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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3:50:29

공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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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동진 제11대 황제
공제 | 恭帝
출생 386년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즉위 396년 11월 7일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421년 11월 2일 (향년 35세)
유송 양주 단양군 말릉현 사저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충평릉(沖平陵)
재위기간 동진 제11대 황제
419년 1월 28일 ~ 420년 7월 10일
유송 영릉왕
420년 7월 10일 ~ 421년 1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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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하내 사마씨
덕문(德文)
부모 부황 열종 효무제
모후 안덕태후
형제자매 3남 2녀 중 차남
배우자 공사황후
자녀 2녀
종교 불교
덕문(德文)
작호 낭야왕(琅邪王)
→ 석양현공(石陽縣公)
→ 낭야왕(琅邪王)
→ 황제(皇帝) → 영릉왕(零陵王)
시호 공황제(恭皇帝)
연호 원희(元熙, 419년 ~ 420년)
}}}}}}}}}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사마진의 마지막 황제2.3. 참척과 폐위2.4. 사후
3. 평가4. 기타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진나라(晉)의 제15대 황제이자, 동진(東晉)의 마지막 황제.

동진이 멸망하고 결국 유유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였다.

2. 생애

2.1. 초기

태원 11년(386년)에 태어났으며, 안제 사마덕종의 친동생이었다. 낭야왕(琅邪王)에 책봉되었다가 위장군, 개부의동삼사, 사도가 되었다. 태재(太宰)로 승진했다가 환현이 황제가 되자 석양현공(石陽縣公)이 되어 사마덕종과 함께 심양에서 살았다. 사마덕종이 복위하자 다시 낭야왕에 책봉되었고 서주 자사, 대사마, 사도가 되었다. 낭야왕 시절 중증 장애의 형 사마덕종의 수발을 정성스럽게 해서 인망을 얻었다.

2.2. 사마진의 마지막 황제

의희 14년(418년) 12월, 사마덕종이 죽자,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형인 사마덕종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의 지적 장애를 앓고 있어 그냥 제위를 받았다간 찬탈이 확 티가 나니[1] 임시로 세운 허수아비 황제였다.

사마덕문은 불교를 깊이 믿어서 6척 높이의 금불상을 제작하여 친히 와관사까지 10여 리를 걸으면서 금불상을 맞이했다. 사람됨이 공손하고 신중했는데 원희 2년(420년) 6월, 중서령 부량이 송공 유유의 뜻에 따라 사마덕문이 유씨에게 양위한다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사마덕문은
'진씨(사마씨) 천하는 이미 환현 시기에 멸망했으나, 유공(유유)에 의하여 또 다시 20년이나 연장되었다. 이에 짐은 이 일을 달갑게 여긴다.'

라고 말하며 흔쾌히 붓을 들고 붉은 종이에 양위 조서를 썼다.

유유는 선양받은 다음 사마덕문을 영릉왕으로 봉했지만 안제 사마덕종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비장애인에다가 통치 능력도 괜찮은지라 살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했으므로 후환을 없애기 위해 낭야낭중령 장의에게 독술 한 단지를 주면서 사마덕문을 독살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장의는 황제를 독살하고 사는 것은 죽는 것만도 못하다면서 스스로 독술을 마시면서 자살한다.

2.3. 참척과 폐위

유유는 그 후 사마덕문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사람을 보내 죽였다. 사마덕문은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봐 두려워해서 항상 저씨(저영원)와 같이 있었다. 그들은 침상 앞에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었으며 그 비용은 모두 저씨가 부담했다. 그래서 유유는 손을 쓰지 못하다가 이듬해 9월, 저비의 오빠 저유지저담지 형제에게 영릉으로 가서 저씨를 만나게 했다.[2] 저씨는 별실에서 그들을 만났고 유유가 보낸 병사들은 그 틈을 타서 담장을 넘어가 사마덕문에게 독약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이에 사마덕문은 불교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내세에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으니 그냥 죽이라고 태연히 말했고 병사들은 그의 아버지 사마요와 같은 방법으로 그에게 이불을 덮어서 질식사시켰는데 그때의 나이가 36세였다. 11월에 충평릉에 안장되었으며 유유는 백관을 이끌고 장례 행렬을 바라봤다.

사마염조환, 유선, 손호를 살려 주고, 조비헌제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기반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고, 선양하는 군주들이 암군 또는 폭군이었거나 이미 허수아비 상태였기에 폐위된 이후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유는 그만한 기반을 갖지 못했고, 사마덕문이 허수아비도 아니었던데가 능력 및 인격면에서도 좋았기에 인망을 모으기 매우 쉬웠다.

때문에 유유는 두 황제를 죽이는 오명을 쓰더라도 자신의 후계를 지키기 위해 사마덕문과 사마씨를 몰살시키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 왕조들이 선양으로 바뀔 때마다 살육이 벌어지는 끔찍한 레이스의 시작이 되었고, 이는 북송 대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된다. 자치통감의 주석을 단 원나라의 호삼성은 유유의 증손자인 유송의 순제 유준의 말로를 보고 '이후부터 선양을 한 전임 황제가 생명을 건진 사례는 거의 없었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2.4. 사후

공제 사마덕문의 장녀 해염공주는 무제 유유의 뒤를 이은 소제 유의부의 부인이 되었다가 남편이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남편이 막장이라서 금방 폐위되는 바람에 황후 생활을 오래하지 못했고 과부가 되었다가 문제 유의륭 원가 16년(439년)에 죽었다. 차녀 부양공주에 대해서는 해염공주의 친동생이라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출처

3. 평가

"공제는 잠깐 천명을 받았으나 다른 사람이 다스렸다. 주나라난왕을 세웠다가 비로소 회왕을 세운 것과 같았다. 공허한 존호를 빌렸고 방법은 달랐어도 멸망한 것은 똑같았다."
(恭乃寓命 他人是綱. 猶存周赧 始立懷王. 虛尊假號 異術同亡.)

- 『진서(晉書)』

4. 기타

5.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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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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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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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겉으로는 선양이라는 쇼는 해야하는데 똥오줌도 못가리는 천치를 데려다가 쇼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선양을 할 배우가 필요했던 것이다.[2] 저유지 형제는 황실의 외척이었으나 오히려 유유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