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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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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비의 계보3. 혈통에 대한 의혹 제기가 부정되는 근거
3.1.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사칭해서 얻을 수 있는 실리3.2. 후한 말엽 당시 족보를 위조해 친족에 끼어들기란 불가능하다
4. 정황 증거
4.1. 적대 인물들도 혈통을 의심하지 않았다4.2. 어딜 가나 살아남았는데 유비의 혈통이 이유였다4.3. 정사에 일족과 나눈 교류와 가계에 대한 상세 기록이 있다4.4. 유표, 유장 등 당대의 유씨 군웅이 유비를 친족으로 보았다4.5. 칭제 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5. 결론6. 기록의 오류?7. 삼국지연의에서8.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1. 개요

유비의 혈통에 관해 제기된 음모론과 이에 대한 반박을 정리한 문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비가 한 황실의 혈통이 아니라고 부정할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사실상 유비 본인이 주장하는 황실 혈통이 맞다고 봐야한다.

예전부터 제대로 된 근거없이 막연하게 유비의 혈통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문열이 평역 삼국지에서 주장하기를 "중산정왕 유승은 120명이 넘는 자식을 두었는데, 그 많은 자손들 중에 족보를 사칭해서 끼어드는 것은 쉽지 않겠는가?"라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중국의 학원강사인 위안텅페이(袁腾飞) 역시 주장했던 것으로[1], 유비가 종친이 아니라고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당장 이문열의 경우엔 정확히는 유승의 아들 유정의 후손이라고 정사 삼국지에 명시되므로 이문열이 정사도 제대로 안 읽었다는 증거가 되며, 위안텅페이 역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나 사료 없이 사견을 표명한 것에 지나지 않고, '유비가 황실 종친일 수도 있지만 당시 종친만해도 수십만이었다'며 종친이라고 다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했다. 결국 유비가 황실 종친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나 추론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정사 기록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2. 유비의 계보

정사에 기록된 유비의 조상들을 살펴보면, 유비는 전한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먼 후손으로, 일단은 황족이긴 하다. 황족이라면 황족이지만, 후한은 광무제 계열이 아닌 전한 황실의 자손에게는 황족의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유비는 유승의 서자인 육성정후 유정의 후손으로, 유정은 주금을 한무제에게 적게 올렸다가 파면되었다.[2] 그 후에는 유비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에서 복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비의 조부 유웅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연주 동군 범현의 현령)에 이르렀다.

3. 혈통에 대한 의혹 제기가 부정되는 근거

3.1.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사칭해서 얻을 수 있는 실리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의 후예는 당시 황제인 헌제와 촌수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까마득한 방계다. 두 사람의 집안이 갈라지기 시작한 건 경제 세대인데 헌제는 그의 13대손이다. 유비가 경제의 몇대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350년에 이르는 걸로 보아 그래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헌제와는 20촌이 넘는 사이였을 텐데 이 정도는 거의 남남 사이나 다름없다. 이에 더해 중산정왕은 아들의 숫자만 무려 120명에 달했고 당연히 그 후손은 지나가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만큼이나 많았다.

게다가 당시에 촌수로 유비보다 현 황실과 더 가까운 종친 인사는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당장 조조 밑에서 모사로 일하던 유엽만 해도 후한 광무제의 7남 부풍질왕 유연의 후손이었다. 다른 군웅인 유우는 광무제 장남인 동해공왕 유강의 후손, 진왕 유총은 후한 명제의 후손으로 이들은 후한 황통에서 그렇게 먼 인물들도 아니었다. 당장 광무제의 손자인 후한 장제의 후손들이 돌아가면서 황제 하던 시절이다. 더 가까운 종친 인사들도 가만히 있는데 까마득한 선조의 몰락한 방계의 말예 주제에 그것만 내세워 한 황실 부흥을 기치로 걸고 발호했다간 세간의 통렬한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3] 그냥 산술적으로 따지면 1대에 자식을 세명씩 봤다고 쳐도 경제부터 헌제까지 13대가 지나는 동안 자손이 160만명에 달하는데, 경제도 그렇고 헌제의 조상인 장사정왕 유발만 해도 자식을 많이 두었다. 자식 많기로 유명한 유승이 세상에 뿌린 (...) 자손들까지 하면 정말 엄청난 수의 "황족"들이 있었을 것이다.

전한 황족 계열들만 봐도 유표, 유언, 유대, 유요 등 유비보다 훨씬 격이 높고 명성도 높은 유씨 일족 군웅들이 많았다. 하지만 유우는 공손찬에게[4], 유총은 원술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유요손책에게 축출당하는 등 황족이라도 힘이 없으면 얼마든지 비참한 수모를 당할 수 있었다. 유표나 유언[5]처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힘을 키운 황족들은 아예 조정을 무시하고 황제놀음 까지 하는 상태였다. 거기다 조조가 황실을 장악한 이후에는 황제는 그냥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저항하려고 했다간 복황후, 동귀인 처럼 무참히 찍혀나가는 상황이었다. 어설픈 종친 사칭은 이득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논영회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유비의 조상은 일찌감치 한무제 때 작위를 박탈당했고, 후한 시대에는 이미 광무제 직계 이외의 전한 황실 후손은 제위계승권을 인정 안 해서 유비 정도의 종친은 성만 황성을 쓰는 일반 백성이나 다름 없었다. 조선 기준으로 대략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11대 후손이 영조대에 스스로를 왕족 운운하는 수준이었다. 참고로 동아시아에서 통상적인 종친의 범위는 군주의 5대손까지다. 임영대군파 11대손쯤 되면 종친부에 들어있던 시기보다 종친부 벗어난 시기가 더 오래될 지경. 중산정왕의 후손이 몇인지 육성후가 작위를 박탈당했는지 같은 문제는 나올 것도 없이 그냥 까마득하다. 중산정왕이 아들을 1명만 뒀어도 이랬을 수준인데 중산정왕은 아들을 120명이나 두었다.

이처럼 중산정왕의 120명이나 되는 아들 숫자 때문에 당시 황실 종친의 숫자는 말도 안 되게 뻥튀기 되어 중산정왕 후계는 직계여도 거의 대부분 종친 취급을 받지 못했다. 유비의 선조는 그중에서조차 서열이 상당히 낮은 축에 들어갔으며 이미 그 당시에 후작 작위를 박탈당했다. 왕위계승권에 근접했던 왕자여도 11대손 쯤 내려오면 종친 취급을 거의 받지 못하는데 이미 당대에 작위를 박탈당한 서열 낮은 황손의 후손이 종친 취급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광무제의 후예라고 사칭하는 게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사칭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수준의 혈통이었던 유엽조차 조조참모 중 한 명이었을 뿐 황실종친이라고 해서 뭔가 특출난 대우를 받은 게 아니었다. 왜냐면 당시 중원의 판도 자체가 한 황실 혈통빨을 거의 받을 수 없는, 후한 말기의 난세였기 때문.

부유하거나 이름 있는 뒷배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개인 능력으로만 밑바닥부터 올라온 황족 출신이라는, 고금에 없을 특수성을 어필한 덕분에 조조와 헌제를 비롯한 당대의 많은 세력과 군벌들이 그 이용 가치를 탐내다가[6] 통수를 당하긴 했으나, 반대로 이런 부분이 빛을 발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오로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세력을 모은 뒤에나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7] 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명목도 적통 유씨 황실이 힘을 잃은 난세였기 때문에 된 거고, 태평성대였다면 그냥 국성을 쓰기만 한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3.2. 후한 말엽 당시 족보를 위조해 친족에 끼어들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족보라는 물건이 단순히 전근대시기 이전까지 공통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착각이다. 같은 '족보'여도 명칭만 같을 뿐, 유비가 살던 2~3세기와 17~18세기 이후 시대의 족보는 사실상 별개의 물건이었다.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드는 행위는 조선 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가짜 족보가 나돌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달로 집집마다 제각기 족보를 갖출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짜라도 일단 족보를 만들어두면 그 문헌에 근거해서 같은 조상이라고 우겨서 끼어드는 시도를 할 수 있고, 끼어들기를 당하는 쪽도 '문서화'된 족보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영부영 일족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족보 위조 행위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날조라기보단 어느 정도 몰락한 잔반과 금전적 거래로 말을 맞췄다. 양반전이나 태평천하 등 당대의 족보 문제를 다룬 작품을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또한 개인 뿐만 아니라 문중에도 여러 혜택을 주는 등 이런 저런 일들을 해줬기 때문에 암묵적인 합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상이 조선시대 후기의 사정이다. 후한을 비롯해서 인쇄술 발달 이전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우선에 족보가 집집마다 있는게 아니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인쇄술이 없었고, 종이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조선시대와는 달리 집집마다 족보를 한 부씩 갖추는 건 불가능했다. 즉, 족보는 일족의 유력자나 관청에서 보관되거나, 유력자의 묘비문 형식으로 기록하거나, 친족들의 기억에 의지해서 서로의 관계를 식별할 수밖에 없었다.[8] 이렇게 되면 친족을 인증하는 것은 일단 친족 서로 간의 기억과 유력자만이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헌 정보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록 문화가 발전하기까지 집안과 친인척 관계를 중요시하지만 따로 족보가 없는 경우에는 씨족이나 부족의 혈통을 전적으로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조상 직계는 4대는 기본이고 그 이상도 외우기도 했으며 그들의 자손관계까지 외우는 경우도 흔했다. 지금이야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예전엔 팔고조도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위아래로 본인의 혈연관계를 외우는 것이 기본 소양이었다. 유교문화권의 제사를 비롯해 전근대 종교의식을 그렇게 강조했던 것도 그렇게 한 번 일가를 싹 모아야 가족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9]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 기록기술과 문화가 발달하기 전에는 많은 문화권에서 보였던 공통된 현상인데, 이름 자체를 XX의 아들 XX 하는 식으로 짓거나 자기소개를 할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까지 밝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서양 중세물이나 이슬람 문화권, 유목민족 등을 다룬 매체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이름만 말하는 게 아니라 "A의 아들인 B의 아들 누구요."하고 내력을 대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10]

친족을 사칭하려면 그들에게 가서 집안 내력을 말하고 기억을 맞춰야 했는데 생판 남인 외부인이 끼여들기 불가능했다. 당장 나 누구 자손이오 라고 칭하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기본에 그들의 형제 관계와 자손 내역까지 말하는 게 기록 기술 발전 이전에 기본이었다. 현대의 대한민국에는 많이 이러한 개념이 퇴색되었지만 아직도 농촌의 집성촌에 가면 사촌을 넘어서 팔촌까지 족보를 외우는 노인도 있다.[11]

후한시대는 농경사회다 보니 요즘처럼 도시로 나가서 일한다든가의 이유로 가족 구성원들이 멀리 퍼져사는 시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거리에 모여서 사는게 기본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친족 사회는 조선시대 양반들도 한 수 접고 갈 정도로 폐쇄적이고 견고했다. 그렇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일족임을 사칭하여 끼어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든 친족을 강압하거나 일시에 속여서 많은 사람의 기억을 일시에 변조해야 하기 때문이다.[12]

또한 족보 위조 행위가 벌어지려면 끼어듦을 당하는 문중도 한미해야 하고 끼어들 사람의 집안 자체도 상당히 잘 나가야 했다. 끼어드는 사람은 족보를 위조하고 누군가를 매수할 돈이 필요하고, 문중은 그런 지원을 받을 만큼 상황이 좋지 못해야 했기 때문. 하지만 유비가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둘이서 가내 수공업으로 근근이 목에 풀칠하고 살던 가난한 청년이었단 건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의 공부도 좀 잘나가는 집안 어른이 돈 대줘서 겨우 마쳤고 나중에 유명해진 후에도 돗자리나 짜던 놈이라고 인신공격을 당할 정도였는데 족보를 사서 황족을 사칭했다기엔 가세가 너무 기울어있지 않은가? 거의 조선 후기의 잔반 수준인데 이 정도면 유비는 족보를 팔아서 누군가를 문중에 끌어들이는 쪽이라면 몰라도 족보를 사서 문중에 끼어드는 쪽은 절대 될 수가 없는 셈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세가 기울었다곤 해도 엄연한 나라의 최고 가문인 황실이 족보 위조 행위를 용인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진짜로 황실을 사칭할 경우 생기는 문제는 더욱 커지는데, 이 때의 이름난 군벌들은 유표나 유언-유장처럼 중앙에서 파견된 황족 및 그들의 자손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칙명에 의해 붙여진 벽보에 따라 근왕의 기치를 내걸고 발흥하여 황건적 소탕을 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다졌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 조정과 황제는 사실상 군벌들의 꼭두각시가 됐지만 어쨌든 그들은 엄연히 황실의 권위와 황명에 기대 발흥한 세력이었기에, 그 권위에 기대어 경쟁자를 역적으로 몰아 황명에 따라 합법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비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커지던 때, 그들 앞에는 "군벌을 이끌고 여러 방법을 거쳐 자력으로 성장한 촌뜨기 출신의 숨은 고수가 알고보니 황실의 친족"이라는 무시무시한 경쟁자가 자기들도 모르는 새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13] 그 경쟁자는 인품이 결코 나쁘지 않았기에 그 인품을 믿고 근왕의 기치 하에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 혈통을 경계하여 사칭범으로 몰아 제거하기 위해 혈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시도도 있었을 것이다. 진짜 사칭범이면 이 시기에 이미 집중공격을 받아 세력이 끝장났겠지만, 밑에 써져있다시피 황궁 내부사정을 모조리 꿰뚫는 조조조차도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적이 된 유비를 비하하는 욕설이 고작해야 "돗자리 장수"였다.

4. 정황 증거

4.1. 적대 인물들도 혈통을 의심하지 않았다

후한 말에는 상대방의 혈통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을 경우 그 점을 트집잡아 공격하는 프로파간다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원술이나 공손찬원소가 얼자라고 '종놈', 심지어는 원가도 아닌 게 원가를 사칭하는 놈이라고 헐뜯었던 것이라든가, 원소가 조조의 혈통이 '환관' 집안이라고 비웃었던 것은 전부 당대 사서의 기록에 남아있다. 말이 프로파간다이지 사실상 서로한테 대고 "원소 애미 종년", "조조 할애비 고자" 운운하며 패드립을 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유비는 황제일족이 거지생활을 면치 못했다고? 라는 당연스러운 의혹이 있음에도, 실제로 적대관계가 되었을때 돗자리 팔아 빌어먹던 그지새끼라는 욕은 종종 들었을지언정 개구라 황손등이 욕설등은 일절 없었다.

특히 조조의 경우 그 유명한 논영회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평생에 걸쳐 다른 모든 군웅들을 제껴놓고 오직 유비만을 자신의 가장 껄끄러운 상대로 여겼던 인물이다. 혹시라도 유비에게 혈통 관련해서 뭔가 트집잡을 거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유비의 혈통에 대해 조사해보는 것이 당연하며, 당시 협천자를 통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의혹거리가 있었다면, 그걸 트집잡아 역적으로 몰아붙여 유비 세력을 궤멸하는 것 정도는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조조 입장에서는 유비를 살려둔 채 붙잡아두고 할 바에는 처음부터 유비를 황족 사칭죄로 제거해버리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관우 장비 등을 회유하는 편이 훨씬 편하고 깔끔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결국 유비를 황제에게 직접 소개하면서 황족으로 인정해야 했고, 이후에도 "귀 큰 놈", "시장 바닥에서 돗자리나 팔던 거지 새끼"이라고 모욕했을지언정 유비의 혈통에 대해서는 전혀 트집을 잡지 않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이는 조조가 유비의 혈통이 거짓이라는 증거는커녕 의혹조차도 찾지 못했다는 말이다. 훗날 유비가 칭제를 할 때 멸망한 한(후한)을 잇는다는 의미로 국호를 한이라 했는데, 이 당시 후한을 멸한 조비 측에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당연히 유비의 혈통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나 조비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유비의 혈통을 부정하지 못했다. 적어도 삼국시대 당시에는 유비의 혈통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개차반 패륜아에 불효자 에피소드도 한가득인 조비가 이 정도의 공격거리를 고작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놔두었을 가능성도 낮다.

이렇듯 당대의 거의 모든 기록과 당시 사람들이 당사자인 유씨 일족에서 적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유비가 황실 종친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후대사람들이 유비의 혈통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당대 사서를 보면 혈통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뭔가 기록에 남기거나 확실하지 않다고 서술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수의 경우 손견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의 자손이라는 떡밥에 대해서는 "아마 손무의 자손일 걸로 추측된다."라는 불확실한 추정만 했지만 유비와 조조는 명백하게 그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거론했다. 그런데 손견은 현대에서 이미 손무의 자손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굳어졌고, 유비는 혈통을 사칭했다고 의심을 받는다.

일부에서는 조위의 입장에서 조조 인생 최후의 난적이었던 유비를 의도적으로 띄워줘야 조조에 대한 면피가 되니 사서에 유비의 황실 혈통을 긍정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위는 그렇다 쳐도, 조위 외에 유비와 적대하던 그 누구도 유비의 혈통에 대한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다. 예로 유비와 한 번도 좋은 관계였던 적이 없던 원술만 봐도, 종국에는 유비가 아예 조조군을 이끌고 자신을 치러 오는데도 유비를 가짜 황족이라고 비난한 적이 없다.[15] 유비의 유기-유종의 승계 문제를 두고 대립하던 형주 채씨 문중,[16] 적벽 직전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노래를 부르며 손유동맹을 반대하던 강동 호족들,[17] 유비의 입촉을 반대하던 친 유장 휘하 서촉 세력들이나 한중에서 대치했던 장로, 아무런 정당성 없이 뜬금포로 칭제를 감행한 손권 등 조조 아니어도 유비를 까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누구도 이걸 써먹은 적이 없다.[18] 까놓고 촉한 수립의 정당성이 오롯이 유비의 황실 혈통에 있었는데[19] 혈통을 문제삼을 수 있었으면 조위나 동오가 이걸 안 써먹었을 것이며, 그런 심리전이 벌어졌으면 당대 기록에 흔적이 남지 않았겠는가?

애초에 삼국지는 조위가 아니라 서진에서 편찬한 역사서다. 서진 입장에서 최대 관심사는 한-조위-서진으로 이어지는 정권 승계의 정당성이지 조조의 통일 실패에 대한 변명 따위가 아니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이 승계구도에 가장 껄끄러운 존재인 촉한 황실의 혈통에 대해 아무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 후대의 유비 혈통 논란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 수 있다. 만약 이런 공범 논리대로 속은(혹은 이용해먹은) 쪽이 우스워지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조씨 황실을 짓밟고 집권한 사마씨 정권은 더더욱 이 문제를 들먹임으로써 조씨와 유씨, 심지어 손씨까지 동시에 두들겨 이득을 취해야 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미 유비의 혈통 문제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 사실관계가 이미 다 정리되어 있었고 완벽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4.2. 어딜 가나 살아남았는데 유비의 혈통이 이유였다

일찍이 유비는 조조를 암살하려다 들켜 원소에게 도망쳤다. 그런데 원소의 신하들이 계속 유비를 죽이라 했지만 원소는 유비가 황족이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고 융숭하게 대우해줘야만 했다. 애초에 원소 본인부터 공손찬과 불구대천이 된 이유부터 유비와 동일한 황실종친인 유우를 공손찬이 살해해서였는데 만약 원소가 유비를 죽이면 그 순간 원소는 공손찬 같은 놈이 되어버리고 만다. 애초에 원소는 황족을 존중한다는 게 가장 큰 명분인데 유비를 죽이면 그 명분이 공중분해되는 것이다.[20]

유비는 원소로부터 이탈한 이후 다시 친척인 유표에게 갔다. 이 때 채모 등이 유비와 격렬하게 대립했으나 그 채모 역시 끝내 유비를 죽일 수 없었다. 유비가 황족임은 물론 유표가 친척 동생 대우를 해줬기 때문이다. 채모는 유비를 이를 갈며 증오했음에도 유비가 황실종친이라서 유비를 못죽인 것이다. 채모는 괴월과 짜고 유비를 암살한 뒤 사고로 죽은 것으로 위장하려 했지만 유비는 적로를 타고 도망쳐 위기를 넘겼다. 채모가 유비를 제거하려는 게 굳이 사고로 위장한 암살이어야만 했던 것 역시 유비가 황족이기 때문이었다. 유비가 일반인이었더라면 채모가 대놓고 체포해도 되었을 상황이었다. 유비가 황족이라서 이렇게밖에 못한 것이다.

이 외에도 유비는 어딜 가서 의탁하든 황실종친이라는 신분 덕분에 그를 받아준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했다. 공손찬의 예로 알 수 있듯, 황족을 함부로 죽이면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4.3. 정사에 일족과 나눈 교류와 가계에 대한 상세 기록이 있다

당시의 중국 사회는 일가 친척간의 배타적인 상호 부조 구조가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사 선주전에는 유비가 유씨 일족과 가진 관계들이 묘사되어 있고, 특별히 신뢰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된 적이 없다.

이렇게 유비가 유씨 집안의 후예들과 씨족 공동체 안에서 긴밀하게 교류를 가졌다는 사실들은 모두 위-진을 정통 왕조로 보고 있는 진수의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당장 유비의 학문을 지원해 준 이는 친척 삼촌뻘인 유원기이며, 유원기의 아들인 유덕연과 같이 공부했고 숙부 유자경에게 꾸짖음을 들었다는 내용 등은, 유비가 유씨로서 유씨 종중의 친척들과 교류해 왔음을 보여준다.[26], 진나라 관리들도 이런 진수의 삼국지를 남겨두어야 한다면서 필사했으며 배송지를 비롯한 후세의 역사가들도 이 점을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비가 제위에 오를 때 습착치는 "한의 제사가 끊겼는데 유일하게 세력있는 종실인 유비가 당연히 그 뒤를 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평을 달았고 배송지가 습착치의 견해야 말로 최선의 견해라면서 맞장구쳤을 정도다.

다만, 자치통감에서 계보 기록의 부재를 들어 의문을 제시하긴 했다.[27] 그러나 '중산정왕의 후손이 지나치게 많아서 구체적인 가계도가 없다'라는 수준인 데다가 향촌 사회가 붕괴된 위진남북조 시대나 족보 날조가 성행하던 당 시대의 사례를 기계적으로 유비와 비교한 것이라, 후한 말기 당시에 황실 종친들과 주변인들이 유비의 혈연관계에 대해서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을 반론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애초에 저 서술 자체가 "황제와 촌수가 이렇게나 까마득히 먼데 한나라의 명맥을 이을 수 있느냐"란 의문을 표하는 것이지, 황제와 이어져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28]

애당초 한나라의 인재 등용 방식인 향거리선제가 이런 견고한 한나라 시기 향촌사회를 근거로 성립 가능한 제도였고, 유비의 조부 유웅은 바로 향거리선의 방식 중 하나인 효렴을 통해 등용되었다. 향촌 사회가 붕괴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사람들이 워낙 이리저리 유랑하다 보니 배타적인 친족 집단이 명확하게 유지되기 어려웠고 엉뚱한 집안 사람이 끼어드는 것이 조금 더 쉬워졌다.[29][30] 허나 유비는 그 시절이 도래하기 전에 태어나고 성장하여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기에 해당 사항이 없다. 예컨대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맞아 유-손 동맹을 맺었을 당시에도 제갈량이 유비를 한실의 후예로 당당히 유세했을때 손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유장과 유비 자신이 같은 한의 종실임을 천명했을 때도 다른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유비가 오를 칠 때도 오나라 측의 반응이나 주변인들의 반응 역시 '선조인 한을 멸한 국적(國賊)인 위를 먼저 쳐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이 역시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것을 당대인들이 인정했다는 증거이며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자치통감 자체도 유비와 그가 세운 나라를 각각 한주(漢主), 한(漢)으로 표기함으로서 당대에 그들이 한나라의 계승을 천명하고 본래의 국호가 한(漢)이라는 사실 자체는 그대로 적었다.

후세 학자들은 유비가 한종실인 것을 당연하게 판단했고, 오히려 삼국지에서 유비를 한소열제로 쓰고 제기(帝記)로 기록해야 하는데 왜 선주라는 표현을 쓰느냐며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령 조선의 학자 성대중은 자치통감과 저자 사마광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며 "사마온공은 경에서는 맹자를 의심하고, 사서에서는 위나라를 황제로 칭했으며, 양웅을 성인으로 과장하고, 순욱을 왕좌지재라고 했으니, 비판할 점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흠잡지 못하는 것은 그의 행실이 상도에 맞아 비난할 만한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司馬溫公以經則疑孟, 以史則帝魏, 詡揚雄以聖人, 目荀彧以王佐, 可議者多, 然人不得以疵之者, 以庸行之無可議也)."라고 하였다.

4.4. 유표, 유장 등 당대의 유씨 군웅이 유비를 친족으로 보았다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를 소개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유비가 유장의 친척이라는 이유였다. 당시 관념에서 성씨 사칭은 중대한 범죄 행위이고,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다면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다. 거기다 종친 사칭? 그리고 후한 조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후한 말 황실은 유명무실하였지만, 유표와 유장은 각각 형주, 성도의 군주였다. 직접 유비와 만난적도 있는데 만약 사칭이었다면 유비 세력은 끝장났을 것이다.[31]

또한 '황실 종친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직접 좌장군으로까지 직위를 올려주던 조조는 당연히 유비의 혈통에 대한 공격을 못했던 것이 아닌가?' 라는 의혹에 대해서도 이것으로 해답이 가능하다. 아무리 조정과 유표의 거리가 멀었다거나 유비가 유표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었다 하더라도 만약 유비의 혈통이 가짜였다면 유표는 사기꾼 하나 내치는 것으로 조조에 대해 합법적이고도 강도 높은 명분의 정치적 공격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을 터이다.[32] 특히나 자신의 말년에 갈 수록 유비의 휘하 세력이 거대해지는 것을 꺼린 유표였다면 못할 것도 없었을 텐데 결국 유비는 유표의 아들과 그의 사후에 연대까지 한다.

4.5. 칭제 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헌제조비에게 선양을 한 이후 물러났다. 이에 유비는 조비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면서 자신도 황제가 되었다. 당대 후한에서는 황족과 황족이 아닌 자에 대한 경계가 명확했으며 이 때문에 똑같이 칭제를 하더라도 원술은 온 천하가 적대한 반면, 유표유언이 대놓고 황제가 쓰는 의전을 도입했을때는 그런 반응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유비가 칭제를 할 당시의 상황을 보자면 사람들은 유비의 칭제를 헌제 퇴위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칭제로 인정하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유비가 황족이었기에 헌제를 대신해서 한의 황제를 계승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당시 그 손권조차 이를 우려해서 함부로 칭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유비는 바로 칭제를 하고도 그 제위가 그대로 인정되었던 것은 이게 황족인 유비와 황족이 아닌 손권의 차이이기도 했다. 손권도 나중에 칭제하긴 하나 그것은 229년, 즉 이로부터 9년이나 지난 시점[33]에서 후한이 완전히 멸망한 게 인증이 되고 나서야 칭제한 것이다.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한 것도 '왕'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당시 촉나라는 한중 공방전 상황이었으며, 유비는 자신이 한중을 지배해야 하는 명분을 제시해야만 했기에 그 명분을 만들려고 한중왕에 등극한 것일 뿐이었다. 유비는 촌수야 좀 멀긴 해도 황족이기 때문에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더라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손권 역시 유비를 한중왕으로 인정했다. 이 왕이라는 자리는 군웅할거 시기에 가장 세력이 강성한 황족이었던 유표, 유장조차 감히 칭할 수 없었던 지위다.

한 마디로 말해 유비가 황족이었기에 한중왕에 등극할 때에도, 심지어 천자로 제위할 때에도 그 어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며, 만약 유비가 황족이 아니었더라면 한중왕으로 등극할 때 이미 누군가가 반드시 딴지를 걸었을 것이다. 이는 한고제 유방이 한신, 팽월, 영포 등의 제후를 숙청한 뒤 유씨 황족만이 왕으로 될 수 있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조가 동소의 발의로 위공에 오를 것과 구석을 청할 때 순욱이 나서서 말렸고, 조조가 위공에 오른 것은 순욱 사후 1년 뒤였다. 유비 비방을 위한 프로파간다 기록이 아니냐고 의심받는 영릉선현전의 언급들을 봐도 유파, 옹무, 비시 등이 유비의 칭제를 반대하면서 댄 근거들은 하나같이 '아직 세력도 약한데 칭제해봤자 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이었지 유비의 혈통에 문제가 있다는 언급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다.[34]

5. 결론

각종 정황 근거와 기록에서 명시됐듯이 유비는 한고조 유방 - 한문제 유항 - 한경제 유계 -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자 중산정왕 유승의 서자 육성정후 유정의 후손이며, 이를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한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중에 육성정후 유정이 있다. 그는 기원전 117년 한무제에 의해 육성정후로 봉해져서 후에 유비가 태어나는 유비의 본적지 탁군 탁현으로 이주했다가 제사에 바칠 금을 바치지 않아 작위를 박탈당했다. 이후 유정의 후손들은 탁군 탁현에서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후일 그곳에서 유비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부정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유비가 유승의 아들 유정의 후손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으며, 당대 인물들도 다 인정했거나 적어도 왈가왈부하진 않았다. 단, 힘이 없던 시절엔 이미 황족의 권리가 없어진 단순한 방계 종친의 혈통이었을 뿐이므로 이는 그냥 간판에 불과했다. 게다가 유비가 젊었을 적 또는 힘이 없었을 적에 유비가 황실의 종친이었다고 해서 딱히 그걸로 이득을 본 것도 없었고 오히려 당시의 유비보다 더 직계에 가깝고 잘나간 이들도 넘쳤다.

태어났을 때부터 유비는 황족의 피만 이어받았을 뿐 황족의 권리 따위는 없던, 유정의 후손들이 모인 탁군 탁현 유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유홍의 외동아들에 불과했다. 이런 유비의 혈통이 먹히기 시작한 것은 유비 본인의 실력과 명망이 천하를 뒤흔들고, 동시에 기존 후한 황실의 권위가 추락하는 난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유비의 혈통은 처음에는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것에 불과했으나, 난세에 자신의 실력으로 힘을 키워 그 가치를 부각시킨 것이다. 동시대에 유우, 유표, 유언 부자, 유요, 유엽, 유총 등 유비보다 조정에 오래 있었거나 세력이 강했거나 직계에 가까운 전, 후한 출신 황족들은 많았다. 그러나 결국 후한이 멸망한 이후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새로운 한나라의 재건을 선포하여 삼국의 한 축에 서고 마침내는 전, 후한을 잇는 제3의 한나라인 촉한을 세운 것은 오로지 유비뿐이었다.

결론적으로 "황족 혈통"이라는, 이렇다할 가치가 없었던 허울을 유비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며 다시 빛낸 것이지, 하늘에서, 선대 황제에게서 뚝 떨어져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마치 200년 전 방계 황족[35]에 불과했으나 한을 재흥시킨 후한의 중흥황제 광무제 유수처럼 말이다.

훗날 조위의 계통을 이어받은 서진진수가 쓴 《삼국지》에서 유비는 한황실의 후손이라는 서술을 전혀 문제삼지 않았으며, 진나라 관리들도 《삼국지》야말로 뛰어난 책이므로 필사해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즉, 촉한을 멸망시킨 진나라의 관리들조차 유비의 혈통을 부정하지 않았다.

6. 기록의 오류?

정사 삼국지》 <선주전>의 유비 선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유정은) 원수(元狩) 6년(기원전 117년)에 탁현의 육성정후로 봉해졌으나, 주금에 연좌돼 후를 잃어서, 일가를 이곳에 이뤘다.

그런데 《한서》 15권 <왕자후표>에서 유정은 원수 6년이 아닌 원정(元鼎) 5년에 작위를 잃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전한에는 정후나 향후가 없고, 모든 후국은 현급으로 대우받았다. 그리고 육성현은 중산국과 탁군의 경계에 있는 현이지 정이 아니었다. 다만 유비의 선조인 유정이 주금에 연좌되어 후를 잃었다는 기록은 《한서》나 《정사 삼국지》나 같다.

그렇다고 이 기록을 잘못되었다고 무시하기에는 살펴볼 만한 점이 있다. 우선 전한에서 모든 후국은 현급으로 대우받았다고는 하나 실상은 향 규모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후국이 적지 않았다. 유표의 경우에도 조상인 유교가 욱랑후였는데 욱랑은 후한에선 정에 불과했다. 그리고 <왕자후표> 마지막에는 '탁'이라고 적혀 있는데, <왕자후표> 마지막의 지명을 후국이 전봉된 지역 이름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즉 유정이 중산국 육성현을 봉토로 받았다가 이후 탁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정이 옮겨질 때 탁군 탁현 관할의 정 규모의 봉토를 받았고, 정후가 있는 후한에서 이를 아예 처음부터 정후였다고 오해했을 수 있다.

7. 삼국지연의에서

육성정후 유정 이후 혈통 기록이 없는 정사와는 달리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의 혈통을 세세하게 언급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정사에서는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 육성정후 유정이 후작을 잃고 탁현에 정착했다는 것까지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후의 기록은 연의의 창작이다. 창작인 만큼 엉성한 부분이 있다. 분명 유정이 후작을 박탈당했는데도 벼슬이 확실히 기록된 유웅을 제외하고 모조리 후작인 것으로 적었다. 또한 유웅을 이어 주군에서 복무했다고 기록된 유홍은 졸지에 백수가 되어버렸다. 볼드체로 표기된 부분은 확실하게 정사에서도 존재가 언급된 부분.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劉勝) - 육성정후 유정(劉貞) - 패후 유앙(劉昻) - 장후 유록(劉綠) - 기수후 유연(劉戀) - 흠향후 유영(劉英) - 안국후 유건(劉建) - 광릉후 유애(劉哀) - 교수후 유헌(劉憲) - 조읍후 유서(劉舒) - 기양후 유의(劉誼) - 원택후 유필(劉必) - 영천후 유달(劉達) - 풍령후 유불의(劉不疑) - 제천후 유혜(劉惠) - 동군범령 유웅(劉雄) - 유홍(劉弘, 무관직) - 유비

다만 연의의 기록대로면 유비는 황숙이 될 수 없다. 이 혈통대로면 유비는 경제의 18대손이 되는데 헌제는 경제의 13대손으로 헌제가 유비의 현조뻘로 훨씬 항렬이 높게 되어버린다. 촌수로 따지면 31촌이 된다. 굳이 호칭을 찾자면 황숙이 아니라 황제의 십삼종내손 혹은 황십삼종내손이라는 해괴한 타이틀을 써야 한다. 그냥 헌제가 황실 혈통을 이어받은 유비 같은 군웅의 도움을 받기 위해 유비를 지원해주려고 황제의 웃어른인 황숙으로 칭했다는 쪽이 좀 더 설득력있을 정도.

더군다나 유비는 까마득한 방계인데 방계는 보통 세대의 진척이 직계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36] 헌제도 경제의 직계는 아니지만 나름 황실 내부에서 혈통을 이어왔는데 한참 전에 방계가 된 유비의 혈통이 18대손까지 진행된 것은 부자연스럽다. 이렇게까지 진행이 빠르려면 유비의 직계 조상들은 아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장손으로만 가계를 이어왔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경제(기원전 188년 출생)와 유비(161년 출생)의 연대간격은 약 350년인데 이를 18대손으로 나누면 평균 20년밖에 되지 않는다. 20년이면 당시 시대상으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까지는 별 무리가 없지만 첫 아이를 제외한 다른 아이까지 봤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나이다. 참고로 경제와 광무제가 6대 182년(세대당 평균 30.3년), 헌제와 광무제가 7대 186년 (세대당 평균 26.6년) 차이로 양쪽 다 적당한 나이이다. 중문 위키에 의하면 유비의 할아버지 유웅이 119년생, 육성정후 유정이 기원전 139년생으로 두 사람 나이가 257년 정도로 나오는데, 대충 계산해보면 최소 7대, 최대 12대 정도가 자연스러우므로 유웅의 손자 유비와 유정의 조부 경제가 12대손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

기왕 창작할 거면 정말로 혈통상 헌제의 황숙 위치가 될 수 있게 경제의 12대손 정도로 맞췄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비가 경제의 12대손 정도로 황숙이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은 하다. 일단 방계는 동생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생으로든 형으로도 갈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의 양녕대군은 세종보다 형임에도 왕이 못 되었기 때문에 양녕의 후손은 방계 왕족이다. 물론 황제처럼 변수가 많지 않는 이상 작위를 물려받는건 웬만하면 장남이기 때문에 황제와 거리가 멀어진 유정의 직계는 웬만하면 장남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두 번째로 둘의 조상은 나이 차이가 많지 않다. 일단 헌제의 조상은 경제의 7남 장사정왕 유발이고 유비의 조상인 경제의 9남 중산정왕 유승보다 형이 맞다. 그런데 유승의 수많은 아들 중 유비의 조상인 육성정후 유정과 유발의 아들 중 헌제의 조상인 용릉절후 유매는 둘 다 출생연도가 불명이다. 제후로 봉해진 연도로 따지면 유정은 기원전 127년, 유매는 기원전 124년으로 유정이 더 빠르다.[37] 유승과 유발 모두 자식이 많았으므로(유승보단 덜하지만 유발도 열명 이상 자식을 뒀다) 사촌지간인 둘 중 누가 더 나이가 많았는지는 불명이다.오히려 제후 책봉 연도로 보면 유비의 조상인 유정이 헌제의 조상인 유매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다.

세번째로 애초에 헌제가 직계가 된 것은 광무제 때부터 따져서 직계이다. 즉, 헌제의 후한의 직계 황족이지, 만약 전한이 멸망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면 유비와 마찬가지로 방계황족이었을 것이다. [38] 유비가 전한의 방계 후손이라고 해도, 헌제의 조상들 역시 전한 기준으론 방계 황족이기 때문에 "전한의 방계 황족들인 유발과 유정"의 세대 진척 중 유정(유비 조상)만 딱히 느릴 이유는 없다.

마지막으로 유비가 방계란건 경제의 방계->유승의 방계->유정의 방계, 유정 아들의 방계, 이런 식으로 계속 방계란 소리가 아니라 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나온 시점부터 방계란 것이다. [39] 위에 언급됐다시피 중산정왕은 아들이 너무 많아 직계여도 종친 취급을 못 받을 정도였으니, 만약 유비가 유정의 직계였어도 아무 힘 없는 일반 백성으로 사는게 이상한 건 아니다.

종합하면 애초에 유비와 헌제의 같은 대 조상인 유발/유승 형제와 사촌지간인 유매/유정의 나이차이가 크지 않고, 유정의 이름모를 아들로부터 유비가 직계인지 방계인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에 유비가 헌제보다 항렬이 높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정-유비 사이에 중간에 누가 있었는지, 장남인지 동생인지 전혀 기록이 없으니까 세대 진척이 더 느릴지 빠를지 아는건 불가능하지만, 유비가 경제의 11~12대손이 되는게 이론상 가능은 하다는 말이다.[40]

8.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병주일지의 저자 '운좋은사람'은 '한 황실 혈통은 윤기 흐르는 흑발과 흑안이 특징'이라고 설정해두었는데, 작중 유비는 이런 요소들을 통해서 자신이 한 황실 혈통임을 증명했다.

[1] CCTV에서 큰 인기를 끈 중국판 설민석 같은 존재로, "위안텅페이의 한말/삼국 강의(2014, 원제 《袁腾飞讲汉末三国》, 상하 2권. 한국에는 "위안페이의 삼국지 강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음.)"을 집필한 사람이다. "마오쩌둥이 1949년 이후 잘한 것은 오직 죽은 것뿐"이란 말 때문에 교사에서 쫓겨난 이후 학원 강사가 된 것인데,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주장한 유비 혈통 의혹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2] 주금이란 매년 8월 천자가 종묘에 제사지낼 때, 제후왕이나 열후들이 부조 형식으로 돕는다는 의미에서 봉헌하는 황금을 말한다. 그런데 전한 한무제 때 제후왕들의 세력을 꺾고 전제 정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주금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거나 정해진 양에 모자란다는 죄목으로 많은 이의 작위를 빼앗는데, 유비의 조상도 이때 걸린 것이다.[3] 실제로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종의 17대손이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태어난 이승만은 왕족 대접을 전혀 받지 못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4] 다만 공손찬 역시 유우를 죽인 일로 원소의 분노를 아주 크게 샀고 결국 원소에 의해 멸망당하고 성에 불을 지르면서 자결했다.[5] 이 둘 역시 경제 대에서 후한 황족이랑 갈라졌다.[6] 유능하긴 하지만 뒷배도 없고 세력 자체는 조그마하니 누구의 등이라도 업어야 될 것이라고 읽을 수 밖에 없는 유비의 처지를 생각하면 한실 종친으로서 대접받는 것이 오히려 처지에 비해 과분해 보였을 것이고, 유비 개인의 처신 또한 이런 시선들과 크게 엇나가지 않게 저자세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세력들한테 반감을 사지 않았던 것이다.[7] 유비가 헌제에 의해 좌장군 직위를 받고 황숙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황족의 혈통이 빛을 발했던 건데 이때 이미 유비는 황건적의 난으로 공을 세웠고 이후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면서 나름 이름을 날렸고 여포나 원술같은 네임드와도 싸워본 적이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황숙 칭호는 연의의 창작이나, 헌제 측 세력이 유비를 끌어들이려고 한 건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유비는 서주란 큼직한 땅을 차지한 적이 있는 군벌이었던 적도 있으며, 여포나 원술에게 패배한 것도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여포에게 뒤통수를 맞아서였다. 당시 남부럽지 않던 세력가인 원술이 유비의 공세를 부담스러워해 여포와 몰래 손을 잡을 정도였으니, 원소나 공손찬, 조조, 유표 같은 톱급 군벌 바로 아래급 군벌이 몰락해 조조 밑에 들어온거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 거물이니 조조도 헌제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그 전에 유비가 황건적의 난에서 공을 세웠을땐 한 황실의 후예는 개뿔, 그저 '공을 세운 평민 의병장' 정도 취급으로 현위 벼슬을 내리는데 그쳤다. 즉 혈통이 아니라 본인의 성과가 워낙 뛰어나기에 주위 대접이 달라지고, 그전까지 아무 의미없는 유씨성이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8] 당장 조선왕실의 가계도도 정확히는 환조 이자춘의 묘비에 기록된 것을 다시 실록에 옮겨적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자춘의 묘비를 써 준 사람이 바로 당대의 석학 이색이었다. 즉 이성계의 가계를 당시 고려 귀족사회가 공인하고 있었던 것.[9] 특히 동양은 피휘 문화로 이름자를 물려쓰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제사를 통한 친족 회합이 중요했다. 이쪽은 대신 항렬자라는 개념을 만들어 친족 식별에 활용했다.[10] 대표적으로 반지의 제왕만 봐도 아라고른은 자신을 소개할 때 꼬박꼬박 아라소른의 아들 아라고른이오.라고 말한다. 또한 현실에서도 일부 문화권은 아예 작명 방식에 이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부칭(父稱)이라고 한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 푸틴 가문의 블라디미르의 아들 블라디미르,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 사우드 가문의 살만의 아들 무함마드 등. 또한 서양에서 자손들에게 대대손손 이름을 물려줘가며 OO X세, OO 주니어 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도 이 범주에 속한다.(예시: 부르봉 왕조 - 루이 XX세.)[11] 팔촌은 현대에서는 남남이나 다름없지만, 과거 개념으로 보면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다. 특히 다 같이 대대로 사는 집성촌이라면 "네가 누구 아들이냐?" 한마디만 물어봐도 촌수가 바로 나온다.[12] 오대십국시대에 곡부의 공말(원래 성은 유씨)이라는 노비가 공씨 문중을 말살하고 공자의 후손을 참칭한 사태가 발생했었는데, 외가에 있던 친척이 돌아와서 사실을 증언함으로서 공말은 처형당했다. 해당 사례만 봐도 혈통 위조는 쉬운일이 아니다.[13] 군사적 능력도 머나먼 관계나마 일단은 황족인 혈통도 인품도 제위를 이어받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태자 없이 갑자기 죽거나 한을 부흥시키기 위해 태자를 쌩까고 후계자로 유비를 지목해 대뜸 제위를 줘버리면 명분상 반대할 이유가 없는, 황실을 꼭두각시로 삼으려는 다른 군벌들에겐 초비상이 걸린다. 이제 그들에게 남는 선택지는, 후한의 황제가 된 유비에게 숙이느냐 "웃기지 마라"를 외치며 되든 안 되든 반항하느냐 뿐.[14] 장비는 몰라도 관우는 조조가 오랫동안 노골적으로 탐내던 인사였다. 실제로 관우가 조조 측에 합류하자마자 편장군 직위에 올랐는데, 이는 관도대전 당시 조조를 오랫동안 섬겼던 주요 장수인 우금(비장군)보다도 높은 직위였고, 관우가 안량을 베자 조조가 황제께 요구해 한수정후란 작위를 받아다주기도 했다. 우금은 나중에 조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장군 직위에 올랐다.[15] 특히 원술은 사세삼공 명문가의 적자라는 자부심이 워낙 커서 유비 쯤은 갑툭튀한 듣보잡 정도로 취급했고 끝내 칭제를 감행했음에도 유비의 혈통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16] 유비가 유기를 적극 후원할 수 있었던 것이 유비가 방계라도 하여간 친족이라는 것에 있었다. 유비를 쳐내고 유기를 낙동강 오리알 만드는 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혈통 논란으로 유비를 친족집단에서 축출하는 것이며 안 그래도 유표는 유비를 은근히 경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채씨네가 그걸 못한 이유는 뻔하다.[17] 연의의 키배논쟁씬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연의는 명대의 저작임을 잊지 말자. 그나마도 제갈량이 입을 다물게 만든다.[18] 여기서 유표, 유장, 손권 정도는 그래도 유비의 황실 혈통을 한 번씩은 써먹었으니, 황족 타이틀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기 위해 눈감아준 것일 수 있다고 쳐도, 서촉 호족들이나 장로는 정말 아무런 부담 없이 유비에게 마음껏 딜을 넣을 수 있는 입장인데도 한 번도 유비의 혈통을 깐 적이 없다.[19] 위촉오 3국 중 촉은 유일하게 익주와는 하등의 인연이 없는 쌩 외지인들이 들어와 세운 국가다. 이런 국가들은 보통 현지세력과의 통혼을 통해 기반을 다지려 하는데 유비는 그나마 목황후와 혼인했지만 유선은 유비의 친위세력이자 마찬가지로 외지(하북)출신인 장비의 딸만 연달아 황후로 맞을 수 있었을 정도로 촉에서 유씨 황실의 권위는 막강했다.[20] 사실 원소는 딱히 유비를 죽이려 든 적이 없다. 원소가 유비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연의 이야기고 정사에서는 원소가 유비를 극진히 대접한 뒤 이후 (쓸모없게 된) 유비를 예주로 보내 유벽, 공도와 함께 조조군의 등 뒤를 노리게 하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유비를 극진히 대접한 것은 헌제가 유비에게 조조를 공격하라고 밀지를 보냈던 덕이 컸다. 그래야 조조와 싸울 명분을 얻을 수 있으니까.[21] 모친이 공부하게 해, 같은 가문(同宗) 유덕연, 요서의 공손찬과 함께 전 구강 태수이자 같은 군 출신인 노식을 섬겼다. 유덕연의 부친 유원기는 항상 유비에게 베품이, (아들) 유덕연과 같았다. 유원기의 처가 이르길 "각자 일가를 이뤘는데, 어찌 항상 이와 같을 수 있으십니까!" 유원기가 이르길 "우리 종중의 이 아이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오."[22] 선주는 어릴 때, 종중의 여러 아이와 나무 아래서 놀며 말하길 "나는 반드시 곧 이러한 우보(羽葆:깃털로 장식 된 덮개)가 덮인 수레를 탈 거야."[23] 바로 위 각주에서 우보 덮인 수레를 타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천자가 타는 수레를 뜻한다.[24] 숙부 유자경이 이르길 "너는 허튼소리 마라, 우리 문중 망하겠다!"[25] 유승의 아들 유정(劉貞)이 탁현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으나, 주금(酎金) 문제에 좌죄되어 후작을 잃고 이로 인해 그곳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선주(先主)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에서 복무했다. 유웅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東郡范令, 연주 동군 범현의 현령)에 이르렀다 선주는 어릴 때 부친을 잃어, 모친과 신발을 팔고 돗자리를 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26] 진수는 조조는 재상 조참의 후손,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고 명확하게 적어놨다. 오히려 손견의 경우 손자의 후손일 것이라고 애매하게 적은 것과 비교된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역사가였던 진수도 유비의 혈통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27] "소열제의 한이 비록 중산정왕(한경제의 아들)의 후예라고 하지만 그 친족관계가 멀어서 그 세대의 수와 이름, 관직 등을 기록할 수 없으며, 유송의 고조가 초원왕의 후예라고 칭하는 것, 남당 열조가 오왕 각의 후예라고 칭하는 것과 같이 그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감히 광무제(전한 멸망 후 흥한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천하를 회복한 후한의 창업자)나 진의 원제(서진 멸망 후 동진을 강남에 세워 진왕조의 명맥을 이은 동진의 창업자)와 비교하여서 한나라의 유통을 잇게 할 수 없다." - 《자치통감》권69 위기일 황초 2년[28] 실제로 유비가 유정의 몇대손인지 아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비와 후한 황실의 헌제는 촌수를 계산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이다. 헌제 유협과 유비는 경제의 아들대부터 갈라져나왔는데, 일단 정말 단순하게 헌제의 아버지나 삼촌뻘인 유비가 헌제보다 항렬이 하나 위라 경제의 12대손이라고 치자. 그렇게 친다면 둘 사이는 25촌 사이로, 사실상 친척관계를 따질 의미도 없는 남이다. 애초에 유비는 161년생, 한 경제는 기원전 141년에 이미 사망한 사람이다. 유비와 헌제의 조상들인 유승과 유발이 언제 태어났는지 불명이지만, 당연히 아버지가 죽기 전에 태어났을 것이기 때문이 저 둘은 300년도 넘게 과거에 공통조상이 있었다는 정도이다. 즉 유비가 유승의 후손인건 다들 인정하는 팩트라도, 이 혈통 자체가 별 의미없지 않느냐는게 자치통감에서 제기하는 의문이다.[29] 영가의 난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유유의 일족이 이러하다, 사실 그 역시도 당대엔 점령한 사례지방에서 후퇴해야 했을 때 해당지역민들로부터 '선조의 무덤'(서한 황족들의 무덤)이 이 지역에 있으니 후퇴하지 말아달라며 어느정도는 옛 한나라 유씨 취급을 받았었다.[30] 당장 서주 주민들도 전란에 휩싸여 대거 양주와 형주로 유입되었고, 심지어 북형주인 10만이 유비를 따라 동쪽으로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다.[31] 지휘력이나 결속력이 부족해 다스리는 지역에 비해 힘이 약한 편이었던 유장은 거물급 군웅인 유비의 힘이 필요했다쳐도, 당시 유표는 조조나 원소조차 견제하는 강자였다. 유비의 실력이 탐날 순 있겠지만, 유표 세력이 언제 폭탄이 될줄 모르는 혈통 사기꾼을 안아야 할 정도로 급박한 적은 없었다. 익주와 형주는 후한 13주 중 인구와 생산력에서 1,2위를 다투던 큰 주였다.[32] 더군다나 원소와의 싸움으로 자리를 자주 비웠던 중기 조조의 행적을 감안했을 때, 실제로 이런 행위가 이루어졌다면 조조한테 매우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이다.[33] 이때가 삼국지 1세대 최후의 생존자조운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34] 후한 당시 '왕'이란 것은 실권은 적은 직책이었고 실제로 조조도 위공->위왕의 루트를 타긴 했지만 위공에 올랐을 때 이미 제후왕들보다 높은 의전서열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왕의 직위는 당시 관례적으로 황족들에게 주는 직위였기에 조조가 왕에 올랐을 당시 (공 즉위로 이미 안 좋던 상황에서) 여론이 더욱 안 좋아진 것이다. 실제로 형주공방전 당시 위나라의 세력 내에서 관우에 호응해 반란이 일어난 것이 이를 보여준다. 즉 황족이 아닌 조조가 왕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심지어 황제가 직접 임명했음에도)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여론이 안 좋아졌는데, 유비는 한중왕을 자칭한데다 칭제까지 했는데도 이런 식의 여론이 없었다. 이는 적어도 당대 중국인들 사이에선 '유비가 황족이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35] 정확히는 중산정왕 유승의 이복형인 경제의 7남 장사정왕 유발의 5대손.[36] 방계는 맏아들의 동생들의 혈통이다. 동생들은 당연히 나이가 어리기에 일반적으로 맏형보다 결혼도 나중에 하고 애들도 늦게 낳으니 당연히 세대의 진척이 느리다.[37] 제후 책봉 시기엔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유정이 나이가 더 많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어쨌거나 비슷한 시기에 책봉된 만큼 나이도 비슷하다고 추정해볼 순 있다.[38] 실제로 전한은 멸망했기 때문에 광무제의 직계인 헌제는 직계 황족이 맞다.[39] 유비쪽으론 유정까지 방계긴 했지만, 설령 유정이 유승의 장남이었어도 마찬가지로 방계로 분류된다.[40] 여담으로 진짜로 헌제보다 한 항렬 위에 나이도 숙부뻘이며 헌제와 13촌으로 비교적 가까운 '황숙'이 역사상에 존재하는데 바로 위에 언급된 유우이다. 유우는 광무제의 장남 유강의 5대손으로서 혈통이 멀긴 하지만 후한의 진짜배기 황손이었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의 창작인 '유황숙' 설정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유우는 혈통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존경을 받는 명망과 인품, 큰 세력까지 두고 있었기에 헌제의 황실을 괴뢰정부로 규정한 원소가 그를 황제로 밀어주기도 했다. 물론 그의 인품 때문에 반역에 해당하는 이런 시도는 단칼에 거절했고, 이 때문에 원소가 협천자 레이스에서 난감한 위치가 되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일이 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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