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0:26

제후장공

파일:제 전서체.png
강제(姜齊) 국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초대

태공
제2대

정공
제3대

을공
제4대

계공
제5대

애공
제6대

호공
제7대

헌공
제8대

무공
제9대

여공
제10대

문공
제11대

성공
제12대

장공
제13대

희공
제14대

양공
제15대

공손무지
제16대

환공
제17대

공자 무휴
제18대

효공
제19대

소공
제20대

제군 사
제21대

의공
제22대

혜공
제23대

경공
제24대

영공
제25대

장공
제26대

경공
제27대

안유자
제28대

도공
제29대

간공
제30대

평공
제31대

선공
제32대

강공
삼황오제 · · ·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삼국시대 · 진(晉) · 오호십육국 · 북조 · 남조 · ·
오대십국 · · 서하 · · · · ·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제(齊)나라 25대 국군'''
강(姜)
여(呂)
광(光)
아버지 제영공(齊靈公) 강환(姜環)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48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53년 ~ 기원전 548년

1. 개요2. 치세

1. 개요

제나라의 제25대 군주. 제영공의 아들. 제경공(齊景公)의 형. 이 당시에 대부 최저(崔杼)와 경봉(慶封)이 권력을 쥐었고, 동곽강이 제장공과 사통하자 최저는 그를 시해한다. 아버지 제 영공이 죽자 그 뒤를 이었다. 앞의 제장공과 구별하기 위해 제후장공(齊後莊公)이라고 불러 구분한다.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약간 그렇지만 넘어가자.[1]

2. 치세

제장공 원년(기원전 553년), 제후장공은 노나라, 진(晉)나라, 송나라, 위(衛)나라, 정나라 등과 전연에서 회맹했다.[2]

제장공 2년(기원전 552년), 제장공은 노나라, 진(晉)나라, 송나라, 정나라와 회맹하는데, 진(晉)나라의 난씨를 막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제장공은 경공을 대부로 임명했다. 그리고 공자 아의 친척인 공자 매를 구두의 언덕에서 사로 잡았다. 공자 조는 노나라로, 숙손환은 연나라로 도망갔다.

제장공 3년(기원전 551년), 가을 난씨 가문의 당주 난영(欒盈)이 제나라로 망명했다. 그러자 대신 앙영과 전문자가 거절하라 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에 다시 노나라, 진(晉)나라, 송나라, 위나라, 정나라와 사수에서 회맹해 다시 난씨를 막자고 했다. 그러나 제나라가 이미 난영을 받아들인 뒤였다.

제장공 4년(기원전 550년), 제 장공은 난영을 진(晉)나라의 곡옥에 잠입시켜 내응하게 했다. 그리고 대군을 거느리고 태항산(太行山)을 넘어 맹문관에 이르렀으나 난영은 패했고, 제군은 돌아가다가 진(晉)나라의 조가(朝歌)를 먹었다.

제장공 6년(기원전 548년), 옛날에 대부 당공이 죽자 그 아내인 동곽강이 아름다워 최저가 차지했다. 그런데 제장공이 최저의 아내가 된 그녀와 사통했는데, 이때 환관 가거에게 채찍질을 한 일이 있었다. 최저와 경봉은 그를 이용해 제장공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5월에 거나라 군주가 제나라에 입조하자 제장공은 잔치를 열었다. 최저는 병난 척하면서 제장공을 유인했고, 거기에 넘어간 제장공은 최저의 집에 갔으나 가거가 부하를 거느리고 그를 포위했다. 그래서 제장공이 달아나다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담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리고 최저가 제장공의 이복 동생인 강저구(姜杵臼)에게 뒤를 잇도록 하니 그가 바로 제경공(齊景公)이다.

최저가 제후장공을 죽인 뒤, 제의 태사(太史, 즉 사관)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라고 기록하자 최저가 그를 죽였다. 그 동생이 똑같이 쓰자 최저가 그까지 죽였다. 작은 동생이 똑같이 쓰자 최저는 그를 놓아주었다. 역사가로서의 의무에 충실한 유명한 사례이다. 남송의 충신인 문천상도 자신의 충심을 표현한 시인 정기가(正氣歌)에서 '제나라 태사의 죽간'이라 하여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소설 열국지에서는 이 부분을 좀더 각색했다. 최저가 작은 동생까지 죽이려 하자 작은 동생은 "여기서 저를 죽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죽더라도 누군가는 이를 역사에 남길 것입니다. 당신이 사실을 감춘다고 해서 그게 가려지지는 않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저는 탄식하며 "나 또한 사직을 위해 부득이하게 한 일이니, 정직하게 기록하더라도 훗날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작은 동생을 살려줬다.

[1] 비슷한 사례로 연나라의 연후문공(燕後文公)이 있다.[2] 훗날 북송거란과 맺은 치욕적인 외교인 전연의 맹이 그 땅에서 열렸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4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4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