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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21:54:22

삼고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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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뜻풀이와 해석3. 출전(出典)
3.1. 정사3.2. 위략3.3. 배송지주3.4. 통전3.5. 연의
4. 대중매체에서5. 여담

1. 개요

고사성어
돌아볼 오두막집
삼국지에 관련된 고사의 하나로 다른 말로는 삼고지례(三顧之禮)[1], 삼고지은(三顧之恩)이라고도 한다. 중국 본토에서는 삼고모려(三顾茅庐)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초가집에 세 번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비슷하게 영어로는 'Third time's a charm'이라는 말이 있다.

후한 말, 유비가 융중에 기거하던 제갈량을 얻기 위해 몸소 제갈량의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던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2. 뜻풀이와 해석

고사의 의미는 "유능한 사람을 대할 때는 그만큼의 정성이 필요하다."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과 의미로는 조조순욱을 세 번 찾아갔다고 해서 나온 삼방순욱이 있는데, 이는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민간전설로 나온 것이다. 순욱은 자기가 직접 조조에게 찾아갔다.

유비는 161년생, 제갈량은 181년생으로 두 사람의 나이는 20세나 차이가 난다. 적벽대전이 발생한 시기를 생각하면 삼고초려는 제갈량이 26~27세 때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당시 유비는 50을 바라보는 나이였던데다 좌장군 예주목 의성정후라는 벼슬과 작위를 가졌으며, 황실의 종친으로서 이미 그 시점에 천하의 삼분의 이를 차지한 조조의 맞수로 전 중국에 이름을 떨쳤던 점을 감안하면, 그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사람을 그것도 형주 인근 고을에서나 재능있다 정도로 유망하던 백면서생[2]을 세 번씩이나 찾아가며 현자라고 극진히 모신 것인데 이는 당시나[3] 지금[4]이나 대단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삼고초려는 삼읍일사(三揖一辭), 즉 '세 번 읍하고 한 번 사양하다'의 맥락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군자가 벼슬길에 나설 때 세 번 읍했으니 세 번 사양하여 신중하게 나아가고, 물러날 때는 한 번 사양하고 지체 없이 떠난다는 뜻으로 유가의 오경(五經) 중 예기(禮記)에 나오는 고사이다.

3. 출전(出典)

3.1. 정사

이때 선주(유비)가 신야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가 선주를 만나보자 선주가 그를 중히 여겼다. 서서가 선주에게 말했다, “제갈공명은 와룡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쓰지 않으십니까?” 선주가 말했다, “그대가 데려오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으나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의당 몸을 낮추시고 방문하셔야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선주가 제갈량을 방문했고 세 번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5]로 남양의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 황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하였사옵니다. 그 후 한실의 국운이 기울어 싸움에 패하는 어려움 가운데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하며 위난한 상황에서 명을 받들어 일을 행해온 지 어언 스물하고도 한 해가 지났사옵니다.
제갈량의 『출사표』 中

정사에서는 사마휘가 유비에게 제갈량과 방통이 복룡과 봉추라는 말을 했고(양양기),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량은 와룡이니 직접 가서 등용할 것을 권유해 제갈량의 집에 세 번 찾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3.2. 위략

한편 위략에서는 제갈량과 유비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비가 번성에 주둔하였다. 이때에 조공(조조)이 마침 하북(河北)을 평정하니 제갈량은 형주가 다음으로 적을 맞이할 것을 알았으나 유표는 성품이 느긋하고 군사에 밝지 못했다. 제갈량이 이에 북쪽으로 가서 유비를 만나보니 유비는 제갈량과 오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가 나이도 어리기 때문에 여러 유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대우하였다. 좌중의 모임이 이미 끝나자 여러 빈객들이 모두 가버렸으나 제갈량만 홀로 남았는데 유비 또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묻지 않았다. 유비는 성품이 털 꼬기(結毦, 결모-짐승털이나 새깃으로 장식품을 짬)를 좋아하였는데 당시에 마침 어떤 사람이 소꼬리털(髦牛尾)을 유비에게 준 자가 있었으므로 유비가 손으로 몸소 그것을 꼬았다. 제갈량이 이에 나아가 말하길,

"장군께서는 마땅히 다시 원대한 뜻이 있으셔야 하는데 다만 털을 꼬고 있을 뿐이군요!"

유비는 제갈량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이에 털을 던지고 답하여 말하길, "이 무슨 말인가! 나는 오로지 이것으로써 근심을 잊고 있을 뿐이오."

제갈량이 드디어 말하길,

"장군께서 헤아려 보시건대 유진남(劉鎭南, 유표)은 조공에 비해 누가 낫습니까?"

유비가 말하길, "미치지 못합니다."

제갈량이 또 말하길, "장군께서는 스스로 헤아려보실 때 어떠합니까?"

유비가 말하길, "역시 같지 못합니다."

말하길, "지금 모두 미치지 못하는 데다가 장군의 군대는 수천 인에 불과하니 이것으로써 적을 기다리는데 계략이 없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비가 말하길, "나 또한 그것이 근심스럽습니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갈량이 말하길, "지금 형주는 사람이 적은 것이 아닌데도 호적(籍)에 기록된 자가 적으니 평상시대로 조세, 인력을 거두면 인심(人心)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유진남에게 말하여 나라 가운데에 무릇 노는 집(游戶)이 있으면 모두 스스로 사실대로 알리게 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기록하여 군대를 늘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비가 그 계책을 따른 까닭으로 군대가 드디어 강성해졌다. 유비가 이 일로 말미암아 제갈량에게 영묘한 계략(英略)이 있는 줄 알고 이때부터 상객으로서 예우하였다.

구주춘추(九州春秋)에서 말한 바도 또한 그것과 같다.

3.3. 배송지주

이에 배송지가 이르길 다음과 같다.
신 송지가 보건대, 제갈량의 표(表-즉, 출사표)에서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어 신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시고 당세의 일을 물으셨다'

고 했으니, 즉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 분명하다. 비록 듣고 본 것이 서로 달라 이런 저런 말이 각각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 어긋나고 위배되는 점이 이 정도에 이르니 또한 실로 괴이한 일이로다.

그렇기에 보통은 적국의 기록에 있어선 오류가 많은 위략이 잘못 적은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나 몇몇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삼고초려하기 전에 처음으로 빈객으로 찾아온 제갈량을 이렇게 만났다는 각색을 하거나 삼고지례 중에 융중대와 함께 이러한 계책을 내놓았다는 각색을 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선 등용된 이후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 일화대로라면 제갈량이 제안한 호구조사로 유비의 세력이 강성해졌다는 말이므로 이 일화는 제갈량의 지략을 높이 사려는 의도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문열이 평역 삼국지에 이 일화를 가져다 썼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는 제갈량을 상객으로 모시는 부분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후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만났을 때 그 때 그 계책을 준 청년이라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는 부분이 나온다

덧붙여, '융중'(隆中)이란 지명 역시 소설의 창작이 아닌 실제 역사적 지명이다. 촉서 제갈량전이 공명이 직접 밭 갈며 양보음(梁父吟)을 불렀다는 대목에, 배송지의 주석으로 습착치의 한진춘추가 인용되어 있다.
제갈량의 집은 남양(南陽)의 등현(鄧縣)에 있었다. 양양성 서쪽 20리 되는 곳으로 융중(隆中)이라 불리었다.

3.4. 통전

두우통전 148권에도 이 내용이 좀 바뀌어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선 제갈량 등용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그냥 제갈량이 호구조사를 제안했고 유비가 받아들인 것으로 나온다.
後漢建安中,劉表為荊州牧,(今江陵郡。)劉備時在荊州,眾力尚少。諸葛亮曰:「荊州非少人也,而著籍者寡,平居發調,即人心不悅。可語劉荊州,令凡有游戶,皆使自實,因錄以益眾可也。」備言其計,故表眾遂強。
후한 건안 연간, 유표가 형주목을 할 때 (지금의 강릉군이다.) 유비가 당시 형주에 있었는데, 무력이 더욱이 적었다.

제갈량이 말하길:

형주는 사람이 적은 것이 아닌데 호적(籍)에 기록된 자가 적으니 평상시대로 조세, 인력을 거두면 인심(人心)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유형주에게 말하여 무릇 노는 집(游戶)이 있으면 모두 스스로 사실대로 알리게 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기록하여 군대를 늘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비가 그 계책을 말했고 유표의 무리는 강성해졌다.

유비는 2년간 서주를 다스려봤고 그전에도 현령, 상 등을 역임해봤기 때문에 그때 호구조사를 해보지 않았을리는 없고 중요성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일화는 제갈량 영입 전후로 통전에 적힌 대로 제갈량이 제안하거나 주도해 (혹은 신야-번성에서, 혹은 처음으로) 호구조사를 했던 게 와전되었을 수 있겠다.

이 일화 자체는 당시 전란으로 인해 호구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행정력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이 일화에서 제갈량이 지적한 것도 유민같은 무산자가 아니라 당시의 유산자이면서 호적에 잡히지 않는 유호(游戶)를 통계에 잡아 기록한다는 건데 여기서 유는 '놀 유(游)'자로 쓴다, 목민심서에서도 양반호 등 기득권을 가진 세금을 내지 않는 유호[6]에 군포를 걷자는 논의가 나오고 한어사전(漢語詞典)에도 유호(游戶)의 뜻은 바로 이 일화를 인용하여 '미등기 호적의 인가(未登記戶籍的人家)[7]로 나오는 걸 알 수 있다. 즉, 평소에 하는 일반적인 호구조사를 할게 아니라 유호(游戶)를 중점적으로 찾아내는 조사하자는 것이다. 시대를 앞서나간 38기동대

즉 이 일화에서 제갈량의 실제 의도는 떠도는 유민이 아니라 실제 경제활동을 하면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 호구를 바로 잡아 통계를 바로내고 이를 기초로 삼아 물자를 걷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파악되지 않은 국가인력 및 재산의 관리라는 면에선 둠즈데이 북, 세부적인 면에선 신라의 민정문서와 성격이 같은 호구조사를 하자는 것이다. 고대 국가에서는 정치와 지방 제도를 잘 운영해 호구 등록을 제대로 하면 세금과 군사가 늘어나 국력 증대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3.5. 연의

답을 찾아 세 번 정성을 들이니, 마침내 와룡이 깨어나 천하삼분을 논하였다.
정사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1. 서서정욱의 거짓 편지에 속아 유비를 떠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제갈량을 추천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조조에게 가게 된 것 자체는 동일하지만 실제로 서서는 제갈량 임관 이후에도 유비 밑에서 일하다가 조조의 남하로 도주 중 장판파에서 어머니가 인질로 잡혀서 조조의 막하로 들어갔다.
  2. 제갈량 주변 인물들(황승언·최주평 등)의 등장과 이들과 유비와의 대화가 추가되었다는 것.
  3. 관우장비가 같이 가며 장비가 실랑이를 벌일 뻔 한다는 것.
  4. 제갈량이 제갈균에게 천하가 평정되면 다시 돌아올 테니 집과 논밭을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실제로 제갈균은 제갈량과 함께 유비에게 출사했다).
연의에서는 사마휘가 복룡과 봉추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서서유비를 떠나기 전에 제갈량을 추천하며 복룡과 봉추의 정체가 각각 제갈량과 방통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서서는 위나라로 가는 길에 생각해보니, 이미 유비의 인품을 알고 있는 자신과 달리 제갈량은 유비에 대해 잘 모르는 등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잠깐 들러 설득하기로 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나를 제삿상의 제물로 만들 셈인가?"라며[8] 화를 내고 들어가버렸고, 서서는 당황했으나 자신도 갈 길이 급했기에 다시 위나라로 떠난다. 그 동안 유비는 두 의형제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갈량을 찾아갈 채비를 하는데, 실패할 때마다 장비가 심통을 부리는 부분이 깨알 같은 개그 포인트다.

처음에는 가을에 한 번 찾아갔으나 그 때는 동자 한 명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고 제갈량은 여행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다만 돌아오는 길에 제갈량의 도우(道友)인 최주평을 만나 난세에 대해 짧은 평을 듣기도 했다. 이후 겨울에 다시 찾아갔으나 역시 제갈량은 없었고, 집에 찾아온 손님들과 장인 황승언, 아우 제갈균만 보고 떠났다. 이때 판본에 따라선 돌아가는 길에 동네 주막에서 백성들이 제갈량의 아내 황부인(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을 놀리는 노래를 부르는 걸 듣자, 장비가 "아내가 저 모양이니 제갈량도 딴 여자나 만나러 돌아다니는 모양이다"라고 씨근덕대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유비는 헛소리 말라며 간단히 일축하고 돌아갔다.

이듬해 봄에 찾아가자 동자가 제갈량이 집에 돌아와 있다고 말했으나, 공교롭게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에 유비는 깰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고, 제갈량이 뒤척이는 걸 동자가 깨우러 가려 하자 눈짓으로 말리기까지 하며 계속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장비가 어찌 되나 싶어서 안을 들여다보니 유비가 계속 서서 기다리는 걸 보자, "저렇게 무례한 놈이 있냐, 내 당장 불을 질러버리겠다!" 하고 폭발했으나 관우가 급히 만류하는 바람에 넘어갔다. 한참을 자던 제갈량은 드디어 잠이 깼는지 자작시[9]를 읊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초당에 봄잠이 넉넉하고, 창밖의 해는 더디더디 기운다.
큰 꿈에서 누가 먼저 깨어날 것인가, 평소에 나 자신은 아노라.
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
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제갈량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동자에게 누가 찾아왔냐고 묻자 동자는 유비가 한참부터 기다리고 있다며 얼른 대답했고, 제갈량 역시 얼른 의관을 갖추고 유비를 맞이한다. 유비는 제갈량의 수려한 풍모에 감동하기도 했고,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는 건 무례한 일인 것 같아 천하는 어찌 되는지와 성도유장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물었고, 제갈량 역시 한낱 백성인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유비에게 감복했기에 이에 차분히 대답하며 천하삼분지계를 설파한다. 한참 설명을 듣던 유비가 망설이다 마침내 세 번이나 찾아온 목적인 "부디 나와 함께 그 대업을 이루자"고 말하자 제갈량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며 거절하였으나, 유비가 "그러면 저렇게 고통받는 백성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며 필살기 눈물을 흘리자 이에 마음이 움직여 유비에게 종군하기로 결심한다.

흥미진진하기도 하지만 연의를 다 읽은 다음 다시 보면 슬퍼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중간에 나오는 사마휘가 "공명이 주군은 만났으나 때는 만나지 못했다"라는 혼잣말을 한 적이 있고, 제갈량이 제갈균에게 자기가 뜻을 이루고 돌아올 때까지 집을 잘 돌보라고 분부를 하는데 훗날 제갈량은 멀리 오장원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니 이는 결국 제갈량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4. 대중매체에서

84부작 삼국지에서는 26화에서 첫 번째 방문과 두 번째 방문이, 27화에서 세 번째 방문이 나온다. 연의에서 삼고초려 도중에 나오는 양양의 명사들과의 대화 등도 충실하게 재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

신삼국에선 제작진이 일부러 노렸는지 33화에서 삼고초려가 나왔다(그것도 세 번 찾는 것이 다 나왔다). 그리고 여기선 장비가 참다못해 제갈량 집에 진짜로 불까지 질러버렸지만[10] 정작 제갈량은 불이 꺼진 다음에야 일어났다. 연기 떠나서 배우분 진짜 멘탈이 대단한 듯

영웅 삼국지에선 특이하게도 유비가 3번 방문을 할 때마다 제갈량이 있다. 처음엔 관우와 장비까지 데려가서 유비 본인의 철학을 설파하며[11] 설득하지만 공명은 내키지 않는다. 등용은 실패했지만 공명에게 야채죽과 뱀고기 등을 얻어먹고[12] 떠난다. 두 번째는 유비가 다시 찾아와서 첫 번째와는 달리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엔 유비가 다른 말 없이 그저 도와만 달라고 부탁을 하고 결국 공명은 받아들인다. 나중에 유비는 이때의 공명을 보고 자신이 젊어서 돗자리나 짜면 인생을 썩히던 시절이 생각났다고 고백한다. 제갈량도 이 당시 자신은 평생 농사나 지어서 먹고 살 것인가 갈등을 하기도 했으니 결국 서로 상대방의 인생을 구원한 셈이다.

파일:attachment/삼고초려.jpg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이벤트로 등장한다. 삼국지 3에서 역사 이벤트 시스템이 처음 들어간 이후 매 시리즈마다 꾸준히 들어간다. 위는 삼국지 10의 융중촌 일러스트. 삼국지 6과 같은 일부 시리즈에서는 장비가 강제로 제갈량을 끌고 나올 수도 있는데, 이걸 말리지 않으면 제갈량의 충성도가 낮은 상태에서 시작되고, 어쩔 때에는 제갈량이 혼자서 오거나, 아니면 유비 본인이 3번째 방문을 안 하는 선택지도 있다(…). 대부분 시리즈에서 시나리오 제목으로 등장하여 207년경에서 시작하는데 유비 시나리오 중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손꼽히곤 한다. 도시라곤 신야 달랑 하나에 코 앞에는 중원과 하북을 다 먹어치운 조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 물론 숙련자들 같은 경우는 유비군 자체의 뛰어난 장수진들과 이후 이벤트로 데려오는 제갈량의 힘을 더해 소수정예로 힘을 합쳐 활로를 찾는 플레이도 선보인다.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2장 중후반부에서 나온다. 특이사항이라면 제갈량의 집에서 나오는 BGM이 황궁 BGM(메인 테마곡)과 같다는 것.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다는 게 헌제를 알현하는 것과 동급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해당 BGM은 이외에도 적벽대전의 해설이나 한중왕 즉위 장면 같이 유비의 생애의 큰 전환점이 되는 부분에서만 흘러나오는 만큼 삼고초려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프롤로그에서 나온다. 유비가 오기 전에 서서와 만나는 장면에서 선택지가 있는데, PC판에서는 뭘 선택하든 진행에 영향이 없지만 콘솔판에서는 연의대로 서서에게 화를 내는 선택지를 골라야만 나중에 관우를 살릴 수 있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주인공이 조조라 나레이션으로만 언급된다.

레전드히어로 삼국전 26화에서 유비가 신선인 제갈량을 설득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배철수의 만화열전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전개 자체는 다른 창작물과 큰 차이가 없는데 나레이션 배철수의 설명이 아주 깨알같다.
배철수: 이것이 바로 유비가 공명을 얻기 위해 공명의 집을 세 번 찾았다는 '삼고초려'라는 고사의 유래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귀한 인재를 얻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인다…는 말로 쓰이는데, 예를 들자면 저기 있는 김애나 PD가 나를 만화열전에 모시기 위해 우리집을 세 번 찾은 것 또한 삼고초려라 할 수 있겠다.
김애나: (스피커 스크래치 소리를 내며) 아저씨! 내가 언제 그랬어요?
배철수: …아…아님 아닌 거지…왜 삐이~ 소리까지 내고 저러남?
대한민국의 대하드라마에서는 한국사를 다룰 때도 삼고초려를 참조한 에피소드가 종종 등장하는데,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이 천재적 책사 최승우를 모셔오기 위해 왕의 신분으로 삼고초려를 한다. 처음에는 최승우의 인물됨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성미 급한 장비추허조를 보냈고, 그 뒤 견훤이 직접 찾아간다.

삼국전투기에서는 2부 프롤로그 에피소드로 시작하며, 단 한 화만에 종료. 유비장비서서의 추천으로 제갈량을 만나러 가는데, 이때 유비는 바니걸 복장을 입고 있었다…하여튼 그랜드 캐니언을 뚫고서 누덕봉 꼭대기까지 장비한테 업혀 올라왔더니 제갈양의 동자만이 남아서 청소하고 있었고, 그녀를 찾아내려고 첫번째는 협박으로, 두번째는 지갑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심문해서, 세번째는 지갑의 돈이 없어졌다는 핑계로 집을 뒤지려다가 얼떨결에 집안에 숨어있던 제갈양과 조우하면서 삼고초려 완성. 이후 그녀에게 천하삼분지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다음 화에서 제갈양을 중용한다.

이문열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그대는 기어코 나를 수고로움은 많고 얻는 것은 적은 그대의 꿈 속으로 들이고 마는구려. 이제 나는 항우에게 천명이 없음을 알면서도 따라나선 범증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 없게 되었소." 라는 말을 하여 자신의 처지를 범증에 빗대어 디스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문열 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이문열 이희재의 만화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아아, 기어코 나를 어지러운 세상으로 끌어 들이는구나”라며 한탄 비슷한 독백을 내뱉고 유비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한편, 여기선 색다른 가설을 제시했는데 일단 제갈량이 유비의 간곡한 권유에 감동먹어서 세상밖으로 나온것은 맞지만 정말로 세상에 나갈 마음이 없었다면 초가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 세상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세상 일에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에 사실 숨어 지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떨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명분과 실속 둘다 챙길수 있는 군주가 바로 유비라 따르기로 했다는 것으로, 일단 유비는 한실의 후손이자 헌제의 황숙으로 불릴 정도로 명분과 정통성을 갖고 있다. 또한, 이미 책사, 군사, 지략가 등이 많이 있는 손권 조조 등과 다르게 유비는 마땅한 책사가 없었기에[13] 유비 밑에서 일하면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수 있으니 그를 따른 거라는 가설이다.

정도전에서는 아예 정도전을 싫어하는 권문세족들이 정도전의 학당인 삼봉재를 세 번 때려부수는 짓을 한다. 정도전도 세 번 찾아온단 말은 들었어도, 세 번 부수는 건 처음 들어본다고 말할 정도. 실제 역사에서 있었던 일이다.[14]

허생전 후반부에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해야 겠냐 묻는 이완에게 첫 번째 방안을 제시하면서 말하는 게 바로 이 삼고초려다. 다만 후세의 해석에서는 당시 유비야 당시 왕도 아니었으니 그랬던 거고, 엄연히 왕인 자가 직접 그렇게 직접 찾아가는 건 무리일 거라 본다.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루트에리노 대왕은 중부도로에서 대마법사 헨드레이크를 우연히도 하루에 3번 만나 그를 자신의 군사로 초빙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작중에서 이 일화를 삼고초려와 같은 의도로 사용했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고, '우연히 세 번 만날 사이라면 전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결국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라는 '인연의 숙명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한 일화로써 쓰였다.

이말년 시리즈의 단편 제갈공명전에선 대기업 조조군에 입사하고 싶어하나 번번히 면접에서 떨어지는 취준생 제갈량을, 중소기업 유비가 계속 찾아가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스펙을 쌓으며 고생하는 취준생들을 삼고초려와 제갈량을 소재로 그려낸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3차 창작물에선 아예 악덕 중소기업 유비가 제갈량을 협박해서 강제로 끌어들이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일명 삼초고려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삼국지톡이나 카츠마타 토모하루 삼국지처럼 서주 대학살과의 연계를 통해 제갈량이 유비를 따르게 되는 것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하는 작품도 있다. 실제로 제갈량은 원래 서주 출신인데 서주 대학살 즈음에 피난 가서 형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이던 서주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유비가 고향의 원수 조조에 맞서 변변한 근거지 없이 떠돌며 형주까지 흘러들어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를 도와 조조의 야망을 분쇄시키고픈 마음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꽤나 그럴싸한 내용이 되기 적절하다.

헤븐 번즈 레드의 등장인물인 리 잉시아가 공명의 후손으로 등장했는데 세번 부탁받으면 제갈량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삼고초려를 당하면 무조건 승낙할 수밖에 없다며 뭐든 들어준다.

화봉요원에서의 삼고초려는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올 동안에 조조군을 적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제갈량의 계략을 말한다. 첫 번째 고(顧)로 유표의 아들들인 유기와 유종이 불화하도록 만들고, 두 번째 고로 주유를 위해 강하에 방어선을 펼치게 하며, 세 번째 고로 유기가 병사들을 이끌고 하구로 떠나 형주의 주군이 유비의 손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 그리고 모든 사전준비가 끝나자 제갈량은 곽가가 감시를 위해 주변에 심어놓은 세작들을 전부 죽이고, 유비에게 하산을 선언한다.

5. 여담



[1] 삼고초려의 일본식 표현이 이 삼고지례의 변형인 삼고의 예(三顧の礼)이다. 之의 뜻이 'の'이니 그냥 같은 표현이라 봐도 무방하다.[2]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은 형주에서 고위층과 교류하며 인척관계를 맺은 제법 유명한 명망가의 일원이었다. 부인인 황부인만 해도 채모의 조카씩이나 되며, 이 시절부터 친구였던데다가 사돈 관계까지 맺은 방통은 명문가의 아들이였다. 유비 휘하에 들어간 후와 비교하면 한미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의에서처럼 초야에 묻혀있던 신선은 아니었던 셈.[3] 교통수단은 커녕 도로조차 제대로 없던 시절 고대의 여행은 말 한필과 식량을 싸들고 몇날 며칠을 목숨을 걸고 이동해야 하는 일이었다. 중간에 재수없이 산적떼를 만나기라도 하면 즉시 몰살인데다가, 혹시 모를 암살자가 기회를 노려 유비의 목숨을 노릴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던 시절에 세 번이나 제갈량 한 명을 위해서 이러한 길을 갔다는 것은 제갈량이 유비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이다.[4]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유비는 국회의원이나 광역자치단체장처럼 대권을 바라보는 유력 정치인 정도로 볼 수 있다. 제갈량은 정치 외교학과를 나와 청년대표 같은 정치 활동을 이제 막 시작하고 조금씩 이름을 알려나가는 중인 20대의 청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이름이 좀 있다고는 하여도 새파랗게 젊은 인물을 선거캠프 본부장으로 임명했거나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총리 자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면,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직접 찾아가 권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냥 립서비스로 띄워준 것이 아니라 데려오자마자 관우와 장비가 질투할 만큼 깍듯이 모시고, 기어이 자기 형제와 같은 두 심복이 불만을 터트리자 수어지교를 언급하며 타이르는 등 파격대우를 해줬다.[5] 布衣, 사전적 의미는 '베로 지은 옷'이지만 여기에서는 '벼슬 없는 선비'로 쓰였다.[6] 참고로 한국사에선 역호(役戶)와 유호(遊戶)로 나뉘었는데 역호는 양역을 담당하는 가구를 가리키고, 유호는 사부(士夫), 유생(儒生) 등 신역(身役)을 담당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7] 여기서 인가(人家)는 사람이 사는 집. 인호(人戶)를 말하며 가족공동체를 중심으로 국가영역 내의 백성을 편성한 단위인 연호(烟戶)와 같은 뜻이며 민호(民戶) 등을 의미한다. 가(家), 호(戶), 연(烟) 등과 동일한 개념이다.[8] 제삿상에 제물로 바치는 소는 키울 땐 종을 달고 애지중지하다가 제삿날이 되면 죽이듯이, 누군가를 모시게 되면 곧 자기 목숨도 바쳐야 하는 처지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 것. 막상 이런 말을 한 제갈량 역시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유비와 그 아들인 유선을 모신다.[9] 연의 이전부터 제갈량이 지었다고 전해지긴 하는데, 실제로 지은 시인지는 알 길이 없다.[10] 2분 50초 부분.[11] 나라에 황제가 중심이 돼야되고(굳이 정치를 안 해도 되지만 백성들이 사랑할 만한 구심점이 필요하기에) 이를 통해 백성들을 안심케 한다는 것. 미축 등이 이 이야기를 듣고 유비의 신하가 된다.[12] 여기서 장비가 뱀을 싫어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참고로 유비가 설파하는 저 사상은 일본의 천황제와 만세일계를 연상시켜서 삼국지에 저런 게 왜 나오냐며 내키지 않아하는 의견이 있다.[13] 연의에서 책사로 묘사된 사람들은 간손미와 같은 서생은 물론이고, 관우와 장비 같은 야전 사령관들과는 구분되는 능력을 보여준다. 전략과 전술 정도의 차이인데, 유비군에는 서서 이후로는 전체적인 전략을 전담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이해하면 된다.[14] 세 번째로 집을 바꿨을 때 쓴 시도 남아있다.[15]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제갈량에게마저도 극진하게 대하는 유비의 인성버프 및 한 집단의 주군인 유비가 이렇게까지 매달릴 정도로 과연 제갈량은 대단한인물인가라는 제갈량이란 캐릭터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게하는 신비주의적인 장치로 각색된 거라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