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9년 2월 7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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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여포의 수하 장수.고순은 정사(《정사 삼국지》,《후한서》)에 따로 열전을 남기진 못했고 <여포전>, <무제기>, <선주전>에 그의 기록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2][3]
2. 정사 삼국지
2.1. 학맹의 반란 토벌
196년, 여포 휘하의 장수 중 하나인 학맹이 원술의 사주를 받고 진궁 등 일부 간부진과 모의해 반란을 일으킨다. 진궁까지 가담했던만큼 여포가 있던 하비는 순식간에 함락당하고 반란군이 여포가 있는 곳까지 들이닥쳤으나 여포는 어찌저찌 처자를 챙겨 고순의 진영으로 달아나는데 성공, 도망칠 당시 하내쪽 사투리를 썼었다고 밝혔고 고순은 학맹이 유일한 하내 출신이니 학맹이 있음이 확실하다 말하며[4] 궁노수를 내세워 학맹을 압박했고, 거기에 학맹의 부장인 조성이 갑자기 학맹에게 반기를 들어 내분을 일으키자 이 틈을 노려 학맹을 참수시킨다.[5]2.2. 장패와 싸우려는 여포에게 조언
여포가 진규의 계책을 활용해 원술을 대파할 무렵 동해(東海)인 소건(蕭建)이 낭야상(瑯邪相)이 되어, 서주 낭야국 거현에 치소를 세우고 여포와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이에 여포는 서신을 보내 소건을 끌어들이려 했고, 소건도 서신과 말을 바치며 이에 응했다. 이렇게 여포는 소건을 아군으로 끌여들였다.그런데 얼마 후 장패가 소건을 습격해 그의 군수물자를 약탈했다. 여포는 분개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장패를 치려했는데 고순은 이를 말리며
장군께서 몸소 동탁을 주살하여 이적(夷狄)들에게 위세를 떨쳤으니 단좌고분(端坐顧盼, 단정히 앉아 주위를 돌아봄)한다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자연 외복(畏服)할 것입니다. 가벼이 친히 출군해서는 안 됩니다. 혹 이기지 못한다면 명성을 손실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무턱대고 싸우지 말고 스스로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여포는 그 말을 무시하고 장패와 싸웠고, 고순의 우려대로 이기지 못했다. 결국 얼마 후에 여포와 장패는 서로 화해했다.2.3. 유비와 하후돈을 격파
조조와 원술 사이에서 갈팡질팡 행보를 보이던 여포는 198년 다시 원술과 손을 잡았다.그리곤 봄에 고순에게 시켜 장료를 이끌고 패성에서 소패의 무너진 병력을 모으던 유비를 치게 했다. 고순은 몇달 넘게 유비와 싸워 9월에 유비가 지키고 있던 패성(沛城)을 공략해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또한 고순은 조조가 유비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하후돈까지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2.4. 여포에겐 과분한 비운의 인재
<여포전>에 주석으로 달린 《영웅기》기록에 의하면 고순은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7백 명의 군사를 이끌었는데 그 군기가 워낙 철저해서 보통 1천 명으로 일컬어졌는데, 갑옷과 무기는 항상 정련하고 번쩍번쩍한데다 매번 싸울 때마다 격파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대는 함진영(陷陣營)[6]이라 불렸다.줏대없고 의리없는 여포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던 사람으로 매사 생각없이 결정하고 변덕이 극심해 언행을 자주 번복하는 여포에게 항상 간언했다.
무릇 집안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충신(忠臣)이나 밝고 지혜로운 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쓰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군께서 거동(擧動)하실 때 치밀히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잘못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 영웅기
여포는 고순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자신 특유의 성정을 고치지는 못했고, 나중에는 고순에 대한 신임조차 흔들려 고순의 군사를 모두 빼앗아 친척이었던 위속에게 주었다. 그리고 전투가 있을 때만 위속의 군사를 고순에게 돌려 나가 싸우게 했다. 대우는 해주지도 않으면서 필요할 때만 이용해 먹겠다는 굉장히 몰염치한 행동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순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7]- 영웅기
2.5. 최후
하비 공방전에서 여포는 진궁과 고순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가 조조의 보급로를 끊으려고 시도했으나, 아내인 엄씨는 고순과 진궁은 사이가 나쁘다고 지적해 여포의 출격을 단념시켰다. 정작 여포의 친척이자 고순의 병사를 뺏어서 넘겨줬던 위속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송헌, 후성과 함께 여포를 배신해 성문을 열었고 진궁을 붙잡아 조조에게 넘겼다.여포가 멸망할 때 여포의 곁을 지켰고 사로잡히자 여포, 진궁과 같이 처형당한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가 조조에게서 연주(兗州)를 빼앗는 장면에서 첫 등장한다. 즉 고순은 팔건장의 일원이 아니다. 복양에서 조조군과의 첫 전투에서는 조조를 거의 한걸음 거리까지 쫓았으나, 조조의 부장 전위에게 격퇴되었다. 그 후 조조의 반격으로 여포가 연주에서 쫓겨나갈 때 여포의 가족을 호위했다.여포가 유비 부재중을 노려 서주를 빼앗을 때 고순은 여포의 명령으로 원술과 대치하던 유비군을 배후에서 공격해 그들을 패주시켰다. 고순은 원술의 부장 기령에게 원술이 여포에게 약속했던 병량을 요구했으나, 그 장소에서 받지 못했다. 원술이 여포을 공격하던 시기에는 고순은 원술 측의 교유군과 대치해 이들을 격파했다.
소패성에 있을 때 조조군의 하후돈과 대결을 벌여 수십 합을 겨루었으나 결국 도주했고, 이때 고순의 부하 조성이 하후돈의 눈을 화살로 쏘아 맞혔기에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군을 되돌려 하후돈군을 격파했다.
하비에서 여포와 함께 붙잡힐 때 고순은 조조에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처형당한다.[8]
연의에서는 별 다른 비중이 없지만, 그래도 무력이 곧 장수로서의 실력인 연의에서 그 하후돈을 상대로 수십 합을 겨뤘다는데서부터 여포군 내에서는 장료 다음가는 최강급 장수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여포 세력 자체가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상당히 인기와 관심이 집중되는 편인 데다가 정사에서의 모습까지 충의의 장수였기 때문에 컬트적인 인기가 상당했다. 끝까지 여포 밑에서 머무르지 않고 어진 군주를 찾아 갈아타 오래 장수했다면 장료나 조운 못잖은 활약을 펼쳤을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여포군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이라 할 만한 인물임에도 《삼국지연의》에서 여포군의 핵심 장수들을 묶어놓은 팔건장에는 못 들어갔다. 게다가 팔건장 면면을 살펴보면 역사에서 여포의 충신으로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까지 함께 한 진정한 여포의 충장이라 평할만하다.
4. 평가
장료, 장패와 함께 여포의 부하 장수로 등장하는 대표적 인물이지만 이 중 장료는 조조 휘하에 들어가기 전에는 두각을 보이지 않았으며, 장패는 사실상 반독립적으로 존재한 군벌이었고, 이해관계에 따랐을 뿐 여포에게 진심으로 충성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포 휘하에서 가장 능력있고 충성심 깊은 장수는 고순이라고 볼 수 있다.남은 기록으로 고순의 이미지를 구성하자면 그는 군재뿐만 아니라 인품과 식견도 뛰어났고 상명하복과 충성에 목숨을 거는, 마치 촉한의 조운과 같이 굉장히 모범적인 군인상이며 충신이다. 분명 군웅할거 시기의 유력 명장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능력 이전에 이래저래 인간이 덜 됐던 여포에겐 정말 과분한 인재, 고작 여포 같은 범용한 인간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 게 안타깝다는 시각이 많다.[9]
여포의 유일한 군사인 진궁과는 굉장히 사이가 나빴는데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여포의 충신이었던 고순 입장에선 충성 없이 그저 조조를 치기 위해 여포를 이용하려 한 진궁이 영 곱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진궁은 여포가 잘 따르지 않자 학맹과 모의해 여포를 내치려고도 했다. 고순이 충직한 무인이자 여포군의 고참이었던 반면 진궁은 문인이었고 장막의 부하였다가 그의 죽음으로 오갈 곳이 없어져 합류한 신입이었던 점을 보면 성격이나 정치적 입지면에서도 반대되는 부분이 많다.
그의 부대가 항상 이겨서 함진영이라 불렸다면서 왜 여포군은 조조군에게 패배해서 하비까지 몰렸는가라는 논란(?)과 비판도 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강력한 정예부대인 걸 강조하다보니 그런 칭호가 붙었을 것이다. 맹수의 이름을 가져다 쓴 호표기가 진짜로 호랑이, 표범으로 이루어진 맹수부대가 아니라 강맹함을 과시하는 의도인 것과 같다. 사실 전투에서 총사령관이나 휘하 장수 몇 명이 꾸준히 승전보를 올리지만 전체 전쟁에서는 불리해지거나 결국 패망하는 사례가 결코 드물었던 역사가 없진않다.[10] 그리고 주군인 여포가 군주로서는 워낙 무능해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외교적으로 실책을 반복하여 세력이 축소되는 수순인데다가 총사령관으로서도 개인의 무용은 뛰어나다고 해도 자주 지레 겁을 먹던가 아니면 무모히 싸우다가 실기하고 패배하는 사례가 반복되었기에 고순이 아무리 활약해도 여포를 비롯한 다른 아군들이 이기지 못하거나 실책을 저지른다면 고순 혼자서 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고순도 결국은 주군인 여포 세력의 일부를 이루는 장수일 뿐 총사령관은 주군인 여포이고 여포의 직접 지휘하 있는 병력이 결국 전투의 승패를 결정한다. 게다가 막판에는 여포에게 자기 직속부대를 빼앗기면서 허수아비 상태에 놓였으니 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주인 잘못 만나 고생만 하다가 영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은 불운한 인물로써 현재의 삼국지 팬덤에선 도대체 이런 인물이 왜 여포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는가라는 것이 의문으로 취급될 정도.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고순/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음력 198년 12월 25일.[2] 후한 말~삼국 정립 시기의 난세에 난립하다 패망한 군웅의 수하 장수치고는 그나마 기록이 꽤 남은 편이다. 여포보다 압도적으로 더 큰 세력을 자랑한 당대 최유력 군웅 공손찬, 원소, 원술의 수하 장수들조차 삼국정립의 주인공인 위촉오로 넘어간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면 활약상이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한 말 중원, 특히 조조 세력 위주의 군웅항쟁과 관련이 깊었던 인물이었기에 그나마 행적이 상당히 기록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3] 공손찬 수하였다 유비에게 간 조운, 유비를 거쳐 조위에 사관한 전예, 원소 밑에 있다 조조에게 귀순한 장합 정도를 제외하면 군웅할거 시기 최고의 세를 자랑했던 이들 군벌들의 휘하 장수들조차 기록이 별로 남은 게 없다. 군웅할거 시기 최고의 실력자인 원소 군의 필두 장수 안량과 문추, 곽원은 적어도 자세력에선 손꼽히는 장수들이었을 게 분명함에도 기록에 남은 활약상은 거의 없다.[4] 다만 이렇게 보면 그냥 일부 병사가 끼어든 것 뿐으로 볼 여지가 많다. 즉 심증이든 뭐든 증거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5] 조성은 이 반란에 진궁도 가담했다고 밝혔다. 그곳에 있던 진궁의 얼굴이 붉어졌는데, 여포는 진궁이 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불문에 붙였다.[6] 진영을 (반드시) 함락시키는 진영이라는 뜻. 고순의 별명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가 지휘했던 부대의 명칭이다.[7]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병력을 빼앗긴 고순은 죽는 순간까지 여포에게 충성을 바친 반면 그 병력을 얻은 위속은 후성, 송헌 등과 짜고 여포를 조조에게 팔아넘겼다.[8]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고순이 대담하게 저항하든 솔직히 항복하든 둘 중 하나를 골랐어도 조조는 살려줬을 텐데 우직해서 조조의 성을 끌어 죽었다고 디스했다.[9] 그래서 삼국지 팬덤 사이에선 차라리 고순 자신의 일대기와 접점이 있던 조조, 유비 같은 뛰어난 군웅들 휘하로 귀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삶은 피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조조 휘하에는 비슷한 방식으로 편입해온 항장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여포의 유일한 충신으로 기억되는 지금보다도 인지도가 낮았을 수도 있다.[10] 당장 이전 시대인 초한전쟁 때 항우도 팽성대전을 비롯하여 그가 참전한 전투 대부분에서 유방을 개발살냈지만 그 외의 전장인 제나라 방면의 한신, 초나라 후방의 경포에게 밀리며 전체적인 전쟁에서는 계속 수세에 몰리다가 패망하는 단계를 그대로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