레함을 보고 웃지만 개만도 못한 사람들도 있다는 점에서 성대중은 탄식한다.
개는 사람이 뒷간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 곧바로 몰려들어 사람이 대변보기를 기다렸다가 재빠른 놈은 먼저 달려들고 약한 놈은 움츠린다. 화가 나면 서로 물어뜯고 즐거우면 서로 핥아 대기도 하는데 다투는 것은 오직 먹이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들 추하게 여겨 비웃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밥그릇을 다투는 것도 개와 다를 바가 거의 없으니, 엄자릉(嚴子陵 엄광(嚴光) )이나 소 강절(邵康節)[11]이 살아 있다면 밥그릇을 놓고 다투는 사람들을 사람이 개 쳐다보듯 혐오했을 것이다. 아침에 뒷간에서 돌아오다가 그 때문에 한 번 웃고는 기록한다.
그러나 사람이 개보다 못한 점이 사실 많다. 교미는 반드시 발정할 때만 하는데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도둑 경계하기를 귀신처럼 하는데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먹여 주면 은혜를 알고 보답은 의리로 하는데 사람이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또 그 때문에 한 번 탄식한다.

2.10. 홍대용에게 바치는 제문

담헌 홍대용(洪大容)은 예전에 없던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내가 그를 만나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홍태화(洪太和)의 제문(祭文)에 그의 평생 업적을 다 서술하였기에 그 전문을 기록하여 때때로 혼자 완미하였다. 제문은 다음과 같다......

성대중은 한 살 위인 담헌 홍대용을 존경했는데[12] 살아 있을 때 만나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태화 홍원섭이 쓴 제문을 자기 문집에 전재했다. 재미있게도 "금강산에서 수레를 돌렸네"라는 구절에 "담헌이 금강산에 갔다가 기이하기만 하고 좁다 해서 바로 돌아왔다"(...)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3. 작가 관련

성대중은 영조, 정조 시대에 벼슬을 했던 인물로, 서얼 출신이지만 탕평책으로 벼슬을 할 수 있었다. 1763년에 조선 통신사 조엄(趙曮)을 수행하여 일본을 다녀왔다. 군수 시절 선정을 베풀었고 이후 정조의 우대를 받았지만 출신의 한계로 벼슬은 부사에 그쳤다.

문제는 이 사람이 패관 소품 문체를 비난하는 글로 정조에게 '순정한 문장'을 썼다고 칭찬받은 전례가 있다는 것. '패관소품'이란 거리의 시사나 일상사, 소문 따위를 기록한 글들로 이후 소설가들도 활용했는데 문체반정 시기 정조의 정책을 앞장서 호응했던 인물이 뒤로는 이러한 저잣거리의 이야기를 모은 책을 쓴 것이다. 통수 성대중에 대한 기록이 적기 때문에 평소에 성향을 숨긴건지, 아니면 처음에는 완고했던 인물이 자료 조사를 하다가 패관문학에 빠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물론 패관만 쓴 건 아니다. 성대중에겐 당대의 학문을 비판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는 학자로서 소명의식이 있었다. 성대중의 이러한 이중적인 부분을 2019년 4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학문의 도는 음식 중에 제일 좋은 고기와 같으니, 무당이나 의술, 갖가지 기예들이 무엇인들 학문이 아니겠는가마는 다만 유학이 그 으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배웠던 것은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모두 실용적인 것들이었다.[13]

그런데 지금은 예는 통례원(通禮院)의 관리에게, 악은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에게, 활쏘기는 훈련원(訓鍊院)의 한량에게, 말몰이는 사복시(司僕寺)의 이마(理馬)에게, 글씨는 사자관(寫字官)에게, 산수는 호조의 계사(計士)에게 맡겨 학자들은 관계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공자께서 드물게 말씀하신 성(性), 명(命), 천도(天道)를 표방하며 이를 도학(道學)이라 부르면서 세상에 제창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들도 모두 이를 잘 말하나 실용적인 것은 마치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니, 삼대의 풍속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성대중만의 독창적인 관점은 아니고 청의 고증학과 비슷한 흐름이다. 물론 그렇다 치더라도, 성대중의 실용주의적 마인드를 엿볼 수 있다.
[1] 아이러니하게도 심기원이 흥안군을 처형할 때 흥안군도 심기원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2] 사도세자의 처삼촌이자 혜경궁 홍씨의 숙부.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다 사사되었다.[3] 저자인 성대중의 생전에는 군주인 정조가 소설 문체를 퇴치하는 문체반정을 일으켰고 소설 문체를 구사하고 업무중에 소설을 읽었다는 이유로 김조순 같은 인물은 반성문까지 써야 했다.[4] 한국에서 어떤 일본 애니메이션이 너무나 히트한 나머지 국가 관료들이 외교사절로 일본 방문중에 일정에 느닷없이 애니·만화 성지순례를 끼워넣는다면 지금도 쇼크가 상당히 클 것이다. 여담으로 비슷한 일을 실제로 한 정치인이 있었는데, 바로 벨기에·프랑스 애니 땡땡의 모험을 너무 좋아해서 국회의원 시절 예정에 없던 만화박물관 방문을 일정에 끼워넣은 박근혜가 그렇다. 그녀는 젊은 시절 땡땡의 모험으로 불어를 배울 정도로 중증 덕후였다고 한다.[5]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뜻한다.[6] 일본어로는 '사부로(さぶろう)'.[7] 문맥을 볼때 삼랑이 남주인공, 월약이 여주인공, 비곤이 삼랑의 동료, 원전이 메인빌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8] 일본어로는 이마이치(いまいち)라고 읽는다. 닛코로 들어가는 초입의 지명으로, 현 닛코 시의 동남부이다.[9] 노조상(盧祖尙)은 당나라 사람으로 자는 계량(季良)이다. 628년 교주 도독(交州都督)에 제수되자 처음에는 받아들였으나 곧 후회하여 숙환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거듭 설득했는데도 노조상이 계속 사양하자 태종은 크게 노하여 “내가 사람을 부리는데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하고는 조정에서 즉시 참수하였다. 《舊唐書 卷69 盧祖尙列傳》[10] 일부러 소란을 일으킨 뒤 죽은 아이 시체를 내던져 당신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뒤집어 씌우는 사기 수법이다.[11] 소옹, 중국 북송시대의 유학자[12] 당파적으로도 모두 낙론에 속한다.[13] 모두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육예(六藝)에 해당하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