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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6 09:09:28

제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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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姜齊)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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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齊)나라 13대 국군'''
강(姜)
여(呂)
녹보(祿甫)
아버지 제장공(齊莊公) 강속(姜贖)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98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730년 ~ 기원전 698년

1. 개요2. 치세

1. 개요

제나라의 제13대 군주.

제장공아들이자 제양공제환공 형제의 아버지였다.[1] 희공의 노력으로 아들인 환공때 제나라가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자가 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강제의 기록이 많아지기 시작한다.[2]

2. 치세

제희공 9년(기원전 722년), 노은공이 즉위했다.[3]

제희공 11년(기원전 720년) 겨울, 제희공은 정장공과 회맹해 정나라의 입지가 더욱 막강해졌다.[4]

제희공 14년(기원전 717년) 5월 신유일, 희공은 노은공과 애에서 회맹했다.

제희공 15년(기원전 716년) 여름, 희공은 동복아우인 이중년(夷仲年)을 보내 노나라와의 우호를 다졌다.[5]

제희공 16년(기원전 715년) 봄, 제희공은 송나라위(衛)나라에게 정나라와의 강화를 요청했다.[6] 같은 해 가을 7월에 송상공위선공과 함께 회맹했다. 8월 병술일에 정장공은 제나라 사신과 함께 동주의 조회에 참석했다. 겨울에는 제희공이 노나라에 사람을 보내 송, 위, 정 등의 3국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제희공 17년(기원전 714년) 겨울, 제희공은 노은공에게 송나라를 치자고 했다.

제희공 18년(기원전 713년) 2월, 제희공은 중구에서 노은공 및 정장공을 만나 회맹했다. 2월 25일 정나라에서 회맹해 출병 시기를 잡았다. 10월 임오일 성(郕)나라가 송나라를 같이 치자고 해놓고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제희공이 정장공과 함께 성나라부터 쳤다.

제희공 19년(기원전 712년) 7월, 희공과 노은공, 정장공이 허(許)나라를 침공했는데 첫날부터 허성을 함께 쳤다. 7월 3일 허나라를 점령했고, 이에 허나라의 군주였던 장공이 위나라로 도망갔다. 제희공이 노은공에게 허나라 땅을 주려 했으나 노은공이 거절해 정장공이 가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나라의 공자 궤, 즉 노환공이 노은공을 시해하고 노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제희공 21년(기원전 710년) 봄, 송나라의 태제 화독이 송상공을 죽이자 같은 해 3월 노환공이 제희공, 정장공과 함께 송나라를 쳤다.

제희공 22년(기원전 709년), 노환공이 영 땅에서 제희공과 회맹하다가 환공이 혼인하겠다는 말을 전해 희공이 미모가 뛰어났던 딸 문강을 환공에게 시집보냈다. 사망 플래그 [7] 이 해 여름에 제희공과 위선공이 포 땅에서 만났으나 맹세하지는 않았다.

제희공 24년(기원전 707년), 희공은 정장공과 함께 기(紀)나라에 방문했다.

제희공 25년(기원전 706년), 북융이 제나라를 치자 제희공은 정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정장공은 6월에 태자 홀(忽)[8]을 보내 제나라를 구원했다. 태자 홀은 북융을 쳐서 300명을 죽였고, 포로도 많이 잡았다. 이에 제희공이 그 공로를 높이 사서 딸을 태자 홀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홀이 말했다.
"정나라는 소국이지만, 제나라는 대국입니다. 그러니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아 거절합니다."
그리하여 혼약이 백지화되었다.

제희공 26년(기원전 705년) 가을, 희공은 정나라 및 위나라와 함께 맹읍과 상(向)읍[9]을 쳤다. 동주의 환왕은 맹읍과 상읍의 백성들을 견으로 옮겼다.

제희공 29년(기원전 702년) 겨울, 희공이 위나라 및 정나라와 연합해 노나라를 침공하니 노나라 군대가 상 땅에서 교전했다.[10]

제희공 30년(기원전 701년) 정월[11], 희공은 위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함께 악조에서 회맹을 가졌다.

제희공 32년(기원전 699년) 2월, 기사일 희공은 송나라, 위나라, 연나라와 함께 노나라를 쳤다. 그 결과 노나라는 패배했다. 같은 해 동생 이중년이 죽었다. 이에 그 아들인 공손무지를 불러 태자인 제아(諸兒)[12]와 같은 대우를 해주었다.

제희공 33년(기원전 698년) 겨울, 희공은 송나라, 위나라, 채나라, 조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정나라는 제대로 대비하지 않아서 대패했다. 같은 해 12월 정사일에 제희공이 죽으니 그 아들인 제아가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암군이었던 제양공(齊襄公)이다.


[1]열국지》에서는 제환공이 제양공의 아들로 나온다.[2] 단 무조건 그런 것은 아니고 제환공, 제경공(齊景公) 등 유명한 군주에 한해서 많아진다.[3] 이때부터 《춘추》의 기록이 시작되었다.[4] 그 이유는 춘추시대 극초기에 정나라는 소국이었지만, 제나라는 나름대로 국력이 상당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다만 정장공의 시기는 정나라가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이었다.[5] 이중년은 제양공을 죽이고 제나라의 군주가 된 공손무지의 아버지였다.[6] 당시 이들은 정장공이 이끄는 정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7] 드립이라 취소선을 사용했지만 실은 맞는 것이, 제희공의 아들이었던 제양공이 누이인 문강과 근친상간을 하고자 매제인 노환공을 죽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제양공, 노환공 문서를 각기 참조.[8] 훗날 정소공이 되었다.[9] 지명이나 성씨로 쓸 때는 向자를 원음인 향이 아닌 상으로 읽는다. 즉 나라 이름, 성씨 상으로 나타낼 수 있다.[10] 제희공 25년, 북융의 제나라 침입때 희공이 제나라를 구원한 제후들의 군대에 양식을 보냈는데 이를 나누는 일을 맡은 노나라에서 정나라의 순서를 맨 마지막으로 하자 분노한 정나라가 제나라에 노나라를 칠 것을 요청했다.[11] 1월이다.[12] 훗날의 제양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