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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9 21:21:46

범증

범아보(范亞父)
범증
范增
[1]
작위 <colbgcolor=#FFFFFF>역양후(歷陽侯)
범(范)
증(增)
별명 아보(亞父)
최종직위 대장군(大將軍)
고향 거소현(居鄛縣)[2][3]
무덤 거소현(居鄛縣) 곽동(郭東)[4]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278년(?)~기원전 204년
(향년 74세?)[5]

1. 개요2. 생애3. 평가
3.1. 비판3.2. 옹호
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초한전쟁 당시 항량항우를 모셨던 초나라 최고의 책사이자 전략가로 초나라의 승상을 역임했다.

전 중국의 제후들이 초나라를 따르게 하려면 옛 초나라의 왕족을 옹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항량의 초나라 군벌이 진나라에 대항하는 반군의 핵심 역할을 하게 만들었기에 항우가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나아가 항우는 거록대전에서 범증 덕에 장계취계(將計就計), 즉 상대방의 전략을 역이용하는 전술로 진나라군을 무너트려 전 중국의 패자가 되었다. 허나 이후 이간질 등으로 항우와 사이가 점점 멀어져 말년엔 쓸쓸하게 사망하게 된다.

2. 생애

사기』 항우본기에 따르면, 범증은 평소 집에 기거하면서 기이한 계책을 잘 내던 사람이었는데, 범증이 나이가 70세쯤 되어서 항량이 반란을 일으키자, 항량을 찾아가서 유세하여 초회왕을 세울 것을 권하였다. 항량은 범증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이후 범증은 초나라의 책사로 활동하게 된다. 다만 범증이 항량을 따르기 전의 행적은 일절 전해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자세한 출신은 불명이다.[6] 당시 시대에는 저런 인물들이 침묵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 시대라서 납득하는 연구가들도 꽤 많다. 전국시대 말기, 통일 진나라 시대의 폭정을 보며 육국을 재건하기 힘들거나 진나라의 오명을 감당할 필요가 없어서 인내하고 기다린 인물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유방의 천하통일에 큰 공헌을 하여 구석을 받고 상국으로 임명된 소하의 경우 관직에 출사는 했지만 중앙 진출은 하지 않고 때를 기다린 것처럼 보이는 행적[7]이 보이며, 중국사 최강의 유격 장수인 팽월도 동네 수적으로 지냈으며[8] 유방의 책사로써 공헌한 역이기 역시 범증 못지않은 연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전에는 미치광이 노인으로 불렸다는 것을 제외하면 행적이 묘연하다.

그런데, 범증이 당시 70세라면 기원전 270년대생일 텐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건 기원전 221년이다. 그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으면 망해가는 여러 나라들이 책사로 모시려 했을 텐데 그 때는 뭘 하고 있다가 이때에야 나타났는지는 참으로 아리송한 일이다.[9] 혹은 범증이 젊은 시기에 있었던 춘신군 황헐의 숙청 사건(기원전 244년)과 연루해서 춘신군의 식객이었다가 춘신군이 숙청당할 때 같이 실각했다는 추정도 있다.

소설 『초한지』에서는 이런 점을 고려했는지, 범증이 본래 선도를 배우던 예비 신선이었으나, 시기를 점쳐서 아직 속세에 나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은둔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계포의 간곡한 요청에 마침내 감격하여 항량을 따라나서게 되는데,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다가 항량과 그 조카에게 천명이 있는지 따져보지 않았음을 깨닫고 몰래 점을 쳐본다. 굵고 짧은 왕운이 보였으나 결국에는 순리를 거스르는 명운이 나왔고, 이에 범증은 크게 후회한다.
"아뿔싸! 내가 경솔하여 사사로운 감정으로 뛰어들고 말았구나. 미리 하늘의 뜻을 헤아려야만 했거늘..."
그렇게 나이 일흔에 천명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항량의 모사로 합류하여 종군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보필하면 하늘도 감동할 테니 열심히 해보자는 결의를 다진 것이었다. 물론 결과는 심히 좋지 않았지만.[10]

이후 항량이 죽고 항우가 초나라군을 통솔하게 되자, 범증은 항우를 보필하였다. 처음엔 항우도 아보(亞父)[11][12]라 부르며 범증의 계책을 잘 따라서 결국 진(秦)나라를 멸망시키는 데에도 성공하지만, 패왕의 자리에 오른 후 독선적으로 변한 항우는 점점 조언을 따르지 않기 시작했다. 패왕의 자리에 오를 때도 범증은 기존 초나라 왕족을 왕으로 섬겨야한다는 입장이었지만, 항우는 듣지 않고 끝내 초의제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좌에 올랐다. 결국 통일 국가의 도읍을 함양이 아닌 팽성으로 천도[13] 이후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유방을 처음 본 순간부터 초에 큰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14][15] 항우에게 유방을 미리 없애버려야 한다고 조언하고 홍문연까지 열어 유방 암살을 모의하지만, 유방을 얕잡아 본 항우는 끝내 따르지 않는다. 《초한춘추》에 따르면 유방이 함곡관을 봉쇄하자 길길이 날뛰며 장작을 모아 불바다를 만들겠다고 협박해 수비병들이 알아서 문을 열게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한신의 능력을 깨닫고 몇 번이나 중용해서 크게 쓸 것을 추천하고 쓰지 않을 거면 죽여 후환을 없애라고 조언했으나 항우는 한신을 우습게 여겨 홀대하기만 하고 그냥 내버려뒀다.[16]

지존의 자리에 오른 항우에게 범증은 이런 저런 조언을 많이 하지만, 범증의 거친 성미가 항우의 심기를 번번히 거슬렀던지라 항우는 이런 간언들을 한 귀로 흘려듣곤 했으며, 대신 부드러운 말재주를 지녔던 장량에게 밀려나게 되는데,[17] 이것은 항우와 범증에게 매우 뼈아픈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서로 삐걱대면서도 어쨌든 군주와 모사로서 뭉쳐 있었지만 결국 진평의 이간 계략에[18] 걸려든 항우는 범증을 내치지는 않되 그를 믿지 않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19] 분을 참지 못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 그래도 노년의 나이로 홧병에 등창까지 도져 사망한다.

보통 군주에게 몸을 맡기고 신하가 되는 건 죽을 때까지가 그 기한이기 때문에, 항우의 의심을 받아 더 같이 일할 수 없다 생각한 범증이 은퇴를 하기 전, 자신의 해골이 뉘일 장소를 찾으러 간다는 식으로 글을 써 올려 결재를 받았는데, 이를 걸해골(乞骸骨)이라 한다.[20]
天下事大定矣 君王自爲之 願賜骸骨歸卒伍
천하의 대세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뒷일은 대왕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원컨대 (대왕께 바친 제 해골을 구걸하오니) 제 해골을 돌려주시어 졸오[21]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흔히 초한지에서는 그가 죽자 항우가 하루 종일 대성통곡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항우가 말을 안 듣는 와중에도 대부분의 계책을 그나마 커버하던 범증이 없어지자, 제대로 된 모사가 없는 초군은 한군의 장량 & 진평 콤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연속으로 얻어터지고 항우는 그때마다 "아보께서 살아계셨다면..." 하고 후회하는 말버릇이 생긴다.[22] 그나마 항우에게 자신의 브레인을 해줄 인물로는 항백종리말이 있긴 한데 항백은 항우의 삼촌이기도 하지만 장량과 친분이 있어서 초나라에 도움을 주긴 커녕 되려 엑스맨 노릇을 했고, 종리말은 지력보다는 무력을 앞세워 앞에 나가 싸우는 장수 기질이 더 강한 편이었다.

3. 평가

훗날 유방은 공신들 앞에서 "자신은 한삼걸을 잘 활용했지만 항우는 그나마 있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해 나에게 패했다."라고 자신과 항우의 용인술을 비교하면서 범증을 자신의 한삼걸과 비교할 만한 항우군 최고의 참모로 평하기도 했다.[23] 그외에도 진평이 이간책을 시도할 때도 핵심 공작대상 4명 중에서도 범증이 있었고[24] 실제 공작도 범증을 중심으로 이간책이 이루어 진다.

다만 유방의 평가나 초한지에서 창작한 내용을 제외하고 사기 등 역사서에서 범증이 활약한 부분을 꼽으라고 하면 은근히 애매한데다가,[25] 지략이 아닌 처신을 따지면 범증 쪽도 책 잡힐 부분이 있었기에 일각에선 과대평가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냥 한고조가 항우 까려고 일부러 추켜세운 인물 같다는 것.

이러한 평가의 근거는 홍문연에서 전후사정을 무시하고 일단 유방을 죽이라고 주장하는[26] 홍문연의 막가파적 행동에 더해, 그걸 무시한 항우에게 어린아이라고 욕을 하질 않나,[27] 나아가서는 분봉을 포함한 항우의 모든 실책에 범증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런 관점에서 범증의 명성은 거품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는 것이다.

3.1. 비판

정리하자면 대원칙 자체는 잘 잡았으나 그걸 실현할 세부적인 계획들이 너무 허술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래 옹호 측의 분봉 내용도 그 대원칙은 이해할 만하고 좋았으나 세부적인 내용들을 따지고 들면 심각한 실책들이 드러난다. 우선 구 진나라의 유방과 3진왕 분봉도 우선 유방을 진나라 최악의 벽오지인 촉에 가둬둘 심산이었으면서 아무리 항백의 로비가 있었다고 해도 그 가둔 놈들에게 나가는 입구인 한중을 줘버린 시점에서 절대 실책이 아니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3진왕들도 충성심 이전에 신안대학살로 당장 쓸만한 군대 자체가 없는 왕들이었다. 유방을 법도 다 어겨가며 죽이자고 난리를 친 양반 치고는 너무나도 허술한 행태다. 거기에 다른 지역의 제후들도 기존 제후들과 항우의 충성파 제후를 같이 배치해서 서로 견제하게 하여 항우의 통솔력을 올린다는 발상 자체는 좋았으나 문제는 충성파 제후들의 세력이 너무 약해서 부임되자마자 기존 제후들이 직접 혹은 유방과 손잡고 항우 충성파들을 축출해버린다.

옹호 측은 이건 어디까지나 후대의 입장에서 해석한 결과고, 실제론 주군과 대적할 이를 뿌리뽑으라 하는 것은 순욱 등의 고사에서도 보이듯 오히려 칭찬받아야 할 행동이며, 대업을 따르지 않는 주군에게 한탄하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다. 오히려 동양에서 군주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탄하는 건 보편적인, 나아가서는 군주의 그릇이 의심받는 행동이다. 일본을 제외한 유교 문화권에서 주군에게 간언하는 기술을 익히라 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간언이 잘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즉, 보다 효과적으로 조언을 현실화하는 수단을 마련하라는 것이지 사무라이 식 충의를 들먹이며 주군이 자신의 의견을 거절하면 굴종하고 주군과 함께 자멸하라는 뜻이 아니다.

한편, 익재 이제현한삼걸은 물론이고 진평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물[28]이라며 평가절하했으나, 이는 상기의 사례와는 다른 경우다. 다음은 그 논고.
누가 묻기를,
"한나라는 3걸(三傑)을 써서 왕이 되고, 초나라는 범증을 쓰지 않아서 망했으니, 그렇다면 범증과 3걸 중 누가 더 나은가?"
하기에, 나는,
"범증은 진평과 견주어도 오히려 못하다 할 수 있는데, 더구나 3걸에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한 고조의 관대함과 항우의 잔포한 것은 범증이 아는 바이다. 약속을 어기는 것보다 더 불신(不信)은 없는데 항우는 관중(關中)에 들어가기 전에 한 약속을 어겼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불인(不仁)은 없는데 항우는 이미 항복한 군졸을 묶어 죽였으며,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것보다 더 불의(不義)는 없는데 항우는 초 회왕(懷王)을 죽였다. 그러고서도 5년이나 뒤에 망한 것은 오직 요행 때문이다.
고조는 처음 관중에 들어갈 때에 오성(五星)이 동정(東井)에 모였으니 하늘이 준 것이요, 한중(漢中)에서 임금이 되매 기꺼이 따르는 초나라의 자제와 제후 백성들이 수만 명이나 되는가 하면, 항우의 조아(爪牙) 같은 신하들이 또한 한나라로 귀순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준 것이다.
왕릉(王陵)의 어미는 그 아들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에 붙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자살을 달게 여겼으니, 고조가 꼭 임금이 되고 항우가 꼭 망할 것은 필부(匹婦)까지도 환하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범증은 꼭 망할 사람을 따르고 꼭 임금이 될 주인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그 지혜가 밝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항우로 하여금 범증의 계책을 쓰게 했더라도 끝내 망함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범증이 이미 항우에게 몸을 바쳐 죽음을 맹서하고 신하가 되었는데, 비록 그가 꼭 망할 것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배신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처음에 회왕이 송의(宋義)를 상장(上將)으로, 항우를 차장(次將)으로, 범증을 말장(末將)으로 삼아 북쪽에 가서 조나라를 구하게 하였으니, 그 당시에 범증이 어찌 항우의 신하였겠는가. 항우가 제 마음대로 상장을 죽이고 거짓말로 회왕에게 보고하였으니 무도하다 할 수 있고, 또 전날 양성(襄城)을 공격할 때에 양성 사람을 씨도 없이 죽이므로, 여러 장수들이 모두 항우를 먼저 관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증은 끝내 항우를 따르다가 의심을 받아 죽게 되고, 진평은 항우와 함께 천하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칼 하나만을 차고 한나라에 귀순해서 모신(謀臣)이 되었다. 그러므로 진평에게 견주어도 오히려 못한데, 더구나 3걸과 비교하겠는가?"
하였다.
〈범증론(范增論)〉
한마디로 항우가 유방의 관중왕 약속을 어기고, 초의제 암살과 신안대학살을 저지를 때 이를 막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천하를 쥐겠다고 나섰느냐는 것으로, 이렇게 답이 없는 행보를 보여주던 항우를 섬긴 것 자체가 문제라는 소리다. 애당초 항우가 천하를 쥘 그릇이 되지 않는 인물이고 처음에 그를 섬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섬겼으니 범증은 어리석고 진평은 처음엔 항우 밑에 있다가 편을 바꾸어 한고조를 섬겨 발뻗을 자리를 잘 잡았으니 진평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천명이 없던 군주인 항우를 섬긴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지 그 능력에 대한 평가가 아니며, 그나마 천명이 있는 유방을 섬긴 진평이 차라리 더 낫다는 식의 이야기다.

조선 효종은 같은 군주의 입장에서, 원래 섬겨야 할 군주인 의제를 시해하고 항우를 옹립한 범증의 행위를 비판하며 이 탓에 유방에게 천하를 낚을 미끼를 던져주었다고 평했다.[29]

3.2. 옹호

위에 있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범증에 대한 저평가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는 이유는 아주 정말로 간단한데, 범증의 죽음을 전후로 초나라가 흔들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확하다. 즉 범증의 절대적인 능력에 의구심을 품을 수는 있어도 초군에서 '상대적'으로 바라봤을 때에는 독보적인 인걸이 범증이었으며, 그나마 초나라가 온갖 삽질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게 거시적인 시각을 제공하던 마지막 생명줄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범증이 고평가 받아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초나라가 범증을 잃은 이후 항우 진영에서는 거시적인 전쟁을 위한 전략이라는 개념이 아예 사라졌다. 범증 사후 항우군의 전략은 "눈앞의 적을 때린다" 를 넘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결과적으로 이는 초한쟁패 내내 항우가 막강한 기동력과 통솔력을 특기로 갖고 있음에도 기각지세를 이룬 유방-팽월 라인 사이에서 유방을 패다가 팽월을 패다가 유방을 패다가 또 팽월을 패다가 하는 똥개훈련 무한루프로 특기인 기동력마저 허망하게 낭비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분봉은 그 내용에 문제가 있었을지언정 그 시대 기준으로는 충분히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당장 진나라가 2대만에 망한 이후 옛 육국의 터전에서 각 국가의 이름을 사용하는 신흥국이 우후죽순 솟아오른 점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역으로 초한전쟁 당시엔 진나라가 전국시대 이래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했을 뿐, 곧바로 무너진 점 등을 통해 분할된 중국이 오히러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실제로 장량이 분봉에 반대한 것도 지금 당장 분봉하는 것에 반대한 거지 이러한 실패 사례를 본 한나라조차 국력의 한계로 초기에는 군국제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으며, 당사자인 장량도 왕족들에게 실망해 한(韓)의 부흥을 때려치우기 전까지 육국의 부활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물며 유방을 죽이려 한 것 치고는 너무나도 허술한 분봉이었다는 말 또한 마찬가지. 범증으로서는 이미 최선의 조언인, 주군의 미래에 적이 될 인물을 색출하고 죽이라는 말까지 건네고 그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랬음에도 자리가 자리라 안 내키니까 계획을 파투내고 심지어 밀고자의 정체를 당사자에게 직접 알려주는 증인 보호 따위 개나 줘버린 신의 없는 짓[30][31]까지 한 건 오히려 항우 쪽이다. 범증이 막가파에 주군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하지만, 막말로 범증의 개인적 성격을 떠나 이렇게까지 말 안 듣는 주군 상대로 울화가 치미지 않는 신하가 있을까? 대놓고 죽이라는 말과 상황까지 강짜를 놓는 주군이 있는 상황에서 삼진의 견제 이상으로 유효한 봉분이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범증이 초나라의 학살에 제지를 걸지 않았다는 부분을 비판거리로 드는 것은 설득력이 너무 떨어진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핏줄이자 숙부이고 초나라의 구심점이었던 항량이나, 일단은 숙부인 항백 등 항우의 일족도, 범증보다 먼저 부하로 들어간 인물들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던 항우라는 인물의 학살을 아무리 아보라고 존칭한다곤 해도 일개 신하인 범증이 제대로 못 막았다고 비난하는건 처사가 너무 가혹하다. 항우는 흔히 초한지 등의 매체에서 알려진 것과 달리 진나라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을 운운하기 이전에 제나라에서도 거듭 학살을 저질렀으며, 범증이 이제 막 막하에 들었을 당시부터, 그러니까 숙부인 항량 생전에도 의제 파벌에게 항우가 가는 곳마다 전부 주멸을 당하고 있다며 살인마로 낙인 찍히고 다른 제후나 장수들도 항우를 꺼릴 정도로 시원하게 학살을 갈기며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으며 그나마 항우의 통제가 어느정도 가능했던 숙부인 항량이나 마찬가지로 숙부였던 항백 또한 이걸 말렸다는 기록은 없다. 한 마디로, 범증이 항우의 학살을 적극 말렸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반대로 (진나라에 대한 원한 따위로) 학살을 부추겼다는 말 또한 없으며, 오히려 항우는 항량이나 범증의 유무와 관계 없이 제 버릇을 못버리고 꾸준히 학살을 단행하던 학살마였다. 범증이 사라지자 외황에서 항우가 보인 자비심을 보면 오히려 범증이 문제였다는 이야기 또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애당초 범증이 문제 인물이었다면 굳이 유방 측에서 이간계까지 써가며 항우와 범증을 떼어놓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이 계속 붙어다니는게 유방 측에 유리하다면 둘을 떼어놓을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괜히 이제현이 "저렇게 말을 안들어 처먹는 주군 밑에 계속 있던게 더 문제 아니었을까?" 하고 꼬집은 게 아니다.

정리해보자면 범증은 틀림없이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가지 실책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실책은 후일 항우의 뒤를 이어 천하를 잡은 유방 등이 이러한 실패 사례를 보고서 타산지석으로 삼았기 때문에 실책으로 보이는 것이지, 천하통일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통일 진나라 쪽이 이상한 것이라 받아들여졌던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그렇게 이상한 것이라 판단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범증이 사라지고 나서 항우군이 무너진 것이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에, 범증에 대한 저평가는 신선하지만 역시 종래의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는 새로운 학설 정도로 받아들이는 쪽이 현실적이며 위에서 주장한 여러가지 실책들을 감안해도 항우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이가 바로 범증이었다는 것.

삼국지로 치면 정욱처럼 고령에 임관하여 여포를 보좌한 책사인 진궁처럼 항우의 참모였으며, 장소처럼 군주에게 아버지같이 대접받았으며 군주를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지만, 군주가 말을 안 듣고 결국엔 숙청당하여 최후를 맞이하는 게 전풍과 닮았다. 유방의 제갈량이라 할 수 있는 장량과 대척점을 이루는 건 사마의와도 같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사마의와는 다르게 범증은 지휘관 스타일은 아니었고, 야심가도 아니었다.

4. 대중매체에서

4.1. 소설

4.2. 만화

4.3. 영화

4.4. 드라마

4.5. 게임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21.jpg
삼국지 12, 13
파일:조조전 온라인 범증.png


[1] 참고로 위와 같은 관모는 천년도 더 뒤인 송나라 때 복식이다.[2] 사기의 기록[3] 현재 안휘성 허페이의 현급시 중 하나인 차오후 시 동북[4] 장쑤성 쑤저우 건륭궁 뒷편 언덕의 위에 범증의 묘가 현존한다고 한다.[5] 고우영 초한지에선 사망 당시 71세라고 나온 바 있다.[6] 이는 유방 휘하 최고의 명장이었던 한신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한신은 아낙에게 밥을 얻어먹고 지내는 명성없는 거렁뱅이라 납득이 가는데, 범증은 처음부터 유명했다면서도 정말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느낌밖에 없다.[7] 그의 법 실력을 본 진나라 관리들에게 중앙 조정 진출 제의를 받았으나 매번 철저하게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8] 심지어 이 사람은 진승·오광의 난 시절에 아직 시기상조라고 궐기를 늦추고 더 때를 기다렸다는 더욱더 직설적인 기록이 있다.[9] 다만 진나라가 6국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해진 것은 이미 진시황의 조부 때인 진소왕 때이므로 진나라는 싫어도 6국은 답이 없음을 꿰뚫어 보고 은신하고 있었다가, 진나라가 휘청인다는 것을 확신하고서야 자신을 드러냈을 수는 있다.[10] 점을 칠 때 자신의 명운도 점쳐보는데, 그 짧은 왕운마저도 마지막까지 함께 누리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만하면 거의 예언가 수준이다.[11] 아버지에 버금가는 자라는 뜻. 흔히 아부라고 읽겠지만 여기서는 보라고 읽는다.[12] 현대로 치면 범버지라는 접미사인 셈.[13] 여기에서 나오는 고사성어가 금의야행, 금의환향이다.[14] "난 유방을 섬겼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한 버전도 있다. 예비 신선이었으니 '이 놈은 될 놈이다' 정도는 꿰뚫어 보지 않았을까.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항우와 유방>에서는 유방을 처음 보자 패기에 지려 패닉에 빠지는 것으로 표현된다.[15] 현실적으로 해석하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가장 먼저 입성하여 점령하는 사람은 열에 아홉은 항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방이 먼저 함양을 점령해버린데다 세력 역시 위협적일만큼 커지자 그가 만만치 않은 능력을 가진 거물이라 장차 항우의 앞길을 막을 사람이 될 거라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홍문연이 벌어진 원인도 유방이 항우의 앞길을 막아서면서였다.[16] 다만 범증이 한신을 천거했다는 얘기는 출처가 애매한 면도 있다. 유방을 죽이려고 할 때를 생각하면, 휘하 장수 하나를 직접 손도 쓰지 않고 탈영하게 내버려둔 점도 의문이고.[17] 이 시점에서 장량은 아직 유방이 아닌 한왕 성의 신하였고 주군과 함께 항우의 막하에 있었다.[18] 일단 제일 먼저 범증을 노리긴 했으나, 사실 항우의 인색한 성격으로 인해 별다른 포상을 받지 못했던 종리말, 주은, 용저 등도 모조리 타겟으로 삼은 광범위한 이간질이었다고 한다. 범증이 금방 죽는 바람에 복수라는 명목으로 나머지와는 화해하고 말았지만. 다만 엄연히 핵심은 범증이고 나머지는 덤으로 공작한거라 작전 자체는 대성공이였다.[19] 범증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아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항우가 "아? 그러시든가..."하면서 모른 체하자 분통을 터뜨리면서 막사를 나오는 판본도 있다.[20] 만화가 고우영은 범증의 이 사직서를 소개하면서 "우리도 사표 쓸 때 한 번 흉내를 내서 멋 좀 부려 볼까?"라는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21] 당시 호적에서 다섯 호를 '오(伍)'라 했고, 3백 호를 '졸(卒)'이라고 칭했다. 즉, 이 말은 "평범한 백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뜻이다.[22] 그나마 범증이 브레이크를 걸 때는 항우가 언짢아하고 말을 안 듣긴 했지만, "최소한 범증이 반대하니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겠다."라는 자각은 가지고 있었고, 범증이 맥락을 정확히 짚어주며 설명해줬기 때문에, 최소한 크게 실패할 것을 그나마 살짝 손해보는 선으로 경감하는 효과도 있었다. 허나 이제 범증이 없으니 하는 일마다 대실패한 것이다.[23] 사실 냉정히 파고들면 항우의 용인술은 이 말보다도 더 심각하다. 항우에게 그나마 끝까지 충성한 이들 중에서 인중호걸이 유일하게 범증이였다는 거지, 항우는 엄연히 다른 특급 인재들을 거느린 적이 있었다. 그 한삼걸 중의 한신도 원래는 항우 진영 소속의 인물이였고, 장량도 표면적으로나마 수하에 둔 적이 있었기에 충분히 회유할 기회가 있었으며, 한삼걸 외에 그에 버금가는 인중호걸들인 진평과 팽월 또한 항우 진영 소속의 인물이였다. 이런 인재들을 다 날리고 범증 유일하게 남았는데 그 범증마저도 제대로 된 기용에 실패했다는 것이다.[24] 나머지 3명은 용저, 종리말, 주은.[25] 사실 사기가 쓰여진 시기는 역사의 승자인 한나라 시절이라, 초나라 내부사정은 아무래도 한나라쪽 자료보단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26] 허나 유방이 먼저 관중을 차지하고 함곡관을 막은 부분에서 이미 항우랑 대적하려는 어그로는 다 끌었기 때문에, 범증 입장에선 항우가 이미 초의제의 약속도 어기고 관중왕 되겠답시고 유방 치려고 마음 먹은 순간 유방은 훗날을 위해서라도 필히 제거해야 할 사람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 헌데 항우는 관중 기껏 먹어놓고 관중왕 대신 서초패왕이 된게 함정 실제 이때 유방을 놔줌으로써 훗날 관중을 유방에게 먹혔을 때도 명분론적으로 밀렸다는걸 생각해보면, 암살 주장이 비인간적으로 보일 순 있으나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전쟁통에 무작정 막가파 행동이었다고 보긴 어려운 부분도 있다. 최소한 유방의 정치적 세력이라도 박탈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었다.[27] 사실 범증은 항우보단 항량에게 고용된 것이라, 항우 입장에선 전대의 꼰대웃어르신 느낌도 들었을텐데, 이게 범증 특유의 성격도 더해져 고압적 자세가 종종 나오자, 항우도 점점 멀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28] 사실 진평 역시 한3걸 못지 않은 재주꾼이다.[29] 효종실록 1권 효종 대왕 행장. 사료를 분석해보면 효종 6년 (1655년) 겨울(음력 10월)에 경연을 하다가 고사의 옛 군주들을 논하며 한 말이었다.[30] 이 일 이후로 조무상은 홍문연 직후 당연히 유방한테 목이 날아간다. 이 정도이니 항우를 믿는거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31] 다만 이때 항우에게 유방을 처단할 명분이 모자랐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즉, 애당초 항우가 홍문연에서 유방을 타박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원래는 그럴 수 없었다는 것. 사실 항우와 유방은 초 의제를 섬기는 장수였고 형식상으로는 동등한 위계였던 만큼 함부로 처벌하기는 어려웠다. 유방 진영에서 번쾌가 나서서 파고들자 유방을 놔준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즉, 범증은 명분이고 나발이고 눈 한번 딱 감고 유방을 없애자는 의견이었고 항우는 내가 유방보다도 강한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는 생각이었던 것. 결론적으로 당시 상황에서는 항우의 판단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범증의 판단이 옳았다.[32] 이 작품에서 범증의 성깔을 온전히 살린 부분은 홍문연 이후 화를 못 참아 옥패를 깨뜨린 장면 하나뿐이다. 이마저도 원전에서는 "어린 놈의 새끼랑 일 못 해먹겠네"라며 뒷담을 한 게 크게 순화되어, "아아... 항우여, 항우여... 옥새는 옥새일 뿐 천하가 아니라는 것을 어째서 모르는가. 이제 다 틀렸다. 오늘 패공을 죽이지 못했으니 언젠가 그가 우리 모두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다."라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대사로 바뀌었다.[33] 다만 사실 반은 맞는 말이었다. 이때 초나라의 주군은 항량이었기 때문. 항량은 사람을 보는 안목도 상당했던데다가 일처리도 잘했고 사람들에게 금세 신망을 얻기도 했다. 비록 교만하다는 한계는 있지만 항우의 학살을 꾸짖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본인이 직접 학살을 할정도로 막장은 아니었고 범증의 충고나 조언도 받아들이는등 이견의 여지 없이 항우보다는 인격적으로 훨씬 나은 사람이었고, 결정적으로 항우는 군주로서는 몰라도 야전사령관으로는 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능력자 인데다가 항량은 항우의 숙부였기에 항우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항우대신 유방이 승리할수 있었던건 유방이 잘나서기도 하지만 반대로 항우가 그만큼 포악한 인간이라 인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항량이 죽지 않아 항우를 교육하고 컨트롤 하거나 항량이 황제가 되어 내치를 담당하고 항우가 전장터에서 싸웠다면, 하다못해 진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천하가 어느정도 안정될 수 있는 2~3년 동안만이라도 살아있어 기반을 잘 다져놓은 상태에서 의제에게 깔끔히 선양 받은후 뒷처리를 다 해준후 후계자 교육까지 끝낸 후에 항우한테 권력을 물려주고 죽었다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항량이 장한의 군대에 의해 죽어버리면서 범증의 운명 또한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범증이 별점에서 본 초나라의 몰락이 항량의 죽음을 의미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34] 반간계의 증거를 내던질 때 그걸 보면서 자기 필체(본인이 쓴건 아니지만 필체가 정말로 똑같다)가 맞다고 시인했다. 이후에 천천히 자신과 항우의 깊은 관계를 모르는 것들이 쓴 가벼운 술수라고 말을 했지만, 이미 분노로 제대로 된 사리분별을 못했던 항우는 들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범증도 항우가 이렇게까지 극대노한 상황인 줄 모르고 차근차근 설명하려다가 말을 끊고 분노하는 항우를 보고서 그제야 아차한다.[35] 물론 정말로 반역을 해서 그런건 아니지만,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항우에게 통했던 반간계의 여파가 더 커질 것은 분명했을 것이고, 다른 죄없는 이들도 피를 보고 내부가 혼란스러워질 것도 알아서 그럴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그 증거를 가져왔던 우자기가 그 피해를 볼 확률이 큰데, 이때 증거를 가져온 우자기도 뭔가 일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고개 숙이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36] 홀로 착잡하게 술을 몇 병씩 마시면서 반간계라는 단순한 계책이라고 말하는 범증의 말을 되뇌이면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그런 조치를 내리기는 했지만, 아부가 나를 배신하다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설마 아부의 말대로 이것이 유방의 반간계라면?'이라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37] 진심으로 범증을 따르며 항우에게도 오열하면서 말하던 엑스트라지만 가만 보면 유언을 좀 왜곡해서 전했다. 범증은 "이제 곧 초는 유방에게 망하고 내가 이룬 일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니 적의 반간계에 죽어가는 것보다 그것이 더욱 허망하고 안타깝구나"라는 뉘앙스로 말했는데 이 녀석은 "눈을 감으시는 순간까지도 초의 앞날을 걱정하셨습니다. 적의 간계에 죽어가는 것보다 그것이 더욱 걱정스럽고 안타깝다 하시며"라는 식으로. 하지만 범증이 항우를 섬겼던 걸 후회한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간 다시 항우가 폭주하는데다 자신의 목까지 날아갈 수 있었으므로 적당히 돌려서 말한 듯하다.[38] 엄밀히 따지자면 먼저 화평이 깨지도록 유도한건 결전을 벌이자는 전서까지 보낸 유방쪽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항우가 그 도발을 참지 못하고 선제공격을 해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항우가 먼저 비겁하게 화평을 깬 것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본인이 화평을 먼저 깨버렸으면서도 한신과 팽월, 영포가 없는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한채로 또 유방을 잡지 못하고 퇴각한다.[39] 아이러니하게 그 직후 황추생은 똑같이 초한전쟁을 다룬 드라마 <초한쟁웅>에서는 반대로 한고제 유방을 맡았다.[40] 장량도 작중에서 혼자서 바둑으로 10명을 한꺼번에 상대해서 이기고 다녔다. 이때의 연출이 매우 박진감 넘친다.[41] 대국 전에 장량과의 대화에서 약간의 복선이 주어졌다. 대세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다고 여긴 범증이 양측 모두 죽는 패를 미리 구상해둔 것. 딱히 장량이 토사구팽당한 적은 없지만 어쨌든[42] 여담으로 이 배우는 같은 시기를 다룬 '대장군한신'(한국 명은 천하의 명장 한신)이란 드라마에서 유방(!)을 맡았다.[43] 삼국에서는 사마의를 연기했는데, 둘의 인생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캐스팅.[44] 이때 단단히 삐지셨는지 "내가 왜 니 아비야! 저런 나쁜 놈이 왜 내 아들이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지?" 라며 앙탈부린다.[45] 가령 범증이 오창을 별동대로 급습한다던지.[46] 항우의 작전을 어린아이 장난 같다고 비웃는다거나.[47] 중대 사항은 이미 다 결정해 보고하는 식으로 하고 자질구레한 안건에 대한 문서를 넘기며 "군중사항을 모두 다 꿰고 처리하시잖아요?"라는 비이냥을 날린다. 이때 같이 코웃음 치는 항장은 천하의 쌍놈. 우자기와 종리매만이 난처해 한다.[48] 아쉬운 건 "걸해골"의 일화가 나오지 않는다.[49] 면담 때문에 추위에 기다리다 걸린 풍한이 원인인 듯.[50] 비단 장량보다 한수 아래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장한, 사마흔, 동예를 삼진왕으로 봉하자고 진언했던 것도 범증이었는데 이는 그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장량이 한신, 팽월, 영포를 3축으로 하는 대전략을 추진할 때도 범증은 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영포가 이반할 때까지 아무런 수를 쓰지 못했으며, 항백이 영포의 처자식을 죽이는 것도 막지 못했다.[내용] 역시... 항우는 몰라도... 천명을 받은 유방은... 이 극한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단 말인가...? 하늘이시여...... 정녕... 유방이... 천하의... 주인이었나이까...? 유방...! 저 세상에서 지켜보겠다.... 너의 천하를.......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