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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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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三崔
신라삼최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후백제의 관료
최승우 | 崔承祐
본관 경주 최씨
출생 ?, 신라 금성
사망 ?, 후백제 완산주(?)

1. 개요2. 생애3. 기타4. 창작물에서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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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신라, 후백제의 문인 겸 관료. 본관은 경주골품6두품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언위와 더불어 신라삼최로 불리며 빼어난 문장력과 학식을 지닌 인물로 알려졌다.

2. 생애

890년, 중국 당나라에 건너간 뒤 3년만에 당나라 예부시랑 양섭 밑에서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 현지 관직에 있다가 어느 시점에 귀국했다. 기록이 소략해서 당나라 어디서 어떤 일을 했고, 언제 신라로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단서가 있는데 동문선에 최승우의 칠언율시 10수가 수록돼 있다. 이 시들은 최승우가 중국에서 자신과 교류하던 인물들에게 헌사한 것인데 이 중 춘일송위태위자서천제회남(春日送韋太尉自西川除淮南)은 당나라 말기에 재상을 지낸 태위 위소도(偉昭度)에게 준 시고, 송조진사송입나부(送曹進士松入羅浮)는 901년경에 70세의 나이로 진사가 된 조송(曺松)에게 준 시다. 최승우의 중국 생활 당시 고위층과도 교류를 해서 명성을 떨쳤고, 특히 조송의 경우를 보면 적어도 901년까지는 최승우가 당나라에서 지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행적이 927년이므로 26년 동안 중국이나 한국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십국시대의 혼란기였고 한반도 역시 통일신라가 쇠락한 후삼국시대였으므로 두 나라의 난세를 모두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분명한 것은 최승우는 지금까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뿐 당시에는 여전히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이 '공백기'인 917년에 최언위가 쓴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郎空大師碑)'에서 최언위 자신과 최치원, 최승우를 신라삼최로 묶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의 중국 강서성 일대를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억강서구유인기지기(憶江西舊遊因寄知己)'가 전하는데 단순히 여행을 갔다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근처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한반도에서 후삼국 시대가 열린 후 어느 시점에 후백제에 임관한다. 최승우가 어떻게 후백제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망해가는 신라를 보고 대안으로서 후백제의 견훤을 생각해 견훤의 밑에 들어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927년 공산 전투 승리 직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내는 위협적인 국서를 최승우가 썼는데, 이 중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유명하다. 이 글은 동문선, 삼국사기 견훤 열전, 고려사 태조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했음에도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경순왕을 옹립했고 본인이 작성해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도 존왕양이적 입장을 드러내며 신라의 충신 코스프레를 하는데, 이것이 최승우의 입장이 반영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최승우는 중국 유학파였고 당시 중국에서는 당나라를 멸망시킨 후량이 결국 당나라 계승을 주장한[1] 후당에게 923년 멸망한 상황이었으므로 대의명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아무튼 최승우는 스스로 작성한 국서의 내용을 읽어봐도 나름의 대의명분을 챙기고자 노력했지만, 927년의 서라벌 급습은 결국 신라 조정을 존중하던 호족들의 지지가 고려로 넘어가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3. 기타

4. 창작물에서

4.1. 태조 왕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최승우(태조 왕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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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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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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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후당을 건국한 이존욱은 당나라 황실의 일원이 아닌 사타족 출신이었다. 할아버지가 당나라 시대에 공을 세워 이씨를 사성받았으니 명분상 계승한다는 것.[2] 일각에서는 최승우가 후백제에서 임관했는지조차 불분명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국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보아서 후백제의 관리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