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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18:12:16

향거리선제


1. 개요2. 역사
2.1. 전한2.2. 후한
3. 제도의 구조4. 문제점5. 장점6. 여담

1. 개요

전한, 후한시대에 보편화 되었던 관료 임용 제도로, 지방관이나 지방의 유력자가 관내의 우수한 인재천거하는 형식으로 행해졌다.

향거리선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유교 원리를 지방에까지 전파시켜 유교적 도덕규범에 따른 관리 선발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래서 인재 천거의 기준은 유교적 도덕률에 있었고, 중앙집권제가 완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지방 인물들을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만들어서 지방과 중앙의 결속을 다지는 형태였다. 실제로 향거리선제는 명목상으로는 '지방의 인재를 찾기 위함'이었기에 처음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인재들이 많았고, 심지어 천거할 권한도 태수 등 지방 관리에게 있어서, 지방민들이 천거될 확률이 높았다.

다만 향거리선제가 무조건 추천제로만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한나라의 향거리선제 아래에서는 주나 군국에서 무재(茂才), 효렴(孝廉), 유도(有道) 등의 명목으로 인재를 추천하면 황제의 시험을 거쳐 고급관원으로 출사하는 관문인 낭관[1]에 임명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후한서 권 57 사필전에 따르면 '건녕 2년(영제, 169년), 조서를 내려 유도지사(有道之士)를 천거토록 하니 사필(謝弼)이 동해의 진돈(陳敦), 현도의 공손도(公孫度)와 함께 (천거된 후) 대책(황제의 책문(策問)에 대한 응답)을 갖추어 모두 낭중(郞中)에 제수되었다.' 는 기록이 있다.

즉, 황제가 단순히 추천인을 곧이곧대로 믿고 무조건 관직에 등용하는 체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인재 선발에 있어 황제의 판단력에 대한 의존이 상당히 커지는데 후한 말엽에 환제, 영제 등 황제들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는 점으로 이 시기 매관매직이 일상화 되면서 이런 체계는 사실상 무력화 된다.

2. 역사

2.1. 전한

전한 초기의 관리 임용 제도는 임자제(任子制)였다. 이 제도는 관록 2천 석 이상의 관리가 3년간 근무하면 자신의 형제나 아들을 1명 추천하여 낭관으로 올릴 수 있는 제도였다. 동시에 한문제는 여러 차례 각지의 고을에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칙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임자제도가 폐지되고 이러한 추천칙령이 상설화된 것이 향거리선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대개 부모의 관직과 작위를 자식이 세습하거나, 군주와 개인적으로 알게 되어 특별히 등용되는 형식으로 관리를 채용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인재들의 전기를 보면 연줄을 타고 군주와 대화를 나누고 언변을 드러내 임용되는 일화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인재 충원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해 정말 실력이 뛰어나고 명망이 높은 소수의 인재들에 한정된 예외적인 사례였다. 선진시대는 대부분의 관직과 작위가 세습되었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귀족적이었다.[2][3]

한나라 시절에는 초창기에는 위와 같은 방법을 따라 관리의 채용 방법은 세습 임용이나 특별 등용 정도였다. 서한 초기에는 임자제(任子制)였다. 이 제도는 관록 2천 석 이상의 관리가 3년간 근무하면 자신의 형제나 아들을 1명 추천하여 낭관으로 올릴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러다 한문제 시기부터 각 지방에 인재를 '추천'해서 올리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비상설적인 '천거'가 시작된다. 천거령은 여러 차례 반복되다 아예 상설화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향거리선제다.

원광(元光) 원년(기원전 134년), 한무제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행했다. 그 과목으로는 효렴(孝廉)・현량(賢良)・방정(方正)・직언(直言)・문학(文学)・계리(計吏 = 上計吏, 計掾, 上計掾), 수재(秀才) 등이 있었다. 후한에서도 그대로 시행되었으나, 수재라는 명칭은 광무제 유수(劉秀)의 이름을 피휘하여 무재(茂才)가 된다.

유교 사상에 따라 지방관과 지역사회 내에서의 여론과 인품에 따른 채용을 하는 향거리선제는 기본적으로 군국제로 시작했기에 지방 통제력이 약했던 한나라가 종법적 가족질서와 유교정치를 바탕으로 지방세력을 중앙정부로 끌어들이는 연결고리로 작용했다. 지방 호족의 자제가 천거되어 중앙관료가 되면서 호족들이 중앙정계에서 떨어져나갈 동인을 상실하고,[4] 이것을 유교적 시스템으로 포장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는 한나라 시대에 일반적인 관리 임용 방법이 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유력자들의 여론을 고려해 천거한다는 구조였으니 지방 유력자 자제들만이 천거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선발 기준이라는 것이 유교적 도덕률이 기반이라 검증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전한의 경제 시기 신하 조조鼂錯가 전쟁경비를 메꾸려 공식적으로 시행한 매작령이 심각해지면서, 후대로 가면 무능하고 딱히 도덕적이지도 못 한 인물들이 천거된 반면, 유능한 인물이라 해도 악평이 돌면 천거되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후한 말의 승상 조조는 유재시거를 선포하며 '불인불효'도 상관 없다 해서 당대에 충격을 주었다.

2.2. 후한

애초부터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시작해서 지방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광무제가 건국한 후한 시기는 향거리선제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향론은 후한의 발달한 경제와 태학으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을 통한 민간 인재 육성 때문에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말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호족들이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시스템인 향거리선제에도 불구하고 실제 후한의 시스템은 전혀 다른 형태를 보여주었는데, 그 이유는 지방과는 상관 없이 존재했던 중앙권력의 존재, 환관과 외척 때문이었다. 중앙의 황제는 지방에서 올라온 관료들에 대항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지방에 권력의 근거를 두지 않는 환관을 중용하고 일부 세력을 외척으로 삼아 자신의 측근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환관과 외척을 측근세력으로 둔 황제권과 지방 호족들이 기반이 된 중앙관료들이 세력 균형을 이룬 것이 후한 초중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일정 시기가 지나자 중앙관료들은 지방 호족으로서의 모습보다는 관료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어 중앙귀족의 모습이 더욱 강해지면서 이런 대립구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권력이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시스템으로 이행되어가던 찰나에 하필이면 황제들이 잇달아 요절하면서 중앙권력을 둔 대립이 벌어졌다. 중앙귀족의 수장의 위치가 된 외척과 환관이 그 예이다. 이 과정에서 강해지던 황제권은 역으로 추락했고, 외척과 환관의 권력다툼에 지방에서 올라온 호족들이 엮이게 되었다.

환제영제 시대에 환관이 중앙을 장악하고 지방 사대부들을 대거 감금한 당고의 금 사건에서 절정을 이루면서 환관이 세력을 확대하던 수단인 매작령이 힘을 얻고 반대로 외척이 세력을 확대하던 수단인 향거리선제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수재로 천거된 이가 글을 모르고, 효렴으로 천거된 이가 부모와 별거하고 청렴하다고 천거된 이가 욕심이 많으며, 용감한 장수라고 천거된 사람은 닭처럼 겁이 많다"는 포박자의 글은 천거제를 기반으로 한 향거리선제의 근본적 한계가 이 시기에는 완전히 걷잡을 수 없어졌음을 보여준다.[5]

후한 말기 전란으로 사회체계가 붕괴되면서 동시에 최소 초한전쟁 이후부터 후한 시기까지 유지되던 지방의 토착 세력들이 몰락, 혹은 지방 군벌로 독립하면서 향거리선제는 붕괴된다.

후한 말의 혼란기에도 형식적으로는 향거리선제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유비원담을 무재로 천거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연히 중앙정부가 마비 상태라 반영될 리가 없었으므로 원담의 아버지 원소와의 관계 형성을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을 것이다. 이 시기의 군벌들은 부하들에게 벼슬을 주면서 조정에 상표하는 형식을 거쳐 임명했는데, 이것도 그냥 거의 말로만 상표해서 보고했다 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향거리선제처럼 제도화된 것은 아니라 해도 인재를 천거하는 전통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사례가 순욱의 인재 피라미드.

위나라에 들어 추천의 권한을 중정에게 몰아주는 구품중정제, 혹은 구품관인법이 제정되면서 향거리선은 폐지되었다. 촉한과 동오는 확실하지 않은데, 양국 모두 후한의 제도를 본받았으므로 향거리선이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나라에서는 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의 영향으로 마치 봉건제를 연상케 하는 관직 세습이 일반화되었다.

3. 제도의 구조

매년 각 주(州)에서 수재(秀才)[6] 1명, 각 군국(郡國)에서 효렴(孝廉) 1명씩을 추천해 관리로 삼았다.

효렴에 천거되면 중앙으로 파견되어 낭관(郞官)이 된다. 낭관은 궁궐 안에서 숙직을 서면서 조정의 실무를 익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지방관이나 조정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보통 낭관을 거친 다음에 현(縣)의 관리나 승(丞)과 같은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효렴은 태수가 1년에 1명만 추천할 수 있고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효렴으로 추천되어 관직에 오른 자가 사고를 치면 그 사람을 추천한 사람까지 같이 벌을 받는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행여 추천받은 자가 난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추천한 자까지 같이 삼족을 멸했다. 때문에 태수는 효렴을 추천할 때 굉장히 신중을 기해야만 했고 1년에 1명씩 효렴을 추천하는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 태수도 있었다.

이렇듯 효렴으로 천거되기가 의외로 어려웠기에 추천을 해준 사람과 추천을 받은 사람 사이에서는 끈끈한 인맥이 형성되었다. 그 때문인지 손견이 세상을 떠나자 과거에 손견이 효렴으로 추천해줬던 환계가 목숨 걸고 유표에게 찾아가 손견의 시체를 찾아왔다.

4. 문제점

간단히 말해서 천거제의 단점을 골고루 다 가지고 있었다.

이 2가지 문제점이 조합된 결과 어떤 말이 나오느냐면,
이미 어진 자와 비루한 자를 분명히 가려낼 수 없고, 또한 귀족들의 위풍이나 지시에 따르며 권세가의 촉탁에 위협되어 찾아오는 자가 문 앞에 가득하고 예물이 폭주했다.
- 왕부의 잠부론
마지막으로 천거를 해주는 것이 곧 '인맥'을 만드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게 개인적인 관계라면 적당히 의리 이야기로 그치고 말겠지만, 천거 피라미드의 규모가 커지고 특정 가문이나 집단과 연계되면 아예 대규모 '파벌'이 되어버린다. 원소, 원술의 원씨 가문이 극단적인 사례다.

5. 장점

위무제 조조는 청년기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았음을 토로한다. 여러 사서에도 조조가 젊은 시절 만인의 인정을 두루 받지 못했다고 하니 조조의 한탄이 자신의 성공을 돋보이기 위한 엄살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조의 조부 조등은 황제 즉위에 관여할 정도로 엄청난 권력을 지닌 당대의 대환관이었고[7] 아버지 조숭은 재산을 실은 수레가 백여 대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갑부에 한영제 유굉 시절에 태부라는 고위직을 구매했다. 즉, 조씨 가문은 후한 말기 엄청난 권력과 재산을 지닌 유력 가문이었으나 탁류라는 약점이 있고 이 때문에 사족(士族)은 조조를 고립시켰다.

명성을 바탕으로 관직을 구했던 이 시대, 이런 사보타지는 청운의 꿈에 매우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교현, 허정 등의 명사들이 조조를 좋게 평가하면서 명문거족 사마방의 천거를 받아 벼슬을 얻게 되지만. 교현에게 따로 감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조조는 궁지에 몰렸다.

이 일화에서 보듯, 한나라의 인재 선발 제도인 향거리선제는 한나라 말년에도 미력하나마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물론 환관의 자손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경학자들의 오만한 자부심도 있었겠지만 돈과 권력이 아무리 많아도 예교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8] 즉 돈 많고 권력 많아도 명사들의 기준에서 낙제점이면 청운의 꿈을 꾸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이를 위해선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했다. 원소의 경우에도 사세삼공의 명문가 원씨 일가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 신분 때문에 얼자였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 시대상 삼공까지 지낼 명문가는 당연히 탁류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래저래 2중고를 겪은 셈인데 원소는 이를 6년상을 통해 극복했다. 얼자이나 명문가 자손도 인정받기 위해서 3년도 아닌 6년씩이나 상복입는 행위를 해야 했을 만큼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게 결코 만만치 않은건 아니었고 그만큼 그래도 나름대로는 인증이 된 인물이라는 뜻일 거다. 진짜 심각한 맹탕은 청운의 꿈에 도전할 수 조차도 없었다는 셈이다.

비록 향거리선제가 인재를 편향적으로 선발할 수 있다는 약점이 있었어도, 향촌의 지배층 뿐만 아니라 다수 피지배층의 여론 역시 반영하고 있었다 (가와카쓰 요시오. 중국의 역사 2권 위진남북조 中). 삼국지에서 민중들에게 재산을 베푸는 호족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작위적이라도 향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모든 계층의 입장을 배려하고 극기하여 해야만 벼슬길이 열렸으니. 향거리선제는 취약점이 많았어도 그걸 운영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은 우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나라에서 위문제 조비가 진군의 건의를 수용해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면서 변화가 생기는데. 일단 향촌을 구성하는 만인의 여론을 반영한 향거리선제가 한나라 말기에 전통적인 향촌이 붕괴되면서 그 기반을 상실하고 대안으로 시작된 구품관인법은 오직 인재를 평가하는 귀족만의 여론을 독점 반영한다.

특히 사마의가 주대중정제를 설치하고서 이런 현상이 강화되어. 청운의 꿈을 품은 인재들은 자신을 평가하는 중정(감독관)의 심기만 살피고 향촌 다수의 여론을 무시하는 게 입신양명에 더 유리한 구조가 된다. 이렇게 하면, 당연히 편협하고 이기적인 유력 가문의 사람들이 벼슬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조조 세대에는 많은 신하들이 청빈(淸貧)을 자랑하고. 청빈이 인재 선발의 기준이 중요한 기준이었지만, 조예 치세에는 신하들이 비싼 옷을 입는 등 사치스럽고 화려한 문화가 유행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공손연, 제갈공명 등 외적이 안보를 위협하고 위명제 조예 등 영명한 군주들이 있어 폭주를 막았지만 애황제 조방처럼 어리거나 나약한 황제가 즉위하면 균형추는 언제든 순식간에 일변할 수 있는, 그런 위태로운 정국이 조씨의 유산이자 한계였다.[9]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자 부족한 대의명분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구성하는 모두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재보다 사마씨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재가 더 절실했고. 사마소 시대에 사마씨는 순욱, 순의, 가충 같이 적당히 능력이 있지만 수재는 아니고 사욕을 단속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발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오직 사마씨에게 충성을 바치며 그걸 위해서라면 황제 시해도 결단할 수 있는, 과격파라는 데 있다. 물론 양호, 두예처럼 드물게 견실한 인물도 있었지만. 구품관인법의 영향력 아래서는 양호 같은 사람을 (적어도 한-위나라 시대만큼) 양산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위나라는, 태조 무황제 조조가 세운, 중화의 삼분지이(三分之二)를 장악한 대국으로. 촉나라와 오나라가 아무리 공격해도 결국 도모하지 못하면서 귀족 집단의 방만을 더욱 부채질 했을 것이다. 제갈공명, 손권, 강유, 제갈각 등이 모두 환경적 상황에 발목이 잡혀 북벌에 실패하니. 북조(北趙)에서는 유능한 인재를,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하며 대승적 차원에서 전격적으로 발탁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다. 연주라는 사통팔달의 땅에서 거병하여 위태로운 길을 걸었던[10] 조조와는 대척점에 있는 상황이었고 적당히 유능해도 천하 대세가 워낙 확고하여 국난을 타개할 수 있었다.

반대로 독발수기능의 침공처럼. 나라가 정말 송두리째 망할 수도 있는 안보 위협이 발생하자 그때 마륭, 문앙 같은 인재들을 혁명적으로 발탁하지만. 그걸 제도화하지는 못한다.

6. 여담

삼국지연의에서는 향거리선제에 대한 내용이 전부 생략되어 알기 어렵지만, 삼국지 초반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향거리선제로 관료를 임용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동시대인 입장에서 한영제가 벌인 매관매직을 비난하는 데에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향거리선제를 제대로 거쳐서 관료를 임용하든 매관매직으로 돈을 받고 임용하든 임용 기준에 주관이 심하게 개입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임용 뒤의 행실이 매우 불량한 것을 보고 "매관매직으로 올라왔으니 저 모양이다"라고 결과적인 비판을 할 수는 있었으나 그 뿐이었다. 사실 한영제 본인부터가 삼국지연의에서의 우유부단한 이미지와는 달리 저잣거리의 상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매관매직을 황제 본인이 직접 주도했으며, 워낙에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책이 향거리선제와 같은 형태이다 보니 상인 출신 황제의 시각에서는 여기에 돈을 개입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11]

향거리선제가 담당하는 것은 중앙관직이고, 지방관직은 세습을 하거나 지방의 아전 수준에서는 돈을 주고 임명되었다. 애초에 향거리선제 이전의 관직 임용 제도의 세 가지 형태 분류가 세습, 관직 매매, 천거였다. 이것이 한대 이후로는 천거제가 향거리선제가 되어 중앙관직 임명 제도가 되었고 나머지 2가지 형태가 지방 하급 관리 임명 시스템이 된 것이다.

조선에서 조광조가 실행하려 한 현량과 제도가 이와 비슷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반대파들에게서 "그 옛날 한나라의 전철을 밟고 싶느냐"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심지어 구조를 보면 향거리선제 복붙이 아니라 개악이었다.


[1] 각 관청에서 문서의 일을 맡던 관직[2] 특히나 이 소수의 인재들은 대게 외국에서 왔기에 자국에서 기반이 부족했고 때문에 기존 세력들과 갈등을 빚다가 다른 나라로 가버리는 일이 많았다. 물론 인정받기 전에도 다른 나라를 떠돌기는 하지만.[3] 애초에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 시절의 제도가 어느정도 잔존해 있었다. 그러니까 혈연에 따라 왕-제후-대부-사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정도에 따라서는 유지되고 있어서 춘추시대만 해도 유명한 인물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상당수가 왕ㆍ공족 후손이다. 공손씨(公孫氏) 역시도 이런 제후(公)의 자손(孫)들이 쓴 성씨(氏)다.[12] 그나마 국가간의 멸망전이 시작되는 전국시대가 되면 이렇게 군주에게 언변을 털어 등용되는 케이스가 많아진다. 이들도 알게 모르게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왕ㆍ공족과 관련된 경우가 있긴 했지만[13] 그래도 비중은 춘추시대보다는 낮아진다. 또한 이렇게 혈연중심은 고대의 기본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어차피 인구밀도도 높던 시대도 아니니 어디서 사람 구해오기가 쉬운 일도 아니고 그나마 가장 가깝게 사는 사람은 가까운 혈족이다.[4] 지방의 호족이 중앙정계에서 떨어져나가면 호족들은 중앙정계에 나서는 대신 지방에서의 권력을 강화하는 길을 택할거고 자연스레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진다.[5] 훗날 조선에서 현량과 실시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을 때 반대파의 주장이 "한나라도 그거 했다가 거하게 말아먹은 거 아닙니까?" 였다.[6] 광무제의 휘가 秀이었기 때문에 후한에서는 이를 피휘하여 무재(茂才)라 했다.[7] 게다가 단순히 권력만 셌던 것도 아니라서 여기에 정치감각마저 출중해 탁류, 청류 막론하고 지지를 받았으며 무엇보다 무사히 은퇴했다. 으레 권력자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더라도 뭔가 책이 잡혀서 군주에게 밉보여서 등의 이유로 몰락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등은 그런 거 없이 무사히 은퇴했다.[8] 그리고 경학자들의 부심과는 별개로 환관의 자손~ 이라는 이유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였는데 조조가 젊을때는 그 유명한 십상시가 활개치던 시대였다. 외척이나 사대부들도 문제가 없는건 아니었지만 환관은 황권강화를 빼면 국가경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말아먹는 정도가 이들보다 훨씬 심각했다. 특히 이들이 벌인 당고의 금은 황제+외척or환관=외척+사대부로 이루어진 권력균형을 완전히 파괴했고 그 결과 환관의 폭주와 사대부들의 반발 등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이러니 경학자들이 환관과 그 집안을 좋아할 수도 높이 평가할 수도 없다.[9] 물론 조위에서 보여진 이러한 면모는 구품관인법의 문제만은 아니고 환관, 외척, 황족 등을 무차별적으로 견제한 영향도 컸다. 쉽게 말해 '근왕세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나마 조비나 조예처럼 제대로 군주노릇을 할 수 있는 경우엔 문제가 없는데 조방처럼 어린 군주가 즉위해 왕권이 약해지면 바로 문제가 생긴다.[10] 비록 모든 적들과 한꺼번에 싸우거나 한건 아니라도 그래도 여포에게 본거지인 연주가 털리고 장수에게는 죽을 뻔 하는 등 초기시절에는 조조도 위태로웠던 때가 많았다.[11] 문제는 영제가 이걸 너무 심하게 했다. 환관이든 후궁이든 이들을 동원해 조용히 뒷돈을 먹는 것도 아닌, 아얘 벼슬에 정가를 매기고 정가만 내면 누구나 벼슬을 주었으며 후불, 할부 등 별의별 방법으로 결재수단까지 마련해주었으며 그나마 원해서 바치는걸 받고 벼슬을 주는 정도면 모르겠는데 자리를 옮기는 경우에도 이 짓을 강요했다. 회전률을 높이기 위해 임기를 대폭 감소시킨건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