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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16:37

장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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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0,#fff> 생애 생애
평가 평가
가족 배우자 하후씨 · 자녀 2 2 · 손자 장준 · 사돈 유비 · 사위 유선
기타 기타 창작물 · 관장지용 · 도원결의 · 장팔사모 · 삼영전여포 · 장판파 전투 · 장판파 · 장판교 · 한중 공방전 · 낭중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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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비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기초로 한다.

2. 초기 생애

탁주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장비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하고 서화도 뛰어났다. 청나라 시대의 역대화기록에 따르면 장비는 줘저우인(탁주 사람)으로 미인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단, 이는 확증되지 않은 썰임을 명심할 것.[1]

유비가 처음 거병할 때부터 관우와 함께 그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기록이 매우 부실하다. 장비의 출신 성분을 두고도 말이 많은데 전부 추측일 뿐 검증된 바가 없다. 확인된 바는 장비는 유비와 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정도다. 참고로 《삼국지연의》와 다르게 정사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장비전〉에 따르면 장비는 젊어서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고, 〈관우전〉에서는 관우가 자신은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라고 언급했으니 이들이 매우 굳건한 유대관계로 묶여있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유비는 젊었을 때 고향에서 패거리를 이루고 협객 생활을 했다고 하니 장비는 관우, 그리고 또 다른 고향 친구인 간옹과 함께 유비의 패거리에 포함되어 활동했을 것이다.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3. 서주에서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가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원술이 와서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우이현, 회음현에서 이를 막았다.

<선주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는 장비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군을 이끌고 회음 석정에서 원술과 싸웠으나 이기고 짐을 되풀이했다. 도겸의 옛 장수인 조표가 하비에 있었는데, 장비가 그를 죽이려 했다. 조표의 무리는 둔영을 견고히 하고 수비하면서 사람을 보내 여포를 불렀다. 여포는 하비를 차지하고 장비는 패주했다.

<여포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물과 뭍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하비 서쪽 40리 되는 곳에 도착했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 사람 허탐은 밤을 틈타 사마 장광을 여포에게로 보냈다. 그가 말했다.
장익덕(장비)이 하비상 조표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 믿지 못합니다. 단양병 천 명이 서쪽 백문성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동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들이 성 서문으로 향하면 단양군이 즉시 성문을 열어 장군을 안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
이에 여포는 밤중에 진격하여 새벽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여포의 군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포는 성문 위에 앉아 보병과 기병으로 불을 놓아 익덕의 군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금, 부곡(部曲), 제장들의 가족을 노획했다. 조표 문서에도 나오지만 도겸의 구장이자 단양병과 연관이 있는 조표가 새로 들어와 서주호족 및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된 유비세력을 꺼리어 서로 갈등이 발생했고, 그 틈에 여포가 어부지리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관우와 함께 유비의 최측근인 장비가 조표와 사이가 나빴다는 건 유비와 조표의 갈등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 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하비의 수장 조표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 여포가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자 유비는 군을 돌려 해서에 주둔했다. 이후 유비가 조조를 수행해 여포를 격파하고 함께 허도로 돌아온 뒤 조조가 장비를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선주전> 주석 《오력》에 따르면 조조가 여러 차례 친근한 자를 은밀히 보내 제장들이 빈객을 맞아 주연을 베푸는 자가 있는지 엿보게 하니, 번번이 이 일로 인해 장수들이 해를 입었다. 유비는 이때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을 거느리고 순무(蕪菁)를 심고 있었는데, 조조가 사람을 시켜 문 안을 엿보게 했다. 그가 떠난 후, 유비가 장비, 관우에게 말했다.
내가 어찌 채소나 기를 사람이겠느냐? 조조가 필시 의심을 품었으니 더 이상 머물 수 없다.
그날 밤 뒤쪽 울타리를 열어 장비 등과 함께 경기병을 타고 떠나며, 하사받거나 선물 받은 의복을 모두 봉해 남겨두었다. 이에 소패로 가서 군사들을 거두어 합쳤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신빙성은 없다. 이는 《화양국지》에도 나오는 기록인데 배송지는 유비가 서주로 따난건 원술 토벌 때문인데 이런 기록이 말이 되느냐고 신빙성이 없다 하였다.

<명제기> 주석 <헌제전>에 따르면 나중에 유비가 소패로 가게 되었는데, 장비도 따라갔다. 장비가 진의록을 만나서 말했다.
그대는 처(두씨)를 빼앗아 간 사람에게 부하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이오? 우리랑 같이 갑시다.
그래서 진의록은 장비를 따라 수백 리를 갔는데, 후회를 하며 되돌아가려고 했고 그래서 장비가 진의록을 죽였다.

유비조조를 배반하고 서주에서 다시 봉기했으나 이내 패배하고 원소, 유표에게 의지했다. 이 과정에서 조조 휘하에 있다가 여남에서 합류한 관우와 달리 장비는 서주에서부터 하북까지 계속 유비를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하후연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200년, 하후패의 종매(하후씨)가 13살일 때 장비와 결혼했다.

4. 형주에서

4.1. 수어지교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제갈량)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이에 관우,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 연의에서는 한층 더 각색해 제갈량이 자기 군략을 박망파에서 확실하게 둘에게 보여주어 불평을 잠재운다.

4.2. 장판파 전투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로 들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하루 낮, 하루 밤을 추격하여 당양 장판파에 이르렀다. 유비는 조조가 갑작스럽게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처자식을 버린 채 달아났고, 장비로 하여금 20기를 이끌고 뒤를 끊도록 했다. 장비는 물가에 의지한 채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 잡으며 외쳤다.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
감히 접근하는 적군이 아무도 없었고 이 때문에 마침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묘사는 상단의 기록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 보다 더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장비가 다리를 끊은 것이나 조조군을 대치한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오늘날 우리로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진수는 장비의 용맹과 담력을 강조하기 위해 저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이미 적군이 한 번에 우르르 몰려 올 수 있는 상황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장비의 대담함과 용기를 증명한다. 예를 들자면 감녕의 무용을 자랑하는 일화로 1300명의 장사를 거느리고 5000명을 이끄는 관우의 도하를 막은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의 장비도 거의 비슷한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감녕이 1300명으로 5000명(물론 지휘관이 관우이기는 했으나)을 저지한 것에 비하면, 이쪽은 21이라는 정도.

이때 조조군의 정예 기병대 호표기가 5000 vs 21의 상황에서 장비를 두려워 해 공격하지 못했다는 것은 장비가 비범하게 활약하여 전국구급으로 명성을 날려왔기 때문일 터인데, 정사에서 특별히 전해지는 기록은 그가 관우와 함께 만인지적으로 불렸다는 기록 정도이다.

<장비전>에는 강물에 의지해서(飛據水斷橋) 라는 말이 나오는데, 연의에서의 모습이 익숙한 경우 '강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다리를 없애버린 후, 멀리서 소리치는 장면'쯤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렇게 보기 어렵다. 이 문장에서 의지한다는 한자는 據인데, 네이버 한자 사전에도 나오지만 이 글자는 의지한다는 뜻 말고도 막아 지킨다는 뜻도 있다. 즉 장비는 다리를 끊고 강을 막아 지킨 것이다. 이 장면이 정사에 나오는 것부터가, 진수가 관장지용이라 불리는 장비의 용맹무쌍과 그 활약상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기록의 의도가 그럴진데 강 건너에서 못 넘어오게 만든 다음 소리만 바락바락 지르는 장면이라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강 건너편에서 그랬다면 강물을 막아 지켰다는 표현이 아니라 강을 사이에 두었다고 기술해야 자연스럽다. 참고로 여기서의 장비는 조조의 정예기병 5천을 전부 맞닥뜨린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장판파는 매우 혼란스러운 땅이었고, 조조군의 5,000 정예기병과 유비의 패잔병, 그리고 그 난리통에 뒤섞인 수많은 민초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조조의 병사들은 유비를 찾거나, 아직 남은 유비군과 싸우거나, 민가를 약탈하거나 등등 제대로 통제되고 있지 않았다. 즉, 5,000명의 정예기병이 질서정연하게 유비를 쫓고 있던 것이 아니므로, 장비가 상대했던 것은 5,000 기병 전체가 아니다. 아마 유비 쪽으로 추격을 해오던 기병 수백과 맞닥뜨린 후 배수진을 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혼자서 수백의 기병을 맞이하여 사생결단을 내자고 호통을 치는 것 (그것도 퇴로를 스스로 끊은 채) 또한 보통 간담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정사에 기록된 내용이라고 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짜인지 의심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의 일이지만, 진수가 기록한 것은 그 정도로 놀라운 활약이기 때문이다.

유비가 후미를 맡기기 위해 장비를 보낸 것은 어떤 의미에선 자살 특공 명령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그것을 수행한 인물은 이 내용 없는 지시를 전술로 승화할 수 있는 능력과 개성을 가진 장수였다. 장비는 한 줌 밖에 안되는 휘하 기병들을 이끌고 장판교 다리 앞을 가로막았다. 기습으로 인해 군대가 붕괴하고 지휘관 유비의 도주로 한번 꺾였던 유비군의 기세가 장비에 의해 뻔뻔하게도 그런 적 없었다는 듯이, 오히려 장비의 사자후로 인해 그 정예인 호표기들도 겁을 먹어 감히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더 요란하게 우뚝 선 상황이 된 것이다. 조조는 오환족 같은 이민족 기병도 거느렸고 따라서 이민족 궁기병이 정예인 이들 사이에 섞여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는데도 호표기들은 멀리서 활 한번 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조조는 이 기습으로 철저하게 유비군을 격파한 후였고 유비의 목숨은 어떻게든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유비가 군비가 충실한 강릉으로 갈까봐 식량, 말 먹이를 보충해 줄 치중까지 버리고 급하게 양양으로 갔다가 유비가 지나갔다는 얘기를 듣고는 하루종일 잠도 안 자고 정예기병을 몰아서 단숨에 300여 리나 강행군으로 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미 급습의 효과까지 끝난 난전상태에서 장비가 아직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잔존 유비군이 모여 조조군의 발목을 잡고자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면[2] 조조로서도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설령 이 잔존병력까지 격파한다고 해도, 말이고 사람이고 더욱 피로가 누적되고, 보급도 없고, 전투로 상하기까지 한 군대로 유비를 계속 추격하거나 강릉에 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에 군대는 자신들에게 암묵적으로 적대감을 품고 있는 10만에 가까운 군중도 수습해야 했다. 추격대, 중군, 치중이 분리된 군대를 이끌고 추격만 계속하다간 아직 형식적인 항복만 받아 조조에게 적대적인 형주 인심이 돌아서면 위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조군 역시 쉬어갈 필요가 있었기에 조조는 더 이상의 무리는 피하는 쪽을 선택하며 추격을 포기하고 확실하게 유비가 강릉을 장악하는 변수를 없애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이후 장비는 유비와 제갈량, 조운 등과 수십 기로 달아나, 한진나루로 비스듬히 향하다, 마침 관우의 배와 만나, 면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자 강하태수 유기의 무리 만 여명과 조우하여, 더불어 함께 하구에 이르렀다.

4.3. 적벽대전

자치통감》에 따르면 주유유비가 주둔한 곳에서 유비의 위로를 받았는데 건방지게도 바쁘다는 이유로 동맹의 맹주인 유비에게 자기를 보러오라고 통보했다. 이에 관우, 장비가 분노했는지 유비는 동맹으로서 뜻을 보여야 한다며 단신으로 주유를 만나나 오히려 주유의 병력이 3만으로 적은 것을 듣고 실망만 하게 된다.

<선주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주유를 만나 비록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유를 남다르게 여기긴 했으나 내심 반드시 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서로 어긋나게 뒤에 남아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이미 손성부터가 오나라인들이 자기네 공적을 미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안 된다고 깠었고, 자치통감에서도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어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아예 빼버렸다.

어쨌거나 장비 역시 관우, 조운 등과 함께 적벽에서 유비의 지휘를 받고 싸웠으며,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정사에서 적벽대전은 유비군의 비중이 큰 전투였기에 상당한 활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4.4. 남군 공방전

적벽대전 이후 주유군과 유비군은 남군에서 조인군과 대치하는데 여기서 관우와 장비도 종군하였다. 관우가 형북에서 조인을 지원하려는 서황, 만총, 악진, 문빙을 막을 때 장비는 주유와 연계하여 활동한다.

<주유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유비가 주유에게 말했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유비가 강남을 평정한 뒤 장비를 의도태수 겸 정로장군으로 임명하고 신정후에 봉했고, 그 뒤 남군태수로 전임시켰다.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가 서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배들을 대거 보내 여동생을 영접하게 했는데, 손부인이 은밀히 유선을 데리고 오로 돌아가려 하니 조운이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가로막고는 유선을 구해 돌아왔다.

5. 익주에서

5.1. 유비의 입촉

<조운전>에 따르면 유비가 가맹관에서 환군해 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유비가 익주로 들어간 뒤 군을 돌려 유장을 공격했고, 장비는 제갈량과 함께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했다. 강주에 이르러 유장의 장수인 파군태수 엄안을 격파하고 산 채로 붙잡았다. 장비가 엄안을 꾸짖으며 말했다.
대군이 당도했는데 어찌 항복하지 않고 감히 맞서 싸웠느냐?
엄안이 대답했다.
경(卿) 등이 무도하게 우리 주를 침탈했으니, 우리 주에는 다만 머리를 잘리는 장군은 있을 뿐 항복하는 장군은 있을 수 없소.
장비가 노하여 끌고 가서 머리를 자르라고 좌우에 명했지만, 엄안은 안색이 변하지 않으며 말했다.
머리를 자르면 자르는 것이지 어찌 화를 내는가!
장비가 이를 장하게 여겨 풀어주고 그를 빈객으로 삼았다. 연의의 일부 판본과 달리 엄안이 앞장 서서 옛 동료들을 설득해 투항시켰다는 언급은 없지만 엄안을 비롯한 항장들로 하여금 앞을 가로막는 유장군을 설득시켜 투항을 이끌어내는 시도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비가 지나는 곳마다 승리했다는 기록에는 싸우지 않고 온전히 투항을 받아낸 것도 포함했을 수 있다.

<장예전>에 따르면 장비가 형주로부터 점강현을 지나 촉군으로 들어갔을 때, 유장이 장예에게 병사를 주어 덕양현의 맥하에서 저항하도록 했는데, 군대는 패배하여 성도로 돌아왔다.

장비는 지나는 곳마다 승리하고 성도에서 유비와 만났다. 익주가 평정된 후 제갈량, 법정, 장비와 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3], 은 천 근, 전 5천만, 비단 천 필을 하사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이를 두어 포상했다. 장비를 영(領) 파서태수로 삼았다.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

배송지는 당시 관우는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였다. 다만 여기서 임저는 형주 남군 임저현을 말하는 것으로 관우의 관할 구역이었고 마초가 잠시 형주로 왔을 공산은 있다. 거기에 유비는 익양대치 때 형주에 온적이 있었다. 따라서 유비, 관우, 마초가 만났을 가능성도 높고 잠시나마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파서태수로서 조조가 공격한 한중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방어해야 하는 장비가 형주로 갔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진 않다.

<유파전> 주석 《영릉선현전》에 따르면 장비는 일찍이 유파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는데, 유파가 그와 말을 하지 않아 장비는 매우 분노했다. 제갈량이 유파에게 말했다.
장비는 비록 무인이지만, 그대를 경모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문무를 결집하여 대사를 정하려고 하십니다. 그대는 비록 고상한 천성을 갖고 있지만, 굽히려는 뜻이 적습니다.
유파는 말했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응당 사해의 영웅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어찌 무사와 함께 말을 하겠습니까?

5.2. 한중 공방전

215년 9월 파군의 7성(七姓)의 이민족왕 박호(朴胡), 종읍후(賨邑侯) 두호(杜濩)가 파군의 이(夷)족, 이민족들을 들어 항복해왔고 이를 황권이 격파했으며 11월 장로가 항복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유비가 유장을 습격해 익주를 차지하고 마침내 파중을 점거했는데 장합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고 한다. 조조가 대군을 들어 한중을 점령하고 남정에 있을 당시에 장합을 시켜서 보낸 것으므로 그 병력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12월 조조가 돌아가며 하후연장합을 남겨 한천을 수비하도록 했다.

장합은 별도로 제군(諸軍)을 지휘해 파서와 파동으로 내려가 항복을 받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니, 탕거, 몽두, 탕석으로 진군해 장비와 50여 일간 서로 겨루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장로가 파중으로 달아나 항복했을때 황권두호박호를 격파하였고 이때 위공 조조가 장합에게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3파 지역을 순행하며 그곳의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여 군대를 탕거로 진군시켰다. 유비는 파서태수 장비를 시켜 장합과 서로 대치하게 하였고 50여일이 지나자 장비가 장합을 습격하여 크게 대파하였으며 장합은 남정으로 달아났고 유비도 성도로 돌아갔다.

<장비전>에 따르면 장비는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남정으로 돌아가니 파(巴) 땅은 안정을 찾았다.

아마도 장비는 우회로를 따라 좁은 길목을 행군하는 장합을 급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합은 위나라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명장이자 전략가인데[4], 이에 맞서 장비가 멋진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아 앞서 설명되었던 것과 다르게 장비는 단순히 용감한 무부가 아닌 용병에 뛰어났던 사령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탁주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후에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바위를 종이 삼고 전장에서 휘두르는 장팔사모를 붓 삼아 입마명(立馬銘)이라는 시를 새겼다.

삼국지집해》 장비전에 따르면 팔몽산은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곳으로 여기에 장비가 친필을 친히 새겼다고 한다.
한나라 장군 장비가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팔몽에서 도적의 수괴인 장합을 격파했으니 이에 말을 멈추고 글을 새기노라.
「漢将軍飛, 率精卒萬人, 大破賊首長合於八蒙, 立馬勒銘.」
이는 대략 장비가 친히 쓴 것으로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명나라 시대의 태평청화에 따르면 쓰촨성 류장현에서 장비가 절벽에 새긴 입마명이 발견됐다.[5]

심흠한(沈欽韓)이 이르길 여지기승(輿地紀勝)[6]에 따르면 팔몽산은 거주(渠州) 유강현(流江縣) 동북 7리에 있는데, 지세가 높고 낮은 게 8곳으로, 물이 이곳을 도는 데 있어, 둘레를 도는 게 1리가 못된다. 항상 연기와 안개가 그 위에 흐릿하게 있기에, 이름 지어졌다. 바로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곳이다. 또한 명승지(名勝志) 비목(碑目)에 있는 유강현제명(流江縣題名)에서 이르길 "한의 장수 장비가 정예병 만 명을 거느리고 도적의 우두머리 장합을 팔몽에서 크게 격파하며, 말을 멈춰 세워 돌에 새겼다", 대략 장비가 친히 쓴 것이다.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방여기요(方輿紀要)[7] 권 68에 선주가 일찍이 파군(巴郡)의 탕거, 선한(宣漢), 한창(漢昌) 3현을 나눠 탕거에 두나, 진나라 때 덜어내 파서에 넣었으니, 광안주(廣安州) 거현이 바로 탕거현이다. 현의 동북 7리에 팔몽산이 있는데, 8개의 봉우리가 높거나 낮게 있고, 그 아래는 10여 리가 평평하고 넓어, 강물이 이곳을 도나, 둘레를 도는 게 1리가 못되며, 항상 연기와 안개가 그 위에 흐릿하게 있다. 산 아래에 돌에 새김이 있어 이르길 "한의 장수 장비가 도적의 우두머리 장합을 팔몽에서 크게 격파하다.", 장비가 몸소 적은 것이다.

<양부전>에 따르면 유비가 장비와 마초 등을 파견하여 저(沮) 길로부터 나와 하변을 취하도록 하였으므로, 저, 뇌정 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 모반하여 유비에게 호응했다.

<조휴전>에 따르면 유비가 장수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가 장비를 보내 고산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8]

이후에는 마초와 함께 한중 공방전 때 뭘 했는지 나오지 않지만 유비가 몸소 한중을 얻으러 친정한 전투인 만큼 유비와 합류하여 종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중 공방전 승리 후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장비를 사방장군 중 우장군에 임명하고 가절을 내렸다.

<위연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성도로 옮겨서 다스리게 되니 중장(重將)을 얻어 한천을 진수케 해야 했다. 중론은 필시 장비가 될 것이라 하였고 장비 또한 내심 자신했으나, 유비는 위연을 뽑아 독한중 진원장군으로 삼고 한중태수를 겸하게 하니 일군(一軍)이 모두 놀랐다.

다만 이 고사는 유비가 장비 대신 위연을 중용하면서 나이가 많이 든 장비는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비가 일개 병사에서 출발한 위연을 파격적으로 중용한 것까지는 맞지만 장비가 군무에서 물러났다고 보는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때 장비는 파군 일대를 담당했는데, 파군은 파촉이라는 익주의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익주의 중심부이자 익주 곳곳으로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위치였다.[9] 즉, 익주 내부에 일이 터지거나 한중이나 성도 등의 주요 도시가 위태로워질 경우 파의 장비를 중심으로 삼아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유비가 장비의 군재를 신뢰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인선이었다.

실제로 이 내용은 유비가 장비를 너무나도 신뢰했기에 나온 결과로 봐야하는게, 유비는 이전부터 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을 최후방 요충지에 두고 본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움직이는걸 선호했다. 서주에 있을 때는 관우에게 하비성을 맡겼고, 입촉을 할 때에는 형주를 관우에게 맡겼다. 유비가 마지막으로 친정한 이릉대전 때도 가장 신뢰할 만한 제갈량조운에게 파촉 지방을 맡기고 나왔다. 한중공방전이 끝나고 파 지방의 장비를 그대로 유임시킨 것도 같은 이유라고 보는게 타당하다.[10]

여기서 놀라운 점은 유비가 다시 한번 장비에게 중책을 맡겼다는 점이다. 이전에 장비는 조표 등 서주 토호들과 마찰이 생겨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긴 경력이 있고[11], 그 이후부터는 유비가 장비가 아닌 관우에게 후방을 맡기는 중책을 준 건데 그런 관우가 형주라는 지역을 맡아 없어지자 새로운 인물을 들이지 않고 장비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것. 장비가 입촉할때 엄안을 격파하고 한중공방전에서 장합을 격파한 것에서 유비의 신뢰를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때 유비의 속내도 짐작이 가능한데 총사령관급인 장비를 최전선인 한중에 세운 후 조조와의 일전을 준비하기보다는 익주의 중심인 파군을 지키게 해[12]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익주 지방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221년, 유비가 칭제하고 장비를 거기장군, 영(領) 사례교위로 올리고 서향후로 올려 봉했다.

6. 죽음

파일:장비 1.jpg
랑중시(낭중) 환후사 내의 장비 무덤. 이곳에 몸이 묻혔고, 관우처럼 수급은 따로 충칭 쪽에 묻혀 있다.

당초 장비의 웅장위맹(雄壯威猛)은 관우에 버금갔으므로 위의 모신 정욱 등이 모두 관우와 장비를 칭하길 만인지적이라 했다.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유비가 늘 이것을 경계하여 말했다.
경은 형벌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친데 또 매일 장정들을 채찍질 하고는 그들을 좌우에 있게 하니 이것은 화를 초래하는 길이오.
그러나 장비는 이를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선주전>에 따르면 221년 6월, 거기장군 장비가 주변인에 의해 해를 입었다.

유비가 오를 정벌할 때 장비는 군사 1만 명을 인솔하여 낭중에서 출발해 강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장비 휘하의 장수 장달, 범강에게 살해 당하고 그 수급을 지닌 채 물길을 타고 내려가 손권에게로 달아났다. 장비 영(營)의 도독이 표를 올려 유비에게 보고했다. 유비는 장비의 도독이 표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서 통탄해하면서 말했다.
아! 장비가 죽었구나.

앞서 유비가 늘 장비에게 형벌이 가혹하니 이를 고치라고 충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범강과 장달의 살인은 가혹행위로 인한 상관 살해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고대의 군법이란 것은 굉장히 가혹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13] 그래서 범강과 장달이 대체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형벌을 받았기에 하필 이릉대전 직전에 그들이 장비를 살해 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니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 이 부분은 상상의 영역이다.

정사에서 이들이 장비를 죽인 이유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설정을 창작해서, 관우의 죽음에 슬픔에 빠진 장비가 오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조의의 표시로 쓸 흰색 갑옷과 흰색 기를 사흘 안에 준비하라 했는데[14] 부장인 범강과 장달이 이는 불가하니 말미를 더 달라 하자 둘을 흠씬 패고는 말미를 내일[15]까지로 줄이니, 장비가 자기 만 생각하고 일을 그르칠사람이고, 어차피 못하면 둘 다 장비에게 사형당한다 생각하고, 이 둘이 잠 자고 있던 장비를 살해했다고 각색되었다.[16]

장비의 죽음은 유비에게 있어서 이릉대전의 대패의 또다른 커다란 이유이다. 전쟁터에서 평생을 살아온 베테랑 장비가 있고 없고는 유비와 촉군에는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인데 그 장비가 전쟁 직전에 죽었으니, 유비에게는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참고로 장비는 이릉대전 직전에 죽고, 마초는 이릉대전이 펼쳐지는 중, 황충은 형주 공방전 1년 뒤에 세상을 떠나 관장마황조 5명 중 4명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그 여파가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 유일하게 남은 조운은 강주를 감독하며 후방에 남아있었고, 제갈량은 유비가 원정을 나가면 본진을 총괄하는 역할이라서 결국 유비 혼자서 전선을 모두 집중 지휘하는 상황에 놓였다. 장비라도 살아있었다면 존재만으로도 병력을 2개로 가를수 있으니 육손이 두 무리를 상대해야하니 쉽지 않았을텐데 상대가 유비 하나밖에 없으니 세력이 크든 적든 오히려 상대하기 손쉬웠고, 자기자신의 명성까지 이용하는 심리전과 의병지계에 노련한 장비가 생존해 있었다면 적어도 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비가 살아 있었다면 이릉대전 발발시 그 휘하에서 실질적으로 병력을 지휘하는 건 거기장군 장비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개전 이후 유비의 움직임을 보면 자신의 본대와는 별도로 군사를 나누어 보낸 일이 잦았는데 장비는 그런 임무에도 적격이었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관우와 장비는 무용이 뛰어나며,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주상을 봉대하였으며,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을 도왔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의 얕은 생각과 몸을 훼손시키며 나라를 구한 태도를 애도한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장비의 시호는 환후(桓侯)라고 했다.

환우기(寰宇記) 86권에 따르면 낭주(阆州) 낭중현에 장비의 무덤이 있는데, 자사(刺史)의 관청에서 동으로 20보(步)에 있고, 높이는 1장(丈) 9척(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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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봉성 삼국지나 최훈삼국전투기에서는 마치 이게 정설인 것마냥 사실 이랬는데 너희들은 몰랐지?라는 뉘앙스로 묘사를 했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록이 전무해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2] 실제로 나중에 이 잔존 병력들은 특별한 지시도 없는 상황에서 유비가 있는 강하로 집결해 적벽대전에 참전할 정도로 강한 생존력과 충성심을 보인다.[3] 한대의 근으로 계산하면 116.5kg, 2019년 8월 23일 현재의 시세로는 67억원이다.[4] 장합제갈량의 1차 북벌을 막은 건 물론 이후에도 제갈량의 북벌을 막는 데 혁혁한 활약을 했다. 연의에서 사마의의 대촉 전공의 1/3 은 사실 장합의 공이다. 연의에서도 제갈량의 페이스에 휘말려 사마의가 제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오히려 장합이 냉철하게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경우도 보여준다.[5] 다만 이것은 후세의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다.[6] 중국 남송(南宋:1227년경) 말 왕상지(王象之)가 편찬한 지리서. 총 200권.[7]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라고도 불린다. 명말청초의 고조우(顧祖禹)(1631년 ~ 1692년)가 찬술한 역사지리지. 본편 130권.[8] 하변전투는 본대가 오기 전이었던지라 허장성세로 찔러보는 수준으로 애초에 병력이 부족했던 장비 입장에서는 뭘 할 수 있는게 없었다.[9] 파군은 현재 중국의 충칭일대로, 성도(청두)를 중심으로 한 촉 지방과 남군(강릉)을 중심으로 한 형주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이 당시에는 강주라고 불렸다.[10] 이건 유비 뿐만이 아니라 후계자가 장성하지 못한 상태로 군주들이 친정했을 때 했던 행동들이다. 조조의 경우도 친정을 할 때 순욱을 조정에 두고 왔고, 유방의 경우 소하가 관중을 담당하며 유방의 일을 서포트했다.[11] 관우에게 하비성을 맡긴건 그 이후에 조조에게서 서주를 다시 한번 탈취한 후다.[12] 한중 점령 이전에도 장비는 파서 태수로 있었다.[13] 고대까지 갈거없이 명대 병법서인 기효신서만 봐도 지금 기준으론 이게 적이랑 싸우자는 건지 아군끼리 다 죽이자는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참형 규정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가혹한 군법을 셀 수 없이 집행해봤고 집행하는걸 봤을 정도로 평생 전쟁터를 누빈 유비가 장비를 콕 찝어서 지적했을 정도면 장비는 당시 기준으로도 두드러지게 혹독했을 가능성이 높다.[14] 시판되는 삼국지 서적에 따라 창, 칼, 화살 등으로 나오기도 한다.[15] 신삼국에서는 약간 순화(?)해서 장비가 둘을 때리고 난 후 또 술을 마시면서 화를 조금 가라앉히고 조용히 "이틀 더 주겠다.(닷새 안에 준비하라)"라고 하고는 등짝이 걸레가 돼 엎드려 있는 그들에게 느닷없이 술을 권하고, 자기들은 지금 술을 마실 수가 없다고 답하자 알았다면서 자리를 떴다고 묘사되었다.[16] 일부 판본에서는 열심히 만들었지만 반 밖에 못해서 얻어맞고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