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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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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2. 전기 군벌 시절
2.1. 조조와 만나다2.2. 동탁 토벌전2.3. 공손찬 휘하2.4. 서주 군벌 시절2.5. 조조 휘하
3. 방랑기
3.1. 2차 서주 점거3.2. 서주 상실과 원소에게 의탁3.3. 유표에게 귀순3.4. 적벽대전
4. 후기 군벌 시기
4.1. 형주를 빌리다4.2. 입촉4.3. 익주를 차지하다4.4. 유비의 수염 콤플렉스4.5. 익양대치4.6. 장로의 문제4.7. 한중 공방전
5. 전성기와 말년

1. 초기

1.1. 출생

유비의 혈통은 유비/혈통 참고.

유비는 161년 음력 6월 7일 동한(후한) 유주(幽州) 탁군(涿郡) 탁현(涿縣)에서 유홍(劉弘)의 아들로 태어났다. 탁현은 《삼국지연의》에서 누상촌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누에치기에 사용하는 뽕나무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현재의 허베이성 바오딩시현급시 줘저우시로 현 베이징 남서쪽에 인접해 있다. 21세기엔 이곳이 중국의 수도권이지만, 이 시대에 요서(遼西) 일대는 그저 변방 외곽이었다.

유주는 삼국시대에 공손찬유우에게 빼앗았고 원소가 공손찬을 무너뜨린 뒤 차지하고 원희를 유주목으로 임명한 하북(河北) 4주 중 하나였다. 원소 사후 원씨가 조조에게 멸망한 뒤에는 위나라의 영역이 된다.

1.2. 성장

유비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형제 자매에 대한 기록이 일체 없는 것으로 보아 외동이거나 형제들을 모두 일찍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비는 홀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를 짜고 신발을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자치통감》에서는 대놓고 '少孤貧'이라고 해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난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유비의 집앞에 있는 뽕나무[1]는 매우 커서 황실의 수레 덮개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를 괴이하고 범상찮게 여겼다. 탁군(涿郡) 사람 이정은 유비의 집앞을 지나가며 이 집에서 필시 귀인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유비는 어린 시절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나는 꼭 이렇게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에 탈 거야."라고 말했는데, 어머니와 숙부 유자경이 "너는 허튼 소리를 하지 말거라. 네가 우리 가문을 멸문시킬 셈이냐!"라고 혼을 냈다. 왜냐하면 유비의 말은 황제가 되겠다는 소리였기 때문에 평범한 시대 같았으면 집안이 멸문될 정도로 위험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2]

탁군(涿郡) 사람이었던 간옹은 어려서부터 유비와 친했다는 것으로 보아 같은 탁현(涿縣) 출신으로 추정된다.

유비는 열다섯 살이 되어 친척 유원기의 후원으로 노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때 공손찬유덕연과 동문이었다고 한다. 유원기의 아내가 유비 후원을 반대했지만 유원기는 유비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며 후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유비는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했으며 호걸들과 결의를 맺기 좋아해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수준의 공부는 했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유비는 말년에 들어서는 독서에 신경을 써서, 죽기 전 유선에게 늘 독서하고 수련하라고 말했다. 유조로 유선에게 한서(漢書), 예기(禮記)에 대해서 읽고, 여유가 있으면 제자(諸子)와 육도(六韜), 상군서(商君書, 상앙의 저서)를 두루 읽어, 다른 이의 지모에서 도움을 얻도록 하고 제갈량이 직접 필사한 신불해, 한비자, 관자, 육도를 통달할 것을 권했다.[3]

이는 유비나 제갈량이 주로 읽었던 책들이 어떤 부분들인지 드러나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역사책이나 유가의 책도 있었지만 법가병가의 책이 많이 있다. 한서는 본조(本朝)를 위한 관례고, 예기는 수양하기 위한 중요한 서적이다. 촉과(蜀科)[4]를 보면 알 수 있듯 유비와 제갈량은 법가를 많이 따랐고[5] 거기에 유가와 병가 등이 섞인 형태였다. 역사서와 유교의 경전과 병법서와 법가의 통치술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폭이 넓다. 제갈량 문서에도 나오지만 제갈량이 순자를 중시했다는 설도 있다.

이에 대해 유학자들이 비판하기도 했지만 청나라 초기의 학자 강신영(姜宸英)이 말하길 '무후(제갈량)는 군사 장군으로서 문사(文事)와 무비(武備)로 바빠 틈이 없었는데도, 손수 신불해, 한비자, 관자, 육도를 베껴 후주(유선)에게 전했는데, 지금 서생은 도리어 이를 할 수 없으니 가히 부끄러움이 누구보다도 심하구나.(중략) 선주(유비)와 제갈량 모두 (후주가) 이 책을 읽기를 원했다. 고대의 사람이 독서함은 모두 실용적이었음을 볼 수 있는데, 유생은 시문을 읊으며 말솜씨에 의지하니, 비록 많아도 또한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찬하였다.

아무튼 유비는 공부를 하고 몇년이 지나지 않아 탁군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되고, 돌아온 후 무리들을 모아서 그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이 시기 말 상인인 장세평소쌍은 유비가 범상치 않다면서 후원했다고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전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비는 모범적인 면과 거리가 멀고 유협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비의 출신 현은 알 수 없으나 탁군 출신이라는 것을 볼 때 이 시기부터 장비와 어울려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탁군으로 도망친 관우도 함께 어울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1.3. 도원결의

나관중의 군담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 장비가 유비와 도원결의의형제를 맺었다고 전하는데 정사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명시되지는 않는다. 다만 여러 정황상 이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었거나, 혹은 그에 준할 만큼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을 유추해볼 뿐이다. 김경한 삼국지에는 도원결의가 나오긴 나오는데 유비 관우 장비 뿐만 아니라 간옹도 참여한 것으로 나오며 형제의 연을 맺는 게 아니라 황건적 토벌 출정식으로 나온다.

정사 <관우전>에서는 장료와 대화할 때 관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조공께서 후히 대우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劉將軍-좌장군 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 함께 죽기로 맹세하는 것은 주로 의형제를 맺을 때 하는 것이고, 또한 <비시전>에서 보면 관우에게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관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으며, 또한 관우가 죽은 직후 여러 인사들이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유비와 관우와 장비는 실제로 의형제였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정사 <장비전>에 따르면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고,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는 잠을 잘 때에도 관우, 장비와 침상(寢牀)을 함께 했으며, 그 은혜는 형제와 같았다고 한다. 위나라와 오나라에서도 이 셋의 두터운 신뢰 관계에 대해 인정했을 정도니, 이 셋이 설령 진짜로 의형제는 아니었을지라도 굳건한 결속력을 지닌 사이었다는 건 알 수 있다.

또한 의형제를 맺는 경우는 실제로 여러 차례 있었으며 오늘날 중국에서도 적지 않게 있는 일이다. 꽌시 문서 참조. 단순한 지인관계가 친구관계, 단순한 친구관계가 오래되면 깊은 친구관계로, 깊은 친구관계가 더 깊어지면 의형제로 발전하는 건 현재 중국에서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물론 그 관계까지 도달하기는 매우 힘들고, 중국에서도 의형제 관계가 너도 나도 있는 보편적인 건 분명 아닌 특수한 관계이다.

유비와 장비가 관우를 만나게 된 시기를 황건적의 난이 발생한 184년 전후로 잡는다면, 유비가 각각 219년과 221년에 두 사람을 잃을 때까지 서로 함께 한 시간은 무려 35~37년이다.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해보면 유비, 관우, 장비가 함께 한 시간은 웬만한 가정에서 자식이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보다도 길었으며, 오늘날에도 3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친우 관계로 매양 함께 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더구나 그냥 어울려다닌 정도가 아니라, 유비 생애의 숱한 패배와 불운을 모두 함께하며 무수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서로 배신하지 않고 끝내 밑바닥 평민부터 각자 일국의 황제와 대장군이 될 때까지 그 인생 역정을 모두 함께 한 사이니, 이 정도면 사실 도원결의가 실제로 있었네 없었네, 의형제였네 아니었네, 따질 필요도 없이 이들 세 사람은 그야말로 가족이요 형제 관계였으리라 쉽게 추측할만 하다.[6][7]

1.4. 황건적의 난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황건적이 들끓자 전국에서 이를 진압할 의병들이 일어났다. 탁군에 머물던 유비 또한 관우장비,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의병이 된다. 유비는 처음 거병할 때는 으레 그렇듯 유주에서 거병한 것이다. 유비는 황건적의 난에서 교위인 추정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여러차례 공을 세운다.

이후 187년 6월에는 장거장순이 반란을 일으켜 유주를 공격하자, 청주에서 (토벌하라는) 조서를 받게 되었다. 종사(從事, 주목이나 군수의 속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장순을 토벌하게 했는데, 평원을 지나다 유비가 무용(武勇)이 있음을 알았던 청주 평원군 사람 유자평의 추천으로 반란진압에 참여한다. 유비는 들판에서 적을 만났는데, 유비가 상처를 입어 죽은 척 하자 적들이 뒤쪽으로 떠났고 이 때문에 그를 수레에 태워 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때의 군공으로 유비는 기주 중산국(中山國) 안희현(安熹縣)의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현위(縣尉)[8]인 안희위(安喜尉)에 임명된다. 중산국은 유비의 조상인 중산정왕 유승의 임지이기도 하다. 지방 말단에 지나지 않았지만 평민 출신이고 20대라는 젊은 나이를 고려한다면 그럭저럭 출세했다고 볼 수 있다.

1.5. 독우 매질 사건

그러나 얼마 뒤 군공을 세운 사람 가운데 가짜 군공자를 선별하라는 조서가 내려오고 얼마 뒤 군의 감찰관인 독우[9][10] 안희현으로 찾아온다.

삼국지 <선주전>에 따르면 얼마 뒤 군의 감찰관인 독우가 안희현에 도착했다. 유비는 그를 만나려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곧바로 독우를 묶고 2백 대를 때린 후 인끈을 풀어 그의 목에 걸고 그를 말뚝에 묶어두고 관직을 버린채 달아났다.

〈선주전〉주석 《전략》에 의하면 군공을 세워 장리가 된 자들을 선별하여 추려내라는 조서가 주군(州郡)에 내려왔다고 한다. 유비는 자신이 파면될 것이라 의심했다. 독우가 도착하여 유비를 내쫓으려 했는데 파견된 독우는 유비가 알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비는 독우가 머물던 전사(傳舍)에 찾아가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독우는 병을 칭하며 만나려 하지 않았다. 유비는 이를 한스럽게 여겨 치소로 돌아간 후 부하들을 이끌고 전사의 문 안으로 뛰어들며 “나는 부군(府君-태수)의 밀교를 받아 독우를 체포하러 왔다.”라고 말한 후 독우를 묶고 현의 경계까지 끌고 갔다. 그 뒤 인끈을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나무에 묶어놓은 뒤 백여대를 매질해 죽이려 했는데 독우가 애걸하자 풀어주고 도망갔다.

연의에서 장비가 뇌물을 요구한 독우를 두들겨 팼고 유비가 그를 말린 것으로 묘사됐으나 정사에서는 유비가 두들겨 팼다고 나온다.

1.6. 사면

이후 하진황건적 토벌 용도로 조정 관리를 파견해서 자신의 모병에 응한 자는 지위고하와 죄질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해주겠다고 선포했는데, 유비는 독우 구타 사건을 사면받고 관직을 얻기 위해서 모병에 참가하고 군공을 세워서 사면받는 데 성공한다. 도위 관구의와 모병하려고 단양에 가던 도중 하비에서 도적을 만나 격파한다. 이때 받은 관직인 하밀승은 스스로 내버렸지만 이후 임명된 고당현의 현위직은 받아들인다. 얼마 후 직책이 현위에서 고당현령으로 승진하게 된다.

2. 전기 군벌 시절

2.1. 조조와 만나다

고당현령이 되었다는 본전 기록 바로 다음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붙인 《영웅기》 기록에 따르면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京師, 낙양)에 있다가 조조와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모으고 불러들여 무리를 합쳤다. 때마침 영제가 죽어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 유비 또한 군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라고 되어 있다. 영웅기는 1차 사료인 데다가 저자 왕찬은 기억력이 매우 좋기로 유명했으며 유표가 형주를 다스리던 시절 유표의 관리로 일했기에 유표와 가까이 지내는 객장으로서 201년부터 208년까지 7년씩이나 형주에 의탁하고 있던 유비를 접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세간에 떠돌아다니는 풍문보단 실제 유비를 보면서 그의 이런저런 사정을 가까이서 들을 기회가 많았을 것이므로 기록의 신빙성은 높은 편이다.

영웅기》에선 유비가 수도 낙양에 있을 때 조조를 따라 패국에 갔다고 쓰고 있는데, 이때 유비가 청주 평원군 고당현령 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후의 동탁 집권시기와 뒤 이은 군웅할거 시대도 아니고 아직 후한의 중앙 정부, 조정의 권위가 멀쩡히 유지되는 상황에서 일개 지방현령인 유비가 무슨 특별한 사유도 나온 게 없는데 임지인 고당현을 놔두고 굳이 수도에 있을 이유가 없고, 거기에 한 술 더 떠 그냥 조조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임지에서 한참 떨어진 조조의 고향인 패국까지 따라가 거기서 장기간 머무르기까지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유비는 고당현령 직을 버리고 수도 낙양에 있다가 조조를 만나 패국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즉 영제 말기 어느 시기에 유비는 고당현령 직을 버리고 관우, 장비, 간옹 등의 최측근만 데리고 낙양에 갔다 조조와 만났고 조조의 고향인 예주 패국(沛國) 초현(譙縣)까지 따라가서 함께 군사를 모았다는 소리가 된다.

이들이 만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비가 장거, 장순의 난 토벌에 참여한 187년 6월 이후 ~ 영제가 붕어한 189년 5월 사이로 추정된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제 말년에 유비의 연대가 정확하게 확인되는 게 187년 6월 장거, 장순의 난 토벌 참여뿐이기 때문이다. 이후 유비가 안희위를 언제 버렸는지, 관구의와 단양에 언제 갔는지까지는 추측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기 때문. 실제로 만남의 시기에 있어 추정 범위는 더 좁을 것이다.

삼국지집해》 <무제기>에 인용된 조별전(操別傳)에 따르면 조조가 전군도위(典軍都尉, 전군교위(典軍校尉)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로 임명되고 고향인 초현으로 보내졌다고 하니 이때 유비가 하밀승, 혹은 고당현령 직을 버린 상태에서[11] 조조를 따르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조가 효기교위로 임명되고 벼슬을 버리고 달아날 때의 경우는 이미 영제는 죽고 소제가 즉위했을 때이므로 영웅기의 기록에 들어맞지 않으며, 또 이 당시 조조는 고향 패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진류에 머무르며 거병했으므로 역시 기록에 들어맞지 않는다.[12] 이와 같이 정확한 시점을 따져보면 조조가 전군도위가 된 188년은 영제 말년이기에 상충하지 않고 부합하는 면이 가장 큰 편이다.

여담으로 유비는 동탁 토벌전 이후 공손찬에 소속되어 청주에서 머물다 도겸의 추천으로 예주에 부임하였으므로 예주 패국 패현에서 인망으로 군림하였고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긴 뒤에도 소패, 즉 예주 패국 패현에 주둔하였음이 기록되어있다. 이후 허도 조정과 조조 휘하에서 공식적으로 예주목에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에도 예주의 인재들이 유비에게 출사하였다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이로 미루어보아 어쩌면 비교적 이른 시기인 이 시점부터 유비는 예주 패국 패현에 영향력을 보유하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2.2. 동탁 토벌전

아무튼 유비는 조조와 함께 동탁 토벌전에 참가하지만[13] 동탁 토벌전에서 유비가 무엇을 했는지 알려진 행적은 없다. 참전했으니 싸우기는 싸웠을 것이고, 조조와 같이 무리를 모으고 있다가 거병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비는 조조의 고향 패국에서 그 동안 조조와 함께 모은 병력을 일으킨 후, 동탁 집권 당시 혼란을 겪던 수도 낙양에서 도망쳐 진류에 머물며 봉기한 조조의 군대에 합류해 그와 함께 동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붙인 유비가 동탁 토벌전에 종군했다는 《영웅기》 기록 다음에 이어지는 본전 기록에서는 바로 이후 유비가 적(賊)에 의해 격파당하니 (노식 문하에서 안면이 있었던) 중랑장[14] 공손찬에게 달아났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쓰인 적(賊) 글자는 '도적(盜賊)'이라는 뜻도 있지만 말 그대로 적군의 세력, 반역자, 역적(逆賊)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유비는 고당현령 직을 버리고 수도에 있다가 조조를 따라갔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현령으로 그대로 있다가 도적에 격파되었기보단 조조 휘하에서 반동탁 연합군의 '적'이자 그들이 '역적'으로 규정한 동탁과 싸워서 패하고 공손찬에게 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실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될 때 하내에서 맹주로 격문을 읽었던 원소나 산조에서 맹주로 격문을 읽었던 장홍이나 모두 동일하게 동탁을 적신(賊臣, 역적)이라고 칭하고 있다. 즉, 당시 유비의 입장이나 후세에 사료를 참고해서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 역시 후세의 사료를 참고해서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 입장에서 보면 동탁군은 '적신'을 따르는 '토벌해야 하는 적(賊)'이었던 것이다.

배송지가 굳이 유비가 동탁군과 싸웠다는 《영웅기》 주석 바로 다음에 유비가 적(賊)에게 깨뜨려져 공손찬에게로 도망갔다는 본전의 기술이 곧바로 이어지게 했던 것으로 보아 그는 본전에서 간단하게 (유비가) 적(賊)에게 패해 달아났다고만 진수가 쓴 부분이 사실은 유비가 적(賊)인 동탁군과 싸우다 격파당하여 달아났던 일이라고 1차 사료인 영웅기를 인용해 자세히 서술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의 대학자 학경은 배송지의 의도가 맞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저서 속후한서에 영웅기를 주석으로 인용하면서 원래 삼국지에 달려있던 '동탁을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까지의 영웅기 주석을 적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에 의해 격파되어 분위장군(奮威將軍) 공손찬에 갔다'라는 기록까지 영웅기 주석이라고 더해서 적었다.[15]

이를 봤을 때 학경이 《속후한서》를 쓴 송말원초(1260년 ~ 1275년) 당시에 남아있던 영웅기에는 '(유비가) 적(賊)에 의해 격파되자 분위장군(奮威將軍) 공손찬에게 달려갔다'라는 기록까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배송지는 영웅기를 인용해 사정을 자세히 쓰고자 했지만 '적에게 격파당해 공손찬에게 갔다'는 것 자체는 본전 기록과 겹치므로 굳이 영웅기의 이 부분은 적지 않았던 것일 수 있는데, 학경이 굳이 정사 삼국지 주석 영웅기에 적혀있는 이상의 내용까지 선주전 본전이 아니라 영웅기 주석의 내용이라며 적었던 것을 보면 설득력이 있다.

거기에 공손찬을 '분위장군'이라고 쓰는 기록은 학경 속후한서 영웅기 주석 이 기록뿐이다. 분무장군과 분위장군은 서로 다른 잡호장군 관직이긴 한데 서로 같은 급의 관직인 데다가 무(武)자와 위(威)자는 붓으로 써놓으면 얼핏 비슷하기 때문에 저수, 여포의 예에서도 나오듯이 굉장히 헷갈리기 쉬운 관직이기도 하다, 결국 학경이 유비가 중랑장 공손찬에게 도주했다는 선주전 본전 내용뿐만 아니라 공손찬이 반동탁 연합군 당시 분무장군이었다는 정사 삼국지 공손찬전에서 내용을 따온 것도 아님을 알 수 있고 이들과는 다른 제3의 독자적인 원전인 영웅기에서 내용을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초평 원년(190년) 봄 정월, 주와 군은 모두 군대를 일으켜 동탁을 토벌했다. 동탁은 홍농왕(소제)를 죽이고 황제(헌제)를 위협해 서쪽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자 소열제(유비)는 다시 관직을 버렸다. 후에 고당위에서 고당현령으로 옮겨 갔다.
원래의 주해(原注)인 영웅기에 따르면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에 있었는데 후에 조공(조조)와 함께 패국으로 돌아가 무리를 불러 모으고 합쳤다. 영제가 붕어하자 천하에 대란이 일어났고 유비 역시 군대를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 적(賊)에 의해 격파당하니 분위장군(奮威將軍) 공손찬에게 달려갔다.
학경 속후한서

어쨌거나 이때 유비와 함께 있었을 조조가 동탁과 싸워서 패한건 위에서 말한 서영군과의 전투뿐이므로 유비는 서영군과의 전투로 인해 조조를 떠나 공손찬에게 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조조는 서영에게 격파당해 군대가 거의 와해되어 군사가 적었으므로 조조 밑에서 유비는 뭘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여기고 조조와 반동탁 연합군을 떠나 공손찬에게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후 조조는 여기저기서 반란까지 겪어가며 생고생 끝에 다시 병력을 규합했으나 그 숫자는 겨우 1천 명밖에 되지 않았고, 병력을 어떻게든 모아서 원소가 있는 하내로 이동한 후에는 더이상 동탁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원소에게 거의 종속된 부하 취급을 받게 된다.

사실 유비 입장에선 조조가 영 미덥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가짜 격문을 돌리고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기까지 하는 연의에서의 위상과 달리 실제 이 당시 조조는 반동탁 연합군에서 별로 영향력이 없었을 공산이 매우 크다. 우선 가짜 격문을 돌린 거 자체도 조조가 한 게 아니라 교모가 한 거고 이 당시 반동탁 연합군의 주축으로 원술, 한복, 공주, 유대, 왕광, 원소, 장막, 교모, 원유, 포신 등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조조를 화려하게 수식하기에 바쁜 무제기에서조차 조조는 그냥 '대행' 분무장군이라고만 나오고 후한서 <원소열전>엔 아예 조조가 참전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조조는 '기타 쩌리' 라인에 포함되어 있었던 듯. 하긴 자사나 태수도 아니고 잡호장군인 분무장군 대행에 다른 사람들은 각각 수만씩 이끌고 오는데 몇천 명의 의병만 데려왔으니 당연할지도. 물론 조인, 유비가 모집해 데려왔을 병력도 있었겠지만 다른 지방관들이 이끌고 온 병력들은 명색이 후한의 정식 관군들이다. 또, 산조 지역의 맹주를 뽑을 때 다른 자사나 태수들이 다들 총대매긴 싫어서 모두 일개 공조인 장홍을 맹주로 지지하는 마당에 명색이 중앙에선 서원팔교위의 일원이었고 효기교위까지 했었던 조조를 지지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절친인 장막과 포신이 있었는데도 그랬다.

<무제기>에서는 조조가 움직이지 않아 질책하는 걸 무슨 맹주 원소까지 질책하는 것마냥 대단한 것처럼 묘사하는데 실제로는 산조에 있던 아무도 조조의 말을 안 들어주니 조조 혼자 피꺼솟해서 무작정 나가다가 역적 동탁의 부하장수인 서영에게 된통 깨진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기껏 자기가 모은 병력, 조인이 모은 병력, 유비랑 같이 모았던 병력, 장막이 보내준 병력 거의 다 날려먹고 친구 장막이 보내준 장수 위자, 포신의 동생인 포도[16]까지 전사하게 만든 다음, 간신히 살아남아 산조에 돌아와서 거창한 계획을 제시하지만, 절친 장막조차 쓰지 못했을 정도로 거창하기만 한 계획이라서 또 다시 아오안, 이러다보니 조조와 행동을 같이 했을 유비가 조조의 이 꼴을 보고 그냥 그 길로 동문인 공손찬에게 도주한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

2.3. 공손찬 휘하

공손찬 휘하에서 유비는 주로 원소 전선에 종군했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했다가 적에 의해 격파되어 도망친 유비를 받아들인 공손찬은, 표를 올려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고(선주전), 청주자사 전해를 위해 191년 7월에 기주목이 된 원소를 막도록 했다.(선주전, 조운전) 전해가 청주자사가 된 것은 191년 11월이므로 유비가 별부사마로서 전해와 붙어 다니게 된 것은 이 때 이후로 보인다.[17] 한편 이때 유우가 천자로 추대되자 유우가 거부했는데 한복이 원술에게 서술을 보내 유우가 황제 위에 오를 것이라는 도참을 쓴 적이 있다. 후세 학자 가운데서는 이를 후에 유비와 조비가 각각 황제가 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유우 문서 참고.

어쨌거나 유비는 거듭된 전공을 세워 시험삼아 청주 평원군의 수평원령(守平原令)이 됐다가, 후에 영평원상(領平原相)[18]이 된다(선주전). 이 시점부터 자치통감에 유비의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자치통감의 191년 10월 기록에 '당초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식의 표현을 붙이면서 유비의 출신이나 배경, 생김새와 성격,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운과의 관계가 서술된다. 자치통감에선 유비가 노식과의 인연으로 공손찬에 의지했다고만 나오고, 원소를 막기 위해서 전해와 붙어 있었던 게 아니라,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초 전해와 함께 청주를 순시하게 했는데 공로가 있으므로 평원상(平原相)으로 삼았다고만 나온다. 어쨌거나 평원상이 된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평원군은 기주 바로 옆에 있는 군으로 213년부터 기주의 영역이 되지만 당시에는 청주에 속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었을 땐 원소가 기주목이 된 후인데(공손찬전) 따라서 그는 원소를 최전방에서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공손찬 밑에 있던 조운과 처음 만나 조운이 유비를 수종했는데 당시엔 그냥 면식 관계였다가 점차 서로 간 정이 더해져 조운이 형의 상을 당해 물러났을 때는 서로 손을 맞잡고 후일을 기약하기도 했다.(조운전 조운별전)

한편 원굉의 《후한기》에 따르면 이보다 이른 시점인 191년 7월에 공손찬이 유비를 평원상에 임명했다고 하는데, 어느 쪽 기록이 맞든 간에 공손찬은 190~191년경에 자신의 군에 들어온 유비가 관우, 장비 등과 함께 단 시간 내에 많은 전공을 올리고, 또 동문이라고 매우 중용하였던 것 같다. 바로 1~2년 사이에 평원상이 되고 자신의 주 전력인 오환호기까지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유비의 전공에는 원래 임무인 원소 견제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실제 선주전과 조운전을 교차 검증하면 전해가 청주자사가 된 191년 11월 이후부터 유비가 전해, 조운 등과 함께 기주목 원소를 막기 위해서 활동했다는 것이 교차검증 되기 때문이다. 아마 간헐적인 교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1년 11월 공손찬이 황건적 30만을 상대하여 엄청난 전공을 올렸을 때 청주-서주에서 북상하던 황건적을 상대로 평원군 근처 발해군 경계에서 싸운 것인 만큼 유관장이 여기에서 공을 세웠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위서(魏書)》에는 이 시기의 유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때 인민들이 굶주리자 떼 지어 모여 노략질하고 사납게 굴었다. 유비는 밖으로 도둑질을 막고 안으로 재물을 풍성하게 베풀었다. 사(士) 중의 아랫사람이라도 필히 자리를 같이하고 같은 그릇으로 함께 먹으며 가리거나 고르는 일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유비는 청주 평원군에서 관리로 지냈을 때부터 상당한 행정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이며, 치안을 바로잡고 덕을 베풀고 재물을 풀어 아랫사람과도 평등하게 자리를 같이 해 많은 사람들의 인망을 얻어 귀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당시 화북 사정이 막장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비가 평원상을 지냈을 때 평소 유비를 깔보고 불쾌해 하던 군민 유평(劉平)이 유비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하지만 그 자객은 유비를 만났을 때 유비가 심히 후대하자 유비를 찌를 수 없어 실토하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청주 북해국(北海國)의 북해상(北海相) 공융은 황건적의 침입을 받자 유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비는 당대의 명사였던 공융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만 한 인물이 자신을 알아줬다고 기뻐하고 삼천 병력을 태사자에게 보내서 도와줬다.

그 뒤 원술원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192년) 조조유표는 원소에게, 도겸공손찬은 원술에게 가담하여 대규모 국지전을 벌였다. 유비는 연주자사공손찬에게 임명된 선경, 서주 도겸과 함께 싸우게 된다. 유비는 자신의 임지인 청주 평원군 고당현(高唐縣)에 주둔하면서 원소, 조조와 싸워 패배한다.(192년 겨울 무제기) 이는 공손찬이 192년 12월 용주[19]에서 원소와 격돌하여 또다시 크게 패한 전투(후한서 원소열전, 자치통감)와 연속적으로 벌어진 전투로 보인다.

후한서》 <공손찬열전>에 따르면 공손찬은 계교 전투 이후(192년) 자신을 추격한 최거업의 병력을 무찌르고 남진, 각 군현을 공략하면서 평원까지 이르렀다. 이후 청주자사 전해를 파견하여 제(濟) 땅을 점거하였다.[20] 원소공손찬을 공격하니 유비와 전해는 동으로 가 제(齊, 청주 제국)에 주둔했다.(삼국지 선주전) 이에 원소는 다시금 수만 명을 보내 전해를 공격했다.(후한서 공손찬전)

자치통감》은 '원소는 공손찬이 설치한 청주자사 전해와 2년을 잇달아서 싸웠는데 병사들이 지치고 아울러 양식도 다하여 서로 백성들에게 약탈하니 들에는 푸른 풀이 없었다. 원소가 그의 아들 원담을 청주 자사로 삼으므로, 전해가 그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태복) 조기가 왔으므로 공손찬이 이에 원소와 화친하고 각각 군사를 인솔하고 물러났다.'라고만 적어 전해군과 원소군의 전투 지역인 제국과 유비의 참전 여부를 서술하지 않았고 그래서 얼핏보면 이 기록은 유비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21] 또 원소군과 전해군의 2년간 전투가 끝난 시점을 193년 1월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때 이미 유비가 여러 사서에 이름을 남기고 있으므로 대략적으로 《후한서》, 《정사 삼국지》의 내용과 함께 종합하자면, 계교 전투가 끝난 이후인 192년의 어느 시점에 전해와 유비가 제국으로 가서 원소군과 싸우다가 유비만 192년 겨울에 고당현으로 이동하여 원소-조조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고, 그동안 제국에선 전해-원소 양측 병사가 싸움의 끝에 피폐해지고 식량도 다해 백성들을 약탈하는 가운데 원소가 새로 청주 자사로 삼은 원담과 전해의 전투가 있었으며, 193년 1월의 휴전협정으로 모든 전투가 종료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치통감》은 원담이 청주로 간 시기를 193년조에 적고 있지만 사실 이게 명확하지 않다. 원담을 청주로 내보내는 조치에 반대했던 저수의 일화는 삼국지, 후한서, 원굉의 후한기, 자치통감에 모두 기술되어 있으나 그 삽입 시점이 모두 제각각이다. ① 『삼국지』 원소전: 공손찬이 역경에서 망한 후(199년), ② 『후한서』 원소열전: 헌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탈출할 즈음(195년), ③ 『후한기』: 원소가 병사했을 때(202년) 初라는 표현을 붙여서. 『자치통감』 역시 동일.

이는 진수범엽이나 원굉이나 사마광이나 '원소가 원상을 총애하여 원담을 청주로 내보내는 조치에 대한 저수의 전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면서도 그 시기는 정확히 몰라 적당한 부분에 서술해두었다는 뜻이다. 즉, 원담의 파견에 대해선 다들 정확한 시점을 몰랐다는 뜻으로, 원소가 병사했을 때(202년) 원담의 파견에 대하여 '初(당초)'라는 표현을 붙인 자치통감 역시 시기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일단 전해가 제국으로 가고 원소군과 2년간 싸운 것이 계교 전투 후인 192년 이후란 것은 확실하다.[22]

다시 《자치통감》 기록의 원전인 《후한서》 <공손찬열전>을 살펴보면 '이후 청주자사 전개(전해)를 파견하여 제 땅을 점거시켰다. 원소는 다시금 (전해가 주둔한 제국으로) 군세 수만을 보내어 전해와 2년에 걸쳐(192년[23]~195년 사이, 193년 1월부터 적어도 동년 3월까지는 공손찬과 원소가 휴전 중인 시기) 전투를 벌였으나, (싸움 끝에) 군량이 다하여 사졸은 지쳤으며, 서로 백성을 약탈하였으므로 들이 황폐해져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라고 한다.

후한서》 <공손찬열전>에는 '원소는 이후 자식 원담을 청주자사로 삼아 파견하였으나, 전해는 그와 싸워 패하여 귀환하였다.'라고 하여 전해가 193년(공손찬이 유우를 사로잡은 해와 같다.) 원담과 싸워 패하여 귀환했다고 썼지만 자치통감은 단지 이기지 못했다고 썼다. 어쨌거나 유비와 전해가 193년 이후에도 청주에 머물면서 도겸을 구원하러 갔으므로 후한서 공손찬전의 전해 귀환 시기 서술은 오류가 맞다. 다만 이 부분은 '싸워 패하여 귀환하였다(敗退還)에 '後'를 문장 앞에 붙여서 '이후에 싸워 패하여 귀환하였다'(後敗退還)라고 하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어쨌거나 실제 전해가 귀환한 시점을 따져보면, 흥평 말엽~ 196년(후한서 공융열전)에 유비의 추천으로 공융이 청주 자사로 천거되었고 조기가 흥평 말엽(후한서 조기열전)[24]에 손숭을 추천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공교롭게도 공융손숭이 천거된 시기가 같은 것으로 보아, 전해는 후한서 기록대로 흥평 말(195년 무렵)에 청주로 파견된 원담에 의해 축출되어 귀환했다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25] 이렇게 볼 경우 194년 여름에 있었던 조조의 2차 서주침공 때 전해가 도겸과 유비를 구원하지 못한 것이 설명되는데 194년 여름부터 195년까지 2년간 원소군과의 전투를 벌이다 원담의 참전으로 축출되어 서주 구원전에 참여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보면 딱 맞아떨어진다.[26]

어쨌거나 《후한서》 〈조기열전〉에 따르면 '(이 당시) 원소·조조는 공손찬과 기주를 다투고 있었다. 원소 및 조조는 조기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함께 군사를 인솔해 수백 리 앞에서 봉영(奉迎)했다. 조기는 깊게 천자의 은덕과 전을 세워 백성을 안심시킬 합당한 이유를 말하고 또 공손찬에게 편지를 보내 이해를 말했다. 원소 등은 각각 군사를 이끌고 떠나며...(중략)' 라고 쓰여있어 192년 겨울 전투 이후 곧바로 쌍방이 화친(193년 1월)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고당현에 있던 유비도 공손찬 휘하였으므로 싸움을 멈추고 청주 제국으로 군사를 물렸을 것이다. 공손찬이 화친을 깬 게 193년 3월 즈음이므로 이때부터 유비도 그해 가을까진 전해와 함께 다시 원소군과 싸웠을 것이다. 다만 본격적으로 원소의 반격이 시작된 건 동년 6월쯤이므로 원소군과 싸우는 시간은 더 짧았을 것이고 청주 공손찬 세력의 우두머리 전해가 직접 서주 구원을 위해 내려올 정도면, 아예 서주를 구원할 때까지 원소 세력의 공격은 미약하거나 없었을 가능성도 많다.

원담 등장 이전까지 원소 세력은 청주에선 평원군 일부에만 세력이 미치기도 했고, 191년경 청주자사 초화의 사망 후 그 후임으로 공손찬은 전해를, 원소는 장홍을 각각 추천하고 각축을 벌인다. 그런데 192-3년경 원소가 장홍을 동군태수로 뺀 것은 아주 잠시 청주에서 발을 뺐다고도 볼 수 있다.

유비는 북방의 유주 출신이었고 공손찬의 휘하였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자연스럽게 하북 일대에서 활동했다.

2.4. 서주 군벌 시절

이후 도겸조조가 맞붙던 도중 조조의 부친인 조숭이 도겸의 경내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 다음 해 가을에(193년 가을) 조조는 서주를 공격하여 도겸을 공격하였으며 10여 개 성을 점령하고 사방에서 도륙질을 했으며, 다음 해(194년) 2월까지 이어서 학살을 벌인다.(서주 대학살 참고) 팽성에서 패하고 담성에서 버티고 있던 도겸은 이에 동맹 관계였던 공손찬 휘하의 청주자사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194년 2월, 전해는 이에 응하여 서주로 내려온다.

이때 함께 내려 온 유비는 거기서 백성들과 군사를 모았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서주에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이는 서주 대학살 당시 다른 주로 도망치지 못하고 낙오된 난민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데, 사실 이건 신야성 탈출 당시 10만 명과 비슷한 일에 더 가깝다. 당시 유비군도 상황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굶주린 수천 명을 거두어서 먹여살리고 전장터에서 그들의 보호까지 한다는 것은 오히려 짐짝이 늘어나는 격이다. 규모만 다를 뿐 유비가 신야 탈출 당시에 보였던 그 담력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보였던 것이었다.

유비는 전해와 함께 그를 따르는 병사 천여 명과 잡다한 오환의 기병들을 데리고 내려왔다.(선주전) 향후 풀 한포기들도 없는 북방의 진흙탕이 될 청주를 떠난 것이다. 이후 전해가 돌아간 후에도 유비는 북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겸의 세력권에 든 예주 패현(소패)에 그대로 머무는데 도겸은 유비를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는지 그에게 4천 병력을 떼어주고 표를 올려 그를 예주자사로 삼는다.(선주전) 조조의 군대 역시 전해가 와서 도겸을 구하려고 하기도 했고 마침 식량도 떨어져 귀환한다.

훗날 위의 구품관인법을 제정한 진군예주 영천군(穎川郡) 출신의 호족으로 예주자사 시절 출사해서 유비의 부하로 있었다. 이때 유비는 서주를 아우를 생각이 있었는데 진군은 그것을 꿰뚫어보고 "원술여포 때문에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서주로 가지 마십시오."라고 반대를 표했다. 후일 진군은 유비가 여포에게 패해 달아날 때 피란민이 되어 야인으로 지내다 여포 사후 조조에게 등용되어 위의 관료가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여름(무제기), 조조는 순욱정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공격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켰고 낭야국, 동해군까지 공략하면서 가는 곳곳마다 다 부수고 없애면서 학살을 벌인다. 유비는 담현 동쪽에서 조표와 함께 조조와 맞서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한다.(무제기) 그 뒤 여포가 조조의 배후를 급습하여 조조가 회군한다.[27]

이때쯤 유비의 부하였던 전예가 고향에 있는 모친의 연로함을 이유로 유비를 떠나게 되었는데 유비는 본인이 공손찬 휘하에 들어올 때부터 스스로 유비를 섬긴 전예를 보내면서 눈물을 흘렸고, 그대와 큰일을 같이 할 수 없게 되었다며 매우 아쉬워했다.(전예전) 이후 전예는 위나라에서 대활약을 펼치게 된다.

같은 해(194년) 도겸이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으니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여기서 만약 도겸이 병력을 더해주고 예주자사로 추천해 서주 중앙에서 떨어진 국경 지대에 주둔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면 유비는 서주를 얻는 데 시간을 좀 더 쓰고 민심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여기서 병력을 더해준 건 도겸이 유비에게 해의가 없다는 명확한 의사표시고 서주 중앙에서 떨어짐으로써 서주의 정치 상황에 손쓸틈도 없이 휘말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안심하고 도겸의 진의를 탐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서주 사람들은 유비를 지지했고, 서주 대학살로 많은 호족들이 강동이나 강북으로 도망치는 와중에도 끝까지 서주에 남은 호족들 또한 유비를 서주의 지배자로 추대했다. 서주가 막장인 상태에서 조조같은 거대 군벌이 언제 또다시 서주에 쳐들어와 헬게이트를 오픈시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켜줄 능력자가 필요했다. 서주 호족들이 외부인인 유비를 추대한 것은 유비가 검증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겸이 죽자 그의 유언을 들은 서주 최고의 대부호 별가 미축은 서주의 백성들을 이끌고 유비를 영접했다.

유비는 백성들과 호족들의 추대에도 불구하고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는 명분을 쌓기 위한 겸양과 자신을 서주 호족들이 받아들여줄지에 대한 반응을 확인해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유비는 임시 배속된 용병대장 같은 위치에 불과했고 서주 내부에 기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도겸이 죽을 때 무슨 의도로 그런 얘기를 꺼냈는지조차 알 수 없고 그걸 받아들였을 때 어떤 처지가 될지 확신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공융 같은 유명인사의 추천과 서주 호족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서주 대호족 중 하나인 진등[28]이 "한실은 쇠하고 천하가 위태로운 데 반해 서주는 호구가 백만이라 풍요롭습니다. 대사를 이룰 수 있으니, 부디 사군(유비)께서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등의 말은 거짓말로 서주 대학살이 일어나기 전에는 정말로 그랬지만 서주 대학살로 조조가 서주를 헬게이트로 만들어 당시 서주는 인외마경이었다.[29] 그러자 유비는 사세오공의 명문 출신인 원술이 다스리면 어떻겠냐며 짐짓 겸양의 뜻을 보였다.

진등은 "공로(원술)는 교만하여 난을 다스릴 만한 주인이 아닙니다. 지금 사군을 위해 보기 10만을 모으려 하니, 가히 위로는 군주를 도와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오패의 업을 이루고, 아래로는 땅을 나누어 차지하여 변경을 지키며 그 공(功)을 죽백(竹帛, 당시 기록은 대나무를 쪼갠 것과 비단에 적었기에 나온 말이다)에 남길 만합니다. 만약 사군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사군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외부인이기는 하지만 공융원술이 어찌 나라를 걱정할 사람이겠느냐고 하며 하늘이 유능한 그대에게 서주를 주는 것이니 받으라고 권하며 지지를 표했다. 그렇게 내외적인 지지를 확인한 유비는 서주 군벌이 되어 여포가 서주를 빼앗는 196년까지 다스렸다. 순욱전에 따르면 이 시기 조조가 연주를 여포에게 빼앗기고 서주를 다시 치려 했는데 순욱이 반대하며 도겸이 비록 죽는다고 해도 서주는 망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패배를 거울 삼아 결의를 맺고 단결하고 있다고 했으며 보리를 거두면서 성을 굳건히 하고 들을 비워 열흘도 안 되어 10만 병사들이 궁핍해질 것이라면서 서주 정벌을 반대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서주는 외부의 적에 맞서 유비의 통치하에 일치단결된 것으로 보인다.

진등을 비롯한 서주 사람들은 유비를 새로운 서주의 주인으로 삼는다며 원소에게 사자를 파견했는데, "하늘의 재앙이 서주에 내려 도겸이 죽은후 남은 백성들은 주인이 없어 간웅(조조)이 틈을 타 원소에게 해를 끼쳐 근심이 될까 두려워 옛 평원상 유비 부군(府君)을 함께 받들어 종주(宗主)로 삼아, 백성들이 귀의하고 있다, 지금 도적이 창궐해 갑옷을 풀지 못하니 삼가 하급관리를 파견해 고합니다" 라고 표를 보냈다. 그러자 원소는 "유비는 고아하고 신의가 있어 서주 사람들이 그를 기꺼이 추대하니 실로 내 뜻에 부합하오."라며 하남에서 유비가 서주 군벌이 된 것을 받아들인다.(선주전 헌제춘추) 원소는 유비가 공손찬 용병 시절에 원소군과 싸운 적이 있지만, 한창 싸우는 와중에 하등 상관도 없는 하남의 일을 해결한답시고 하북에서 멀리 하남까지 내려간 시점에서 유비가 더이상 공손찬을 돕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 같다. 원소 입장에선 마침 자기 휘하지만 서주 사람들이 적대하는 조조는 여포와 연주 쟁탈전에 정신없기도 했고 여차하면 경우에 따라 조조가 연주를 완전히 잃으면 조조는 완전히 자신의 휘하로 두고 유비와 손 잡는 수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전에 자기의 적이었다는 이유로 계속 적대한다면 자칫 북쪽의 공손찬, 남쪽의 유비가 전처럼 힘을 합쳐 양쪽에서 압박할 가능성이 높아지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던 이유도 작용했을 거다.

사실 공손찬 문서에도 나오지만 193년 12월 유우 살해 이후 공손찬은 하북에서 급격히 민심을 잃고 유우 주변의 인재들을 숙청하고 사대부를 탄압하는 등 몰락의 시초를 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194년에 벌어진 서주 구원전 이후 유비가 도겸과 서주 사람들을 돕는 겸, 서주로 이주한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공손찬 입장에선 동문이 등을 돌렸으니 배신감이 들 만도 한 일이지만 정황상 유우가 처형당하는 장면을 보거나 가까이에서 소식을 접했을 유비 입장에서는 공손찬이 자기한테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여겼을 테니 아예 서주에서 자기가 있어주기 원한다는 좋은 구실도 있겠다 자신만의 살길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서주 지배자가 된 유비는 할 일이 많았다. 서주 대학살로 인한 피해를 수복해야 했고, 원술이 서주를 노리고 있었으며, 서주는 방어적으로 불리한 땅이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유비를 하나 둘씩 인정해주고 있었고 유비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내정도 금방 안정되어 외부적 요인을 제외하면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한편 유비는 저명한 학자인 진기, 정현과 교류하면서 매번 그들이 가르침을 주어 치란의 도를 모두 언급했지만 사면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기 손건을 추천한 인물이 바로 정현이다. 노식, 유비, 원소 등과 연이 있는 정현이고, 정계에 별 관심 없었다는 정현이, 유달리 유비에게는 세상 다스리는 이치도 가르쳐주고 쓸 인재도 천거해주고 했던데서 뭔가 형주의 사마휘 프로토타입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유비는 이렇게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쳔하를 다스리는 통치술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195년 여름, 여포가 유비에게 의탁한다.

유비는 여포가 온 천하에 유명한 배신의 명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조라는 공공의 적이 있다는 점, 땅을 잃고 원술원소에게 거부당한 상황에서 유비까지 거부하면 여포가 서주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점, 군웅할거 객장 문화에서 유비가 마땅히 거절할 만한 명분이 없다는 점 때문에 유비는 여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유비는 여포를 삼국지연의에서 소패(小沛)로 유명한[30] 예주 패국 패현으로 보낸다.

이후 헌제를 맞이한 조조는 그를 진동장군, 의성정후로 높여준다. 협천자를 막 한 당시의 조조는 내외적으로 수습해야 할 게 많아서 신흥 군벌인 유비까지 적대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진동장군은 조조가 헌제를 받아들이면서 196년 6월에 받은 직책으로 이후 9월에 조조는 대장군이 된다. 따라서 이 일은 196년 9월 이후의 일이다.

196년 가을경 유비는 서주를 노리던 원술과 싸운다. 원술은 "내가 여태껏 유비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는데 뭐하는 놈이냐."라고 무시하지만 유비를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여포를 부추긴다. 이를 보아 유비는 원술을 상당히 밀어붙이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말이 안 되는 게 유비가 서주를 먹은지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라 최소한 2년 전부터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짜 뜻은 유비라는 놈은 어디서 굴러먹던 듣보잡 출신이냐,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정도로 생각된다.[31] 원술은 서주를 공격했지만 유비는 군을 이끌고 우이현과 회음현에서 그의 군을 막았다.

그런데 하비상이자 성문교위를 맡은 조표는 유비의 서주 지배를 반대했다. 여포연주 호족인 진궁은 조표와 결탁해서 하비를 침공한다. 당시 하비는 장비가 지키고 있었는데 장비는 조표와 마찰이 커서 조표가 통수친 원인 중 하나였다. 조표의 모반을 안 장비는 즉시 조표를 죽인다.[32]

하지만 조표로 인해 여포군들은 이미 성에 들어오고 있었고 여포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단양병들만이 저항하고 있었다. 결국 만인지적인 장비조차 어쩌지 못하고 패배하고 여포는 유비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이에 유비는 하비로 돌아왔지만 병사들이 곧바로 궤주하는 바람에 해서(선주전), 서주 광릉군(廣陵郡)(영웅기)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수습해 원술과 싸웠지만 패배한다. 결국 유비는 서주 광릉군 해서현(海西縣)으로 군대를 돌리게 된다.

유비에게 이 사건은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표는 도겸의 구장으로 그가 도겸의 출신 지역 병사들이자 정예들인 단양병을 이끌고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서주 호족이라기보다는 구 도겸 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즉 이 사건은 서주 호족이 벌인 사건이 아니라 유비 이전에 서주 군벌이었던 도겸 세력이 자신들이 아닌 먼 하북에서 온 유비가 서주를 장악한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서주 호족들은 유비 편이었는데 서주 대호족 미축은 자신의 여동생(미부인)을 유비의 부인으로 들이고, 노객 2천 명과 금과 은 및 재물로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보탰다. 이때 유비는 곤란하고 궁핍했으나 미축의 도움에 힘입어 다시 떨칠 수 있게 되었다. (미축전)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는데 영웅기에 의하면 광릉에서 원술에게 패한 후 보급이 어려워지자 유비의 대소관료들과 군사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음력으로 9월경에 진동 장군 직을 받고 곧바로 서주를 여포에게 강탈당했으니 바로 겨울이 닥쳐온 것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와중에도 젊은 시절의 협객 기질은 여전했는지 197년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서 헌제를 잃은 후 막장이 되어 떠돌아다니며 노략질 중이던 양봉한섬을 살해한다. 영웅기의 기록에 따르면 유비의 땅에서 여포의 명으로 이 두 사람이 보리(麥)를 취해 군자금으로 삼았다는데 이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때 유비는 양봉과 면담하기로 하고는 그 자리에서 잡아 죽였고, 한섬은 양봉을 잃자 병주로 달아나다가 장선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된다. (동탁전) 물론 근처에서 알짱거리면서 거슬리게 하는 도적떼 따위를 살려둘 이유는 없지만 말이다.

유비는 서주 광릉군에서 식량 사정이 곤궁해지자 서주 군벌이 된 여포와 화목하였고, 여포가 사로잡은 처자를 돌려받았다. 유비군은 과거 여포에게 내준 곳인 예주 패국 패현, 흔히 소패라 부르는 곳에 자리잡게 된다.

유비가 패현에 머물자 1만 명의 병력이 유비 휘하에 모여들었는데 유비가 서주뿐만 아니라 예주에서도 인망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자기 영지는 잘 다스리는 유비의 특성상 서주뿐만 아니라 소패도 잘 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여포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을 것이며, 유비의 세력이 커진 것을 경계한 여포가 친히 유비를 공격해서 유비는 소패를 떠나야 했다.

2.5. 조조 휘하

유비는 여포에게 쫓겨난 뒤 조조에게 귀순한다. 유비가 조조에게 도착하자 정욱이 유비를 죽일 것을 간언하나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유비를 예주목으로 삼아 예주[33]에 머물게 한다.(선주전) 유비 직속 친위대장을 맡은 걸로 추정되는 진도는 이 시기에 유비에게 사관했다.

유비는 예주[34]에 머물면서 흩어진 병사들을 어떻게든 모으려고 했고, 조조는 유비에게 군사와 군량을 보태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는 패에 머물던 유비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유비가 조조의 도움을 받아 예주 패 땅을 되찾는 데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198년 봄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군이 여포군의 군마를 약탈했다는 이유로 여포가 먼저 선수를 쳐서 고순장료를 보내 패성을 공격한다.(선주전) 이에 유비는 두 번이나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가 수습한 병사들로 몇 달을 넘게 버텼고, 조조 역시 원군으로 하후돈을 보내지만 고순에게 패한다.

결국 9월에 유비는 격파되어 홀몸으로 달아났고 고순 등은 그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이때 선주전 영웅기 주석 원문에 '九月,遂破沛城,備單身走,獲其妻息'라고 쓰여 유비가 처자도, 군대도 챙기지 못하고 대패하여 단신으로 도망갔음을 알 수 있다. 관우와 장비 등은 이후 유비를 따라간 흔적이 보이기에 유비는 혼자 도망치고 나중에 관우, 장비, 간옹, 손건, 미축 등이 합류했다거나 했을 가능성이 높다.[35]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조가 직접 출병한다. 10월, 예주 경계에서 도망친 유비를 만난 후 곧 여포를 공격한다. 유비는 조조군을 따라 서주 하비국(下邳國)을 공격한다. 무제기에서는 여포 정벌의 주체를 일관되게 조조로 서술하고, 선주전에서는 조조가 몸소 동쪽으로 가 유비를 도와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하고, 그를 생포했다고만 나온다. 서황이 별도로 군을 이끌고 여포의 장수 조서, 이추 등을 항복시키고, 진규진등 부자가 광릉의 군사를 이끌고 조조에게 합류하는 와중에 유비의 구체적인 행적은 단신으로 도망쳤다가 예주 양국에서 조조와 만난 후 그를 따라가 최종 목적지인 하비국에서의 행적만 나오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이 당시 패성에서 유비가 얻은 병사 상당수는 원래 조조가 보태준 병사들이었고 유비가 단신으로 도망하여 간신히 조조군에 들붙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병력없이 소수 측근과 함께 조조군 진영에서만 머물렀을 가능성도 높고, 실제 수습했다고 해도 유비 휘하의 직속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여포가 붙잡히고 유비는 처자를 되찾았다. 여포의 처우를 결정할 때 여포가 비굴한 태도를 보이며 유비를 현덕이라고 부르며 살려달라고 빌자 조조가 처음에는 웃으며 왜 명사군(유비)에게 애원하냐며 맥이다가, 여포가 조조에게 "명공(조조)은 보병을, 자신은 기병을 지휘하면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물어보니 조조는 고민과 의심에 빠진다. 이때 조조가 유비에게 의견을 물어보자 유비는 조조에게 "명공께서는 여포가 정 건양동 태사를 섬길 때 모습을 못 보셨습니까?"[36]라면서 여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죽일 것을 암시했다. 그러자 조조는 여포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후한서 여포열전에서 여포는 유비를 노려보며 "귀 큰 놈이 제일 못 믿을 놈이다!"라고 말하며 목이 매달린다. 한때 여포빠들과 촉까들이 이 부분을 들먹이며 유비를 음흉한 위선자라고 비난했는데, 연의나 정사나 갈 곳 없던 걸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받아줬더니만 빈집털이라는 빅엿으로 보답했으며, 이후에도 트집을 잡아서 재건을 시도하는 유비를 박살내서 유비는 서주 대학살 시절 적이던 조조에게 의탁하고 말았다. 따라서 유비가 여포를 용서하는 것은 그야말로 호구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만큼 여포에게 쌓인 감정이 결코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단순히 감정 때문에 여포를 죽였다고 할 수 없는데, 여포는 그 인성과 돌머리와는 별개로 기마술이 뛰어난 맹장이라서 조조라는 먼치킨 휘하에서 통제받으며 활동할 경우 두고두고 유비를 괴롭힐 가능성이 높아서 후환을 없앴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로 되돌아온다. 조조는 유비에 대한 예우를 매우 두텁게 하였는데, 심지어 나갈 땐 유비와 같은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유비는 허창으로 돌아와 좌장군이 되었고 조조는 유비에게 경의를 표하고, 대단히 중히 여겼다. 또한 관우, 장비 두 사람도 중랑장이 되었다. 조조의 모신 정욱곽가는 유비를 살해하자고 권하였으나, 조조는 뛰어난 인물들의 신용을 잃는 것을 우려하여 허락지 않았다.

조조는 조정에 표를 올려 좌장군으로 삼는다. 조조에게 얻은 좌장군 직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좌장군 영 사례교위 // 삼주목 의성정후'(한중왕 즉위 표문)라는 유비의 직함 중 처음 오는 관직일 정도다.

좌장군직은 간단한 관직이 아니다. 조위 최고의 무장인 오자양장 모두 사방장군에서 더 올라가지 못했다. 실지로 좌장군은 장합우금의 커리어 하이[37]였다. 물론 대장군, 거기장군, 표기장군, 위장군이라는 사대장군이 품계상 위다. 하지만 사대장군으로 가면 무관이라고 볼 수 없는 권력 중추로 1인자와 국정 운영을 면밀히 논의해야 하는 위치다. 당장 조조부터가 원소에게 태위를 주고 자신은 실권을 가진 대장군을 먹으려다가, 결국엔 원소에게 대장군까지 양보하고 자기는 거기장군이 되었다. 사방장군은 사정장군/사진장군 보다 품계상 위인데, 국경을 책임지는 전선 사령관 급인 사정장군과 사진장군은 군벌이 난립하는 후한말부턴 서량의 마등 같은 지방 군벌을 달래는 용도로 전락한 상태였다.[38]

원소가 중국 최강의 세력으로 건재하여, 코앞의 하북에도 지배권이 닿지 않았던 조조 정권의 사정을 고려하면 좌장군이라는 직책은 조조가 유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책을 준 것이다. 당시 유비의 나이는 삼십대였고, 유비가 조조에게 귀순한지도 얼마되지 않았고, 조조군 내에서 눈에 띄는 공적을 올린적도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특이한 부분이다.

물론 장군직은 항상 능력/커리어로 주는 건 아니고, 이런저런 정치적 고려가 따른다. 유비는 반원소의 대표 주자였던 공손찬의 휘하였고, 도겸이 예주자사로 올린 바 있으며, 한때나마 서주라는 하나의 주를 다스렸던 인물이다. 그런 부분들을 '예우'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공손찬은 원소에게 줄곧 밀리며 패망 직전이었고 군벌로서의 근거지였던 서주는 2년 만에 여포에게 빼앗겨 빈털터리 신세로 맨몸으로 조조에게 의탁한 비참한 신세였다.[39]

이게 단순한 예우성 관직이 아님은 바로 드러난다. 조조는 전날의 공손찬이나 뒷날의 원소, 유표처럼 유비를 적극적으로 써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황제를 참칭한 한 황실의 '에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 0순위였던 원술 토벌을 위해 조조는 유비에게 군대와 부장까지 딸려 파견했다. 나중에 곽가와 정욱이 왜 그랬냐고 조조를 들볶는데 이는 곧 유비에 대한 우대가 조조 본인의 의지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것과 비교할 만한 케이스가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군벌이었던 마초의 높은 위상과 입지를 고려해 오른팔 관우(전장군) 바로 밑이자 왼팔 장비(우장군)의 바로 위인 좌장군에 임명한 것이다. 그런데 왕의 신분으로 사방장군을 임명한 유비와 달리 조조는 이때 왕이나 공, 승상도 아닌 사공의 직위에 있었다. 태위였던 조조가 (자기 부하로 쓰고 싶은) 유비한테 자기를 위협할 위치인 표기장군, 거기장군 자리를 받아줄리가 당연히 없다는 걸 생각하면 조조 입장에선 자기가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을 얻어다 준 것이다.[40] 얼마나 조조가 유비를 탐냈는지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조조는 허도로 되돌아 와 표를 올려 유비를 좌장군으로 삼고 그에 대한 예우가 더욱 중해졌는데 평소 출행할 때 같은 마차에 타고 같은 자리에 앉았을 정도로 유비를 중히 대했다. 보통 조조에 대해선 관우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시초는 유비였던 것이다. 심지어 논영회에선 조조는 유비를 '사군(使君)'으로 높여주는 한편, 반대로 자신은 '이 조조(操)'라고 본명을 불러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조조가 유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유비가 이 얘길 듣고 얼마나 당황했을지 알 법하다.[41][42][43]

결국 조조는 '좌장군' 유비를 군부의 2인자까진 아니더라도, 여하튼 일군의 사령관으로 (유비와의 연회에서 스스로가 영웅은 자신과 유비 둘뿐이라고 인정했듯이) 그 능력을 인정하고 유용하게 써먹을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까놓고 말해 이것만으로도 이미 유비는 난세에나 가능한 벼락출세를 한 거고, 이대로 그냥 눌러앉아 적당히 활약했어도 명장으로 열전에 남았을 것이며 여기서 만족하기만 했어도 조조의 부하와 조위의 개국공신으로서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선주는 포부가 크고 굳세고, 너그럽고 후하고 사람을 알아 보고, 선비를 잘 대우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임금과 신하 관계의 지극히 공정함은 고금의 아름다운 본보기다. 기지와 임기응변, 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진수

그러나 유비의 야심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고 때마침 천자인 헌제가 기획한 의대조 사건이 터지면서 유비는 조조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다.[44]

하지만 조조의 그릇이 유비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평판을 생각할 때, 이들의 결별은 피할 수 없던 걸지도 모른다. 당장에 진수부터 "유비는 항상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였다. 조조와 하는 행동의 반대의 행동을 하여 세력을 구축하여 대항하였다. 이러한 유비의 행동은 그가 조조에게 대항하여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보다는 조조가 자신을 받아들일 그릇이 아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때 조조가 유비를 실질적으로 중용하려고 통 크게 내려준 좌장군 자리는 결국 조조에게 등을 돌린 유비에게 한나라 중앙 조정의 권위를 업혀준 꼴이 되어 유비가 조조와 대항할 때 잘 써먹었다. 유비가 조조를 벗어난 시점부터는 유비의 좌장군 직함은 일종의 간판으로서 자신의 정무조직을 마음대로 운용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45][46]

이것이 잘 증명된 것이 적벽대전 때다. 손권은 당시 조정 관직상으로는 토로장군에 회계태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지방 토호에 지나지 않는 손권이 대놓고 조조와 맞서는데 필수 불가결한 명분이 바로 유비였다. 물론 조조의 권위는 어마어마했지만, 한실 종친 + 중앙에서 정식으로 제수한 좌장군 + 헌제에게 조조를 치라는 밀명을 받은 유비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중앙 정부의 지역 토후 진압' 정도로 정의될 간단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좌장군이라는 굵직한 직함을 달고 있고 의대조 사건으로 한층 권위를 부여받아 황제의 인가를 받은, 한실의 수호자이자 반 조조의 상징이 된 유비가 손권과 손잡자 상황이 달라진다. 손권과 노숙, 주유는 유비를 앞세워 원소가 처음 만든 프레임을 재활용한 '황제를 쥐고 한실을 농단하는 역적 조조에게 맞서는 정당한 싸움'으로 만들었다. 제갈량이 오나라의 손권에게 유세할때 유비는 한 왕실의 후예인 만큼 조조에게 항복할 수 없고 손권이 유비가 아니면 조조에게 대적할 수 있는자는 없다고 한것도 이런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이용해서 손권은 조조의 프레임에 맞설 수 없다는 이유로 항복을 주장한 양주 호족과 서주 호족의 의견을 묵살시키고 조조와 적벽에서 싸우게 된다. 적벽대전 당시 유비도 적극적으로 싸웠지만 무제기에서 조조가 상대한 적을 '유비'로 기록하고 정작 쳐들어간 손권, 주유는 거론도 안 하는 건 이 때문이다. 다만 싸움 당시 양주 호족이 손권을 안 도와줘서 유비 병력과 주유 병력이 각각 2만으로 동일했기 때문에 양주 군벌에 지나지 않는 주유보다 전국구 명성을 가지고 있는 유비가 우선시된 측면도 있다.[47]

그리고 이렇게 반평생 잘 써먹은 좌장군 인수는 '한중왕 즉위표문' 올리는 김에 첨부로 딸려보내 반납해서 유비의 조조 상대 티배깅의 절정을 찍는다.

여담으로 이후 조조가 원상, 원희의 목을 보낸 공손강을 좌장군에 임명했기에 중앙조정상에선 유비의 직위는 이미 사라졌긴 했다. 하지만 인사 정보가 전산망으로 컨트롤되는 시대도 아니고 도장 주웠다고 황제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 시대니, 정식으로 자리를 반납한 것도 아닌 유비 입장에서는 응 무효~ 하면서 그러든지 말든지 무시하고 계속 좌장군 관인을 쾅쾅 찍어댔을 것이다.

실제로 유비의 좌장군부는 이후에도 쭉 계속 운영되었고, 애초에 동연도 일족 자체가 황하 이남 사람들은 들어볼 일도 없는 북녘 땅 반 독립세력에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들이다. 어차피 유비랑 손 잡는 사람들 모두 반 조조인 이상 '나 믿을 거야, 유 좌장군 믿을 거야' 식이었을테니 역시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직함의 힘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서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나 장관같은 공식 직함이 절대적인 것은 한반도 이남 영토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조조, 정확히 말하면 그가 조종하던 한 황실의 권위는 자신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서조차 권위가 한계가 있었다.(이는 조위가 점령지역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인구를 지니고 있었단 점을 보면 명확하다) 조조가 아닌 유비를 지지하는 세력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훗날 관우와 제갈량의 북벌 당시 이들에 호응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난 반란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조의 영토 내에서도 이 정도인데 그 밖에서는 그를 따르는 이가 더욱 적을 것이고, 이런 반조조파들이 그가(조종하는 황실이) 새로 임명한 인사를 새 좌장군으로 인정할 리가 만무하다.

실제로 원상이 잡혀 죽은 뒤인 유비의 형주목 취임 때도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주유전)이라고 쓰고 있고 입촉 때도 '성도가 평정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고 좌장군부(左將軍府)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서좌장군부사 署左將軍府事)'(제갈량전) 한중왕표에도 '(한중왕에 올랐으니) 좌장군과 의성정후의 인수를 반환합니다'(선주전)라고 썼다. 진수조차 주변 군벌이나 부하들, 유력인사들이 유비를 실제 좌장군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비의 가치에 대해 고찰해보면
이 무렵 조공(曺公)이 선주(先主)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과 이 조조(操)[48]본명을 불러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조조가 유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유비가 이 얘길 듣고 얼마나 당황했을지 알 법하다.]뿐이오. 본초(本初)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이다.”

선주는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비저(匕箸)를 떨어뜨렸다.

- 촉서 선주전-

당시 조조가 유비에게 가진 감정은 논영회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조가 유비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수하에 넣어 대업의 한 축으로 잘 써먹으려다가 유비에게 속은 것. 정욱곽가가 유비의 뭘 믿냐면서 유비 기용을 반대하고 오히려 죽이자고하 할 때도 밀어붙일 정도였다. 물론 유비가 처신을 잘 해서 조조가 껌뻑 속아넘어간 것도 있기는 하지만. 후일 조조가 이통이나 장패 등의 반독립 군벌을 중용하면서 이들을 유용하게 썼던 것을 생각하면, 유비의 '쓸모'는 그 이상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즉 저들보다 넓은 서주의 영토를 한동안 호족들과 백성들의 인심까지 한 몸에 얻어가며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정치, 군사 지도자로서 성장한 유비를 일종의 유니크 레어 카드로 보았다 할 수 있다.

유비의 군사적 능력은 당대 제일은 아닐지언정 분명 우수한 지휘관이자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군인이었다. 군웅할거 시대 유비가 의탁한 사람 내지는 힘을 빌리려던 자들인 공손찬, 도겸, 조조, 원소, 유표, 유장 모두 유비 세력을 최전방에 보내서 적을 방어하는 일을 맡기거나 맡기려고 했다.

유비는 열악한 시절에도 관우장비, 진도미축같은 양질의 장교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특히 관우장비는 이때부터 이미 군웅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유비 하나를 관리해 이들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꽤 매력적인 미끼였다. 유비에게 강경한 입장이었던 주유도 부귀영화로 유비의 눈을 멀게하고, 자신이 관우와 장비를 다루면 패업을 이룰 수 있다고 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즉 유비는 요즘 말로 하면 '우수한 용병단 두목'이었고, 유비 세력은 '당대 제일가는 신용도의 용병단'이며, 유비를 받아들인 군벌들은 '용병 고용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비는 당대 제일가는 신용도에 걸맞게 최전방 용병으로 활동하며 (조조와 유장을 배신한 사례를 제외하고)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나머지도 싸움이 끝난 다음 도망친 경우는 있어도 싸우는 중에 배신하진 않았다. 당시 원소가 아직 잘 나가던 시절로 원소와의 싸움을 준비하던 조조가 어디로 보내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비 세력을 우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조조는 생전 호족들에 대한 학살과 숙청도 곧잘 벌여서 호족들에게도 평판이 좋은 편이 아닌지라 서주 침공 당시 본거지 연주 호족들이 조조의 뒷통수를 친 전적이 있고, 조위는 5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상상 이상으로 많은 호족 반란을 겪어야했다.
물론 이런 장점들은 모두 유비가 조조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그 때문에 당시 조조는 장비와 미축을 비롯한 유비의 수하들에게도 높은 관직을 내리고, 특히 장비는 하후씨와 혼인시켜 인척으로 삼는다.[50] 이는 조조가 유비 세력을 와해하는 것과 더불어 유비 세력들 개개인을 자신의 수하로 부리고자 했던 목적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부하들은 죄다 유비가 조조를 배신할 때 유비를 따라가서 무용지물이 된다.

아무튼 이렇게 쓸모가 많으니 조조 입장에서는 유비를 어디다 부려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런 유비를 포섭하기 위해 좌장군직까지 덥썩 내주고 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조조에게는 그저 희망회로로 끝났다. 유비는 부탁받은 대로 원술을 죽이자마자 이제 볼일 끝났다면서 자신의 뒷통수를 쳐서 서주를 장악하고, 2개월 만에 유비를 서주에서 내쫓았더니 원소에게 빌붙어 관도대전 때 양동작전을 맡아서 예주가 뒷통수를 치게 만들고, 유표에게 빌붙어 쿡쿡 찌르고, 손권과 협력하여 적벽에서 본인을 꺾고, 남형주와 익주를 차지한 후 한중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한중왕 참칭 등 마지막까지 자신을 방해했다.

이렇게 우대했으니, 후일 조조가 배신을 당했을 때 유비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을지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조는 주령이 유비를 서주에서 놓쳤다는 이유로 갑질을 할 정도다. 한편 1세대 군벌 최후의 생존자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조조는 자신의 생애에 유비를 자신의 맞수이자 최후의 적으로 인정했다. 손권의 경우에는 "아들을 둔다면 그만 한 인물을 둬야 한다."라고 한 점에서 맞수보다는 자기 다음세대의 인물로 인식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뭔 이유가 있든 유비는 당시 조조 밑에서 잘 지냈고, 장패에게 사신으로 보내어 자신을 배신한 장수들을 인도할 것을 요구하는 임무를 주기도 하였다.(장패전)

그러던 중 유비는 헌제의 밀조를 받은 동승과 만나 황제의 밀명을 받들게 되고 이에 몰래 동승, 왕자복, 충집, 오자란 등과 조조를 죽일 것을 공모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유비는 원술 토벌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 실패할까봐 도망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엄연히 '때 마침 사명을 받아 실행하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선주전), 유비가 출정한 것은 199년 6월, 동승이 처형당한 것은 200년 정월로 약간이나마 시간차가 있다.

유비의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유비는 그 명분을 이용할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유비 자신에게 조조를 죽일 만한 힘도 없는 데다 정말로 조조를 죽인다고 해봐야 유비 자신이 분노한 조조 일파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어찌되던 몸 성히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테니까. 게다가 호시탐탐 헌제를 노리는 세력(원소나 유표, 손책 등)까지 끼어들기라도 하면 다시 한번 난리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조조와 사냥을 나갔을 때 관우가 조조를 죽이는 게 어떻겠냐고 하는 것을 유비가 말리기도 한다.(관우전)

이후 어느 날 유비는 조조에게 불려나오고 역사적인 대화가 오간다.
이 무렵 조공(조조)이 선주(유비)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유비)과 나 조조 뿐이오. 본초(원소) 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

선주는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비저(수저)를 떨어뜨렸다.
- 선주전
이때 곧바로 천둥 벼락이 치자 유비가 조조에게 말했다.
"성인(聖人)이 말하길, '빠른 천둥과 거센 바람에는 필시 낯빛을 고친다.'[51] 하셨으니 실로 그러합니다. 한바탕 벼락의 위세가 가히 이 정도군요!"
- 선주전 주석 화양국지
공(조조)은 스스로 실언했다고 후회했다.
- 화양국지 유선주지

화양국지》에서는 유비가 동승 일행과 공모한 이후 논영회 일화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유비가 동승 일행과 함께 공모한 이후 조조가 부른 것으로 묘사하여 유비의 위기감을 증폭시킨다.

3. 방랑기

3.1. 2차 서주 점거

건안 4년(199년) 6월, 세력이 쇠락하여 망해가던 원술원소에게로 가려고 하자 조조는 유비, 주령, 노초에게 군사를 딸려보내 하비에서 원술의 길을 막아 공격하게 하였다.

논영회 이후 조조는 사람을 풀어 유비를 감시하였는데, 《화양국지에》 의하면 유비는 그러한 사정을 알아채고는 밭에서 를 뽑으며 소 일을 보냈고,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유비에 대한 경계를 풀어버렸다. 그날 밤, 유비는 원술을 치려는 명목으로 조조에게 군사를 받아 떠났고 이후 다시는 조조의 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조를 껌뻑 속아넘기고 농락할 정도면 유비의 처세술과 연기력은 진짜로 대단했던 모양.

어쨌든 이 때문에 유비는 의대조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하남으로 내려갔지만 유비의 진짜 목적을 생각한다면 애초에 허도에서 같이 일을 꾸미는 게 아니라 서주에서 공모하는 쪽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 후 이 소식을 들은 정욱곽가, 동소가 유비를 놓아주면 안 된다고 진언하고 나서야 실수를 알아챈 조조는 유비를 추격하게 하였으나 때를 놓쳐 유비를 풀어주고 만다.

유비는 원술이 원소에게 가지 못하게 방해했고 원술은 우회해서 가려다 도중에 죽는다.

유비는 원술이 죽자 서주자사 차주를 공격하여 죽이고 서주 하비국을 점거하여 서주를 되찾는다.

참고로 서주는 본래 항우의 본거지였던 팽성국이었지만, 서주 대학살로 인해 팽성국이 행정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도겸 시절부터 주요 지점을 하비국으로 옮긴 상태였다. 그 때문에 유비가 서주 군벌이었던 시절에도, 여포가 서주 군벌이었던 시절에도 하비국이 중심이었다.

이때 조조가 같이 파견했던 주령은 유비가 하비를 점령하자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돌아오는데,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이후 주령은 유비의 일로 열받은 조조에게 화풀이 대상으로 갑질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유비 입장에서는 알 바 아니고, 주령이 조조의 부하가 된 시기가 서주 대학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동정 가치도 없다. 그렇게 유비는 조조에게서 벗어나 독립 군벌로 재기한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유비가 패(沛)의 관아로 돌아가자, 조조가 유비를 엿보게 하여, 유비가 바야흐로 파(蔥)를 찢으며, 하인에게 이를 하게하나, 바르지 못해, 바로 지팡이를 들어 그를 때림을 보였는데 조조는 안심했는지 "귀 큰 녀석이 아직 이를 깨닫지 못했구나." 라고 했지만 유비는 그날 밤, 급히 동쪽으로 갔다. 정욱과 곽가가 다시 이를 말해, 조조가 말을 달려 그를 추격하게 하나, 미치지 못했다. 유비가 마침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배반했다.

이후 유비는 관우에게 하비를 맡기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조조의 군벌 본거지가 연주, 예주 다수, 사례 일부고 협천자 명분으로 건립한 허도가 행정구역으로 예주 영천군 허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조조와 맞서기 위해 일부러 접경지역에 머무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나서면 중요 후방지역을 관우에게 맡기는 신뢰는 훗날 유비가 익주를 차지할 때 형주를 맡긴 것에서도 드러난다.

유비가 서주를 점거하자 서주 동해군창희가 모반하고 서주의 군현 대다수는 조조를 배신하고 유비의 편을 들었으며 그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다. 첫 번째와 달리 조조와 손잡고 서주 군벌이었던 여포를 죽인 뒤 조조를 배신하고 조조가 임명한 서주 자사를 몰아내고 무력점거한 것이었다. 심지어 유비는 (물론 배신했지만) 그 서주 대학살의 주범인 조조와 손을 잡았던 적이 있다. 이럼에도 서주의 군현 대다수가 조조를 배신하고 유비의 편을 들었다는 것은 그의 지지 세력이 서주에 얼마나 튼튼히 자리잡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서주 대학살이 벌어진 지 겨우 육칠여 년, 학살 후유증이 여전했으니 처음만큼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불구대천지원수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조가 서주 대학살을 감행하였고 그 이후에도 기필고 서주를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도 서주의 풍족한 생산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생 동안 유비가 내세운 이데올로기는 일대를 차지할 때 사람의 인심을 얻은 뒤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처음 서주를 넣을 때는 물론 형주와 익주를 차지할 때도 이러한 수순을 거쳤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습점거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서주 군현들이 곧바로 전향한 것을 보면 단순한 기습점거가 아니라 사전에 현지 세력과 치밀하게 기획된 프로젝트라고 보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이는 유비가 서주 민심을 잘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그 사이에 여포와 조조의 치세를 거쳤고 유비의 서주 지배 기간이 2년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서주를 잘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유비가 옛 도겸의 부하들인 조표와 단양병들의 배신으로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일부의 여론'이었을지언정 '절대다수의 여론'은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유비는 조조와 손잡고 여포를 죽였음에도 그로 인한 서주의 불만이 없던 것을 보면 여포가 서주 군벌이었던 시절 서주를 잘 못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좋았냐면 그것도 아닌 게, 조조가 유비를 용서할 리가 없고 서주는 방어에 취약한 지형이었다. 거기다 서주 대학살도 아직 피해가 수습되지 않은 판국이었다. 유비는 기껏 손에 넣은 본거지를 잃을 수는 없기 때문에 부지런히 밑바탕을 깔았다. 원술의 하북으로 가는 길을 차단해 사실상 말려 죽인 뒤에 서주를 점거한 것은 원술이 세가 약해졌다지만 변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가능성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유비는 손건을 보내 조조보다 세력이 강한 하북 군벌인 원소와 동맹을 맺어서 조조를 견제했다. 원소도 조조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비에게 기병을 보내서 군사적 지원을 했다.(선주전, 원소전) 기록은 없지만 조조와 싸우는 동안 다른 군벌이 쳐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 가장 강대한 군벌인 원소와의 동맹은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허도의 동승같은 반 조조세력과 연줄을 유지해서 자신이 조조와 싸웠을 때 뒷치기를 하거나 최소한 조조 본거지를 흔들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조조와 유비의 세력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는 만큼 불리하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서주를 겨우 7개월 만에 조조의 침공으로 잃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비는 자신의 불리점을 최대한 상쇄하기 위해서 여러 긴밀한 움직임을 펼쳤고, 조조를 속아넘긴 것부터 시작해서 서주 장악과 안정에 이르는 이러한 판짜기 능력은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아무튼 유비는 예주 패국 패현에 머물면서 조조를 견제하고 있었고 조조는 유대왕충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지만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유비에게 이들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유비는 이들을 격파하고 "조조가 직접 온다면 모를까, 너희들이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헌제춘추)

영웅기》에는 '조조와 유비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했는데 유비가 원소에게 비밀을 흘렸고 원소는 조조가 (아마도 원소) 도모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조는 스스로 혀를 깨물어 피가 흐르게 하여 실언에 대한 후세의 경계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밀스러운 얘기를 했다는 점, 조조 스스로 실언했다고 생각했다는 점, 그게 또 하필이면 대놓고 조조가 원소를 저격하는 발언이었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 기록은 논영회 일화를 유비가 원소에게 흘림으로서 원소가 자신을 도모할 뜻을 품은 조조를 공격하게 할 마음이 들게 만들려는 시도로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유비가 서주에 다시 복귀한 다음 원소와 동맹을 맺어 조조를 견제하던 199년 후반에 있었던 일을 기록했던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일화는 유비는 사소한 일화 하나하나까지 오로지 조조를 대적할 마음으로 철저히 이용했다는 얘기로 볼 수 있다.

3.2. 서주 상실과 원소에게 의탁

5년(200년) 봄 정월, 동승 등의 모의가 누설되어 모두 형벌을 받아 주살되었다. 공이 장차 친히 동쪽으로 유비를 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바야흐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가시려 하니, 원소가 이를 틈타 우리 배후를 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이 말했다, "무릇 유비는 인걸(人傑)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오. 원소는 비록 뜻은 크지만 사세를 살피는 일에 더디니 필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자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쳐서 깨뜨리고 유비의 장수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 무제기
건안 5년(200년), 조공이 동쪽으로 선주를 정벌하자 선주가 패적(敗績, 대패)[52]했다 - 선주전
건안 5년(200년) 태조가 동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전풍이 원소에게 태조의 배후를 습격하라고 설득했으나, 원소의 자식의 병 때문에 사양하고 허락지 않으니, 전풍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치며 말하길

"무릇 만나기 힘든 기회를 만났는데, 어린 자식의 병 때문에 그 기회를 그르치다니, 애석하도다!"

라 했다. 태조가 이르러 유비를 격파하니,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삼국지 원소전
건안 5년. 좌장군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패(沛)[53]에 의거하며 조조를 등졌다. 조조는 이를 두려워했으며 장차 직접 유비를 칠 준비를 했다.

이에 전풍이 원소에게 말하길.

"공(원소)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조조입니다. 지금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유비를 치려 하는데, 이때 군사를 이끌고 뒤를 습격한다면 한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군사란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원소는 아들이 병을 앓고 있다며 이를 거절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전풍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했다.

"슬프다.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한낱 어린아이의 병 때문에 잃으니 정말 아깝구나."

원소가 이를 듣자 크게 화를 냈고, 나아가 이로 인해 전풍을 싫어하게 되었다.

조조는 원소가 황하를 건너는 것을 두려워 했으므로,이에 급하게 유비를 쳐서, 마침내 그를 깨뜨렸다.
후한서 원소전
건안 5년(200), 조공(曹公, 조조)이 동쪽을 치자 선주는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삼국지 관우전
태조가 처음 원소를 정벌할 때 원소의 병력이 강성했으나 우금은 선봉이 되기를 자원했다. 태조가 이를 장하게 여기고 보졸 2천 명을 주어 이끌게 했다. 우금은 연진(延津, 황하 나루터. 진류군 산조현 북쪽)을 지키며 원소와 맞섰고 태조는 군을 이끌고 관도(官渡)로 돌아갔다.

유비가 서주를 들어 모반하자 태조가 동쪽을 정벌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는데 우금이 견수(堅守)해 함락시킬 수 없었다. 또한 악진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원소의 별영(別營)을 들이치고, 연진 남서쪽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하내군 급현, 하내군 획가현의 2현에 이르기까지 보취(保聚) 30여 둔영을 불사르고 적군을 참수하고 사로잡은 것이 각각 수 천에 이르렀고, 원소의 장수 하무(何茂), 왕마(王摩) 등 2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삼국지 우금전

200년 정월 임오일(9일) 동승, 왕자복 등과 계획했던 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동승이 처형된다.(의대조 사건) 조조는 사건 주모자들과 더불어 동승의 딸이자 헌제의 후궁인 동귀인(당시 회태 5개월이었다고 한다)까지도 교살한 뒤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대패해서 또 처자와 하비에 있는 관우도 못 챙기고 도주한다.(선주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유비는 '설마 원소가 있는데 조조가 오겠어?' 라고 생각하다가 조조의 대장기만 보고 달아났다고 하는데 사마광은 통감고이에서 "유비가 필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음을 헤아리니, 위서는 매우 터무니없다."라고 평가했다.[54] 후한서 원소열전에 따르면 유비가 서주를 장악하자 조조는 이를 두려워했으며 장차 직접 유비를 칠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원소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이 때가 기회이니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라는 전풍의 조언을 무시하였다. 결국 원소가 구원하지 않아 유비는 패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비의 주력이 격파되고 하비에 고립되어 있던 유비의 심복 관우는 곧 조조가 하비를 쳐서 사로잡힌 후 조조가 극진히 대우하여 편장군에 오른다.[55]

당시 원소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고, 조조 세력은 연주예주, 사예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유비서주를 보유하고 있고, 후방에는 형주유표도 있다. 즉, 원소(4), 조조(2.5), 유비(1), 유표(1) 이라는 세력비다. 단순한 전력비를 보면 원소의 우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그러나 사실 원소 문서나 관도대전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원소는 당시 역시 하북의 모든 역량을 장악하진 못했고 협천자 논리를 내세워서 직, 간접적으로 양면 공세를 펼치며 원소세력 외곽부터 잠식해 들어오는 조조를 상대하는 데 힘을 많이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유비를 동맹세력으로 놔두고 조조가 세력을 더 확장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는 선택지도 분명 있었다.

다만 정사 삼국지 우금전에서는 우금이 조조가 본대를 이끌고 유비를 치러 가는 사이 연진 사수를 명령받았고, 배후를 노린 원소에 맞서 견수한 후, 오히려 역으로 악진과 함께 원소의 영향력이 확고하지 않은 하내를 치면서 영웅적인 승리를 이끌었다는 서술이 등장하기 때문에 원소가 배후를 치지 않았다는 통설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원소가 조조의 시선을 서주에서 여기로 다시 돌리기 위해 이 지역을 쳤는데 우금의 결사적인 방어로서 유비를 구원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도 일리가 있으며, 이는 원소의 의표를 찌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기록은 소수 분견대를 통한 원소의 견제 시도로 선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른 기록들은 모두 원소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오히려 원소군이 역습까지 당했기 때문에 우금전의 기록이 사실이라 해도 원소의 본대가 직접 움직인 것이 아니라 소수의 별동대를 통한 견제의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소극적 태도로 유비의 패망을 방관하던 원소가 유비의 망명을 받아들이자마자 한황실 재건을 명분삼아 대대적으로 남하하며 관도대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원소의 관도대전 승리를 전제한다면 원소에게 더없이 유리한 상황이었고, 유비를 원소의 대등한 동맹자로서 한 주를 차지해 정치적 실권을 가진 군벌로 대우해 그에게 지분을 주기보단, 유비 자신이 가진 정치적 실권을 잃고 몸만 간신히 살아남아 원소에게 명분을 바치는 상황을 원소가 의도했다는 해석 또한 충분히 성립이 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아들의 병 때문에 원소가 기회를 포기했다는 설은 과장되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즉, 관도대전을 일으켜 조만간 조조를 치기로 이미 마음먹은 원소는 유비가 그의 명분만을 가져오는 것을 선호한것 같다. 실제로 조조에게 패망한 유비는 겨우 몸만 도망쳐 나와서 원소에게 '명분'을 가져다 바치는 존재로 전락했다. 게다가 설사 조조가 유비를 물리치고 서주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미 조조는 서주 대학살을 벌인 전력이 있어 서주에서 조조의 지배가 확고하게 굳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원소가 유비가 명분만을 가져오는 상황을 고려했다면 이 점도 그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비는 원소의 아들인 청주 자사 원담에게 갔는데 원담은 예주목 유비에게 무재로 천거받은 적이 있었고, 유비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보기를 이끌고 나와 그를 맞이한다.(선주전) 원소는 자신의 도시 에서 200리 밖까지 나와 유비를 직접 마중하였고 위서에 따르면 유비가 원소에 귀부하자 원소 부자가 마음을 기울여 공경하고 중히 대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이 시기 유비가 반 조조 세력의 상징 격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뜻한다. 연의에선 아예 헌제의 밀명에 대해 언급하며 유비를 한의 충신이라 부르며 맞이한다. 또한 원소의 진영에 머무를 때 유비는 마침내 조운을 얻는다.[56] 그 와중에 대패로 다 흩어져 달아났던 유비의 병사들이 한 달 남짓 지나자 어떻게 알긴 알았는지 점차 유비에게 다시 모여들었다고 한다. 유비는 이 와중에 은밀히 조운을 보내 무리를 모으게 해 수백명을 얻었는데 이들이 모두 좌장군 유비의 부곡이라 칭했으나 원소는 이를 알지 못했다.

관도대전이 일어나자 원소는 문추를 파견해 조조를 공격하게 했고 유비는 이때 문추와 함께 5~6천의 기병을 이끌고 조조와 싸웠지만 문추는 조조의 치중을 방치해 이용한 계략에 걸려 병력 통제에 실패해 사망하고 유비는 후퇴한다.
汝南黃巾劉辟等叛曹操應袁紹,紹遣劉備將兵助辟,郡縣多應之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를 따르자 원소는 유비를 보내어 병사들을 거느리고 유벽을 돕게 하니, 군과 현에서 대부분이 그에게 호응하였다.[57]
자치통감 63권
劉備略汝、穎之間,自許以南,吏民不安,曹操患之
유비가 여수, 영수 사이의 지역을 '경략'하자 허현으로부터 이남 지역의 관리와 백성이 불안하였으므로 조조가 이를 근심하였다.
자치통감 63권 한국어 번역
曹操與袁绍於官渡交戰,汝南郡黃巾餘軍劉辟等响應袁绍叛曹,袁绍便派劉備率軍與劉辟會合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교전하자 여남군 황건잔당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역하여 원소에게 호응했고 원소가 유비에게 편승한 무리를 통솔하게 하고 유벽에게 무리를 모으고 합치게 했다.
중국어 위키백과

이후 유비는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하는 동안 여남으로 보내져 허도를 공격한다. 예주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은 원씨의 본적지라서 원소에게 호응한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후방 교란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즉 양동 작전.

자치통감》에 따르면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란하고 원소에게 붙었고 원소는 유비에게 장병을 딸려보내 유벽과 함께 다수의 군현을 호응케 했다. 조인전에 따르면 원소가 유비를 보내 허도 바로 밑인 예주 여남군 은강현 등 여러 현을 돌며 많은 무리를 일으켜 호응하게 했다. 한편, 이 시기 관우는 백마 전투의 선봉으로 수많은 병사들 사이를 돌격하여 원소의 명장 안량을 찔러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원소의 장수들을 모조리 압도하여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푼 것으로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했는지[58] 조조가 보냈던 물품들을 모두 봉인하고 편지를 조조에게 써서 보낸 뒤 그를 떠나 유비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하북에서 사례를 통해 예주까지 가는 동안 조조군은 뭘 한 건지 두 번이나 유비가 예주 여남군을 오가면서 저지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유비가 일생 동안 도주를 여러 번 하면서 단 한 번도 붙잡힌 적이 없을 정도로 위험지대를 피해서 돌아다니는 것에 능숙한 인물인 만큼 단순히 적군이 자신을 공격하기 힘든 곳만 다녔을 수도 있다. 생애 전반기 기록을 보면 의외로 유비는 예주에 머문 적이 많아서 지리를 잘 알았을 것이고. 여하간 쉽지는 않은 일이기에 미스터리하다. 강을 타고 갔다는 추측도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시기 유비는 낙양 북쪽 맹진항을 통해 조조의 배후를 크게 돌아간 뒤 예주 여남군에서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유비는 원씨 고향이 있는 여남군, 그중에서도 헌제가 있는 허도 바로 남쪽에서 중점적으로 활동하며 양동작전을 훌륭히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주의 거의 전역이 원소의 편을 들고 조조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는 조조의 의대조 사건같은 만행들로 인해 예주 호족이 조조에게 반심을 품은 상태에서 원소가 그걸 놓치지 않고 유비를 보내 자신이 만든 한의 역적 조조 프레임을 공고화시킬 명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유비가 허도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설치는 것을 근심했다. 허도는 행정구역상 예주 영천군 허현이기 때문에 예주가 거의 다 등을 돌린 상황에서 허도가 함락되기라도 하면 협천자 프레임도 잃고 원소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인이 "유비가 새로 원소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병을 이끌어 유비를 패주시키고(조인전) 유비는 원소에게로 되돌아간다.(선주전)

조인에게 패해 돌아온 후 유비는 은밀히 원소를 떠나고자 했다. 이미 관도대전 전부터 원소 몰래 조운을 통해 병사들을 모으고 있었던 유비다. 언제고 간에 다시 독자 세력을 구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단 얘기. 거기다 원소는 유비가 서주에서 패퇴하고 명분만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을 땐 수백리 앞에서 유비를 마중했지만, 그전에 유비가 엄연히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별개의 군벌이었을 때는 동맹관계면서도 되도 않는 아들 병 핑계 대면서 사실상 도움을 주지 않을 거라고 천명한 인물이었으니 자신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태도를 바로 바꿀 인물이 원소라는 건 유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당시 원소가 겉으론 아직 강대한 세력이었지만 관도대전의 패배에서 보이듯이 세력 내적으로는 심각하게 균열이 가고 있었음은 만천하에 드러난 상태였고 유비는 옆에서 그걸 직접 확인까지 했다.

그런 이유로 원소가 명분을 위해 유비를 이용했듯이, 유비도 명분을 바쳐줄 가치가 떨어진 원소를 버릴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조조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선 원소 세력은 조조의 샌드백으로 두고 자신은 허도와 가까운 유표와 인접한 여남으로 가서 그의 지원을 받아 천자가 있는 허도를 노리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유비는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원소가 이를 받아들여 다시 여남으로 파견된다. 그리고 이후 유비는 다시는 원소에게 돌아가지 않았다.[59]

원소가 유비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공도 등과 합쳐 그 병력이 수천명에 이르렀다. 조조는 채양을 보내 공격하지만 "설령 우리 군세가 불충분하다고는 하여도, 너희들이 설령 백만 병력을 끌고 왔다고 하여도, 나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조맹덕이 단신으로 온다면 내 스스로 물러나겠다만은!"라고 말하며 전사시킨다.(화양국지)

그런데 말이 씨가 되었는지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한 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조조의 본군과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해서 손건, 미축유표에게 보내 형주로 망명한다. 형주는 서주 대학살 당시 서주에서 형주로 도망친 피란민들이 많은 지역으로 유비가 인망을 얻기 유리한 곳이었다. 결국 그중에서 유비 일생일대의 파트너를 발굴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 결정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버린 결정이었다.

3.3. 유표에게 귀순

유표는 직접 교외에서 유비를 영접해서 상빈의 예의로 대우하고, 군사들을 보태어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게 했다. 그러나 유비에게 귀부하는 형주의 호걸들이 날로 많아지자 유표는 유비의 마음을 의심해 은밀히 그를 방비했다고 한다. 유표가 이렇게 유비를 맞은 것은 원소 이후 '조정을 장악한 역적 조조에 맞서라는 황제의 밀명을 받고 역적에 대항하는 한실의 종친' 유비의 명분론을 이용할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조조가 조정을 장악하고 중앙 정부로서 유표에게 순순히 따를 것을 요구하는 시점에서 조정의 이름을 걸고 형주 지배의 당위성을 확립했던 유표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유표는 칭제를 생각했던 듯도 보이지만 원술의 선례를 의식했는지 황제 비스무리한 흉내는 내면서도 결국 칭제하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는 있겠으나, 꽤 효과적이었던 원소의 선례를 따르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국 형주의 호족들, 그중에서도 유표가 처음 형주에 왔을 때 그를 지탱해 준 양양의 대호족 괴씨, 채씨 일족들 같은 호족 세력 상대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채씨 일족을 대표하는 채모 같은 인물은 조조의 친구일 정도로 당시 유표를 지탱하던 세력들은 친조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표는 유비가 형주에서 인심을 얻어 형주의 여론을 장악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조조의 협천자 프레임을 깰 유일한 인물이 유비 뿐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크게 의지하는데, 영웅기에 나오는 유비의 형주자사 겸임 기록이나 유표가 유비와 계략을 논하거나 연회를 가지는 기록이 꽤 나오는 것을 봐도 유표 입장에선 유비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표전>에 따르면 원소와 조조의 대결 전에 장사태수 장선(張羨)이 유표를 배반하였는데, 유표는 포위한지 몇 년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장선이 죽자, 그 아들 장역을 세웠다. 유표는 결국 장역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남으로 영릉, 계양, 북으로 한천을 거두어 땅이 수천 리에 이르고 병력이 10여만에 이르렀지만 원소가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어도 그저 한수와 장강을 점거해 시세를 관망했다고 한다.[60] 유비는 이런 유표의 강대한 세력을 이용해 조조의 후방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 같다.

유표와 조조가 충돌했던 박망, 호양, 무음 등의 한수 이북 형주 지역은 허도와 지근 거리에 닿아 있기에 유표가 배후를 공략할 경우 이는 조조에게는 무척 심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유비가 이런 최전방 지역인 신야에 배치되고 박망 등에서 조조군과 부딪친 것만 보더라도 유표가 유비를 어떻게 이용하려고 했는지 볼 수 있다. 실제로 유표는 몇 차례의 호기를 맞이 하기도 했지만 조조의 배후를 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유비가 제안한 호기를 이용한 계책을 쓰지 않은 걸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건 그만큼 '대조조 대항용'으로서 유비의 입지가 형주에서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비는 이렇게 형주에 여러 해 머물렀다. 이 시기는 평생 전 중국을 좌충우돌 떠돌아다니면서 싸웠던 유비의 인생 가운데 몇 안되는 평온한 시절이었지만, 유비 개인으로서는 만족스러운 세월은 아니었다. 한번은 일찍이 유표와 자리를 함께 했는데, 일어나 측간에 갔다가 넓적다리 안에 군살이 붙은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자리로 돌아온 뒤 유표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유비에게 물었다. 유비가 말했다, "제 몸이 항상 말안장을 떠나지 않으니 넓적다리 살이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지금은 다시 말을 타지 않으니 넓적다리에 군살이 올랐습니다. 나이는 공연히 먹어가는데 공업(功業)을 아직 세우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슬퍼했습니다."(구주춘추) 이 일화에서 생겨난 고사성어가 바로 비육지탄.

또 연의에도 나온 유명한 에피소드인 괴월채모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한 적로의 일화도 이 시절에 나온 것이다.[61](세어) 손성은 '주인과 손님에 입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사이가 더 벌어졌을 텐데 말도 안 된다'고 깠지만 학경의 경우 '유표가 사람들이 귀부하는거 보고 은근히 경계했다며? 그럼 괴월, 채모가 참소하는 게 혹시 있어서, 이 단계의 급작스런 일을 망언이라 여기지 않을 수도 있지'라고 했고 나관중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연의에 이 에피소드를 집어넣었다.

이때 조조는 유비가 유표와 함께 배후를 칠까 매우 염려하였는데[62], 곽가가 나서서 유표가 유비를 쓴다면 그를 제지하지 못할 것이고 그를 안 쓰면 쓸모없어질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안심시킨다.(곽가전) 그런데 203년에 조조가 여양에서 원상과 대치하고 있을 때 유표의 명령으로 유비가 북침을 한 적이 있었다. 조조는 급히 하후돈이전을 보내 유비를 막게 하였는데 유비는 하루아침에 둔영을 불태우고 떠났으며, 하후돈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고 하는데 이전이 매복을 의심했음에도 하후돈은 듣지 않고 우금과 함께 그를 추격하였고 유비는 복병이 있는 곳으로 유인해 그를 박망파에서 격파한다. 이전이 구원병을 이끌고 당도하자 유비군은 철수한다.(이전전)

조조가 오환족과 싸울 때를 틈타 유비는 허도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지만 유표는 듣지 않는다. 유표가 나중에 유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유비는 '뭐 언제라도 다시 기회가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하고 넘어갔다고(한진춘추).

물론 속은 꽤나 쓰렸을 것이다. 당시 조조는 대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중에 현지에서 영입된 토착 세력가 전주의 존재를 배제할 경우 이미 패배가 확정적이었던 상황이었고, 전주의 안내에 따른 행군 과정도 중간에 길이 끊겨 산을 뚫고 계곡을 메우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물을 찾지 못해 말 피로 연명하며 전멸의 위기를 겪는 등 험난한 도박의 연속이었기에 후에 원정을 말린 사람들에게도 조조가 상을 내린건 뭔가 느낀 것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당시 유비가 이런 점을 간파하고 이런 진언을 할 만도 한 게 유비는 유주 출신이고 조조가 맞서고 있던 그 오환족과 싸우던 공손찬 휘하에 있었으며 스스로도 오환기병을 거느리고 싸운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 지역 사정과 그로 인해 조조가 겪을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전주가 개입하지 않았거나 하다못해 유표가 유비의 말을 들었다면 중원의 세력구도 자체가 바뀔 수도 있었다.

이 와중에 유비는 서서의 추천으로 삼고초려를 통해 마침내 제갈량을 얻고, 둘의 관계를 스스로 물고기와 물에 비유하면서 수어지교라는 고사성어도 만들어냈다.(제갈량전)

3.4. 적벽대전

208년, 《영웅기》에 따르면 유표가 병에 걸리자 유비는 영형주자사(領荊州刺史)로 올랐다.[63] 한편 원가를 멸망시키고 하북을 평정한 조조는 마침내 형주를 공격하였고, 때마침 유표가 세상을 떠나면서 차남 유종이 뒤를 잇는다. 유종의 대신들[연의]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유종은 처음엔 거부한다. 이때 부손이 유비를 언급하며 설득한 과정이 볼 만하다.(유표전)

부손은 유종더러 그와 유비가 누가 더 낫냐고 질문하고 유종은 내가 유비보다 못하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부손은 조조를 유비더러 막으라고 해도 힘든데 유종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만일 유비가 조조를 막아낸다면 형주는 유종의 것이 아닌 유비의 것이 된다고 말한다. 결국 유종과 형주 수뇌부는 조조군에 투항할 것을 결의하게 된다.

이 대화를 통해 유표의 가신들, 정확하게는 양양의 괴씨, 채씨 일족들이 가진 유비에 대한 경계심을 엿볼 수 있으며, 사실 유비가 형주 인심을 서서히 얻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이런 심리가 불거질 만도 했다. 단적으로 유비가 신야에 있을 때 많은 형주의 호걸들이 그에게 귀부해서 유비를 유표 측에서 경계했다는 것도 그렇고, 가만 봐두면 형주는 유비가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은 유표 측이나 다른 세력에서도 은근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웅기》에서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하게 했다는 기록이나 물론 신빙성은 없다고 배송지가 부인하긴 했으나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를 맡기겠다고 했다는 말이 퍼졌을 정도면 유비가 장차 형주를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 당시 형주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사실 하북이 평정된 이상 그 다음은 무조건 형주와 강동이 될 수밖에 없었고 반조조 입장이 전반적으로 강했던 형주민의 입장을 고려해 봤을때 조조가 내려와서 싸우게 되면 그 반동으로 형주 최전방에 있던 조조의 아치에너미 유비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유비가 이전부터 형주민들의 인심을 얻어가던 것과 함께 조조와 맞서기 위해 형주민과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유종 대신 형주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게 부손의 말이었던 것이다. 이를 봤을 땐 유비의 형주장악은 필연적인 위협으로 유종이나 채씨, 괴씨 세력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 유비는 당시 평판이 괜찮았던 유표의 장자 유기를 후원해 채씨 일족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는데[65] 이것은 장자이자 후계자로서 결격 사유가 전혀 없는 유기를 통해 인심을 얻는다는 면에선 매우 효과적이었다. 확실히 인망에 따라 움직이는 유비의 성향이 또 한번 드러난 일인 셈. 유종과 채씨 일족이 유비에게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항복을 결의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대로 두었으면 형주의 인심은 유비에게 쏠렸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 당시 형주의 선비들과 백성들은 유기가 박대당하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 아파하였고 사람들은 채모가 유종을 돕고 유기를 모함했던 까닭에 이를 책망하며 그를 천시, 경멸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괴씨나 채씨가 당시 유표세력을 만들어 준 양양의 대호족이라고는 해도 여기서 나오는 '선비들'이나 '사람들'로 대표되는 다른 형주의 호족들이나 백성들이 유기에게 동정적이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다면 그 뒤에서 유기의 후원자 포지션을 잡고 있으면서 동시에 반조조 세력의 상징으로서 호걸들이 날로 귀부하는 등 인심을 얻어가던 유비는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당장 채씨의 사위이자 괴씨의 처남이 유비 세력에서 핵심 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당장 유비가 유종을 크게 부르고 강릉으로 떠날때 유종이 아무 말도 못하고 두려워 했던 것이나 유종 좌우 주위의 측근뻘 되는 사람들, 그러니까 호족들과 백성들 등 양양에 있던 형주 사람 대부분이 자신들의 주군 유종을 버리고 단지 성밖에서 유종을 불렀을 뿐인 유비에게로 우르르 몰려가 귀부하고, 유종과 채씨 세력은 그걸 전혀 막지 못했던 장면은 조조가 타이밍 좋게 유표가 죽을 당시에 곧바로 형주로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형주의 상황이 장차 어떻게 되었을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일 수 있다. 이후 손권에게 노숙이 형주에 은의를 베풀지 못하였으니 (형주 여론을 장악한) 유비를 방패로 삼자고 한 부분이나 위에서 설명한 친 유기, 반 유종-채모 여론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유표가 죽을 무렵이면 유표와 연대해 형주를 지배하던 양양의 친 조조세력 괴씨, 채씨 등을 빼곤 형주의 호족들과 백성 다수가 강하로 내려간 유기와 전방에 주둔하던 유비에게 기울었고 이는 심지어 채모의 근거지인 양양의 호족들과 백성들마저 조조에게 항복을 기습적으로 결정한 유종과 채모를 비롯한 채씨 세력을 버리고 유비에게 귀부하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쨌거나 유종은 결국 조조에게 투항하고 형주를 들어바치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9월 조조가 신야에 다다르자 유종은 항복하고 부절을 바쳤다. 당시 조조 진영에서는 속임수가 아니냐는 제장들의 의견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누규가 다들 왕공으로 높이는데 유종은 부절을 바쳤으니 지극정성이라고 했고 조조는 진군한다. 이 결정이 최전선에서 조조와 대치하고 있던 유비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조조가 남하하여 완성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유비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싸울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66]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종은 유비에게는 감히 알리지 않았는데 유비는 시일이 지나고 마침내 깨달아, 친한 이를 파견해 유종에게 물었다. 유종이 송충에게 유비에게 이르러 뜻을 밝히게 했다. 이때는 조조가 완에까지 진군한 상태였다.[67] 유비는 이런 소식에 크게 격분했는데, 그 이유는 조조가 이미 코앞에 있고 조조에 항복한 형주와 조조 본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유비군은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분노하여 '경들이 이처럼 일을 만들고도 서로 알리지 않다가 화가 닥쳐서야 나에게 알리니 심하지 않은가!'라고 송충을 칼로 겨누며 '경을 죽여도 분을 풀기 어려우나 대장부가 떠나는 마당에 죽이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외치며 내쫓아보내고 부하들과 작전을 논의한다.

<선주전> 주석 《한위춘추》에 따르면 어떤 이는 유종과 형주의 관원을 위협해 남쪽 강릉으로 데려가 농성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유비는 '유형주(劉荊州, 형주목 유표)가 죽을 때 내게 고아를 맡겼으니, 신의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구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오. 죽은 뒤 무슨 면목으로 유형주를 만나겠소'라고 거절한다. 기록으로 보면 유표는 유비를 아들들의 후견인 격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일 유기와의 합류는 유기 입장에서도 후견인 격인 유비의 합세로 더 버틸 힘이 생겼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형주 사람들이 유기를 동정하였으며 유비가 유기와 이전부터 연결되어 그의 후견인 격으로 있었던 것도 유비가 형주 사람들의 인심을 잡는 데 영향을 주었다 판단할 수 있다.

거기다가 유종 세력 내부에서조차도 양양의 괴씨, 채씨 같은 친조조 세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진춘추》에서 나오길 유종이 항복한 후 "조조는 이미 장군의 항복을 얻었고 유비는 달아났기에, 필히 해이해져 방비를 하지 않을 것이니, 가벼운 무장으로 단기로 나갈 것입니다. 만약 제게 뛰어난 병사 수천만 주셔서, 험준한 곳으로 요격하면, 가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를 사로잡으면 위엄은 천하에 진동하니, 앉아서 범처럼 걸어나간다면, 중원이 비록 넓다 한들,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 평정할 수 있으니, 다만 한번의 승리만을 거두어서 금일 보전하여 지키는 게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기회는 만나기 어려우니 놓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유종의 장군 왕위가 한다.

이 발언에서 몇 가지를 알아낼수 있는데 첫째, 유표가 생전에 조조에 대한 투항을 거부했던 것처럼 유기와 유비뿐만 아니라 친조조 세력인 채모, 괴월 등에게 추대받아 형주를 이어받은 유종 세력 내부에서조차도 반조조의 기류가 분명하게 존재했다는 것, 둘째, 당시 유종이 조조군에 항복했어도 정예 수천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런 군세를 요청할 만한 위치에 있는 장군이 반조조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즉, 유종 세력 내부에서도 물주인 양양의 괴씨, 채씨 호족들 외에 조조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세력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유종의 급작스런 항복으로 덩달아 항복했던 유표의 부하 관리와 군사들 대부분이, 적벽대전 이후 패했다해도 아직 황제의 권위를 등에 지고 있는 조조를 버리고 손권도 아니고 유기의 뒤에 있다가 그가 죽자 자연스레 그 세력을 흡수한 반조조 세력의 상징 유비에게 귀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실제로 조조가 내려오자 형주의 인심은 유종보다 유비를 따랐던 것도 사실이고, 왕위 같은 이가 했던 발언과 더불어 항복한 유종 세력에서도 유종의 후원자들이 작당해 벌인 기습적 항복에 어쩔수 없이 수긍했을 뿐이지 반조조 세력이 상당했고, 이걸 유비가 대안이 되어 모조리 흡수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당시 유표의 옛 부하들을 받아들이는데 수가 워낙 많아 유비가 다스리던 치소 공안이 좁아 손권에게 땅을 청구했을 정도다.

유비는 바로 출발하여 양양을 지난다. <선주전> 본전에는 제갈량이 이때 유비에게 양양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 권했지만 유비는 차마 그럴수 없다고 거절한다. 유비가 무리를 거느리고 떠나서 양양을 지나다가 말을 세우고 유종을 불렀는데 유종이 두려워하여 일어날 수 없었다. 유종의 좌우 사람들과 형주 사람 대부분이 유비에게 귀의했다.
무후(武侯)가 융중에서 선주를 위해 계획하며, 형, 익을 점유하라니, 선주가 그 말을 매우 훌륭하게 여겼다. 즉 촉이 형, 익 2주를 얻고자 하며, 마음에 새겨두며 주의 깊게 생각함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건안 13년, 조조가 유표를 남으로 정벌했다. 유표가 죽어, 그의 자식이 형주를 가지고 항복했다. 무후가 선주에게 유종을 공격하면, 형주를 가질 수 있다고 권했다. 진지의 제갈량전에선 그의 계책을 기재하지 않았으나 선주전에는 보태어 보이니, 선주가 유표가 탁고한 이유를 들으며 이르길 “나는 차마 할 수 없다.”라 했다. 위, 진 사이에 이 일을 의논하며, 대략 모두 습착치의 견해와 같아, 모두 선주를 옳다 여기며 무후를 바르게 보지는 않았다. 공연이 쓴 한위춘추에서, 깊이 그를 위해 숨기며, 곧 사서의 글을 바꿔 “어떤 이가 권했다.”라 적어, 무후의 계책이 아니게 했다. 배송지주, 통감 모두 공연의 설을 옳다고 여겼다. 마침내 정자(程子), 주자는 곧 선주가 공격하지 않은 것을 권도(權道)를 잃은 것으로 여겼고, 후의 논하는 이들은 마침내 선주가 앉아서 알맞은 시기를 놓쳤다며 힘써 책망했다. 대저 한의 토지를 가지고, 적신(賊臣) 조조에게 항복했으니, 유종에겐 공격해도 되는 도리가 있었다. 선주가 말을 멈춰 유종을 부르자, 유종은 두려워 일어설 수 없었으니, 유종에겐 빼앗기 쉬운 형세가 있었다.

형, 익을 취함은 융중에서 계책을 정해서, 선주는 일찍이 형주에 대한 뜻을 잊지 않았다. 탁고로 인해 차마 하지 못했다는 건, 기껏해야 영웅이 사람을 속임을 훌륭히 여기는 것으로, 이 미담을 빌려 형주의 인사를 농락한 것일 뿐이다. 유장劉璋이 선주를 부담했으나, 선주는 갑자기 습격해 이를 가졌는데, 선주는 또한 유종을 소중히 여김을 보인 적이 없었다. 형주를 탈취할 뛰어난 재능을 오래 그리워하여, 공격할 수 있는 때를 만났고, 유종을 소중히 여기는 진실한 뜻이 있지 않아, 빼앗기 쉬운 형세에 당면했으니, 당시 형주를 공격하기 적당하지 않다고 간하는 이가 있어도, 또한 군심을 흔들고 미혹케한다고 이르며, 그를 죽이고 드러내 보였다면, 형주를 취하며, 애초에 무후의 권유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이를 권하나 오히려 따르지 않았으니, 이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게 아니라, 그의 뜻이 진실로 조조의 병사를 두려워했을 뿐이다.

조조가 남으로 내려올 때, 병사가 수십만으로, 기염이 매우 강성했다. 선주의 부하 병사는 불과 수천으로, 유종을 탈취함은 어렵지 않으나, 조조를 막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금방 얻고 금방 잃는 자였다면, 어찌 조용히 때를 기다렸겠는가? 선주의 계책은 무르익었다. 그런데도 선주가 공격하지 않음이, 전부 중요한 기회에 어두웠다고 이르는가? 논하는 이들은 또한 조조에게 항복한 날, 형주 인사가 유종을 떠나 선주에게 붙은 이가 10여 만 명으로, 10여 만의 용력을 얻어서, 그 세력이 조조를 대적하기에 충분하기에, 무후에게 이런 권함이 었었다고 이르나, 이 또한 겉은 옳은 것 같으나 속은 그렇지 않은 견해다. 선주가 조조의 병사가 완에 이름을 듣고, 급히 무리를 이끌고 예봉을 피해, 강릉으로 달아나 스스로를 보존할 작정이었으나, 당양(當陽)에 이르러, 조조가 5천 기로 그를 추격하자, 당시 선주는 10여만의 무리를 데리고, 싸우지 않고 저절로 무너져, 처자식도 서로 돌아볼 수 없었으니, 일시적으로 붙어서 따르는 무리가, 조조의 전군을 당해낼 수 있었다고 이름은, 감히 믿을 수 없다. 그런즉 무후의 권고는, 그가 실제로 행한 것이 아닌가? 이는 또한 그렇지 않다. 융중대에서, 이미 형주를 취할 것을 권했는데, 어찌 빼앗기 쉬운 형세가 있고, 공격할 수 있는 때를 만났는데, 그의 주군을 위해 권하지 않았겠는가?

조조가 가을 7월 남으로 유표를 정벌하니, 8월 유표가 죽었고, 자식 유종은 양양에 주둔했고, 선주는 번에 주둔했다. 9월 선주가 병사를 이끌고 달아나, 양양을 지나나, 유종은 이미 조조에게 항복했다. 당시 조조의 군은 오히려 신야에 있었다. 무후가 선주에게 권고함은, 양양을 지날 때로, 양양은 신야에서 오히려 3백 수십 리가 떨어져있어, 4일이 못돼 이를 수는 없었다. 이에 수일 내에, 형주의 각군에 호소해, 형세가 혹시 한번 대적하기에 충분했거나, 설령 대적할 수 없어, 결국 양양을 잃었더라도, 형주는 진실로 유씨의 형주라, 조씨에게 모두 들어가는 것까지는 안 됐을 것이다. 그 후 적벽의 승으로, 오와 땅을 나누며, 이 또한 유씨의 땅을 나눠 오에게 넘긴 거라, 손씨에게 굽히며 이를 취하지 않았다면, 당일 선주가 형주를 취하며 빌린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미래의 어떤 날 손씨가 형주를 의논하며 또한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 마침내 서로 분쟁하여, 각군을 잃고, 대장을 엎어지게 하며, 한번 기회를 놓쳤다고 다시 떨쳐 일어날 수 없었겠는가? 무후에게 사전에 미세한 것까지 알 수 있는 현명함이 있었으나, 선주가 헤아림이 미치지 못했구나.
황이주(黃以周)의 경계잡저 (儆季雜箸) 사설략사(史說略四)에서

청나라 말기의 학자 황이주(黃以周)는 제갈량이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자치하라고 한 게 사실이라고 하면서 유비가 유종을 공격하는 것이 이치에 맞고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조조를 이길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유종을 공격해 차지하고 형주를 규합했다면 조조를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고 후에 형주를 빌린 일로 손권과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대저 형(荊), 익(益)을 점유함이 곧 융중(隆中)의 본래 계책이나, 당일 형세로 이를 헤아리면 아마도 제갈공(諸葛公)은 필시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때 조조가 이미 완에 있으며, 군세가 매우 성대했다. 선주가 체류하던 무리로 틈을 타 타인의 나라를 공격해 설령 유종을 취할 수 있었어도, 조조는 막을 수 있었는가? 선주는 남으로 가 강릉(江陵)을 점거하고자 하여, 사람도 많아 수만이나, 조조가 오천 기로 그를 추격하니, 싸우지도 않고 패하며, 마침내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났으니, 그가 조조를 막을 수 없었음이 틀림없다. 공연의 한위춘추(漢魏春秋) 에서 "어떤 이가 유비에게 유종을 위협해, 형주의 관리를 얻고, 남으로 강릉을 점거하자고 설득했다."라 하며 제갈공의 계책이라 말하지 않으니, 그 말이 옳다. 통감에선 모두 그의 말을 기재하며 진지(陳志)를 따르지 않았으나, 진지의 두 말을 참고해 쓰며, 이르길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가질 수 있다.”라 했으니, 공연의 책에서 “어떤 이가 유종을 위협해 형주의 관리를 얻고, 남으로 강릉을 점거하자고 설득했다."에 근거했을 뿐으로, 유종을 공격해 마침내 형주를 다 가질 수 있었다는 건 아니다. 주자(朱子)가 이를 논하며, 선주가 유종을 공격하지 않았으나 유장을 취해 경권(經權)을 모두 잃었다고 일렀다. 선주가 유장을 공격해 취하면서 옳지 않음이 비롯됐으나 다만 어쩔 수 없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이에 유종을 공격하지 않았으니 즉 진실로 잃었다고 여기지는 못한다. 이는 또한 주자의 확정되지 않은 견해일 뿐이다.
왕무횡(王懋竑)

반면 왕무횡은 유종을 공격하고 양양을 치는 것은 제갈량의 계책이 아니며 이는 공연의 한위춘추 배송지주와 통감 모두 제갈량의 계책이 아니라고 쓴 것이 합당하다고 서술했다, 또 유비가 본래 계책인 융중대가 있긴 했어도 조조를 막을 수가 없어서 유종을 공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썼다.

<선주전> 기록은 유비 일파가 조조가 눈 앞에 닥쳐오고 앞뒤가 적으로 둘러싸인 다급한 상황에서 고민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장 제갈량은 양양을 지나면서 유종을 공격해 (뒤에 있는 후환을 제거하고) 형주를 신속히 장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봤고 어떤 사람은 유종을 위협해 형주의 관원들을 장악한 다음 강릉으로 도망가야 한다 여겼다. 사실 유종의 좌우 사람들과 형주 사람 대부분이 모두 유비에게 귀부하고 채모가 유종을 돕고 유기와 유표를 이간한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하니 유비가 인심을 얻은 걸로 따지면 양양을 얻어 공성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나 유표와의 신의 문제도 그렇거니와 사실 유비가 양양을 점거하면 양양의 대호족 채씨, 괴씨 일족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일이기도 했으며 당장 조조가 언제 올지 모르니 공성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치통감》에선 본전과 《한위춘추》의 설을 고증해 정리하여 '송충을 떠나보낸 후 유비가 부곡을 불러 논의 했는데 혹자가 유비에게 권하길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가히 얻을 수 있다(或勸備攻琮,荊州可得)'라고 했으나 유비가 그러면 자기가 나중에 유표를 어찌 보겠느냐며 거절했다고 기록했다. 자치통감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양양 공격은 제갈량이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최전방에서 고립된 유비는 달아나야 했는데 이때 시간이 분명 지체됨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무덤에 들려 슬퍼하는 등 자신을 따르는 형주 백성들과 호족들의 인심을 얻는 퍼포먼스를 잊지 않았다. 유비가 이러는 동안 신야에 도착해 형주의 항복을 받았던 조조는 강릉에는 군량이나 군대에서 쓸 것이 충분하기 때문에 유비가 이를 점거하여 남형주를 차지할 것을 우려하여 치중을 내버려두고 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유비가 이미 양양을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병 5천을 뽑아 호표기라 하여 하루만에 300리(한나라 시대 1리 = 415.8m 따라서 125km에 해당)를 달려 장판파[68]까지 급히 추격해 이르렀다.

유종 항복 직후 나온 조조와 유비 양대 책사진의 결론은 '강릉을 먼저 선점해야 한다'로 이미 결론이 난 상황이었다. 일단 유비 진영 책사진의 회의 결과 자체는 사적에 확실히 나오고, 또 그렇지 않고서야 유비가 굳이 무리를 나눴을때 관우에게 지정한 최종 목적지를 강릉으로 선정한다는 제스쳐를 취할 필요가 없다. 또 조조군 책사진의 결론이 '유비보다 먼저 강릉 선점'이 아니라면 조조가 유비의 10만 무리를 미친듯이 추격한다음 유비 추격이 실패하자 마자 곧바로 10만 치중을 수습하기보다 강릉 선점을 위해 재빠르게 이동할 이유가 없다.

당시 조조는 후일 위왕 즉위 후 말년의 삽질을 보이지 않는당대 최고의 전략가 중 한 사람이었고 조조군 양대 책사인 순욱순유가 멀쩡히 건재하던 시절이었다. 적벽에서 전쟁을 반대한 가후도 있기는 하지만 배송지부터 당시 가후가 적벽대전을 반대한 건 대국적으로 완전히 뻘소리라고 대놓고 깠으니 넘어간다.

유비 역시 조조만은 못해도 전쟁에서 전투로는 이골이 난 사람이고 그의 책사 제갈량 역시 만능의 능력자이자 당대의 전략가로 꼽이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들이 양양을 차지하지 않는 결정을 내린 후 당시에 낸 결론은 모두 동일하다. '강릉을 먼저 선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유비가 강릉을 얻으면 장강 수로를 통해 강하의 유기, 나아가 동오와도 연계할 수 있고, 형주의 잘 조련된 수군이 있기 때문에 수군이 약한 북방의 조조군은 강릉성을 포위하지 못하고 정면공격만 반복할 수밖에 없어 방자의 이점이 극대화된다. 또 사서에는 군비가 충실하다고 나오며, 이미 잘 개발된 형남 4군에서 장강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급을 받으며 조조군을 축차소모시킬 수 있다. 원래 형주자사의 치소도 유표 부임전에는 양양현(후에 조조 치세에 양양군이 된다)이 아니라 무릉군에 있었고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장사군만 해도 남군 전체 1.5배~2배 정도가 된다.

반대로 조조가 강릉을 수중에 넣는다면 곧바로 형남 4군을 발 아래 둘 수 있으며 형주 수군을 완전히 흡수하여 장강을 자신의 진격로로 활용할 수 있다. 실제로 조조의 동오 침공에서 주력을 맡은 것은 채모가 이끄는 형주 수군이었고, 이 형주 수군이 궤멸되자 조조는 더 이상 동오를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직후 형주에 대한 통제권을 통째로 상실해버렸다.[69]

괜히 이후 조조가 유비의 강릉 접수 소식에 붓을 떨어뜨린 게 아니다. 그만큼 당시 강릉이 형주 전역에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유비는 당시 상황상 거리상으로 강릉에 조조보다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유비는 군재 자체는 당대 최상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투에 있어선 계산이 빠르고 상황 수습이 능숙한 군인이다. 오랜 세월 패주를 거듭하며 유랑한 유비지만, 그는 자신에게 확실한 승산이 있는 싸움, 즉 한 수 아래인 조조의 부하 무장들(유대, 채양, 하후돈) 등을 상대로는 철저한 승리를 거뒀다. 애초에 그런 생고생의 끝에서도 끝끝내 살아남는 것도 자기 능력이다.

다만 자신의 근거지를 빼앗기거나, 혹은 여포조조 같은 당대 최고의 무장들을 상대로 병력의 열세를 안고 싸워야 할 때는 전투를 포기하고 미련없이 도주하거나 최대한 다른 군웅의 지원을 얻기까지 지연전으로 버티는 것이기에 약해 보이는 것일 뿐,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며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반증이 된다. 거기다 한중 공방전에서 보듯, 유비도 환경만 잘 조성되면 당시 좀 해이해진 상태였지만 그간 자신을 고생시킨 조조를 엿먹였다. 그런 사람이 굳이 강하가 아니라 강릉을 선택한 이유가 달리 있을까?

보통 '미끼'라는 것은 그 미끼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 보일 때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양 진영 모두 전쟁의 행방을 가를 최중요 요충지로 강릉을 지목한 상태에서 '10만 군중의 탈취가 당시 형주 전역에서 강릉 선점에 비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미끼내지는 방패로서 성립하는가?' 에 대한 질문의 답은, 적어도 조조에게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비 역시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옛날 경사에서 조조를 처음 만나 조조의 고향인 패국에 가서 병사를 모아 동탁 토벌전에서 함께한 이래 몇 번이나 같이 있었고 서주와 기주에서 조조를 대적하면서 조조가 어떤 인물인지 뻔히 아는 인물이 유비였다. 눈으로 본 서주 대학살과 전해들었을 관도대전에서의 원소군 생매장만 보더라도 조조가 백성들이 죽든지 말든지 일체 신경 안 쓸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 보는 눈이 당대 제일인 유비가 결코 몰랐을 리 없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유비는 '강릉 점령'이라는 위치 상의 이점을 선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조조가 당장 눈앞에까지 와서 언제든지 자신을 쫒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단지 10만 군중이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따라 온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다 끌어안아 가면서 어떻게든 가려고 했다. 유비가 자신을 따라오는 군중을 외면한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자신의 근본을 포기하는 짓이며, 강릉 선점도 선점이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할 수는 없었던 가치였던 것이다. 그것이 유비의 인덕이든 간흉이든, 이 사건이야말로 유비라는 인간이 왜 유비인지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느린 행군을 하는 유비였지만 그래도 조조의 추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관우에게 수군을 주고 일부 백성도 태워서 최종목적지인 강릉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뒤 자신은 계속 지상으로 이동하다 장판파에 이르고, 밤낮으로 쫓아오던 조조의 정예기병대인 호표기가 따라잡자 공격을 가하자 애당초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던 유비의 무리들은 사방팔방 흩어지거나 조조군에 사로잡혔다. 이 와중에 서서는 모친이 잡히는 바람에 유비군을 떠나고(제갈량전), 유비는 민간인 사이에 섞여있던 자신의 처자까지 버리고 달아나서 측근들과 함께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는 위태로운 상황이 처한다. 호표기의 대장인 조순은 이런 과정에서 유비의 두 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조는 강릉성을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조인전)

이 과정에서 유비의 가족은 흩어졌고 조운은 필마단기로 유비의 부인 감부인과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온다.[70] 장비장판파에서 만인지적의 위세로 조조의 대군을 막아낸다. 가족까지 잃은 유비는 필사적으로 강을 따라 도망가다 떠났던 관우의 배에게서 구출을 받아 면수를 건너고, 강하태수 유기의 1만여 병력과 만나서 함께 하구에 도착한다. 유비는 관우의 소속이 된 수군과 잔병을 합쳐 1만 명을 모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손권의 수하 노숙은 죽은 유표의 조문을 핑계로 형주로 왔다. 목적은 내부 염탐.(노숙전) 이때는 조조가 공격하기 이전이었으므로 혹시 형주에 내분이 있다면 손권이 끼어들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었다.

노숙은 본래 서주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출신으로 대단히 부유한 호족이었지만 서주 대학살을 피해 강동(江東)이라고 불리던 양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이런 말을 손권에게 하면서 노숙이 유비를 평하는 것이 흥미롭다. 노숙은 유비를 일컬어
“유비와 같은 천하의 영웅이 조조와 불화가 있어 유표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그의 재능을 질시하여, 중용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었다. 하북에서부터 항상 패배해서 쫒겨다니던 유비가 천하의 영웅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인데, 이는 유비에 대한 동시대 인물들의 시선을 알 수 있게 해준다.(노숙전)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숙은 돌아가는 길에 장판파 패주 당시 유비를 만난다. 이때 유비의 병사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노숙과 유비가 만났을 때는 일교(一校, 천명)도 되지 않았다고 <노숙전> 주석 《오록》에서 노숙이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장판파에서 조조에게 깨지고 나서 직후의 상황을 과장한 것이고, 이후 위에서도 나오듯이 유비는 곧바로 유기가 주둔한 하구로 이동하여 관우의 수군, 패잔병들 수습, 유기의 1만명을 합쳐 2만명의 병력을 재구축하고 제갈량은 2만의 병력이 유비에게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된다. 하여간 노숙은 유비가 머무르는 하구까지 따라가면서 손권과 힘을 합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유비에게 설명한다. 당시 손권은 노숙을 보내 유표의 두 아들에게 조문하고 아울러 유비와 결친하도록 했다. 노숙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조조가 이미 한진(漢津)을 건넜으므로 노숙이 앞으로 나아가 당양에서 유비와 서로 만났다. 이에 손권의 뜻을 전하고 천하의 사세를 의논하며 은근한 뜻을 드러냈다. 또 유비에게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는데 유비는 옛 친구이자 창오태수오거에게 의탁하러 간다고 짐짓 떠 보았다.

노숙은 "토로장군 손권께서는 총명, 인자하여 현인을 공경하고 선비를 예우하니 장강 이남의 영웅호걸들이 모두 그에게 귀부했습니다. 이미 여섯 군(郡)을 점거하고 군사는 정예하며 군량이 많아 족히 대사를 이룰 만합니다. 지금 그대를 위한 계책으로는, 심복을 보내 동쪽과 결친하여 연합의 우호를 다지고 함께 세업을 이루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거에게 투탁하신다 하나, 오거는 범상한 인물로 먼 군에 치우쳐 있어 장차 남에게 병탄될 것이니 어찌 족히 의탁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으며 유비는 노숙의 계책을 마음에 들어하고 노숙의 말에 따라 진격하여 강하군 악현에 머물고는 번구에 주둔한 후 제갈량을 노숙과 함께 오로 가게 한다.(노숙전)

이때 제갈량손권과 면담하게 되는데 그에게 '조조는 강성하니 항복할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자 손권은 '그럼 유비는 왜 항복을 안하는가?'라고 되물었고 제갈량은 '유비는 뛰어난 영웅인데 어찌 남의 밑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71]'라고 말을 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하였고 조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제갈량전)

노숙이 되돌아간 뒤 오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벌였는데 유종의 대신들처럼 손권의 대신들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손권은 불쾌해하였지만 신하 모두의 생각이었으므로 뭐라 하지 못했다. 그가 잠시 옷을 갈아입으려고 몸을 일으키자[72]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노숙이 뒤를 따라갔고 손권이 노숙에게 의견을 묻자 노숙은 조조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제갈량과의 면담 이후 손권도 주전론으로 마음이 기울었으므로 그는 노숙을 칭찬한다.(노숙전)

이때 주전파인 주유는 파양에 있었으므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노숙은 주유를 수도로 불러들였고 대신들과의 회의 석상에서 주유는 이름난 무장답게 조조군의 약점을 지적하고(먼 거리를 와서 싸움, 유리하지 않은 지형에서 싸움, 단합이 안 됨, 겨울이라 말먹이 등 식량 조달에 곤란을 겪음) 오군의 강점을 지적하면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며 항복론자를 제압한다.(주유전)

이때 유비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 손권은 힘으로 호족들과 한나라의 정당한 지방관들을 깔아뭉갠 손책의 후계이므로 통치의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조정의 영수인 한나라의 승상인 조조가 통치권한을 내놓라고 하면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장소같은 손권의 신료만 봐도 이 문제를 그렇게 보고 있었고, 그러나 유비는 황제로부터 역적 조조를 토벌하라는 밀서를 받은 몸이며 한나라의 중앙 관직인 좌장군을 역임하고 있었으므로 손권에게 있어서 조조와 해당하기 위해선 최상의 명분이 되어 줄 존재였다는 것이다.

즉, 적벽대전 때는 조조와 전쟁할 이유 자체가 성립이 안 되어서 아주 곤란한건 맞다. 그러나 유비 덕에 명분이 생겨도 적벽대전 당시에 동원된 병력은 손권과 주유, 정보 등이 데리고 있던 군사조직 뿐이었다. 즉 싸울 명분이 생겨도 호족들이 병력을 지원하지 않고 저울질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유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영지를 가지고 있는 손권이 달랑 3만밖에 동원 못한 이유이다.

어쨌거나 손권은 이에 주유, 정보에게 총 3만의 병력[73]을 지휘하게 하고 노숙과 제갈량을 동행하게 한다. 유비는 주유와 만났고 유비에겐 2만여 병력이 있었으므로 이들과 병력을 합치게 된다. 유비가 강하에 머물면서 주유가 만난 사람이 유기가 아니라 유비라는 점에서도 이 시점에 강하에 유비가 세력을 잡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번구에서 손권의 원군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비는 드디어 손권이 보낸 주유의 배를 발견하고 사람을 보내 주유를 위로한다. 그런데 자신의 아랫사람이 되는 주유는 부서를 떠날 수 없다면서 거꾸로 유비보고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유비는 관우, 장비에게 이 자리에서 이미 힘을 합치기로 했는데 부르는 것을 안 갈 수는 없다면서 말하는데 아무래도 동맹이랍시고 이렇게 나오는 주유의 이런 태도에 저 둘이 화가 난 모양이라 달랜 모양이다. 그래서 유비는 직접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주유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유비는 주유의 군대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 3만인 것을 주유에게 듣고 발견한다. 노숙의 말에 허풍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겨우 3만?[74] 유비가 실망감을 나타내며 적다고 말하자 주유는 실병력도 2만인 주제에 3만이라고 뻥카를 치면서 '그냥 자신이 공을 세워 적을 쳐부수는 것을 지켜보기나 하라'고 오히려 핀잔을 준다. 유비는 예전에 만났던 노숙 등을 불러다가 함께 얘기를 하자고 하지만 주유는 이번에도 '노숙은 명을 받아 움직일 수 없으니 (본인이)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라고 공명도 조금 있으면 올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 말한다.

아랫사람이 이렇게까지 대하니 빡칠만도 하지만 유비는 노숙을 부르려고 했던 자신의 잘못에 부끄러워하는 한편 한 군대를 이끌 주유의 엄정함을 확인한 것에 대해서는 기뻐한다.

이 기록은 <선주전>의 《강표전》에 있는 기록인데 이 뒤에 유비는 주유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보고 2천 명을 이끌고 형세를 관망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손성은 이 기록에 대해
유비는 웅재로, 필히 죽을 형편에 처하자 위급함을 오에 고해 도움을 얻어 달아날 수 있었으니, 다시 강변을 고망[75]하며 훗날의 계책을 품을 까닭이 없다. 강표전(江表傳)의 말은 응당 오인(吳人)들이 전미[76]하려는 말이다.

라고 기록했으며 《자치통감》 또한 《강표전》의 내용은 기록하되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하고 기록했다.

이후 적벽대전에 나온 위 측의 기록(정사 삼국지)을 보면 유비는 오히려 주유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싸웠으며, 조조를 철저하게 작살냈음을 알 수 있다.

유비는 이들과 병력을 합쳐 총 5만의 병력으로 적벽에서 조조군의 십수만에서 수십만[77] 대군과 싸운다.(선주전) 자세한 내용은 적벽대전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적벽에서 화공으로 대승을 한 뒤 주유와 유비는 힘을 합쳐 조조군을 맹추격한다. 조조는 화용도에서 진창을 풀로 메꿔가면서 길을 만들어 간신히 탈출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한다. 애초에 적벽대전은 수전이었으니 승리 직후 곧바로 추격을 했더라도 육지인 화용도에 상륙하려면 조조가 탈출할 시간을 벌려고 남은 후군을 뚫어야 하니 유비가 화용도에 화계를 했을 무렵에 걸리적거리는 아군까지 밟아가며 필사적인 조조는 이미 탈출했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주력은 대부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피해를 작게 보는 시각도 있긴 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무제기만을 본 서술. 조조는 이후 몇 년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으며, 남하 당시 획득한 형주 땅에서 조인이 1년여를 버티는 데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서황, 악진, 문빙 등이 북쪽 길을 막은 관우 상대로 계속 승리를 거두지만 결과적으로 본래 목적인 포위망을 풀어낼수는 없었고 결국 조인은 형남 일대를 포기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그냥 살려보내준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소설에만 나오는 완전한 창작이다. 화용도 문서 참조.

4. 후기 군벌 시기

4.1. 형주를 빌리다

이 후 조조군과 싸워 유비는 남군과 형남 4군을 얻는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비가 아예 땅을 빌리지 않았다, 형남 4군 중 일부도 손권에게 받아 빌린 것이다 등 여러가지 설이 있고 꽤나 경과가 복잡하기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형주 공방전의 형주 정복 부분 참고.

그 뒤 주유는 촉 정벌을 하기 위해 강릉을 떠나 파구까지 가다가[78]도중에 죽었고, 이후 손권이 '장로가 조조의 눈과 귀가 되어 익주를 노리고 있고 조조가 장로를 통해 익주를 얻으면 형주가 위험해진다'며 손유를 보내 익주를 취하려고 했으나, 유비는 본인이 익주를 도모할 작정이었으므로 '장로는 진심으로 조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며 촉의 지형이 험난하니 지금 (손권이) 촉(蜀), 한(漢)으로 무리하게 출병해도 군대의 길이가 만 리에 이르니, 싸워서 이기고 공격해서 차지하고자 하면 비록 실리(失利)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일을 잘 해낼 수 없을 것이고 그 사이에 조조가 니네 치면 망하는 거 뻔한 거 아니냐?'며 반대한다.

손권이 이럼에도 출진을 강행하려고 하자 유비는 쫄아서 순순히 손권의 말을 따르는 게 아니라 아예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라며 명분을 들고[79] 관우를 강릉, 장비를 남군 자귀현, 제갈량은 남군에 주둔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무릉군 잔릉현에 주둔하면서 길을 막고 무력시위를 하며 결사반대해 이를 좌절시킨다.(선주전 주석 헌제춘추) 손권도 직정하고 이렇게 나오는 유비의 뜻을 알았고 정말로 익주 정벌에 주유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미리 준비한것이 먹히기엔 유비의 경계 태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았는지 유비를 무시하지 못하고 그냥 계획을 취소했다. 사실 이미 유장장송의 계책을 받아들여 법정을 먼저 유비에게 보내 화호관계를 맺게 했으니 신의 타령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유비가 이러는 이유는 물론 손권의 익주 점령을 막고 자기가 융중대에 따라 촉, 익주를 온전히 다 먹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 단, 세부적으로 몇가지 설명할 것이 있는데 선주전 본전에 유비가 왜 이랬는지 분명하게 이유가 나온다. 이때 당시에 유비군 내부에서도 손권의 이런 제안에 갑론을박이 있었던 모양인데 어떤 사람들은 의당 이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오나라는 끝내 유비가 소유한 형주 땅을 넘어 촉을 소유할 수 없으니 촉 땅은 가히 유비 세력이 차지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형주 주부 은관이 반대하고 나섰다.
만약 오의 선두, 선봉이 된다면, 나아가서는 능히 촉을 이길 수 없고, 물러나서는 오가 이를 틈탈 것이니 일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지금 다만 그들이 촉을 치는 것을 도와주는 것처럼 하되, 우리가 새로이 여러 군을 점거하여 군을 일으켜 움직일 수 없다고 하면, 필시 오는 감히 우리를 넘어 홀로 촉을 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퇴지계(進退之計)를 이처럼 하면 가히 오, 촉의 이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 선주전
혹여 오군의 선봉을 우리가 맡게 된다면 대사는 물 건너가는 겁니다. 지금은 그저 이 요청에 찬성만 하시고, 새로 여러 군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움직일 수 없다고 하십시오. 그는 필시 우리 (형주 쪽)를 건너서 촉에 손에 넣으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 화양국지 유선주지

손권은 주유가 강릉에 있을 때 익주를 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아니면 뭔가 꿍꿍이가 있던지, 하여간 주유와 같이 익주를 공격하려던 손유를 시켜 형주를 경유해 익주를 공격하게 하려고 했다. 내세울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휘관인 주유가 죽었고 이제 강릉은 유비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일단 제안한 것만 따지면 손권은 유비의 군사력과 유비 본인의 지휘력을 이용하여 그들을 선봉에 세우려고 한 모양이다. 그러나 은관의 진언에 따르면 당시 유비군 상황으로 촉을 공격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여기서 유비가 실패하면 뒷감당은 유비 본인이 해야하는 데다가 (한창 결혼 동맹 이후 내부에서 손부인이 오나라 신하들과 군대를 이끌고 유비 치소 옆에 성까지 짓고 깽판을 부리는 와중에) 손권이 무슨 수작으로 형주를 가만히 둘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강릉에 주유가 있을 때는 익주 공격은 (어차피 유비를 믿지도 않았던) 주유의 오나라 혼자하는 군사 행동이라 군대의 보급로가 한없이 길어지고 촉 공격에 문제가 되는 영안 공격은 주유가 해야하니까 유비가 책임질 일은 없으니[80] 그냥 주유가 뭔 짓을 하든 가만히 두었지만, 이제는 유비가 온전히 길목인 남군에 있는 상황. 아직 남군을 다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형주를 완전히 안정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이 공격이 실패하면 유장의 적대감이나 군사적 손해는 고스란히 유비가 감당해야 한다. 즉, 당시에 오는 촉을 못 먹는다는 것이 이미 유비군 내 여론이다. 게다가 주유도 없는 상황에서 합비 공방전 당시 손권이 보여주었던 군사적 능력만 봐도 유비 입장에선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장송, 법정, 맹달과의 커넥션에서 찾을 수 있다. <유장전>을 보면 장송은 적벽대전조조를 찾았지만 채용하지 않고 무시하자 원망을 품는다. 그리고 적벽대전 직후 돌아와 조조와 관계를 끊을 것을 설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장을 설득하며 말하길 "유예주(劉豫州)는 사군(使君)의 지친이시니, 가히 통교할 수 있습니다."라 했다. 유장은 그 말이 모두 옳다고 여겨, 법정(法正)을 보내 선주와 화호관계를 맺게 하고, 곧장 또 법정 및 맹달(孟達)에게 영을 내려 병사 수천을 보내어 선주를 도와 수비토록 하였는데, 법정은 마침내 돌아왔다.
유비의 입촉은 이후에 다시 장송이 건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장송의 커넥션이 있는 상황에서 일단은 화호관계라고 알려진 유장의 신임을 잃을까 염려하여 신의를 내세워 손유의 진군을 막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선주전의 어떤 사람이 촉을 치자고 하는 것은 장송과의 커넥션은 아직 공공연한 사실이 될 수 없으므로 최고위직들이나 일부 고위직만 공유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유비의 익주 점령 과정을 봐도 212년~214년 3년이 걸렸다. 익주 내부 장송과 법정의 커넥션과 1년간 익주에 주둔하며 익주호족들과 접촉하고 민심을 얻은 과정, 안팎으로 익주를 뒤흔들었음에도 3년인 것이다. 당시 손권이 합비 전투에서의 실패나 주유 사망 및 유비군 내 판단을 고려할 때 애초에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익주 침공은 꿈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이 유비군내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또 유비 본인의 말대로 손권이 오나라에서부터 병력을 익주까지 보내면 조조가 그 틈을 노려 오나라로 치고 들어가지 말란 법도 없었다.[81] 어쨌거나 익주를 자력으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유비는 이미 유장(과 유비에 협력하는 내부세력)측과 커넥션을 맺은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아직 여러군을 안정시키지 못했다는 핑계로 자력으로 익주에 온전히 힘을 투사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고 혹시나 이런식으로 유비군의 힘을 약화시키고 익주에 간다는 핑계로 형주, 남군에 눌러 앉아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손권군의 움직임도 경계해야 했다. 한마디로 마치 연의에서 주유가 그랬던 것처럼 손권이 가도멸괵의 계책으로 나오지 말란 법도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비는 은관의 계책을 채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 없다'는 말은 손권의 익주 진격을 반대하기 위한 핑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비 본인의 진심이기도 했을 것이다. 까놓고 맨주먹으로 일어선 군벌 유비가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가 저거고, 저런 식으로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려고 했던 인물이 유비다.

유비는 근본적으로 서주 때도 그렇고 형주 때도 그렇고 지역 주민들 상대로 명분을 충분히 쌓고 인의를 내세우고 해당지역을 안정시켜, 그 지역 인심의 힘에 의지해 한 지역을 다스리는 방식을 매우 선호했고, 후일 익주에 들어가서도 바로 유장을 치자는 말에 '아직 은혜와 신의를 (이 지역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다'면서 일부러 돌아가는 길로 가면서 은덕을 후하게 베풀어 주변의 민심을 거두고, 주민들을 포섭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결국 그것을 통해 혼란했던 익주를 완전히 손에 넣는 데 성공했던 인간이다.

여기서 유비 본인의 말을 보자,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럽게 하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인덕을 베풀고 조조가 속임수를 쓰면 나는 충실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유비는 근본적으로 덕으로서만 세상 사람들을 따르게 할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천하를 손에 쥘 수 있다고 확신한 인간이다. 물론 필요하면 무력탈취도 꺼리낌없이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합당한 이유와 지지를 받아가면서 했고 애먼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주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괜히 아직 시세가 안정되지도 못했는데 성공할지나 모를, 아니 솔직히 익주를 먹을 생각이 있는지도 의문인[82] 원정의 고기 방패 선봉 짓으로 익주민들을 자극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설령 유비가 익주를 공격하더라도 그 시점은 유비군이 만반의 준비를 이루어 낸 상태에서 최대한 적절한 타이밍에 천천히 익주민을 회유하는 형태로 진행했을 것이다. 여기에 실제로 결국에는 이런 준비가 철저하게 갖추어진 상황에서 익주 내부의 혼란스러운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장송, 법정 등 익주 신하들이 믿을 건 유비밖에 없다면서 알아서 유비한테 익주를 가져다 바치도록 내부에서 협력하고 나아가 작전 참모로 까지 합류한 절호의 기회까지 왔으니 이는 실로 융중대에서 제갈량이 익주의 사람들은 혼란한 정치에 지처 영명한 군주를 기다릴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 유비가 은관의 계책을 받아들인 게 실로 맞았던 것이다.

4.2. 입촉

한편 이에 앞서 장송이 208년, 적벽대전 전에 조조가 형주를 얻었다는 소식에 유장의 사신으로 갔으나 푸대접을 받고[83] 불만을 품었다. 이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깨졌고 장송은 조조와의 관계는 끊고 유비와 제휴할 것을 유장에게 권하였다. 누가 가면 좋겠냐는 물음에 평소 친한 법정을 추천하였다. 이로써 유장은 유비와 연합하였고 이어서 법정과 맹달을 통해 수비할 병사 수천 명을 지원해주었으며 전후로 선물도 막대하게 하였다. 법정이 돌아와 장송에게 이르길 유비에겐 웅대한 계략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211년, 조조가 한녕태수 장로를 정벌하려 한다는 소문에 유장이 두려워하였다.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공격해 한중을 합병하자고 간언한다. 유장은 이를 옳게 생각하고 법정을 유비에게 사신으로 보내고 유비는 이에 응한다.

앞서 부손은 유종에게 유비는 유종이 부하로 다룰 만한 자가 아니며 조조를 막아내면 형주는 유비의 것이 될 것이라고 간언한 적이 있다. 이는 유장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유장은 유비를 다룰 수 없을뿐더러 유비가 장로를 합병하고 조조를 막는다면 촉은 유장의 것이 아닌 유비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손이 예측한 식으로 장송이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다. 장송은 아예 처음부터 유비를 불러들여 그를 촉의 주인으로 삼을 속셈으로 유장에게 이런 간언을 한 것 같다. 이것은 <법정전>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익주별가 장송(張松)이 법정(法正)과 서로 친했는데 유장이 함께 큰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며 늘 남몰래 탄식했다.”

라고 말한 것을 보아 장송과 법정은 유장에 대해 그다지 충성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84] 이 둘은 이전부터 유장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남몰래 탄식해왔던 터라 유비를 받들 모의를 하고는 때를 기다렸다. 이는 제갈량이 일찍이 익주의 선비들은 유장의 정치에 불만을 품어 명군 얻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예견과 같았다. 게다가 장송이 유비를 만난 뒤 보낸 사신은 다름아닌 법정이었다.

유비가 익주에 도착했을 때 유장이 군사를 늘려주었고 그 결과 그 병사는 3만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손권은 유비를 활로(猾老: 교활한 늙은이)라고 욕하였다. 유비의 나이는 당시 50대로 이 시절 기준으로 노인이 맞다. 유비는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어 익주 지방을 장악하였다.(선주전)[85]

당시의 유비가 처음부터 익주 대신 한중으로 진공해서 한중을 차지했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86] 그러나 만약 당초 계획대로 북형주가 있었다면 북형주에서 조조를 막으면서 한중으로 진공이 가능했을 것이나(실제로 융중대를 처음 제시할때 제갈량은 북쪽 한중의 장로와 남쪽 유장의 익주를 통틀어 익주라고 표현하며 같이 차지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후일 조조에게 북형주를 빼앗기면서 번성-양양의 물적, 인적자원, 교통로를 모두 장악당해 빼앗기고 남형주를 기반으로 했어야 했던 것이 유비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될 경우 천혜의 요새인 상용과 한중의 험지를 익주라는 풍요롭고 병력이 충분한 배후지 없이 아직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미약한 남형주만을 가지고 돌파해야 한다는 난점이 생긴다.

거기다가 만에 하나 차지한다고 해도 이를 뒷받침할 익주가 없으므로 서쪽의 한중부터 남쪽의 남형주까지 영토가 길고 좁게 형성되고, 그곳 중 어느 한 곳이 끊겨버리면(예를 들어 중간의 상용이라던가) 관중이나 익주 등 어디 외부로 진출하기도 전에 각 지방에 주둔한 군세가 고립되어 외곽에서부터 먼저 각개격파 될 수도 있는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 원 역사에서도 유비가 익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남형주에서 조조군과의 청니대치가 발생했는데, 만약 영토가 이렇게 될 경우 위험성은 더더욱 증가한다. 한 마디로 남군을 비롯한 남형주만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유비세력이 한중을 우선해 먹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당시 세력구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배후지인 익주를 완전히 유비가 차지하지 않는 이상 한중만 먹는다고 조조까지 칠 수 있다고 보는건 여러 가지로 무리수에 뒷통수가 간질간질한 일이었던 것이고 유비가 먼저 익주를 온전히 석권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다만 관서 군벌들이 적당한 선에서 전역을 종료시키거나 유비가 익주를 먹을때까지 버틴 게 아니라 마초, 한수를 제외하고 다시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조조와의 싸움에서 완패당한 게 문제였을 뿐. 하다 못해서 마초가 기성 전투 이후 양주를 석권했을 때 하후연을 물리친 다음 양부 같은 내부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버티기라도 했다면 판도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수도 아직 재기를 노리는 판국이었고.

어쨌거나 입촉한 후 유비는 매사에 조조와 반대로 하여 성공하였다고 자신을 평하면서 익주 점령에 고심했는데 이에 방통은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뿐이라며 유비를 설득한다.
방통이 유비를 설득했다.

형주는 황폐해져 사람과 물자가 고갈되었고, 동쪽으로 오(吳)의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 조씨(曹氏)가 있어 정족지계(鼎足之計)의 뜻을 펼치기에 곤란합니다. 지금 익주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성하여, 호구수 백만에 사부 병마(四部兵馬)로 나오는 바가 잘 갖춰져 있으니 보화(寶貨)를 밖에서 구할 필요 없이 지금 임시로 빌려 대사를 정할만 합니다.”

유비가 말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럽게 하고 조조가 포악하면 나는 인을 베풀고 조조가 속임수를 쓰면 나는 충실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방통이 말했다.

“형편에 맞추어 대응할 때는 오직 한 가지 길로 평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약한 자를 아울러 강한 자를 공격함은 춘추오패가 했던 일입니다. 역리로 취하되 순리로 지킴하여 의리로 보답하고 대사가 이룬 뒤 대국(大國)에 봉해 준다면 어찌 신의에 위배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유비가 마침내 이를 행했다.
정사 삼국지 방통전 주석 구주춘추

유비는 이후에도 기습을 제안하는 방통에게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민심을 잡는 일에 주력했는데 방통은 이에 상, 중, 하 3계책을 진언하고 유비는 중책을 취하기로 한다.(방통전)

다음해 212년, 손권조조에게 공격을 받자 손권은 유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유비는 유장에게 조조가 승리한다면 형주를 통해서 익주로 공격이 들어올 것이지만, 장로는 한중에 틀어박혀 웅거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위협적이지 않으니 우선 형주로 가서 조조를 막겠다고 전달하고 병사 1만과 물자를 부탁했다. 유장은 병사 4천만 빌려주고 물자도 요청한 양의 절반 정도만 지원했다.

그러자 유비는 포상도 없으면서 사대부[87]들에게 사력을 다하라는게 말이 되느냐며 분노했는데 명분적으로 유비에게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유비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장로를 제대로 공격할 능력도 없었던 유장이 스스로 요청해서 용병으로서 도와주러 온 것이었고 장로는 한중에 웅거한다고 해도 수만 명의 병력을 일거에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군벌이었다. 게다가 한중은 천혜의 요새지, 이런 곳을 공략하기 위해선 많은 병력이 필요한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지원해준 게 원래 요구하는 병력과 물자의 절반도 되지 않으니 유비 입장에선 일단 자기 근거지도 위태로운 상황인데 조조 막은 후에 다시 돌아와서 제대로 장로를 공격하지 말라는 얘기냐는 불만을 제시할 수 있는 사항인 것이다.

한편 장송은 유비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당황해서 유비와 법정에게 대사가 이루어지는 마당에 왜 떠나려 하느냐고 밀서를 보냈다. 헌데 장송의 형 장숙(張肅)이 두려워한 나머지 음모를 유장에게 폭로하여 장송은 참수당해버렸다. 이 때문에 유장은 유비를 의심하고, 관문을 걸어 잠그도록 지시했다. 유비는 분노하여 유장의 백수군독인 책임자 양회, 고패의 무례함을 질책하며 불러 참수했다. 호삼성이 이르길 '그가 손님을 대접하는 예가 없음을 꾸짖은 것이다'라고 했다. 유비는 황충, 탁응에게 군을 이끌고 유장에게 향하도록 했고 곧바로 민첩하게 (백수)관[88] 안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사졸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고, 그 김에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도 모두 유비군에 흡수. 병사를 이끌고, 황충, 탁응 등과 진군해 부현에 이르러, 그 성을 점거했다. 호삼성은 이는 방통의 중책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양회, 고패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병들을 거느리고 관두(關頭, 관문, 요긴한 길목)를 점거해 지키며, 듣기로 여러 차례 유장에게 전(牋, 상주문, 서신)을 올려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간언했다 합니다. 장군께서 이르기 전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고 형주에 위급한 일이 있어 되돌아가 이를 구원하려 한다고 하며, 아울러 행장을 꾸려 겉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의 영명(英名)함에 감복하고 있었던 데다 또한 장군이 떠난다는 것에 기뻐하여 필시 가벼운 차림의 말을 타고 만나러 올 것이니, 장군께서 이 틈을 타 그들을 붙잡고 진격하여 그 군사를 차지하고 이내 성도로 향하십시오.
방통전

유장은 유괴, 냉포, 장임, 등현 등을 보내 부현에서 유비를 막게 했으나 모두 격파되었고, 물러나 광한군 면죽현에 의지했다.

조일청이 언급한 《태평어람》 346권에서 인용한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에서 이르길 이 당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장이 유비를 부르니, 유장의 장수 양회가 여러 번 간하여, 유비는 유장의 자식 유의(劉祎)와 양회를 불렀다. 주연이 무르익었을 때, 유비는 양회가 비수(匕首)를 지닌 것을 봤다. 유비가 그의 비수를 내놓으며, 이르길 "장군의 비수가 아름다운데, 고 또한 있으니, 이를 손에 넣고 볼 수 있겠소?" 양회가 이를 줬다. 유비가 비수를 얻고는 양회에게 이르길 "너는 소인으로, 어찌 감히 우리 형제의 우호를 이간하느냐!" 양회의 욕설이 아직 이르지 못했는데, 유비가 그를 벴다.

이에 《삼국지집해》의 저자 노필이 살피길 <선주전>에선 양회, 고패를 백수관에서 베며, 유장과 서로 만날 수 없었으니 영릉선현전이 잘못 본 듯하다는 언급을 했다. 다만 <방통전>에도 양회와 고패가 여러 번 유장에게 유비를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상소로 간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유장을 직접 만나 간했다기 보단 상소로 간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노필의 말이 꼭 맞다고 할 수는 없고 정황상으로도 당시 상황과 들어 맞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후, 유비는 유장과 전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유장은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여러 군대를 지휘하게 했으나, 이엄은 무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낙성으로 진군한다. 그러다가 213년(자치통감에서는 214년)엔 유비군이 낙성을 포위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 유비의 군사(軍師) 봉추(鳳雛) 방통이 낙성 공격을 지휘하다 유시(어지러이 날아오는 화살, 눈 먼 화살)에 맞아 유비군 진중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유비는 낙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나서 성도를 포위할 무렵에 유비의 부수관 탈취와 동시에 형주에서 출병하여 익주 각지를 평정 중이었던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이 유비 본군(3만)과 합류한다.[89] 214년오호대장군(관장마황조)의 세 번째 장수인 서량의 마초가 서촉으로 도망쳐서 유비군에 합류하였고 뒤이어 유장이 항복하게 된다. 마초가 도착하자 군을 이끌고 성 북쪽에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가 도착한 후 열흘이 지나기 전에 성도가 무너졌다. 당시 성도의 성벽을 사이에 두고 수십 일 동안 대치하던 유비군과 유장군의 전쟁은 마초의 전향이라는 사태를 맞아 비로소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4.3. 익주를 차지하다

당시 유장은 3만의 정병과 성중의 사람들이 1년을 버틸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유비는 일단 병사들에게는 전리품으로 성안의 부고를 내어주고[90] 한편으로는 성중의 물품을 차지한 다음 그 다음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재분배하는 과정을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주택, 논밭, 창고에 있던 곡식과 비단 같은 원래 익주 성도 토착 주민들의 것도 지배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원래 가지고 있었던 이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214년, 유비는 익주을 겸하고 인사를 골고루 배치하는데 그에게 원한이 있는 자이건 혹은 유장과 친척 관계인 자건 간에 인재를 기용했다. 선주는 또 익주목을 겸했는데 제갈량을 고굉, 법정을 모주, 관우, 장비, [마초]] 등을 조아, 허정, 미축, 간옹을 빈우로 삼았다. 동화, 황권, 이엄 등은 본래 유장이 임용했고, 오의(오일), 비관 등은 또한 유장의 인척이고, 팽양은 또한 유장에게 배척되었고, 유파는 예전에 원망한 자이나, 이들 모두를 현요직에 두어 그 기량과 재능을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치고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촉서 선주전

자치통감》은 이로서 익주 사람들은 크게 화합하였다고 기록한다. 이 외에 유언, 유장 부자와 친했으나 유장과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한 방희를 사마로 기용하였다. 유비는 대체로 유장에게 소외된 인물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 혹여 반대파의 구심점이 될 지 모를 유장은 한지로 보내버린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러한 일련의 정책으로 익해 익주 사람들은 크게 화목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이후 익주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갔던 것 같다.

유비는 익주에 입성한 뒤 토목 사업을 벌인 것 같은데 진군이 "이전에 유비가 성도로부터 백수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많이 만들어 많은 인력을 소비하였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진군전) 이 때문인지 조조가 한중으로 진군해올 무렵까지 '하루 수십 번의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촉으로 공격해 보려고 했을땐 이미 유비가 익주를 완전히 장악한 후였다. 《부자》에 따르면, 7일 후 촉에서 온 투항자가 유비가 두려워하는 자들을 참했음에도 촉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고 전했고, 조조는 유엽에게 촉을 쳐도 좋은지 물었는데 유엽은 이제는 안정되었으니 칠 수 없다고 답했다. 고작 일주일만에 익주가 안정되어 상황이 바뀐 것이다.[91]

한편 유비가 촉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듣고 조조의 승상연인 조전은 유비가 성공하지 못하리라 여겼으나 부간이 말하길 "유비는 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고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하며 제갈량은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알고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으니 재상으로 삼을 만하며.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고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보좌하는 세 사람이 인걸이니, 유비의 지략까지 더하면 무엇을 성공하지 못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유비는 명백히 익주를 하나의 기반으로 삼으려고 유장과 전쟁을 벌였으며 따라서 익주민들에게 최대한 인심을 얻으려는 입장에 있어 익주민들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인심을 얻기 위해 여러 제스처를 취했다. 유장을 기습하지 않은 것도 인심을 아직 못 얻었다는 이유였고,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익주민을 포섭하고 되도록이면 그들의 이권을 보장하며 인심을 얻는 데 주력한다.

유장 측에서 청야전술을 한다는 것에 경악한 것도 공략의 어려움에도 자기가 기반을 잡아 궁극적인 목표인 북벌을 시행할 기반인 익주가 큰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또 유비는 성도에 들어서서 성도의 금은을 나누어주거나 관부를 열어 병사들에게 대접하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익주에서 지원받아 흡수하거나 항복한 익주 병사들이기도 했다.

처음 입촉했을 때처럼 자비를 베풀어서 익주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등의 노력을 보이고 이후 이릉에서의 패배 이후까지 익주 자체는 상당히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 유장이 쓴 '백성들이 공격하고 싸운다'는 표현처럼 유비는 포섭한 익주 주민들과 흡수한 군사를 이용해 유장과 싸운다.

어떤 의미에선 더 이상 유장을 신뢰하지 않았던 익주 인사들이 유비를 끌어들인 전쟁이었던 만큼 이 전쟁은 일종의 내전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비가 전쟁 이후 유언, 유장 시기 내부 갈등과 반란이 심했던 익주를 하나로 결속시킨 일련의 정책은 이후 촉한의 성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4.4. 유비의 수염 콤플렉스

처음 유비가 입촉하여 유장과 만난 자리에서 장유라는 사람이 종사였는데 유비는 장유가 수염이 많은 것을 보고
"과거 내가 탁현에 살고 있을 때 모(毛)성을 가진 자가 특히 많아 동서남북 모두 `모`라는 집이 많았었소. 탁현의 현령이 `수많은 털이 탁을 에워싸고 사는구나!`라고 했소."

라며 놀린다.

여기서 여러 모씨(諸毛)란 중국식으로 저모(猪毛)와 발음이 같다. 그리고 탁(涿)이란 옛날식 발음이 돈(豚)과 가까운데, 『광아(廣雅)ㆍ석친(釋親)』에 의하면, ‘돈(豚)은 둔(臀), 볼기, 밑, 바닥’이라 했다. 장빙린(章炳麟)은 이를 ‘둔(臀), 볼기’가 아니라 마땅히 ‘앞에 있는 구멍(前竅), 전규 즉 여자의 음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요컨대 돼지털이 엉덩이나 여자의 음부를 둘러싸고 있는 꼴이라고 비웃은 것이다.

그러자 장유가 대답을 하는데
"과거에 상당군 노현의 장이 되었다가 탁현의 령으로 승진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당시 어떤 사람이 편지를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노현이라고 기록하면 탁현을 무시하는 일이 되고, 탁현이라고 기록하면 노현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노탁군`으로 쓴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위 말은 유비가 탁군 출신인 점을 들어 노탁군(수염이 없는 군주)이라는 것을 은근히 비꼰 것이었다. 노(潞)란 노(露)와 동음이고 탁(涿)의 고음이 둔(臀)과 같으니, 노탁군(潞涿君)이란 노둔군(露臀君), 즉 볼기짝을 드러낸 꼴의 군자란 뜻이 된다.

유비는 이를 잊지 않고 있다가 훗날 장유가 220년 조씨의 천하로 바뀌고 유비가 222년과 223년 사이에 익주를 잃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자 그를 참수한다. 이때 제갈량이 만류하자 "향기 나는 난초라도 문앞에 나 있으면 베어낼 수밖에 없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만 정말 수염의 원한 때문이라고 보기는 곤란한 게 한 왕조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하는 유비에게 있어서 유씨를 부정하는 장유의 발언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고 이것 때문에 참수했다는 쪽이 더 타당하다. 《화양국지》에서도 이것이 실제 이유였다고 기술하고 있다.[92]

4.5. 익양대치

같은 214년, 헌제의 아내인 복황후가 조조에 의해 살해당했다. 조조가 212년에 위공이 되어 황제인 헌제를 끌어내리고 마음대로 국상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복황후와 그녀의 친척이 조조를 제거하여 황권을 다시 회복하려 하였고, 이에 조조는 화흠을 보내 복황후를 죽이고 복황후 소생의 두 황자도 독살하였다.[93] 외척들과 황제 쪽에 붙어있던 인사 200여 명을 죽인 후 조조는 조절을 헌제의 새 황후로 삼게 했다. 동귀인 이후 조조의 위공 등극을 반대한 순욱이 죽을때 격분했던 유비는 이 일을 듣고는 발상(發喪)했다. 당시 천하에서 감히 복황후를 발상할 수 있는 사람은 유비밖에 없었다.(후한서 효헌제기 주 산양공재기)

215년손권이 유비가 익주를 얻었으니 형주를 내놓으라 한다. 이때 사신으로는 제갈근이 파견되었고 유비는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이내 형주를 전부 상여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자치통감, "乃盡以荊州相與耳")

손권은 여몽을 보내 장사, 영릉, 계양을 빼앗았는데 유비는 이에 대응하여 군사 5만을 이끌고 직접 유비가 형주에 있었을 때 근거지로 삼았던 공안으로 내려왔고 관우에게 3만을 갈라줘 익양으로 파견하는 등 싸움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선주전)

그런데 215년 그해에 장로가 조조에게 격파당하였으므로 촉과 오는 위나라의 확장에 크게 긴장하게 된다. 이에 손유 양측은 다시 만나 합의를 거쳐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속하게 하고 자신은 남군, 영릉, 무릉을 갖기로 합의한 후 조약을 맺고 일을 매듭짓는다. 즉 이 시점에서 형주 문제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4.6. 장로의 문제

익양대치에서 돌아온 유비는 황권을 시켜 조조의 침공으로 파중현에 피신해 있던 장로를 영접하려 하나 이전에 장로가 항복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그런데 이전의 몇몇 기록을 보면 장로와 유비가 대립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선들은 장수하려고 양생하면서 송화 가루와 노을도 절제하여 먹었는데 그대는 맛있는 것만 추구하니 어찌 도를 숭상할 수 있겠소?
제갈량, 장로를 비판하며 - 예문류취
위의 글은 제갈량이 장로에게 보낸 글로 알려져 있다. 보면 알겠지만 제갈량은 장로가 내세우는 종교적인 면을 비판하고 있고, 장로를 사이비 교주로 격하시킨다. 언제 쓴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비 정권의 재상격이었던 제갈량이 이렇게 직접 장로를 비판할 정도라면, 유비 정권이 장로와 적대한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사실 융중대에서부터 장로는 병탄해야 할 대상으로 봤으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유장이 유비를 불러들인 것은 장로에 대처하기 위함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장로가 이끌던 오두미도 세력은 유언과 결탁했지만, 유언 사후 유장이 장로의 일족을 살해하면서 유장과 적대하게 되었다. 《촉서유이목전》을 보면, 유언이 익주로 끌어들인, 소위 동주 세력이 익주 현지인들과 충돌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조위의 난이 있는 등, 유장의 익주 통치가 난항을 겪은 일이 있는데, 이때 기록을 보면, '장로의 부곡이 파서 일대에 있어'라는 부분이 눈에 띤다. 오두미도 세력이 익주에서 한중 뿐만 아니라 파서 일대에 이르기까지 세를 넓히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익주 평정 이후, 유비는 장비파서태수로 임명한다.

제갈량이 장로를 직접 비판할 시점에서, 유비 세력과 장로의 세력이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핵심 장수인 장비를 파서태수로 임명하고 한중을 얻은 뒤에도 장비를 지속적으로 이 일대에 배치한 것은 장로의 세력이 유비에게 일정 이상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4.7. 한중 공방전

조조는 한중하후연, 장합을 주둔케 하고 여러 번 파[94]의 경계를 침범했다. 그리고 216년, 장비장합이 탕거에서 맞붙은 것을 시작으로 유비는 조조와의 전쟁에 돌입한다. 건안 22년(217년)[95] 유비는 법정의 진언을 받고, 건안 23년(218년)에 마침내 유비는 제장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격하였다.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 등을 보내 하변(下辯)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하여 마초 등은 후퇴한다. 유비가 양평관에 머물며 하후연, 장합 등과 서로 맞섰다.

이에 호응하여 위나라에선 김의가 위의 수도인 허창에서 길비, 경기, 위황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헌제를 취한 뒤 유비를 불러들일 것을 계획하나 진압된다.(무제기)[96]

219년엔 유비군이 전투에서 대승해 위의 장군 묘재 하후연이 (황충 또는 유비에 의해) 참수된다. 이에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당도하자 유비는 직접 군을 이끌고 지형을 기반해 맞서 조조에게서 한중을 수비한다. 당시 유비와 그의 모주 법정이 있던 자리에까지 화살이 날아오기도 했으나 유비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요충지를 지속적으로 지켜내 마침내 조조를 철퇴시켰다.

사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교전을 응하지 않았다 나오긴 하는데 그것도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조조를 위해 좋게 써준 말에 불과하고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다른 사서들에는 멀쩡히 격렬한 교전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나오는 데다가 심지어 유비가 양자 유봉을 시켜 조조에게 먼저 싸움을 걸며 도발하자 조조가 격노하면서 '유비 이 돗자리 장수놈이 가짜 아들로 감히 나한테 시비를 걸어? 내 아들 조창이 오기만 하면, 유비 너 가만 안 나둔다'라며 당장은 못 싸우고 부들부들거리기만 하는 상황도 나온다. 이게 얼마나 조조가 수세에 몰린 상황이냐면 이후 조조가 진짜로 북쪽에 있던 조창을 불러서 지원하게 하려 했는데 조창이 밤낮으로 달려가 한중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조는 더 견디지 못하고 철수해버린다. 즉, 저 발언은 유비의 도발에도 싸울 생각은 못하고 열받으니까 빡쳐서 내뱉은 말이라는 것. 애초에 싸움이 아예 없었다면 조조가 회군을 결심할 정도로 그토록 많은 병사들이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조조가 하후연을 장안에서 주시하며 방치하거나 이후 관우의 진격에 오만 호들갑을 떨며 천도를 논하고 관우를 치기 위해 영혼의 한타를 끌어 모아 회남 지역 방어선을 방치하는 등 전략적 감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에 유비 입장에서는 그동안 병력 차이로 깨지기만 했던 조조를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고 한중 땅을 탈취했으니 매우 고무되어 있었을 것이다.

5. 전성기와 말년

5.1. 한중왕이 되다

유비는 한중을 차지한 뒤 헌제를 협박해 위왕 작위까지 받아내어 거칠것이 아무것도 없어진 조조에 맞서 한중왕을 칭하니 마침내 유비는 천하삼분을 완료한다.

이때 유비가 자기 지배지의 중심 지역인 파나 촉을 따서 파왕이나 촉왕이라고 하지 않고 한중왕이라고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중 땅은 원래 유방이 한왕(漢王)으로서 대업을 시작한 땅이기 때문에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정통성을 주장하기 아주 적합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漢)은 이미 왕조의 이름이 되어 있으니 유방처럼 한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피하고[97] 대신 지명을 그대로 따서 한중왕이라고 했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유비가 만약 단순히 위왕 조조와 칭호를 가지고 맞장을 뜨려고 했다면, 1자왕(一字王)[98]인 촉왕(또는 다른 1자왕)의 칭호를 사용했겠지만, 유비는 황실에 대한 존중을 표하기 위해 조조보다 한 단계 낮은 2자왕의 칭호를 쓰는 것을 감수했다고 볼 수 있다. 군현제 정착 이래로 일자왕은 황실 직계에게만 주어지는 것인데 조조가 위왕이 된건 사악한 권신이 천자를 핍박하며 일자왕을 자칭한거나 다름이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또한 한나라가 일어선 한중 땅의 왕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자신은 한나라-전한의 시조인 유방과 같은 존재라고 포장할 수 있고, 따라서 유비와 대립하는 조조에게는 자연히 항우의 이미지를 덧씌울 수 있었고, 또한 위왕이라고 하면 초한쟁패기 희대의 졸장부 위왕 위표를 떠올리게 한것. 당대 사람들은 유비의 한중왕 즉위에 대해 옛 한고조를 떠올리게 한다고 평했는데, 이는 유비의 프레임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래저래 조조로서는 왕작의 위엄이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비는 돌아와 성도를 다스렸고 위연을 발탁해 도독으로 삼아 한중을 진수하도록 했다. 전략에 따르면 이때 유비는 관사(館舍-객사, 객관)를 세우고 정장(亭障)을 쌓았는데, 성도에서 백수관까지 4백여 개에 이르렀다. 여기서 관사란 고대 역참 제도를 뜻하고 정장이란 요새, 군사 시설 등을 뜻하니 유비는 본격적으로 북벌을 준비하기 위해 내정을 다지면서 잠시 숨을 고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가 한중왕을 칭한 전후로 위나라에서는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형북으로 밀고 올라가며 천하를 진동시킨 관우의 인수를 받아 허창까지 반란군이 활동하는 등, 위나라는 당시 최고로 잘나가던 유비의 기세에 흔들리고 있었다.

5.2. 관우장비 사망

하지만 219년, 관우형주 공방전에서 북진하던 중 서황에게 패배하고, 이후 위와 밀약을 맺고 형주의 남군을 기습 침공한 손권의 오군에게 형주를 잃고 참수당하는 일이 생긴다. 그로부터 2년 후 221년 6월, 복수를 준비하던 장비 역시 부하인 장달범강에게 살해당한다. 유비는 관우의 일에는 크게 놀라 격분하며 대노하였으며[99] 장비의 일에는 '아! 장비가 죽었구나' 라고 한탄했다. 연의에서는 이를 극적으로 표현해 관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사흘이 지나 깨어나 손권을 잡아 죽이고 동오를 멸할 때까지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뜻을 제갈량에게 내비쳤고, 이후 장비마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또다시 사흘 밤낮을 펑펑 울며 두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죽했으면 제갈량과 조운이 '두 분의 죽음은 우리에게도 실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지만, 현덕께서 몸을 추스리지 않고 슬퍼하기만 하면 누가 그들의 복수를 하겠습니까.'라며 위로하고 나서야 겨우 몸을 추스리고 손권과 동오의 씨를 말리겠다고 다짐하며 이릉대전을 일으킨다.

5.3. 조조 사망

220년 정월에 복잡다난한 관계였던 조조가 죽는다. 아마도 형주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유비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고 천하통일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을 것이나 관우가 죽고 형주를 상실한 유비는 곧바로 그런 대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조비는 너무나도 손쉽게 왕위를 계승했다. 유비는 조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한염을 보내 글을 받들고 가서 조문하게 하고 조문품으로 비단 등의 예물을 보냈다.

여기서 《위서》와 전략의 기록이 갈리는데 《위서》에선 조비는 초상을 빌미로 유비가 화친을 구한다고 생각해 짜증을 냈고 형주자사에 명해 한염을 죽이고 사명을 끊도록 했다.

반면 《전략》에선 한염이 병을 핑계로 상용에 머물면서 글과 조문품을 보냈는데 마침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여 칭제하고 나서는 그더러 여기 오라고 하는 답서를 보냈고 유비가 그 답서 꼬라지를 보고 마침내 칭제했다고 한다. 학경의 경우 '유비가 조조, 조비와 원수인데 친선용으로 조문을 할 리가 있겠는가? 위나라인들이 과장한 것이다'라고 위서의 기록을 깠고, 반미의 경우 위서랑 전략의 기록이 다른데 전략의 경우엔 확실하지 않나 싶다고 의견을 달았다. 왕랑허정에게 서신을 보내며 이르길 "의심하며 꺼림이 없을 수 있어, 길이 처음으로 개통돼, 옛정을 마음껏 얘기하며, 소식을 전하오", 또한 "마침 천명이 성주(聖主)에게 수여하는 시기를 맞이해"라 이름을 생각하니, 바로 이때라고 했다.

다만 《자치통감》에 따르면 7월에 맹달이 항복하고 산기상시에 봉하고 서성 세 군을 합쳐 신성군이라 하고, 맹달에게 신성태수를 맡겼다. 조비는 정남장군 하후상, 우장군 서황을 보내 맹달과 함께 유봉을 습격해 상용을 탈취했는데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고 제위에 오른 건 10월이므로 조비가 제위에 올랐을 때 상용은 위나라 땅이었다. 이렇게 되면 한염이 병들었다 칭하며 (더 나아가지 않고 촉나라 땅인) 상용에 머물며 글을 조비에게 보냈는데 때마침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고 제위에 올라 한염이 올린 글을 받아 답서를 보낼 수는 없다.

5.4. 촉한 건국

건안 25년(220년) 정월 조조가 죽자 조비가 뒤를 이어 위왕에 즉위하고 연호를 연강(延康)으로 바꿨으며 10월에 마침내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위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황초(黃初)로 개원했다. 이로서 한나라는 마침내 멸망했다. 《촉서》 <선주전>과 《화양국지》에 따르면 촉에 헌제가 해를 입었다는 소문이 전해졌고[100] 이 사태에 대해 유비의 대응은 빨랐다. 유비는 상복을 입고 발상하며 헌제가 시해당했다고 선포하였으며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물론 헌제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물론 유비와 그의 수하들이 헌제가 정말 살해됐다고 오해했을 수 있다. 당장 위나라 현지에 있던 소칙만 봐도 헌제가 선양하고 나서 해를 입었다고 여기고 곡을 했으며 헌제 스스로도 복황후가 조조에게 죽을 때 스스로의 신변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믿을 정도였다. 이릉대전 당시 유비에게 보내는 제갈근의 편지에는 '폐하께서는 관우와의 친분과 돌아가신 황제(先帝)[101]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헌제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었으므로 당시에 헌제가 선양을 하면 무사하지 못할거라는 소문은 분명 퍼져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한참이 지난 나중에도 계속 착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헌제가 선양 후 산양공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여생을 보냈다는 사실은 위나라의 국가 기밀도 아니었다. 따라서 촉나라 수뇌부가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어쨌든 헌제가 해를 입었다는 소문이 퍼진 후 유비의 주위에 있던 무리들은 상서로운 징조를 말하기 시작한다. 모두 많은 길조를 말하며, 해와 달이 서로 이어지는 듯했다는데, 삼국지집해의 저자 노필은 이는 모두 광무제가 도참(圖谶)을 숭상한 풍습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102] 의랑 양천후 유표[103], 청의후 상거, 편장군 장예, 황권, 대사마의 속관 은순[104], 익주별가종사 조작, 치중종사 양홍, 종사좨주 하종, 의조종사 두경, 권학종사 장상, 윤묵, 주군(周群)[105] 등 주로 익주 출신 인사들이 상언하길 여러 도참을 말했다.《촉서》 <선주전>과 《화양국지》 <유후주지>를 종합하면 여러 도참이 나오는데 예컨데 낙서견요도(洛書甄曜度) 에서 이르길 "적가(赤家)의 세 태양은[106]덕이 창성해, 9세(世)에 비[107]를 만나니, 황제가 되는 때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했고[108] 주군의 부친(주서)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주군의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수차례 말하길 남서쪽에 여러 차례 누런 기운이 있어 선 것을 헤아리니 몇 장(丈)이나 되었고 때때로 상서로운 구름과 바람이 선기(璇璣-선성과 기성. 북두칠성의 두 번째, 세 번째 별)에서 아래로 내려와 이에 호응했고 도서와 같으니 이는 필시 천자가 나올 징조다. 응당 익주에서 성스러운 군주가 흥기하여 중흥할 것이나, 이때에는 허도에 황제가 살아 계시므로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이에 유비가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응해, 속히 홍업(洪業)에 임하시며, 해내(海內)를 편안하게 하길 바란다고 했다.

익주 출신 인사들이 이렇게 익주에서 한실을 중흥할 것을 말하며 민심에 순응해 유비에게 칭제를 권하는 것은 그만큼 유비가 생전에 유비정권의 흥망 = 익주호족의 흥망으로 등치시켜 익주호족과 후일 황제국으로 등장할 촉한을 묶어버리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화양국지에 따르면 유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다음해(221년) 봄, 태부 허정, 안한장군 미축, 군사장군 제갈량, 태상 뇌공, 광록훈 황주, 소부[109] 왕모 등이 유비가 즉위하도록 간청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이들은 조비가 찬탈하고 시해하며, 한실을 없애고, 잔혹하고 무도하며 사람과 귀신이 매우 분해하며, 유씨를 모두 그리워하고 있으며 지금 위로는 천자가 없어, 천하가 놀라 두려워하나, 우러러볼 곳이 없다했다. 촉서 선주전에 따르면 이 당시 상서한 신하들만 8백여 명인데 이 정도 숫자라면 다 외부 출신이나 형주 인사들 뿐일리가 없고 익주 출신들까지 합쳐서 출신을 가리지 않고 촉한의 신하 대다수가 상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상언에 따르면 이들 모두 상서로운 조짐을 자세히 진술해, 도참의 뚜렷한 증거라고 했다고 한다. 이들은 유비가 이미 거절했던 한의 혈통을 이어 제위를 잇도록 하는 일을 권했으나, 유비는 이를 또 다시 허락하지 않았다.

유비가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최측근 제갈량이 진언하는데 '경순이 광무제에게 천하 영웅들이 따르는데 제위에 오르지 않으면 그를 따를 자가 없게 된다고 하여 황위에 올랐다, 지금 조씨가 한(漢)을 찬탈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는데 대왕께서는 유씨의 일가로 세계(世係)를 계승해 몸을 일으켰으니 지금 제위에 오름이 마땅하며, 대왕을 따라 부지런히 힘쓴 자들이 작고 사소한 공을 바라고 있다'라고 하여 유비를 광무제에 비견해 설득하였다. 결국 유비는 이 말에 따랐다.

이는 즉, 여러 신하들이 유비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요청하게 한 것으로 처음엔 익주인사 출신 실무 관료들의 지지를 얻고, 그 다음엔 주요 측근들과 외부 인사, 형주, 익주 출신의 삼사(三師), 구경(九卿)[110]들의 주도하에 자신을 따르는 형, 익주 관료 상당수들이 지지를 표명하게 한 다음, 촉의 많은이들이 촉한 정권이 세워지는데 도참을 이용하도록 참여하게 하고, 마침내는 최측근 제갈량의 간언으로 어쩔수 없이 황제 위에 오른다는 구색을 갖춘것이다.

이에 유비는 유파를 책임자로 삼아 제위 등극에 대한 모든 문서를 작성할 것을 지시하고 칭제를 준비했다. 제갈량과 박사 허자, 의랑 맹광이 즉위를 위한 의례 작법을 정하고, 길일을 택했다. 그리고 서기 221년 4월 6일, 유비는 마침내 성도 무담(武擔)의 남쪽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촉한을 건국한다. 연호를 장무(章武)라고 하였으며[111] 대사면을 행했다. 백관을 두며, 종묘를 세우고, 한고제 이하에게 제사를 지냈다.[112] 제갈량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허정을 사도(司徒)로 올리며 장비와 마초를 각각 거기장군(車騎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후일 전한, 후한과 구분하기 위해 촉한이라고 불리게 될 나라의 공식적인 등장이었다. 유비는 한의 계승을 천명했던 만큼 한나라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했는데, 그 제도에 따르면 군부의 서열은 가장 위에 대장군이 있고 그 다음에 표기장군-거기장군 순서인데, 유비는 대장군(大將軍)을 임명하지 않았다. 유비의 측근 중 장비, 마초를 능가할 서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직 죽은 한 사람 때문이기에 일지도 모른다.[113][114] 유비는 유파가 쓴 다음과 같은 글을 하늘에 올렸다.
건안 26년(221년)[115] 4월 병오일, 황제 유비는 감히 현모(玄牡, 희생용 검은 소)를 써서 황천상제(皇天上帝)와 땅의 천신과 지신에 밝게 고합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해 역수(歷數)가 무궁했으나, 일찍이 왕망이 찬역하자 광무황제가 진노하여 이를 주살하고 사직을 다시 보존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무력에 의거하여 잔인한 짓을 예사로 저지르니, 주후(主后)를 살륙하고 하늘에 차고 넘칠 정도로 죄악이 커 중국을 망치며 하늘의 뜻을 되돌아보지 않았고, 조조의 아들 조비는 흉역한 마음을 품고는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했습니다. 뭇 신하, 장사(將士)들이 이르길, 사직이 무너지려 하니 저 유비가 응당 이를 닦아 2조(한고제, 광무제)의 대업을 잇고 천벌을 봉행해야 한다 했습니다.

저 유비는 덕이 없어 제위(帝位)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 백성들과 바깥의 만이(蠻夷) 군장(君長)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모두 말하길, '천명에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고, 선조의 유업은 오래도록 폐할 수 없으며, 사해(四海)에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된다'하며, 온 나라 땅이 저 유비 한 사람을 의지하며 바라봅니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또한 한나라의 제위가 장차 땅에 떨어질 것을 근심하여, 삼가 길일을 택해 백관들과 함께 단(壇)에 올라 황제의 옥새와 인끈을 받듭니다. 제사물품을 마련해 천신(天神)께 고류(告類, 황제나 황태자 즉위식 등 때에 행하는 제사의식)하니, 신들께서는 흠향하시고 한가(漢家)에 복을 주어 사해를 영원히 평안케 하소서!

평생 황실을 좌지우지하며 무시했던 조조는 죽을 때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왕의 직위였고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지만 찬탈을 하지 않고 한의 신하로 죽었다. 반대로 한나라 황실의 존속과 부활을 위해 노력했던 유비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촉한을 건국하여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둘의 삶을 생각해볼때 묘한 결과가 나왔다고 할 수있다. 물론 조비가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조조를 무제로 추존하긴 했지만 조조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이는 그만큼 유비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얼마나 기민하게 여겨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상황이기도 하다. 사실상 당시 천하에서 오로지 세력있는 한실 종친은 유비 뿐이었으나 헌제는 어쨌거나 한나라의 황제였고 헌제가 있는 한 유비는 한중왕으로서 한실 부흥을 외치며 왕호의 칭호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비가 선양으로 황제위를 찬탈하여 위나라를 건국하자 유비는 촉한을 건국하고 황제위에 오를 명분이 생긴것이다.

같은 해 5월, 유비는 황후 오씨를 세우고, 유선을 황태자로 삼았다. 6월, 유영을 노왕으로, 유리를 양왕으로 삼았다.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장무 원년(221년)에 촉한의 호(戶)는 20만, 남녀 구(口)는 90만이었다.

<비시전>에 따르면 신하들이 한중왕을 추천하여 제(帝)로 칭할 것을 논의했을 때, 비시가 유비의 황제 즉위를 반대했고 때문에 이로 인하여 거역하는 뜻이 되었으며, 영창종사(永昌從事)로 좌천되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당시 비시를 좌천시킨 것은 촉한 조정으로 조정의 뜻이 황제 추대로 모여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비시의 논조는 당장 황제에 오르기보다는 위나라를 토벌하고 적절한 때에 황제에 오르자고 한 것이니 궁극적으로는 유비의 황제 즉위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비시의 이런 태도를 후일 있을 이릉대전을 막기 위한 시도로 보기도 한다. 유비는 황제에 오른 후 형주의 수복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동진을 했는데 일각에서는 진정한 목표는 찬탈자인 위나라라는 논지를 내세웠고 비시 역시 사실은 그런 의미로 말했다는 것.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했다.

5.5. 이릉대전

유비가 내린 최악의 오판. 그러나 인의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반드시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 그리고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이야기를 불멸로 남게 한 그 마침표.

촉한의 국력을 괴멸적으로 손실시키고 유비 자신도 완전히 재기불능으로 전락시킨 유비 생애 최악의 대패이다.

221년 7월, 유비는 관우를 잃은 분노를 마침내 폭발시켜 군사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한다. 조운, 진밀 등의 중신들을 비롯해 최고 참모 제갈량도 암묵적으로 반대했을 정도로 (출신을 가리지 않고) 촉한 조정의 신하들 대다수가 반대했으나 유비는 이 의견을 듣지 않았다.(화양국지 유선주지)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유비는 몹시 성내며 허락지 않았다.

《신선전》에 따르면 이의기는 촉군 사람으로 도술을 알았다. 소열 황제(유비)가 오를 정벌하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맞이해 그가 도착하자 길흉을 물었다. 의기는 답변을 하지 않고 종이와 붓을 찾았는데, 병마·(병)기를 수십 장 그리더니 문득 그를 한 장씩 찢어버렸다. 또 큰 사람을 하나 그렸는데, 그를 땅에 묻어버리고는 떠나버렸다.[116]

촉군은 국경지대인 무현과 자귀까지 큰 무리 없이 진군한다. 육손, 이이, 유아는 의도군 서쪽인 무현과 자귀현에 주둔해 있었는데, 촉군의 선봉인 오반풍습은 무현에서 이이 등을 격파했고, 육손은 후퇴한다. 유비는 병력을 자귀로 진격시켜 그곳까지 점령했는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그 병력이 4만 명이었다. 유비는 이로서 동쪽으로 향하는 통로를 온전히 확보했고 무릉의 오계만이(五谿蠻夷)들은 모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자귀가 함락된 시점에서 손권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대항하게 한다. 그는 5만의 병력을 육손에게 배당했고 주연, 반장, 한당, 서성, 손환, 송겸 등을 휘하에 배속시켰다.

후일 서진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수군을 통해 이 지역을 밀어버렸지만, 유비 같은 경우 확실히 동오를 제압할 전력이 아니기 때문에 수로와 육로 둘 다 썼다. 전선이 밀리거나 후퇴해야 하는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수군이 육군의 속도에 맞춰줘야 하니까 속도의 이점은 없다. 대신에 병력충원이랑 보급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는데 유비는 이것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이릉을 넘어서선 유비가 효정에 주둔하고 오반진식이 이릉에 주둔함에 따라 육군과 수군이 나뉘게 되어 효정의 촉군을 상대하는 육손 입장에선 촉군이 배를 버리고 도보로 진영을 만든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한편, 유비가 동쪽으로 오고 무릉만이 준동하니 손권은 이릉대전과 별개로 보즐이 이끌고 북상하던 교주의 1만 군사로 익양에서 적을 대비하게 했으며, 무릉만은 합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군대가 일어나 소란했던 영릉계양, 무릉만 군은 대전이 끝난 이후 보즐의 1만 군에 토벌된다. 무릉만을 유도하려던 번주와 연계해 반기를 들었다가 손권에게 먼저 격파되었었지만 이후 영릉의 7개 현을 지키면서 소릉태수로 자칭하며 촉을 섬기고 이(夷)의 경계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이 지역 반란의 필두격 인물인 습진반준에게 격파당한 후 수개월을 버티다 자결한다.

222년 봄 정월, 유비가 자귀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고, <오주전>에서는 송겸이 촉한의 주둔지 다섯 곳을 모두 격파, 함락시키고 그 장수들을 참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최초 촉의 육로를 통한 형주 진출은 촉군이 진지까지 세워 주둔하기까지 했는데도 그 기간 동안 오군과 대치를 하다가 돌아올 정도로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시기 정월, 장군 오반, 진식이 이끄는 수군이 의도군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함으로써, 촉군은 원정 시작 약 반년 만에 비로소 오나라의 최전선이자 강릉으로 갈 수 있는 관문인 요충지 이릉을 점거했다. 이후 장군 풍습을 대도독으로 임명했으며, 장남을 선봉으로 삼고 보광, 조융, 요순, 부융 등은 각각 별독(別督)으로 임명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이미 유비가 자귀에서 효정으로 출발하기 전에 수십개 둔영이 무현부터 이릉경계까지 지어져 있었고 이 상태에서 정월부터 6월까지 오나라와 대치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 1월 진식과 오반의 수군이 이릉까지 진출하며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2월, <황권전>에 따르면 자귀에서 유비가 남하하여 형주 전선에 직접 참전하려고 하자, 유비군의 참모 황권은 손권군의 전투력이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며, 장강의 수로를 타고 내려가는 진로는 비록 물살을 타고 나아가기가 쉽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해야 할 때에는 되려 물살을 거슬러야 하는 탓에 진퇴의 차이가 크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그는 이러한 형세에 유비가 지속적으로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으니, 자신이 직접 선봉이 되어 싸우겠다는 간언을 내놓았다. 황권의 발언은 본대가 적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상황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릉을 넘어선 지역에서의 원정 실패 가능성을 상당히 깊게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유비는 이 발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남하한다. 실제로 황권은 단순히 전략가로서의 기량 뿐 아니라 두호박호를 격파하는 등 나름대로 지휘 실력 또한 갖췄음을 실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그 상대가 파촉의 일개 호족과 이족에 불과했으니, 황권 본인의 말대로 손권군의 전투력을 우려한다면 차라리 군사지휘관으로서는 훨씬 뛰어난 자신이 계속 일선 지휘를 맡는 게 맞겠다고 유비는 판단한 모양이다. 무엇보다 오나라와 손을 잡은 위나라의 배후침공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고 그 곳을 방어할 믿을 만한 카드는 황권 정도밖에 없었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선봉을 청한 황권을 진북장군으로 삼아서 장강 북쪽에 있는 여러 군사를 감독하게 했다.(권중달 자치통감 번역) 북쪽에 있었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한 이유에 대해 선주전에선 '이릉도(夷陵道)에서 오군과 서로 맞서게 했다.'로 기술하고 있지만 <황권전>에서는 '강북의 군대를 통솔하여 위나라 군대를 막도록 했다'로 기술하고 있다. 두 서술이 충돌하는데, 이릉도에서 오군이 배후를 끊는 것을 막는 것과 동시에 북쪽의 위군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 둘 다였을 것이다. 목적이야 어쨌든 황권을 강북에 있는 군대를 '감독'하게 한 것은 동일하므로, 《자치통감》에서는 '황권에게 장강 북쪽에 있는 여러 군을 감독하게 했다'고만 썼다. 다만 후일 강남의 유비가 퇴각해 길이 끊겼을 때 황권은 위나라에 항복하니 위나라에 더욱 가까운 위치였다고 추측할 수는 있겠다. 한꺼번에 둘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라고 시킨 것이니만큼 황권이 얼마나 유비에게 신뢰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동시에,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의도군 이도현 효정(猇亭)에 이동하여 주둔했다. 이는 대치가 길어지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도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손에 넣으려는 기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이후 한산에서 무릉으로 통하여 시중 마량을 보내 금, 비단, 작위 등을 주면서 오계만을 회유했다. 이들이 촉군에 호응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병력을 보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오서》 <보즐전>에 따르면 무릉만이 움직이려 할 때 익양에선 보즐이 교주의 1만 군사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촉군 진영에 있던 호(胡)왕 사마가가 무릉만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므로 무릉만은 보즐에 막혀 이릉 전선에 합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에서 손권이 2월에 조비에게 직접 보낸 상소에서는 유비가 갈라진 무리 4만 명과 2, 3천 필의 말을 이끌고 자귀를 출발했다고 썼다. 이렇게 보면 유비의 군은 먼저 출발하여 이릉에 이르는 진영을 구축한 수군, 효정까지 진출한 본대 4만여 군과 다시 이릉에서부터 효정에 이르는 추가로 진영, 진지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이는 후방군대 크게 둘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유비는 육손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한 손환을 이도성에서 포위하였고, 이것이 사서상 확인되는 유비군의 최대 진군경로에 해당하며 <육손전>에 따르면 이 포위망은 육손에 의한 대패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이 시점에서 유비군은 약 50개 이상의 진영을 구축했으며, 이 중 무협과 건평에서 이릉 경계까지 설치된 둔이 수십 개에 해당한다. <오주전>에 의하면 3월 시점에서 이 진영의 총계는 50여 개이다. 3월로 적힌 기록이고, 대전 전체의 경과를 아우르는 묘사 상 전체 진영의 숫자로 의심되므로 확정짓기는 애매하지만 3월 시점에서 50여 개라는 단정은 가능할 것이다. 다만 손환의 포위가 3월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알 필요는 있다. 어쨌거나 이렇게 지속적으로 사건을 관망한 육손의 평가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촉군은 배를 버리고 도보로 진지를 만든 상황이었고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해질' 정도로 그저 대치하면서 둔중해졌다.

마지막으로 육손의 명을 어기고 이도에서 촉군을 공격한 손환의 군대를 역으로 포위한 선봉군이 설치했을 진영이 있다. 유비군의 정확한 이도 진격 시점이 파악되지 않기에 이는 <오주전>에 집계된 3월의 진영에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대도독 풍습과 선봉을 맡은 장남이 효정 일제 공격 당시 사망하였으나 이도 포위망 자체는 육손의 공격대상이 아니었으므로[117] 6월 시점에서는 효정부터 다시 이도까지 진영이 이어진 것으로 보이고, 장남은 효정의 권역으로 간주될 수 있으면서 이도 포위망을 관리할 수 있는 위치에서 죽어야 한다.

총합하여 <문제기>, <육손전>, <오주전>의 험지 주둔 묘사에 따르자면, 촉군의 진영 배치는 다음과 같이 비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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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군 각 기지의 험지 주둔 묘사를 볼 때 형문산 주둔은 거의 확실하다. 이릉을 끼고 동/서안에 모두 주둔했음이 확인되므로 형문산 주둔은 이릉 서안과 이어진다. 효정을 둘러싼 진지 비정은 효정 방어를 위해 험지 주둔을 가정한 것으로서 효정과 한 덩어리로 파악할 수 있고, 깔끔한 지도를 원한다면 지워질 수 있다. 효정과 이도 사이의 주둔은 이도 공격을 담당했을 선봉대인 장남이 전몰하면서도 효정 주둔으로 적힌 《계한보신찬》의 서술에 근거한다. 점이 아니라 선으로 표시된 것은 사서상 진영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묘사와 실제 육손의 공격 당시 개별 진영이 각각 공격당해 개별적으로 저항/항복한 묘사에 의거한다.

유비는 강가에 병력을 배치하여 육군과 수군이 서로 최대한 지원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릉을 넘어오면서 부터는 수군은 작전을 포기하고 진식의 지휘 아래 진격을 하지 않고 일부는 해체되어 오반의 지휘와 함께 유비를 따라 전방으로 이동한 듯이 보인다. 이는 수군이 독자적인 단위로 활동을 포기하고 이도 등을 함락시키기 위해 선봉의 육군전력을 강화하려고 전환되고 나머지는 이릉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이후 기록에서 수군의 기록은 마안산의 수군격파 기사와 자귀의 배를 버렸다는 기사가 나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이후 사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주전>에선 이릉 양안에 수군이 주둔한다는 기록 이후 패퇴할 때까지 수군의 기록이 끊긴다. <육손전>에는 유비가 이릉을 넘어온 시점부터 수륙병진을 포기하고 배를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육손은 이러한 정황이 달라질 수 없다고 평가했다. 군사적 단위로서의 수군이 완전히 해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이릉 점령 이후로 활동 기록은 육손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마안산 전투에서 촉군의 병사들과 수군이 일거에 손실되었다는 기록과 자귀에 도달한 이후 배를 포기한 기록이 존재해서 이릉 인근에서 수군이 격파되었다는 기록은 있기 때문이다. 별개의 퇴각 기록, <선주전>에서 자귀에서 버려진 배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모든 선박이 문자 그대로 버려지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각 진지에 분산배속되어 연락/보급 등의 역할을 맡아 통합된 '수군'으로서 활동할 여력을 잃었거나, 혹은 이릉에서 후방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박들이 주둔한 상태였을 것이다. 적어도 효정에서는 육손의 수군을 막을만한 전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장비가 살아 있었거나, 위군과 맞설 지역에 다른 믿을 만한 장수가 있어 황권을 효정의 선봉으로 보낼 수 있었다면 후방인 이릉에는 유비 자신이 주둔하고 이릉의 수군을 따로 분산하지 않고 장비나 황권과 함께 효정에 보내 그곳에서 피해를 입더라도 지휘부는 무사할 수도 있었겠지만 숙련된 야전 지휘관이 부족했던 당시의 촉군은 총사령관인 유비가 전방에서 공격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효정에 주둔하여 적어도 몇달은 버티고 있었을 이도성을 공략하고 있었으며 수군은 일부는 전방을 지원하기 위해 육군으로 전환되고 나머진 효정에서 육군과 함께 공격하며 수로를 지키기보단 후방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장비를 대신해 효정에 있는 대독인 풍습부터가 상대편 지휘관인 육손을 경시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후 약 1년여가 지난 장무 2년(222년) 6월경, 효정에서 2월부터 오군과 대치하고 있던 유비는 오반에게 수천 명의 군사만을 주어 평지에 진영을 새로이 세우게 하고 육손을 유인하니 다른 오나라 장수들은 모두 공격을 주장했는데, 육손만은 유비가 산골짜기에 복병을 둔 것을 간파하여 공격하지 않고 버텼다. 결국 유비는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골짜기에서 나온다.

오군의 분위기는 지휘관인 육손과 휘하가 양분되어 있었다. 당시 육손의 부장으로 종군한 주연, 반장, 한당, 서성 등은 모두 유비를 빠르게 격파하길 바랐으며 이에 응하지 않은 육손이 유비를 두려워한다고 여겨 원망했다.[118] 이러한 태도는 이도에서 육손의 명을 무시한 손환이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하려다가 역으로 유비에게 포위되어 방어전을 시작한 이후로 재차 관측된다. 장수들은 육손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기에 육손이 칼을 잡고 강경하게 나와야 할 정도였다. 이렇게 육손은 장수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강력히 고수했다. <육손전>에 따르자면, 육손은 (유비군이 다다른) 이릉은 나라의 최전선에 있는 관문일 뿐이며, 분명히 요충지지만 그 자체로서는 언제건 함락될 수도, 함락 당할 수도 있는 입구일 뿐이라는 자세를 견지했다. 따라서 아직 오나라의 초입에 도달했을 뿐인, 더군다나 험지에 주둔한 촉군에게 오군이 먼저 공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후일 육손의 아들 육항보천이 서릉(이릉)에서 반역하자 '서릉은 빼앗기면 이남의 이민족들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지니 강릉을 버려서라도 서릉을 차지해야 한다.'라고 하긴 했지만 이때는 촉한이 멸망해 북쪽의 형주뿐만 아니라 서릉 서쪽의 익주까지 진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서릉이 전략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위치가 되어 오나라가 여길 빼앗기면 진나라는 익주에서 삼협을 거쳐 서릉을 통해 다시 북형주의 양번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오나라의 형주를 유리한 상황에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에 서릉을 지원하기 위해 출격한 양호 등의 서진 구원병력은 익주가 아니라 북형주에서 오기도 했고, 이는 익주에서만 이릉으로 진격할 수 있었던 유비와는 차이가 있다.

보기에 유비의 '굳히기'는 나쁘진 않은 전략으로 보인다. 촉군이 한중 점령 이후 조조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던 까닭에서는 역시 지형의 유리를 빼놓을 수 없다. 위험한 지역을 공격해 들어오면서 수세에 몰렸을때를 대비해 각 진영을 험지에 둠으로써 점거하고 굳힌다는 발상은 나쁘지 않다. 실제 유비가 세운 전략을 두고 오나라 장수 전원이 빠른 개전을 원했고 개전을 막고 있던 육손을 원망했다는 점에서 지형을 위시하고 적군을 유인한다는 유비의 발상은 통용되지 못할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유비는 효정에서도 대대적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유도하는 유인책을 쓰기도 했고 이때 오군의 다른 장수들은 다 넘어갔으나 육손만은 넘어가지 않아 무산된 전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육손이 마침내 수세를 풀고 비로소 교전에 나설 때가 됐음을 천명했을 때, 앞서 출진을 주장했던 장수들은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며 되려 사령관의 지시에 반대를 표했다. 육손을 제외한 제장들의 여론은 이미 많은 요충지는 모두 유비가 선점해 굳게 지키고 있으니 적군의 주둔지를 치기 어렵고 공격하면 반드시 불리하는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상태였으며, 이는 유비가 선택한 전략이 일견 효과적이었을 여지가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으로 유비는 손권의 애간장을 태우게 해서 돌발적인 선공을 취하게 만들고 이를 이를 역격하면서 형남의 이민족들과 호응하여 남군을 싸먹으려 했다는 전략을 입안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전적으로 상대방의 '섣부름'에 의존하여 전술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시도였으며 상대가 육손이 아니라 빠른 개전을 원하던 다른 장수였다면 몰랐겠지만 실제 역사상에서 육손은 오나라 장수 전부의 이러한 섣부름을 효과적으로 관리했다. 결국 이릉대전에서 촉군은 지형의 유리는 있을지언정, 한중 공방전에서 촉군의 승리를 성립시킨 나머지 요소가 없었다. 육손이 증명했듯이 이미 촉군이 수백킬로 미터의 보급로를 유지시키고 있는다는 점, 지형에 의존하는 이상 진군 속도가 늦어지며 이것이 전체 군의 부담을 다시금 가중시킨다는 점, 당시 촉군이 진공한 이릉이 아직 최전선에 불과하여 설령 빼앗아도 빼앗기기 쉽기 때문에 적에게 반드시 먼저 와야만 할 전술적 이유를 제공할 수 없었고, 따라서 상대가 일단 육손처럼 관망에 나서면 조금씩 지형에 의존해 진영을 늘려 나가며 진영이 얇아지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더불어 이민족의 호응 역시 보즐에 의해 막히고 있었을 공산이 컸다.

육손은 이릉은 이도까지 얻어야 의미가 있는 점령지라고 파악하고 손환이 수개월 포위되어 있는 이도가 버틸 것을 자신했으며, 성이 견고하고 식량도 충분하며 손환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다 했으므로 이러한 자신감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지원이 가능한 안정된 배후지가 있는 상황에서 형주의 거점들이 육로로 함락된 사례는 이 시기 전체를 들어서 관측하기 어렵다. 육손은 지형에 기댄 촉군에 말려드는 일이 불필요하며, 공격하면 산지의 지형상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수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평야에서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할 일을 경계했는데, 이 중 후자는 특히 이도를 포위한 촉군에 직접적으로 말려드는 일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평야에서 벌어지는 회전은 근본적으로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데다가 촉군에는 적어도 2~3천 필의 말이 있었고 이는 기병전력이 몇천 단위로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릉대전 관련 기록에선 오나라의 기병전력이 나오지 않는데 만약 오군의 기병전력이 부족했다면 개활지에서 상대편에 기병이 몇천 정도 있다는 점 역시 껄끄러운 요소였을 것이다. 거기다 육손 스스로 말했듯 유비는 보통 적이 아니기에 신중한 태도를 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손의 전략은 맞아 떨어져, 그의 전략에 의하여 오의 영토 내로 5, 6백 리를 들어온 촉군은 장강을 따라서 전군과 후군이 7백 리나 되는 긴 전선을 형성했다. 이 사실을 들은 조비는 유비가 병법을 모르며, 7백리 군영으로 적을 막을 수 없고 고원, 습지, 험한 곳 등 장애가 있는 곳에 군영을 설치하는 일은 쉽게 포위당하기에 병법에서 금하는 바라며 유비를 비판했다

윤 6월, 유비를 관망하던 육손은 공격을 시작한다. 다른 장수들은 유비를 이기려면 처음부터 싸웠어야 하지 어째서 본토에 5, 6 백리나 들어와 요충지들을 차지한 지금에서야 들어오냐고 묻자 육손은 원정이 길어져(이 시점에서 원정은 약 1년에 해당한다.) 유비군의 기세가 흐트러졌고, 달리 선택할 계책도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육손전>에 따르자면 그가 손권에게 보낸 장계에서 말하길 촉군은 육군과 수군이 함께 진군하지 않았으며, 변화가 불가능한(둔중한) 상황이었고, 배를 포기했다고 언급한다. 실제 당시 촉의 수군 기록은 이릉 점령 기록과 마안산 전투 때 격파당했다가 자귀에서 배를 버렸다는 기록뿐이다. 수군을 감독했던 오반은 육로 진군으로 추정되는 매복계의 일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별개 선박들의 퇴각 기록, <육손전>에서의 마안산 수군 대파, 선주전에서 자귀에서 버려진 배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모든 선박이 문자 그대로 버려지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각 진지에 분산 배속되어 연락/보급 등의 역할을 맡아 통합된 '수군'으로서 활동할 여력을 잃었거나, 혹은 이릉에서 후방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박들이 주둔한 상태였을 것이다. 두 가능성은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둘 사이 어딘가가 실제일 가능성이 있다. <선주전>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수군은 이릉 양안에 주둔한 이후 더 이상의 활동 기록이 없는 상태였다. <육손전>에 묘사된 육손의 지속적인 관측에 따르면 적어도 전방에 위치한 효정과 이도의 사이에서는 오의 수군을 막을 만한 촉의 수군 전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였고 육손은 이를 확신한 시점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최초 유비군의 진지를 공격한 육손군은 패퇴한다. 비로소 유비군을 공격할 시기가 이르렀다는 판단하에 치러진 육손의 첫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지켜보던 부장들은 마치 그것 보라는 듯한 태도로 병사들을 소모시킬 뿐이라고 그를 비판했다. 그러나 육손은 오히려 자신만만하게 유비를 격파할 방법을 알고 있다며 제장들을 다독이며 화공을 시작했다. 육손은 병사들에게 각기 띠풀을 한 묶음씩 준비케 하여 다수의 요새들을 공격했다. 오서 육손전에는 여러 부대를 통솔하여 동시에 공격했다(通率諸軍同時俱攻)고 묘사되어 있는데, 여러 요충지에 있던 유비의 군사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촉군을 격파했다는 뜻이리라. 때는 마침 무더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고[119] 유비군의 진영은 나무 울타리, 목책으로 만들어진 터라 여기에 완전 상극이었다. 덕분에 화공이 크게 성공하였다.

사실 고대에 화공으로 대승리를 거뒀다는 건 전략도 전략이지만 사실 그 군대를 훈련시키고 통솔한 능력을 아주 높이 쳐야 한다. 왜냐면 네이팜탄 같은 걸 터뜨리는 게 아니고 기껏해야 기름이나 땔감 먼저 준비해두고 횃불에 불화살인데 이런 조건하에서 화공은 동시다발적으로 불을 붙여서 한번에 화르륵 해버리는게 중요하기 때문에 무전 이딴것도 없는 그 시대에 화공이 성공했으면 그건 엄청나게 잘 훈련된 군대이며, 그 통솔자가 매우 뛰어나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육손과 육손이 이끄는 오나라 병사들은 그에 적합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황권전>에 따르면 유비가 직접 강남으로 갔는데(효정) 육손이 물의 흐름을 타고, 갑자기 포위하자 강남에 주둔한 촉군이 패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육손전과 자치통감에서 화공의 주체가 육손이 인솔한 '각 부대'(육손전), '여러 부대'(자치통감)로 명시되는 점과 이 '여러 군대'가 동시에 함께 공격했다는 점을 보면, 육손의 수군은 강을 타고 이동하며 강에 인접한 진지들에 공격을 펼친 것으로 보이고, 이에 육지의 여러 곳에 주둔한 군대가 호응하여 각자 띠풀과 짚단을 들고 양측에서 육손의 지휘하에 동시에 수륙으로 포위 공격한 형태로 보인다. 배를 타고선 마른 짚단이나 띠풀로 불을 놓아 화공을 할 수는 없을 테고 수군만으로 효정을 포위할순 없었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 모든 부대를 인솔하는 총사령관은 육손이었으므로 이때 동원된 모든 오나라 군대는 육손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상에서는 육손이 물을 따라 강가를 향해 공격해오고 육상에서는 화공으로 진지를 혼란시켜 공격해 효정에서부터 이도 사이의 촉군 진지는 양방에서 공격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촉군 지휘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120] 이때 최전선 효정에서 지휘를 맡고 있던 대독이자 당장 계한보신찬에서 적을 가벼이 여겨 (대처할, 수습) 시기를 잃고 위험을 불러일으켜 재난이 이 한사람으로부터 생겨 커졌기에 (이 화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풍습반장의 부하에게 베여서 죽임(斬)을 당했다. 이로 보아 반장은 당시 육상으로 효정을 공격했을 것이다.

오군이 패스하고 지나간 이도 포위군의 장남주연에게 죽었다. <육손전>에 따르자면 이들은 직접적으로 붕괴하지 않은 상태에서 후방의 지휘부가 패주하자 별도로 퇴각을 시작했다. 이도에서 촉군이 포위하였던 바로 그 손환군은 이후에 '매우 강성하여 산골짜기에 가득한' 유비군을 육손과 함께 격파(이 서술은 1차 붕괴가 있던 효정-형문산에 대한 서술이거나, 2차 붕괴가 있던 마안산에 대한 서술이다.)하고 패주하는 유비를 추격해 탈출로 요소요소를 끊어 놓으므로, 일단 촉의 이도 포위군이 퇴각을 시작한 이후 손환군이 빠르게 북상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도 포위망을 유지하던 선봉 촉군은 공격당하자 자신들이 역으로 포위하던 손환군과 이릉 서편에서 공격중인 한당군, 마지막으로 육손 본대를 거쳐야 유비가 이끄는 촉군 본대에 도달할 수 있는 상황에서 기록이 사라진 상태이고, 이상의 정황을 볼 때 이 선봉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하다가 바로 격파당했다고 간주하는 편이 합당하다. 이 시점에서 촉군에 선봉이라고 명시되는 장수는 장남뿐이고, 그 역시 풍습과 똑같이 이 패배로 목숨을 잃었다는 계한보신찬, 육손전의 기록이 있다. 위에서도 얘기되었지만 장남은 효정의 권역으로 간주될 수 있으면서 이도 포위망을 관리할 수 있는 위치에서 죽었을 것이다. <주연전>에는 주연이 5천의 병사를 감독하여 유비와 싸우면서 육손과 협력하다가 '별도로 촉군의 선봉대를 공격해 격파하고 그들의 퇴각로를 막은' 사건이 유비군의 패주와 연관되어 서술되는 기록이 있는데 장남의 죽음은 이 시점으로 비정이 가능할 것이다.

촉군을 지원하던 호왕(胡王) 사마가[121] 또한 목숨을 잃었다. 총사령관 유비는 효정의 공격을 더 이상 막지 못하고 도주했고 촉군의 지휘체계는 총지휘부인 효정이 붕괴된 이 시점에서 개별 진지들에 거의 영향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40여 곳의 진영이 격파되었고 개별 진지들은 경우에 따라 포위당하여 항복을 시도하거나 배를 이용해 무질서한 퇴각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도성을 포위하고 있던 유비군의 선봉이 물러나니 성에 갇혀있던 손환의 애움도 알아서 풀려 손환 또한 참전해 유비를 추격했고 형세가 급격하게 기울어지자 도망칠 곳이 없는 두로유녕은 항복해버린다.

효정에 있던 유비는 후퇴하여 자귀와 이릉의 중간 지점인 마안산에 올라 주위에 군대를 다시 포진시켰으나 오군은 이를 추격해 포위했다. 한 차례의 거센 전투를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장수들을 다시 한 곳에 불러모은 육손은 다시 한 번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육박해가며 유비를 포위해 공격했다. 이때 마안산에서 급히 수습해서 집결한 유비 본대는 효정에 이어 2차 격파되었다. 유비의 진영은 붕괴되고 와해되어 오군에 대패하고 수만명이 전사했다.(자치통감) 이 패배로 인해 원정의 피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결국 유비군의 진지는 모두 격파되었고, 자귀에까지 패배가 이어졌다. 유비는 밤을 틈타 간신히 도망친 다음 자귀에 이르러 군사를 재수습했으며 이 시점에서 자귀에서 형주로 나간 유비군은 조직으로서는 궤멸되었다.

결국 유비는 효정에서 자귀로 돌아와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합하여 배를 버리고 육로로 파군 어복현으로 향했다. <손환전>에서는 유비가 배를 버린 까닭을 손환이 앞서 영안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시점에서 오의 수군은 이미 자귀를 스쳐지나가 강 상류의 촉 진지들을 공격하는 상태로 보인다. 촉서에 따르자면, 유비가 숨을 고른 자귀 그 자체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상총전>, <조운전>의 주석으로 달린 《조운별전》, 《계한보신찬》에 진수가 단 주석은 효정 패배와 별도의 자귀 패배를 서술하고 있으며 <상총전>에서는 자귀 패배 당시 상총의 진영만이 무사했다고 말할 정도로 큰 패배를 서술하고 있다. 왕보는 자귀에서의 패배로 사망했다. 결국 유비는 자귀에서 패배할 때 그나마 피해 없이 온전한 상태를 유지한 상총의 부대와 오반, 진식이 이끌고 있던 수군 등 남아 있는 부대들을 규합해 마침내 배를 버리고 육로로 파군 어복현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오군의 손환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유비의 도주로를 차단했고, 육손군은 육로로 유비를 추격했다. 유비는 약 이백여 킬로미터를 산행으로 도주하였다. 후전[122]을 맡은 부융의 군대는 오군의 항복 권유를 거절하며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멸한다. 계속해서 육손군의 추격을 받던 유비와 패잔병들은 역참에 있던 한 무명 관리의 기지로 인해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유비가 백제성으로 들어서려 할 때 그런 유비의 뒤를 막기 위해 역을 관리하는 자가 스스로 꽹과리와 투구를 져다가 태워서 후방의 추격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후에야 유비는 겨우 백제성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123]

하지만 육손군은 속도가 늦어졌을 뿐 추격을 계속했고, 백제성의 지척인 남산에 도달해 이대로 유비를 칠지 어떨지를 상의했다. 오의 제장들은 강력히 유비를 잡을 것을 건의했으나 육손은 위군을 우려해 이를 거부하고 돌아왔다. 자귀에서 유비가 패했을때 조운은 진군해 백제성에 도착했는데 오군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유비는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이렇듯 부융정기 등 충신들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유비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유비가 격파됨에 따라 북쪽의 황권은 222년 8월 길이 끊겨 어쩔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했고 황권 및 영(領) 남군태수 사합 등 318명이 형주자사에게로 와서 가(假)인수, 계극, 당휘, 아문, 고거 등을 바쳤다. 황권 등이 행재소에 이르자 조비는 주연을 준비하고 승광전(承光殿)에서 이들을 보았다. 황권, 사합 등은 각각 앞으로 나와 항복한 사정을 진술했으며, 조비는 군대의 승패와 진퇴에 대해 논설하니 위의 장수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황권에게 금과 비단, 수레와 말, 옷과 갖옷, 휘장과 처첩을 하사하고, 편장, 비장에 이르기까지 하사하는 것에 차등을 두었다. 황권을 시중 진남장군에 배수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그날로 불러 수레에 배승하도록 하였다. 사합 등 42인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며, 장군, 낭장이 된 것이 100여인이었다.

연의에서는 판본에 따라 제갈량이 유비가 짠 진을 보고 분노해 '이딴 식으로 진을 치라고 한 사람을 처형해라' 라는 말을 하지만 곧 진을 짠 사람이 유비라는 것을 안 뒤 이제 촉한도 끝이라고 탄식하는 장면도 나온다. 결국 진을 잘못 짠 탓에 유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두 차례에 걸쳐 군사를 수습했다고 한다. 물론 정사에서 제갈량이 실제로 이런말을 한 적은 없다. 그저 유비를 도울 훌륭한 군사였던 법정의 부재를 한탄했을 뿐.[124]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라면 절대 일으키면 안되는 전쟁이었으나 유비는 복수라는 감정하에 전쟁을 일으켰고, 자신이 세운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만다. 평생을 인의로 살아온, 혹자에 의하면 음흉하게 속여가며 쌓아온 이미지라 하더라도 그것을 개인의 감정 때문에 저버리고 일으킨 전쟁이, 유비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고 이후 촉의 하락에 분명히 영향을 미친 이 선택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유비와 관우, 장비라는 사람들의 서사를 완성시키고 삼국지와 자신을 역사에서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5.6. 도원종언

효정에서 꺾이고 마안산에서 대파당해 이릉대전에서 진 유비는 222년 8월, 백제성에 주둔하고 얼마 가지 않아 이질에 걸린다. 관우장비의 죽음과 형주 상실, 이릉대전 패배 등 잇따른 악재로 인한 화병이라는 설이 있다.

유비가 죽기 전,
"짐의 병이 처음에는 다만 하리(下痢, 이질)[125]였는데 그 뒤 잡다한 병으로 옮겨 거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하고 언급하는데,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우를 위한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원수를 갚기는커녕 일생 일대의 대패를 당한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게 아닐까 추정된다.

손권이 유비가 백제성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선주전>에 '손권이 선주가 백제(白帝)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선주가 이를 허락하고 태중대부 종위(宗瑋)를 보내 보명(報命, 답례)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비가 오를 다시 치려 했던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에 촉오 관계는 서로 어쩔 수 없는 각자의 사정 때문에 다시 화평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촉한은 이릉대전 이후 내부에 여력이 없었고, 손오는 곧바로 이어진 위의 침공을 막기에도 버거웠다.
유비위나라 군대가 대거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적군은 지금 벌써 강릉에 있소.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짐은 다시 동쪽으로 갈 것인데, 장군은 이에 동의하오?'

그러자 육손은,

'단지 걱정되는 것은, 폐하의 군대는 방금 패배하여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며, 양국의 화친 관계를 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스스로 보충해야 하지 병력을 궁핍하게 할 틈은 없습니다. 만일 십분 헤아리지 않고 다시 뒤엎어지는 상황 속에서 생존자들을 멀리 파견하여 오게 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오록

이 서신에서 적이 명확히 위군으로 명시되고 있으므로, 이는 딱히 조비의 남정을 틈탄 유비의 공격 의도를 나타낸다기보다는 이제 막 이릉대전 후 화친으로 서로의 관계가 재정립되는 시기에 유비가 지원 의사를 밝힘으로서 재정립된 양자 간 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외교적 수사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이어지는 육손의 거절까지가, 양자가 서로 예상한 수순에 가까울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유비 휘하에서 이릉대전에 참전했거나 후방에 있던 유비의 몇몇 장수들과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장수들은 남아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릉대전 후에도 유비의 인척인 오반이나 유비가 처음으로 쓰고 유능하다고 칭찬한 상총, 이릉 당시 별독이었던 보광, 요화 등은 살아남아 고위직에 올랐고 조운, 진도, 위연 등 남아있던 유비의 측근 숙장들이나 역시 유비의 인척이자 숙장인 오의는 제갈량 정권 하에서도 군부의 고위직을 유지했다.[126] 그리고 새 인재를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렇게 발굴된 무관 측 인재가 바로 마충이다. 또한 유비의 핵심 정예병들은 그 와중에도 상당수가 살았을 확률이 높은데 제갈량제갈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제성(영안)에 주둔한 '진도가 영솔하는 군사는 선제(유비)의 군사들 중에서도 백이로써 촉나라의 정예부대'라고 쓰고 있다. 이들을 유비의 측근인 진도가 지휘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군주 직속 수행원 개념으로서,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할 것을 맹세한 자들로 구성된 전사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외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조운의 강주병이나 위나라와 맞서 북부를 지키는 군사를 비롯한 각 지방의 병사들도 남아 있었다.

223년 4월, 유비는 백제성에서 붕어했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유비는 후사를 승상 제갈량과 상서령 이엄에게 부탁하는데 그로 인해 이엄은 유비 사후 제갈량에 이어 정권의 2인자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상 유비에게 권한을 이양받은 제갈량도 같은 탁고대신이지만 이엄이 큰 실수를 하여 북벌을 망치자 촉한 전 조정을 동원하기 전까지는 그가 대놓고 욕심을 부려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유비는 죽기 전에 권한을 분배했고 아들과 제갈량, 이엄으로 권력을 분립시켰다. 군권은 이엄이 가졌는데 그는 중도호가 되었고 통내외군사로서 영안에 남아 주둔했다. 유비는 자신의 병사들을 조운에게 맡긴 상황에서, 죽으면서 이엄에게 전체 군권을 맡겼던 셈. 하지만 이엄에게 무조건 맡겼다보긴 뭐한데 이엄이 비록 중도호/통내외군사로 조운보다 위에 있으나, 영안은 유비의 패잔병과 조운이 가진 강주의 남은 병사들이 주둔했다. 이는 오정벌에 나선 군대 (유비가 거느린 촉의 총 병권) 중 온전한 후방 병력은 온전히 조운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비 붕어 직후엔 조운이 중호군에 정남장군, 영창정후로 임명되면서 이엄과 조운의 역할이 분배된다. 제갈량이 북벌할때 이엄은 조운이 한중으로 이동하자 강주로 옮기고 이엄이 있던 영안에는 호군 진도를 남겨서 이엄에게 통솔하도록 했다.

어쨌거나 제갈량의 남중 정벌과 기산 정벌 이후 제갈량은 조운을 데리고 다니며 군권은 제갈량에게 이동했고 이엄은 북벌을 앞두고 후방을 맡기기 위해 동쪽으로 영안, 북쪽으로는 성도, 한수(가맹), 부, 한중까지 이를수 있는 중요한 지점인 강주로 이동시켰을 정도로 제갈량의 신임을 받았다. 또 수송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는 유비가 싸울 땐 제갈량이 담당하였고 이엄이 면직된 뒤엔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이 맡은 매우 중차대한 책무였다. 또한 <이엄전>을 보면 제갈량이 기산에 출정하자 승상부의 일까지 맡았다고 하는데 이는 내정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유비의 탁고대신이라는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볼 수 있는 예다.[127]

일세를 풍미한 영웅답게 유언도 참으로 대담하다. 제갈량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128]
"승상의 재능은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업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만일 그 아이가 그만한 재능이 있지 않거든 승상께서 성도의 주인이 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고굉지력(股肱之力, 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지절(忠貞之節, 충정의 절개)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이옵니다."

손성은 이에 대해서 유선과 제갈량이 다른 뜻이 없어서 그렇지 탁고를 뭐 이렇게 남기느냐면서 합당하지 않은 말이라 비판했지만, 호삼성은 예로부터 탁고를 맡긴 군주 중에 유비만 한 사람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같은 황제인 청나라강희제는 "유비의 말은 겉보기와 다른 이유가 있다" 하고 평했다.[129][130] 물론 유비가 어떤 생각으로 말했는지는 유비 본인만이 알 것이다.

죽기 전 유선에게
"착한 일을 작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되고, 악한 일을 작다고 하면 아니 된다(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131]

라는 말을 남겼다. 《삼국지》 <선주전>에 분명히 있는 기록이고, 《소학》과 《명심보감》, 《자치통감》에 인용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장이다. 이 다음에 덧붙여서 말한
"오직 어질고 덕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다. 이 아비는 덕이 부족하니, 부디 나를 본받지는 말거라."
도 나름대로 유명한 말이다. 평생 인덕을 추구하며 조조와 정반대의 길을 살아왔던 유비가 최후의 순간에 자신은 덕이 부족하니 나를 본받지 말고 나날이 덕을 쌓으라 하고, 반대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으며 죄없는 사람들을 무수히 죽여 시체로 강을 메운 조조는 죽기 직전에 젊은 날의 치기로 자기 대신 죽은 조앙의 일을 제외하고는[132] 전혀 후회할 일 따위는 없다고 했던 것과 극렬하게 대비된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두 사람이었다.

5.7. 무덤

유비의 혜릉은 지금의 청두 무후사 정전 서쪽에 있다. 223년 4월 영안궁(永安宮)에서 병사한 뒤, 5월에 청두로 옮기고 8월에 혜릉에 매장하였다. 유선은 자신의 생모이자 유비의 부인 감부인과 합장케 했고 후일 태황태후가 된 목황후도 사후 합장되었다.

원추형의 능묘는 작은 구렁처럼 보이고, 수목이 울창하고 잔디가 푸르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짙다. 능묘는 가림벽과 난간문, 묘지로 향하는 길, 침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림벽은 길이 10m, 높이 5m이며, 한가운데 마름모꼴의 석각이 새겨져 있다. 위쪽에는 구슬을 희롱하는 한 쌍의 용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박쥐가 새겨져 있다. 난간문은 너비 12m, 안길이 7m이며, 3칸의 한가운데 '한소열릉(漢昭烈陵)'이라고 적힌 현판이 높이 걸려 있다.[133] 하지만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유비보다 제갈량의 공을 높이 보아, 다들 무후사라고 불렀고 아무도 혜릉이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 중국에서 유비는 중국 신발 산업의 비조(鼻祖), 즉 원조로 여겨지고 있다. 2002년 12월 15일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중국 피혁협회가 유비를 중국 신발산업의 비조로 모시기로 하고 쓰촨성 청두의 신발공업지구인 우허우(武侯)구에 그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고 14일 신화통신이 전했다.

당시 중국 피혁협회장이었던 쉬융(徐永)씨에 따르면 유비는 청두에 촉의 도읍을 정한 뒤 신발산업을 적극 육성해 당시 쓰촨의 신발이 위와 오에 널리 수출됐을 만큼 국가적 특산품이었다고 한다. 또 제갈량을 모신 청두 무후사의 유비 상 위쪽에 걸린 편액에는 ‘1845년 신발산업 제자들이 세움’이라는 글귀가 씌어 있을 정도로 유비는 중국 신발 업계의 상징적 존재라는 설명이다. 유비의 묘소를 지키고 있는 유비의 후손은 신발 수공업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134]


[1] 후일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주 산업이 뽕나무 잎을 먹인 누에를 쳐서 만드는 비단 산업이라는 점에서 묘한 일화라고 할 수 있다.[2] 왕정 국가에서 이런 발언은 국왕의 죽음 또는 실권을 암시하기 때문에 제1계승권자여도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3] 이러면서 '승상(제갈량)이 경(유선)의 지량(智量)을 칭찬하여 심히 크게 수양해 바라던 바를 넘어섰다 하니 실로 그러하다면 내가 또 무엇을 근심하리!'라는 말도 남겼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유선의 나이가 이미 열일곱이다. 15세면 관례를 치르고 성인 취급하던 시절이니 열일곱이면 현대 기준으론 이미 대학생 정도인 건데도 책 제목까지 하나하나 적어주면서 공부하라고 독촉하는 걸 보면, 심지어 '승상이 너 공부하라고 책을 여러 권 직접 필사하기까지 했다. 너 꼭 찾아봐라'라고 하기까지 했으니...[4] 촉한의 법률제도[5] 예컨데 유비는 진기, 정현과 교류하면서 매번 (그들이) 가르침을 주어 치란의 도를 모두 언급했지만 사면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제갈량의 인용으로 잘 알려졌다.[6] 심지어 이런 사실은 다른 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어서 관우와 형제라고 칭할 정도로 친한 친구였던 장료는 관우 본인에게 '좌장군(유비)과 나는 한날 한시에 같이 죽기로 약조한 사이이므로 결코 저버릴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고, 유엽은 '관우가 죽었는데 유비가 복수를 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라고 했고, 유비는 정말로 관우를 위한 복수전에 나선다.[7] 전대, 당대, 후대에 걸쳐 이 셋처럼 끝까지 신의를 지킨 이들은 많지 않다. 설령 지키더라도 이들만큼 신의가 깨질 대위기를 겪은 이들 역시 많지 않다. 당장 실제로 의형제를 맺었다는 마등한수는 서로 뒤통수를 치며 싸우면서 신의를 깼고, 손책주유는 끝까지 서로를 신뢰했지만 둘은 대패해서 뿔뿔이 흩어지길 반복했던 유관장 삼형제만큼 신의가 깨질 위기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주유는 손책이 죽고 난 이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는데 의리를 지킨 것, 적벽대전에서 모른 척 항복할 수 있었는데 가장 강력한 주전파로 활약한 것을 봐도 주유는 유관장 삼형제만큼은 아니지만 꽤 의리를 지킨 편이다.[8]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군대가 경찰의 일까지 겸했는데 이 당시 현위는 대대장경찰서장인 셈이다.[9] 독우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관직의 명칭이다.[10]삼국지평화》에서는 이름이 최렴으로 나온다.[11] 다만 하밀승을 버리고 조조와 만났다가 반동탁연합군이 흐지부지 되고 고당현령이 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했으며 거기다가 회유할 만한 명망도 아직 부족하고 말단인 현령급의 인사를 장안의 동탁 조정에서 일일이 신경쓰면서 벼슬을 내려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당현령이 되고 나서 벼슬을 버린 후 낙양에 있다가 조조를 만났고 조조와 함께 산조에서 반동탁연합군에 종사하다가 서영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즉 적(賊)에게 격파된 이후 달아나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공손찬에 의탁했기에 이후 공손찬이 표를 올려 별부사마를 받게 하고 기주목이 된 원소를 상대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2] 또 조조가 혼자 가다가 발생한 여백사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유비가 같이 있었다는 얘기는 없다.[13]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공손찬 휘하로 동탁 토벌전에 참여했다고 나오지만 사실 《정사 삼국지》에서 공손찬은 동탁 토벌전에 참여하지 않았고 유비는 조조와 같이 참여했다.[14] <선주전> 기록은 이렇고 《화양국지》는 그냥 유비가 고당현령이 된 이후 바로 공손찬이 중랑장이 되자 표를 올려 별부사마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같은 삼국지의 <공손찬전>은 이때가 공손찬이 분무장군 직을 받은 이후라고 기록하고 있고 《후한서》와 《자치통감》은 이 시기 공손찬이 항로교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공손찬이 분무장군을 받은 시기는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 중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정사 삼국지는 189년 동탁이 낙양에 들어섰을 때, 후한서는 191년 30만 황건적을 격파했을 때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도 이 문제를 판단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적지 않았다. 원나라의 대학자 학경의 저서 《속후한서》는 《영웅기》를 인용해 동탁 토벌전에서 적에게 격파된 당시 유비가 분위장군 공손찬에게 갔다고 하여 초평 원년(190년) 당시 공손찬이 분위장군이라고 쓰고 있다.[15] 이 적에 의해 격파되었다는 것을 황건적 등의 도적떼에게 격파되어서 공손찬에게 갔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냥 고당현령을 쭉 하다가 도적떼에게 격파되어서 공손찬에게 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16] 연합군 중에서는 원소의 군사가 가장 강성해 대부분의 호걸들이 그에게로 모였지만 포신은 조조를 높게 평가했는데, 이를 미루어보아 장막과 함께 포신이 조조를 지원해서 포도가 따라갔다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17] 학경 《속후한서》는 《영웅기》를 인용해 '(초평 원년) 군을 일으켜 동탁 토벌에 종군하다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 갔다'라는 기술을 한 이후 "초평 2년 여름 6월, 원소가 기주목 한복을 쫓아내고, 스스로 주를 거느리며, 공손찬이 배치한 청주자사 전해를 공격했다. 겨울 10월, 공손찬이 표를 올려 소열제를 별부사마로 삼아, 전해를 위해 원소를 막게 했다"는 기록을 적고 있는데 공손찬이 자사를 배치한 것은 후한서 효헌제기와 후한서 공손찬전에 따르면 191년 11월에 30만 황건적을 격파한 이후이므로 초평 2년의 기록은 '유비가 별부사마가 되어 전해를 위해 원소를 막게했다'라는 기본틀만 빼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이 기록 전반은 그냥 넘어가기 쉬운 선주전의 '군을 일으켜 동탁 토벌에 종군했다. 적(賊)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공손찬은 표를 올려 (선주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田楷)를 위해 기주목 원소를 막도록 했다.' 라는 서로 이어지는 기록을 확실히 둘로 나누어 각각 초평 원년(190년), 초평 2년(191년)의 사건임을 확실히 기술함으로써 실제로는 두 사건 사이에 시간차가 꽤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18] 환, 영제 연간 평원군은 다시 국(國)이 됐기에, 유비가 평원을 실제적으로 다스리는 직책인 상이 된 것이다. 당시의 평원왕은 유석(劉石)인데 이오후(蠡吾侯) 유익(劉翼)의 자식으로, 건화 2년(148년)에 봉해졌다가 건안 11년(206년)에 봉국이 없어졌다.[19] 청주 평원군기주(冀州) 발해군(勃海郡) 경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20] 그러나 《후한서》 <원소열전>과 《삼국지》 <원소전> 《영웅기》 주석에 따르면 바로 이후 공손찬이 192년 12월(자치통감) 용주에서 패배해 193년 1월(후한서 원소열전, 자치통감)에 조정의 화해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21] 실제로 자치통감은 처음 유비가 등장하여 조운과 만난 이후 서주대학살에서 서주를 구원할 때까지 유비의 기록이 없다. 아마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보고 뺀 듯.[22] 다만 후술하듯이 여러 기록을 교차 검증하면 원담의 파견은 후한서 원소전의 기록이 가장 원래 파견 시기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23]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다시 부연하자면 192년 초에 계교 전투가 있었으니 그 뒤 공손찬이 최거업의 병력을 격파하고 남하했다가 전해를 제국으로 보낸 것이 192년 어느 시점으로 보인다. 한편 192년 겨울 유비는 고당현에서 원소와 조조 동맹과 싸우고 있었으니 전해와 함께 제국으로 갔다가 바로 고당현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24] 조기가 형주에 머물면서 장안에서 도망쳐나와 낙양에 있던 헌제에게 상주했다.[25] 손숭은 진짜 부임했는지 알 수 없고, 공융은 실제로 청주 북해국에 소재하고 있었다만 얼마 안 가 건안 원년(196년)에 원담에 의해 쫓겨난다. 그리고 그 후임이 조조가 추천한 이정(삼국지 이전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정도 얼마 안 가 죽고 비로소 조조가 표를 올려 청주의 실지배자인 원담을 정식 자사로 승인했던 게 아닌가 한다.(196년~199년 사이) 그 이전까지 원소는 황제의 재가 없이 원담을 청주 자사로 내세웠던 것이고.[26] 자치통감은 전해의 구원을 흥평 원년인 194년 2월에 붙여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지 무제기, 삼국지 도겸전 주석 오서를 보면 194년 봄으로 해석될 수 있다.(조조가 팽성(彭城)으로 진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자 도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저항하였고, 청주 자사 전해(田楷)가 와서 도겸을 구하려고 하니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도겸전 주석 오서) 흥평(興平) 원년(194년) 봄,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왔다.(무제기)) 어쨌거나 이후 전해의 서주 구원 기록은 사라지므로 194년 2월에 돌아가서 원소군과 싸웠다면 말이 된다.[27] 연의에서는 이 소식을 듣자 곽가가 "기왕 회군하는 거, 유비에게 글을 보내서 오늘은 이만 봐준다는 식으로 하시면 주공이 유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셈이 됩니다."라고 말한다.[28] 진등의 부친 진규는 원술과 친구였고 원술보다 좀 더 나이가 많을 것으로 보이는 원소가 조조와 동갑이라고 가정한다면 진규의 나이는 이때면 30대 후반~40대 초반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당시 진등은 20대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29] 다만 삼국지집해에서 심가본(沈家本)의 말에 따르면 '속지(續志) 에서 서주부는 호(戶)가 476054고, 구(口)는 2791683이라고 했다. 이에 백만이라 칭함은 이미 열에 여섯, 일곱이 비는구나. 대저 서주가 조조가 도륙함을 지난 후이나, 남은 무리가 오히려 이 정도 수이니, 즉 지난 날의 부유함을 알 만하다. 연후에 기주 측은 조조가 원담, 원상을 이긴 후에, 겨우 30만을 얻었으니, 그의 도륙이 계속됨은 어째서인가!'라고 했다. 즉 심가본의 말은 조조가 그 난리를 치고도 50만은 되었다는 얘기.[30] 정사 삼국지에서도 소패로 칭하긴 한다.[31] 원술이 이런 발언을 뱉을 만한 개연성은 있다. 탁류파의 중심인 원가의 아들로 태생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한나라 귀족층 사교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몸이고 거기에 원술 본인이 어려서부터 유협생활로 떠들썩해서 난다긴다 하는 젊은이들은 다 자기가 알고 자기가 모르면 허접한 놈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꽤 있다. 이런 원술이 아무리 나름대로 유망주였어도 한나라 최북단 유주 탁군 출신의 촌놈인 유비를 일찍부터 알았을 리 없다. 원술이 유비를 인식했을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를 개연성 있게 추정하자면 조조랑 어울리던 동탁토벌전 시기 정도긴 하다. 그러나 사실 손견과 함께 위세를 떨치느라 바쁘던 원술이 당시 제후도 아닌 잡장이었던 조조에게 새로 합류한 신참 정도일 유비에 대해 알았을 가능성은 낮고, 유비가 공손찬 산하 최전선에서 원소를 방어하고 있을 때 동맹군인 공손찬의 주요 부하 중 하나로 유비란 사람이 있다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이 때 즈음에는 원소와 공손찬의 싸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최전선에서 일군을 이끌던 유비에 대한 인식 정도는 반드시 했으리라 짐작된다.[32] 삼국지연의에서는 술쳐먹은 장비의 뻘짓 중 하나로, 조표는 단순히 상관의 주폭에 당한 불쌍한 배신자로 나온다. 다만 실제 상황은 보다 복잡한데, 조표는 유비 이전부터 도겸을 오랫동안 섬겨왔고 벼슬도 하비상으로 당시 중랑장에 불과했던 장비보다 확연히 높을 정도로 만만찮은 입지를 갖고 있었다. 유비의 서주 지배에 대해 불편히 여기던 단양파의 리더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벼슬이나 입지로 보면 최소한 이들 중 거목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장비는 당연히 유비충성파였고, 서주에는 이들 외에 유비에게 호의적인 진규/진등, 미축 등 서주의 토착 실력자들까지 세 세력이 있는 구도였다. 그런데 유비와 관우의 부재 중에 단양파의 조표와 유비파 중 가장 강경한 장비가 마찰이 생긴 것이다.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엮여있었는데, 당시 유비는 서주를 넘겨받은지 2년도 채 되지 않은데다 외부인사란 특성상 기존 인사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지라 이런 폭탄을 처리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조조의 대학살로 쑥대밭이 된 영토를 재정비하는게 우선이라 현실적으로 정리할 시간도 없고, 원술을 토벌하러 전력을 끌고 간 상황이라 여러모로 최악이었던 것.[33] 정확하게 패국인지 패현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당시 유비가 여포에게서 도망나온 곳이 다름아닌 패현임을 감안하면 전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조조가 유비를 도망나온 곳으로 정식 관직을 주고 다시 되돌려보낸 격이 되기 때문. 그리고 패현이 패국의 치소인 상현과 구분하기 위해 소패라고 불린 것을 감안할 때 '패'라고 불렸던 것은 패현이 아닐 가능성에 추가한다.[34] 영웅기에 따르면 패성(沛城)[35] 실제로 삼국지집해에 인용된 (삼국지) 송본에선 "장수와 병졸의 처자식을 잡았다."라고 썼다.[36]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당대에는 굉장한 무례였다. 유비는 여포에게는 이름을 부르면서 깔보고, 정원동탁에게는 호칭까지 붙여가며 예를 표한 것으로 여포를 비난한 것이었다.[37] 우금은 관우에게 투항한 책임을 물어 조비 시기에 안원장군으로 강등된다. 장합은 사망 직전 정서거기장군이라는 명예직을 역임하고 있었다.[38] 원가를 멸족시킨 후, 조조는 황제 놀음을 하던 유표를 한실의 권위로 크게 압박했다. 유표는 지절을 가졌을지언정 정남장군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유표가 꺼내든 카드가 유비였지만, 유표는 유비가 세력을 키우는 것을 두려워 하여 크게 쓰지 못했다.) 협천자에 하북과 오환을 평정한 조조는 유표 사후 형주를 그대로 접수해버리는데, 조정의 권위도 큰 몫을 했다.[39] 유비가 가진 거라고는 관우, 장비, 미축, 미방, 진도 정도. (조운별전에 딱히 모순된 내용이 없으므로) 조운조차 없었다.[40] 비교를 위해 언급하면 '위왕' 조조가 자신의 최측근 하후돈에게 내린 가장 높은 벼슬이 전장군이었고 이는 한참 후의 일이었다. 또한 장합이 좌장군 자리에 오른건 조비가 황제가 된 이후였다. 즉 이때 당시엔 (순전히 명목상이긴 하지만) 벼슬만 놓고 보면 조인이나 하후돈 같은 사람보다 유비가 높은 직위였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는 잡호장군이던 하후돈에게 도독에 해당하는 권한을 줄 정도였으니 명목상 벼슬은 큰 의미가 없고, 당연히 조조 군 내에서 바로 유비의 입지가 저 둘보다 커졌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 정도로 높은 벼슬이었다는 것.[41] 사군(使君)은 사(使)가 붙은 고관을 높여 부르는 말로 여기서는 자사의 경칭이다. 이때 유비는 실질적으로 조조에게 얹혀사는 처지였으나 일단은 예주자사를 제수받았었기 때문에 사군이라 불러준 것이다. 조선의 사또에 해당한다.[42] 여기서 당시 협천자를 개시한 사공 겸 거기장군이었던 조조가 유비를 '사군' 나으리로 높여 부르는 한편 반대로 자신은 이름을 불러 스스로를 극히 낮추고 있다. 지금도 한자 문화권의 예법으로는 본명을 성씨도 없이 부른다는 것은 완전히 연하의 아랫사람을 대하는 하대이다. 조선으로 비유하자면 세도정치기 최고권력자로 영의정을 세 차례나 지낸 김좌근이 상갓집 개 시절의 흥선군 이하응에게 "오위도총관 대감마님과 소인 좌근"이라고 한 것과 같으니 유비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알 법하다.[43] 비슷한 예로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에서도 서문에 표를 올리는 제갈량이 신 량(亮)이 삼가 아뢰옵니다.라고 자신을 낮춘다.[44] 설령 유비가 황제의 밀명을 따르지 않았더라도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은 성격의 조조가 당장이야 유비가 유용해 좌장군 벼슬까지 주면서 이른바 넘버 2로 우대해 잘 써먹으려고 나뒀다가 어느 시기에 유비에게 유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해 이를 빌미로 제거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조조의 핵심참모인 정욱이나 곽가부터가 유비를 경계해 죽이자고 하는 판이었고.[45] 물론 유비가 중앙정부에서 떨어져나가고 중앙정부와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속관을 임명하는 이상 유비는 중앙정부의 실질적인 좌장군이라고 할 수 없지만 직접 부여받은 관위가 일종의 작위로서 기능해 권위를 가지게되어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46] 난세이던 당시 명분은 아무 힘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막강한 힘을 주는 다소 모순된 존재였다. 모든 벼슬은 황실이 내리는 것인데 황실이 힘이 없으니 조정에서 주자사 자리 줬다고 해도 그 주를 실질적으로 점거하는 세력이 생까버리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힘이 생겼을 때 그 명분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유비는 황실로부터 정식으로 임명받은 좌장군이었고 의대조 사건의 주동자들이 동지로 인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조의 입김으로 직위를 박탈되어도 "역적 조조가 황제를 감히 능멸해 내린 조치는 황제의 칙명을 받드는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명목 하에 무시할 수 있고, 이걸 인정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유비는 훗날 한중왕에 오르며 좌장군부를 반납하기 전까지 좌장군부를 설치해 운영했고, 유비의 세력은 다른 세력에게 없는 명분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유비가 합류한 세력은 명분 면에서 크게 먹고 들어가고, 이 명분의 힘은 훗날 관우의 북벌이나 제갈량의 북벌 당시 위나라 세력 내에서 이들에게 호응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 볼 수 있다.[47] 기록에 따라서는 주유 병력을 3만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48] 여기서 조조는 유비를 '사군'으로 높여주는 한편 반대로 자신은[49] 이 주제와 상관없지만 하북을 평정하고 고향 유주로 돌아가는 것도 유비 개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집안 기둥뿌리 뽑아먹어가면서 한량짓 하던 말썽쟁이가 좌장군으로 금의환향해서 집안 어른들과 고향 노인들에게 효도와 보은하고, 장세평소쌍이 살아있으면 말값도 갚는 등...[50] 다만 장비와 하후씨의 결혼은 정략결혼인지 아니면 장비의 납치혼인지 논란이 존재한다.[51]논어》에 나오는 말이다.[52] 자기 나라에 패전(敗戰)을 일컫는 말,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뜻이다. 패적 자체가 전장에서 싸웠다는 것을 전제로 한 용어이다.[53] 소패, 예주 패국 패현이다[54] 무제기, 선주전 본전, 원소전, 관우전, 자치통감에서는 일관적으로 유비가 싸우지 않고 도망을 갔다는 기술이 없으며 통감고이에서 사마광은 위서의 기록이 터무니 없다 기술했으니 자치통감의 서술은 따라서 유비가 싸웠다는 것을 기본으로 작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냥 도망쳤다면 적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하니 그들을 쫓아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잡은 것이 2천여 명이었다.라는 식으로 별도로 기록을 했어야 하는데 삼국지 본전에 그런 기록은 없다.[55] <관우전>과 <선주전>에서는 禽(생포)을 강조하고 있다. 관우는 고립된 상태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패배하여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자치통감》에서도 '進拔下邳,禽關羽'라고 기록해 조조가 하비를 공략하고 관우를 사로잡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하비에서 공성전 끝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인다.[56] 이것은 조운 별전에 따랐을 때의 합류 시기로, 조운전만 보면 유비가 도겸에게 지원갔을 때 이미 합류 상태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대체적으로는 조운전에서는 그냥 수종만 한거고 본격적으로 따르기 시작한 건 조운 별전 시기라고 절충하는 의견이 대세인 듯하다. 실제로 예주와 서주, 허도에 유비가 있었을 때는 조운의 기록 자체가 유비군 관련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어 위키백과나 관련 서적 등에서도 합류 시기를 이 시기로 잡는다.[57] 자치통감의 현대어 번역인 자치통감전역에서는 '汝南郡的黃巾軍首領劉辟等背叛曹操,回應袁紹,袁紹派遣劉備統兵去援助劉辟,周圍的郡、縣紛紛起來響應'이라고 써서 '(여남) 주위의 군현 대다수가 잇달아 호응하였다'라고 쓰고 있다.[58] 그전부터 공을 세우면 무조건 유비에게 돌아간다고 천명했었다.[59] 물론 겉으로 유비가 원소를 떠날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벽, 공도와 함께 유표의 지원을 받아가며 조조의 후방을 노리고 사보타주를 벌였지만 이게 망하는 바람에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던 것이니까, 원소도 어차피 명분만 취하면 유비에게 더 볼 일도 없었을 테니 가능했던 일이긴 했다. 뭐, 이유야 어쨌건 유비가 먼저 원소를 은밀히 떠나고자 했던 건 사서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관우가 조조 휘하에서 안량을 참한 것도 있어서 떠나고 싶었을 테고.[60] <환계전>에 따르면 환계가 장선에게 조조 편을 들 것을 권유하여 장선이 장사와 옆의 세 군을 인솔하여 유표에게 항거하고, 사자를 보내 조조를 만났으며 조조는 매우 기뻐했다. 마침 이때, 원소와 조조가 전투를 계속했으므로 조조의 군대는 남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표는 급히 장선을 공격하였고, 장선은 병들어 죽었다. 성은 함락되었으며, 환계는 스스로 몸을 숨겼다 한다.[61]태평어람》에서는 유비가 조조의 객장으로 있을 때 조조가 선물로 말을 골라주게 했는데 유비는 흉마라고 꺼려져 방치되어 야위고 병든 말을 보자 그걸 골랐는데, 주위에서는 비웃었으나 훗날 이 적로라 불리는 말은 유비를 구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유비 본인은 언제나 말에 타고 진두지휘하며 싸워온데다 개와 말을 좋아했으니 이 일화에서 적로의 가치를 알아봤던 모양이다.[62] 그도 그럴 것이 유비가 형주에 머물러 있을 때 북쪽엔 원상의 세력이 살아 있었고 남쪽의 유표와 북쪽의 원상이 연계하면 조조도 형세가 어려워진다. 원상도 절대로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닌데다 고간 같은 뜻 밖에 위협적인 적수도 있었다.[63]영웅기》의 저자 왕찬은 당시 형주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었고 유표의 이름으로 외교문서를 대필한 것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을 보면 외교 쪽 일을 담당했을 테니 유비를 조정에 상표한 것을 본 게 확실할 것이다.[연의] 채부인 포함.[65] 정사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후일 유비가 유기와 힘을 합친 것도 그렇고 유기가 제갈량을 중시하여 그에게 계책을 물었다는 데서 이미 그 상황이 다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66] 선주는 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공이 졸지에 당도한 것을 몰랐다.(선주전)[67] 완은 번과 매우 가까이 있어 적병이 이미 경계로 들어오나, 숨기고 서로 알리지 않아 과연 선주는 몹시 놀랐다.(삼국지집해)[68] 오늘날의 후베이성 징먼시 둬다오구(掇刀区).[69] 적벽 대전은 조조가 동오 침공을 급하게 서두른 탓에 스스로 패배를 자초한 면이 컸지만, 형주의 민심이 조조에게 절대 우호적이지 않았기에(서주대학살로 인한 백성들의 극혐+형주 피난민들 유린 등...) 서둘러 동남 전역을 마무리 지어 후환을 없애야 했던 것이고, 그런 상황을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유비의 피난민 수용이었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70] 조운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구출해온 아두가 바로 촉의 2대 황제 후주 유선이 된다. 유선은 호부견자의 대명사로 유명해서인지 이것 가지고 조운을 까는 농담이 꽤나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물론 조운이야 구할 수 있는 유비의 가족을 구해서 오는 부하 장수로서 해야할 자기 역할을 했을 뿐이다. 유선이 훗날 못난이 짓을 할 거라고 조운이 무슨 수로 예견하겠는가.[71] 즉 '손권은 장강을 끼고 많은 군대와 모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나 우리 주군인 유비는 천하의 영웅이므로 어찌 항복하겠소?'라며 은근히 깐 것.[72] 손권이나 노숙 항목에도 있지만 이 '옷을 갈아입다'라는 표현은 곧 화장실에 감을 의미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려면 옷을 일부 벗어야 하는데 과거 고위층의 의복은 입고 벗는데 많은 품이 들어 널찍한 탈의실이 딸려 있었기 때문이다.[73] 이라고는 하는데 《오주전》, 《건강실록》에는 주유, 정보가 실질적으로 지휘하는건 2만[74] 그나마도 건강실록, 오주전 기록에 따른다면 유비가 직접 본 병사는 2만으로 본인이 보유한 병사랑 똑같다.[75] 顧望 - 형세를 관망하며 거취를 결정하지 아니함.[76] 專美 -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함. 그러니까 오나라 쪽이 적벽대전 승리를 자기들에게 좋게만 포장하려고 했다는 뜻이다.[77] 오 약 3만, 유비군 약 2만으로 정사의 전기마다 병력 규모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는 손유 동맹과는 달리 조조군은 20만에서 80만까지 정사의 전기마다 기록이 매우 다르다. 약 3~4세기 지나서도 쉽지 않았던 인원을 단 한 지역에서 동원한다는 건 과장이거나 미친 짓이다. 정말로 그만한 인원을 들이고도 패배했으면, 조조의 시대도 끝났을 거다.[78] 사실 강릉 앞에서 조조의 군대와 맞서는 가운데 일을 진행시켜야 하며 강릉성 혼자 물자를 대기는 무리므로 보급을 위해 장강 남쪽에 물길을 공유하는 유비군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데 천하삼분이라는 계획이 있는 유비군이 상황이 어렵다는 식으로 제대로 협조를 할 리가 없다.[79]화양국지》에 따르면 이때 유비는 "익주가 현명하지 않아, 좌우에게서 재앙을 얻고 있으니, 장군의 높은 의리로, 위로는 한조(漢朝)를 바로잡고, 아래로는 종실(宗室)을 돕길 바랍니다. 만약 반드시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면, 이 유비는 장차 산림에서 제멋대로 하며, 감히 명을 듣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좀 더 분명한 어조로 전쟁을 일으키면 재미없다고 협박하고 있다.[80] 그리고 유비는 주유와 함께 남군 공방전을 하면서 주유가 어깨죽지에 화살을 맞아 치명상을 입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몸 상태로 안 그래도 성공 가능성이 먼 원정길을 그대로 성공시킨다고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81] "지금 동맹이 까닭 없이 서로 공격하고 정벌해, 조조에게 계기를 빌려줘, 적에게 틈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으로, 훌륭한 계책이 아니오."라는 말에 호삼성 역시 동감했는지 이에 대해 이르길 '추(樞)는, 문호(門戶)가 움직이고 흔들리는 것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조조가 오, 촉을 흔들고자 하나, 아직 그 흔들림을 얻지 못했음을 말한다. 만약 자기들끼리 공격하고 정벌하면, 그에게 움직일 수 있는 계기를 빌려주게 되는 것이다.' 라고 했다.[82] 당장 적벽 대전 때부터 기껏 기대했더니 병력은 적어서 실망했던 적이 있고, 이 와중에 군재가 뛰어났던 주유도 죽은 마당이다. 결국 은관의 계책을 채택한 것으로 보아 유비도 대체 손권의 군사적 능력의 뭘 믿고 원정의 선봉짓을 해야하는지 의문을 가졌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하물며 안 그래도 공안에 오나라 관리와 병사들이 깽판치는 손부인 따라와 있는 마당에 익주 원정은 형주에 대규모 병력 주둔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더 위험하다.[83] 습착치는 과거 제환공이 교만하게 굴자 배반한 나라가 아홉이었고 조조가 교만하자 천하가 삼분되었다며 수십년간 노력해도 찰나에 이렇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평가했다.[84] 유장의 지배력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85] 한편 이때쯤 헌제춘추에 따르면 순욱이 수춘에서 죽자 수춘을 도망친 어떤 사람이 손권을 찾아가 조조가 순욱에게 복황후를 죽이라고 했지만 순욱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자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손권은 그 사실을 촉에 알렸다. 유비는 화를 내며 늙은 도적이 죽지 않았으니 환란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86] 중국에서는 아예 융중대를 비판한답시고 조조가 오기 전에 신야에서부터 장로는 약해빠졌으니 한중을 노리고 연이어서 양주를 공격했어야 한다는 괴악한 글을 쓴 작자도 있다. 일단 유비를 받아들인 유표가 허락할지는 둘째치고 조조가 행여나 쳐들어오면 그나마의 근거지 신야를 잃는데다가, 신야에서 상용을 거친 후 한중까지의 거리나 보급의 불가능성, 길의 험악함은 말할 것도 없고 장로도 실제로는 만만치 않은 군벌에 지형의 이점까지 있는 상황에서 당시 형주를 온전히 아우르지 못한 유비의 세력으로 한중을 차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연이어서 조조도 어렵게 상대한 양주 군벌 세력을 공격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제갈량도 이 지역을 공격할때는 이 지역 융족과 화친하라고 조언했을 정도니 말이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그 글을 본 사람들 가운데 '차라리 신야에서 장안을 치는 게 더 가까우니 장안을 치라고 하지 그래요?'라고 한 사람도 있다.[87] 여기의 사대부는 후대의 사대부와 의미가 다르다. 일반 군사의 의미로 士와 관작이 있는 벼슬아치의 大夫의 합칭 정도다.[88] 통감에선 관두(關頭)라 썼다. 호삼성이 이르길 즉 백수관두(白水關頭)다.[89] 자연스럽게 관우가 형주를 진수받게 되는데 유비가 익주를 정벌하고 세력 중심지를 익주에 옮기게 되면서 기존 형주를 도맡는데 적합한 인사가 관우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비는 황제나 왕이 아닌 좌장군임에도 황제나 왕처럼 권한을 내려 그에게 동독형주사이자 양양 태수, 가절월을 내리고 형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서 담당하게 한다.[90] 사실 《영릉선현전》 기록이 아니라 삼국지 본전 기록으로는 유비는 익주의 재정을 모두 장악하고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전 기록을 기준으로 하면 부고의 개방은 병사들이 아니라 유비가 주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91]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은 이렇게 평했다. '일주일 동안에 어떻게 갑자기 다소 안정되었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유엽은 대략 유비가 촉 지역을 지키고 있는 것을 살펴보고 범접할 수 없는 점이 있어서 이런말로 조조에게 대답했을 것이다.'[92] 둘의 신경전은 유비와 유장을 따르는 신하들 사이에 신경전을 대표하는 기록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실제로 유장이 유비를 익주로 불러들인다고 하자 강하게 반대한 유장의 신하들도 있었고.[93] 화흠이 문을 부수고 황후를 끌어내자 머리를 풀어헤친 채 산발을 하고 끌려가던 황후가 헌제에게 살려달라고 하자 헌제는 울며 "나도 언제까지 살지 모르오"라 대답하였다.[94] 후한서 군국지에는, 파서, 파동의 명칭은 없고 파군만이 있다. 초평 원년(190년)에 파군을 갈라 영녕군을 설치하고(파군-영녕군) 그 후 건안 6년(201년)에 유장이 파군을 갈라 영녕군을 파동군으로 삼고, (기존의 파군 속현인) 점강현으로 파서군을 설치했다. 이 무렵에 파군태수가 따로 존재하는 걸 볼 때(장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막았던 엄안이 바로 파군태수) 파군-파서-파동의 구분이다. 《진서》 지리지의 설명도 이와 유사한데 유비가 촉을 차지한 이래 속현 일부의 이동은 있지만 이 파-파서-파동(이른바 삼파)의 체제는 그대로 이어진다.[95]자치통감》, 《촉서》 <법정전>, 《화양국지》 <유선주지> 기록, 《촉서》 <선주전>에 따르면 218년.[96]후한서》 효헌제기 삼보결록주에 따르면 당시 경조(京兆) 사람인 전의는 자가 덕위(德偉)로 스스로 대대로 한나라의 신하이니 이에 발분하여 경기 위황과 함께 천자를 끼고 위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유비를 돕고자 했으나 일이 실패하고 삼족이 멸해졌다.[97] 왕조의 이름과 동일한 봉지명을 쓰는 제후가 있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주나라 때의 주공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한 황제는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당시의 한왕에서 칭호를 높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한왕이라고 칭할 경우 유비가 장차 헌제를 밀어내고 스스로 한나라의 황제가 되겠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다.[98] 같은 제후왕이라도 봉지명이 한 글자인 1자왕(국왕 또는 친왕이라고도 함)이 2자왕(군왕(郡王)이라고도 함)보다 높은 지위다. 다만 고려조선이 친왕 격이었던 건 봉왕이나 번왕이 아닌 외번국의 국왕으로 인정하여 그러한 것이다. 중국 국내의 봉왕ㆍ번왕들은 식읍 및 비서실 정도의 왕부(王府)를 열 수 있을 뿐, 본격적인 행정조직을 가질 수가 없지만, 국왕은 행정조직(6조 등)을 가질 수 있다.[99] 관우의 죽음은 미방이 오나라로 귀순하여 배신한 탓도 있었는데, 미축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결박해 유비에게 죽여달라고 청하였으나 유비는 미축의 잘못이 아니라며 위로하며 예전처럼 대하였다. 이 때까지는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있었던 셈. 그러나 부끄러움과 슬픔을 이기지 못한 미축은 시름시름 앓다가 곧 화병을 얻어 눈을 감고만다.[100] 다만 촉서 선주전은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여 황제위에 오른 후, 화양국지는 연호를 연강으로 바뀐 후 이 기사가 나온다.[101] 한 헌제 유협. 강남에서도 조비가 유협을 살해했으리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자치통감 호삼성 주석에서는 '당시 촉인들이 전하길 한제가 이미 살해당했다고 하니 이로 인해 칭하길 선제라 하였다.'(時蜀人傳漢帝已遇害,因稱之爲先帝)라고 적었다.[102] 촉서 선주전: 건안 25년(220년), 위문제(魏文帝, 조비)가 존호(尊號)를 칭하고 연호를 고쳐 황초(黃初)라고 했다. 혹 전해 듣기로 한나라 황제가 해를 입었다 하니, 이에 선주는 발상(發喪)하여 상복을 입고, 시호를 추존해 효민황제(孝愍皇帝)라 했다. 이 이후로 여러 곳에서 뭇 길조들이 있다고 말하여 해와 달처럼 서로 잇대었다.(日月相屬).[103] 후한 말 군벌인 유표와는 동명이인[104] 殷純, 《화양국지》에 따르면 음순(陰純).[105] <선주전> 원문에는 초주가 참가했다고 되어 있으나 <초주전>에서는 초주가 권학종사가 된 것은 유비가 죽은 건흥 연간에 제갈량이 명한 것이며 초주의 나이를 상고하면 당시에는 겨우 20대 초반이라 이런 중대사항에 참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삼국지집해에 학자들이 고증이 적혀있다. 《화양국지》에는 상서로운 도참을 말할때 "주군(周群)의 부친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라고 적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심가본은 "부친 군" 두 자가 베끼다 잘못돼 거꾸로 된 것으로, 응당 "신 군의 부친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라고 하는 것이 화양국지의 말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여기서 나오는 초주의 이름은 주군이 와전된 것으로, 글을 베끼다 군(群) 자를 놓치고, 다시 초(谯) 자를 잘못 더한것이라고 했다. 중국어 위키문헌에 제공하는 화양국지교보도주(華陽國志校補圖注)본 에서도 같은 이유로 '주군'으로 적고 각주로 '(화양국지의) 각 구본(舊本)과 삼국지에는 동일하게 '초주'라고 적혀있다. 고찰하건데 당시 초주는 아직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尚未入仕), 이 표 안에는 주군(周群)이 밝혀져 있다. 당시 전사(傳鈔)하면서 잘못 쓰여 주군이 초주가 되었다. 이곳을 개정하니 상세한 주를 그대로 따른다'라고 교정했다.[106] 반미(潘眉)가 말하길 '적가에서 세 태양이란, 고조, 광무제, 선주(유비)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세 태양의 예언에 부합한 것이다'라고 했다.[107] 備, 준비하다는 뜻도 있지만 유비의 휘인 '비'를 뜻하기도 한다.[108] 이 도참은 광무제 유수와 엮이던 도참과도 유사하다, 낙서견요도(洛書甄曜度)에 따르면 붉은 세 덕이 구세를 창성하면 수(광무제 유수의 휘)의 증표가 모이고 황제의 때로 합쳐져 편안히 새겨 봉해진다.(洛書甄曜度: 赤三德 昌九世 會修符 合帝際 逸刻封.)고 한다. 이는 《후한서》 97권 지(志) 제7 제사상(祭祀上)에 나오는데 이외에도 유사한 도참이 여기에 꽤 실려 있다. 촉한은 광무제처럼 한실을 부흥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므로 이런 광무제와의 공통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필의 의견처럼 그 당시의 풍습을 따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109] 少傅, 구경(九卿)의 하나로 천자의 어의, 어물, 경비, 식사 따위를 맡아보는 관직.[110] 이때 구경의 출신을 보면 남양 출신의 뇌공, 영릉 출신의 황주, 익주 한가군 출신 왕모로 왕모는 후에 뇌공의 후임 태상이 된다. 형주에서 온 남양-남군 출신말고도 촉한에선 이와는 관계없는 형남 영릉 출신인 유파, 장완, 황주 등이 기용되기도 했고 왕모는 이후 뇌공 후임으로 태상도 지내면서 주 안에서도 이을 자가 없다고 평가받는 등 고평가를 받는다.[111]송서》 역지(曆志)에 따르면, 유씨가 촉에 있으며, 역법을 고치지 않았으니 한의 사분법(四分法)을 그대로 썼다.[112] 배송지는 유비가 비록 한경제로부터 나왔다 하나 세대 수가 아득히 멀어, 종족 계보를 밝히기 어렵고, 한을 계승해 어떤 황제를 원조(元祖)로 삼아 친묘(親廟)를 세웠는지도 알 수 없다. 이때 빼어나게 슬기로운 이들이 보좌하고 유생들이 궁에 있었으므로 종묘에는 필시 헌장(憲章)이 있었을 것인데, 실어놓은 기사에서 누락되었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라고 했다.[113] 그래서인지 유비의 심중을 이해할만한 측근이었던 제갈량은 대장군을 부활시키지 않았다. 촉한에서 대장군이 임명되기 시작한 때는 제갈량이 죽고 승상이 영구결번이 되면서 승상을 대신할 직위가 필요해졌을 때였다.[114] 모든 면에서 최적임자인 관우가 죽은 다음에 대장군에 임명될 만한 인물은 마초와 장비 뿐인데 둘 중 누구를 임명해도 골치가 아파진다. 마초와 장비는 사방장군 임명 당시부터 마초는 좌장군, 장비는 우장군으로 유비는 마초를 약간이나마 더 위 직위에 임명했다. 이는 당시 제후였다가 유비 휘하로 들어온 마초의 입지를 존중해 (유비 진영에서 군공이 더 적은) 마초를 더 높은 벼슬에 임명한 것인데, 실제로 마초는 대장군 다음가는 표기장군에, 장비는 거기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비를 대장군에 임명한다면 원래 더 높은 위치였던 마초의 불만을 사게 된다. 반대로 마초를 대장군에 임명한다면, 거병 초기부터 유비를 섬긴 장비나 다른 부하들을 제치고 후반부에 합류한 그에게 최고명예인 대장군 직위를 주는 것이기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대장군이란 군권을 쥐고 무관으로서 최고직위이기 때문에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라 줄세우기 식으로 주긴 힘들다. 조조가 황실을 끼고 있을 때 본인이 오르려다가 원소의 위세에 눌려 억지로 양보한 직위이며, 조비가 선양받은 이후 조위의 일등 공신이자 조조의 오른팔인 하후돈에게 준 직위이다. 관우를 임명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없었기에 애매해진 것.[115] 유비는 조비가 바꾼 연강, 황초 연호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건안 연호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116] 유비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대인을 그려서 묻은 것을 황제가 붕어하는 형상임을 알았다.[117] 이하는 모두 '육손전'이 출처다.[118] 유비에 대항할 때 장군들 가운데 어떤 이는 손책 시대의 노장이고 어떤 이는 황실의 친척이었으므로 각각 긍지를 갖고 서로 듣고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119] 연의에서는 무더운 날씨 때문에 촉한의 군세가 지쳤다고는 하는데 일리가 없는 얘긴 아니지만 당시 중국의 기후는 대체적으로 한랭건조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육손은 기후를 살펴보아 마침 건조한 날씨를 기다려 화공을 했을 공산이 있다.[120] 강한 바람을 탄 산불의 전파 속도는 초속 30-40m 정도나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상대편의 계략이 화공인 것과 그 공격이 시작되는 시기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면 불길을 잡기도 전에 불이 순식간에 번졌을 수 있다. 만약 효정에 수군이 있었다면 임기응변으로 병력을 수군에 태워 육상의 화공을 피하고 강에선 육손의 수군과 대치하며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상황은 그리 흘러가지 않았다.[121] 이 호왕이라는 칭호 때문에 사마가는 북방 이민족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자세한 얘기는 사마가 문서 참고.[122] 후퇴할 때 추격하는 군사를 막아 전 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후방에 있는 부대를 말한다.[123] 유비는 이릉에 도착한 후 사천성 봉절현에서 동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백제성까지 직통으로 연결하였는데 연도에 역마점을 두어 잘 연결되도록 하였다. 유비가 도망할 때 오의 군사가 뒤를 쫓아왔는데, 이때 다행히 이 많은 역점에서 일을 맡았던 관리인이 유비군이 버리고 간 갑옷 등을 모아서 좁은 길에 모아두고 불을 질러서 추격군의 추격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상 국역 자치통감에 달려 있는 주석.[124] 법정은 유비가 한중을 얻고 나서 고작 1년 뒤에 45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제갈량은 '법효직(법정)이 살아있었다면 능히 주공을 동쪽으로 이끌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주공이 그의 간언을 무시하고 동쪽으로 가셨어도 형세가 이렇게까지 기울어지진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125] 대장에 세균 감염이 일어나는 병으로 당시에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병이었다. 한 종류의 이질 바이러스는 합병증을 일으키는데 아마 이것에 걸린 것으로 추측된다.[126] 특히 조운의 경우 중호군에 올라 황실금군의 통솔권과 군대의 임명권을 쥐었는데 이를 보면 유비의 황실측근 세력은 이릉대전 후에도 제갈량 정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127] 문제는 같이 유비에게 탁고(나라의 장래를 믿을 사람에게 부탁함)를 받은 이엄이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고 칭왕을 하라(참고로 촉한에서 한실역적 1순위 조조가 구석을 받고 위왕을 칭했다)' 고 꼬드긴다(이에 제갈량은 이엄에게 어디서 감히 칭왕 및 구석이란 단어를 꺼내냐며 꾸짖었다) 이엄이 진짜로 그러라고 권한 것인지, 아니면 제갈량의 충성심을 시험하려고 권한 것인지, 아니면 제갈량이 이를 덥썩 동의하면 제갈량을 숙청할 명분이었는지는 모르나 유비의 탁고를 받은 이엄이 촉한에 분란을 일으킬 뻔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름 가능성이 생겼던 4차 북벌이 이엄 때문에 퇴각하게 되자 제갈량은 이엄을 탄핵하는데, 그 명분들 가운데 하나가 선제(유비)에게 탁고를 받은 이엄이 감히 소신(제갈량)에게 구석과 칭왕을 하라고 권했다는 것이 언급되며, 상소문을 보면 제갈량이 같이 유비에게 탁고를 받은 이엄에게 느낀 배신감이 절절하게 묻어난다.[128] 정사에서 알려진 유언은 제갈량과 유선에게만 남긴 유언이며, 연의에서는 조운에게도 '그대와는 젊은 시절에 만나 함께 온갖 고생을 하며 난세를 누볐는데 내가 부덕해서 그릇된 판단을 한 결과 이렇게 먼저 떠나게 되었다. 부디 젊은 날의 정을 잊지 말고 어린 내 아들을 보필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 추가되었다.[129] 현재도 여러 해석이 있는데, 개중에는 '이 사람은 내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로 깊게 믿는 사람이니 그대들은 승상 하는 일에 토달지마라'고 제갈량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실어줬다는 추측이 있다.[130] 영웅기에서 형주 시절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를 물려줄 뜻을 보였다고 하였으나, 배송지는 이를 두고 "유종을 이미 후계자로 정해놓고 유비한테 이러는 게 말이 되냐" 하며 깐 적이 있다. 당시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를 맡기겠다고 했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이면 유비가 장차 형주를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 당시 형주에 퍼져 있었다고 사료된다. 유비의 유언과 이런 일화 때문인지 삼국지연의에서는 병중의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를 권하는 장면이 나오며,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평생 사마의를 의심한 조조와 다르게 유비는 제갈량에게 촉의 주인 자리를 내주려는 신뢰를 보여준 덕분에 제갈량이 평생을 촉한에 바쳤다고 묘사한다.[131] 하작은 주역 계사하전(系辭下傳) 에서 이르길, "선이 쌓이지 않으면 명성을 올리기엔 부족하고, 악이 쌓이지 않으면 죽기엔 부족하다. 소인은 작은 선은 무익하다며 행하지 않고, 작은 악은 해가 되지 않는다며 물리치지 않기에, 악이 쌓여 바로잡을 수 없고, 죄가 커져 벗어날 수 없다."인데, 유비가 이를 경계로 삼았으니, 즉 독서를 매우 즐기지 않은 게 젊은 시절이었지만, 그 후에는 즉 책의 중요함을 알게 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132] 조앙이 죽은 뒤 당시 그를 친자식처럼 길렀던 양부모 정부인은 "내 아들을 죽여놓고 무슨 낯짝으로 뻔뻔하게 살아 돌아왔습니까? 어떻게 공께서 이럴 수 있습니까!" 하며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이에 조조는 정부인이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갖도록 친정으로 보냈다 나중에 다시 찾아가 용서를 빌며 자신과 다시 함께 해달라고 싹싹 빌었다. 그러나 이미 조조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진 정부인은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그를 외면했고, 결국 조조는 씁쓸하게 "당신은 아직 젊고 재능도 많으니 나같은 놈보다 더 나은 이를 만나 행복하게 사시오" 하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훗날 조조가 임종을 기다릴 때 측근에게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모든 일에 후회는 없지만 조앙의 일만큼은 평생의 짐이 되었다며, 만약 사람에게 영혼이 있어 조앙이 내게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자신은 뭐라 답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고 한다.[133] 한소열의 혜릉의 위치에 대해선 명리학에 능하고 풍수를 볼 줄 알았던 명나라의 공신 유기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이 부분은 해당 문서 참고.[134] 썰에는 짚신 수공업은 쇼맨십이고, 실제로는 황릉 관리자라는 말도 있다. 이 썰이 사실이면 유비의 후손이 선조의 무덤을 지키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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