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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몰년도 | ? ~ 기원전 177년 |
이름 | 심이기(審食其) |
작위 | 벽양후(辟陽侯) |
초한쟁패기때 유방의 부하.
2. 행적
2.1. 초한전쟁
유방과 동향인 패현 출신. 유방이 패공을 자칭하자 유방의 형인 유중과 함께 유태공을 모시는 일을 했다.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나 유방이 팽성전투에서 항우에게 크게 패하자 혼란한 와중에 여후와 유태공 등의 유방 친족들을 수행하다가 항우의 포로가 됐다. 처음에 유태공을 모신 일 등을 봤을 때 유씨 가문의 집사 노릇을 한 모양.
이후에는 항우의 진영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광무 대치 이후 한나라와 초나라가 화의를 하면서 여후, 유태공 등과 함께 한나라로 돌아왔다.
2.2. 전한
그 후 한나라가 통일하고 벽양후(辟陽侯)라는 작위를 받아서 나름 출세를 하게 된다.이 때까지의 행적만 놓고 보면 충직하게 집사 노릇을 한 셈이지만 그 이후의 행적을 놓고 보면 철저히 여후를 위시한 여씨 일족의 수족 노릇을 하게 돼서 스스로의 인생을 꼬게 된다.[1]
고제 8년(기원전 199년)에 조왕 장오의 신하들인 관고 등이 유방을 살해하려다가 들키고 만것. 양아치 시절 근성이 남아 있던(...) 유방이 백등산 포위전에서 깨지고 온 길이라 심기가 좋을리는 없었지만 사위인 장오를 막대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문제는 이 때의 일로 관고, 장오뿐만 아니라 장오가 일전에 유방에게 바쳤던 조(趙)씨 역시 투옥된 것. 이 때 조씨는 유방의 아이를 품고 있었고 동생인 조겸(趙兼)을 시켜 심이기에게 석방을 청탁했다. 심이기는 여후와 오랜 세월을 보낸만큼 여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청탁에도 소극적인 자세만을 취했고 여후 역시 질투에 석방을 들어주지 않았다. 고제 역시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도 무시한 것은 덤. 이 일로 조씨는 아이를 낳고 얼마 있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이 아이가 바로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이다.[2]
실상 심이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한계가 있었겠지만 이 일은 심이기의 명줄을 크게 짧아지게 한다.
이후 기원전 195년에 유방은 숨을 거두게 되는데 문제는 여후가 고제의 죽음을 숨기는데 심이기가 일조한 것. 다행히 역상이 시기적절하게 강력한 공신들의 반란 위험을 경고하여 고제의 죽음을 여후가 선포하여 잘 넘어갔지만 심이기는 권력에 영합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을 개시한다.
혜제기 7년에는 여후와의 친분이 오히려 덜미를 잡혀 혜제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나[3] 우선은 친분이 있던 주건(朱建) 덕에 한 번은 목숨을 건지고 문제 때의 여씨 대숙청 때도 육가와 앞서 언급된 주건의 변호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4]
그리고 심이기는 전객(典客)[5]의 자리에 오르고 뒤이어 승상이 된다. 시기는 여태후본기와 한서에서 기록이 다른데 여태후본기에선 혜제 사후이고, 한서에선 혜제 7년 (기원전 188년)이다. 심이기와 여후는 낭중령(郞中令)[6]도 겸임하여 신하를 감시하고 모든 결재를 좌지우지 하는 등의 월권 행위를 벌인다. 조고의 수법의 모방으로 보인다. 여후 측의 대표적인 수족이었던 만큼 여씨 멸족을 앞두고 제일 먼저 탄핵당해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육가와 주건의 보호로 용케 목숨은 건지고 복직했다.
하지만 업보는 돌아오는 법이라고, 문제 3년(기원전 177년) 앞서 말한 조씨의 아들인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이 궁궐로 입조했다. 유장은 당연히 자기 어머니의 원수인 심이기를 매우 싫어했고 죽이려고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전해오는 기록이나 유장이 일찍 부모를 여읜 것을 보면 정서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하고 난폭한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7]
유장은 심이기를 찾아가서 만나기를 청했고 심이기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당당히 그를 만나러 갔다. 유장은 둔기로 심이기를 때린 후 종자 위경(魏敬)을 시켜서 목을 베고 살가죽을 벗기게 했다. 이 소식이 한문제에게 들어가자, 한문제는 근데 심이기면 대표적인 여후 끄나풀 아니냐? 어떤놈이 그자식을 살려줬지?이라며 유장이 아니라 주건에게 체포령을 내렸고, 멸족당할까봐 겁을 집어먹은 주건은[8] 가족이라도 선처해달라며 그자리에서 자결했다.
시호는 유(幽)였고 작위는 아들 심평이 이었다.
3. 총평
초반에는 나름 충직하게 집사 노릇을 한 개국공신이지만 특별한 능력이 없고 여후의 총애 하나로 출세한 문고리다보니 여후가 저지른 악행의 얼굴마담으로 화살을 받았고, 본인 처신도 자중과는 거리가 멀어서 공신들 입장에서는 절대 좋게 볼 인물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유장에게 죽었을 때를 보면 유장의 잔인함도 돋보이지만 인과응보라는 말이 떠오르게 한다.[1] 여후는 잔인해 보이지만 은혜에는 확실히 보은하는 측면도 있었던 만큼 심이기에 대한 신뢰가 컸던 걸로 보인다.[2] 유방은 유장을 여후에게 맡겨서 기르게 했다. 그래서 여후는 키운 정이 있어서인지 유장에게는 동정적이었다.[3] 심이기는 여후와 간통설이 퍼져 있었고 여씨의 오른팔 역할을 했기에 혜제는 그를 매우 혐오했다.[4] 승상 자리에서는 잘렸다.[5] 이민족, 제후를 관리하던 자리. 나름 고대 중국의 고위직인 구경(九卿) 중 하나다.[6] 궁궐의 출입을 관리하는 자리. 즉 심이기는 조정 신하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끄나풀 역할을 한 것.[7] 유장은 성격적으로 문제가 많았는데 앞선 이유와 더불어 여후 역시 유장을 어릴 때 부터 기르다보니 키운 정이 있어 내버려두는 편이었다. 또한 혜제 역시 이복형제이자 어릴적부터 같이 큰 유장을 두둔하는 편이었고 문제 역시 유장의 가정 환경을 아는터라 그의 행동을 방관했다.[8] 고후기 시대의 조정 중신들에 대한 보복심이 다분히 엿보이는 조치였으므로 이랬던 것으로 보인다. 같이 심이기를 변호한 육가가 제외된 점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