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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7-27 12:13:07

제경공(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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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의 26대 국군 제경공(齊景公)에 대한 내용은 제경공(26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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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2F7B> '''제(齊)나라 23대 국군'''
강(姜)
여(呂)
무야(無野)
아버지 제혜공(齊惠公) 강원(姜元)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82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98년 ~ 기원전 582년

1. 개요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2.1. 네 나라의 사신들을 모욕하다2.2. 안(鞌) 전투
3. 백성들을 위로하다

[clearfix]

1. 개요

제나라의 23대 군주. 제혜공의 아들. 제영공의 아버지. 그는 선정을 베푸는 등 내정에는 능했으나 안타깝게도 전쟁은 잘하지 못했다. 다만 상대가 나름대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진(晉)나라라는 점 때문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1] 제나라의 26대 군주인 제경공(齊景公)과는 다른 인물이다.[2]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2.1. 네 나라의 사신들을 모욕하다

제경공 6년(기원전 593년) 10월, 진(晉)은 극극을, 노(魯)는 계손행보를, 위(衞)는 손양부를, 조(曹)는 공자 수를 사신으로 제나라에 보낸다. 이들에겐 각자 특징이 있었는데, 진나라의 극극은 애꾸눈이었고 노나라의 계손행보는 대머리였으며 위나라의 손양부는 절름발이였고 조나라의 공자 수는 꼽추였다. 네 사람이 동시에 제나라를 사신으로 도착하자 제경공은 이들을 맞이해 접대한다. 문제는 제경공이 준비한 마부들이었다. 애꾸눈인 극극의 수레는 애꾸눈이 몰고, 대머리인 계손행보의 수레는 대머리가 몰았으며, 절름발이인 손양부의 수레는 절름발이가 몰았고, 꼽추인 공자 수의 수레는 꼽추가 몰게 했다. 이런 행색으로 제나라 도성에 입성하는 사신단을 보자 제경공의 어머니인 소(蕭) 태부인[3]은 누대 위에서 이를 구경하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해 큰 소리로 폭소하고 만다. 이에 네 명의 사신들은 이 소리를 듣고 매우 불쾌해하였다. 특히 극극은 대로하여 제나라에서의 일을 마친 뒤 진나라로 돌아가 임금에게 제나라를 쳐줄 것을 청하였지만 시기가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한다. 결국 극극은 나중에 제나라에서 사신을 4명 보내자 그들을 죽이는 걸로 울분을 표했다.[4]

제경공 7년(기원전592년) 봄, 제경공이 노나라 북쪽 변방을 공격했다.

위나라의 손양부가 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신축(新築)에서 교전하여 대승을 거뒀다.

2.2. 안(鞌) 전투

제경공 8년(기원전 591년),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치니 제나라는 패배하여 공자 강(強)을 볼모로 보내 진(晉)나라는 물러났다.
제경공 10년(기원전 589년) 봄, 제경공은 노나라위(衛)나라를 쳤다. 노나라는 진(晉)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진 경공은 극극을 중군장으로 사섭(士燮)[5]을 상군장으로, 난서(欒書)를 하군장(下軍將)으로 삼아 노나라와 위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6월 6일 미계산에서 교전이 일어났고, 6월 17일 양군은 안 땅에 진을 쳤다. 그때 제나라 측에는 방추보(逄醜父)가 제경공의 거우[6]로 있었는데, 전쟁에 앞서 제경공이 호기롭게 외쳤다.

"진나라 놈들을 (어서) 무찌르고 밥이나 먹자!"

그 결과 극극에게 화살을 쏘아 맞추는 전공을 세운다. 극극은 다리에 피가 났고 퇴각마저 생각했으나 거어인 해장의 만류로 실행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부상을 견디며 참은 보람이 있었는지 재차 맞붙을 때는 도리어 제나라가 위기에 빠졌다. 제군은 곧 패했고 제경공은 달아났다. 이에 만일을 대비해 방추보는 제경공과 자리를 바꿨다.[7] 과연 전차로는 갈 수 없는 길에 걸려 더 달아나지 못했고 그들은 사로잡혔다. 경공을 추격해온 진(晉)나라의 한궐이 짐짓 방추보에게 엎드리며 말했다.

"우리 군주께서 노나라와 위나라를 구원하라 하셨습니다."[8]

한궐이 누가 경공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방추보는 태연히 경공인 체하며 거우 행세를 하던 경공에게 물을 떠오라고 명했다. 이에 경공도 상황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당연히 방추보는 잡힌 상태로 끌려갔고 그를 보고 속은 것을 깨달은 극극은 방추보를 제거하려 했다.

"감히 나를 속이다니!"

그러자 방추보가 대답했다.

"군주를 대신해 죽는 것은 진정한 충정이오."

극극은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 충정에 감동해 그를 놓아 주었다. 그리하여 방추보도 무사히 제나라로 복귀했다. 진(晉)나라가 마릉(馬陵)[9] 땅까지 추격하자 제경공은 보물을 바치며 물러나 달라고 요청했으나 진(晉)나라는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 대신 극극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들었다.

"소동숙(蕭桐叔)의 딸(제경공의 어머니인 소 태부인)을 볼모로 넘기고 제나라 밭의 이랑을 동서 방향으로 터라![10] 그러면 물러나 주겠다."

그 무리한 요구에 제경공이 대답했다.

"태부인은 과인의 어머니요, 진나라 군주께서도 어머니가 계실 것이외다. 의를 내세우며 우리를 정벌하는데, 이렇게 포악하게 굴어서야 되겠소이까?"

결국 극극은 이걸로 타협을 보았다.

"좋다. 그러면 대신 노나라와 위나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줘라."

제경공은 그 요구를 들어주어 결국 전쟁은 끝났다.

3. 백성들을 위로하다

제경공 11년(기원전 588년), 제나라로 돌아온 제경공은 원유(군주의 사냥터)의 출입 금지를 풀고 세금을 감면하였으며,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구제하고 병자들로 하여금 치료받을 수 있게 지원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그 해 12월, 진(晉), 송(宋), 노(魯), 위(衛), 정(鄭), 조(曹), 주(邾), 기(杞)의 제후들과 함께 충뢰(蟲牢)에서 맹약한다.

제경공 14년(기원전 585년), 진(晉), 송, 위, 정, 조, 거(莒), 기의 제후들과 함께 포(蒲)에서 맹약했다.

제경공 17년(기원전 582년), 제경공이 죽고 아들인 강환(姜環)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영공(齊靈公)이다.


[1] 진경공(晉景公) 치세다.[2] 26대 군주인 제경공은 23대 제경공의 손자다.[3] 선군인 혜공의 아내. 제후(諸侯)의 아내를 일컬어 부인(夫人)이라고 한다.[4] 다만 이는 사기의 기록으로 춘추시대의 사건에 대해서 더 신뢰도가 높은 좌전에는 사신을 죽인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5]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섭(士燮)과는 다른 인물이다.[6] 車右. 전차를 옆에서 호위하는 직책.[7] 즉 자신이 제경공인 척해서 대신 표적이 되려는 의도였다. 비슷한 사례로 훗날 후한 시대 때 조무가 주군인 손견이 위기에 처하자 그의 붉은 두건을 자기가 두르고 적군의 이목을 끌어 손견이 무사히 달아날 수 있게끔 한 것이 있다.[8] 당연하지만 제경공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조롱하려는 뜻에서 한 말이다.[9] 바로 손빈방연이 마지막으로 싸운 그 마릉 땅 맞다.[10] 제나라와 진나라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는 곧 언제라도 우리가 너희를 압박할 수 있게 쳐들어가기 쉽도록 길을 트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