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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1:44:53

제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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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葛緖
제갈서
최종직위 조위옹주자사(雍州刺史)
서진 위위(衛尉)[1]
역임한 관직 조위태산태수(泰山太守)→옹주자사(雍州刺史)
서진태상(太常)→위위(衛尉)
성씨 제갈(諸葛)
(緖)
생몰기간 ?~?
고향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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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장수이자 정치가. 제갈충, 제갈굉[2]의 아버지. 성씨가 제갈씨인데, 서진에 종사한 대표적인 제갈씨 인물이다.[3]

2. 정사 삼국지

서주 낭야국 양도현[4] 사람으로 255년에 태산태수로 있을 때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등애의 지휘하에 적을 막는 데 성공했다.

263년에 옹주자사로 있을 때 촉 정벌이 시작되자 등애, 종회와 함께 대장이 되어 기산으로부터 출병했다. 무위에 주둔해 강유의 퇴로를 막는 역할을 맡다가 강유와 싸울 때 음평, 교두에 주둔해 강유가 물러나서 양안관을 구원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강유가 공함곡 북쪽 길을 통해 옹주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속아서 30리를 후퇴했다가 강유가 교두를 빠져나와 검각으로 향하는데 성공하자 목표를 잃게 되었다.

제갈서는 하루 차이로 강유를 놓쳐 임무에 실패했다. 등애는 그에게 덕양정을 통해 부성을 거쳐 성도 인근의 평야로 나오는 산길로 검각을 우회하는 공격을 제안했다. 하지만 제갈서는 자신이 받은 명은 강유와의 교전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검각으로 나아가 종회와 합류했다.

독자화의 야심을 품고 있던 종회는 제갈서에게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죄목을 씌웠다. 그는 수도로 압송되었고 휘하의 병력은 종회에게 편입되었다. 이 사건은 제갈서에게는 결과적으로 행운이 되었는데, 촉의 멸망 이후 일어난 종회의 반란에 연루되어 죽는 사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65년에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하자 태상이 되었다가 숭례위위까지 오른다. 손녀인 제갈완은 사마염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3. 삼국지연의

촉 정벌 때 등애 휘하에서 독립 부대를 이끄는 4명의 장수 중 1인[5]으로 등장해 음평, 교두를 지키다 영수의 계책에 속아 교두를 돌파당하며, 검각에서 강유를 공격하다가 패퇴하자 성난 종회에게 죽을 뻔 하지만 그가 등애의 부하이니 살려줘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의견으로 살아남는다. 그의 군대는 종회에게 편입되었으며, 등애가 자신의 장수를 그렇게 막 다룬 것에 분노해 종회와의 사이가 갈라지는 계기가 된다.

4. 미디어 믹스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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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8[6], 9, 10,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397.jpg
삼국지 13, 14

특이하게도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난 후 그 뒤로 쭉 출연이 없었다가 삼국지 8에서 다시 복귀했는데 시리즈 내내 능력치가 상당히 암울한 잡장으로 등장한다. 강유에게 속아 임무를 실패하거나, 음평 샛길로 나아가자는 등애의 제안을 거부하고, 종회에게 병력을 빼앗기는 등 무력한 모습만 보여서 그런듯 하다. 하지만, 이는 제갈서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능력치 책정이다. 강유에게 기만당한 것은 상대가 촉한의 마지막 희망인 그 강유였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며, 등애의 음평 샛길 제안은 당시 지휘관이라면 충분히 거부할 만한 도박수였다. 그리고 종회에게 병력을 빼앗긴 것도 종회는 당시 위나라 정계의 거물이자, 촉 정벌을 전담하는 총사령관에 가까웠으며, 관직 역시 진서장군이었기에 권위와 명성에 눌려 병력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앞서의 실책때문에 더더욱 명분이 없었으리라. 물론, 전투에 관련한 유일한 기록이 강유에게 기만당한 것 뿐이므로 야전지휘관으로서의 능력치(통솔, 지력 등)는 박하게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력은 괜찮게 줄만 한데, 제갈서는 촉정벌의 공신들이 줄줄이 죽는 와중에도 살아남아 진나라에 종사하여 태상, 위위 등 구경(九卿)의 고관에 올랐기 때문이다. 삼국지 12편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8/무력 41/지력 38/정치력 58. 병법으로는 기사와 제사가 있지만 무력이 낮아서 위력은 별 볼 일 없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5/무력 43/지력 27/정치력 48/매력 50으로 합계 213. 특기는 화시.단 1개로 무특기는 간신히 면했다.

삼국지 11에서는 능력치가 더 너프되어 통솔 41/무력 40/지력 29/정치 46/매력 48로, 합계가 204다. 병종적성은 기병만 B이고, 나머지는 모두 C이며, 당연하게도 특기 조차 없다.

삼국지 13에서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41/40/29/46. 특기는 공성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공성이며 전법은 창속강화.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41, 무력 40, 지력 27, 정치 46, 매력 49로 전작과 달리 지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우유, 주의는 할거, 정책은 침략황폐 Lv 1, 진형은 봉시, 전법은 매성,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4.2. 삼국전투기

히비키 단으로 등장한다. 앞에서 로버트 가르시아로 패러디된 양회와 헷갈리지 않기 위함인지 위군임에도 군복 색이 빨간색이 아니고 분홍색이다.[7] 검각 전투 (7)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등애가 연주에 있었을 때부터 따른 사실상의 직속수하라고 서술됐다.

검각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당시 옹주자사로 촉 정벌에 참여했다. 제갈서는 기산 방면으로 군을 끌고 진군했으며, 제갈서를 막기 위해 장익이 관성을 포기하고 음평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고 묘사됐다. 제갈서는 교두에 주둔했으며, 이에 강유가 교두를 피하고자 공함곡을 통해 돌아가려 한다는 첩보를 받고 교두에서 퇴각해 30리쯤 뒤로 물러섰지만, 강유가 이를 역이용해 제갈서가 뒤로 빠진 사이 바람같이 퇴각하면서 강유를 놓치고 말았다.

이후 등애가 답중에서 내려오자 강유를 놓친 것에 대해 등애에게 사과했다. 등애가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고 자기와 함께 행동하겠냐고 묻자 제갈서는 내심 FM 타입인 등애와 함께하면 개고생만 할 것 같아서 본 임무대로 강유를 쫓아가겠다며 거절했다.[8]등애가 검각을 뚫는 것은 힘의 낭비라며 한심하다고 하자 등애에게 대안이 있냐고 물었고, 등애가 산을 넘는다고 하자 그게 더 힘 낭비라며 어이없어했고, 그대로 종회에게 갔다. 그리고 제갈서의 부대는 종회에 의해 검각 돌파를 위한 총알받이로 써먹혔다.

제갈서는 이대로 있다가는 전멸이라고 판단하여 종회에게 따지러 갔지만, 오히려 종회에 의해 죄를 뒤집어씌워지고 수도로 압송됐다. 다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바로 뒤 소개컷에서 이렇게 수도로 압송된 뒤 오히려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서술되며 등장이 끝난다.


[1] 숭례위위(崇禮衛尉)[2] 諸葛厷/諸葛宏, 자는 무원(茂遠)으로 빼어난 재능을 지녔으며, 진나라에서 사공주부를 지냈다.[3] 촉한은 제갈량제갈균 형제, 손오는 제갈근제갈직, 조위는 제갈탄, 제갈정 등의 인물들이 있었다.[4]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과 동향으로 삼국시대 제갈씨 거물 거의 대부분의 고향이다.[5] 나머지 3인은 견홍, 양흔, 왕기다.[6] 위 이미지에 비해 색조가 조금 다르다.[7] 단의 퍼스널 컬러가 분홍색이다.[8] 해당 에피소드 마지막 부분에서 종회에게 화살받이로 써먹히는 제갈서가 그려지며 이게 잘못된 선택인 것마냥 묘사됐지만, 이후 전개를 볼 때 사실 제갈서의 예측도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